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rry Seems To Be The Hardest Word
- Elton John
-
- What have I got to do
- to make you love me
- What have I got to do
- to make you care
- What do I do
- when lighting strikes me
- and I wake to find
- that you're not there
-
- What do I do
- to make you want me
- What have I got to do
- to be heard
- What do I say when it's all over
- And sorry seems
- to be the hardest word
-
- **
It's sad, so sad
- it's a sad, sad situation
- And it's getting
- more and more absurd
- It's sad, so sad
- Why can't we talk it over
- Oh it seems to me
- That sorry seems
- to be the hardest word
-
-
-
- ** Repeat
-
- What do I do
- to make you love me
- What have I got to do
- to be heard
- What do I do
- when lightning strikes me
- What have I got to do
- What have I got to do
- When Sorry seems
- to be the hardest w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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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대가 날 사랑하게 하려면
- 어떻게 해야만 되나요
- 그대가 내게 관심을 보이게 하려면
- 어떻게 해야 될까요
- 아침 햇살이 비추어
- 눈을 떠 일어나 보니
- 그대가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땐
- 어떻게 해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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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대가 날 원하게 하려면
- 어떻게 해야 되나요
- 그댈 향한 내 마음을 그대에게 전하려면
- 어떻게 해야 될까요
- 모든 것이 끝나 버렸을 때
- 무슨 말을 해야 하나요
- 이 세상에서 가장 하기 힘든 말은
- 미안하다는 말인거 같아요
-
- **
- 슬프네요, 너무도 슬퍼요
- 가슴이 저리도록 슬픈 일이예요
- 점점 더 우습게 되어가고 있어요
- 슬퍼요, 너무도 슬프네요
- 왜 우린 서로 얘기를 나눌 수 없나요
- 언제나 내게 있어
- 미안하다는 말은
- 가장 하기 힘든 말인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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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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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대가 날 사랑하게 하려면
- 어떻게 해야 되나요
그댈 향한 내 마음을 그대에게 전하려면
- 어떻게 해야만 될까요
아침 햇살이 비추어 눈을 뜰 때
- 어떻게 해야 하나요
- 어떻게 해야만 하나요
- 어떻게 해야만 하나요
미안하다는 말은
- 가장 하기 힘든 말인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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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orry Seems To Be Hardest Word ::::
4세 때부터 피아노를 연주하였으며, 11세에는 왕립 음악 아카데미에 장학생으로 입학하는 등 탁월한 음악적 두각을 나타내었던 엘튼 존은 록 역사상 솔로 아티스트로서는 가장 많은 히트곡들을 탄생시킨 아티스트들 중의 하나라고 할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배운 클래식에 기초한 음악적 재능을 바탕으로 해서 흐르는 듯 하면서도 호소력에 넘쳐나는 많은 곡들을 작곡해낸 그는 1976년 <Sorry Seems To Be Hardest Word>라는 곡을 발표하면서 차트 6위를 차지하였다. 감미로운 그의 피아노 연주가 어우러진 이 곡은 마치 클래식 소품을 듣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후에 조지 마이클이 유려한 팝적인 해석으로 리바이블하기도 했다.
:::: Elton John ::::
[Ⅰ]
1947년 3월 25일에 영국의 미들섹스주 피너에서 태어난 엘튼 존(Elton John)은 전형적인 영국의 중류 가정에서 레지낼드 케네스 드와이트란 이름으로 성장했다. 어렸을 때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이던 엘튼 존은 4살 때
부터 피아노 수업을 받으면서 재능을 키워 나갔다. 후에 런던의 로얄 아카데미 오브 뮤직 학교에 입학해 정식으로 클래식을 공부하던 엘튼 존은 뛰어난 성적을 보여 줄곧 장학생으로 선정되었다.
클래식 피아노 수업을 받으면서도 그가 관심을 가졌던 음악은 클래식 쪽보다 파퓰러한 록 뮤직에 심취했었던 관계로 해서 엘튼 존은, 17살이 되던 해인 1966년에는 아예 학업을 중단하고 밀즈 음악출판사에서 근무하면서 저녁에는 블루소로지(Bluesology)란 프로 밴드에 가담해 연주 경력을 쌓았다. 그때까지의 이름인 렉 드와이트란 이름에서 엘튼 존으로 개명된 것은 본래 블루소로지의 리더가 색소폰 주자였던 엘튼 딘이었는데, 엘튼 존의 음악적 재능이 뛰어나자 리더 자리를 엘튼 존에게 양보를 하였지만, 사람들은 엘튼 존이 엘튼 딘인 줄 알고 엘튼이라고 부르자 그때부터 이름을 엘튼 존이라고 개명했다고 한다.
1969년까지 이 그룹에서 연주를 하던 엘튼 존은 신인 작곡가 모집에 응모하면서 블루소로지에서 탈퇴하여 솔로로 독립했다. 개성이 강한 피아노 테크닉으로 록 뮤직을 연주하던 엘튼 존은 신인 작곡가 모집에 응모했을 당시에 만난 랭커셔 출신의 시인인 버니 토빈(Berine Taupin)과 함께 곡을 만들어 발표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버니 토빈이 쓴 가사에 엘튼 존이 곡을 입혀서 발표한 <Empty Sky>는 좋은 반응을 얻었던 데뷰 곡이 되었다. <Empty Sky>가 돌연 영국내에서 센세이셔널한 화제를 모으자, 미국의 레코드 업자들은 엘튼 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했으며, 결국에는 미국의 유니버셜 레코드사와 계약을 맺은 엘튼 존은, 1970년 여름부터 계속되는 레코드 취입과 공연으로 순식간에 미국의 화제 스타로 등장했다.
엘튼 존의 공연 날자를 앨범 타이틀로 붙인 실황 음반 「11-17-70」을 발매하기 시작한 그는, 그 뒤로 계속해서 1972년에는 「Honky Chateau」를, 1973년에는 「Don't Shoot Me, I'm Only The Piano Player」 같은 골드 레코드를 발표하면서 미국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버는 싱어 송 라이터로 각광을 받았다.
엘튼 존이 발표한 곡 중에는 다른 유명 가수들이 리바이벌해 크게 히트시키기도 했는데, 1969년에 발표했던 <Lady Samantha>를 후에 쓰리 독 나잇(Three Dog Night)이 불러 히트시켰으며, 실라 블랙은 <Your Song>을 불렀으며, 토우 패드는 <Bad Side Of The Moon>을, 아리사 후랭클린은 <Border Song>을 히트시키는 등, 70년대에 가장 많은 곡을 만든 작곡가로도 인정을 받았다.
송 라이터로 확고한 자리를 굳혔던 엘튼 존은 1976년 6월에 키키디(Kiki Dee)와 함께 <Don't Go Breaking My Heart>를 듀엣으로 불러 골드 레코드를 수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엘튼 존은 1977년에 작사를 맡아 함께 활동해 온 버니 토핀과 결별하면서 그의 활동은 잠시 중단되기도 했다. 그때부터 엘튼 존은 싱어 송 라이터 생활보다는 갖가지 사업에 치중했는데,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는 자신이 직접 로케트(Rocket)란 레코드 회사를 설립해 신인 아티스트를 발굴하면서 사업가로도 수완을 보이고 있다.
1980년에 엘튼 존은 자신의 21번째 앨범인 「21 At 33」을 발표했는데, 그러한 앨범 타이틀은 33살에 21번째 앨범을 발표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1981년 후반에는 앨범 「The Fox」를 발표해 <Nobody Wins>를 히트시켰다. 또한 엘튼 존은 노래 뿐만 아니라 스포츠에도 대단한 광(狂)으로, 영국의 축구 클럽 Nottingham Forest F. C.의 회장이기도 하며, 엘튼 존은 서정적인 피아노 선율로 폭 넓은 팬을 보유하고 있다. [ From Samhomusic.com ]
[Ⅱ]
*지난 30년간 천부적인 재능으로 팝계에 화제가 되어온 최고의 싱어송라이터 엘튼 존
엘튼 존은 아마도 우리 현대사의 가장 성공적인 음악 아티스트 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그는 대중적 인기 면
에서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와 비틀즈(the Beatles)의 그것과 어깨를 나란히 했고, 오랜 생명력과 활발한 녹음 활동으로는 엘비스와 비틀즈의 시대적한계성을 초월하고 있다.
1992년 그는 엘비스의 오랜 기록이였던 “빌보드 탑 40의 가장 연속적인 히트곡 기록”을 깨고, 엘튼 존의 첫 히트곡인 “Your Song” 이 1970년 12월에 데뷔한 뒤, 22년 동안 한해도 거르지 않고 히트곡을 차트 위에 올려 놓았기 때문이다. 다재 다능한 스타인 엘튼 존은 주옥 같은 발라드 가수 겸 작곡가이자, 화려하고 신나는 록앤롤 스타이기도 하다. 그는 또한 기타가 주름잡던 대중음악계에 반주 악기에 지나지 않았던 피아노를 처음으로 전면에 등장시킨 영향력 있는 아티스트이기도 하다.
어두운 런던 뒷골목의 작곡가 사무실 견습생에서 70년대 최고 수퍼스타 자리로 수직 상승한 엘튼 존은, 때론 엽기적이며 파격적인 의상과 악세서리, 다이나믹한 무대 매너로 마술과 같이 관객을 사로잡곤 했다. 때론 아주 성숙한 음악과 무대로, 자신의 음악만큼이나 큰 비젼과 이상을 관객들에게 전달하곤 한다. 엘튼 존과 그의 파트너이자 작사가인 ‘버니 터핀(Bernie Taupin)’은 70년대의 다른 싱어 송 라이터들에게 시대를 풍미하는 유행과 영감을 주었다. 엘비스 프레슬리가 50년대의 유행을, 비틀즈가 60년대를 풍미했다면, 70년대는 바로 엘튼 존의 시대였으며, 그의 영향력은 80년대와 90년대를 넘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본명은 레지널드 케네스 드와이트(Reginald Kenneth Dwight). 1947년 3월 25일 런던의 교외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배운 피아노로 영국 왕립 음악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하는 영예를 안았으며, 음악 영재반에 속해 영재교육을 받기 시작한다. 클래식 음악 교육을 받았지만, 그의 가슴과 영혼은 록앤롤에 사로잡힌다. 레이 찰스, 버디 홀리, 척 베리 그리고 제리 리 루이스 등 초기 미국 흑인 록앤롤 영웅들에게 매료된 그는 블루스롤러지Bluesology 라는 밴드에 가입하여 흑인 소울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Lion King> <Aida> 등 영화에서 뮤지컬음악까지 다양한 활동
이 밴드에는 탁월한 실력의 두 멤버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탁월한 보컬실력을 갖춘 롱 존 볼드리 (Long John Baldry) 였고, 다른 한 명은 색소폰 연주 였던 엘튼 딘(Elton Dean) 이였다. 밴드 가입시 16살 이였던 그는 그보다 나이가 많고 프로 정신이 뛰어났던 이들 뮤지션의 이름을 따서 추후 자신의 무대 이름인 엘튼 존(Elton John)을 만들기에 이른다. 훗날 아무도 이 이름이 팝 음악계를 가로지르는 고유명사가 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1967년 엘튼 존과 현재의 파트너인 버니 터핀(Bernie Taupin)은 리버티 음반사 (Liberty Record)가 낸 광고를 보고 처음 만나게 되었으며, 이후 이들의 성공적인 파트너 관계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엘튼존의 초기 앨범들 <Empty Sky>(1969) <Elton John>(1970) <Tumbleweed Connection>(1970)이 엘튼 존을 록 음악계에 소개시켰다면, 그의 무대 공연은 그의 위치를 다른 차원의 세상으로 이동시켰다. 70년대 최고의 영국 세션맨들로 구성된 엘튼 존 밴드(Elton John Band), 엘튼존의 파격적인 무대매너와 연출력-예를 들면 타조 깃털, 한 세트에 5천불씩 하는 선글라스, 조명 이 들어 오는 옷들과 갖은 악세서리 등-은 그 누구에게도 찾아 볼 수 없는 흥미진진한 볼거리였다. 무대위에 자유 의 여신상이 등장하는 것은 물론, ‘도널드 덕’으로 또는 아마데우스 모짜르트로 분해 자신의 피아노를 두드리는 엘튼존의 기발한 공연매너는 많은 매니어를 매료시키기 시작한다. 그래서 그는 70년대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그 시대를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자리잡는다 해를 거듭하면서 엘튼 존의 카달로그는 점점 더 투터워지고 다양해졌다. 1971년 한해에만 엘튼 존과 관련된 4장의 새앨범? <Tumbleweed Connnection> <Live Album 11-17-70> <Madman Across The River> <Friends>(영화 사운드트랙) -이 발매 되었으며 이들 모두 빌보드 앨범차트 상위에 랭크되는 쾌거를 누린다. 이 앨범들 속에는 지금까지도 애창되고 영화 및 드라마에 삽입되곤 하는 엘튼 존의 고전들 ‘Tiny Dancer’ ‘Levon’ ‘Honky Chateau’ ‘Rocket Man’ 등이 싱글 히트되기도 했다. 1973년 자신의 레이블인 Rocket Records를 설립한 엘튼 존은 방향을 바꾸어 다분히 팝적이며 담백한 멜로디를 담은 곡들을 내놓기 시작한다. ‘Don’t shoot Me’ ‘I am only the Piano Player’ ‘Crocodile Rock’ ‘Daniel’ 등 싱글 히트만이 아닌 앨범의 전체적인 컨셉에 더 충실한 곡들이 엘튼 존을 70년대의 가장 중요한 싱어송 라이터 로서 자리잡게 한다. 국내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Goodbye Yellow Brick Road’ 또한 이 시기를 통해 발표된다. 1973년부터 1976년까지의 기간 동안 엘튼 존은 15곡의 싱글 히트곡을 발표한다. 그 중 6곡-Crocodile Rock, Bennie and the Jets, Lucy In the Sky with Diamond, Philadelphia Freedom, Island Girl, Don’t Go Breaking My Heart- 은 #1을 차지했고, Daniel, Goodbye Yellow Brick Road, Don’t Let the sun godown on me는 #2를 차지한다. 이 15곡의 파워풀한 히트곡은 통산 156주의 연속적인 차트 기록을 세웠 으며, 이 3년동안 엘튼 존의 싱글은 Top 40 차트를 벗어나는 일이 없었다. 이렇게 엘튼 존은 70년대 중반 대중음악, 록의 세상을 지배하기에 이른다. 엘튼 존의 히트곡이 줄지어 히트하자 그의 앨범 또한 차트를 벗어나는 일이 드물었다. 1972년부터 1975년 까지 발매된 그의 7장의 정규 앨범은 모두 #1을 기록 했으며, 모두 합쳐 39주 동안 넘버원을 내주지 않았다. 이런 성공은 전시대에 the Beatles, the Rolling Stones, Elvis Presley가 세웠던 기록이며, 엘튼 존은 그들의 이런 모든 기록들을 갈아 치우기 시작한다.
1974년 엘튼 존은 워트포트 풋볼 클럽(the Watford Football Club)란 프로축구 팀의 대주주로서 이사가 되기
도 했다. 같은 해 추수감사절에 엘튼 존은 은둔생활을 하던 존 레넌을 설득시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공연했고. 그 공연에서 3곡을 함께 부르기도 했다. 그런데 이 공연은 아이러니하게도 존 레넌의 살아 생전 마지막 공연이 되었다.
엘튼 존의 생산적인 녹음 활동은 80년대로 들어와 잠시 주춤하는 듯 보였다. 오랜 파트너인 작사가 터핀과 2년간의 휴지기를 갖기도 하였으며, 이 기간 동안 서로 다른 아티스트와 활동을 하기도 한다. 비록 발매되 는 앨범의 수는 줄었지만, 그렇다고 80년대의 그의 히트 곡이 줄어든 것은 전혀 아니었다. 1989년에 발매 된 <Sleeping with the past> 앨범에서 히트한 ‘Sacrifice’는 그의 데뷔 20년만에 고국인 영국에서 첫번째 #1 이 되는 아이러니도 만들어냈다.
90년대로 넘어 오면서도 엘튼 존은 여전히 활동적이며 생산적인 활동을 한다. 여러 자선 사업에 꾸준히 많은 관심을 보이며 지원을 아끼지 않던 그는, 자신과 친한 주변의 많은 지인들이 AIDS로 사라져가는 것에 안타까워 하며, ‘엘튼존 에이즈 퇴치재단 Elton John AIDS Foundation’을 설립하며, 에이즈에 대한 계몽과 치료 그리고 보균자들에 대한 지원을 그 누구보다도 더 열정적으로 시작한다. 음악적으로도 1992년 자신의 과거 히트곡을 조지 마이클(George Michael)과 함께 부른 “Don’t Let The Sun Go Down On Me”으로 싱글 차트 #4를 기록 했고, 94년 최고의 작사가 팀 라이스(Tim Rice)와 함께 디즈니영화 <The Lion King>의 주제가를 비롯해 5개의 곡을 작사했고 주제가 ‘Can You Feel The Love Tonight ?’ 라는 곡으로 아카데미 최고 사운드트랙상과 그래미 최우수 남자 팝보컬상을 수상했다. 이들 콤비는 2000년 ‘드림웍스’의 신작 애니메이션 <The road to El Dorado>의 음악작업을 해내어 팬들의 좋은 반응을 얻기도 했다.
1997년과 98년은 엘튼 존에게 있어 매우 의미있는 시기가 된다. 그에게는 개인적인 비극과 가장 영예로운 이벤트가 함께 한 해이기도 한데, 엘튼 존에게 가장 가깝고 친근한 친구인 다이애나 황태자비(자동차 사고)와 이태리 디자이너인 베르사체(Gianni Versace-에이즈로 인한 합병증으로 사망)를 모두 비극적인 죽음에 의해 떠나보내야 했고, 영국인으로서 가장 영예로운 일인 기사 작위를 받았기 때문이다. 비틀즈의 과거 매니저이자, 프로듀서인 조지 마틴(George Martin)에 의해 제작된 엘튼 존의 다이아나 황태자비 추모 싱글 <Candle In The Wind>는 전세계적으로 3천 3백만장이나 팔려 나갔으며, 현존하는 세계 최대의 싱글 판매고를 기록하고 있다. 싱글의 판매 수익은 3천만 달러로서 모두 다이아나 비 추모기금으로 기부되었다. 98년 말에는 미국 음반협회에서 당시까지 북미에서 가장 많은 판매고를 올린 솔로 아티스트를 발표했는데, 엘튼 존은 1위인 미국 컨트리 가수 가스 브룩스(Garth Brooks)다음으로 2위를 차지했으며, 그의 미국내 판매 총 누적수는 6천 6백만장이었다.
엘튼 존은 애니메이션 ‘라이언 킹’에서 함께 작업한 팀 라이스와 함께 애니메이션을 뮤지컬화하는 작업을 시도한다. 그 결과 97년엔 디즈니 최고의 뮤지컬 <The Lion King>이 탄생한다. 또한 이들 콤비는 2000년 3월 브로드웨이에서 오픈한 디즈니의 브로드웨이 뮤지컬 <Aida>(베르디 원작의 오페라)의 작업에도 참여해 이 작품이 그해 4개의 토니상을 수상하는데 큰 기여를 한다. 팝음악에서의 그의 끊임없는 영광에 빛을 더하듯 현재 가장 높은 박스 오피스를 내고있는 두 브로드웨이 뮤지컬 작품은 모두 엘튼존이 작곡한 음악들을 담고 있는 샘이다.
2001년 늦여름, 그는 관객들에게 다시 돌아와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성공적인 공연을 치뤄냈으며, 이 실황은 <One Night Only>라는 라이브 앨범과 DVD로 발매 되었다. <2001 Songs from the West Coast>란 의미심장한 앨범을 냈고, ‘I want Love’라는 엘튼 존 고유 스타일의 노래가 싱글 커트 되었다. 2004년 11월에는 그의 새 앨범 <Peachtree Road>가 발매를 앞두고 있다.
현재 엘튼 존은 2005년 3월 뮤지컬의 본고장인 영국 웨스트엔드에서 오픈할 뮤지컬 <빌리 엘리엇 Billy Elliot>의 음악작업을 하고 있다. 이미 지난 6월 22일 제작발표회를 갖고 4개의 곡을 발표했다. 많은 사람을 감동시킨 원작영화처럼 엘튼존의 음악은 또 한번 관객을 사로잡을 것이다.
▲ 피아노를 연주하며 열창하는 엘튼 존. 그는 피아노를 대중음악 무대 전면에 내세워
성공한 뮤지션으로 불린다.
:::: 세계적 팝스타 엘튼 존의 사상 첫 내한공연 (2004.9.17)
우리가 거장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기에 전혀 주저치 않는 팝음악계 의 살아 있는 전설이자, 진정한 아티스트 인 ‘엘튼 존’ Elton John의 내한공연이 오는 9월 처음으로 서울 하늘아래 펼쳐졌다. 1969년 데뷔 이후, 30여장의 정규 앨범과 9개의 넘버원 히트곡, 27개의 Top 10 히트곡을 우리에게 선보인 가장 창조적인 아티스트 중의 하나인 엘튼 존! 그의 단짝인 야마하 그랜드 피아노, 그리고 이 피아노맨과 길게는 30여년을 같이 연주해온 8명의 밴드가 함께 이번 공연을 장식해서 많은 한국 팬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1970년대 ‘Your Song’이란 히트곡으로 차트를 석권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피아노 연주와 강렬한 무대 매너, 그리고 화려한 의상 등으로 단숨에 스타덤에 오른 그는 70년대를 통틀어 가장 성공적인 아티스트로 대서양 양쪽의 대륙에서 자리매김했다. 80년대 들어와서도 Sacrifice, Nikita, Candle In the Wind 등의 주옥같은 히트곡들을 발표하면서, 여전히 꺼지지 않는 창작열을 불태우고 있는 그는 이미 여러 차례의 그래미상 및 아카데미 영화음악상, MTV, Billboard 뮤직 어워드의 수상과 후보의 영예를 누렸으며, Rock 음악에 끼친 지대한 영향력을 인정받아 90년대 초에는 미국의 Rock & Roll Hall of Fame (명예의 전당)에까지 그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또한 이번 엘튼 존의 내한은 영국 귀족의 한국 방문이라 이채로웠다. 그는 1997년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 그 동안의 자선활동과 오랫동안 뮤지션으로서의 창조적 활동을 인정받아 영국인 최대의 영예인 기사작위를 수여 받기도 하였다.
이번 공연은 스탭과 밴드를 포함한 30여명의 출연단과 약 25톤의 무대 공연장비가 공수되며, 이 장비 중에는 그가 어디를 가든 가지고 다니는 피아노 2대(백업 포함)가 포함되어 있다. 이미 지난해 여름부터 스케줄링에 들어간 이번 아시아 순회 투어는 9월 12일 홍콩에서의 2회 공연을 시작으로 대만, 한국, 중국(상해) 공연으로 이어진다.
*엘튼존 공연 이모저모
영국 출신의 세계적 팝스타 엘튼 존(57)의 첫 내한 공연이 2004년9월17일 저녁 서울 잠실 주경기장에서 궂은 날씨 속에서도 화려하게 펼쳐졌다. 공연 직전인 오후 8시께 가랑비가 내려 공연을 보러 온 3만여 관객들은 마음을 졸이며 그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오후 8시 20분께 엘튼 존은 밴드 멤버들과 함께 검은색 턱시도 차림에 빨강색 셔츠 차림으로 무대에 올랐다. 그랜드 피아노 앞에 앉아 첫곡 `Bitch is back'를 부른 그는 일어나서 관객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감사합니다. 오늘 즐거운 시간을 함께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라고 인사했다.
그는 세 번째 곡 `Levon'을 부를 때는 마지막 부분에서 오랜 음악 동료인 드러머 나이젤 올슨을 비롯한 8명의 밴드 멤버들과 호흡을 과시하며 열정적인 피아노 연주 실력을 선사했다. 이후 `Philadelphia Freedom' `Rocket Man' 등의 레퍼토리가 이어졌고 공연 직전 내리다가 그쳤던 비는 다시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흥겨운 연주가 돋보였던 `Tiny Dancer'를 부르던 중에는 비가 갑자기 쏟아지기도 했다.
그러나 관객석은 동요하지 않았고 엘튼 존과 밴드 역시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노래와 연주에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그의 `단짝'인 야마하 그랜드피아노를 연주하며 `Sorry Seems To Be The Hardest Word' 등을 부를 때는 3만여 명의 관객이 환호성을 절로 지르며 공연장을 감동의 물결로 채웠다.
엘튼 존은 궂은 날씨에도 자리를 뜨지 않고 열광해 준 한국팬들에게 “공연에 와 주셔서 감사합나다. 여러분들은 가장 훌륭한 관객입니다. 가능하면 빨리 다시 한국에서 공연을 하고 싶습니다”라며 감사를 표했다.
*첫 내한 공연 전 엘튼 존과의 인터뷰
공연이 있기 전 엘튼 존은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팬들을 보게 되어 기대가 크다” “난 멜로디 인간… 音이 절로 쏟아져” "전세계 팬들의 사랑은 과분한 행운이며 무대위에선 한번도 피곤한 적 없어 한국서도 특별한 것 보여 드릴게요" 고 했다.
-------------------------------------------------------------------------- 팝 음악의 살아있는 전설 엘튼 존(57)이 9월 17일 오후 8시 잠실 올림픽주경기장에서 생애 첫 한국 무대에 오른다. 엘비스 프레슬리, 비틀스와 같은 시대에 활동하며 1970년대 최고의 팝 스타였던 그는 근년 들어 ‘라이온 킹’과 ‘아이다’ 같은 영화음악·뮤지컬 음악으로 창작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현재 그는 2005년 3월 영국에서 막 올릴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의 음악작업도 하고 있다. 엘튼 존의 서정적이고 때로 파워 넘치는 피아노 연주는 기타가 장악하던 로큰롤 무대에서 피아노를 전면에 세운 전환점이었다. 그는 ‘유어 송(Your Song)’, ‘소리 심스 투 비 더 하디스트 워드(Sorrry Seems To Be The Hardest Word)’ 같은 발라드로 전 세계 팬들을 사로잡았다. 한국 언론과 인터뷰(이메일)는 이번이 처음이다.
Q : 첫 음반 ‘엠프티 스카이(Empty Sky)’가 나온 지 35년이 지났습니다.
첫 한국 공연을 갖는 소감을 말씀해 주세요.
A : “내 음악적 성공은 행운이며 과분합니다. 지금도 매일 저녁 공연에 감사하고 축복으로 여깁니다. 왜 그동안 한국에 못 갔는지 모르겠어요. 아마도 매니저가 게으른 탓일 겁니다. 이번에 한국 여행에 기대가 큽니다. 처음 가보는 나라이고 첫 공연이며,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팬들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Q : 그간 작업을 보면 음악에 대한 욕구가 끝없이 확장해 온 것 같습니다.
그 에너지와 영감은 어디서 오나요?
A : “어렸을 적 클래식을 공부한 것이 음악을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나는 늘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시를 쓰고 싶습니다. 음악은 내 생각을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이에요. 나는 예술과 음악과 그림을 사랑합니다. 내 음악은 거의 모든 곡이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Q : 현재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의 음악을 만들고 있다는데 뮤지컬에서 발견한
매력은 무엇입니까?
A : “‘빌리 엘리어트’는 한 소년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이루기 위해 장애를 극복하는 놀라운 이야기를 담은 훌륭한 작품입니다. 나는 록밴드 ‘후(The Who)’의 피트 타운센드가 그들의 뮤지컬 ‘토미’를 만들었을 때 뮤지컬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훌륭한 뮤지컬 한 편이 안무와 음악, 다양한 무대로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전할 수 있는지에 탄복했습니다.”
Q : 공연에서 화려한 의상과 유쾌한 연출로 이름났는데요, 그것에 공을 들이는
이유가 있나요?
A : “나는 무대 위의 연예인(Performer)이 관객에게 줄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을 주고 싶어요. 나는 많은 무대 의상과 특수 장치를 갖고 있지요. 70년대 무대엔 요즘처럼 특수 효과나 다양한 컴퓨터 조명이 없었고 오직 가수와 피아노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나는 팬들에게 뭔가 특별한 것을 보여주고 싶고, 그래서 팬들이 집에 돌아가 그 이야기를 하길 바라요. 서울 무대에도 뭔가 특별한 게 있어요. 다들 오셔서 직접 보세요.”
Q : 한국인들은 ‘소리 심스 투 비 더 하디스트 워드’를 가장 많이 알고, 그 노래를
제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이 노래는 사실 비교적 덜 히트한 곡인데도 말이죠.
A : “이상하지만 그건 사실입니다. 미국에서는 내 노래 중 ‘타이니 댄서(Tiny Dancer)’가 유난히 인기 있고, 영국에선 ‘새크리파이스(Sacrifice)’가 가장 사랑받는 발라드입니다. ‘소리 심스…’는 영국과 유럽에서 잠깐 인기 있었습니다. 아마도 어떤 노래가 어떤 나라 사람들만의 정서를 건드리는 것 같습니다.”
Q : 흔히 당신을 ‘70년대의 가장 위대한 팝스타’로 부릅니다. 그 표현이 합당합니까?
A : “70년대는 음악인들 모두에게 위대한 시대였습니다. 나의 귀중한 친구 존 레논이 있었고, 에릭 클랩튼, 마크 볼란(영국 로커), 프레디 머큐리(밴드 ‘퀸’의 보컬)가 있었죠. 그들과 같은 시기에 음악을 했다는 것은 영광입니다. 음악적으로 가락과 창작성도 지금과 많이 달랐습니다. 70년대가 없었다면 지금의 음악들도 없었을 겁니다.”
Q : 수많은 한국의 30~40대들이 그때 당신의 음악을 들었습니다. 그들에게 하고픈
말이 있습니까?
A : “우선 감사합니다. 그들의 사랑 없이는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겁니다.”
Q : 당신은 피아노를 대중음악 무대 전면에 내세워 성공한 사람으로도 불립니다.
피아노란 악기에 대해 말씀해주시죠.
A : “나는 ‘멜로디 인간(Melody Person)’입니다. 그냥 앉으면 작곡을 할 수 있습니다. 허풍 떤다고 하겠지만, ‘소리 심스…’나 ‘유어 송’ 같은 곡은 매일이라도 쓸 수 있습니다. 나는 피아니스트이기 때문에, 빠른 템포 곡을 쓰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Q : 당신의 음악은 때로 흥을 돋우거나 화를 가라앉히고 슬픔을 위로합니다. 그런
의도를 갖고 작곡을 합니까?
A : “그렇다면 정말 기쁜 일입니다. 모든 아티스트들이 자신의 음악이 그렇게 되길 바랄 것입니다.”
Q :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엔 무대에서 지치기도 쉬울 것 같은데요. 어떻습니까?
A : “이상하게도 무대 위에서는 한번도 피곤한 적이 없습니다. 그건 습관과 같은 것입니다.”
Q : 수많은 뮤지션들이 지금도 나타났다 사라집니다. 평생 음악을 하고픈 사람들
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A : “자신만의 색깔, 자신만의 이야기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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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 노래 처음 들었을때 생생히 기억합니다. 정확히 제가 중학교3학년때 입니다. 당시 mbc 무슨 일회성 드라마중 "두권의 일기"란 게 있었어요.두가지 에피소드가 있는 내용인데, 그 중 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최진실 이었습니다. 한참 풋풋하게 인기를 얻기 시작할 때였지요. 그때 상대역이 홍학표? 였나 그랬는데 암튼 둘이 이별하는 장면서 최진실이 혼자 울면서 걸어가는데 이곡이 배경음악으로 나왔어요. 당시 한참 감수성이 예민하던 저는 처음 듣는 순간 확~악 빠지게 되었습니다. 한동안 이 노래 매일 몇십번씩 듣곤 했어요. 참 아름다운 곡입니다. p.s. 엘튼 존의 인터뷰 내용,, 어쩜 마이클과 생각하는게 저렇게 비슷할까요?
와 깜놀 그걸 다 기억하세요?? 맞는 것같네요. 정말 아직도 가슴에 남는 드라마였어요.
두 분다... 저와 비슷한 연배이신듯 하네요 ㅎㅎ
두권의 일기, 기억합니다....
채시라, 최진실 주연이었다는 것 까진 기억하는데,
그의 상대역들이나 내용은 가물가물한데,
스파님 정말 대단하셔요....
비결이 뭽니껴... ㅎㅎㅎㅎ
밖에 약간 찬기운의 바람이 부네요...노래가 가을느낌이네요..
맞아요... 가을과 특히 잘어울리는 곡인 것 같아요...^^
블루가 부른 버젼보다 욕쉬 엘튼쟌~의 원곡이 탁월하죠잉....
저 학창시절때 너무 좋아한 노래....아~~옛날이여....
아.... 정말.... 옛날이여~~~를 외치치 않을 수가 없네요...ㅎㅎ
학창시절, 영어쌤을 짝사랑한 나머지,
순전히 영어쌤께 잘보일려고 밤새워 영어단어 외우고
영어공부의 일환으로 팝송 가사까지 외우며 해석하고 다녔던 기억이...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