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나해 1월29일 [(녹) 연중 제4주간 월요일]
[수도회] 무덤에서 나와 주님의 자비와 해방을 선포함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사무 15,13-14.30 16,5-13ㄱ
† 복음 마르 5,1-20
◈ 오늘의 묵상
게라사인들의 지방에 있던 더러운 영은 죽은 이들의 무덤에서 삽니다.
죽음의 세계에 갇혀 그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자학하며 한 사람을 괴롭힙니다. 이 더러운 영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놀랍게도 “하느님의 이름”까지 팔아가며 자신을 괴롭히지 말아 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군대’라는 이름처럼 수많은 악령들이 한 인간의
영혼을 파괴하려고 몸부림치고 있었습니다. 이 더러운 영은 부정한
짐승으로 여기던 돼지 떼 속으로 들어가서 몰살을 하고 맙니다.
아마 이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사건의 자초지종을 들었을 때 그들은 한 인간이 더러운
영으로부터 해방되어 깨끗해진 것보다는, 자신들의 마을에 혼란을
일으키고, 돼지 떼를 몰살시킨 예수님을 곁에 두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믿음을 통해 치유를 받고 새사람이 되는 길보다는 지금의
나와 적당히 타협하고, 세속적 평화를 지키고 싶어 하는 나약한 인간
본성을 들여다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치유받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나서려고 할 때, 그를 집과
가족들에게 돌려보내시어 하느님의 능력과 자비를 직접 선포하도록
명하신 것입니다. 가까운 가족에게조차 가장 치욕적인 존재로 소외당한
한 인간의 극적인 치유와 회심이, 설득하고 변화시키기 가장 힘든
가족들에게 일어나는 것이 복음의 힘임을 예수님께서는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가족의 비극은 다윗 가문의 피비린내 나는 저주에서도 봅니다. 자신의
죄는 용서받았지만, 그 벌로 자식들에게 쫓기며 죽임을 당할 처지인
다윗의 모습에서, 내 잘못으로 보속해야 하는 벌이 작지 않음을
깨닫습니다. 어쩌면 더러운 영이 나와 가장 가까이 있고,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이라면, 가장 먼저 치유되도록 청하는 것이 중요할
듯싶습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주님의 기준에 맞춰서
2018년 나해 1월29일 연중 제4주간 월요일
제1독서
"압살롬에게서 달아납시다. 주님께서 명령하신 것이니 저주하게 내버려
두시오."
○ 사무엘기 하권의 말씀입니다. 15,13-14.30 16,5-13ㄱ
복음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1-20
수학 올림피아드에서 금메달을 딴 사람은 수학자로 대성할 가능성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당연히 수학 문제를 잘 푸니까 위대한 수학자로
대성할 가능성이 많을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그러나 어느 유명한
수학자는 수학 올림피아드에서 금메달을 딴 사람은 수학자로 대성할
가능성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수학적인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것이 우수하지, 단순히 수학 문제를 풀기만으로는 수학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문제 풀이보다는 문제 제기가 더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이는 우리의
삶 안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즉, 어떤 결과보다는 과정이 더
중요합니다. 하지만 사회는 결과만을 최고로 인정하려고 하니 자기
자신도 모르게 결과 중심주의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분명히
중요한 것은 과정인데 말이지요.
주님께서는 어떤 결과가 나올지를 다 알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어떻게
할지를 그리고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외면할지를 또 당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지를 모두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뻔한 결과라고
하면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최선을 다해 하느님 뜻에 맞게 살려고 노력하셨습니다. 결과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결과를 중요하시 여긴다고 해도 뻔한 결과라고 하면서
포기하려고 한다 해도, 우리는 그 과정이 중요함을 기억하면서 지금
이 순간을 최선을 다해 하느님 뜻에 맞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주님과 마주하게 됩니다. 마귀들의 군대
전체가 한 사람의 몸을 차고 있기 때문에 그 누구도 통제할 수 없었지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비참한 인간을 건강하게 하실 수 있었고 실제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분명히 주님께 감사와 기쁨의 표현을 해야 할
순간입니다. 그런데 그 고장 사람들은 결과만을 생각합니다. 즉,
마귀들이 돼지들 속으로 들어가면서 이천 마리쯤 되는 돼지들이 모두
호수에 빠져 죽는 물질적인 피해를 보면서 저희 고장에서 떠나 주십사고
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마귀들이 돼지들 속에 들어가게 해 달라고 예수님께 청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어차피 주님으로부터 쫓겨나겠지만 어떻게든 주님과
사람들이 갈라지도록 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바로 물질적인 피해라는
결과를 통해 사람들은 주님으로부터 멀어집니다.
무엇이 더 중요한 지를 늘 묵상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단순히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기준을 따져서 결과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기준에 맞춰서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가위바위보는 이기기만 하는 패가 없습니다. 그리고 지기만 하는 패도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네 인생입니다(조정민).
어제 잠시 들린 인천교구 상3동성당.
사는 것이 힘이 들 때가 있습니다(최천호)
어쩜 나 혼자 이런 시련을 당하고 있는지 라는 생각이 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잠시 뒤를 돌아본다면 우리는 참 많은 시련을 잘
이겨내어 왔답니다.
지금 당장 얼굴이 굳어진 채로 지낸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진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당장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당신의 시련이 달라지거나
변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그런 상태일수록 웃으며 차근차근 하나씩
그 매듭을 풀어보세요. 언제 그 많은 매듭이 풀려지라고 생각을 한다면
더 답답할 것입니다.
생각을 너무 앞질러 하지 마세요. 다만, 앉은 채로 하나씩 풀어 보는
겁니다. 언젠가는 신기하게도 그 매듭이 다 풀어져 있을 겁니다.
당신은 잘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기에 우리는 모두 잘 할 수 있습니다.
꽃이 피리라고 예상못했는데... 다육이에 꽃이 피었습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무덤에서 나와 주님의 자비와 해방을 선포함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8년 나해 1월29일 연중 제4주간 월요일 마르 5,1-20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 5,8)
무덤에서 나와 주님의 자비와 해방을 선포함
한 이방인이 더러운 영에 들려 무덤에서 죽음에 기대어 산 송장처럼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만나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뀝니다. 이 놀라운 변화는 전적으로 하느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의
권능에 따른 것입니다.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을 무덤에서 나와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게 해주십니다. 무덤은 빛이 차단되고 가족들은 물론
이웃과 사회와 단절된 곳이지요. 그는 단절과 소외와 어둠의 세계에서
시체처럼 살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어 그를
무덤, 곧 비참의 동굴에서 꺼내주신 것입니다.
더러운 영에 들린 그 이방인은 어느 누구도 더 이상 그를 쇠사슬로
묶어둘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었지요. 예수님의
개입으로 그토록 강하게 저항하던 그가 "옷을 입고 제정신으로"(5,15)
앉아 있게 됩니다. 하느님의 힘이 악의 세력을 압도하여 비정상의
정상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들어왔던 더러운 영이 나가자 나갔던
정신이 제자리로 돌아온 것이지요!
더러운 영에 들린 그 사람은 "밤낮으로 무덤과 산에서 소리를 지르며
제 몸을 찧곤 했습니다."(5,5) 그는 그렇게 자아가 분열되고 왜곡되어
소중한 자신을 자학하며 지냈던 분열에 빠진 것입니다. 이는
식민통치자 로마군대의 세력에 짓눌려 불의하고 비정상적인 상황을
초래한 유다인들의 처지를 가리킨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더러운 영에
들린 그는 예수님께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5,7) 하며 "괴롭히지 말아 달라"(5,8)고 합니다.
그렇게 예수님과 관계맺기를 거부하던 그는 더러운 영이 나가자
예수님께 "같이 있게 해 주십사고 청합니다."(5,18) 예수님의 개입으로
관계가 단절되어 폐쇄적이고 살던 그가 문을 활짝 열고 관계맺기에
나선 것입니다. 스스로를 학대하고 소외시켰던 그가 이제는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사람으로 변화된 것이지요.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자아를 회복해주시고 비정상적인 사회관계를
정상화 하도록 이끌어주십니다.
그런데 더러운 영에 들렸다가 해방된 그는 바로 그 이방인 지역으로
가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해 주신 모든 일을 선포합니다. 자비를
체험한 그가 자비를 선포한 것입니다. 해방의 기쁨을 맛본 그가 천상의
기쁨을 선포한 것이지요.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그를 변화시키시어
복음을 선포하는 하느님의 도구로 삼으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우리의 자아를 회복시켜주시고 인간다운 삶을 살도록
이끄시며, 자유와 해방의 선물을 주시는 주님께 감사드려야겠습니다.
나아가 예수님처럼 우리 삶의 이방지역을 찾아가 주님의 사랑과 해방을
선포해야겠습니다. 자비를 지니고 다른 이의 거칠고 닫힌 마음, 상처와
분노와 증오로 가득찬 마음 속으로 찾아들어가야겠습니다.
오늘도 어둡고 폐쇄적이며 부조리한 무덤에서 나와 사랑의 집, 정의의
집, 생명의 집으로 돌아가야겠습니다. 나아가 거짓과 탐욕, 불의와
불평등의 악에 과감히 맞서 인간다운 삶을 실현함으로써 하늘나라를
선포해야겠습니다. 모든 것을 새롭게 변화시키시어 생명과 자유와
희망을 주시는 주님의 도구로 사는 오늘이길 기도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마르 5, 19)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1월29일 연중 제4주간 월요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마르 5, 19)
주님께서는 가장 소중한 자비를 우리에게 언제나 베푸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다가오는 그 어떤 것도
막지 않으시며 다 맞아들이십니다.
맞아들임은 대화의 기장 큰 본질이 됩니다.
치유와 정화는 대화에서 시작됩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과 예수님께서는 기꺼이 대화를 나누십니다.
더러운 영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을 이야기합니다.
구원은 예수님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더러운 영은 점점 죽음쪽으로 기울어집니다.
더러운 영을 추방한 후 제정신이 된 그를
가족들에게 돌려 보내십니다.
그 어떤 사람도 저버리지 않으시는 자비의 주님이십니다.
자비를 먹고 사는 우리들 삶입니다.
자비없이는 영적으로 건강한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더러운 영은 결국 끝이 있지만 자비는 영원합니다.
자비의 원천이신 예수님을 선택하는
예수님의 날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끝없는 자비로 다시 일어서는 자비의 날 되십시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서울] 연중 제4주간 월요일
2018년 나해 1월29일 연중 제4주간 월요일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마르 5,1-20
오늘은 독신서약 미사가 있는 날입니다. 사제서품을 받기 전에 서품
대상자들은 교구장님 앞에서 ‘독신서약, 신앙고백, 순명서약’을 하게
됩니다. 독신서약은 온전한 몸과 마음으로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겠다는
다짐입니다. 신앙고백은 자신의 가르침이 아니라 교회의 가르침을
전하겠다는 약속입니다. 순명서약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먼저 따르겠다는 다짐입니다. 서품자들이 오늘 약속한 것을 마음에
새기고, 삶을 통해서 실천하기를 기도합니다.
아르헨티나에서 오신 주교님과 성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주교님께서는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신학생은 교리와
신학을 배우기 전에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어린아이가 말하는 법을 배우지 않고 말을 하는 것은, 걷는
법을 배우지 않고 걷는 것은 부모님의 사랑을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지 못한다면 머리로 배운 것을 삶으로 실천하기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신학생들이 규칙과 공부에 얽매인다면 영적인 자유가 없어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이 영적으로 충만해진다면 규칙과 공부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왜 사제가 되려고 했는지를
깨닫는다면 공부도 즐거워질 것이고, 기도가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서품자들이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면 좋겠습니다. 왜 사제가 되려고
하는지를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자유와 충만함으로
신자들에게 다가가면 좋겠습니다.
신자들은 능력 있고, 재능 있는 사제들을 좋아하지만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제들을 존경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꽃에는 향기가 있듯이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제들에게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전해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신자들은 사제의 강론, 사제의 말, 사제의 행동을
통해서 느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몸은 언젠가 늙고, 병들어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과 정신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이 나를 믿으면 살아서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고 죽어서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더러운 영에 사로잡혀 있으면 예수님과
함께 있어도 죽은 것과 같습니다. 마치 무덤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더러운 영을 내보내고 성령이 함께 하면 주님과 함께 있지
않아도 살아 있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반란을 일으킨 아들 압살롬을 대하는 다윗’의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가족들을 잘 다스리지 못하는 다윗을 무능한
왕이라고 비난을 합니다. 사랑하는 아들의 군대에 쫓겨서 도망을
가야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런 중에 다윗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저주하게 내버려 두시오. 행여
주님께서 나의 불행을 보시고, 오늘 내리시는 저주를 선으로 갚아
주실지 누가 알겠소?’ 다윗은 이제 원망도, 미움도, 슬픔도, 고통도 모두
주 하느님께 맡겨드리고 있습니다. 다윗은 더러운 영들을 내 보냈고
성령과 함께 했기 때문에 겸손할 수 있었고, 자신에게 주어지는 고난을
원망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윗이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드리는 것 보다 더 큰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그것은 ‘원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미워하고,
원망해서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갈등과 고민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사랑을 말씀하셨습니다. 또 하나 우리를 영적으로
성숙하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욕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귀에 걸린 사람은 치유를 받았습니다. 고마운 마음에 건강을
회복한 사람은 예수님 곁에서 시중을 들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치유의 대가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이제 건강을
회복하였으니, 가족들에게 돌아가서 예전처럼 지내라고 하셨습니다.
‘사랑과 비움’은 우리를 건강하게 해 주는 선물입니다.
신앙생활을 하고, 봉사활동을 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
삶의 한 부분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 안에 있는 더러운 영들을 몰아내는
것입니다. 며칠 지나면 방 안에 먼지가 쌓이듯이 우리가 성령과 함께
하지 않으면 우리 마음에도 더러운 영들이 들어옵니다. ‘시기, 질투,
분노, 미움, 교만, 게으름, 욕망’과 같은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에
사로잡히면 우리의 몸은 살아 있어도 무덤과 같은 것입니다.
월요일 아침입니다. 성령이 충만한 하루가 되시기 바랍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예수님을 만나면 인생이 바뀝니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8년 나해 1월28일 연중 제4주간 월요일(마르5,1-20)
예수님을 만나면 인생이 바뀝니다.
그 날의 기분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습니다. 마음에
둔 사람을 만나면 기쁨이 크고, 보기 싫은 사람을 만나면 가슴이
아픕니다. 좋은 스승을 만나 훌륭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못된 사람을
만나서 잘못된 길을 걷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면 운명이
바뀔 수도 합니다. 만남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인생이
변합니다. 그분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시기 때문입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예수님께 마주 나왔습니다. 그것은 큰
은총입니다.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무덤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무덤이란 곧 죽음을 의미하는데 사랑이
없는 미움과 시기, 질투, 분노, 적개심, 무관심 등으로 지옥같이 사는
상태를 말합니다.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이 족쇄와 쇠사슬에 묶여
있었다는 것은 무질서와 혼란 상태에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소리를
지르며 돌로 제 몸을 치곤하였다는 것은 분노와 자학으로 괴로워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그 어둠에서 나왔으니 복이 있습니다. 그는
결국 제정신으로 돌아왔습니다(마르5,15). 제정신으로 돌아왔다는 것은
새 삶을 시작하였다는 것을 의미 합니다. 그는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그분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
(로마12,2)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 새 삶을 시작하게 되었고
예수님 곁에 같이 있고 싶어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기 고향에서 떠나주기를 바랬습니다. 심지어 벼랑까지
끌고 가 떨어뜨리려고 하였습니다(루카4,28). 더러운 영이 들렸던
사람도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저를 괴롭히지
말아주십시오”(마르5,6).하고 외쳤습니다. 여기서 악령의 속성을 볼
수 있습니다. 악령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정확히 알고
인정하였지만, 그분과 소통하고 친교를 나누는 일은 거부합니다. 이렇게
악의 세력은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잘 알면서도 그릇된 삶에 고집스레
집착하고 거기에서 벗어나기를 극도로 싫어합니다(손희송). 그런데
제정신이 들자 예수님께 “같이 있게 해 주십시오”(마르5,18) 하고
청하였습니다. 이 청은 제정신이 들기 전과는 전혀 다른 청원입니다.
“이제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것이 나타난 것”(2코린 5,17)입니다.
예수님께 “같이 있게 해 주십시오” 하는 청은 곧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제정신이 들어 청원한 기도이니 만큼 우리도 기도를 할
때 제 정신으로 해야 합니다. 그래야 무턱대고 청하지 않고 효과적인
기도, 꼭 이루어지는 기도를 할 수 있으며 주님의 뜻에 의합한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는 기도가 아니라 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때로는 기도가 들어지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적 유익을 위해서 거절하신 것으로 믿고 주님께 대한 신뢰를
잃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더러운 영이 들렸던 사람이 주님을 만나 새 생활을 시작하였듯이
우리도 주님을 만나 ‘새로 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지상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고,
천상 것에 마음을 두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누군가 나를
만나서 기쁨을 간직할 수 있는 날이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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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世上)에서 중요(重要)한 3가지‘금(金)’이 있는데 돈을
상징(象徵)하는 “황금(黃金)”과 음식(飮食)을 상징하는 “소금”
그리고 시간(時間)을 상징하는 “지금(只今)”이다“
어느 남편(男便)이 이 말을 듣고선 너무 의미(意味)가 있다고 생각해서
부인(婦人)에게 문자로 물어 보았습니다. “여보, 세상을 살아가는데
중요한 3가지‘금(金)’이 있는데 뭐라고 생각해?” 잠시 후 부인에게서
답장(答狀) 문자가 왔습니다. “현금, 지금, 입금.” 이 문자를 보고 남편이
입을 쩍 벌리며 다시 문자를 보냈습니다. “방금, 쬐금, 입금.”@@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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