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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 가장 위대한 산악인을 추모하며)
수많은 청중들을 앞에 두고 한 중년사내가 연단 위에 섰다.
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으나 눈빛은 비장했다.
그의 강연이 거의 끝나갈 즈음 청중들 중 한 사람이 손을 들어 그에게 질문했다.
"선생님이 생각하시기에 이 땅의 가장 위대한 산악인은 누구입니까?"
그는 주저하거나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먼저 간 후배대원 백곰 '백준호'를 거명했다.
그러면서 2004년 5월 18일에 있었던 백준호의 위대했던 감동 실화를 청중들에게 얘기하기 시작했다.
작게는 수십 미터에서 크게는 수백 미터에 이르는 죽음같은 빙하계곡 아이스폴,
그 세상 끝 심연보다 더 낮게 깔려있던 대장부의 뜨거운 눈물이 일순간 그렁그렁 그의 미간에 차올랐다.
더이상 청중들이 또렸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의 흐릿해진 동공은 이미 청중들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8740 미터 에베레스트 정상 부근을 향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후배 대원들이 잠든 바로 그곳이었다.
원초적으로 인간들의 접근을 불허하는 신들의 땅, 히말라야.
그 날카롭고 위태로운 태고적 빙벽에 그대로 각인되어 있는 백준호의 '위대한 발자국'과 그의 애끓는 '휴매니즘'을 따라가고 있었다.
韓國 山岳史에 불멸의 기록으로 남아있는 勿忘의 해가 바로 2004년도다.
바로 그 해에 계명대 산악부 원정대가 히말라야를 향했다.
원정대의 대장은 박무택이었다.
1차 정상 공격조였던 '박무택'과 '장민'은 험하기로 악평이 자자했던 초모랑마(8848M) 등정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2004년 5월 18일 오전 10시경이었다.
한국 산악사에 또 한 번의 위대한 이정표를 찍는 순간이었다.
그들이 완등하고 내려오면 캠프5에서 대기하고 있던 '백준호'와 '오은선'이 2차 정상도전에 나설 참이었다.
날씨도 좋았고 모든 게 순조로워보였다.
1차 공격조가 정상을 찍고 백미터 정도를 내려왔을 때였다.
당시 대학교 4학년이었던 26세 청년 '장민'(1975-2004)은 이미 탈진상태를 보이고 있었다.
큰일이었다.
심각한 위기였다.
아직 경험이 일천하고 앳된 그를 돕기위해 박무택 대장(당시 37세)은 갖은 노력을 경주했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것은 곧 서로에게 치명적 위협을 초래하는 서막이었다.
8천미터 이상의 고봉들이 즐비한 히말라야.
평지의 1/3밖에 안되는 희박한 산소와 낮은 기압으로 인해 신체의 밸런스가 심하게 뒤틀리고 체력소모가 극심한 상태에서
자신의 몸조차 가누기 힘든 판에 누군가의 생명을 지켜내기 위해 몸을 던진다는 건 애시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건 일반인들의 머릿속에서나 존재하는 사치스런 단어일 뿐 죽음이 목전에서 아른거리는 극한의 현실에선 어불성설이었다.
제아무리 철인이라해도 그곳에선 단지 5킬로, 10킬로 정도의 무게만 더해져도 바로 고꾸라지거나 퍼질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자신의 안위보다는 탈진한 후배대원을 챙기느라 힘을 너무 써버린 박대장.
추락 직전의 그를 구하다가 박무택의 고글까지 벗겨졌고 이내 천길 낭떠러지 아래로 사라졌다.
강렬한 태양광에 그대로 노출되면서 시각을 상실하게 되는 천형같은 雪盲이 찾아왔다.
雪上加霜이었다.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런 상태로는 한발자국도 전진하기 힘들었다.
설맹에 걸린 박무택을 빙하의 땅에 남겨두고 구조를 요청하러 장민은 하산을 서둘렀지만, 이미 지칠대로 지쳐버린 그도 곧 조난을 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이후로 그는 끝내 아무런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
그때가 2004년 5월 18일 오후 6시경이었다.
캠프는 뒤집혔다.
당연했다.
피를 나눈 형제보다 더 끈끈하게 지냈고 서로를 더 뜨겁게 챙기며 사랑했던 한국 최고의 산쟁이들이 아니던가.
구조가 시급했다.
두 사람의 구조를 위한 동행을 요청하는 백준호의 갈급한 목소리가 무전을 타고 히말라야의 하늘에 계속해서 울려퍼졌다.
외로운 늑대의 마지막 울부짖음같이 그의 목소리는 피를 토하고 있었다.
또한 진정으로 눈물겨운 호소였다.
그러나 악천후로 돌변한 빙하의 땅에서 목숨을 건 채 어둠속으로 자신을 내던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국의 산쟁이들이든, 외국의 알피니스트들이든, 당시 히말라야 원정에 나섰던 꽤 많은 산악인들이 백준호의 처절한 호소를 무전으로
들었으나 어느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했다.
아니다.
나서지 못한 것이 아니라 적어도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인간이라면 그런 악천후와 칠흑같은 어둠속을 뚫고 분연히 떨쳐 일어서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것이 냉엄한 현실이었다.
빙하보다 더 차가운 외면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백준호는 혼자 일어섰다.
너무나도 아끼며 자신의 분신처럼 사랑했던 한 학번 후배 '무택이'를 찾기 위해서 였다.
죽음을 무릅쓴 거룩한 출정이자 외로운 등반이었다.
백준호는 홀로 '캠프 파이브'를 나섰다.
바로 내일(5월 19일) 백준호와 두 번째로 정상공격을 하기로 했던 '오은선대원'만이 신들의 영역으로 홀로 떠나는 그에게
자신의 '산소 마스크'와 '레귤레이터'를 건네주었다.
고봉에 도전하는 산쟁이들에겐 자신의 목숨 다음으로 소중한 두 가지 필수 장비였다.
백곰이란 별명으로 불린 '백준호'(1967-2004)는 타고난 산쟁이였다.
그는 대구 대건고와 계명대 산악부의 주장을 지냈으며 ROTC에 지원해 군생활도 장교로 복무했다.
전역 후엔 제약회사에서 8년을 근무했고, 대구에서 숯불갈비집을 운영하기도 했으나 그는 끝내 산에 대한 깊은 사랑과 시원적인 동경을 포기할 순 없었다.
히말라야 16좌를 세계 최초로 完登했던 살아있는 전설, 엄홍길 대장과는 서너번의 원정대를 함께 꾸리기도 했었다.
박무택, 백준호, 엄홍길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운명적인 파트너였고, 서로를 끔찍하게도 아끼며 사랑했던 최고의 兄弟들이었다.
또한 백곰은 오버행의 달인으로 통했다.
인공암장이나 자연의 직벽보다 몇배나 더 험난한 오버행을 만나면 대부분 백곰이 始登에 나서 르트를 개척하곤 했었다.
여러번의 히말라야 원정에서도 가장 힘들고 위험하기 짝이없는 初登을 자처해 맡곤했다.
한마디로 그는 체력의 지존이었고 배려심과 희생정신이 남달랐던, 한없이 가슴이 따뜻했던 사내였다.
그래서 산쟁이들은 언제나 듬직했던 백준호를 생각할 때마다 '따뜻한 카리스마'를 느끼곤 했었다.
히말라야 정상부근인 8740미터 지점.
탈진한 채 움직일 수 없는 사랑하는 두 동료를 위해
모두가 말렸고 외면했지만 '무택이'와 '민이'를 구하러 백곰은 칠흑같은 어둠속으로 홀로 나섰다.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행동이었다.
그때가 5월 18일 오후 7시 경이었다.
칼바람과 눈보라가 계속해서 송곳처럼 할퀴었고 찔러댔다.
그렇게 그렇게 또 그렇게,
밤을 꼴딱 새워가며 450 미터의 거리를 11시간 동안이나 사투를 벌인 끝에 백준호는 드디어 박무택을 만났다.
백준호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인간도 감히 상상할 수도, 연출해 낼 수도 없는 기적같은 조우였다.
진정으로 거룩하고 위대했던 11시간의 목숨 건 고군분투였다.
바로 그날 아침 그 대목이, 대한민국 산악사에서 최고의 해와 달과 별로 기록되었던 가장 숭고하고 위대한 순간이었다.
박무택은 밤새도록 희박산소와 치명적인 동상으로 인해 거의 산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었다.
자연과 한몸이 되기 직전 두 형제는 히말라야 꼭대기에서 죽음을 뛰어넘는, 최후의 해후를 하고 있었다.
上善若水같은 人間愛였고 진정으로 가슴이 먹먹해지는 至高한 등반이었다.
준호가 무택이를 만났을 때 무택이는 마지막 숨을 힘겹고 나즈막하게 내쉬고 있었다.
백곰도 이미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상태였고 기진한 몸이었다.
정신과 육신의 분리.
그는 동료를 구하러 왔지만 이승과 저승의 변곡점을 막 지나려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간절한 눈빛으로 서로를 붙들었고, 각자의 영혼속에 고이 고이 서로의 의리와 정과 사랑을 묻었다.
"민이는 못 찾았고, 무택이는 찾았으나 구조는 불가하다"라는 마지막 무전을 남긴 채 백준호도 그대로 산이 되었다.
2004년 5월 19일 아침 6시경이었다.
세 명의 연락이 두절된 뒤로 오은선 대원이 다시 그들을 찾으러 캠프를 떠났다.
그러나 박무택의 시신과 백준호의 배낭만을 확인했을 뿐 두사람은 끝내 찾지 못하고 돌아왔다.
'죽은 자'를 위한 '산 자'들의 현란한 수사가 무슨 소용있으랴.
그러나 백준호의 그 거룩한 발자취에 산쟁이들뿐만 아니라 세인들도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었다.
백곰은 별이 되어 세상 사람들의 존경과 추앙을 한몸에 받았다.
그때 그의 나이는 서른여덟이었다.
그가 산이 된 이후 지금까지 수많은 성상이 흘렀지만 그는 여전히 감동과 위대함의 언어로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대한민국 산악인 최초로 그는 義死者로 지정되었으며 지금도 한국 산악사의 불멸의 傳說이자 神話로 남아있다.
나보다는 삼 년 후배지만 다시 한번 '의사자 백준호'에게 이 지면을 빌려 심심한 존경과 경외를 전하고 싶다.
영화 '히말라야'는 지금 이 시간에도 파죽지세로 성공스토리를 써가고 있다.
작년 한 해, 관객 3천만명을 동원한 이 시대 최고의 배우이자 천의 얼굴, 황정민(엄홍길 역)을 비롯해
며칠 전 전격적으로 결혼을 발표한 떠오르는 신예 정우(박무택 역), 중량감 있는 연기파 배우 김인권(백준호 역), 탄탄한 연기력에 늘 수더분하고 유쾌한 라미란(오은선 역), 묵직하고 인상적인 캐릭터에 잘 어울리는 조성하와 김원해 등 연기자들의 '케미'는 더없이 완벽했고 멋졌다.
충무로 정통 연기파들의 최고의 앙상블이었다.
통상 어드벤처 무비나 재난영화 등에서 '콘티'의 중요성은 두말할 나위도 없겠지만 이번에도 콘티는 단연 돋보였고 빛을 발했다.
그만큼 메가폰을 잡았던 이석훈 감독이나 제작을 맡았던 윤제균 두 사람의 작품에 대한 통찰과 몰입, 관객들의 감성을 세세하게 터치하며 가슴을 뭉클하게 틀어쥐는 실력은 단연 발군이었다.
2004년 5월,
히말라야를 향한 목숨 건 도전에서 끝내 산이 되어버린 세 명의 산쟁이들 - 백준호, 박무택, 장민.
이 영화는, 매순간 서로를 아끼며 함께 동고동락했던 그들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2005년 5월에 떠났던 휴먼원정대의 리얼 감동 스토리를 다룬 작품이었다.
명예도 보상도 없는 125분짜리 감동 휴먼 드라마에 뜨거운 박수를 보내고 싶다.
세계 최초 히말라야 16좌 완등이란 위업을 달성한 엄홍길 대장이지만 그의 인간적인 내밀한 告白을 들으며 나는 다시 한번 옷깃을 여몄다.
그의 진솔한 고백은 감동이었다.
그는 그동안의 숱한 도전에서 동료들 10명을 잃었다고 했다.
죽음의 목전에서, 극한의 추위와 공포의 질곡에 처할 때마다 그는 먼저 간 열 명의 대원들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한번 더 힘을 내게 해달라고 수도 없이 주문했고 또는 울부짖으며 기도했다고 했다.
지금까지 박무택과는 원정을 4번이나 했는데 그 중 2000년도 칸첸중가(8586M) 원정 때 그 산 꼭대기 바로 아래 절벽에서 자일 하나에 의지해 매달린 채로 밤을 꼬박 지새우면서 서로를 수도 없이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극한의 공포와 추위를 이겨냈던 일은 죽을 때까지
절대로 잊을 수 없을 거라고 했다.
"무택아. 졸면 죽는다. 졸면 죽어. 정신 차려라. 정신줄을 놓으면 죽는다고...."
언뜻 언뜻 잠이 들다 깨고 또 잠이 들다 깨면서 그렇게 최악의 밤이 지나고 세상의 가장 높은 지점에서 가장 먼저 밝아오는
여명의 눈동자를 맞았을 때 두 사람이 그 시간까지 살아있음을 자각하고는 끝내 감사의 눈물을 흘렸노라고 했다.
시시각각으로 죽음의 크레바스를 수도 없이 건넜던 산악계 거인의 고백은 깊은 호수처럼 맑고 담담했다.
먼저 간 세사람을 위해 장도에 나섰던 2005년 5월의 휴먼 원정대.
그들은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히말라야의 凍像으로 굳어버린 동료 세 명을 찾기 위해 다시 목숨 건 도전에 나섰다.
하늘의 도움으로 박무택 대원은 찾았으나 끝내 백준호 대원과 장민 대원은 찾지 못했다.
백준호와 장민은 그렇게 완벽하게 에베레스트가 되어갔다.
그들은 신들의 땅, 히말라야를 그렇게도 사랑했던 만큼 바로 그곳에서 영원한 인식을 취하고 있을 거라 믿었다.
2005년 5월 29일날,
휴먼 원정대는 만년설로 뒤덮힌 히말라야에 박무택 대원을 위해 작은 돌무덤 하나를 만들어 주었다.
엄대장은 마지막으로 돌같이 딱딱하게 굳어버린 무택이의 손에 가져간 장갑을 끼워주며 다짐했다.
"히말라야를 향한 사랑과 도전을 절대로 중단하지 않겠노라고, 먼저 간 동생들의 소망까지 함께 엮어 17좌를 완성해 내겠노라고"
엄홍길 휴먼재단의 17좌는 이제 더이상 山이 아니다.
네팔의 각 오지 16군데에 튼튼하고 좋은 학교를 지어 그곳 주민들에게 헌정하는 프로젝트다.
드디어 2016년 봄에 11번째를 헌정하게 된다.
시작이 반이라고 했던가.
벌써 7부 능선을 넘었다.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지만 계획은 실천하지 않으면 한낱 물거품같은 꿈일 뿐이다.
영화 '히말라야'가 우리에게 묻는다.
그리고 한국 山岳史에 가장 위대한 산악인으로 기록 된 채, 2004년 5월 19일 에베레스트의 전설이 되어버린 '백준호'와
그의 평생 동반자 '박무택'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묻는다.
"사람에 대한 조건 없는 사랑이 아니라면 정녕 山이 무슨 所用이며 무슨 意味가 있느냐고."
"그런 근원적인 人間愛가 아니라면 당신의 삶에 무슨 가치와 소망이 있느냐고"
나는 인생을 어떻게 살고 있는가.
희생과 사랑 그리고 헌신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누군가의 심금을 울려 본 적이 있는가.
의미있는 삶을 위해 목숨을 걸어 본 적이 있는가.
불타는 熱情, 따뜻한 感性 그리고 죽음을 담보한 挑戰에 스스로 떨쳐 일어나 흔쾌하게 나섰던 적이 있는가.
나의 평생의 소망, 그 必生夢이 무엇인지를 바로 알고 묵묵하게 실천하며 일관되게 행동하고 있는가.
극장문을 나서면서 나는, 나도 모르게 계속 혼자서 중얼거리며 뇌까렸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시인, 안도현 선생님의 '너에게 묻는다' 주 일부 싯구였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새벽 큐티시간이 자꾸만 길어지고 더없이 소중하게 와닿는 이유도
조건없는 인간애와 내 삶의 방향에 대한 치열한 사유 그리고 기도 때문일 게다.
산에 대한 영화라 전설적인 산악인의 어록을 반추하면서 '히말라야' 후기를 맺고자 한다.
우리의 선조들은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고 가르치셨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영국출신의 걸출한 알피니스트, 앨버트 머메리(ALBERT MUMMERY, 1855-1895)는
오히려 "길이면 가지 말라"고 설파했다.
현대판 알피니즘의 태두이자 창시자인 그는 그의 저서 <알프스에서 카프카스로>에서 이렇게 설파했다.
몽블랑에 한 번 올랐다고 몽블랑을 다 오른 것은 아니다.
"당신이 오른 것은 적게는 몇 개에서 많게는 수십, 수백 개에 이르는 수많은 루트들 중에서 단지 하나만을 선택해 오른 것 뿐이다"
初登에 성공했다고 어찌 위대한 알프스를 다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의 책이 1895년에 영국에서 출간되자마자 곧바로 알피니스트들에겐 바이블이 되었고, 산과 무관한 일반독자들에게도 세상을 바라보는 색다른 스펙트럼으로서 일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산을 몹시도 사랑했던 그도 19세기가 저물어 가던 시기(1895년)에 히말라야 낭가파르밧에서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다가 바로 그곳에서 그대로 산이 되었다.
그리고 세계 산악사에 등불같은 전설로 남았다.
"길이면 가지 마라"
현대 알피니즘의 창시자인 신화적인 존재, 앨버트 머메리의 위대한 일성은 오늘도 수많은 산쟁이들을 산으로, 산으로 또 산으로 향하게 만든다.
그가 말했다.
"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고도(altitude)가 아니라 산을 대하는 당신의 태도(attitude)다" 라고.
우리네 삶에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큰 것 같다.
역시 인생의 핵심은 재물, 권력, 성과가 아니라 방향, 태도, 사랑임을 다시 한번 낮은 자세로 묵상해 본다.
시종일관 겸손하되 더욱 뜨겁게 도전하고 부대끼는, 헌신적인 삶을 위해.
오늘도 스스로에게 힘찬 격려를 보내 본다.
브라보.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