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0725 우뻭카(평온) 두 가지의 차이 등. 연습 70-5~11 (위뿔라냐니 식카와띠님)
230725 연습 70-5~11 우뻭카 두 가지의 차이 등
연습문제 70번
70-5. 멧따는 어떤 성질이 있습니까? 대상은 무엇입니까?
멧따(자애)는 어떤 성품이 있고 무엇을 대상으로 합니까? 자애의 본질(성품)은 아도사(성내지 않음)입니다. 아도사는 넓은 범위이고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중생들을 잘 되게 하고 싶은 마음, 친절한 마음,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자애입니다. 중생들을 잘 되게 하고 싶은 마음, 친절한 마음, 사랑하는 마음이 자애입니다. 자애는 작은 부분이고 큰 범위로 아도사가 있습니다. 자애(자애)라는 마음부수는 없습니다.
아비담마는 본질(마음, 마음부수, 물질, 열반)에 관한 것이니까, 마음부수 52개 중에서 자애의 본질은 ‘아도사’ 마음부수를 골라야 됩니다. 하지만 모든 아도사가 자애는 아닙니다. 아도사 안에 있는 친절하고 중생을 잘 되게 해주고 싶고 행복하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자애입니다.
예를 들어서 성지순례를 간다거나 법문을 들을 때 성냄이 없습니다. 그러면 이때 아도사의 마음입니다. 성내고 있지 않습니다. 이 때에 있는 아도사는 자애가 아닙니다. 이 순간의 마음은 법을 대상으로 하고 있고 법문 대상으로 하고 있고, 만약에 성지순례를 갔다면 성지(형색)를 보고 있겠죠. 이때 있는 성내지 않는 마음은 자애가 아닙니다.
자애라는 마음부수는 친절하고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중생이라는 관념을 대상으로 할 때입니다. 중생을 대상으로 하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성지 순례 가서 탑을 대상으로 하거나, 지금처럼 논장에 대한 법문을 듣고 있을 때는, 중생이라는 관념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상태가 아니죠. 그러니까 이 순간은 ‘아도사’이지만 ‘자애’는 아닙니다.
아주 정직하고 바르게 중생의 이익을 바라는 마음이 자애입니다. 정직하고 바르게 대가를 바라지 않고 중생의 이익을 원하는 마음이 자애입니다. 아들을 사랑하고 아내를 사랑하고 친척들을 사랑하고 그리고 정(情)이라고 하죠. 우리나라 말로는 정이라고 하는 것은 가짜 자애입니다.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이건 진정한 자애가 아니다. 자애의 유사품입니다. 이런 가족과 친척들에 대한 자애는 ‘딴하뻬마’라고 합니다. 자애가 아니라 ‘집착에서 오는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딴하뻬마는 로바(탐욕)입니다. 자애(선한마음)가 아니라 불선한 마음입니다. 아비담마 측면에서 보면 그렇습니다. 딴하 뻬마가 있어야 가족이 이루어지겠죠.
답은 이렇게 쓰면 됩니다. ‘자애는 중생의 이익을 바라고 중생들이 잘 되길 바라는 성품이고 아도사이다. 중생이라는 관념을 대상으로 한다.’
70-6. 까루나(연민)는 어떤 성질이 있습니까? 대상은 무엇입니까?
연민은 고통 받는 중생을 보고 불편해합니다.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마음이 너무 불편하면 도사입니다. 도사로는 넘어가지 않고, 마음이 불편하긴 하지만 몹시 불편하지는 않은 상태가 연민입니다. 고통 받는 중생을 보고 내 마음이 가만히 있지 못하는 게 연민입니다. 그래서 도와주려고 하죠. 도와주려고 하지 않더라도 일단 불편하면 연민이 있는 겁니다.
고통 받는 중생을 보고 내 마음이 불편하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으면 연민이 있는 상태가 아니고, 내가 도움을 주지 못하더라도 내 마음이 편치 않으면 연민입니다. 이를 과도하게 지나쳐 내가 화가 나고 눈물이 나면 성냄입니다. 그렇게까지 되지 않고 불편하기만 한 상태가 연민입니다.
그럼 연민의 대상은? 무엇을 보고 연민을 느끼는가? ‘고통받는 중생이라는 관념’을 보고 내 마음이 불편한 상태가 연민입니다. 요즘은 별로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만, 초상집에서 통곡하는 것은 도사(성냄)죠. 초상집에서는 무엇을 느껴야 되는가 하면 상웨가(경각심)를 느껴야 되죠. 그리고 가족들에 대해서는 연민을 느껴야죠. 여담으로 옛날에는 통곡을 잘해야 됐습니다. 양반집에서 며느리를 뽑을 때 통곡 하는 것을 들어보고 뽑았다고 말합니다. 통곡 즉 슬픈 연기를 잘해야 했다는 거죠. 아비담마의 측면에서 보면 예전부터 내려오는 전통들이 인간들을 모두 바르게 이끌고 간다고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무엇이든 숙고해보고 바른 것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합니다.
7. 무디따는 어떤 성질이 있습니까? 대상은 무엇입니까?
무디따는 함께 기뻐하는 마음이죠. 행복해하는 중생이라는 관념을 대상으로 보고 나도 행복합니다. 나도 기쁩니다. 그 사람이 행복해하는 것을 보고 나도 같이 기쁜 건데, 대상은 ‘행복해 하는 중생이라는 관념’입니다. 중생이라는 관념. 우리는 관념 속에서 사는 거죠. 우리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행복해하는 중생(존재) 그리고 고통 받는 중생(존재) 이런 존재들 사이에서 살지 않습니까? 우리는 관념 안에서 삽니다. 관념 안에서 살고 실재(빠라맛타)가 뭔지 모르고 삽니다. 행복해하는 중생을 보고 나도 같이 기뻐하는 것, 나도 함께 즐거운 상태가 무디따입니다.
70-8. 우뻭카(평온)는 어떤 성질이 있습니까? 대상은 무엇입니까?
우뻭카는 중생이라는 관념을 대상으로 보고, 그 상황에 대해서 평정한 마음입니다. 내 마음이 자애도 아니고 연민도 아니고 무디따도 아니고 그리고 성냄도 아닌, 평정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우뻭카라고 합니다. 자애가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연민하는 것도 아니고 기쁜 것도 아닌 그냥 내 마음이 평온한 상태가 우뻭카입니다.
이것의 본질은 따뜨라맛잣땃따(중립), 균형을 유지하는, 밸런스를 유지하는 마음부수인 거죠.
70-9. 자애와 우뻭카의 본질을 쓰세요.
네 가지(자애 연민 무디따 우뻭카)를 왜 ‘브라흐마위하라’라고 합니까?
이 네 가지 중에 뭔가 하나로 지내면, 네 가지 모두가 아니더라도 네 가지 중에 하나로만 지내도 ‘브라흐마위하라’라고 합니다. 범천들의 마음가짐, 범천들이 이 마음으로 범천계에 살기 때문에 이것을 ‘브라흐마위하라’라고 합니다. 부모는 이 4가지 마음으로 자식을 보살핍니다. 그래서 부모를 모시는 것을 범천을 모시는 것과 같은 공덕이 있다고 합니다. 모든 부모가 다 그렇진 않겠지만 대부분의 부모들이 이런 마음이 있어야 자식을 키우지 이런 마음 없이 어떻게 자식을 키우겠습니까? 이 4가지 고귀한 범천의 마음을 부모의 마음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연민은 고통 받는 중생에게 느끼는 연민심이고, 무디따는 행복해하는 중생을 보고 나도 같이 기쁜 겁니다. 내 마음이 같이 기쁜 것, 저 사람이 복을 지으면 나도 같이 기쁜 겁니다. 그리고 우뻭카는 행복해하는 존재도 아니고 불행한 존재도 아닌 중간 존재에게 느끼는 마음이라고 나와 있는데, 제가 보기에는 그런 것 같진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 우뻭카는 행복해하는 존재를 보고도 내 마음이 기쁨없이 평정하고, 자기의 업의 결과이니까, 고통 받는 존재를 보고도 연민없이 평정한 거죠. 업의 결과이니까. 아주 기뻐하는 존재를 보고도 평정함, 업의 결과이니까, 이런 마음이 우뻭카입니다. 행복하고 고통 받는 존재가 아닌 중간 존재를 보고 느끼는 마음이 우뻭카가 아니라, 어떤 상태의 존재를 보더라도 내 마음이 기쁘지도 연민하지도 않고 평정한 상태가 우뻭카입니다.
이 브라마흐마위하라의 우뻭카와 위빳사나 수행에서의 우뻭카, 제일 마지막 지혜 단계인 ‘상카루뻭카냐나’의 우뻭카는 다른 겁니다. 여기 브라마흐마위하라에서의 우뻭카는 중생이라는 관념을 대상으로 합니다. 우리는 이번 인간 생 뿐만 아니라, 과거 윤회도 미래 생도 내내 관념의 세상에 살거니까. 이 4가지 고귀한 마음을 잘 키워야합니다.
이 브라흐마위하에서의 우뻭카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쓸 수 있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중생이라는 관념을 대상으로 하는 우뻭카이고, 위빳사나 지혜 단계에서 제일 마지막에 도과를 얻기 전에 있는 지혜 단계에 있는 ‘상카루뻭카’는 중생을 대상으로 하지 않습니다. 중생이라는 대상을 보고 내 마음이 평온한 상태가 아닙니다. 상카루뻭카의 우뻭카는 중생을 보고 있지 않습니다. ‘나’라는 신수심(身受心. 빠라맛타 담마)을 대상으로 보고 우뻭카가 일어나는 겁니다. 변화무쌍해서 고통스러운 불안한 ‘나(오온)’를 보며 우뻭카 상태가 유지된다는 거죠. 대상에 ‘나’는 없고 오온만 있는 거죠. 그 오온이 계속 생멸하는데 생멸을 보고 내 마음이 평온합니다. 이게 상카루뻭카의 우뻭카입니다.
브라흐마위하라의 우뻭카는 우리가 보는 세상,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보는 중생,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중생이라는 관념들을 보고, 내 마음이 계속 평온한 상태입니다. 업과 업의 결과를 알기 때문에 평온이 유지되는 상태, 그러니까 이게 브라흐마위하라의 우뻭카이고, 상카루뻭카의 우뻭카의 대상은 중생이라는 관념이 아니라(우리 범부들이 사는 세상이 아니라) 눈을 감고 보는 위빳사나의 대상입니다.
위빳사나의 대상은 눈뜨고 행선하면서도 볼 수 있습니다. 밥을 먹으면서도 볼 수 있고 일상생활 하면서 눈 뜨고도 볼 수 있는데, 위빳사나 수행자들은 밖을 보지 않죠. 자기만 봅니다. 밖에 누가 쓰러져서 발작을 해도 돌아보지 않습니다. ‘나’만 보거든요. 그래서 위빳사나를 하는 사람들이 매우 이기적이라고 볼 수 있지만, 이 사람들은 관념을 보지 않고 실재를 보며 죽지 않는 길을 열심히 달리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3 가지 우뻭카가 다릅니다.
1. 상카루뻭카의 우뻭카가 있고
2. 브라흐마 위하라의 우뻭카있고,
3. 10가지 바라밀의 ‘우뻭카 바라밀’이 또 다르죠.
3. 10가지 바라밀, 도와 과를 얻기 위해서 채워야 되는 바라밀이 10가지가 있는데, 그 10가지 바라밀에 속하는 ‘우뻭카바라밀’은 내가 선업이든 불선업이든 업을 짓고 그것의 결과에 대해서, 내 마음이 평정을 유지하는 우뻭카입니다. 일을 하는 데 있어서 계속 평정심을 유지하는 우뻭카입니다. 즉, 우뻭카 바라밀인 거죠. 좋은 결과에도 좋지 않은 결과에도 평정을 유지하는 우뻭카이고, 브라흐마위하라의 우뻭카는 희노애락에 흔들리는 중생이라는 관념을 보고 평정을 유지하는 것이죠. 상카루뻭카의 우뻭카는 대상부터 다르죠. 대상이 위빳사나의 대상을 보고 우뻭카가 계속 유지되는 겁니다.
책에서 읽은 내용입니다. 어떤 수행자가 수행하러 호숫가 바위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아 있는데 호수에 작은 벌레들이 물에 빠져 허우적대다 죽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수행자는 벌레들이 끊임없이 물에 빠져 죽는 것을 보며 너무 불쌍했습니다. 그래서 물속에 들어가 계속 건져주느라고 수행을 할 수 없었습니다. 수행자는 자신의 도과를 정진하기 위해 앉았는데 이 벌레들을 구해주느라고 사마디를 얻지 못하는 거죠. 일어나서 물에 빠져 죽는 벌레들을 계속 건졌습니다. 이 수행자는 위빳사나를 하고 있는 게 아니라 중생이라는 관념을 보고 연민을 닦고 있는 거죠. 도와 과를 얻으려면 위빳사나를 해야 하는데 브라흐마위하라를 하고 있는 겁니다. 이 수행자가 브라흐마위하라의 연민을 일으켜서 고통 받는 중생을 구해준 거죠. 이러면 범천의 마음입니다. 하지만 윤회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거죠. 번뇌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연민을 실천하는 행동으로는 번뇌가 소멸되지 않습니다. 번뇌가 소멸되려면, 윤회에서 벗어나려면, 도와 과를 얻으려면, 연민히 여기는 마음을 사띠해야 하겠죠. 그 대상을 보고 “봄, 봄, 봄”이라고 사띠해야 하겠죠. 그래야 팔정도가 닦아집니다. 삼마사마디도 생기고, 삼마와야마도 생기고, 삼마사띠도 생기고, 삼마딧티, 위빳사나 지혜도 생기겠죠.
이 호숫가에 앉은 수행자는 대상부터 잘못 보고 있습니다. 위빳사를 하기 위한 재산을 모으는 범천의 마음을 닦는다고 생각하면 바르게 하고 있습니다.
70-10. 그 네 가지를 왜 브라흐마위하라라고 합니까?
범천계 범천들이 사는 마음이기 때문에 브라흐마위하라라고 합니다.
70-11. 무엇을 에까 산냐 라고 합니까?
에까 산냐는 하나의 기억함입니다. 음식에 대한 혐오를 말하죠. 음식에 대해 혐오하는 기억함, 음식이 혐오스럽다고 떠올리는 겁니다. 보통 대부분의 사람들이 음식에 대해서 탐착합니다. 음식 좋아하죠. 맛에 대한 집착인데, 이것은 아나함이 돼야 사라집니다. 난다말라비왐사 사야도가 ‘맛에 대한 집착(라사딴하)’에 대해서 법문을 하신 책이 있습니다. 그렇게 집착하는데 이 맛에 대해서 혐오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 그 맛에 대한 혐오, 음식에 대한 혐오를 일으키는 것이 에까 산냐입니다.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회향하겠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공덕이 우리를 번뇌의 소멸로 이끌기를.
이러한 우리의 공덕을 모든 존재들에게 회향합니다.
모든 존재들이 행복하기를!
사-두 사-두 사-두
https://cafe.naver.com/dhammadipakorea/535
일부용어 수정.
첫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