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통하는 자의 복
마태복음 5:4,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찬송가 261장(이 세상의 모든 죄를)
예수님은 오늘 본문 말씀에서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사람들에게 선포하셨습니다.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라는 약속을 덧붙이셨습니다. ‘위로를 받는다’는 단어는 ‘파라칼레오’라는 헬라어 단어의 수동태입니다. ‘파라칼레오’는 ‘곁에 와서 돕는다’, ‘대신 간구한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백성들의 연약함을 아시고 그렇게 돕고자 이 세상에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육신을 공생애를 사시면서 주의 백성들을 열렬히 도와주셨습니다. 영적인 무지에서 건져내주시고 삶의 고단함에서 그 심령을 달려주시고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구원의 길로 인도해주신 돕는 자로 늘 곁에 함께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는 자기의 이름으로 또 다른 돕는 자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그 보혜사 성령님이 행하시는 바가 예수님과 동일합니다. 그래서 누가 그렇게 성령님의 위로, 교통, 인도, 역사하심의 은혜를 누리는가 하면 바로 애통하는 자가 누린다고 주님은 오늘 본문 말씀에서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달려나와 은혜받은 자들이 거의 다 애통하는 자들입니다. 병으로 고생하며 신음하던 이들이 예수님께 나왔을 때에 예수님께서 고쳐주셨습니다. 그렇게 병고침의 은혜를 입은 자들은 다들 뛸 듯이 기뻐하며 감사하며 돌아갔습니다. 귀신들린 자들을 주님께 데려왔을 때에 주님께서 귀신을 내쫓아주심으로, 그들이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함과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었습니다. 죄로 인하여 늘 눌리며 두려움과 슬픔 속에 살던 자들도 주님께 나아오면 용서를 받고 죄에서 벗어난 자유와 구원의 기쁨을 인하여 완전히 달라진 삶의 주인공들이 되었습니다. 그 한 예로, 동네에서 죄인으로 소문난 여인이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들르신 예수님 소식을 듣고 식사 시간에 찾아와 예수님의 발 곁에 무릎을 꿇고 눈물로 그 발을 씻고 머리칼로 그 발을 닦고 옥합을 깨뜨려 그 발에 부어드렸습니다. 사람들은 그녀가 행실이 안 좋은 것으로 소문나서 다들 꺼렸었는데, 주님은 그녀의 그 눈물을 받으시고 그녀의 많은 죄를 사해주시고 그녀에게 구원의 은혜와 평안을 약속해주셨습니다. 그러니 그 후에 그 여인이 얼마나 충만한 기쁨과 넘치는 자유함 속에서 살았겠습니까? 애통하는 자는 이처럼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족장 야곱은 형 에서를 만나면 큰 변고를 당할 것이 너무 분명하여서 얍복 강을 건너지 못하고 홀로 밤중에 강가에서 서성이다가 한 사람이 나타나 그를 죽이려 하므로 밤을 새면서 씨름합니다. 그 씨름 중에 그 상대방이 단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분임을 깨닫자 눈물로 호소하기 시작합니다. 이에 대하여 호세아 12:3 이하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모태에서 그의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힘으로는 하나님과 겨루되 천사와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그렇습니다. 힘으로는 누가 하나님과 겨루어 이길 수 있겠습니까? 누가 우리 전능의 주님과 싸워서 이길 자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야곱이 눈물로 매달리니까 하나님은 그의 눈물에 흔들려서 야곱에게 축복해주시고 그 날 아침에 분노로 달려온 형 에서의 마음을 녹이시고 에서가 죽일 듯 달려왔다가 동생 야곱을 품에 안고 함께 울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가장 강한 자인가요? 눈물로 기도하는 사람이 가장 강하고 무서운 사람입니다. 정필도 목사님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부산의 수영로 교회를 개척하시고 은퇴 후 원로로 계시다가 얼마 전에 소천하신 목사님이신데, 이분이 과거 안식년에 1년 동안 미국에서 공부하셨습니다. 그런데 가시면서 교회를 맡겼던 부목사님이 그 1년 동안에 목사님의 뜻을 다 외면하고 교회를 자기 뜻대로 운영하였습니다. 목사님이 돌아와 보니 교회가 이상해졌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그 부목사님의 일로 인하여 너무 마음이 아파 하나님께 날마다 울었습니다. 그 부목사님은 정 목사님이 안수하여 세운 부목사였고 사랑하였던 목사였기 때문에, 정 목사님은 교회 강대상 바닥에 앉아서 계속 울기만 했습니다. 그랬더니 금방이라도 무슨 일을 벌이고 교회를 쪼갤 것처럼 하던 부목사님이 얼마 후에 정목사님께 와서 사임하겠다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나중에 그 부목사님이 하는 말씀에 “아무 것도 두려울 것이 없고, 자기가 다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 정필도 목사님은 하나님 앞에서 자꾸 우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것이 겁이 나서 그만 둔다.”라고 말했다고 들려오더랍니다. 맞습니다. 하나님 앞에 우는 사람은 가장 무서운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눈물의 기도를 들으시기 때문입니다.
다윗도 수많은 고난이 있었지만 그러한 고난을 극복한 비결은 하나님 앞에서 엎어져 우는 것이었습니다. 시편에 보면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울었느냐면 그의 침상이 눈물로 뜰 정도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우리 구주 예수님께서도 고난이 얼마나 많으셨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 늘 눈물로 기도함으로 그 모든 시험과 고난을 극복해가셨지 않습니까? 히브리서 5:7 말씀에 보면 사도가 증언하기를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고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우는 것이 복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살리려 하실 때에는 그들에게 선지자들을 보내어 하나님 앞에 울라고 요청하곤 했습니다. 요엘 선지자가 대언하기를
“너희는 처녀가 어렸을 때에 약혼한 남자로 말미암아 굵은 베로 동이고 애곡함같이 할지어다”(요엘 1:8)
고 하였으며,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며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요엘 2:12,13)
고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울어야 하나님께서 용서와 사랑과 축복을 부어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눈물에 약하십니다. 애통하는 자에게 자비가 풍부하십니다. 그들에게 위로해주시고 도와주시고 함께해주십니다. 기쁨으로 대신 채워주십니다. 그래서 이사야 61:3 말씀에 애통하는 자들에게 주어질 성령의 위로에 대한 메시야 언약의 말씀이 이것입니다.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며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 우는 것은 반드시 성령의 위로의 은혜가 충만하게 부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근심으로 인간적으로 슬퍼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그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가지고 와서 토설합니다. 한나처럼, 다윗처럼 하나님 앞에 눈물로 간구합시다. 우리의 죄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 나와 눈물로 고하며 용서를 구합시다. 주님께서 조국 유다를 위하여 예루살렘의 딸들에게 울라고 명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조국 유다의 미래가 풍전등화인 것을 아시는 예수님은 울어야 산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지금 우리나라는 기회이자 위기의 시기를 맞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을 받기 위하여, 우리와 우리 자녀들과 나라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가 울어야 할 때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주의 백성이 울 때에 주께서 약속된 바대로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역경 중에 받은 위로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간증의 열매가 풍성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