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빠진 놈
전 호준
“아이고 이 얼빠진 놈아!” 마구잡이 쏟아지는 회초리 세례에 찍소리 한번 못하고 울며 도망쳐 나왔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이 쓸개 빠진 놈아! 나가 뒈져라!” 엄마의 불같은 성화에 얼이 빠져 걸음아 날 살려라. 쫓겨났다.
어둠이 삼킨 담벼락 밑에 쪼그리고 앉아 생각해도 어머니의 야단보다 잃어버린 양은 양푼이 눈앞에 아른거려 가슴이 아프다.
어릴 적 그렇게 개구쟁이는 아니었지만, 가끔 얼빠진 행동으로 어머님의 속을 썩인 적이 많다. 지금도 그 버릇이 남았는지 가끔 얼이 빠질 때가 있다.
어릴 적부터 민물고기를 좋아했다. 잡는 것은 물론 먹는 것은 더더욱 좋았다. 초등학교 3.4학년쯤인 것 같다. 어느 토요일 학교를 파하고 돌아오니, 집이 텅텅 비었다.
부엌에 들어가 밥을 챙겨 먹던 중 반짝반짝 빛이 나는 양은 양푼이 눈에 들어왔다. 번뜩! 형들이 냇가에서 사발 무지로 고기 잡던 생각이 떠오른다.
양푼에 보리밥 몇 숟갈을 된장에 비벼 깨소금까지 살짝 뿌리고 밥 부재를 찾아 가위로 구멍을 오려냈다. 서랍을 뒤져 고무줄까지 챙겨 콧노래를 부르며 집에서 오백여 미터 떨어진 큰 거랑으로 신나게 달려갔다.
여름방학이면 친구들과 어울려 뻔질나게 멱 감으려 다니던 곳이라 주저함이 없다. 비교적 고기가 많이 노는 조용한 곳을 찾아 전을 폈다. 양푼에 밥 부재를 덮고 가장자리를 따라 고무줄로 단단히 동여맸다.
생각보다 물이 깊다. 무릎과 허벅지 중간쯤 잔잔한 물살이 흐르는 곳에 피라미며 송사리들이 꼬리 흔들며 유유히 헤엄쳐 오른다. 침이 꼴깍한다.
자갈과 모래를 헤쳐 적당히 구덩이를 파고 양푼에 서서히 물을 채워 구덩이에 넣고 자갈과 모래로 가장자리를 채워 묻어 고정했다.
양푼에 들어찰 물고기를 상상하며 돌을 뒤져 골부리며 뿌구리를 쫓아다니며 나 혼자만의 물놀이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추석 명절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명절을 폐지해 달라는” 취지의 파격적인 청원이 잇달아 올라오고 있다는 기사가 떴다. 현대사회에서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차례를 지내는 의미가 퇴색되었다는 이유다. 대체 공휴일이 낀 긴 연휴, 산으로 바다로 해외로 나만의 오붓한 시간을 갖지 못하고 명절증후군이란 스트레스에 시달려야 하는 주부들의 고충에 일리가 있는 반란이다.
산 조상도 섬기기를 꺼리는 세상에 낯모르는 죽은 조상이 와서 먹고 가는 것도 아니다. 서툰 솜씨에 몸살이 나도록 시달려야 하니, 안 갈 수도 안 할 수도 없다. 어쩌라! 급기야 얼빠진 곳에 얼빠진 청원을 넣는 이들의 용기 앞에 수긍해 본다. 맞벌이가 대세인 요즘 세대, 황금연휴를 맞아 자유롭게 푹 쉬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인데 그들에게만 멍에를 지우는 잘못된 관습이 웃지 못할 청원의 실마리가 아닐까?
연중 많은 절기가 있지만, 설날과 추석은 우리 민족 최대의 고유 명절이다.
설날은 지난 한 해를 뒤돌아보고 새해를 설계하며 조상의 음덕을 기리고 웃어른들께 세배로 경로효친 사상을 고취한다. 새해의 소망과 건강을 하늘과 조상님께 기원하는 차례를 지내고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덕담으로 상호 정을 돈독히 하여 화목하게 잘 살라는 고유의 얼을 되새기는 날이다.
추석은 연중 오곡백과가 가장 풍성한 계절로 햇곡과 햇과일로 하늘과 조상님께 감사드리고 풍성한 수확을 자축하는 일종의 가족 화목 감사축제다.
가을바람이 불며 전국이 온통 축제로 들뜬다. 00 페스티벌 00 축제 모두 열광하면서 왜? 가족들만의 정겹고 오붓한 잔치는 외면하는 걸까? 이름도 00 페스티벌 00 축제가 아닌, 00 잔치 한 마당이면 쪽이라도 팔리는가?
얼이 빠져가고 있다. 오천 년 이어온 민족 전통문화의 얼이 빠져나가고 있다. 찬란한 역사와 문화유산, 소중한 문화재도 얼이 지워지면 한낱 값비싼 골동품에 불과하다. 얼이 빠진 사람은 허수아비요. 얼빠진 민족의 미래는 속 빈 강정이다. 누름돌이 빠진 빈 양푼이 같이 흔적 없이 살아질지도 모른다.
고기로 가득할 양푼을 기대하며 조용히 다가갔다. 양푼이 흔적 없이 살아지고 없다. 아무도 다녀간 사람도 없다. 당황하다. 어찌 된 걸까? 물살에 주변 모래가 서서히 패이면서 가벼운 양푼이 떠내려간 모양이다. 순간 눈앞이 캄캄하다. 아차! 양푼이 바닥에 넣어 그릇을 지탱해줄 얼 같은 누름돌을 빼먹었다. 못난 내가 너무 처량하고 답답해 미칠 지경이다.
넓고 긴 거랑을 몇 번이나 오르내리며 허덕였지만 보이지 않는다. 오늘 아침 오일장에 어머니께서 모처럼 장만한 새 그릇을 잃어버렸으니, 얼이 빠져 멍하니, 눈물만 난다. 어떡하지! 어둠이 서서히 밀려온다.
불안과 두려움에 오싹 한기가 든다. 떨어지지 않는 무거운 발길, 정신 나간 놈의 소행을 알고 기다리던 어머니, 풀이 죽어 빈손으로 돌아오는 얼빠진 놈에게 내려지는 사정없는 응징, 얼빠진 놈의 정신머리를 고치려는 고육지책이 아니었을까?
명절을 폐지해 달라는 얼간이들의 얼빠진 청원, 시린 이 때문에 이빨을 통째 뽑아버리자는 어이없는 발상에, 절(寺)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란 옛말이 무색하다. 2018.9.27
첫댓글 "밥부재"(보자기) "거랑"(개천)
이제는 사용하지 않아서 사라진
옛날 50년대 국민학교 시절 정겨운 사투리, 반갑습니다.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를 안타깝게 그려낸 글 잘 읽었습니다.
'얼빠진 곳에 얼간이들의 얼빠진 청원' 속이 시원합니다. 풍습도 참삶의 아름다운 방향으로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이야 누가 탓하겠습니까마는 얼간이들의 얼빠진 사고 방식이 문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서글픈 시대상의 단면을 재미있게 쓰신 글 잘 읽었습니다.
"얼빠진 ...' 글 제목이 참 재미있습니다. 감사합니다.최상순드림
밥부재, 거랑, 골부리, 뿌구리 등 등, 오랜만에 들어보는 정감이 가는고향 사투리입니다.
추석이 되면 늘 생각나는 것이 우리는 너무 형식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봄니다. 그냥 모두 내려놓고 가족끼리 이웃끼리 즐기고 사랑하는 그런 명절로 거듭나는 방법은 없을까 생각해 봅니다. 잘 읽었습니다.
양푼에에 밥부재를 덮고 고기를 잡으려는 얼빠진 소년은 그래도 순수하고 귀엽네요~ 누름돌이 빠진 양푼이 사라지는 것을 청와대 명절폐지 청원에 비유함이 매우 적절하십니다. 공감하며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명절, 고향, 뿌리, 가족... 우리의 오래된 전통을 하루 아침에 없앨 수가 있겠습니까? 형식이 중요하다고 누가 말했습니다. 형식이 있어야 내용도 채워넣을 수 있다고 하더군요.. 찾아야 할 '얼'을 양푼의 누름돌에 비유하셔서 쓴 시사적인 글 잘 읽었습니다.
사라진 양푼과 사라져 가는 우리의 아름다운 전통과 풍습을 비유하여 선생님의 안타까워 하시는 마음을 잘 드러내셨습니다. 아름다운 명절이 누군가에게는 행복하고 누군가에게는 희생과 고통이 되는 행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 청와대 게시판의 그런 청원의 글도 있나 봅니다. 남녀, 세대간의 서로 이해와 소통을 통해 우리의 아름다운 전통이 후대 언제까지라도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어린 소년이 실수로 양은 냄비에 누름돌을 빠뜨리는 실수는 할 수 있지만, 우리 민족의 얼이나 다름없는 전통문화를 뽑아버리자는 청원을 하다니요. 참담함을 글할 수 없습니다. 푸른집이라고 하여 얼을 제대로 간직한 사람이 거주하고 있기나 합니까. 태극 혼도 빼버리고 없는데요. 얼이 빠져 나간 인간은 곤충에 불과할 것입니다. 절묘한 비유로 쓰신 추석 만평이 많은 것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소년의 고기잡이의 얼빠진 실수와 민족 고유의 얼을 잘 대비하여 쓰셨습니다.
밥부재 , 잊혀져가는 정겨운사투리를 되새겨 주셔서 새롭습니다.
어린시절 추억담을 들으니 고향에서 지낸 일이 생각납니다. 명절을 맞아 며느리들이 힘드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고유한 명절을 없애려고 청원하는 행위가 개탄스럽습니다. 요즈음 시대에 맞게 우리의 풍습을 고쳐나가면 될일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요즘은 건강을 위해서 일부러 멍때리기를 한다고 합니다. 좀은 모자란듯 살아가는 게 잘 사는 인생이라 했건만,
인정머리가 각박해지고 메말라만 가니 그저 안타까울 뿐입니다. 일침을 가하는 세태풍자 글 잘 읽었습니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8.09.30 13:22
잃은 양은 양푼이에 대한 추억을 잘 읽었습니다.. 저도 명절을 철폐해달라는 청원이 있다는 뉴스를 접했습니다.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대목입니다. 그렇게 지내기 싫다면 안 하면 되지. 구태여 청와대에 청원하는 자체가 우습습니다.
요즘 세태를 적절한 비유로 잘 꼬집은것 같습니다. 유유상종이라, 푸른집에서 비슷한 사람들끼리 청원받고 청원하는 촛불인지 호롱불인지, 명절은 여러개의 시제중에오랜 세월속에 설과 추석 두개남은 것을 보전 못하면 미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의미있는 글 공감하며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