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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역사 01월14일
1987년 1월 14일
서울대생 박종철군 고문사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청 인권센터)에서
열린 고 박종철 열사 25주기 추도식에서 87년 당시 영등포교도소에 복역하던 이부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이 고인의 고문 치사 사건 축소은폐 시도를
제보하고, 외부로 알리는데 결정적인 역할
을 했던 당시 안유 보안계장(왼쪽)과 한재
동 교도관(오른쪽)을 소개하고 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1987년1월14일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대한민국 경찰 수사관들이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 박종철을 심문하던 중
물고문으로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이다.
이사건을 계기로 성공회 서울 주교좌대성당
(대한 성공회 서울교구,주임사제:이한우 바우로
신부)에서 6월 항쟁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6월 항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고 평가받는다
▶2011년튀니지 대통령,
민주화시위 피해 사우디로 도피
실각 하루전인 2011년 1월 13일 방송에서
시위자제 대국민연설 중인 벤 알리 튀니지 대통령
▶2002년신승남 검찰총장 사퇴
사퇴의사를 밝힌 신승남 검찰총장이
평상시와 같이 가벼운 미소를 띈 채
대검 청사로 출근하고 있다.
▶2000년첫 영장류 복제 원숭이
‘테트라(Tetra)’ 탄생, 과학전문지 사이언스에 발표
복제 원숭이 테트라.
미국 오리건 영장류연구센터와 오리건 건강과학대학 공동연구팀은 2000년 1월 14일 과학전문지 사이언스에 배아 분리 기술을 이용한 ‘테트라(Tetra)’ 라는 이름의 암컷 원숭이를 복제하는 데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이들 연구팀이 이용한 배아 분리 기술은 1996년 영국 로슬린 연구소가 탄생시킨 복제양 돌리의 체세포 복제와는 다른 기술이었다. 제럴드 새튼 교수팀은 암-수 원숭이의 난자와 정자를 이용, 인공수정란을 만든 뒤 배아가 8개의 세포로 분열됐을 때 이를 4개로 쪼개 각각의 배아로 만들었다. 일란성쌍둥이가 만들어지는 것과 비슷한 원리로, 테트라는 수정란을 넷으로 쪼갠 뒤 각각 다른 네 마리의 암컷 원숭이에게 착상시켜 길러낸 것 중 유일하게 성공한 원숭이이다.
테트라의 탄생은 인간과 가까운 영장류에 대한 복제시도라는 점에서 윤리적 논란을 일으켰다. 돌리 양을 복제한 로슬린 연구소의 이언 윌머트 박사가 인간 배아 복제 실험에 착수하겠다고 밝히는 등 세계 곳곳에서 인간 복제 실험에 대한 논란이 확대돼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2000년재일동포작가 현월(玄月),
일본 아쿠타가와상(芥川賞) 수상자로 선정
아쿠타가와상 수상이 발표된 2000년 1월 14일, 현월(가운데)씨가 오사카의 한 한국식 선술집에서
축하를 받고 있다.
▶1997년대만, 미국에서 도입한 패트리어트 미사일 실전배치
▶1996년방송통신위성 `무궁화2호`,
미국 케이프커내버럴 공군기지에서 발사
발사준비를 하고 있는 무궁화2호.
▶1996년삼파이오,
포르투갈 대통령에 당선
조르제 삼파이오 포르투갈 대통령.
▶1984년부산 대아관광호텔 화재
(38명 사망, 23명 중경상)
▶1983년한국, 비행정보구역 일본-
중공기 통과 허용. 일본, 미국에
군사기술 제공 결정
▶1981년단국대, 강원도 영월에서
고구려 왕검성 발견
▶1980년유엔특별총회,
아프간주둔 소련군 철수결의안 가결
▶1978년수학자 쿠르트 괴델 사망
▶1978년영화배우 최은희
홍콩서 북한에 납치
합작영화 ‘양귀비’의 출연교섭을 위해 1978년 1월 11일 홍콩에 갔던 여배우 최은희가 1978년 1월 14일 현지서 납치돼 북한으로 보내졌다.
홍콩과 국내 수사기관은 북한지령을 받은 홍콩 거주 이상희 여인과 이 여인의 사주를 받은 교포 김규화 및 중국인 왕진일 등의 음모에 의한 납치로 추정, 김규화를 반공법과 여권법 위반혐의로 구속하고 실형을 선고했다.
최은희의 납북사실은 후에 알려졌는데 그는 화물선을 타고 북한에 보내진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도착한 남포항에는 김정일이 직접 마중나온 것으로 알려져 그에 대한 김정일의 관심을 엿볼 수 있었다. 남편 신상옥씨도 같은해 7월 19일 홍콩에서 납북됐다. 영화광으로 알려진 김정일은 두 사람에게 낙후된 북한 영화를 활성화 해줄것을 요구했으며, 두 사람은 ‘탈출기’, ‘소금’ 등 7편의 영화를 제작하며 왕성한 활동을 펼쳤고, 최은희는 1985년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소금’으로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신상옥-최은희 부부가 1989년 국내 첫 공식 기자회견을 갖고 ‘자신들은 김정일의 지령에 의해 강제 납치됐다’고 밝혔다.
공산권의 각종 영화제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자 김정일은 두 사람에게 특별히 동구권 여행을 허락했고, 두 사람은 납북 8년 2개월 만인 1986년 3월 13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극적으로 서방세계로 탈출했다.
신상옥-최은희 부부가 1989년 국내 첫
공식 기자회견을 갖고 ‘자신들은 김정일의
지령에 의해 강제 납치됐다’고 밝혔다.
▶1977년포항제철 단일규모로
세계최대 분괴공장 착공
▶1975년정부,
석가탄신일-어린이날을 공휴일로 제정
▶1974년긴급조치 3호 선포
(12월 27일 해제)
▶1972년덴마크의 왕
프레데리크 9세 사망
▶1967년해군함정과 여객선 한일호 충돌
1967년 1월 19일, 침몰된 여객선 한일호가
가덕도 기슭에 예인되어 흰 선체를 드러냈다.
▶1966년베트남 쿠데타(6차) 실패로
웬찬띠 장군 해외도주
▶1963년드골 프랑스 대통령,
NATO협정 불참가 및 영국의 EEC 가맹거부를 표명.
▶1962년알제리의 OAS(비밀군조직) 조직적 테러 개시
▶1960년흐루시초프,
소련 최고회의서 병력 1/3 삭감 제의
▶1960년농림부,
농촌고리채정리요강 작성
▶1959년북한 노농적위대 창설
▶1957년영화배우 험프리 보가트 사망
▶1954년마릴린 먼로,
야구선수 조 디마지오와 결혼
조지프 폴 "조" 디마지오(Joseph Paul "Joe" DiMaggio, 1914년 9월 25일 ~ 1999년 3월 8일)은 전 메이저 리그 야구 뉴욕 양키스의 선수이다.
메이저 리그 야구 기록인 56 경기 연속 안타와 영화 배우 마릴린 먼로의 연인으로 유명하다.
39,40년 각각 타율.381과 .350으로 2년 연속 리그 타격왕에 올라서며 루 게릭이 은퇴한 후 팀내 최고의 공격력을 자랑하였고, 특히, 39년에는 자신의 첫 MVP수상과 함께 신시네티 레즈와의 월드시리즈에서 우승을 거머쥐었다.
1941년 5월 15일부터 시작하여 7월 17일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의 시합을 마지막으로 56경기 연속안타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달성하였다.
마를린 먼로의 세번의 결혼 중 제일 사람들의 입에 많이 오르락내리락한 것은 위대한 야구선수 조 디마지오와의 두번째 결혼이다. 겨우 9개월간 지속된 짧은 결혼생활이었는데 결혼 자체보다 마릴린 먼로가 외롭게 죽은 후 평생 동안 그녀의 무덤에 장미꽃을 바쳤다는 조 디마지오의 로맨틱한 행동이 더 이야기 거리가 되었다.
‘세기의 결혼’으로 대서특필된 먼로와 디마지오.
마릴린 먼로와 조 디마지오가 운명적인 조우를 하게 된 사연은 이렇다.
당시 조 디마지오는 부상으로 그간 선수로 활약했던 Yankee Clipper(New York Yankees의 전신)에서 은퇴한 상태였다. 한 시범경기에 게스트 자격으로 출전했는데 마릴린 먼로가 그 경기에 초대되어 다른 선수들과 화보촬영 하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한 눈에 마릴린 먼로에게 반한 조 디마지오는 사람들을 통해서 데이트 신청을 했는데 첫 데이트에 마릴린 먼로가 2시간이나 늦게 나타났다. 아무리 잘 나가는 여배우였지만 당대 최고의 야구선수인 조 디마지오를 2시간 씩이나 바람을 맞췄으니 분위기가 영 어색했다. 하지만 마침 데이트 장소인 식당 안에 있던 한 남자 배우가 두 사람이 있던 테이블로 와서 분위기를 돋궈준 탓에 무난하게 첫 데이트가 마무리 되었다. 마릴린 먼로는 사과도 할겸 자신이 직접 운전해서 조 디마지오를 집까지 바래다 주었다.
마릴린 먼로에게 온 정신을 뺏긴 조 디마지오는 첫 데이트 다음 날부터 매일 전화를 해서 '애프터'를 신청했지만 계속 거절당했다. 2주 동안 매일 전화했는데 거절당하자 조 디마지오는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그런데 얼마 후에 마릴린 먼로가 조 디마지오에게 먼저 전화를 해서 데이트를 하자고 했다. 그 이후 둘은 급속도로 가까워져서 1954년 1월에 결혼에 이르게 된다.
결혼식은 세간의 이목을 피해 샌프란시스코 시청의 작은 홀에서 친구 부부 1쌍만 참석한 가운데 간단하게 올려졌다. 주례는 판사가 섰고 결혼식은 약식으로 치러졌다. 비록 결혼식은 간단했지만 두 수퍼스타의 결혼을 취재하려는 미디어의 열기는 장난이 아니었다. 시청 청사 앞에는 수 백명의 기자들이 장사진을 치고 갓 결혼한 두 부부를 기다리고 있었다.
샌프란시스코 시청 청사에서 약식 결혼식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는 마릴린 먼로와 조 디마지오. 아이를 몇 명이나 낳을 것이냐는 질문에 마릴린 먼로는 최소한 6명은 낳겠다고 했다. 영화는 계속 찍겠지만 현모양처 노릇도 제대로 하고 싶다고 했던 그녀의 기대는 1년이 못가 깨져버렸다.
여러모로 대칭적인 캐릭터인 두 사람의 결혼은 완벽한 결합으로 비쳤다. 서로 상대방이 갖지 못한 것을 갖고 있기 때문에 상호보완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는 기대였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했다. 개성이 강한 두 사람이 융합되기에는 서로의 차이가 너무 컸다.
조 디마지오는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사람이었다. 그래서 집안에서 조용히 자신을 챙겨줄 수 있는 스타일의 아내를 원했다. 반면 마릴린 먼로는 자신이 영화배우로써 더 성공할 수 있도록 외조해주는 남편을 기대했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상대방의 일에 관심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조 디마지오에게는 야구가 인생의 전부였는데 마릴린 먼로는 스포츠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한편 조 디마지오는 영화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부족했다.
많이 알려진대로 두 사람의 파경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은 뉴욕에서 촬영 중이던 영화 '7년만의 외출'(the Seven Year Itch)이었다. 지하철 송풍구에서 올라온 바람이 마릴린 먼로의 하늘거리는 드레스를 날려올리고 그녀가 섹시한 모습으로 치마를 누르는 문제의 그 장면이었다.
문제의 장면을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보수적인 조 디마지오의 불편한 심경이 충분히 공감된다. 다음 날 모든 신문에 자기 아내의 치마가 들춰지는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실렸으니 그도 그럴만하다. 그 사진을 보면서 사람들이 수근댈 말이 뻔히 짐작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날 밤 둘은 집으로 가서 크게 싸웠고 이 싸움의 불씨는 좀처럼 꺼지지 않았다. 기분전환을 위해서 뉴욕을 떠나 캘리포니아로 갔지만 부부싸움은 계속 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조 디마지오가 분을 참지 못하고 손찌검을 하고만 것이다. 마릴린 먼로는 당장 이혼소송을 제기했고 조 디마지오와의 모든 연락을 끊어버렸다.
동료배우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아내의 치마가 올라가는 것을 뚫어지듯 보는 장면을 옆에서 응시하고 있었던 조 디마지오. 그날 밤 대판 부부싸움을 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조 디마지오는 마릴린 먼로의 마음을 돌리려고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마릴린 먼로가 그를 아예 상대해주지 않자 프랭크 시나트라와 같은 지인들에게 둘을 재결합시켜달라고 통사정을 했다. 하지만 한 번 돌아선 그녀의 마음은 그의 어떤 노력에도 돌이켜지지 않았다.
한편 조 디마지오와 헤어진 후 마릴린 먼로 또한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이 남자 저 남자의 품을 전전했고 케네디 형제와 동시에 정사를 벌인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뭇 남자들과 연애를 했지만 그녀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허전함은 달래지지 않았다.
방황하던 그녀의 마음이 안식처로 다시 찾은 곳은 조 디마지오였다. 순간의 실수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그녀를 사랑하던 조 디마지오에게 그녀의 완고하던 마음의 문도 다시 활짝 열렸다.
두 사람은 재결합을 공식화하고 함께 보내는 시간을 늘려갔다. 당시 두 사람이 데이트하는 장면을 목격했던 사람들은 주변을 전혀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서로에게 깊이 빠져있었다고 전한다.
재결합을 향해가던 두 사람의 사랑은 비극적인 결말을 맞게 된다. 1962년 8월 4일 마릴린 먼로가 자살을 한 것이다. 지금도 마릴린 먼로의 자살에 대해서는 타살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죽기 직전까지 조 디마지오와의 결합을 위해 들떠있던 그녀를 생각하면 전혀 근거가 없다고 부인하기 힘들다.
그녀가 죽은 뉴욕의 아파트 관리자들은 마땅히 연락할 곳이 없어서 조 디마지오에게 연락을 했다. 그는 모든 이들을 물리치고 혼자서 그녀의 장례를 준비했다. 장례식에는 아무도 부르지 않았다. 주변에서는 수퍼스타의 장례식이니만큼 최소한 영화사 관계자들과 동료 배우들만이라도 참석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그는 "당신들이 아니었다면 마릴린은 여전히 멀쩡히 살아있을 것이오"라며 일축했다.
뉴욕타임즈의 보도에 따르면 장례식이 끝나고 조 디마지오는 마릴린 먼로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하오.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하오"라고 몇 차례나 흐느꼈다고 한다.
두 사람과 관련된 이야기 중 사람들의 마음을 가장 뭉클하게 하는 대목은 조 디마지오가 죽기 직전까지 그녀의 무덤에 매주 두 번씩 장미꽃을 바쳤다는 것이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조 디마지오는 마릴린 먼로가 살해당했다고 굳게 믿었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이 좀더 이해심이 넓었다면 그녀와 이혼을 했을리도 없고, 이혼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녀를 죽이고자 했던 세력으로부터) 그녀를 보호할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남은 인생 동안 마릴린 먼로에 대한 죄책감과 그녀에 대한 그리움에 시달려야만 했다.
https://youtu.be/40OJMfjWV7k 1부
https://youtu.be/IpRCK8-sJoQ 2부
▶1953년티토. 유고 초대 대통령에 선출
▶1949년항공사관학교 창설
▶1943년2차대전 중 연합국 수뇌들
카사블랑카에서 회합, 독일에 무조건 항복 요구 성명
▶1938년일본의 정치가 호소카와 모리히로 출생
▶1935년자르지방,
인민투표로 독일복귀 결정
▶1934년진강에서 재중국독립단체대표회의
▶1920년스페인의 소설가
페레스 갈도스 사망
▶1912년프랑스, 포앙카레내각 성립
▶1908년소설가 이무영 출생
▶1904년영국의 사진가 세실 비턴 출생
▶1900년오페라 `토스카` 로마에서 초연
▶1896년미국 작가 도스패소스 출생
▶1875년알베르트 슈바이처 출생
▶1874년독일의 물리학자 조한 필립 라이스 사망
▶1850년프랑스의 소설가
피에르 로티 출생
▶1818년핀란드 역사 소설의 아버지 토펠리우스 출생
▶1753년영국의 철학자 조지 버클리 사망
▶1742년영국의 천문학자 핼리 사망
핼리 [Halley, Edmund, 1656.11.8~1742.1.14]
1742년 1월14일 영국 천문학자 에드먼드 핼리가 86세로 작고했다. 핼리가옥스퍼드 대학 천문학 교수로서, 그리고 만년에는 그리니치 천문대 대장으로서 이론과 관측에서 천문학에 일정한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이다. 예컨대지구에서 본 항성의 천구상 위치가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조금씩 변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고유운동’은 핼리가 처음 발견한 것이다. 그러나만일 그가 26세 때 출현한 대혜성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핼리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 운명의 1682년에 핼리는 하늘에 꼬리를 드리운 살별을 세심히 관찰한뒤, 그것이1531년과 1607년에 출현한 바 있는 혜성들과 같은 궤도를 돌고 있음을 확인했다. 그는 이 세 개의 혜성이 동일한 천체이며 태양 주위를 76년 주기로 돌고 있다고 결론 내리고, 1758년에도 이 혜성이 다시 나타나리라고 예언했다. 핼리는 물론 그 혜성의 회귀를 보지 못하고 죽었다.그러나 그의 예언은 정확히 들어맞아, 이 혜성은 1758년 크리스마스 밤에긴 꼬리를 하늘에 드리웠다. 이 꼬리별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핼리혜성이다. 핼리혜성은 태양 주위를 이심률 0.9673의 타원 궤도로 돈다. 도는 방향은 태양계 행성들과 반대고, 그 주기는 76.03년이다. 최근에는 1986년에나타났으니, 2062년에 다시 나타날 터이다.긴 꼬리를 드리우며 나타나는 혜성은 옛 사람들에게 흔히 흉조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혜성은 타원형 궤도로 태양 주위를 도는 얼음과 먼지의 뭉치일 뿐이다. 핼리혜성은 궤도 주기가 짧은 단기 혜성이지만, 개중에는 주기가 10만 년이 넘는 것도 있다. 혜성들은 가스와 먼지를 뿜어내기 때문에실제보다 크게 보일 뿐, 그 핵의 지름은 고작 수 킬로미터에 지나지 않는다.
▶1701년일본의 봉건영주 도쿠가와 미쓰쿠니
▶사망926년발해, 거란의 침입을 받고 멸망
▶877년고려 태조 왕건 출생
https://youtu.be/_8wKcWsNzj0
출처 네이버지식백과,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