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노란 국화 흰 국화
고경명(高敬命)
본래 빛깔로 말하면 노란 국화가 귀하다 하나
천연스런 자태 지닌 흰 국화도 신비롭네
세상 사람들 국화를 구별해서 말하지만
서리에 굴하지 않는 건 둘 다 같다네
詠黃白二菊(영황백이국)
正色黃爲貴(정색황위귀) 天姿白亦奇(천자백역기)
世人看自別(세인간자별) 均是傲霜枝(균시오상지)
[어휘풀이]
-傲霜(오상) : 서릿발 추위에도 굴하지 않는 기개.
[역사이야기]
고경명(高敬命((1533~1592)은 조선 선조(宣祖)때의 문인이며 의병장으로 호는 제봉(霽峰)이다 .제봉은 임진왜란 때 치열했던 금산전투에서 순절(殉節)했다. 시와 글씨 그림에 뛰어났다. 저서로 『제봉집(霽峯集)』이 있다.
제봉은 1558년(명종 13년) 문과 갑과에 장원급제해 벼슬을 시작했다. 을산, 영암, 한산, 서산, 순창군수를 거쳐 임한 한 해 전 동래부사를 끝으로 낙향했다. 노년의 제봉은 왜구의 침략으로 선조가 의주로 파천했다는 소식에 분연히 일어섰다. 59세의 나이로 건강이 온전치 못했지만 격문을 돌려 의병 6,000여 명을 담양에 모아 진용을 편성했다. 유팽로, 안영, 양대박을 종사관으로 삼고 출사표를 조정에 보냈다. 그는 아들 고인후(高因厚)에게 무주, 진안에 복병 수백 명을 배치해 왜구가 영남에서 호남으로 넘어오지 못하게 했다. 그 후 진을 옮겨 장남 고종후(高從厚) 차남 고인후와 합류한 뒤 호서, 경기, 해서 지역에 창의구국(倡義救國)의 격문을 보냈다.
제봉은 호서 의병장 조헌에게 왜구 토벌을 제의했으나 조헌이 청주공략에 바빠 참전을 못하자, 제봉은 전라도 방어 관군과 함께 왜구가 주둔한 금산성을 공격했다. 그러난 1만 명이 넘는 왜적의 저항과 관군의 무능함으로 일진일퇴를 거듭하다 왜적은 위약한 관군을 먼저 무너뜨린 후 의병부대를 기습했다. 그때 제봉과 차남 인후 등 수 많은 의병이 목숨을 잃었다. 비록 패했지만 의병들의 분투로 왜적의 기세는 한풀 꺾였다. 곡창 전라도를 왜구가 넘보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충무공의 수군이 해전에서 연승할 수 있었던 것이다.
치열한 금산전투에서 장남 종후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아버지와 동의 시신을 40여 일 뒤 간신히 수습한 뒤 다시 의병을 일으켜 스스로 복수(復讐) 의병장으로 칭했다. 그때 진주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김천일 당과 함께 왜적을 상대로 9일간 사투를 벌이다 전세가 기울자 남강에 몸을 던져 순절(殉節)했다.
3부자가 한 전쟁에서 순국한 사례는 세계 전사에 없다고 한다. 3부자가 과거에 급제한 문인들이다. 15세 막내도 전쟁터로 떠나는 아버지를 따라 나섰다. 그러나 제봉은 어머니를 잘 모시고 자신의 시문집을 잘 보관할 것을 당부하여 막내를 돌려보냈다. 출가한 장녀는 몇 년 뒤 정유재한 때 남편이 왜적의 칼에 전사하자 장검에 몸을 던져 자결했다. 전남 담양 창평의 대종가 고택 벽에는 세독충정(世篤忠貞)이라는 휘호가 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나라에 충성하고 곧은 마음을 굳게 지녀야 한다.’는 제봉 선생의 좌우명이다.
포충사(褒忠祠)
광주시 남구 원산동에 있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호남에서 최초로 의병 6,000여 명을 모집하여 왜군과 싸우다가 1592년 8월 금산싸움에서 전사한 고경명과 두 아들 종후와 인후 3부자와 유팽로, 안영 등 5명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서원이다. 1603년 박지효와 그 후손들이 임금에게 사액(賜額)을 청하여 포충이라는 이름과 편액을 받았다. 포충사는 1865년 대원군이 전국의 서원을 정리할 때도 장성의 필암서원(筆巖書院)과 함께 폐쇄되지 않았던 전남 지방의 2대 서원 가운데 하나이다. 포충사에는 고경명의 친필로 쓰인 마상격문(馬上檄文)과 목판 493장이 보존되어 있다.
출처 : 한시와 함께하는 우리나라 역사 『노을빛 치마에 쓴 시』
지은이 : 고승주. 펴낸 곳 : 도서출판 책과 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