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보는 교회사 35] 가톨릭 교회의 개혁 예수회의 이냐시오 구본식 교회의 쇄신이 필요한 시점에 다행스럽게도 활동적인 새로운 수도회들이 창설되었다. 모든 새로운 수도회가 교회개혁에 큰 몫을 하였지만 꼭 필요한 시기에 나타나 가장 중요한 몫을 담당한 수도회가 예수회라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만한 수도영성과 수련방법과 활동정신으로 교육, 사목, 선교, 학문 등 모든 방면에 큰 영향을 끼쳤다. 반대로 이들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또한 반대자들이 생기고 많은 분쟁의 불씨가 되기도 했다. 어떤 연유에서든 다른 수도회의 표적이 되기도 하였지만, 정치사회에서도 각국의 행정가들의 미움을 사서 큰 박해도 받은 수도회였다. 이러한 예수회의 역사를 알아보자. 로욜라의 이냐시오(Ignatius von Loyola, 1491-1556년) 이냐시오 성인은 바스크 지방의 귀족집안에서 태어났다. 열두 명의 형제 가운데 여덟 번째였던 성인은 기사가 되는 수업을 받고 아라곤의 재무담당관 집에서 젊은 시절을 보내게 된다. 당시 귀족의 자제들이 사는 평범한 삶이었다. 새롭게 주인으로 맞이 한 나바라의 공작은 그를 프랑스군 과 싸우는 팜플로나 전투에서 프랑스군과 싸우게 했다.1521년 5월 20일, 이 전투에서 그는 오른쪽 다리에 큰 부상을 입고 고향으로 돌아와 치료를 받게 되었다. 긴 병상생활 속에서 그는 보라지네의 자콥이 쓴 “성인열전”과 루돌프의 “그리스도의 생애”라는 책들을 여러 번 탐독하게 된다. 여기서 그는 자신이 지금껏 알아왔던 세속적인 삶과 성인들의 모범적인 삶이 다르다는 것과 예수님의 생애에 대해 신비를 느꼈다. 그러나 결단은 쉽지 않았다. 성인들의 삶을 따르는 길과 자신이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 사이에서 갈등을 하던 그는 드디어 세상의 주인보다는 하느님을 주인으로 모시기로 결정하고 순례의 길을 떠난다. 순례의 길 1522년 3월 24일에 몬세라트에 있는 베네딕도 수도원에 도착한 이냐시오는 자신의 첫 번째 영성 지도자로 생각하는 사노네 한테 총고백을 하고 성모상 앞에서 밤샘기도를 한다.새벽에 기도를 마친 그는 자신의 장검과 단검을 제대 아래 두고 말[馬]은 수도원에 주고 거지옷으로 갈아입고 순례자의 지팡이를 짚고 3킬로미터쯤 떨어진 만레사라는 작은 도시에 도착하였다.여기서 그는 병원의 환자를 돌보면서 회개의 삶을 살았으며 자주 몬세라트에 가서 영적지도를 받고는 했다. 이때 사노네는 치스네로스의 수련서를 주고 영성수련을 하게 했다. 그의 삶은 매우 엄격했다. 빵을 구걸하면서 단식생활을 하는 이냐시오는 회개와 보속과 기도로써 살았다. 차츰 그를 알아보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피해 한적한 곳의 동굴을 찾아 자신의 은둔처로 삼았다. 자신의 몸을 전혀 돌보지 않고 살았으므로 큰 병에 걸렸던 것이 이상 하지 않다. 육체적인 큰 고통을 겪으면서 정신적으로는 모든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육체적인 극기와 영적 성숙의 관계가 정립되어 뒷날 그가 세우는 예수회의 지침이 되게 된다. 여기서부터 그의 작은 지침서 “영성 수련”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한번에 쓴 것이 아니라 그가 자신을 수련하면서 조금씩 적어나간 것이다. 이냐시오는 만레사에서도 이미 유명해져 있었다. 사람들은 이냐시오의 가르침을 받기 원했다. 1523년 2월 이냐시오는 만레사를 떠난다. 오로지 예수님의 생애에만 관심이 있었던 그는 예수님이 사셨던 곳을 순례하기로 결심했다.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성지관리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실천하려 다가 오히려 반대를 받고는 스페인으로 돌아와서 하느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학업에 열중하기로 했다. 학문연구 그는 서른세 살에 처음으로 바르셀로나에 머물면서 꼬마들과 함께 초급 라틴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2년 뒤에 선생들의 조언으로 알칼라 대학의 철학과에 입학하여 공부하면서도 자신의 영성수련은 등한히 하지 않았다. 자연히 그의 주변에 젊은 학생들이 따르게 되었다. 당시 스페인은 이단적인 신비가들 때문에 시끄러웠는데 공부하는 늙은 학생이 강론도 하고 피정지도도 하게 되니 고발을 당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였다. 종교재판소에 잡혀가서 문초를 당하고 그의 “영성수련”도 심사를 받았다. 단죄는 받지 않았지만 설교를 한다든지 교리적인 것에 대해서 4년 동안 신학공부를 마치기 전에는 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고 풀려났다. 살라만카로 옮겨가서 학업을 계속하려 했지만 상황은 비슷했다.다시 종교재판소에서 재판을 받고 풀려난 이냐시오는 모든 학문의 중심지인 파리로 옮긴다. 1528년 2월 2일에 파리에 도착해서 이미 칼빈과 에라스무스가 교육을 받은 몽테귀 학원에 머물며 학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학업보다도 사는 것이 급했다.구걸을 하며 지내다가 스페인령의 네덜란드 지방의 부자상인들에게 학비를 간청하러 갔다. 여기서 아주 열성적인 한 상인을 만나 그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그 상인은, 이냐시오는 성인이며 수도회를 창설할 것이라는 말과 함께 그를 도와주었다. 1529년 10월부터 바르바라 기숙사로 옮긴 뒤에 이냐시오는 자기보다 열다섯 살이나 적으면서 학교에서는 선배인 베드로 파브르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등과 한 방에서 지내게 되었다. 파브르와 하비에르는 이냐시오한테 철학을 가르쳐주고 성인은 그들에게 영성수련을 시켰다. 결과적으로 크게 변한 두 사람은 성인과 같은 삶을 살기로 결심하게 된다. 이런 활동이 다시 소문이 나면서 두 명의 대학 교수 앞에서 교리적으로 틀린 점이 없음을 증명해야 하는 사건도 있었다. 학업은 그 뒤로 순조롭게 진행이 되어 1533년에 철학을 끝내고 신학과에 입학하였을 때, 첫제자인 파브르는 1534년 7월 22일에 사제품을 받았다. 수도회 창설 베드로 파브르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외에도 야고보 라이네스, 알퐁소 살메론, 니콜라오 보바딜라와 포르투갈 사람 로드리게즈 아제네도가 이냐시오를 따르는 그룹을 형성하고 있었다. 당시 아들은 스페인의 선교열에 고무되어 성지로 가서 이방인들에게 선교하고자 하는 열의를 모았다. 따라서 이때에 파리에서는 교회에 반기를 드는 루터 추종자들이 말썽을 일으키고 있었지만, 이들은 그 일에 별 상관을 하지 않았다. 처음 생각대로 이방인에 대한 선교열로 가득할 뿐이었다. 첫서원은 몽마르트 성당에서 1534년 8월 15일에 가졌다. 여기서 가난과 정결과 영혼구원을 위해 일생을 바치는데, 가능하다면 예루살렘에서 활동을 하되 교황이 바라는 곳에 가겠다고 서원했다. 이때는 기존 수도원의 장상에 대한 순명에는 서원하지 않았고 회의 창립도 아직 구체화하지 않았다. 이냐시오는 병이 깊어져 더 이상 학업을 계속할 수가 없게 되었다.병든 이냐시오에게 고향의 공기가 필요하다는 의사들의 조언으로 그는 로욜라 성(城)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몸이 조금 낫자 그는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다시 이탈리아의 볼로냐로 공부하러 떠났다. 그러나 병이 재발되어서 그는 베네치아에 가서 다른 동료들을 기다리게 되었다. 한편 파브르가 이냐시오 대신에 동료들과 베네치아로 여행을 떠났다. 당시 프랑스 왕과 독일 황제가 전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장을 피해 길을 독일 쪽으로 잡았다. 이들은 길을 가는 동안에 가톨릭 교회에 적대적인 사람들을 만났고 또 여러 위험을 겪으면서도 용감하게 그들과 논쟁을 벌였다. 그리고 어떤 지방에서는 가톨릭 신앙인들이 큰 위험 속에 있는 것을 보았으나 원래의 선교목적을 버리지는 않았다. 오십여 일의 여행 뒤에 1537년초에 베네치아에서 파브르 일행과 이냐시오는 만났다.
그들은 또다시 예루살렘으로 떠나려 했지만 1523년 프란치스코회 수사들의 냉담한 반응이 생각나서 공적으로 교회의 인정을 받을 필요를 느끼게 된다. 그 사이 이냐시오는 1537년 6월 24일에 사제가 아니었던 동료들과 함께 사제품을 받았다. 미사에 대해서 경외심을 갖고 있던 이냐시오는 첫미사를 18개월 동안 준비했다. 이때부터 이들은 자신들을 ‘예수의 군대’라고 하기 시작했다. 즉 이 세상에서 누구도 상전으로 모시지 않고 오로지 예수님의 군사로 사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의도 였다. 이냐시오는 라네즈와 파브르와 함께 1538년 성탄절 로마 성모설지전 대성당에서 첫미사를 올리고 각자의 임무에 들어갔다. 이냐시오는 영성수련을 시키고 다른 두 사람은 대학교수가 되었다. 자연히 그들의 임무가 청년교육이었다. 1538년 교황의 허가를 얻기로 하고 이냐시오는 동료들과 로마로 떠났다. 로마에 가기 전에는 당시 영향력 있는 추기경들이 그들을 반대할까 걱정을 했지만 로마에 도착했을 때는 오히려 추기경들이 그들 일행을 반갑게 맞아하고 교황알현을 주선해 주었다. 교황은 그들의 가난한 모습을 보고 그들을 수도자로 대우했고 사제품을 받을 수 있는 관면을 주었다. 그해 사순절에 모든 동료들을 로마에 불러모아 그들이 성당이나 병원이나 수도원 등에서 설교하고 성사를 줄 수 있는 허가를 얻어내었다. 이들이 활동하자마자 사람들은 이들 동료들에게 모여와서 많은 변화를 느끼고 돌아갔다. 따라서 처음부터 열렬히 환영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반면에 또한 심하게 반대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당시 로마는 종교개혁이라는 큰 진통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수도원의 인가를 주저하였다. 인가심사가 3개월이나 걸렸다. 예수회는 1540년 9월 27일에 지켜야 할 사항들과 함께 인가를 받았다. 수도회에 들어오거나 선교지역에 갈 때 그들은 항상 교황의 허가를 얻어야 하였다. 회원의 중요 임무는 하느님의 계명을 설교하고 아이들한테나 모든 사람들한테 교회의 기초적인 교리를 가르치는 것이다. 또한 필요한 직무는 장상에게서 받을 것이며 장소를 옮기거나 직무를 바꾸기를 원하는 이는 먼저 장상에게 말하고 교황에게 보고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회는 처음부터 교황의 뜻대로 움직이는 수도회라는 것이다.
직무의 방향도 세 가지로 정해졌다.첫째는 그들이 원하는 이방인들의 선교에 나서는 것이고 두 번째는 독일이나 북유럽, 영국 같은 교회에서 갈라져 나간 지역에 가서 그들과 투쟁하는 일이다. 세 번째는 신자들의 세계 즉 이탈리아나 스페인, 프랑스 등지에서 활동하는 것이다. 예수회가 종교개혁에 적절히 대처함으로써 갈라져 나간 지역을 많이 회복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기 때문에 처음부터 반루터, 반칼빈 운동이지 않았느냐고 하지만, 실제로 예수회는 ‘하느님의 영광’이라는 대전제 외에는 특정 목적이 있지 않았다. 따라서 예수회는 유럽 안에서만 머물러 있지 않고 인도나 중국 심지어는 초창기 동료들은 일본에까지 선교를 떠났다. 다음에는 그들의 성공과 좌절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겠다. 구본식 안드레아/ 대구효성 가톨릭 대학교 교수 ‧ 신부 [경향잡지, 1996년 11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