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감영공원
강 문 석
감영監營은 조선시대 관찰사가 직무를 보던 관아를 이른다. 따라서 경상감영은 경상도를 관할하던 오늘날로 치자면 도청을 말한다. 4백여 년이나 경상감영이 대구에 자리 잡은 덕분에 대구가 경상도의 중심을 넘어 한강 이남에서 가장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도시가 될 수 있었다. 정치는 물론 경제와 행정 사법 교육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대구가 남부지방의 거점도시가 되는데는 경상감영이 있었던 것이다.
역 대합실에 들어선 대형 성탄트리가 여느 해처럼 한 해가 며칠 남지 않았다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열차를 기다리는 승객을 빼곤 사람들의 발길이 분주했다. 얼마 전 동대구역 환승센터가 준공되었다는 뉴스를 접하면서 기회가 되면 꼭 한 번 찾아보리라 생각했는데 S백화점이 문을 연 것 말고는 별반 달라진 게 없어 보였다. 몇 년 동안 공사가 계속되고 있는 역 광장은 여전히 펜스로 막혔고 공사용 대형장비가 쏟아내는 소음이 요란했다.
삭막한 도시에다 하늘은 을씨년스러운 겨울비까지 퍼붓고 있었다. 궂은 날씨지만 3시간 가까이나 역 대합실에 죽치고 있긴 싫었다. 역에 당도했을 때 열차가 막 떠났다면서 다음 열차편이 늦는 게 미안했던지 매표원은 철도파업을 둘러댔다. 순간 우려해 왔던 국운이 쇠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대한민국은 여기까지’라던 어느 논객의 뼈아픈 지적이 빈말이 아닌지도 모른다.
지금까진 삼사십 분만 기다리면 열차를 탈 수 있었다. 그랬던 열차를 2시간 40분이나 기다려야 하다니 기가 찼다. 혼자서 파닥거려봐야 스트레스만 더 쌓일 것 같아 대구근대역사관을 찾아보기로 했다. 전란의 상처가 아물지 않았던 1950년대 후반엔 고향 김천이 작은집이라면 대구는 늘 큰집에 비유되는 선망의 도시였다. 또래들은 대구로 상급학교를 진학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댔다.
중학 3년 동안 웅변을 한답시고 학업에 소홀했던 걸 두고두고 후회했는데 오히려 웅변대회 때문에 대구를 자주 들락거릴 수 있었으니 우물 안 개구리는 면했던 셈이다. 대구의 근대역사를 만난다면 추억여행이 될 수도 있을 거라는 기대감을 안고 중앙로역에서 지하철을 내려 대로에 올라섰다. 모두가 외지에서 온 사람들은 아닐 터인데 근대역사관 찾아가는 길을 묻는 행인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TV가 시도 때도 없이 보여주는 국회청문회 때문에 ‘모른다’에 중독된 사람들 같아 혼자서 실소를 머금었다. 안내판마저도 거리표시가 없어서 한참을 더 헤맸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오늘이 마침 월요일, 역사관은 정기휴관이었다. 굳게 닫힌 문틈으로 안내서나 도록이 있는가를 살폈지만 헛수고였다. 마침 대구근대역사관과 붙은 곳에 경상감영공원이 있었다. 애써 당도했으니 공원은 꿩 대신 닭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공원도 쉬는 날이어서 안내해줄 해설사가 없어 혼자서 빗속을 돌며 카메라에 공원의 풍경을 담기 시작했다. 선화당宣化堂을 마주하자 ‘관찰사 닿는 곳에 선화당’이란 속담이 떠올랐다. 관찰사가 가는 곳마다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호화롭게 지내는 것이 마치 자신의 집무실인 선화당에 있는 것과 같다는 뜻으로 가는 곳마다 호사를 누리는 것을 빗댄 말이었다.
우리 선조들이 공직생활을 어떻게 해왔는지는 따로 묻지 않아도 이런 속담들이 일러준다. 공원 터는 5천 평으로 드넓었다. 1910년부터 55년 동안 경상북도 청사가 있었고 도청이 옮겨간 후 1970년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대구의 중심에 위치하여 중앙공원이라 불리다가 1997년 지금의 경상감영공원으로 바뀌었다. 공원에는 관찰사가 집무를 보던 선화당과 관찰사 처소로 쓰이던 징청각澄淸閣이 남아 있다.
관찰사와 대구판관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세운 29기의 선정비도 있다. 이 외에도 옛 건물의 멋을 살린 정문과 분수 돌담 그리고 자갈이 깔린 산책로와 조국통일을 기원하는 ‘통일의 종’이 있었다.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달구벌대종이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제야의 종' 타종식을 이곳에서 거행했었다. 경상감영의 정문으로 건립된 관풍루觀風樓는 ‘감사가 누상樓上에서 세속을 살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대구에 감영이 설치되면서 정남쪽에 포정문布政門을 세우고 그 위에 관풍루를 만들었다. 관풍루는 1906년 대구 읍성이 헐리면서 달성공원으로 이전하였다. 누각의 원래 명칭은 폐문루閉文樓로 새벽 5시에 문을 열고 밤 10시에 문을 닫을 때 풍악을 울렸다. 측우기를 받치는 선화당 측우대는 1770년 제작되어 제작년대가 확인된 기상관측설비로선 유일한 것이다. 진품은 기상청으로 이관하고 현재는 모형으로 제작한 것만 남아있다. 공원을 두 바퀴나 도는 동안에도 겨울비는 하염없이 내렸다.
한겨울에도 단풍잎을 매달고 선 나무는 온몸으로 처연하게 비를 맞고 있었다. 낙엽으로 돌아가야 할 자연의 순환원리를 거역하고 도시의 온난화를 만든 인간들에게 무언의 시위를 벌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선화당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던 소녀는 내가 내미는 카메라를 받아들더니 과감하게 빗속으로 나섰다. 그는 '한 번만 더 찍어 볼게요'라더니 대여섯 번이나 셔터를 눌러댔다. 퍽이나 꼼꼼한 성격의 소유자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