註: 아래 내용은 고전번역원의 한국고전종합DB에 실린 송재소(宋載卲) 교수의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해제 가운데서 다산이 살았던 시대 배경과 생애, 그의 사상의 개요를 살펴봅니다.
● 시대배경과 다산의 생애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다산은 실학(實學)을 집대성한 조선 후기의 위대한 학자였다. 그는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답게 정치, 경제, 역사, 지리, 문학, 철학, 의학, 교육학, 군사학, 자연과학 등 거의 모든 학문분야에 걸쳐 방대한 양의 저술을 남겼다. 500여 권에 달하는 이 저술들은 깊고도 넓은 학문세계로 인하여 오늘날까지 살아 있는 우리의 고전이 되고 있다. 다산의 저작들이 이토록 오늘날 우리의 관심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그의 사고가 당시의 현실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당시의 현실은 어떠했는가?
그가 살았던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는 조선조 봉건사회의 해체기로서 봉건적 병폐가 누적되어 그 말기적 현상들이 도처에 드러나고 있던 시기였다. 특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후의 사회는 전란(戰亂)으로 국토가 황폐화되어 농업생산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또한 국가에서는 고갈된 재정을 메우기 위하여 백성들로부터 과도한 세금을 징수해야만 했고 이 과정에서 관리들은 온갖 협잡을 자행하며 백성들을 괴롭혔다. 이른바 삼정(三政)의 문란과 이를 둘러싼 지방관들의 부정부패가 바로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집권층 내부의 권력투쟁이 격화되어 그 권력투쟁을 통한 자체 분열의 결과 살아남은 소수의 특권층이 국가의 요직을 독점하게 된다. 이들을 벌열(閥閱)이라 부르는데 이들은 자기네들의 특권을 이용하여 광대한 토지를 사유화하게 되고, 이에 따라 대부분의 백성들은 무전농민(無田農民)으로 전락하고 만다.
학문의 경향도 권위주의화되고 경직된 주자학(朱子學) 일변도로 흘러 비생산적인 공리공론(空理空論)의 경향을 띠게 되었다. 주자학 자체가 원래 강한 보수성과 체제유지적 성향을 지니고 있는데다, 이 시기에 이르면 주자학이 절대적인 권위를 구축하고 있어서 주자학 이외의 학문은 용납하지를 않았다. 뿐만 아니라 주자학은 집권층의 자기방어를 위한 정치적 도구로 이용되어 주자의 이름으로 정적(政敵)을 탄압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학문과 언론의 자유가 박탈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라가 처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하여 진지하게 노력한 일군의 양심적인 학자들이 있었으니 이들이 바로 실학자(實學者)들이다. 그리고 다산은 이들 중에서도 대표적인 학자였다.
다산의 생애는 대체로 수학기(修學期:1789년 28세까지), 사환기(仕宦期:1800년 39세까지), 유배기(流配期:1818년 57세까지), 해배 이후(解配以後:1836년 75세까지)의 네 시기로 나눌 수 있다.
(1) 수학기(修學期)
다산은 1762년(영조38) 경기도 광주(廣州)에서 부친 정재원(丁載遠)과 모친 해남 윤씨(海南尹氏) 사이의 4남 2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압해 정씨(押海丁氏)로 여러 고을의 수령을 지낸 명관(名官)이며 학자였고, 모친은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후손으로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의 손녀였다.
다산은 자질이 영특하여 7세 때 오언시(五言詩)를 짓기 시작했다고 한다. 16세에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유고를 보고 평생 성호 선생을 사숙(私淑)하게 되었다.
22세(정조7) 때 증광 감시(增廣監試)에서 생원(生員)으로 합격하였는데 이것이 정조(正祖)와 다산의 운명적인 첫 만남이었다. 이후 5, 6년 동안 성균관에서 학업을 닦는 한편 성균관에서 유생들에게 보이는 시험인 반제(泮製)에 여러 번 뽑혀서 정조 임금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28세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첫 벼슬인 희릉 직장(禧陵直長)에 제수되었다.
(2) 사환기(仕宦期)
이후 다산은 정조의 총애 속에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 등의 벼슬을 역임했다. 31세 때에는 수원성(水原城) 수축에 〈기중도설(起重圖說)〉을 지어 바쳐 활차(滑車)를 이용함으로써 많은 경비를 절약케 했다. 33세에는 암행어사의 명을 받고 경기도 연천(漣川) 지방을 순찰한 후, 연천의 전 현감 김양직(金養直)과 삭녕(朔寧)의 전 군수 강명길(康命吉)을 논죄하여 법에 따라 처벌하게 했다. 이 암행어사 길에서 그가 목격한 피폐한 농민들의 참상은 그의 일생을 지배한 민중지향적 사고의 출발점이 된다.
34세에 병조 참의(兵曹參議), 우부승지(右副承旨)가 되었으나, 주문모(周文謨) 사건에 둘째 형 약전(若銓)이 연루된 것을 트집잡아 반대파들의 공격이 심해지자, 정조는 다산을 금정도 찰방(金井道察訪)으로 좌천시켰다. 그러나 5개월만에 다시 내직(內職)으로 불러들였다.
36세에 좌부승지(左副承旨)에 제수되었으나 노론(老論) 벽파(辟派)들의 모함이 심해져서 이른바 ‘자명소(自明疏)’를 올리고 관직을 사퇴하려 했다. 이 상소문에서 그는 자신과 천주교와의 관계를 분명하게 밝혀 놓았다. 정조도 하는 수 없이 그를 황해도 곡산 도호부사(谷山都護府使)로 내보냈다. 곡산 부사로 재직한 2년여 동안 그는 명관(名官)으로 선정을 베풀었으며, 이때 겪은 일선 지방관으로서의 경험이 후일 그가 《목민심서》를 집필하는 데에 커다란 자본이 되었다.
38세에 다시 내직으로 발령받아 병조 참지(兵曹參知)와 형조 참의(刑曹參議)에 제수되었는데, 형조 참의로 재직한 동안의 경험을 토대로 후일 《흠흠신서(欽欽新書)》를 집필하였다. 그 동안 천주교와 관련하여 그를 무고하는 상소가 잇따르자 39세 되는 해 봄에는 모든 관직을 버리고 처자와 함께 고향인 소내[苕川]로 낙향했다. 신변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사태가 심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해(1800년) 6월 28일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함께 다산의 운명도 결정되었다.
(3) 유배기(流配期)
1801년(40세) 신유옥사(辛酉獄事)로 수많은 남인(南人) 시파(時派)들이 투옥되고 참형을 당했는데, 이때 다산의 셋째 형 약종(若鍾)은 옥사하고 둘째 형 약전(若銓)은 신지도(薪知島)로, 다산은 경상도 장기(長鬐)로 유배되었다. 같은 해 10월 이른바 ‘황사영(黃詞永) 백서(帛書) 사건’으로 다시 체포되어 약전은 흑산도로, 그는 전라도 강진(康津)으로 이배(移配)되었다. 처음에는 강진읍 주막집과 보은산방 등에서 거처하다가 1808년(47세) 다산(茶山)의 초당으로 거처를 옮겨 1818년 해배될 때까지 살았다.
그는 강진에서 18년 동안 실로 정력적인 저술작업에 몰두했다. 사실상 다산의 주요한 저술들은 이 시기에 집필되었거나 구상된 것이다. 말하자면 다산은 어쩔 수 없는 유배지를 창조적 공간으로 활용한 셈이다. 특히 이 시기에, 경세학(經世學)과 더불어 다산사상의 두 축을 이루고 있는 경학(經學)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가 이루어졌다. 그는 강진에서 이른바 18제자들을 길렀으며, 혜장(惠藏), 초의(草衣)와 같은 고승(高僧)들과도 귀중한 인연을 맺었다.
(4) 해배(解配) 이후
1818년(순조 18) 57세의 나이에 유배에서 풀려 고향으로 돌아간 후에도 다산은 저술을 계속했다. 미완이었던 《목민심서》를 완성했고 《흠흠신서》, 《아언각비(雅言覺非)》, 《매씨서평(梅氏書平)》 등의 저작을 내놓았다. 고향으로 돌아온 지 18년 만인 1836년 75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 다산사상의 개요
다산의 사상을 한마디로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실학자로서의 다산의 면모는 실학시대 이전의 주류 사상이었던 주자학(朱子學) 또는 성리학(性理學)으로부터 벗어나려 했다는 점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성리학은 주로 철학적 제 문제를 관심의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지만, 우리나라 중세기의 성리학은 단순히 철학적 영역에 국한되지 않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을 지배하는 하나의 중세적 이데올로기로 군림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성리학에 도전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성리학의 최대 과제는 천리(天理) 또는 도(道)를 체득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천리는 무형의 추상물로서, 모든 현상을 있게 했고 또 현상을 지배하는 최고의 원리이다. 말하자면 인간의 지각활동 너머에 있는 선험적(先驗的)인 어떤 섭리와도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성리학적 관점에서는 인간의 모든 도덕질서나 사회제도 등을,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보지 않고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는 천리의 구현으로 파악한다. 그렇기 때문에 또한 사회제도를 포함한 이 세계의 모든 것을 인간의 힘으로 바꾸려 해서는 안 되며 바꿀 수도 없다는 것이 성리학의 세계관이다.
다산은 이와 같은 성리학에 대하여 비판적인 입장에 섰다. 그는 무형의 추상물인 천리 또는 이(理)를 세계의 최고 지배원리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은 이(理)의 구현이라 생각되는 모든 사회질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논리로 연장된다. 여기에는 임금과 신하, 남편과 아내, 지주와 전호(佃戶) 등의 종적(從的) 신분관계도 바뀔 수 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으며, 불합리한 사회제도가 개혁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다산사상의 중심에는 개혁사상이 자리하고 있다. 다산사상의 핵심은 개혁사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당시의 우리나라를 ‘털끝 하나라도 병들지 않은 것이 없는’ 사회로 진단하고, 우리나라가 앓고 있는 병의 원인이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치료해야 하는가를 심각히 고민했다. 이러한 고민의 궤적이 방대한 저술로 응축된 것이다. 이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제도의 개혁이다. 각종 제도의 개혁을 통해서만 우리나라가 앓고 있는 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와 같은 다산의 개혁안을 담은 대표적인 저술이 《경세유표》와 《목민심서》이다. 《경세유표》는 당시의 법질서를 초월한 국가기구 전반에 걸친 개혁의 청사진이고, 《목민심서》는 당시의 법질서 안에서의 지방행정에 대한 개혁안이다.
● 《다산시문집》에 대하여
다산이 환갑 때 쓴 〈자찬 묘지명(自撰墓誌銘)〉에 의하면, 그의 저서는 경집(經集) 232권, 문집(文集) 126권, 잡찬(雜纂) 141권, 총 499권인데, 그의 후손이 기록한 〈열수전서 총목록(洌水全書總目錄)〉에는 경집 250권, 문집 126권, 잡찬 166권 등 총 542권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환갑 이후의 저술들이 추가된 결과일 것이다. -이하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