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좌 앞에 사는 행복 (계 7:9-17)
이 시간에 “보좌 앞에 사는 행복”이라는 제목입니다. 일찍이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시84:10-11에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주님의 보좌 앞의 삶이 얼마나 행복하고 값있는 일인지 잘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항상 여호와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만 살아야 합니다. 영적 주소가 보좌 앞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보좌 앞에 흰 옷 입은 셀 수 없이 많은 무리가 나옵니다. 이들은 누구일까요? 이들은 구원 받은 우리 성도들입니다. 구원 받은 우리 성도들의 영적 모습을 이렇게 묘사해 놓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사는 자가 얼마나 아름다운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돌린 영광과 내용을 살펴보면 그들에게는 구원과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이 있고 보호와 만족과 인도와 위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4:16)”고 말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 지상 성도도 보좌 앞에 나아가 그 은혜를 받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보좌 앞에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세상에 미련 두지 말고 나와야 합니다.
9절에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이들은 언어도 다르고 인종도 다르고 말도 다른 수많은 나라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능히 셀 수 없이 많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온 사람들을 그 누가 다 셀 수 있을까요?
그 질문보다 무엇이 그들을 나오게 만들었을까요? 보이지 않게는 성령의 역사이지만 외적으로는 환난입니다. 14절에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그랬습니다. 대 환난에 대한 여러 설이 있지만 좁은 의미에서만 말하면 구원의 목적을 위하여 회개토록 하시는 고난의 은총입니다. 다윗이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한 말씀과 같습니다.
히브리서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히12:11-13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성경에 하나님의 구속사와 관련이 있는 일에는 항상 크다는 표현이 붙습니다. 아기 예수가 난 작은 고을 베들레헴도 그래서 큰 고을입니다. 유대 예루살렘 골고다 언덕에서 한 분 예수가 처형 당한 사건이 그래서 우주적 사건인 것입니다. 환난을 당한다고 다 예수 앞에 나오나요? 성도가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과 성령의 인도 속에 연단을 받을 때 그것이 좁은 의미에서 대 환난입니다. 하나님 떠나 살아보니 정말 인생의 의미도 재미도 없고 고통스럽고 방황하고 그것이 대 환난입니다. 세상에 미련 두지 말고 하나님 앞에 나아오라는 말씀입니다.
어느 사람이 사업이 잘 되어 큰돈을 벌었습니다. 큰 저택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부도가 났습니다. 모든 것은 다 차압당하고 갈 곳이 없어서 월세를 얻어 들어갔습니다. 그러기 전에는 세상일에만 분주했는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생전 처음 해보는 금식기도를 보았습니다. 금식기도 중에 하나님이 말씀을 주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
그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내려와 말했습니다. "저택 같은 큰 집을 잃어버렸는데 하나님께서 더 큰 집을 주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재산을 다시 찾았구나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고 이제는 회개하여 하나님의 집 교회당에서 살고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환난이 우리를 만듭니다. 참 신앙인으로 만듭니다. 그러므로 환난 당한다고 낙심하지 마시고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보좌 앞에서 행복을 누립니다.
2. 보혈의 씻음을 받아야 합니다.
14절 하반 절에 뭐라 하셨습니까?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하나님 앞에서 살라고 하지만 가장 장애물이 무엇입니까? 우리 마음의 죄책입니다. 바로 살려고 노력하지만 왜 그렇게 양심 괴로운 일이 많은지, 일상생활에서는 별로 모르고 지내지만 하나님 앞에만 나오려고 하면 바로 살지 않은 것 같고 충성도 못한 것 같고 양심이 괴롭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율법만 알고 있지 복음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율법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무엇이 옳은 건지 압니다. 그러나 율법의 중심인 사랑을 알아야지 선악만 알면 우리 양심은 정녕 죽습니다. 왜 그럴까요? 양심에 가책될 일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입니다. 특별한 범죄가 있어서만이 아니라 인간 본질 자체만 생각해도 하나님 앞에 설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선악을 알게 하는 율법을 알면 알수록, 그 눈이 열리면 열릴수록 내 양심에 고통이요, 남에게 적용하면 남에게도 고통입니다. 특히 말씀대로 살려는 사람들이 겪는 양심의 고통은 큽니다. 그래서 잘 믿는다는 사람들이 더 얼굴이 어둘 때가 많습니다. 얼굴 모습이 불신자보다 더 못할 때가 많아요. 율법은 알고 복음은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 율법적인 사람은 자신도 재미가 없고 남들도 재미 없습니다. 맨 날 잘못만 지적하고 문제 삼으니까요. 그 말이 틀리지 않을지라도 덮어주고 이해해 주는 사랑이라고는 조금도 없습니다. 이것이 율법적 인간입니다. 율법의 중심은 사랑인데 사랑은 모르고 선악만 아니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선악의 눈이 열리면 열릴수록 스스로 심판자 하나님이 되어 선악 간에 내 심령도 죽이고 남도 죽입니다. 만약 그 상태로 보좌 앞에 나간다면 찌르고 태우는 화염검으로 그 양심이 견뎌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세요. 9절에 흰 옷 입은 이 사람들은 서서 있어요. 하나님 앞에 서 있어요. 종려가지 들고 서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담대히 서게 하는 것은 바로 보혈의 공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골고다 언덕에서 나를 위해 흘리신 그 공로를 믿고 안심하는 것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나의 죄보다 예수님의 피가 더 진리입니다.
우리는 의롭지 않는 자를 의롭다 하신 그 하나님을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시는 그 진리를 믿어야 합니다. 이신칭의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지극히 기초적인 진리입니다. 그러나 이 기초를 적용해서 화평을 누리는 사람이 적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롬5:1-2에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예수 피 공로 믿고 이러한 화평과 즐거운 마음으로 담대히 하나님 보좌 앞에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15절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하나님 앞이 어디일까요?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목전에서 범죄했습니다. 범죄도 그럴찐데 하나님 앞이 아닌 곳이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그 곳이 하나님 앞이고, 우리가 예배하는 곳이 하나님 앞이고,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 앞입니다. 평안한 양심으로 날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섬기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다윗이 어떻게 위대해질 수 있었나요? 날마다 기도하고 찬송하니까 능력이 임했습니다. 권세가 임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며 경외하는 곳에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면 성령이 임하셔서 자동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집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그 성령의 흐름 따라 살면 승리와 만사능통입니다.
게리 토마스는 '뿌리 깊은 영성은 흔들리지 않는다.' 라는 책에서 말하기를 "우리의 뿌리가 하나님 아버지와의 친밀한 동행에 깊이 박혀 있지 않다면 모든 노력은 힘의 낭비에 지나지 않는다. 신앙의 뿌리를 은혜의 보좌 깊은 곳에 내릴 때 세상의 온갖 바람과 유혹을 이겨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사막의 '메스퀴트' 라는 식물은 사막의 모래 밑 30미터까지 그 뿌리를 내려 수분을 흡수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루 종일 작열하는 태양아래 물 한 모금 발견하기 어려운 사막에서도 생존합니다. 메스퀴트처럼 신앙의 뿌리를 은혜의 보좌 깊은 곳에 내릴 때 세상의 온갖 바람과 유혹을 이겨 나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오실 날이 가까울수록, 주님 앞에 갈 날이 다가올수록 더욱 더욱 힘써야 할 것이 경건의 시간입니다. 예배가 무너지면 다 무너집니다. 기도시간이 무너지면 다 무너집니다. 그래서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지니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했습니다. 이 말씀의 배경으로 볼 때 미래 천국만이 아니라 아울러 지상 성도들이 받을 신령한 복도 말씀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예수 안에서 아버지 보좌 앞까지 올려 주셨습니다. 우리의 주소는 아버지 품 안이요, 예수 그리스도 안이요, 천국이요,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입니다. 우리 모두 환난 고통 주는 세상미련 다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공로 믿고 평안하고 담대한 마음으로 날마다 하나님을 섬겨서 우리의 삶이 보좌 앞에 사는 천국의 삶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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