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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3. 묵상글 ( 연중 32주간 목요일. - 무엇이 우리 가운데에?.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아직 / 06:48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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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3. 연중 32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05:35 이전에 작은형제회 홈페이지에 게시가 안되면
새벽미사 참례후, 그 시간 동안 게시되면 06:40분쯤 게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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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13. 05:41
- 무엇이 우리 가운데에?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오늘 주님께서는 동문서답하고 계십니다.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에 너희 가운데 있다고 답하시니 말입니다.
때를 묻는데 장소를 답으로 말씀하시는 것 아닐까요?
그런데 그런 것 같지만 그런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시간과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인격적인 문제라고 답하신 겁니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은 3차원의 세계라고 흔히 말합니다.
시간과 공간이 있는 세계이고 한계가 있는 세계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께서 계신 곳이고,
하느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계시지요.
영원히 계시고 아니 계신 곳이 없이 어디든지 계시지요.
이 말을 뒤집으면 시작과 끝이 없고 어디에 국한되어 계시지 않습니다.
이 말은 또 하느님 안에 있으면 우리도 시간과 공간에 갇히지 않고 초월하지만
하느님 안에 있지 않으면 시간과 공간의 한계 안에 머물게 된다는 뜻이 됩니다.
문제는 유한한 우리 곧 한계가 있는 우리가 어떻게
한계를 초월하신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느냐 그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늘로 오를 수 있느냐 그것인데
바오로 사도는 이에 대해서 이렇게 간단히 얘기합니다.
우리가 올라갈 수도 없지만 올라갈 필요도 없다고.
그리스도께서 하늘나라를 가지고 내려오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잖습니까?
당신의 오심으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복음을 믿어 회개하면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고 하느님 나라는 우리 가운데 있게 됩니다.
그러니 하느님 나라가 미래 언제 오겠냐고 물을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으니 우리 가운데서 찾으라는 것이고,
찾을 것이 아니라 발견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언제 어디로 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오시고 이미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그러니 찾아다닐 필요가 없고 발견하면 되는 것이고
내 안에서 발견하고 우리 가운데서 발견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쉬운 길을 놔두고 어려운 길을 찾는 어리석음이 우리 가운데 있지 않은지,
우리 가운데 하느님께서 계셔야 하는데 어리석음이 있지 않은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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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3. 연중 32주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의 벗
“지혜를 사랑하라, 주님을 찬미하라”
“당신 말씀 밝히시면,
미련한 이들이 깨치나이다.
당신 얼굴 이 종에게 빛나게 하시고,
당신 법령을 가르쳐 주소서.”(시편119;130,135)
오늘 화답송 시편 119장에서 두 구절입니다. <주님의 법>이라는 주제로 무려 176절까지 게속되는 시편중 가장 긴 장이나 내용은 참 풍부합니다. 옛 현자 다산의 지혜로운 말씀에 이어 어제 레오 교황의 말씀도 지혜로웠고 시의적절했습니다.
“초연함이란 욕망에 무뎌지는 것이 아니라 욕심에 휘둘리지 않도록 마음의 중심을 세우는 것이다.”<다산>
“도전으로 가득찬 시대, 그리스도를 그 중심에 모셔라. 수도원들은 어둠의 시대에 평화를 가져다 주었다. 주님의 섬김의 학교가 되라. 예수님을 모두에게 가져다 주라.”<레오14세 교황>
“형제애 없이, 우리는 살 수 없다. 형제애는 불가능한 꿈이 아니다. 모두가 형제자매들이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사랑하라.”<레오14세 교황>
지혜를 최우선으로 선택하십시오. 지혜를 열렬히 항구히 사랑하십시오. 주님을 사랑하듯, 연인을 사랑하듯 그렇게 지혜를 사랑하십시오. 지혜에 대한 청정욕의 사랑은 무죄이며 언제나 좋습니다. 그리고 지혜를 훈련하여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지혜의 찬가>라 해도 좋겠습니다.
“지혜는 혼자이면서도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자신안에 머무르면서도 모든 것을 새롭게 하며, 대대로 거룩한 영혼들 안에 들어가, 그들을 하느님의 벗과 예언자로 만든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지혜와 함께 사는 사람만 사랑하신다.”
하느님의 벗이, 지혜의 사람이 되고 싶지 않습니까? 인간 마음의 고질적 병이자 인간 재앙과 불행의 원천인 무지에 대한 답도 지혜뿐입니다. 탐욕, 성냄, 어리석음, 허무등 모두가 무지에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오늘 지혜의 찬가 내용이 참 풍부하여 공부하는 마음으로 전부 인용합니다.
“지혜 안에 있는 정신은 명석하고 거룩하며, 유일하고 다양하고 섬세하며, 민첩하고 명료하고 청정하며, 분명하고 손상될 수 없으며, 선을 사랑하고 예리하며, 자유롭고 자비롭고 인자하며, 항구하고 확고하고 평온하며, 전능하고 모든 것을 살핀다. 또 명석하고 깨끗하며 아주 섬세한 정신들을 모두 통찰한다.”
지혜는 무엇인가?
역시 계속 이어지는 풍부한 내용이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자 하는 청정욕을 북돋웁니다.
“지혜는 어떠한 움직임보다 재빠르고 그 순수함으로 모든 것을 통달하고 통찰한다. 지혜는 하느님 권능의 숨결이고, 전능하신 분의 영광의 순전한 발산이다. 지혜는 오점도 그 안으로 기어들지 못한다. 지혜는 영원한 빛의 광채이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활동의 티없는 거울이며, 하느님 선하심의 모상이다. 지혜는 해보다 아름답고 어떠한 별자리보다 빼어나며 빛과 견주어 보아도 그보다 더 밝음을 알 수 있다. 밤은 빛을 밀어내지만 악은 지혜를 이겨내지 못한다.”
이런 지혜는 그대로 하느님의 현존입니다. 무지의 병, 무지의 악, 무지의 죄에 대한 궁극의 치유와 예방도 지혜뿐임을 깨닫습니다. 지혜대신 말씀을, 사랑을 넣어도 그대로 통합니다. 진선미, 신망애 모두가 지혜에 속함을 봅니다. 이런 지혜의 화신이, 하느님의 지혜가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하느님의 지혜이신 주님과의 우정이 깊어질수록 하느님의 벗이 되어 살 수 있으니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바로 이런 지혜가 오늘 복음에 답을 줍니다. 주님의 말씀은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도 좋은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보라, 여기에 있다.’또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바로 내 삶의 자리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느님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언젠가 써놨던 글이 새롭게 떠오릅니다.
“자리를
찾지 않는다.
자리를
탓하지 않는다.
그 어디든
뿌리내리면
거기가 고향이고
꽃자리이고 하느님의 나라이다”
오늘이 내일입니다. 오늘 잘 살면 내일은 내일대로 잘 됩니다. 하느님의 지혜이신 주님과 일치가 깊어질수록 하느님의 벗이 되어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느님의 나라를 살게 되니 결코 부화뇌동도 경거망동도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보라, 저기에 계시다.’ 또는 ‘보라, 여기에 계시다.’ 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나서지도 말고 따라가지도 마라.”
바로 오늘 지금 여기서 깨어 살아야 할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날로 삶의 중심인 주님께 깊이 뿌리 내릴 때, 날로 새로운 안정과 평화의 정주의 삶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의 벗이 되어 지혜로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나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니,
내 입에 늘 찬양이 있으리라.
내 영혼 주님을 자랑하리니,
가난한 이는 듣고 기뻐하여라.”(시편34,2-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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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3. 연중 32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의 앞부분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말씀이요, 뒷부분은 ‘재림’에 대한 말씀입니다. 전자가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라면, 후자는 “아직 아니” 온 하느님 나라입니다. 전자가 하느님 나라의 ‘내면적 도래’라면, 후자는 하느님 나라의 ‘외면적 현현’에 해당하며, 전자가 ‘구속사’라면, 후자는 ‘종말론’에 해당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루가 17,20)는 질문을 받으시고 대답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루카 17,20-21)
이는 당시의 유대인들이 지니고 있었던 “하느님 나라의 때와 장소와 성격”에 대한 대전환이요 혁명적인 선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느님 나라”를 지상적이고 정치적, 민족적인 메시아 왕국으로 이해하고 있었고, 그래서 ‘하느님 나라’가 세워질 때, 자신들을 압제하는 로마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리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물리적인 의미로서의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하느님의 주권과 통치가 실현되면 어디에서나 이루어지는 ‘하느님 다스림의 나라’를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당신의 오심과 함께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안에 ‘이미’ 임재 하는 나라로 선언하십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때’는 당신과 함께 이미 왔고, 하늘나라라는 “장소”는 공간적이거나 심리적인 내면이 아니라 “너희 가운데”라는 역사적이면서도 동시에 초월적인 하느님의 활동공간이며, 또한 그 나라는 민족적, 정치적이 아니라 당신의 활동과 통치와 주권이 미치는 곳이면 어디서나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 나라”는 이미 와 계신 당신과 함께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안에 ‘이미’, ‘지금 여기’, ‘우리들 가운데’, ‘와’ 있는 나라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재림”이 언제 어떻게 올 것인지, 그리고 그 전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번개가 치면 하늘 이쪽 끝에서 하늘 끝까지 비추는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날에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루카 17,24-25)
이는 “예수님의 재림”이 번개가 번쩍할 때처럼, 단박에 천지가 환해지듯이 동시에 즉각적으로 일어날 것이며, 동시에 범 우주적으로 일어날 것임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여기 있다. 저기 있다’라고 찾아 나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유토피아’(장소가 없는)가 아니라 분명한 장소, 곧 하느님의 백성인 하느님의 다스림이 이루어진 “우리들 안”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여기’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 곧 ‘하느님의 다스림 안’에 머무는 일이요, 지금 ‘우리 가운데’ ‘와 계신’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
주님!
저희를 비추시어,
저희들 안에 이루신 당신의 나라를 보게 하소서.
저희를 다스리시어,
‘지금 여기’에 와 있는 당신의 사랑을 살게 하소서.
저희를 변형하시어,
번개가 치면 단박에 천지가 환해지듯이
저희의 온 정신과 영혼, 삶과 방식이 바뀌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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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3. 연중 32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피정 중에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강의하신 신부님께서는 변화에는 세 가지 차원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물리적인 변화, 생물학적인 변화, 그리고 사회학적인 변화입니다. 먼저 물리적인 변화는 물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온도에 따라 물은 고체가 되기도 하고, 액체가 되기도 하며, 기체가 되기도 합니다. 본질은 같지만, 형태는 달라집니다. 생물학적인 변화는 애벌레를 통해 볼 수 있습니다. 땅 위를 기어다니던 애벌레는 어느 순간 고치를 짓고, 그 속에서 자신을 녹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늘을 나는 나비가 됩니다. 고통스러운 과정이지만, 그 안에서 새로운 존재로 태어납니다. 사회학적인 변화는 정보, 자원, 기술의 발전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정보가 독점되던 시대에서 이제는 나누고 공유하는 사회로 변화하였습니다. 자원이 소수에게 집중되던 시대에서 협력과 나눔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이제는 인공지능(AI)의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저도 그 변화를 실감합니다. 영어 강의가 실시간으로 통역되고, 화면 속 영어 자료가 즉시 한국어로 번역됩니다. 기술의 발전은 놀랍지만, 신앙 안에서의 변화는 그보다 더 깊고 본질적입니다.
60년 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Ecclesia est semper reformanda! (교회는 항상 쇄신되어야 한다)” 교회가 쇄신되어야 하듯, 신앙인인 우리도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 시작을 우리는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에서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야고보, 요한, 베드로를 데리고 타볼 산에 오르셨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의 얼굴과 옷이 빛으로 변했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대화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변화를 촉구하셨습니다. “너희는 잔치에 초대받으면 윗자리에 앉지 말고, 오히려 맨 아래 자리에 앉아라.” 하셨습니다. 그분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내가 한 것처럼 너희도 그렇게 하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그렇습니다. 변화의 핵심은 겸손과 희생입니다. 세상의 변화는 정보와 자원, 기술로 이루어지지만, 신앙인의 변화는 겸손과 희생으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그 길은 낮아짐의 길이요,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는 길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깊을수록 인간적인 교만은 사라지고, 겸손은 영혼의 빛으로 드러납니다.
토마 사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분의 상처를 직접 보고, 손으로 만져 보기 전에는 믿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고 했고, 니체는 시대의 신앙을 비판하며 “신은 죽었다.”라고 외쳤습니다. 하지만 하느님 나라는 누군가가 대신 알려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AI가 대신 가르쳐 줄 수도 없습니다. 신앙의 길은 내비게이션으로 안내받을 수 있는 여정이 아닙니다. 스스로 묻고, 그 질문의 깊이 속에서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이 진리를 깨닫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찾는 사람은 바로 그렇게 끊임없이 묻고, 대화하고,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지혜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밤은 빛을 밀어내지만, 악은 지혜를 이기지 못한다. 지혜는 세상 끝에서 끝까지 힘차게 퍼져 나가며 만물을 훌륭히 통솔한다.” 지혜는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우리가 참된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청원하고, 다짐하며, 대화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는 우리를 변화시키는 힘이며, 인간의 지혜를 하느님의 지혜로 이끌어 주는 통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저기에 있다.’ 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 나라는 과거의 일이 아닙니다. 또한 먼 미래에 올 일도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지금, 여기, 우리 가운데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서 그 완성을 향해 걸어가는 순례자들입니다. 세상은 변화를 두려워하지만, 신앙인은 변화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습니다. 세상은 편리함을 추구하지만, 신앙인은 겸손과 희생 속에서 참된 평화를 찾습니다. 그 길이 바로 예수님께서 걸으신 변모의 길, 십자가의 길, 그리고 부활의 길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변화는 ‘모양’의 변화가 아니라 ‘마음’의 변화입니다. AI의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진리는 이것입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하느님과 대화할 때, 우리는 이미 하느님 나라 안에 살고 있습니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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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3. 연중 32주간 목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성체성사의 진정한 성사성!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11월 12일 수요일- 마흔여섯 번째 주간 (호명환 번역): 성사적 현실
성체와 성혈은 창조 세계 전체를 그리스도의 현존으로 드러내는 성사적 표징입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매일 묵상은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에 뿌리를 두고 리처드 로어와 CAC 운영진, 그리고 객원 교수들의 묵상 글을 제공해 주어 우리의 영적 수양을 심화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동정(compassion)을 구현하도록 도와줍니다.
리처드 신부는 성체성사 안에서 성체와 성혈의 성사적 의미를 설명합니다.
예수께서 "이는 내 몸이다."라고 말씀하실 때, 그분은 단순히 눈앞의 빵만을 가리키신 것이 아니라, 온 우주와 모든 피조물, 곧 물질적이면서도 성령으로 충만한 모든 현실을 함께 말씀하신 것이라 믿습니다
성체성사를 단순히 기적이라고 보는 것은 그 본래 메시지가 아닙니다. 우리가 성체성사를 자주 거행하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이 메시지는 인간의 정신에 큰 충격을 주며, 우리의 교만과 개인주의에 도전하기 때문에 평생의 실천과 깊은 겸손 없이는 내면화되기 어렵습니다. 성체성사는 단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의 근본적 질서와 패턴을 드러내는 성사적 현실입니다.
성체성사의 빵과 포도주는 우주의 모든 요소를 상징하는 성사적 표징으로서, 성육신의 현존을 드러내고 전달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 메시지를 그토록 거부해 왔을까요? 진정으로 성체성사적인 교회라면 물질의 '그리스도화(Christification)'가 지닌 공동체적·우주적·육체적 성격을 가장 먼저 인식했어야 합니다. 가톨릭은 예수 그리스도의 실제 현존(Real Presence)을 이 땅의 물질적 요소 안에서 올바르게 고백하지만, 많은 이들이 그 고백의 함의를 충분히 깨닫지 못합니다. 빵과 포도주는 배타적 현존으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지만, 그 본래의 기능은 참으로 포괄적이며 언제나 충격적인 현존을 전달하는 데 있습니다.
참된 신자는 성체를 영할 때, 두려워 바라보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진리를 받아들입니다: 곧, 창조 세계 전체가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 본질과 고난 속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냅니다.
성체성사는 우리가 자신의 현존을 봉헌함으로써 그리스도의 현존을 인식하는 마음의 만남입니다. 성체성사 안에서 우리는 단순한 언어나 이성적 사고를 넘어, 더 이상 신비를 말로 설명하지 않고 실제로 ‘씹어 먹는’ 자리로 나아갑니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생각하라'거나 '이것을 바라보라', 혹은 '이것을 경배하'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이것을 먹어라!'라고 명하셨습니다.
우리의 인식은 몸과 세포, 참여적이며 궁극적으로 일치된 차원으로 옮겨져야 합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이 신비를 먹고 마셔야 하며, 어느 날 방어 없는 순간에 '오, 하느님! 나는 정말 내가 먹는 것이 되었구나! 나 또한 그리스도의 몸이구나!'라는 깨달음에 이르게 됩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존재의 첫 순간부터 참된 것이었음을 신뢰하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성체성사는 우리로 하여금 벌거벗은 존재 안에서도 존엄과 능력이 흐르고 있음을 깨닫게 하며, 다른 모든 이들 역시 그렇지만 대부분은 알지 못합니다. 이러한 몸의 자각은 우리의 신앙 생활 전체를 이끌고 힘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이 때문에 나는 빵과 포도주 안에 그리스도의 실제 현존(Real Presence)이 있다는 정통 신앙을 고수해야 합니다. 저에게 있어, 만일 우리가 가장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요소들 안에서의 실재를 희생한다면, 결국 우리 자신 안에서도 동일한 실재를 희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Story From Our Community
저는 거의 2년 동안 감사 일기를 쓰기 위해 종이 일기를 사용해 왔습니다. 그런데 최근 제 실천을 다시 돌아보며, 일기 문구를 “나는 감사하다”(I am grateful for)에서 “감사합니다”(Thank you for)로 바꾸었습니다. 오늘 일기를 마치면서, 저는 성체성사와의 연결을 깊이 느꼈습니다. 성체성사 기도(Eucharistic Prayer)는 하느님과 서로 간의 친교(Communion)에 대한 우리의 감사(Thanksgiving)를 드리는 것입니다. 저의 감사 기도는 그 공동체적 감사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Helen C.
References
Adapted from Richard Rohr, The Universal Christ: How a Forgotten Reality Can Change Everything We See, Hope For, and Believe (Convergent, 2019, 2021), 132, 134, 136, 137.
Graham Mansfield, untitled (detail), 2021,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빵과 포도주, 그리고 물이 성사 안에서 은총을 드러내듯, 자연 세계 또한 이미 주어진 풍요를 받아들이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심지어 고기가 잡히지 않는 고요한 하루조차 그 자체로 하나의 친교(Communion)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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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3. 연중 32주간 목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0-21)
그 나리를 차지하기 위하여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제지들이 여쭈자(사도 1,6 참조),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나라는 범죄자의 굴종이 아니라 은총의 진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해방된 자유인이 주님의 종이 되게 합시다(1코린 7,22 참조). 주님의 일을 함께할 때 우리는 그 나라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고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나라가 언제 오는지에 대해서는 말씀하려 하지 않으셨지요. 다만, 심판의 날이 올 것이라며 그날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 주셨습니다(마태 24,30-31 참조).
그날이 뒤로 미루어지리라는 약속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암브로시우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셋째 오솔길】
돌파하여 자기 하느님을 낳기
설교 24 우리는 또 다른 그리스도들이다
당신을 밴 태와 당신께 젖을 먹인 가슴은 복됩니다!(루카 11,27).
하느님 말씀을 듣기 위해서는 우리의 가장 깊은 자기에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와 아버지인 하느님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이 합일 속으로 가라앉을 필요가 있다. 이 들음의 과정에서 우리는 하느님이 실로 자신의 생명과 자신의 존재와 자신의 신성을 우리에게 주었다고 하는 놀랍고도 새로운 소식을 접하게 된다. 우리는 신성 - 우리 자신의 신성- 을 만나고, 하느님이 우리와 더불어 그것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직면한다. 그리하여 부자 관계, 곧 하느님을 “아빠’나 “아버지”로 부르는 관계가 순전히 이루어진다. 그것은 하느님 쪽에서 결코 놓지 않는 관계다.
아버지는 자신과 우리 사이에 사이(separation)가 없음을 잘 안다. 우리만이 우리와 하느님 사이, 우리와 우리의 신성 사이에 이분법이나 분리 혹은 사이를 설정할 따름이다. 하느님의 관점에서 보면 합일은 완전하고 영원히 지속된다. 엑카르트는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결론짓는다. 요한 복음 17장에서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내가 하나가 되었듯이"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그리스도와 하느님이 하나이듯이,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난 우리들도 하나다. 아버지와 우리와 존재하는 모든 것과 말씀은 같은 빛 속에서 하나다. 만유내재신론적인 우리 존재의 진리가 빛을 받는다.(503)
✝️ 목요일 성모님의 날✝️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와 목동 / 세 바르따스>
제 6장 오직 하느님만을
통고의 마리아
막이 열리다
미사를 끝낸 신부는 제의 서랍을 정돈하는 수녀에게 감사하면서,“수녀님, 저 유명한 통고의 마리아 수녀를 만날 수 있을까요?"
하고 물었다.
‘유명하다고요? "
하며 반문한 제의방 수녀는, 어처구니 없는 말로 사람을 놀라게 하시는 신부님이라고 말하고 싶은 듯한 표정으로 엷은 미소를 지었다.
“신부님은 형용사를 잘못 쓰셨습니다 ...... 아무 공로도 없는 ...... 아무 가치도 없는 자인데"하고 항의하고 싶었을 것이다.
“유명하고 말고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요? "
“다른 수녀들과 조금도 다름없는 수녀입니다. 지금의 저처럼 ..•••• 우린 모두 다 똑같습니다"
이 신부는 루치아 자신과 대화를 나누었다는 것을 전혀 모른 채 투이를 떠났다.
또 다른 때 포르투갈의 수녀와 둘이서 물건을 사려고 민호강 맞은편에 있는 발렌사까지 걸어간 적이 있었다. 두 사람은 기뻤다. 그녀들은 고국 포르투갈의 땅을 밟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경찰의 감시에도 세관 관리들에게도 들키지 않고 국제 다리를 건넜다.
두 사람은 포르투갈의 옛 성채 쪽을 향해 걷고 있었다. 검은 수도복, 어깨걸이, 주름잡힌 머리수건, 짧은 검은 망사 밑에 혈색 좋은 얼굴이 미소 띠고 있었다.(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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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3. 연중 32주간 목요일. 갑곳성지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이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올 것입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는 것이 아니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너희 가운데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큰 깨달음을 줍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늘나라를 저 먼 미래, 혹은 죽은 뒤에 가는 어떤 장소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미 지금, 여기, 우리 안에 하느님의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알려주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어떤 화려한 건물이나 눈에 보이는 권력의 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바로 주님께서 계신 곳, 그리고 그분을 따르는 이들의 마음 안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사랑과 자비, 용서와 평화가 실현되는 순간마다 드러납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던 마음을 내려놓고 용서할 때, 힘든 이웃을 도울 때, 작은 희생 속에서 기쁨을 나눌 때 우리는 이미 하늘나라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바로 그 나라의 중심이시고, 우리와 함께하시며 그 나라를 드러내십니다.
그러나 경고의 말도 있습니다. “보라,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며 외적인 징조에만 매달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나라는 보여주기식 종교생활이나 눈에 띄는 기적을 통해서가 아니라, 매일의 삶 속에서 주님과 함께 살아갈 때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지 말고, 이미 우리 가운데 오신 주님을 통해 하늘나라를 경험해야 합니다.
오늘 하루 우리 가정과 일터, 공동체 안에서 작은 사랑과 친절을 실천해 봅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이미 하늘나라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휴식은 필요합니다.
선한 마음일지라도….
‘신부님! 이제 봉사를 그만하고 싶습니다. 지쳤습니다.’
이런 말을 종종 듣습니다.
아무리 선한 마음으로 선한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휴식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마음 역시 지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잘 쉬는 것이 잘 걸을 수있는 방법입니다.
아무리 잘 걷는다 하더라도 쉬어야 할 때 쉬지 않으면
이내 발은 붓고 더 이상 걷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쉬어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쉬어가야 오래 갈 수 있습니다.
쉼이 필요하다 싶으면 쉬세요.
괜찮습니다.
그대의 쉼은 더 많은 선함의 길을 가고자 하는 쉼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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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1차 게시 이후 묵상글(강론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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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3. 연중 32주간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감사합니다. 덕분이에요. 좋았습니다. 사랑해요. 미안합니다. 제 탓입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존경합니다.” 등의 말은 어떤 말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정답은 ‘뻔한 말’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우리는 평소에 이런 말을 잘 하지 않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라는 생각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당연하고 뻔한 말을 듣고 싶어 하기에, “고맙다는 말도 안 해.”라면서 서운한 감정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뻔한 말이지만, 따뜻함과 진정성을 가지고 있기에 사람들은 듣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이 뻔한 말을 자주 하는 사람이 자기 가치를 밖으로 잘 드러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가치 때문에 사람들은 좋아하고 또 함께 하려고 합니다.
단단한 사람이 되는 것도 좋지만, 향기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 아닐까요? 뻔한 말의 반복에서 나의 아름다움이 드러납니다. 뻔한 말이지만 따뜻함과 진정성을 담아서 말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만큼 이 세상도 따뜻하고 진정성 넘치는 곳이 될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이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질문합니다. 즉, ‘시기’에 관해 묻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로마 제국을 무너뜨리고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가시적이고 정치적인 사건, 또는 극적인 종말론적 현상으로 기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는 그들의 기대대로 대답하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루카 17,20)
하느님의 나라는 그들의 생각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외적인 제도가 아니라, 하느님의 다스림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과 영혼 안에서 이루어지는 내적, 영적 실재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현존과 활동 안에서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사람, 그분 말씀에 맞춰서 생활하는 사람을 통해 하느님의 나라는 존재하게 됩니다.
이미 온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이 하느님의 나라 안에서는 어떠한 죄도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하느님의 나라에 살고 있는 우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느님 나라의 따뜻함과 진정성이 넘치는 모습을 우리가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뻔하다면서 그 모습을 외면하게 되면, 하느님의 나라에 사는 우리가 될 수 없습니다.
세상의 거짓 가르침에 현혹되지 말고(루카 17,23), 영광에 앞선 고난의 길(루카 17,25)을 묵묵히 받아들이며, 오늘 우리 가운데 이미 온 하느님 나라를 충실히 살아내는 깨어있는 기다림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신중하되 천천히 하라. 빨리 뛰는 것이야말로 넘어지는 것이다(셰익스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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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3. 연중 32주간 목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선)을 찾아라!"
오늘,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관심과 호기심, 두려움이 뒤섞인 마음으로 질문을 드립니다. 이는 우리 모두가 늘 궁금해하는 물음이기도 합니다.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겠습니까? 마지막 날은 언제입니까? 세상의 종말, 곧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실 '최후의 심판'은 언제입니까?"라는 질문이지요....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가 인간의 계산이나 관찰로는 알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종말의 시기를 인간이 미리 알 수 없음을 강조하시는 말씀입니다. "번개가 하늘 이쪽에서 저쪽까지 번쩍이듯"이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순간적이고 압도적인 빛과 영광 속에서 일어날 것이라는 말씀인데,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두 번째 오심은 구체적 상황이나 시점이 알려지지 않은 신비로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이는 단순히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이미 지금 우리의 마음 안에서 시작되는 영적인 현실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마지막 날의 위대한 사건은 보편적 현실로 드러나겠지만, 동시에 각 사람의 마음이라는 작은 세계 안에서도 이루어진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우리 내면 깊은 곳에서 하느님 나라를 찾아야 합니다. 천국은 우리 안에 있으며, 그곳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도록 부름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 하느님 나라는 언젠가 예측할 수 없이 '외적으로' 도래하겠지만, 이미 지금 우리 존재의 '내면 깊은 곳'에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마지막 날은 이미 각 사람 안에서 형성되고 있다는 말이지요.
이탈리아의 이론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Carlo Rovelli)는 자신의 저서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에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시간'이 절대적이지도 않고 보편적인 흐름도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니까 현대 물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시간은 상대적이고 우리 인간의 부정확한 인식이 만들어낸 환상에 가까운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 현재와 과거와 미래는 다 지금, 여기에 있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언젠가 있을 그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오늘 우리의 마음 안에 그 나라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즉 최후의 심판의 그 결정적인 날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비로운 심판자로 우리를 맞아주시기를 원한다면, 지금 그분을 우리의 친구이자 내적 손님으로 모셔야 한다는 말입니다.
언젠가도 말씀드렸지만, 우리가 하느님 나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 나라를 살아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우리 아버지 기도'(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소서!" 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 베르나르도는 대림 시기의 설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세 가지 오심에 대해 말했습니다. 첫 번째 오심은 그분께서 사람이 되신 '육화'의 사건이고, 마지막 오심은 '최후의 심판'에서 심판자로 다시 오실 때입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중간 오심'이 있는데, 이는 지금 각 사람의 마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의 재림입니다. 바로 이 내적 오심 안에서 첫 번째와 마지막 오심이 개인적이고 체험적으로 현재화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최후의 심판 날에 선포하실 말씀은 이미 지금 우리의 마음 안에서 메아리치고 있는 것입니다. 아직 오지 않은 그날의 현실은 이미 현재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최후의 심판은 하느님께서 염라대왕처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상과 벌을 주는 식의 재판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당신 사랑과 자비와 용서의 현실을 실현하시며 이 현실 속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초대하시는 것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언젠가도 말씀드렸듯이, 가장 빠른 시간은 지금이지 과거가 아닙니다. 지금(현재) '내'가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과거와 미래가 결정된다는 말입니다. 지금 하느님의 선과 사랑과 자비와 용서를 선택한다면 우리는 지금 그 선과 사랑과 자비와 용서를 실현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미래의 일이 아니라 지금의 일인 것이고, 또 그 선택이 새로운 현실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미래라고고도 하고 과거라고도 말할 뿐입니다.... 말장난 같지만 이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입니다.
요즘 저는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를 자주 걱정합니다. 그러니 직금의 선택이 자꾸 미뤄지는 것이지요. 그래서 마음을 바꾸어 먹으려고 노력합니다. 지금 '나'는 하느님 사랑 안에 있음을 의식하면서요....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다시 한번 강조하여 권고해 주십니다.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들을 먹여 주신다. 너희는 그것들보다 더 귀하지 않으냐?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선)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 6,26-27; 3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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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3. 연중 32주간 목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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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8&id=2116401&menu=4770
위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리스트에서 “서하”를 찿아 들어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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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3. 연중 32주간 목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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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ofmkorea.org/ofmhom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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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3. 연중 32주간 목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17,20-25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들로부터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을 받으십니다. 그들이 그런 질문을 한 것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하느님 나라’를 정치적이고 민족적인 메시아가 나타나 이 지상에 강력한 왕국을 세우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메시아의 왕국이 세워지면 로마의 압제와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 다윗 왕 시대에 누리던 영화와 번영을 다시 누리게 될 거라고 믿었던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그런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의미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뜻인 정의와 공정, 자비와 평화가 실현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런 상태는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에 오신 당신을 ‘하느님의 그리스도’로 믿는 이들의 마음 속에서 이미 시작되어 자라고 있다고 말씀하시지요.
하느님은 특정한 ‘어디’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세상 어디에나 계십니다. 주님은 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언제나 아버지와 함께 계셨고 그분의 뜻에 따라 세상에 오신 후에는 ‘임마누엘’ 하느님으로써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매일 들르는 시장에도 계시지만 돈에 눈이 멀면 주님을 못봅니다. 시끄러운 광장에도 계시지만 세상의 소음에만 귀를 기울이면 주님의 목소리를 못 듣습니다. 온갖 범죄나 사건사고의 현장에도 계시지만 고통과 슬픔에만 온통 시선을 빼앗기면 그 안에 숨은 하느님의 섭리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상기시키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아무리 큰 슬픔과 난관에 빠져도, 대체 어디로 가야할 지 몰라 막막하고 답답해도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알든 모르든 언제나 한결같이, 드러나지 않지만 묵묵히 우리를 위한 당신 뜻을 이루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을 만나야 합니다. 내가 사는 자리에서, 나와 함께 살아가는 ‘우리’라는 관계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나와 함께 있는 사람 안에서는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고 내가 좋아하는 상황, 조건, 사람 안에서만 하느님을 찾습니다. 그래서 그분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무지와 죄악의 어둠 속을 방황하게 되지요.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당신이 온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다시 오시는 그날에 불완전하고 부족하게 보이는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당신 뜻을 따르기 위해 많은 고난을 겪고 같은 세대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더라도 그 어려움과 고비를 잘 극복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고된 훈련을 이겨내야 승리의 영광을 얻고, 오랜 산통을 잘 극복해야 생명을 얻는 기쁨이 오듯, 고통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과정을 거쳐야 그분과 더 깊이 일치할 수 있고, 그 깊은 일치를 통해 하느님께서 나를 위해 준비하신 선한 뜻이 내 삶 속에서 온전히 실현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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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3. 연중 32주간 목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박윤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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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bs.catholic.or.kr/bbs/bbs_list.asp?menu=4770
위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리스트에서 “박윤식”님을 찿아 들어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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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3. 연중 32주간 목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김종업로마노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제1독서 (지혜7,22ㄴ-8,1)
"지혜는 어떠한 움직임보다 재빠르고, 그 순수함으로 모든 것을 통달하고 통찰한다. (24) 지혜는 하느님 권능의 숨결이고, 전능하신 분의 영광의 순전한 발산이어서, 어떠한 오점도 그 안으로 기어들지 못한다. (25) 지혜는 영원한 빛의 광채이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활동의 티없는 거울이며, 하느님 선하심의 모상이다. (26) 지혜는 혼자이면서도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자신 안에 머무르면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하며, 대대로 거룩한 영혼들 안으로 들어가, 그들을 하느님의 벗과 예언자로 만든다. (27)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지혜와 함께 사는 사람만 사랑하신다.(28) 밤은 빛을 밀어내지만, 악은 지혜를 이겨 내지 못한다." (30)
지혜서 7장 22ㄴ절 - 8장 1절까지는 '지혜의 본성'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묘사된다.
첫째, 저자는 지혜서 7장 22ㄴ절-23절에서 지혜의 21가지 속성(명석하고 거룩하며 유일하고 다양하고 섬세하며 등등)을 밝히고, 이어서 지혜를 세상의 영혼(지혜1,7참조)과 동일시하여 "지혜는 어떠한 움직임보다 재빠르고(민첩하고), 그 순수함으로 모든 것을 통달하고 통찰한다"라고 한다.
그 다음 지혜서 7장 25-26절에서 저자는 '숨결', '발산', '광채', '거울', '모상'과 같은 용어들을 사용하여 지혜가 하느님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표현한다.
그러고 나면 지혜서 7장 27-28절에서 "지혜는 대대로 거룩한 영혼들 안으로 들어가, 그들을 하느님의 벗과 예언자로 만든다" 라고 하면서 지혜가 사람들과 밀접한 연관을 맺는다는 사실을 묘사한다.
그리고 지혜서 7장 29-8장1절에서 저자는 지혜가 지닌 우주적 차원을 다시 언급하면서 지혜는 해와 별과 빛보다 빼어나며 "만물을 훌륭히 통솔한다." 라고 지적한다.
또한 지혜에는 도덕적 차원도 있다.
그래서 "악은 지혜를 이겨 내지 못한다." 라고 말한다.
이러한 묘사들은 지혜를 행복하고 성공적인 삶을 위해 실천적인 조언을 주는 것 이상으로 부각시키고, 지혜를 우주적, 역사적, 도덕적, 신학적 의미를 가진 인격체가 되게 한다.
지혜는 분명 이스라엘의 하느님 외에 다른 어떤 여신이 아니다. 저자는 유일신 사상을 믿는 유다인이다.
저자는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창조주이시고 만물의 주님이시며, 유일하게 참된 하느님이시라고 믿는다.
지혜는 정의나 자비처럼 기껏해야 하느님의 속성이다.
하지만 지혜에는 그 이상의 무엇이 있는 것 같다.
지혜가 여성의 특성을 갖는 것은 단순히 '지혜'를 뜻하는 히브리어 '호크마'(hokma)와 그리스어 '소피아'(sophia) 명사의 성이 여성이라는 사실에서 기인하는 것일 수도 있다.
물론 지혜는 여신 '이시스'(isis; 많은 학자들은 지혜서 7장 22-24절에서 이시스의 속성에 해당하는 것을 제시한다고 본다)나 다른 여성 신들을 가리키는 유다인들의 용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의인화된 지혜의 속성들을 예수님께 부여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콜로1,15-20; 요한1,1-18; 히브1,1-4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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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2주간 목요일 복음]
하느님의 나라가 하늘의 죽음으로 인간의 육(肉)을 뚫고 들어오신다.
복음(루카17,20-25)
20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서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을 받으시고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 인간들의 생각하고 말하는 하느님의 나라가 아니라는 말씀이다.
21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 너희 가운데(어몽- 사이에), 곧 바리사이들에게 둘러싸여 계신, 그들 사이에 계신 예수님 당신을 지칭하신 말씀이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시려, 그분의 말씀으로, 지혜로 오신 예수님이 하느님 나라다.
(히브1,1-3 참조)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통하여 말씀하시다 1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지만, 2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만물의 상속자로 삼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통하여 온 세상을 만들기까지 하셨습니다. 3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십니다. 그분께서 죄를 깨끗이 없애신 다음, 하늘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진리)에 앉으셨습니다.
독서(지혜7,25-28) 25 지혜(말씀, 예수)는 하느님 권능의 숨결이고 전능하신 분의 영광의 순전한 발산이어서 어떠한 오점도 그 안으로 기어들지 못한다. 26 지혜(예수)는 영원한 빛의 광채이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활동의 티 없는 거울이며 하느님 선하심의 모상이다. 27 지혜는 혼자이면서도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자신 안에 머무르면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하며 대대로 거룩한 영혼들 안으로 들어가 그들을 하느님의 벗과 예언자로 만든다. 28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지혜와 함께 사는 사람만 사랑하신다.
= 하느님의 말씀, 지혜이신 예수님을 구원의 진리로 깨달은 사람만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이들이 또한 하느님의 나라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중~‘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 하늘(샤마임- 하늘들)의 복수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지혜의 말씀인 그리스도의 복음을 구원의 진리로 깨달은 이들이 하늘인 것이고, 그 ‘하늘들 안에 계신 아버지’라는 말씀이신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의 나라가, 뜻이 땅(흙인 나)에서도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 하신 것이다.
22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날을 하루라도 보려고 갈망할 때가 오겠지만 보지 못할 것이다.
= 사람의 아들의 날, 곧 하느님의 나라를 너희들이 생각하고 말하는, 그 하느님의 나라를 갈망할 때는 하루도 보지 못할 것이라 하신 것이다.
23 사람들이 너희에게 ‘보라, 저기에 계시다.’, 또는 ‘보라, 여기에 계시다.’ 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나서지도 말고 따라가지도 마라.
= 너희들이 원하는 하느님의 나라를 찾지 말라, 다시 반복하여 강조하신 말씀이다.
24 번개가 치면 하늘 이쪽 끝에서 하늘 저쪽 끝까지 비추는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날에 그러할 것이다.
= 하느님의 나라를 완성하실 그리스도의 영, 성령은 번개처럼 일하신다.
다시~ 독서 (지혜7,27.-8,1) 27 지혜(예수의 영)는 혼자이면서도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자신 안에 머무르면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하며 대대로 거룩한 영혼들 안으로 들어가 그들을 하느님의 벗과 예언자로 만든다. 8,1 지혜는 세상 끝에서 끝까지 힘차게 퍼져 가며 만물을 훌륭히 통솔한다.
25 그러나 그(人子)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
= 사람의 아들(예수님)이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시기 위해서는 먼저 배척을 받아 육이 죽으시고(벗으시고) 영으로 살아 나셔야, 그 영이 사람(제자들) 안으로 들어오셔서 하느님 나라를 완성하신다는 말씀이시다.
(로마8,9) 9 그러나 하느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사시기만 하면, 여러분은 육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게 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있지 않으면, 그는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갈라5,4-5) 4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는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와 인연이 끊겼습니다. 여러분은 은총에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5 그러나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믿음으로 의로워지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루가2,34) 34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시기 위해서 세상 속에 갇힌 하느님의 백성, 자녀들을 먼저 구하셔야 한다. 그런데 그 하느님의 자녀(제자)들이 세상 것에 물들어 따르려 하지 않기에, 그 세상의 것을 치워 버리는, 빼앗아 버리는 그 고난으로 쓰러지게 하신 후, 하늘의 것으로 채우시고 입히셔서 다시 일으키는 일을 하실 것이기에 제자들의 배척(排斥)과 사람들의 반대를 받으실 것이라는 말씀이다.
(요한3,3) 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2테살1,5) 5 이는 하느님의 의로운 심판의 징표로, 여러분이 하느님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실 여러분은 하느님의 나라를 위하여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 또한 세상의 죄에 물든 그 하느님 백성, 자녀(제자)들의 죄를 예수님 당신의 정결한 피로 깨끗하게 씻어 거룩하고, 의롭게 하신 다음 데려가셔야 했기에, 십자가의 대속, 그 죽음, 고난을 먼저 받으셔야 함도 말씀하신 것이다.
(요한19,30) 30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신 포도주를 드신 다음에 말씀하셨다. “다 이루어졌다.” 이어서 고개를 숙이시며 숨을 거두셨다.
(로마14,17) 17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
= 성령의 이끄심, 보호하심으로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그 십자가가 거저 주는 의로움으로 하늘의 기쁨, 평화를 누리고 있다면, 그래서 하느님께 감사의 축제, 예배(미사)를 드리고 있다면 하느님 나라가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요한4,23) 23 그러나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사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이들을 찾으신다.
☨영원한 보호자 천주의 성령님!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흙인 우리, 나)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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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3. 연중 32주간 목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최원석님 공유
김건태 신부님_하느님 나라의 때와 곳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바리사이들이 던진 질문, 곧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 하는 질문을 받으시고,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하는 단호한 답을 주시는 장면으로 열립니다. 바리사이들은 분명히 ‘언제’라는 시간을 여쭈었음에도, 예수님은 ‘어떻게’라는 모습을 먼저 일러주시는 것으로 답하십니다. 여기까지는 선문답처럼 보입니다.
사실, 하느님 나라의 도래 문제는 유다교에서 중요한 문제였으며, 라삐들과 묵시 문학가들은 그때를 추정할 수 있는 표징들에 대하여 큰 관심을 보여왔습니다(다니 9,2 참조). 율법을 충실하게 준수하면 의인으로 판단되어 하느님 나라에 입성할 수 있다는 확신 속에 살아왔던 유다인들, 특히 바리사이들에게 이 나라는 ‘어떻게’라는 모습보다는 ‘언제’라는 시간으로 관심을 끌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 곧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 하는 말씀 속에는 ‘어떻게’와 함께 ‘언제’에 관한 답이 들어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더 정확하게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선포’로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와 있다고 단정하십니다. 그러나 마음이 닫혀 있고 귀가 막혀 있던 바리사이들은 이를 알아듣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받아들여, 제대로 듣고 보고 깨달아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적대 세력인 마귀를 쫓아내는 여러 행적과,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을 뜨겁게 하는 권위 있는 가르침을 거부하니 참 어려운 일입니다. 하느님의 나라, 곧 구원의 시간은 시작되었으나,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이 나라를, 이 시간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바리사이들과의 대화에 이어, 예수님은 이제 시선을 제자들에게 돌리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느님 나라를 여신 분이며, 그분은 이 나라의 완성을 위하여 마지막 때에 다시 오셔야 함을 알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의 날’이 오기 전에, 제자들을 번민 속에 몰아넣을 불행의 날들, 공포의 날들이 앞설 것임을 예고하십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사람의 아들의 재림’을 인내심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이러저러한 표징들을 찾으려 하고, 거짓 예언자들의 말씀 앞에 혼란을 겪기도 하겠지만, “나서지도 말고 따라가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문자 그대로의 종말의 시간에 앞서, 예수님은 당장 이 세대의 사람들, 나아가 당신을 따르던 사람들에 의해 조롱받고 천대받고 배척을 받으실 것이며, 제자들은 이를 목격할 것입니다. 물론 십자가상 죽음을 통해 사랑이 최후의 승리를 거둘 것이나, 증오와 분열을 완전하게 정복하기 위해서는 아직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 시간이 바로 교회의 시간이며, 박해의 시간입니다. 제자들을 포함한 모든 신앙인은 어떠한 환난 속에서도 믿음으로 극복해 나가야 하며, 마지막 때에 오실 ‘사람의 아들’을 맞이할 준비를 늘 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맞이할 준비 과정에서 고통을 오히려 큰 버팀목으로 받아들일 것을 이르십니다. 온갖 반대와 배척으로 하느님 나라를 세우신 주님의 가르침이며, 동시에 하느님 나라를 준비하면서 긴장의 끈을 놓지 않기를 바라시는 간절함이 읽히는 대목입니다.
오늘 하루, 하느님을 마음에 모시고 지내는 가운데, 지상에서 이미 하느님의 나라를 체험하고 맛보는, 보람 있는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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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1.”은 박 베드로 형제님이 보내주신 자료입니다.
## 공유하신 분께서 강론글이나 묵상글 수합과정에서 과년도의 자료를
사용하신 것도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 1. ================================================
♣복음말씀의 향기♣ No4407
11월13일 [연증 제32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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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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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서울대교구 박민호 요셉(우면동성당 부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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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긴장과 설렘, 성취와 기대, 기쁨과 두려움 사이에 살아가는 우리 교회!>
예수님께서 당신 사명 완수를 위한 최종 목적지인 예루살렘, 더 나아가서 골고타 언덕을 향해 올라가시는 중에, 바리사이들과 제자들을 향해 ‘짧은 묵시록’을 선포하십니다.
아직도 예수님의 신원에 대해 긴가민가 확실치 않았던 바리사이들, 언제나 예수님 정체에 대한 강한 의구심을 지니고 있었던 바리사이들이 묻습니다. ‘대체 하느님 나라는 언제 오는 것입니까?’ 이에 예수님께서는 의외의 말씀을 하십니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루카 17,21)
‘하느님 나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가장 큰 삶의 주제요 화두였습니다. 주변 강대국들로 인한 침략과 파괴, 훼손과 멸망으로 인해, 큰 고통과 깊은 슬픔의 세월을 보내면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젠가 도래할 하느님 나라에 대한 기대와 희망으로 겨우겨우 숨 쉬고 견뎌왔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구체화되고 실현될 것인가?’ 하는 물음은 이스라엘 모든 계층 사람들의 간절한 물음이었으며, 동시에 예수님 입장에서도 가장 중요한 가르침의 주제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당장이 아니라, 5년 뒤, 아니면 10년 뒤, 그도 아니라면 30년 뒤...과연 살아생전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을까?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뜻밖에도 이미 와있다고 하시니, 다들 깜짝 놀랐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공생활 출발점은 이미 하느님 나라 출현의 시발점이었습니다. 그분은 하느님 아버지의 이름으로 악령들을 쫓아내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도래했기에, 그간 활개를 치던 악령들이 힘을 잃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 존재 자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의 나라를 바라고 지녔던 희망의 성취였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오래전 약속된 구원의 때가 도래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지닌 사람들은 영광스럽게 변모하신 그분께서 당신 교회에 보내신 성령의 활동 안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이미 목격했던 것입니다.
다만 하느님의 나라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으로 인해 시작되었습니다. 그분으로 인해 구약 시대는 종료되었습니다. 그분을 통해 새로운 시대, 구원의 시대가 활짝 열렸습니다. 하지만 만물의 최종적인 회복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 교회는 긴장과 설렘 상태에서 살아갑니다. 성취와 기대 사이에서, 소유와 희망 사이에서, 기쁨과 두려움 사이에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희망 속에서 기뻐합니다.’
“희망 속에서 기뻐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하십시오. 궁핍한 성도들과 함께 나누고 손님 접대에 힘쓰십시오. 여러분을 박해하는 자들을 축복하십시오. 저주하지 말고 축복해 주십시오.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십시오.”(로마서 12장 12~15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바로잡아 주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경천동지할 뜻밖의 초자연적 현상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 한가운데 와 있으니, 이제 우리들 안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추구해야 하고 실현해야 합니다.
큰 죄인들이 대대적으로 주님께로 돌아서는 곳, 바로 하느님의 나라가 실현되는 곳입니다. 가난한 이웃들을 위한 사심없는 나눔과 봉사가 이루어지는 곳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끝도 없는 고통과 십자가 속에서도 기뻐하고 감사하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하느님의 나라 흔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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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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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나라를 위한 겨자씨 믿음 만드는 법>
찬미 예수님!
프랑스 파리의 부유한 은행가 아들로 태어난 '자크 페쉬(Jacques Fesch)'는 24살에 인생의 막장에 도달했습니다. 그는 방탕한 생활로 빚더미에 올랐고, 은행 강도를 시도하다 경찰관을 살해했습니다. 그는 1957년, 단두대 이슬로 사라질 사형수였습니다.
그가 갇힌 '상떼(Santé)' 감옥의 독방은 빛 한 점 없는 절망의 공간이었습니다. 죽음의 공포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신을 믿지 않았고, 세상과 자신을 저주했습니다.
그런데 수감 1년 후,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어느 날 밤, 칠흑 같은 독방 안에서 그는 갑작스러운 '강렬한 빛'을 체험합니다. 그는 자신의 옥중 일기에 그 순간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강렬한 외침이, 그 무엇도 막을 수 없는 외침이 내 가슴속에서 터져 나왔습니다. '살려주십시오!' 그 순간, 나는 믿었습니다. ... 그날 밤, 그분께서 내 감방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나는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예수님이셨습니다." 자크 페쉬, [빛이 내 눈을 뜨게 하다(Light over the Scaffold)]
더 놀라운 것은 그 이후의 변화입니다.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3년 동안, 그의 감방은 더 이상 지옥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좁은 감방 안에서 춤을 추었고, 찬미가를 불렀습니다. 그는 죽기 직전 딸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사랑하는 딸아, 내 마음은 넘치는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단다. 나는 이제 곧 그분을 만나러 간다. 그분은 나에게 '천국'을 미리 맛보게 해주셨다." 사형수 자크 페쉬의 감방은 가장 비참한 곳이었지만, 그가 자기 안의 예수님을 만난 순간, 그곳은 가장 거룩한 '성전'이 되었고 '하느님 나라'가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옵니까?" 그들은 하느님 나라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거나, 로마 제국을 물리치는 거대한 정치적 변혁으로 올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
여기서 '너희 가운데(entos hymon)'라는 말은 '너희들 사이(관계)'라는 뜻도 있지만, 더 깊게는 '너희 안(내면)'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흔히 행복의 파랑새를 찾아 밖으로 헤맵니다. 돈을 더 벌면, 좋은 집에 살면, 건강해지면 행복할 거라 믿습니다. 하지만 동화 속 틸틸과 미틸이 온 세상을 헤매다 결국 자기 집 새장에서 파랑새를 발견했듯, 하느님 나라는 이미 우리 안에 와 있습니다.
위대한 성 아우구스티누스도 이 진리를 뒤늦게 깨닫고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늦게야 님을 사랑했습니다! ... 님은 제 안에 계셨거늘, 저는 밖에서 님을 찾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장소'가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 내면에 이미 와 계신 '그분'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자크 페쉬처럼 가장 비참한 순간에도, 내 안에 계신 그분을 만난다면 그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이제 우리가 무엇을 해야겠습니까?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평생을 전쟁터에서 보냈습니다. 배신과 죽음의 공포가 가득한 외부 환경 속에서도 그는 평정을 유지했습니다. 그 비결을 그는 [명상록]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너는 언제든지 네 자신 속으로 물러날 수 있다. 인간에게 자신의 영혼보다 더 조용하고 평화로운 은신처는 없다. 나는 내 안에 흔들리지 않는 성을 쌓았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믿음만 있다면 우리는 이미 우리 안의 '성전'에 있습니다. 세례 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 집을 지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성전을 탐욕과 걱정, 미움이라는 먼지로 뒤덮어 놓고, 밖에서만 행복을 찾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무너져 가는 다미아노 성당을 돌 하나하나 다시 쌓아 올렸듯, 우리도 매일 우리 내면의 성전을 재건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크 페쉬처럼, 가장 절박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살려주십시오!" 이 외침은 단순한 비명이 아닙니다. "오직 당신만이 나의 생명이십니다"라는 최고의 신앙고백입니다.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옙스키도 비슷한 체험을 했습니다. 그는 반역죄로 사형 선고를 받고, 형장에 끌려가 기둥에 묶였습니다. 총살형 집행 5분 전이었습니다. 죽음의 공포 앞에서 그는 비로소 온 마음을 다해 기도했습니다.
"하느님, 만약 저에게 다시 한번 생명이 주어진다면, 그 삶의 매 순간을 기적처럼 여기며 살겠습니다!" 그 순간 황제의 특사로 감형되어 극적으로 살아난 그는, 이후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성경을 읽으며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 "살려달라"는 절박한 기도가 그에게 하느님 나라를 열어준 것입니다.
정말 나는 진실하고 절박하게 그분께 바라는 게 있습니까? 가장 힘들 때, 가장 외로울 때, 길게 기도하려 하지 마십시오. 자크 페쉬처럼, 도스토옙스키처럼, 단 한 마디의 화살기도를 쏘아 올리십시오. "살려주세요!" "도와주세요!"
이 짧고 진실한 겨자씨만 한 외침들이 하나씩 쌓일 때,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세상 그 어떤 풍파에도 무너지지 않는 견고한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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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의정부교구 김동희 모세 신부님]
오늘 복음은 루카 복음서의 종말론에 해당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에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나라가 오는 시간을 물었더니, 시간이 아닌 장소를 말씀하신 셈입니다. 시간을 말씀하시지 않은 까닭은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우리가 알아차릴 수 있는 방식으로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아무 때나 어디서나 누구나 볼 수 있는 그런 사건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예수님의 공생활을 관상하는 묵주 기도의 빛의 신비 3단은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심을 묵상합시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공생활 맨 처음부터 줄곧 하느님 나라에 관하여 가르치셨습니다. 그분 공생활의 첫 말씀은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였습니다. 특히 루카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는 나자렛 회당에서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는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를 읽으신 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4,21)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왔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를 당신의 인격과 활동에 일치시키셨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주도권은 하느님께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는 자기의 선함으로 얻어 내야 할 어떤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얻어 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열어 받아들이고 응답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는지, 어디인지를 묻기보다 그 나라를 반갑게 맞아들이면서 그 나라에서 환영받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마리아 사람 한 명만이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루카 17,15-16). 아버지의 모든 변화는 어느 날 새벽, 이러한 ‘감사’가 아버지의 마음에 찾아들며 시작되었습니다. “나 같은 사람하고 지금까지 살아 주어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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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7,20-25: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께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는지를 묻는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보아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21절)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 나라는 이미 예수님 안에서 현존하는 실재이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 가운데 있다.’는 말은 곧 예수님 자신 안에서,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이들 안에서 이미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성 치프리아노는 “그리스도를 모시는 이의 마음 안에 하느님 나라가 머무른다.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 나라는 우리 안에서 살아 움직인다.”(De Oratione Dominica 13)고 가르쳤다.
결국 하느님 나라는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하느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상태이며, 그것은 인간의 내적 변화 안에서 시작된다. 성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 즉, 하느님 나라는 외적인 모습보다, 성령의 내적 열매로 드러난다. 우리가 정의를 실천하고, 평화를 이루며, 성령 안에서 기뻐할 때 이미 하느님 나라는 우리 삶 가운데 현존한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는 ‘이미’와 있으나, 동시에 ‘아직’ 완성되지 않은 신비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서만 하느님 나라가 드러나리라고 말씀하신다.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버림을 받아야 한다.”(25절). 십자가는 하느님 나라의 문을 여는 열쇠이다. 성 이레네오는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 열렸다. 십자가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주권과 사랑의 힘을 본다.”(Adversus Haereses V, 20,1) 하느님 나라가 우리 안에 자리 잡으려면, 우리 역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제자의 길을 걸어야 한다.
감사와 사랑, 용서와 화해가 이루어지는 가정은 이미 하느님 나라다. 반대로 불의, 분열, 미움이 지배하는 곳은 이미 지옥의 씨앗을 키우는 공간이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를 기다린다는 것은 단순히 종말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은총에 응답하여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권고한다. “그대가 가난한 이를 도울 때, 하느님 나라는 이미 그대 안에 있다. 그대가 분노를 참을 때, 하느님 나라는 그대 안에서 다스린다. 하느님 나라는 먼 곳이 아니라, 그대의 선택 안에 있다.”(Hom. in Mt. 14,3)
하느님 나라는 먼 미래에 갑자기 떨어지는 번개처럼 올 종말의 사건일 뿐 아니라, 이미 우리 가운데 시작된 하느님의 통치다. 그 나라는 성령의 열매로, 십자가의 길을 통해 드러나며, 우리의 삶 안에서 사랑과 감사, 정의와 평화의 실천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우리 가운데 이 하느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삶을 살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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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내 가운데에 하느님의 나라>
루카 17,20-25 (하느님 나라의 도래, 사람의 아들의 날)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서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을 받으시고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날을 하루라도 보려고 갈망할 때가 오겠지만 보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보라, 저기에 계시다.’, 또는 ‘보라, 여기에 계시다.’ 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나서지도 말고 따라가지도 마라. 번개가 치면 하늘 이쪽 끝에서 하늘 저쪽 끝까지 비추는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날에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
<내 가운데에 하느님의 나라>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
내 가운데에
하느님의 나라가
살갑게 느껴지는 까닭은
내가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되어가기 때문이겠지요
내 가운데에
하느님의 나라가
그럼에도 낯선 까닭은
내가 아직
하느님의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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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내 안에서’ 자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서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을 받으시고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날을 하루라도 보려고 갈망할 때가 오겠지만 보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보라, 저기에 계시다.‵, 또는 ′보라, 여기에 계시다.‵ 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나서지도 말고 따라가지도 마라. 번개가 치면 하늘 이쪽 끝에서 하늘 저쪽 끝까지 비추는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날에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루카 17,20-25)
1) 바리사이들이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물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왔다고 대답하십니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라는 말씀은, 그 나라가 사람들 안에서 ‘이미’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나라는 세속의 국가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워진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정부 수립이나 정권 교체 같은 방식이 아니라, 누룩이 밀가루 반죽을 부풀어 오르게 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루카 13,21), 즉 ‘새롭게 변화됨’이라는 방식으로 시작되고,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나라입니다.
우리 교회는,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써 시작되었고,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완성된다. 우리는 지금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종말 한가운데에서 살고 있다.”라고 표현합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은 곧 하느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날이고, 그날이 바로 ‘종말의 날’입니다.>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나라는 특정 장소나 특정 지역에 세워지는 나라가 아니다. 그 나라는 모든 곳의 모든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따라서 ‘이곳’, 또는 ‘저곳’이라고 말할 수 없다.”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면, 사람들은 그 나라에서 살고 있다는 것인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면, 사람들이 그 나라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 되는데, 그것은 사람에 따라 다른 것으로 생각됩니다. 믿음에 따라서, 또 신앙생활의 성숙도에 따라서 하느님의 나라를 체험하는 것이 다르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천국의 행복을 체험하고, 그 행복을 누리는 사람도 있고, 자기는 신앙인이라고 말하면서도 천국의 행복과는 상관없이 살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2)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라는 말씀에서 ‘너희 가운데에’는 ‘사람들의 마음속에’가 아니라, ‘사람들의 삶 안에’입니다.
‘첫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으로 따라가서 그날 예수님과 함께 묵었고, 예수님을 메시아로ㅠ믿었는데(요한 1,39-41), 사도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예수님의 삶’을 직접 보았기 때문입니다.ㅠ‘예수님의 삶’ 자체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처럼 ‘자신의 삶 안에서’ 하느님의 나라에 동참해야 하고, ‘삶으로’ 그 나라를 증명해야 합니다.>
3)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날을 하루라도 보려고 갈망할 때가 오겠지만 보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제자들이 겪게 될 박해를 예고하신 말씀이고, 박해가 너무 심해서 예수님의 재림을 갈망하게 될 것이라는 뜻인데, 이 말씀에서 ‘보지 못할 것이다.’는, ‘그날이 언제인지는 말할 수 없다.’입니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보라, 저기에 계시다.’, 또는 ‘보라, 여기에 계시다.’ 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거짓 메시아, 가짜 재림 예수 등이 많이 등장할 것이라고 예고하시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나서지도 말고 따라가지도 마라.”라는 말씀은, 거짓 메시아나 가짜 재림 예수에게 속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말씀이고, 그런 가짜들에게 속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는 예고 말씀이기도 합니다.
<가짜가 자기 입으로 “나는 가짜다.” 라고 말하는 일은 없고, 언제나 항상 “내가 진짜다.”라고 주장합니다. 옛날부터 수없이 많은 가짜와 사이비들이 나타났고, 지금도 많이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그런 가짜와 사이비들에게 속지 않으려면 더욱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번개가 치면 하늘 이쪽 끝에서 하늘 저쪽 끝까지 비추는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날에 그러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번개가 치면 사람들이 모두 보게 되고 알게 되는 것처럼, 나의 재림도 모든 사람이 보게 되고 알게 된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특별히 선포할 필요도 없고, 공지할 필요도 없는 일, 모든 사람이 당연히 목격하게 되는 일입니다. <종교가 다르거나 아예 없는 사람들도 모두 포함됩니다.>
“그러나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라는 말씀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아마도 제자들 중에는 중간 과정을 모두 생략하고 재림으로 직행하기를 바란 사람도 있었을 텐데, 그것은 ‘하느님의 뜻’도 아니고 ‘하느님의 방식’도 아니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십자가를 생략하고 부활과 재림으로 직행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1베드 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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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김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 복음은 하느님 나라에 관하여 다룹니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이 말씀에서 “가운데에”라고 옮긴 그리스 말은 ‘- 안에’, ‘- 속에’, ‘누군가의 깊은 곳에’라는 뜻을 가집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풀어 보면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너희 속에, 너희 마음속 깊은 곳에 있다.’가 됩니다.
인간은 누구나 내일에 대한 불안을 안고 살아갑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때문에 점집을 찾고 사주를 보거나, 사적 계시에 집착하거나, 사이비 또는 유사 종교에 빠지는 것은 실제로 고통스러운 현실을 더욱 어렵게 만듭니다. 거짓 위로에 자신을 맡기는 것은 모래 위에 성을 쌓는 격이자 불난 데 기름을 붓는 격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믿음과 신앙은 정확하게 계량하거나 측정할 수 없어, 이를 향한 여정도 그저 막연하고 모호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구체적 표징이나 확실한 ‘계시’ 또는 강렬한 은사에 목말라하는 이유이기도ㅠ합니다. 이 목마름을 악용하면서 인류 역사 안에서 이단과 사이비가 끊이지 않았으며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 유혹의 손길을 뻗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믿음과 희망을 두어야 할 곳은 하느님 한 분뿐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통하여 하느님 나라가 우리 한가운데에 있다고 명확히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세례성사 때 우리 안에 뿌려진 하느님 나라의 씨앗은 지금 이 순간도 자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느님의 뜻을 찾고 예수님의 가르침에 충실하며 이웃 사랑을 실천할 때, 눈에 보이지 않는 이 씨앗은 어느새 싹을 틔우고 훌쩍 자라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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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우 신부님]
<하느님 나라의 지혜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지혜서는 구약성경에 담긴 유다이즘 사상을 ‘솔로몬의 지혜’라는 이름으로 집약해 놓은 성경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에 오시기 전, 그리고 로마 제국이 아직 일어나기 전에 지중해 일대를 비롯한 남부 유럽과 북부 아프리카 그리고 서부 아시아는 ‘헬레니즘 세계’라고 부르던 하나의 문화권이었습니다. 그리스 마케도니아에서 일어난 알렉산더가 하나의 언어, 하나의 문화로 이 지역을 정치적으로 통합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무렵에는 유다인들이 이스라엘 지역은 물론 온 헬레니즘 세계에 두루 퍼져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이즘의 사상가들은 조상들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던 구약성경의 지혜를 자라나는 새로운 세대에게 단절 없이 전해주기 위하여 그리스어로 이 지혜서를 썼습니다. 이 성경의 이름이 ‘지혜서’인 배경도 당시 헬레니즘이 추구하던 가장 큰 시대적 화두가 ‘지혜’였던 데서 유래합니다.
그리하여 지혜서가 말하는 지혜는 창세기 이래 유다이즘의 정수가 담겨져 있으며, 특히 장차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는 신앙이 녹아 있습니다. 이는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와 하느님 나라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개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전통적으로 유다인들이 기다려오던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던 메시아 즉 그리스도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며 그 나라의 뜻을 가르치시고 당신이 신적 권능을 지니고 계심을 여러 가지 기적으로 입증해 보이셨어도 이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당시의 제자들은 물론이고 바리사이들을 비롯한 유다인들은 다윗이나 솔로몬처럼 정치경제적으로도 힘 있는 현세적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에게서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을 받으시고 황당해지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0-21)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미 다가온 하느님 나라는 바리사이들을 비롯한 당시 유다인들이 이를 알아보지 못했던 까닭에 머지않아 박해를 받을 것임을 암시하셨습니다. 그것이 머지않아 닥쳐올 십자가 수난이었습니다.
이제 지혜와 하느님 나라는 부활 신앙으로 선포되고 있습니다. 부활은 죽었던 육신이 다시 살아나는 소생이 아니요, 육신이 죽은 후에 불멸하는 영혼으로 남는 사건도 아닙니다. 지금 여기서부터 의로움과 거룩함을 위한 희생으로 시작되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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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지혜서 저자는 지혜에 대한 정의와 함께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지혜는 하느님 권능의 숨결이고, 전능하신 분의 영광의 순전한 발산이어서, 어떠한 오점도 그 안으로 기어들지 못한다. 지혜는 영원한 빛의 광채이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활동의 티 없는 거울이며, 하느님 선하심의 모상이다.”(지혜서 7장 25절-26절)
성경이 대부분 신앙을 전제나 목표로 하는 책인 데 비해 지혜서와 욥기, 코헬렛, 잠언, 시편에 영향을 준 지혜문학은 인간의 이성에 바탕을 둔 지적인 활동에서 문제들에 대한해답을 찾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성서 기자는 근동의 지혜문학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궁극적으로 하느님 구원 역사에서 그 해답을 찾으려 하고 있습니다.
고대 근동의 세계를 한 마디로 단순하고 뚜렷한 결론을 얻으려는 기대는 갖지 말아야 하는 것이 거리가 먼 역사와 지역 안에서 다양한 변천과 발전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고대 근동의 지혜의 세계를 보면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자연과학, 천체의 현상, 의학, 건축술, 수학 등에 기초를 둔 ‘자연과학적 지혜(Scientific wisdom)’가 있고 사회과학에 바탕을 둔 ‘실용적 직혜(Practical wisdom),’ 그리고 철학과 인간제반 대한 문제와 목적, 고통과 죽음의 문제에 대해서 ‘사변적 지혜(Speculative wisdom)’가 있습니다. 이러한 근동의 지혜문학의 ‘지혜’가 성경 저자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 지혜가 하느님과 연결되어 추상적인 지혜가 ‘인격화’가 되었고 후에는 신격화 되는 단계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성서에서 지혜서 저자는 이렇게 말씀을 전합니다.
“지혜는 혼자이면서도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자신 안에 머무르면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하며, 대대로 거룩한 영혼들 안으로 들어가, 그들을 하느님의 벗과 예언자로 만든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지혜와 함께 사는 사람만 사랑하신다. 지혜는 해보다 아름답고, 어떠한 별자리보다 빼어나며, 빛과 견주어 보아도 그보다 더 밝음을 알 수 있다.(지혜서 7장 27절-29절)
추상적인 지혜가 아니라 인격체로서의 전능한 자로서 자신을 따르는 이들의 영혼에 들어가 그들이 하느님과 벗이며 예언자가 되게 해주는 것입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루카 17장 20절)라는 질문을 바리사이로부터 받고 대답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여기에 계신다,’ ‘저기에 계신다.’라고 사람들이 떠든다 하더라도 ‘동요되지 말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성실하게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가 말하는 공간인 위치가 아니라 ‘우리 가운데 이미 계신다.’(루카 17장 21절)라는 주님의 말씀대로 우리의 삶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미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로지 아버지만 아신다.“(마태오 24장 36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따금씩 세상이 조용할라치면 휴거를 부르짖으며 세상 종말을 예고하고 또 그것을 믿고 따르는 추종자들 때문에 시끄러울 때가 있습니다. 사람은 어리석어서 몇 차례 이런 경험을 하면서도 금방 잊어버리고 같은 말뚝에 또 다시 부닥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들 중에 어떤 이들은 ‘이번에는 정말’이라는 표현까지 쓰며 사람들에게 노스트라다무스(Nostradamus)까지 들먹이며 자신의 예언의 정당함을 내세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주님께서 ‘그날과 그 시간’을 알지 못한다고 못 박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말씀대로 그들 때문에 우왕좌왕하며 따라나설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리에서 오늘 해야 할 일에 충실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 가운데 있다.’라고 이르신 주님의 말씀대로 시공간을 넘어서 바로 우리의 삶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시작 되었지만 아직 지상의 세계가 끝나지 않는 시점에서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닌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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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신부님]
<비극적이긴 한데 그래도 해피엔딩>
+찬미예수님
신학생 시절에는 하루빨리 공부를 마치고 사제가 되고 싶었습니다. 사제가 되면 더 이상 양성과정에 구속받지 않아도 될 것 같았고 성소에 대한 고민도 사라질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사제가 되고나니 제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금방 알아챘습니다. 성당 안에서의 각종 사건들과 신자분들이 지닌 어려움을 듣고 조언하는 과정에서 저 스스로에 대한 부족함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성소에 대한 고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라질 것 같았던 개인적인 욕망은 오히려 덧나가기 쉬워보였고 그러므로 끊임없는 성찰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다보니 하루빨리 경험을 쌓고 나이를 먹어 보다 현명한 사제가 되기를 바라게 되었습니다.
유학시절에는 하루 빨리 학위를 받고 싶었습니다. 박사 학위만 받는다면 더 이상 공부할 일이 없을 것 같았고, 실제로 학위 수여식 때에는 이제 다시는 책을 볼 일이 없을 것이라며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교수가 되고나니 오히려 학생 때보다 더 많은 공부가 요구됩니다. 논문은 한 가지 주제로 개인적인 연구만 하면 되었었는데, 이제는 매주 다른 주제와 비전공 과목까지 공부해야 하고.어떻게 잘 알아듣게 가르칠 수 있을지 방법론까지 고민해야 합니다. 이러한 시간을 보내다 보니 ‘배움에는 끝이 없고 살아가며 겪는 어려움은 계속해서 새롭게 생겨날 것’이라는 비극적인 사실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미래의 저의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나이가 먹어 현명한 사제가 된다고 할지라도 그때에는 그때대로 분명 나름의 부족함이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오히려 혈기가 왕성한 젊은 사제들을 부러워하게 될지 모를 일입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경험이 쌓이고 쌓여 학문적으로 깊이가 있어지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배움은 끝이 없는 것이니 연구와 공부는 계속되어야 할 것이고 새로운 연구 과제들이 생겨날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아무래도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없으리라는 생각에 막연하기까지 합니다. 살아가는 동안 고통과 갈등이 계속해서 주어질 것이라는 사실. 이것은 우리에게 참으로 비극적인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 이야기의 끝은 해피엔딩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루하루 새롭게 주어지는 어려움을 극복해 낼 때, 그 끝에는 우리가 목표로 하고 있는 하느님 나라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면 그렇습니다. 운동선수가 아무런 노력 없이 금메달을 딸 수 없고 아무런 공부 없이 시험을 잘 보는 학생도 있을 수 없습니다. 시끄럽고 지저분한 공사 과정 없이 아름다운 건물이 탄생할 수 없고 산모의 정성과 고통 없이 소중한 생명이 세상에 태어날 수도 없습니다. 이렇듯 우리의 삶 역시 여러 가지 고통과 희생 속에 하느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삶으로 거듭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이 말씀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는 다른 곳이 아닌 그분의 뜻을 실천하는 이들의 마음 속에서 서서히 이루어짐을 알게 됩니다. 반면 우리는, 저의 신학생 시절, 학창 시절의 모습과 같이 살아가며 하루하루 고통 없이 고민 없이 살아가길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복음의 말미에 나오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
실제로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께 조차 공짜로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여기에는 고난과 배척이 있었으며 이를 예수님께서는 직접 체험하심으로써 우리에게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얼핏 보면 비극처럼 보이지만 결국 부활의 신비, 즉 하느님의 나라를 우리에게 열어주는 최고의 사랑과 영광으로 그 끝을 맺습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가 일상생활 안에서 마주하게 되는 어려움들은 결코 우리의 것을 강탈하는 손해가 될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인간적이고 물리적인 손해처럼 보이지만 결코 우리의 영혼을 손상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의 영혼을 단련하고 완성시키며 더욱 지혜로운 신앙 생활을 하도록 하는 발판이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모든 일에서 지혜로우신 분이십니다. 이러한 지혜에 우리가 의존하고 주님의 사랑과 희생을 가장 우선적인 가르침으로 둔다면 무엇이 우리를 가로막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의 복음 환호송은 이러한 삶을 살아가고자 결심하는 우리에게 새로운 지혜를 알려줍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 우리가 고통 중에 있다면 우리의 전신인 하느님 역시 고통스러우십니다. 그리고 이를 함께 이겨내고자 온갖 힘과 용기를 주십니다. 여러 가지 한계 속에서도 이를 차차 이겨낼 때 우리는 더욱 굳건하고 아름다운 주님의 가지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스승이신 주님의 고통으로 하느님 나라가 영원히 빛나게 되었듯 말입니다.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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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는 하느님의 나라!>
오늘 복음(루카 17,20-25)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와 사람의 아들의 날인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로부터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을 받으시고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 그 자체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시작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바로 그곳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언제나 기뻐하고, 끊임없이 기도하고, 모든 일에 감사드리는 바로 그곳,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이 있는 바로 그곳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미 우리 가운데에 와 있는 하느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나라는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완성된 하느님의 나라'는 사람의 아들이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 이루어집니다. 그 때는 아무도 모릅니다. 오직 하느님 아버지만이 아십니다. 그러니 유혹에 넘어가지 말고 늘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11.13(목)은 '대학수능능력시험이 있는 날'입니다.
수험생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그들이 그동안 최선을 다한 노력들이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수험생들 마음 안에 주님의 평화가 함께하길 기도합시다!
인간으로서, 그리고 하느님의 자녀로서, 각자의 자리(성소)에서 기쁘게 최선을 다하는 것, 바로 그 자체가 하느님의 나라이고, 하느님의 나라 안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주님, 수험생들에게 평화를 내려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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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
붉은 단풍도
나무를 중심으로
뜨겁게 타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 안에서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선포하십니다.
지금 살아내야 할
사랑의 현실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이미 우리 안에,
이미 우리 가운데에
존재하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하느님 나라이시며,
그분과 함께 사는
우리의 삶이
그 나라의
현실입니다.
진정한 혁명은
내면에서
시작됩니다.
하느님 나라는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 하느님의
사랑을 살아내는
일상이 바로
하느님의
일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시작된
구원의 현실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삶 속에서
실현됩니다.
하느님 나라는
마음속에서
살아 움직입니다.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서
이미 현존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 마음의
중심입니다.
삶과 마음,
관계의 중심에서
체험되는
나라입니다.
이미 우리 가운데
살아 숨 쉬는 은총이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이미 우리 가운데
살아 숨 쉬는
은총을 만나는
오늘 되십시오.
하느님 나라는
지금, 우리의
일상 속에서
체험될 수 있는
뜨거운 마음의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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