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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의 아들 시몬아 내 양을 먹이라
요 21:15-19
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요 21:15-19 / [내 양을 먹이라] 아침 식사가 끝났을 때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예, 주님을 사랑하는 제 마음을 주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주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면 내 어린 양들을 먹이라.' 16) 예수께서 다시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참으로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예, 주님을 사랑하는 제마음을 주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면 내 양들을 돌보라.' 17) 예수께서는 한 번 더 그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정말로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께서 세 번이나 같은 질문을 하시자 근심이 생겨서 `주님, 주님은 제 진심이 어떤지를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면 내 양들을 먹이라. 18)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젊었을 때에는 네가 원하는 일을 하고, 가고 싶은 곳에 마음대로 갈 수 있었다. 그러나 네가 늙으면 다른 사람이 네 팔을 붙잡아 벌리고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19) 예수께서는 베드로가 어떤 죽음을 맞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가를 은연 중에 알게 하시려고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대제사장의 집 뜰에서 예수를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부활하신 예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바닷가에 직접 숯불을 피우시고 생선을 요리하시며 그를 기다리십니다. 실패의 장에서 다시 세우시고 베드로의 소명을 회복시키십니다. 주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을 확인하시며 고백하게 하십니다. 실패한 과거를 떨치고 일어나 미래로 나아가게 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치라(15-17)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의 허물을 세 번의 사랑고백으로 덮어주십니다. 의도를 가지고 물으시는 주님의 질문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냐”고 물으실 때 베드로는 근심하여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시니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신다”고 대답합니다. 그러한 대답 앞에 주님은 사명을 주십니다. 사명은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고 선택받음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누리는 것만이 아닙니다. 때론 사랑에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대가로 십자가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한 베드로에게 주어진 대가는 목자의 사명을 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목자의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양을 위해서 어디든지 찾아 나설 수 있는 애정이 있어야 하고, 자신의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어떤 위험으로부터도 양을 지켜내려는 용기가 있어야 목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18-19) 예수께서 내 양을 먹이라는 말씀과 동시에 사명에 대해 이야기 하십니다. 사명에 대한 내용은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지만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를 사랑하고 따르는 데는 희생의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베드로는 먼 훗날 로마에서 순교하게 됩니다. 베드로 역시 십자가에 달려 순교했는데, 주님과 같은 방법으로 죽는 것이 너무 황송해서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책임을 수반하고 희생을 수반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적용: 사명자의 힘은 하나님을 사랑함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을 진실 되게 사랑할 때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맡기시고 감당할 힘을 주십니다. 말과 혀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다른 형제에게 모욕을 당한 이가 압바 시소에스를 찾아와서 말했다. “형제한테 상처를 받았습니다. 앙갚음을 하고 싶습니다.” 노인은 젊은이를 다독이며 말했다. “그러지 마시게, 친구여. 원수 갚은 일은 하나님께 모두 맡기게.” 그러나 젊은이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러자 노인은 “기도하세, 형제여”라고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 하나님 저희는 이제 더 이상 주님의 보살핌이 필요 없습니다. 손수 복수를 하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이 기도를 들은 젊은이는 얼른 노인의 발아래 엎드려 고백했다. “이제 형제와 다투지 않겠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 유시 노무라,《사막의 지혜》
< 설 교 >
너는 나를 따르라
요 21:15-23 / 김상복 목사
누구나 살아가면서 주위사람을 본의 아니게 실망시킨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직장동료를 실망시키거나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실망시키고 자식이 부모를 실망시키기도 합니다. 돌이켜 보면 저도 부모님과 같이 산 11년 동안 부모님을 한 번 실망시킨 적이 있었습니다. 부모님의 책망을 받는 순간 ‘어머니가 나에게 실망을 하셨으니 이제는 나를 싫어하실 거야!’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남을 실망시키면 자기 자신에게 실망하게 되고 자존감이 떨어지고 자괴감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상대방과의 관계가 멀어지고 점점 보이지 않는 담이 생깁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도 이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3년 동안 예수님의 제자로 살았지만 마지막에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예수님 면전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며 “나는 저 사람을 몰라요. 나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라며 저주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의 예언대로 새벽닭이 울자마자 극심한 죄의식에 사로잡혀 밖으로 나가서 통곡을 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서 부인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안다고 하면 혹시 그들이 자기도 죽이지 않을까 순간적으로 겁이 났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미국에서 자동차 범퍼스티커의 글을 보고 참 옳다고 느낀 적이 있습니다. “If God seems to be far away, guess who moved.” (만약 하나님이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진다면, 누가 움직였는지 생각해 보라.) 누가 움직였을 것 같습니까? 우리가 움직였습니다. 하나님은 늘 제 자리에 계신데 우리가 멀리 도망가고 움직입니다.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예수님께서 재판을 받으시는 중에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도 도망가고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베드로뿐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린 요한만 남고 다 도망갔습니다.
도망을 갔던 제자들은 자신에게 실망을 했습니다. “아, 이제는 끝났다. 예수님께서 나를 좋아하실 리도 없고 내가 예수님을 볼 면목도 없구나.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보잘 것 없고 예수님을 배반하고 낙심한 나를 다시 쓰시지 않을 거야. 그러니 갈릴리 바다에 옛날처럼 고기나 잡으러 가야겠다.” 일곱 명의 제자들은 사도직을 포기하고 갈릴리 바다로 가서 밤새 고기를 잡았습니다. 하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지요. 영적으로만 실패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생업에도 쓸모가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옛날에는 고기 잡는 일이 전문이었는데 지금 와서는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스스로에 대한 심한 허탈감에 사로잡혔습니다. “나는 보잘 것 없는 존재, 쓸모없는 존재야.”
이렇게 낙심하고 힘없이 돌아오는 제자들에게 누군가 물었습니다. “고기를 잡았소?” “고기는 무슨 고기, 한 마리도 못 잡고 밤새 고생만 했소.” “그러면 오른쪽으로 그물을 던져 보시오.” 피곤해서 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 말대로 그물을 던졌더니 물고기 153마리를 그물에 가득 차도록 잡았습니다. 이번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153석을 얻었습니다. 그것을 놓고 야당에서 “겨우 턱걸이를 했다”고 하자 청와대 비서 중의 한 사람이 “153은 성경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잡은 물고기 수와 똑같다. 턱걸이가 아니라 풍성한 것을 말한다.”고 응수했답니다. 그 비서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기독교인 것 같아요.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부인하고 떠나 생업으로 돌아간 베드로나 제자들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오히려 기적을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실망을 안겨준 그 시간에도, 죄의식과 두려움에 가득 차서 영적으로 육적으로 실패자라고 느낀 그 순간에도 예수님께서는 찾아오셔서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나는 아직도 너희를 사랑한다. 너희는 아직도 쓸모가 있다. 무가치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이렇게 힘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어느새 빵과 물고기로 먹을 것을 준비해서 “나와서 나와 같이 조반 먹자”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조반을 먹으려고 둘러앉아서 보니 그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이 실망한 순간에도, ‘이제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실 수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나는 실패했고 다른 사람을 실망시켰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도 여러분에게 다가오셔서 먹을 것을 마련해 주시고 여러분을 사랑하시고 여러분에게 기적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부족하고 연약하고 보잘 것 없고 다른 사람을 실망시키고 실패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실패하지 않으십니다. 그런 순간에도 우리를 붙들어 주십니다. 하나님이 멀리 계신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이 움직여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향해 계속 다가오십니다. 넘어진 그 순간에도 여러분의 손을 잡아주시고 맛있는 음식을 준비해서 그 고통의 순간에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우리 하나님이요 우리가 섬기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이 혹시 지난 주 동안 자기 자신에 대해서 실망했거나 가족을 실망시켰거나 직장 사람, 우리 성도들을 실망시켰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이 시간 여러분을 찾아 오셔서 용서하시고 받아주시고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이 믿음을 굳건히 하시길 바랍니다.
실패한 사람들에게는 사랑을 재확인시켜줄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너 그때 내가 너를 빤히 쳐다보는 앞에서 나와 상관이 없다고 했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예, 정말 사랑합니다. 제가 3년 동안 예수님 사랑한 것 아시잖아요. 제가 예수님을 부인한 것은 죽을까봐 겁이 났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직도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래. 사랑한다는 말만으로는 부족하다. 사랑의 행동이 따라야 한다. 나를 사랑한다면 내 양을 치고 내가 원하는 사역을 하라. 내가 지금까지는 너희들과 함께 있었지만 머지않아 아버지 집으로 갈 텐데 내가 하던 일을 이 땅에서 너희가 맡아 계속하라. 실패했을지라도 이 세상 끝 날까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주님은 여러분과 영원히 같이 계십니다. 내가 주님과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져도 그것은 나의 주관적인 느낌일 뿐입니다. 주님은 여러분 옆에 찾아오시고 함께 계시고 기적을 베푸시고 배고플 때 먹이시고 목마를 때 마시게 하시고 피곤할 때에 새 힘을 주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만족시켜줄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는 엄청난 욕구들이 있습니다. 사랑 받고 싶은 욕구가 있어서 끝없이 사랑 받기를 원합니다. 사랑이 끊어지지 않기를 원하지요. 하지만 사람이 주는 사랑은 끊어지고 약화 됩니다. 그럴수록 더 갈증이 생깁니다. 사람에게 인정받기를 원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칭찬을 받고 싶지만 사람들은 칭찬에 인색합니다. 격려를 받고 싶지만 아무도 격려해주지 않습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수많은 욕구와 무한한 갈증을 채워줄 능력이 없습니다. 남편도 아내도 자식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원해도 사람은 이 무한한 갈증을 채워줄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무한한 갈증은 무한하신 하나님만이 채워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네 남편이나 아내나 자식이나 부모를 나보다 더 사랑하면 내 제자가 되기 어렵다” 하셨습니다. 여러분 인생의 마지막 갈증을 주님께 와서 채우시기 바랍니다. 그분께 나아오면 그분은 여러분을 언제든지 안아주시고 기적을 베푸시고 조반을 마련해주시고 사랑의 풍성한 은총을 채워주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낙심하고 절망하고 좌절한 그 시간에도 주님께서는 여러분의 영혼을 위해 기적을 베푸시고 사랑의 잔치를 베풀어 주십니다.
여러분,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의 사랑은 바로 여러분 곁에 있습니다. 그동안 자신에 대해서 실망한 점이 있더라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오늘도 여러분을 끌어안아 주십니다. 우리가 도망가는 것이지 주님은 절대 도망가시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제 나 같은 사람을 쓰시지 않을 거야. 그만 따라다니라고 하실지 몰라.’ 이런 생각이 들 때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완전히 가루가 되고 먼지가 되어버려도 주님께서는 그 먼지에 물을 붓고 다시 빚어서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 주십니다. 주님의 손 안에서는 무엇이든 새롭게 다듬어집니다.
베드로는 이것을 체험했습니다. 베드로뿐 아니라 주님 앞으로 다가오는 모든 사람들의 체험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실패하고 잘못될 때에도 주님은 절대로 우리를 버리지도 떠나지도 않으십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일으켜 주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사랑 안에서 의미 있게, 보람 있게 다시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을 여러분과 제가 믿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물으시자 베드로는 걱정이 되었습니다. “근심했다”고 합니다. 왜 세 번이나 물으셨을까요? 베드로의 가슴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세 번 부인을 했었으니까 다시 세 번을 확인하신 것이 아닐까요. 길게 물으시지도, 이유를 따지시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나를 사랑하느냐?” “사랑합니다!” “내 양을 먹여라.” “나를 사랑하느냐?” “사랑합니다. 정말입니다.” “그래. 내 양을 치라.” “너 정말 나를 사랑하느냐?” “정말입니다. 주님, 모든 걸 다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주님 사랑하는 것 아시지요? 그때는 너무 겁이 나서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하지만 사실 제 마음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새벽에 닭이 울 때 저는 너무 자신이 미워서 밖에 나가 회개하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런 나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찾아와 주신 것 정말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주님은 여러분을 찾아오시고 여러분의 삶에 새로운 기적과 새로운 은총을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 서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자네가 젊었을 때는 띠를 띠고 가고 싶은 곳에 마음대로 다녔지. 이제 나이가 들었는데 머지않아 딴 사람이 와서 꽁꽁 묶어서 죽음의 길로 데려갈 것이다.” 베드로의 가슴이 얼마나 서늘했겠습니까! 그 죽음은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나중에 실제로 십자가에서 죽게 되었을 때 이렇게 말했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똑바로 달려 돌아가셨는데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예수님처럼 똑바로 달리겠는가. 나는 거꾸로 달려 죽겠다.” 전설에 의하면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었다고 합니다.
베드로의 죽음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 이러라”(19절).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하면 여러분의 고난, 심지어 죽음마저도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희생을 할 때도 그 희생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참을 일이 아닌데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참았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참기도 하고 견디기도 하고 희생하기도 하며, 심지어 목숨을 바치기도 하는 것입니다. 단 한 가지 전제조건,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사람에게 인정받고 칭찬받고 상을 받기 때문에 선을 행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을 향한 사랑 때문입니다. 이 한 가지 때문에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내가 인정을 받고 칭찬을 받을 때는 섬기고, 그렇지 않을 때는 주님을 떠나 멀리 고기 잡으러 가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사랑이 오직 주님을 향한 사랑이기를 바랍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처음부터 늘 짝이었습니다. 어디든지 같이 갔고 예수님께서 무슨 일을 시켜도 두 사람에게 꼭 같이 시키셨습니다. 산에 오르실 때도, 당나귀를 가져오라고 하실 때도, 겟세마네 동산에 기도하러 갈 때도, 유월절 저녁을 준비할 때에도 베드로와 요한은 짝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십자가에서 죽을 것이라는 말씀을 듣자 요한은 어떻게 될지 궁금했습니다. “요한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은 네가 상관할 것이 아니고 너는 나를 따르라.” 딴 사람은 상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섭리는 사람마다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다릅니다. 나를 향한 섭리, 여러분을 향한 섭리, 옆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가 다릅니다.
어느 미국 목사님이 집을 팔려고 내 놓았는데 안 팔립니다. 그런데 어느 성도가 와서 “목사님, 저도 집을 내 놓았는데 사흘 전에 팔렸습니다.”라고 했어요. 목사님은 기가 막혔습니다. 본인은 온 시간과 정력을 다 바쳐서 주님을 섬겼는데 본인의 집은 안 팔리고 기껏 주일날 교회 나와서 예배드리는 것이 고작인 교인의 집은 팔렸으니 불공평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 목사님의 집은 1년 만에 팔렸어요.
여러분은 언제 낙심합니까? 여러분의 인생과 다른 사람의 인생을 비교할 때입니다. 여러분이 언제 교만해집니까? 다른 사람의 인생을 비교할 때입니다. 다른 사람의 인생과 비교하면 교만해지거나 낙심하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절대로 나와 다른 사람을 비교하지 마세요. 그러면 무엇과 비교해야 합니까? 나와 나의 가능성을 비교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나의 가능성을 놓고 현재의 나와 비교하면 발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혜가 풍족한 것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다.” 나는 ‘나’이기 때문에 ‘나’처럼 사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비록 내가 부족하고 환경과 여건이 좋지 않아도, 내 나름대로 끝까지 주님을 위해 살려고 애쓰는 축복이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종종 내 책임을 소홀히 하면서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에게 주신 축복에 대해서는 이기적인 태도로 시기와 불평을 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분노하고 절망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나를 향한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이 있음을 아십시오. 그리고 그 계획은 언제나 선함을 믿으십시다. 그리고 누가 어떻게 뭐라고 하든지, 내가 가야 할 그 길을 꾸준히 주님과 함께 걷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서, 오로지 주님을 사랑하는 그 일편단심으로 환경과 여건의 변화와 상관없이 끝까지 주님을 섬기는 축복이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 21:15-17 / 조용기 목사
<서론>
저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제목으로 오늘 하나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성령을 보내신 날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령은 다른 보혜사 나는 처음 보혜사, 성령은 다른 보혜사 성령과 나는 똑같은 분이신데 예수님은 처음 보혜사요 그 다음 다른 보혜사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를 도와주겠다는 것입니다. 보혜사라는 말은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항상 우리와 같이 있어서 우리를 도와주시는 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여러분 떠나지 않고 항상 계신 것입니다. 그 성령께서 오순절날 이 날에 강림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온 천하 만민을 복음으로 이끄는 거대한 사역을 했습니다. 참 저는 예수님의 제자들 이력을 보면 기가 막혀요. 초등학교 나온 사람, 한 사람도 없습니다. 전부다 쟁이들이에요. 어부를 불러서 주의 종으로 삼으시고 세리를 불러서 주의 종으로 삼으시고 사회에 외롭고 버림받고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을 데려다가 주님께서 3년 반 동안 훈련을 시키시고 마지막 성령을 보내셔서 성령을 받고 난 다음 세계를 움직이는 위대한 주의 종들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성령이 임하시면 여러분 지금, 자신보다 훨씬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예수님 따라 다니면서 많은 훈련을 받은 제자들하고 인터뷰를 좀 해볼까 합니다. 여러분 열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라 3년 반 동안 다녔는데 어떻게 해서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살았고 또 훈련을 받았는지 인터뷰를 해보면 좋을 것 같아서 제가 작정을 했습니다. 방송 인터뷰하는 사람 아니지만 그래도 나라고 못할 것도 없지요. 왜냐하면 제가 해외에 나가면 꼭 인터뷰하는 사람들이 오는 것입니다. 와서 질문을 하고 그 다음 텔레비에 나가고 라디오에 나가는데 말 잘못하면 꼭 그것을 확대해 가지고서 고약하게 만들 때가 많습니다. 나는 오늘 베드로부터 시작해서 열 두 제자를 인터뷰 하는데 정직하게 할 것입니다. 고약하게 안할 것이니 이 분들 조심 안 해도 괜찮을 것입니다.
<본론>
1. 예수님을 만난 인연
제일 인터뷰를 하고 싶은 사람은 베드로입니다. 시몬과 같이 갈대 같은 인생인데 시몬이 어찌해서 수제자가 되었으며 그리스도교의 반석이 되었는지 궁금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베드로에게 물어보는 것입니다. 당신은 예수님과 인연이 있는 것 같은데 어떻게 해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까? 나 말입니까? 그렇지요. 당신 아니고 갈대가 여기 있습니까? 아. 우리 어부들은 밤에 고기를 잡습니다. 갈릴리호수는 낮에는 고기들이 전부다 깊은 곳으로 들어가서 잠을 자기 때문에 안 잡힙니다. 그런데 하루는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는데 그날은 별로 재수가 없는 것 같아요. 한 마리도 못 잡았어요. 그물만 찢어지고 탄식을 하면서 해변가에서 그물을 싣는데 웬 사람들이 아침부터 예수님을 둘러싸고 모여오는데 예수님이 군중을 피해서 뒤로 물러가다가 나중에 해변가로 오다가 더 물러갈 데가 없으니까 내 배에 올라타잖아요. 그리고 해변에서 좀 띄우다가 밤새도록 고기도 한 마리 못 잡은 사람이 예수님까지 배를 빌려달라고 하니 무슨 일인가. 배를 조금 떼 주니까 예수님이 거기 앉아서 말씀을 가르치는데 내가, 당신 거기에서 뭘 배웠습니까? 하니까 배우기는 뭘 배워요? 밤새도록 그물 던지고 피곤해서 예수님 말하는 동안에 잠만 잤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했나요? 주님이 나를 흔들기에 깜짝 놀라 깨보니까 아직까지 배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나도 있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기를 이제 내 설교 다했으니까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아라. 예? 사람 웃기지 마세요. 고기잡이는 고기잡이가 아는데 당신 같은 백년서생이 어떻게 고기 잡는 법을 안다 말이요? 더구나 해가 뜨고 난 다음에는 고기가 안 잡히는데요. 밤이 맞도록 그물을 던졌어도 고기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그런데 무언가 그 베드로의 마음속에 시키는 대로 해라. 시키는 대로 해라. 하는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못 잡았지만 당신이 그물을 던져 보라고 하니까 한번 해보겠습니다. 그래서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던지니 고기가 얼마나 많이 잡혔던지 그물이 당겨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동료 어부들을 불러서 같이 그물을 당겨서 고기를 잡아보니 두 배에 가득했습니다. 얼마나 고기가 많이 잡혔던지 눈이 휘둥그레지고 제일 먼저 베드로가 느낀 것은 이것 보통 사람 아니구나. 이것은 하나님이 같이 계신 사람이구나. 하나님이 같이 계시다고 생각하니까 무엇이 드러납니까? 죄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서 있을 수가 있느냐. 그 자리에서 꿇어 엎드려서 나는 죄인입니다. 물러가 주십시오. 그러니까 주님이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날 따르라. 그래서 예수님을 물고기를 잡는 현실에서 만나 보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냥 만난다고 만나는 것이 아니라 인연이 있어서 만나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교회 늘 왔다 갔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나보지 못하고 종교적으로 왔다갔다하는 사람 굉장히 많습니다. 그러나 교회 와서 결정적인 문제를 해결 받을 때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그 생애 속에 크나큰 변화가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그의 생애 속에 변화가 온 것은 빈 배에 물고기를 채웠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 열매를 맺게 된 것입니다.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기적이 그 마음속에 체험되었기 때문에 그는 주님께 죄를 회개하고 제자가 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참 귀중한 것입니다. 저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전도는 많이 받아 보았었습니다. 누님 친구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아서 집에 놀러오면 꼭 저보고 예수 믿으라고 권면을 했어요. 그래도 예수님을 믿을 생각은 없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도 관심이 없었어요. 그러나 폐병이 걸려서 피를 토하며 죽어갈 때 더 이상 치료받을 수 없고 치료해 주는 사람도 없고 죽는 날만 기다릴 때 그때 와서 전도하며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고 병이 낫는다고 하므로 예수를 진실로 구하게 되고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만나게 된 동기로 말미암아 제가 환상을 보게 되고 예수님이 나를 치료해 주셔서 6개월 만에 죽는다는 사람이 78살 이 될 때까지 살아 있으니 큰 인연입니다. 그때 만난 사실이 평생을 변화시킨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일생에 이러한 중요한 전환점이 있는데 여러분께서는 반드시 예수님을 만나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구출해 주신 것은 베드로에게 있어서는 일생에 크나큰 변화인 것입니다. 그는 젊을 때부터 고기잡이였고 어느 특정한 교육을 받은 사람도 아니고 사회에서 가장 낮은 층에 속한 사람이었는데 그가 예수님의 택함을 받고 나니까 세계를 움직이고 역사를 변화시키는 인물이 되고 만 것입니다. 여러분도 예수님을 만나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베드로의 인터뷰를 하고 있는데 베드로의 형제인 안드레가 하는 말이 내 말도 좀 들으십시오. 내 형의 말만 듣지 말고 내 말 좀 들으십시오. 그 물고기 많이 잡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갈릴리의 산비탈에 갔을 때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 가는데 예수님이 병자들을 얼마나 고쳤든지 병자라는 병자는 다 모여서 산비탈로 오는데 잠시 헤아려 보아도 남자만 5천명, 남자만 옵니까? 여자와 어린 아이들이 따라오니까 수만명이 예수님을 따라왔는데 해는 저가고 날은 어둑어둑 해지는데 먹을 것은 없고 사람들이 허덕이는데 예수님이 빌립을 불러서 빌립아 저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잖아요. 그랬지? 그러니까 그랬다고... 그래. 왜 먹을 것을 줬습니까? 그러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돈 한 푼도 없고 떡 살 곳도 없는데 저 많은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니 예수님이 생각을 잘못해도 크게 잘못했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당신 말하고 대답해서 주님 이곳이 광야입니다. 좀 똑똑히 보십시오. 그리고 돈도 없고 떡 살 곳도 없는데 먹이라고 하면 어떻게 먹입니까? 그러므로 못 먹인다고 내가 거부했었습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명령할 때는 이성적으로 할 수 있어서 명령하는 것이 아닙니다. 뭐냐,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하라고 할 때는 기적을 기대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하는 곳에는 항상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기적을 제하여 버리면 주님의 교훈은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그때, 베드로의 형제인 안드레가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빌립을 제켜 놓고 여기 어린 아이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는데 별로 많지 않지만 주님이 어떻게 좀 해보십시오. 없는 자는 있는 것까지 빼앗는다고 예수님이 뭘 하라고 할 때 없다고 변명하면 있는 것도 빼앗아 버립니다. 그런데 없을 때 있다고 나오면 주님이 더 많이 있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플러스인생을 살아야지 마이너스 인생을 살면 안됩니다. 여러분은 모든 일에 절대 긍정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안드레가 그것을 가지고 오니까 예수님께서 그것을 받아서 손에 얹더니만 전부다 사람을 열 사람씩, 다섯 사람씩, 떼를 지어 앉게 하라고.. 앉게 하자 주님이 떡을 축사하니까 그 다음 제자들이 주고 난 다음에 보면 또 생겨있고 주고 난 다음에 또 생겨있고 이것 정신이 없습니다. 먹고 나니 또 생기고 먹고 나니 또 생기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하나 알아야 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어떠한 경제적인 난관과 어려움이 있어도 주님 뜻대로 살면 또 생겨납니다. 안 생겨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신앙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여러분과 같이 계신 것은 없는 것을 있게 하는 기적을 행하기 위해서 같이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좀 대기업을 하든 중소기업을 하든 구멍가게를 하든 어려울 때 여러분이 해야 될 것은 주님이 같이 계신다는 것을 확인하고 어려울 때 주님 영광 위해서 헌신하고 기적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언제든지 기적이 일어날 것을 믿고 바라보고 입으로 시인하십시오. 그러면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예수님이 함께 계셔서 문제를 해결하실 것을 믿습니다. 나는 승리합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이런 기적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안드레는 말하기를 우리는 정말로 놀랬습니다. 다 배불리 먹이고 난 다음 이제는 사람들이 더 안 먹겠다고 할 때 부스러기를 모아보니 열 두 바구니에 가득 찼었습니다. 주님은 부족함이 없게 하는 것이 주님이십니다. 야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늘 부족함이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입니다. 내가 주고 또 주고 나누고 또 나누어도 내게는 더 넘쳐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남에게 꾸어줄지라도 꾸지 않는 사람이 된다는 그 생각을 마음속에 하십시오. 우리에게는 생각을 하고 난 다음에 그 생각이 환경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내 생각이 나는 안된다. 못한다. 못산다고 하면 그런 것을 늘 상상하게 되고 두려워하게 되고 그런 말을 하면 그런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항상 상상 속에 나는 잘된다. 나는 축복을 받는다. 나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문제없다. 그리고 마음에 담대하게 믿고 그대로 말하면 희한한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저는 항상 절대긍정적인 삶을 살아야 되겠다고 결심을 했기 때문에 아침에 교회 사무실에 나오기 전에 차에 앉으면 하나님, 나는 오늘 예수님 안에서 기쁩니다. 행복합니다. 잘됩니다. 좋은 일이 생겨납니다. 넘치게 좋은 일이 생겨나서 나눌 수가 있습니다. 꼭 그렇게 말합니다. 그렇게 늘 말하고 사니까 지금까지 좋은 일만 있지 않습니까? 나쁜 일도 가끔 있지만...좋은 일이 여러분의 생각과 믿음과 입술의 고백을 통해서 여러분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만들어진 것이 여러분 환경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마음속에 항상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을 생각하고 믿고 말하십시오. 왜,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기적을 행하기 위해서 여러분과 같이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아무것도 안 해 주고 구경만 하려고 오신 예수님이 아닌 것입니다.
2. 베드로가 체험한 사건들
예수님은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고 열 두 바구니가 남게 하므로 놀라운 인상을 제자들에게 준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주님은 어찌하든지 주님 중심으로 살면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을 마음속에 꽉 믿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하는 말이 이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것은 세상에 사람이 물위로 걸어오지 않습니까? 우리가 오천 명 먹이고 열두 바구니 남긴 그 사건 이후에 주님이 우리보고 배 타고 먼저 가버나움으로 건너가라고 해서 예수님 없이 우리는 건너가고 예수님이 군중들을 해산했는데 밤 사경이 불어 바람이 불고 파도가 쳐서 아무리 배를 저어도 배가 앞으로 나가지 않고 고생을 하고 있는데 아 누가 하얀 그림자가 배를 향해서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걸어오지 않습니까? 보니 유령이에요. 우리 어부들은 압니다. 밤에 유령이 물 위로 걸어오면 반드시 그 배가 파선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령인줄 알고 전부다 고함을 치니까 주님께서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그러죠? 그래서 베드로가 만일 주시어든 나로 물 위로 걸어오게 하소서. 주님 오라! 제자들이 다 말립니다. 야, 이 사람아 죽으려고 하냐! 안 된다. 올라가지 마라. 그런데 그는 떨치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물 위로 저벅 걸어 나갔습니다. 저벅저벅저벅 걸어가는데 예수님도 파도를 밟고 오니 오르락내리락 하고 베드로도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걸어가다가 고개를 들어서 옆을 바라보니까 바람이 불고 파도가 쳐오고 무섭다 말입니다. 그만 예수님을 바라보는 눈을 파도를 바라보고 내가 할 수 있다는 말이 사라지고 물에 빠져 죽겠구나. 두려워하자 바로 물에 빠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주여, 내가 빠져 죽겠으니 살려달라고 하니 예수님이 손을 내밀어서 그를 붙잡아 일으켜 세워 주시고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그렇게 말을 해서 구출함 받은 그 이야기를 하면서 예수님은 밤중에 물 위로 걸어오다 빠진 나도 건져 주시더라. 예수님은 이러한 기적을 행하신 분이시다. 이 말을 함으로써 우리가 아무리 어둡고 캄캄한 밤에 고약한 일을 당하더라도 주님만 바라보면 주님이 같이 건져주신다는 것입니다. 바라봄의 법칙으로 잘못 바라보면 안 되는 것입니다. 잘못 바라보면 오늘날 여러분이 늘 바라보고 가슴에 간직한 것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잘못 바라보고 나는 안 된다. 나는 약하다. 나는 병들었다. 나는 정상적인 삶을 못 산다.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두려워 하면 여러분은 망합니다. 믿음의 반대는 두려움입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베드로가 배운 것은 아무리 파도가 치고 바람이 불어도 예수님의 말씀 위에 서서 예수님만 쳐다보고 가면 물 위로 걸어간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파도 위로 걸어가는 것은 예수님을 바라보면 걸어가게 된다. 그러나 바람과 파도를 보면 빠져 죽는다. 여러분의 삶속에 다가오는 환난과 풍파가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환난과 풍파를 바라보고 두려워 하면 물에 빠져 죽습니다. 그러나 바람과 파도가 아무리 불어도 예수님만 바라보면 그리고 믿고 입술로 고백하면 파도 위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아주 간단한 것입니다. 여러분, 바라보고 믿고 말하자. 따라 말씀하십시오. 바라보고 믿고 말하자. 무엇을 바라보느냐. 긍정적인 축복과 믿음을 바라보고 믿고 말하면 축복을 받고 잘못된 것을 바라보고 두려워하고 부정적으로 말하면 물에 빠집니다. 우리 생활 여러분 평범하게 살아갈 동안에 이 세 가지를 완전히 마음에 간직을 하십시오. 언제나 무엇을 바라보느냐.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봐야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보혈을 바라보고 죄 용서함 받고 거룩하게 되고 성령 충만하게 되고 치료와 건강을 바라보고 고침을 받고 건강을 얻게 되고 축복을 받아 저주에서 해방된 것을 바라보고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잘되는 것이고 아주 간단한 것입니다. 이것을 시행하면 여러분의 인생에 언제나 주님이 같이 계셔서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물에 빠지지 말고 물위로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일 뿐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제자들에게 보여주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산 위에 올라가서 그들과 둘러앉아서 기도를 했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예수님이 번갯불 같은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흰옷이 번갯불 같이 번쩍이고 아주 입이 딱 벌어집니다. 그러면서 그 영광의 빛을 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깊은 혼수 같은 잠에 빠졌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직접 환상 가운데라도 만나면 잠에 떨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눈을 똑똑히 뜨고 볼 정도로 정신이 감당 못해요. 저도 여러 번 하나님 환상을 보았는데 진실로 하나님 환상이 마음속에 나타나면 말갛던 내가 쿨쿨~ 정신없이 잠 속에 빠져서 하나님 환상이 떠나가면 번쩍 잠에서 깨어나게 돼요. 그런데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이 영광 가운데 나타난 것을 보고 깊이 잠이 들어서 코를 곯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잠이 좀 깨서 보니까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천 년 전에 세상을 떠난 사람이고 엘리야는 오백년 전에 구름타고 하늘로 올라간 사람인데 생각하기는 이미 다 죽은 사람인데 예수님 앞에는 살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보면 사람이 죽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살다가 저 세상으로 이사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살다가 저 세상으로 이사 가는 사람이지 여러분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말씀하기를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지금 살아있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모세와 엘리야가 장차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고난당할 것을 말씀 드리고 경배하는 것을 보고 야 참 하나님이시구나. 그래서 베드로가 주님 이 자리가 좋습니다. 여기에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해서 하나는 모세를 위해서 하나는 엘리야를 위해서 짓고 여기서 사십시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그 말하는 제자들을 바라볼 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 말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그 말을 들으라. 예수님이 내려가자. 산 아래는 죄인들이 있고 병든 자가 있고 간질하는 사람이 있고 슬픈 사람이 많은데 내가 이들을 위해서 왔으니 내가 이들을 도와줘야 된다고 내려가자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그 산에서 그냥 하늘나라로 올라가 버릴 수 있어요. 하늘나라의 영광을 보여주면서 예수님은 육신을 쓰고 온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하나님이라는 것을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보여 주셨는데 그 하나님이 이 땅에 온 것은 병들고 가난하고 마귀에 잡혀 있고 간질하고 고통당하는 사람을 도와주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데 그 예수님이 이 자리에 계신 것은 우리들을 돕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도움이 필요 없으면 예수님을 만나려고 하지 않아요. 예수님께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은 주님의 도움을 받음으로 변화가 되는 것입니다. 죄인은 용서해 주는 예수님이 계세요. 허물이 많은 사람은 씻어주는 예수님이 계세요. 병든 사람은 고쳐 주는 예수님이 계세요. 저주받고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은 그것에서 건져주는 예수님이 계세요. 죽는 사람은 천국을 이끌어 주시는 예수님이 계세요. 예수님은 여러분, 우리에게 해방과 자유를 주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마귀에게서 해방을 얻고 죄에서 자유를, 허물에서 자유를, 질병에서 자유를, 죽음에서 자유를, 가난에서 자유를, 고통에서 자유를 주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러므로 언제나 우리를 해방해 주시는 주님,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는 주님이셔서 주 안에 들어가면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한 역사가 일어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하여 몸 찢고 피 흘려서 마귀에게 팔린 우리들을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부활하신 능력으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무엇에 묶여 있습니까? 여러분, 병에 묶여서 자유가 없습니까? 거기서 해방되어 나오십시오. 가난의 묶음에서 자유가 없으면 그것을 털고 나오십시오.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려고 자유를 주셨은즉 그러므로 믿음에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마라. 여러분이 자유와 해방을 얻은 모습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그것을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자유가 여러분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마귀는 이미 패배한 원수로서 우리가 알고 나가는데 마귀는 우리를 이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가 모를 때 속이고 점령하지 이제 성경을 읽고 깨달아 알고 마귀를 대적하면 마귀는 여러분을 더 고통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이라는 것을 가장 명백하게 보여준 사건은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라버니 나사로의 죽음에서 건져주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마르다와 그 동생 나사로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들이 갈릴리 지방에 있을 때 유다 땅에 있는 이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어서 그 여동생들이 예수님이 계신 곳에 사람을 보내어서 오라버니가 죽게 되었으니 빨라 와달라고 했는데 예수님은 이틀을 더 기다렸습니다. 죽어서 나흘이 될 때를 기다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철저히 죽은 사람을 살려야 살리는 능력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제자들과 나흘 후에 오니까 그 여자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예수님이 이 자리에 계셨으면 우리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겠나이다. 간절한 마음으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네 오라버니가 산다. 예, 부활의 날에 다시 살 줄 믿습니다. 지금 내가 부활이다. 지금 내가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살겠고 영생을 얻을 것이라. 그래도 그 누이들이 믿을 도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자들에게 자기는 부활이요 생명으로 지금 나를 믿으면 지금 살고 죽어도 산다고 말하는데 그것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여러분 보고 말씀합니다. 너희는 나를 믿느냐? 믿으면 아멘 하십시오. 그러면 너희가 죽지 않고 영원히 살리라. 아멘 하니 좋지요. 예수님은 그 아멘 대답을 듣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들을 데리고 나사로의 무덤가에 가서 무덤 문을 열어 놓아라. 네 오라버니가 산다. 아니오. 아니오. 죽은 지 나흘이 되어 냄새가 납니다. 큰일 납니다. 온 사람들에게 우리들 미쳤다고 합니다. 그러니 무덤 문을 옮길 수 없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아주 분노한 목소리로 발을 구르면서 내가 네게 말하노니 너희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않았느냐. 믿어서 돌문을 옮겨 놓아라. 그래서 울면서 그들은 돌문을 옮겨 놓으니까 예수님이 돌문 앞에서 뭐라고 말씀했습니까? 나사로야 나와라! 그 말 한마디에 죽은 옷 수의를 입은 채로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수의를 벗기고 묶은 것을 풀어주라. 그렇게 말씀했는데 이것을 읽을 때마다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는 것입니까? 그 옛날에 소설 같은 이야기로 있었던 이야기지 실제로는 안 된다. 그러는데 이것은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인 것입니다. 주님이 요사이도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입니다. 요사이 무덤은 옛날 무덤과 달라서 돌로써 막아 놓은 무덤이 아니기 때문에 화장을 하면 불로 타버리고 매장을 해도 살이 썩어져 가기 때문에 문제지만 주님은 살리기 원하는 사람을 오늘날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는 역사를 베풀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요사이 책을 하나 읽고 있는데 나는 천국을 보았다는 미국의 유명한 정신과 병원 의사인 것입니다. 뇌전문적인 의사인데 자기가 뇌병에 걸려가지고서 죽어서 7일 동안 저 세상에 갔다 왔는데 그 사람의 책을 읽어보면 자기가 뇌학자이기 때문에 뇌가 죽으면 인격은 사라진다고 생각했는데 분명히 자기는 뇌에 병이 들어서 죽었는데 죽고 난 다음에 사라진 줄 알았는데 자기가 뇌를 떠나서 독립으로 존재하면서 천국을 볼 수 있었다는 내용을 설명하는데 상당히 확신할 수 있는 정보를 많이 제공해 주었어요. 그가 하는 말이 내가 뇌 전문가 아니냐. 뇌에 대한 일은 나만큼 아는 사람도 많지 않은데 뇌 전문가인 내가 죽었는데 뇌가 없이 떠나가지고 하늘나라에 올라가서 천국을 보았는데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아름다운 처지에 있는 천국을 보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나사로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는 것으로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며 우리 사람들이 이 땅에서 죽어서도 저 곳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확증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 다음 주님은 베드로를 통해서 우리에게 간증해 주는 것이 또 있습니다. 저들이 주님과 함께 갈릴리 호숫가에 와서 주님이 우리 저 바다 건너편으로 가자. 그래서 함께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갑니다. 다 어부였기 때문에 물놀이를 잘하지요. 배를 잘 운전할 줄 압니다. 자기들 모여서 서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배 구석에 가서 팔을 베고 주무십니다. 그런데 점점 파도가 거세게 일어난다 말입니다. 나중에는 아주 파도가 세서 물이 배에 가득하게 되매 그대로 있다가는 빠져 죽겠다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래도 주무시고 계세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 배가 절대로 안 가라앉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평안히 주무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런 믿음이 없기 때문에 불안하고 공포에 떨었습니다.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워서 일으키니까 예수님이 일어나서 바람과 파도를 꾸짖으시니 잠잠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내 믿음을 어디다 두었느냐. 믿으면 이런 것이 오면 기도하고 꾸짖어야지. 당황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여러분과 나와 같이 계셔서 바람이 불고 파도가 일어 우리 삶이 뒤엎어지려고 할 때는 주님께 기도하고 구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바람과 파도를 잠잠케 해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에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바람과 파도가 불어올 때 어떻게 하겠습니까? 포기하고 낙심할 것입니까? 주님께 부르짖을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날도 여러분에게 와 있어서 해방과 자유를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해방과 자유인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때 마귀에게서 여러분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피를 다 쏟고 살을 찢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는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입니다. 죄에서 자유를 허물에서 자유를 질병에서 자유를 저주에서 자유를 죽음에서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따라 말씀하세요. 예수님께서 내게 계시면 나는 해방과 자유를 누린다.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해방과 자유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꿈과 환상을 주시고 예수님은 교회를 통해서 해방과 자유를 주시는 것입니다. 교회가 그냥 건물만 지어놓은 것이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 같이 두세 사람 이상 모인 곳에는 예수님이 함께 계신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몸 된 교회에 나오면 여러분이 각오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반드시 해방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마귀에게서 해방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자유를 얻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예수님이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이 그냥 종교적인 목적으로 왔다 갔다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매일같이 예수님 안에서 해방을 얻고 자유를 얻고 꿈과 환상을 가지고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한 사람으로써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풍랑도 예수님은 잠잠케 하는 기적을 허락해 주는 것입니다. 왜 그러면 이와 같은 많은 기적들을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보여 주실까? 그 이유가 있습니다. 기독교는 기적의 종교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반드시 우리 삶속에 기적이 따른다는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기적이 없는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닌 것입니다. 기적이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마지막 간증에서 자기들이 예수님을 다 버리고 도망친 이야기부터 했었습니다. 예수님이 잡혀서 사형선고를 받고 끌려가기 전에 예수님이 베드로를 쳐다보니 베드로가 예수님 보고서 밖에 나가서 통곡하고 울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한 것입니다. 첫 번째도 예수님을 모른다. 두 번째도 예수님 모른다. 세 번째는 맹세하고 저주하여 가로되 나는 그 사람 모른다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발견한 것은 예수님을 안 믿을 수는 없으되 목숨을 내놓을 만큼 사랑을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럴 힘이 안 생긴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그럴 때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안 믿을 수는 없어서 믿기는 하지만 그러나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라 하면 그렇게 할 힘이 모자란다는 것입니다. 그게 문제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질문한 질문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도 거기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안 믿을 수는 없지요? 예수님을 구주로 믿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네 목숨을 나를 위해서 내놓으라고 하면 할 마음은 있지만 힘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힘이 없지요. 예수님이 그것조차도 다 이해하시는 것입니다.
3.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하셔서 40일 동안 여기 번쩍 저기 번쩍 하시면서 나타나실 때 제자들은 어디에서 예수님이 나타나실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 고향으로 내려가자. 고기잡이는 천상 고기나 먹고 살아야 되지 않겠느냐.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간다. 바다로 자기 배의 먼지를 털고 나가니까 다른 제자들도 우리도 우리도 다 걸어 나갔습니다. 밤새도록 그날도 물고기를 잡으려고 해도 못 잡았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해변가에 서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얘들아 무엇이 좀 있느냐? 아무것도 없습니다.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져 보아라. 오른편에 던지니까 물고기가 많이 잡혔거든. 제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예수님이시다. 주님이시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옷도 걸치지 않은 채 그냥 물속에 뛰어 들어가서 예수님께 나오니까 예수님이 숯불을 피워 놓고 물고기를 구워 놓고 기다리십니다. 그래서 다 배불리 먹고 난 다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대표인 베드로를 정면으로 보시고난 다음 베드로야, 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때 사랑이라는 말이 예수님이 아가페라는 말을 썼습니다. 헬라어에서는 사랑이라는 글자가 두 개 있는데 아가페는 목숨을 바쳐 사랑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저 친구로 사랑하는 것은 필레오라고 합니다. 필레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아가페. 이것은 목숨을 바쳐서 사랑하는 것이고 그냥 친구로 사랑하는 것은 필레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쳐다보시고 베드로야 네가 나를 아가페 하느냐? 목숨을 바쳐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눈을 밑으로 깔고 고개를 흔들면서 나는 주님을 필레오 합니다. 친구로 사랑합니다. 그래. 내 양무리를 쳐라. 잠시 후에 예수님이 또 베드로야. 네. 너 나를 아가페 하느냐? 예. 주님 나는 주님을 필레오 합니다. 친구로 사랑합니다. 잠시 있다가 예수님께서 베드로야. 네. 너 나를 필레오 하느냐? 친구로 진짜 사랑하느냐? 간이 덜컹 내려앉았습니다. 왜냐하면 전에 예수님을 아가페 한다고 세 번이나 말하고 난 다음 부인했는데 주님이 이제 또 필레오 하느냐 묻는데 언제 또 주님을 버릴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주님이시여 주님이 알지 않습니까? 나는 나 몰라요. 내가 전번에도 주님은 희생적으로 사랑한다고 아가페 한다고 말을 했으나 세 번이나 부인한 전력이 있는데 주님이 자꾸 나를 아가페 하니까 나는 친구로서 사랑한다고 두 번 말했는데 세 번째 아가페라고 하느냐고 묻는데 내가 나를 모르겠어요. 지금 친구로 사랑한다고 했다가 언제 또 모른다고 뒤로 자빠질지 내가 어떻게 알아요. 주님만이 아십니다. 주님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래. 네 양 무리를 쳐라. 이것은 베드로만 보고 말씀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보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너희 나를 목숨을 바치고 사랑하느냐? 친구로서 사랑합니다. 주일날 안 지킬만하면 안 지키기도 하고 거짓말 안해야 될 것인데 필요하면 거짓말도 좀 하고 세상살이 해나가는데 있어서 아가페를 못하고 친구로 사랑합니다. 이런 것이 우리의 심정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여러분과 내가 거짓말 안하는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신적인 사랑으로 사랑하지 못하고 친구로서 사랑하는데 친구로서 사랑한다고 주님이 버리시는 것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인정해 주시고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데 아가페로 사랑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나중에는 네가 나를 필레오 하느냐? 친구로 사랑하느냐? 그것은 나는 이제 대답 못합니다. 주님이 아시지요. 그때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한 것은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한 것을 기다려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너희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얻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목숨을 바쳐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은 성령이 임해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나의 힘으로 나의 능으로 되지 않고 성령이 임하시면 성령의 권능으로 내가 마음에 성령께 잡혀서 주님을 사랑할 수 있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오순절날에 백이십 문도가 성령을 충만히 받고 방언으로 시작하자마자 성령의 불에 의지해서 그 엉터리 같은 제자들이 나가서 세계를 3백년 만에 변화시킨 것입니다. 그 무시무시한 로마제국을 3백년 만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국가로 변화시키고 만 것이고 2천년이 된 오늘날에는 세계 인구의 60%를 예수 믿는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알지 못하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승천하시고 사순절이 지나고 난 다음에 보내신 성령님을 우리 가운데 그대로 두시고 불러내지 않았었습니다. 성령은 우리 가운데 지금 함께 계신 것입니다. 성령은 여러분과 나의 보혜사가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나를 돕기 위해서 언제나 같이 계신 분이 보혜사 성령이신 것입니다. 성령은 바람과 같고 안개와 같이 우리와 같이 계시는데 눈으로는 안 보이나 여러분이 성령을 인격적으로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드리면 우리 가운데 와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진리를 깨달아 알게 해주시고 진리 위에 설 수 있도록 은혜와 사랑과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성령이 아니면 절대로 목숨을 바쳐 아가페할 사랑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성령이 오시면 목숨을 바쳐 아가페하는 사랑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오늘 성령이 우리 여의도순복음교회에 이 자리에 와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충만히 채워지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여러분을 통해서 가난한 사람들은 모두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복을 받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평화의 복을 영적으로 가난한 자는 성령으로 충만으로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는 부요로 변화시키는 기적을 베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여러분이 어떠한 포로가 되어 있어도 해방을 얻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자유와 해방을 얻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안을 열어 주셔서 하늘나라 영광을 깨달아 알 수 있게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마귀가 여러분 몰래 억압해서 여러분을 훼방하고 여러분을 억압하고 우울하게 만들고 절망적으로 소망을 잃게 만드는 것을 여러분을 건져내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은총이 값없이 선물로 주신다는 것을 깨달아 알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우리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깨달아 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하늘나라의 영광을 여러분에게 채워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령이 여러분과 같이 계신 것을 믿으십시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같은 어부에게도 같이 계셔서 성령이 저들을 위대한 일군으로 만드신 것처럼 여러분 성령이 같이 계시면 성령이 여러분을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이 마귀에게 해방되고 억압에서 자유를 얻는 것이 여러분의 특권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특권을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오늘 모두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서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을 꿈을 꾸십시오. 마음에 그것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믿으십시오. 그리고 나는 전인구원을 받은 사람이라고 입으로 시인하십시오. 그러면 어찌할 수 없이 하나님의 능력이 여러분과 같이 계셔서 내일은 오늘보다 다음 달은 금번 달보다 명년은 금년보다 나아지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제자들을 불러 모으시고 이 많은 기적을 보여 준 것은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보통이 아닌 하나님의 기적으로 삶이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보통 사람이 아닌 기적을 약속받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기적이 일어납니다. 기적을 알고 믿고 꿈꾸고 고백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 기적 속에서 여러분이 승리하게 되면 그때는 더 큰 믿음을 얻게 되고 더 큰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가 그것을 누릴 수 있다는 것 보증해 주는 약속의 말씀이요 그렇기 때문에 성령을 주신 것입니다. 성령이 약속의 말씀으로 여러분이 꿈꾸고 믿고 입술로 고백하고 나가게 만들어 주기를 원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부터 시작해서 여러분 절대로 과거를 돌아보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부정적인 것을 바라보고 탄식하지 마십시오. 예수님 안에서 절대 긍정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 완전히 해방되었습니다. 완전히 자유를 얻은 사람이 된 것입니다. 또 여러분을 통해서 마귀는 쫓겨나가고 억압은 사라질 수 있습니다. 빌립 집사가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하니 많은 사람들에게 붙은 귀신이 소리치며 나가고 절름발이와 앉은뱅이가 나가니 그 성에 기쁨이 충만하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평신도라도 하나님의 나라를 마음속에 모시고 있기 때문에 자유와 해방을 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자유와 해방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평신도지만 이 자유와 해방을 전달해 주십시오. 예수 이름으로 행하면 성령께서 기적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다 같이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주님 오시기 전에 큰 뜻을 이룰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한 번 기도하겠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 21:15-22 / 이성우 목사
중학교 시절에 축구를 하다가 사고로 실명을 했지만 장애를 극복하고 연세대학교 문과대를 졸업한 뒤 1972년에 도미하여 피츠버그대학에서 교육학 박사학위를 받아 한국인 최초의 시각장애인 박사가 되어서 조지 부시 대통령 시절에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차관보를 역임한 강영우박사는 그동안 여러 가지 경로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도전 정신을 심어준 분입니다. 그런 그가 안타깝게도 아직 채 70이 되지 않은 연세인데 지난 해 10월에 담석으로 병원을 방문했다가 췌장암 진단을 받은 후 수차례 수술을 받고 최근 생애의 마지막 시간을 아내와 함께 보내기 위해 병원에서 퇴원을 해서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생의 작별을 고하기 위해 지인들에게 이메일로 인사를 했는데, 그분이 감리교 신문인 기독교 타임즈 기자에게 보내온 이메일 내용이 신문에 소개된 바가 있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누구보다도 행복하고 축복받은 삶을 살아왔습니다. 주변을 정리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작별할 시간도 허락받았습니다. 여러분으로 인해 저의 삶이 더욱 사랑으로 충만하였고 은혜로웠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저로 인해 슬퍼하거나 안타까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그의 두 아들은 현재 미국에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자랑스러운 한국 민의 위상을 떨치고 있는데, 큰 아들인 진석 씨는 30만 번 이상 백내장 굴절 수술을 집도해서 워싱턴 포스트가 선정한 ‘2011년, 최고의 슈퍼 닥터’에 뽑혔으며, 차남인 진영 씨는 지난 해 10월에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선임 법률고문으로 임명되어서 2대째 백악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실명의 불행 중에서 만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좌절하지 않고 꿈을 키워나갔고 그 꿈이 결국은 현실이 되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신앙인으로서의 좋은 영향력을 끼쳤으며, 많은 감동과 용기를 주었는데, 인생의 여정에서 만난 시련과 위기 앞에서도 다시 한 번 멋진 삶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어서 잠시 소개를 해 보았습니다. 이 분의 삶을 들여다보면, 충분히 불행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있었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내일에 대한 꿈을 꾸었고, 좌절하지 않고 꿋꿋하게 그 길을 걸어감으로써 결국은 믿음의 사람이 누릴 수 있는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누렸을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자가 될 수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복음은 그 안에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는 줄로 믿으며,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새삼스럽게 깨닫게 됩니다.
저의 어린 시절 때만해도 우리나라 사람들의 삶을 보면 한 가정에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가족들이 많았습니다. 아직 산업화가 진행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한 밥상에서 여러 가족들이 어울려서 식사를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어린 자식들은 조부모나 부모님을 통해서 섬김과 돌봄을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어린 자녀들은 자신이 소중한 존재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가족들을 배려하는 법을 어려서부터 배울 수 있었습니다. 맛있는 반찬이 있으면 그것을 서로 나누어 먹는 것을 통해서 다른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배려하는 마음을 자연스럽게 배우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식들이 지금처럼 한 두 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보통 대 여섯 명은 되니까 형제들끼리 어울리는 시간이 많았고, 그 어울림을 통해서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더 중요한 사실은 좀 큰 자식이 바쁜 엄마, 아빠를 대신해서 자기보다 어린 동생들을 돌보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일찌감치 철이 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동물은 사료만 먹어도 성장하지만 사람의 성숙은 밥만 먹는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경우에는 서로가 배려하며 배려를 받아야하고, 서로 간의 섬김과 돌봄을 통해서만 정상적인 성숙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교회는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령한 몸이며, 주님의 몸 된 이 교회에 속해 있는 모든 성도들은 주님의 몸을 이루는 각 지체들입니다. 그리고 이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요 하나님이 세우신 신령한 가정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아버지인 목회자가 있고, 주 안에서 먼저 거듭난 영적인 맏자식이 있는 것이며 또 그 뒤를 잇는 영적인 아우들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성도들은 이 신령한 가정의 가족 구성원들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새로운 영적인 생명이 잉태되고 출생하며 사랑의 섬김과 돌봄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 줘야하는 사랑의 공동체요 믿음의 공동체일 뿐만 아니라 생명의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13장에서 잡히시기 전에 행하신 세족식에서 자기가 사랑하던 제자들의 발을 몸소 씻겨 주심으로 섬김과 돌봄의 본을 보여주시고 그들이 서로 섬기며 돌봄의 삶을 삶으로 자신의 뒤를 따를 제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배려하며 섬기고 돌보는 삶을 살 것을 당부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기대와는 달리 모두가 예수님을 향해서 세상적인 왕을 기대하면서 서로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자 하는 세상적인 야망을 가지고 있다 보니까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는 가운데 공동체 안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기 때문에 십자가 죽음이 코앞에 다가온 예수님의 입장에서 이런 제자들의 모습이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3장 14-15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오늘 본문 말씀인 요한복음 21장 15-22절까지의 말씀은 예수님의 수제자로서 3년 동안 예수님과 동고동락했지만 끝까지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 실패했던 시몬 베드로가 자기의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서 바다에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으려고 했지만 그것마저도 실패한 상태로 지쳐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베드로에게 찾아오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에 걸쳐 물으시고는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자신의 양 무리인 성도들을 섬기며 돌보는 삶을 살 것을 당부하는 목양의 위임 식 장면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속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연거푸 세 번씩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고, 그 물음에 대해서 베드로 역시 “내가 주를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세 번에 걸친 물음과 대답을 통해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베드로에게 있는 것을 확인하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그 주님 사랑하는 마음을 주님의 양을 먹이고 치는 일을 통해서 나타내 보여 줄 것을 요청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명령과 위임을 받은 베드로는 교회 전승에 의하면 본문 18절 말씀처럼 주님의 양 무리를 돌보고 섬기는 일을 위해서 순교의 길을 걸어감으로써 그 명령과 위임에 충성을 다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서는 다른 복음서들과 달리 이미 교회가 태동된 이후에 기록된 복음서로서 여러 가지 이단사상들이 교회를 어지럽게 만들고 있는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믿음을 고백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요한복음 서를 시작하자마자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목적 때문에 요한복음서는 일곱 번에 걸친 예수님의 표적과 일곱 번에 걸친 예수님의 설교를 통해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으며, 일곱 번에 걸친 ‘자기 선언’ 형식을 통해서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계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믿음’과 ‘영생’을 강조하고 있으며, 누구든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리스도이신 것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갖게 됨과 아울러 그들은 심판을 받지 않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되는 영생의 삶을 약속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이러한 놀라운 축복과 은혜가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라고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는데, 이런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에서 완성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내용은 기독교 복음의 핵심적인 진술로서 우리 모두가 이러한 증거에 대한 분명한 신앙의 고백을 가지고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이 복음을 부지런히 증거 하는 자들이 되어야 함을 요한복음은 깨우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전도자로서의 헌신적인 삶과 충성을 요구하며 결단을 촉구하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의 핵심적인 내용인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전반부인 요한복음 21장 1절부터 14절까지의 말씀은 디베랴 해변을 배경으로 그려진 한 폭의 수채화 같은 정감을 느끼게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21장의 주제는 분명히 예수님께서 당신의 부활하심을 재삼 입증해 보이심으로써 제자들이 분명한 믿음을 갖게 만들어서 그들이 담대하게 나아가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이신 것과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된다고 하는 놀라운 사실을 증거 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무거운 주제를 말씀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르는데 실패한 제자들을 찾아오신 예수님의 모습은 너무도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을 느끼게 만들어 주고 있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 저자의 의도는 과연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것은 분명히 제자로서의 삶을 실패한 그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불어넣어 줌으로써 자연스럽게 다시금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끄시기 위한 주님의 속 깊은 배려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실패한 자들을 책망하지 않고 다그치지 않으며 힘을 잃은 그들에게 새 힘을 불어 넣어주시기 위해서 친히 먹을 것을 준비해서 그들을 먹이시는 자상함을 보여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3년 동안의 공생애를 사시는 동안에 따르는 무리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하시고 그들의 문제를 놀라운 능력으로 해결해 주심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 하여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도록 만드는 것도 아주 중요한 과제였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을 훈련시켜서 그들을 든든하게 세우는 문제가 역시 아주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포함되어 있는 요한복음 21장을 보면, 어떤 면에서는 예수님의 한 축의 사역이 실패한 것처럼 보여 지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모두 예수님을 따르는데 실패하고 부름받기 전의 삶으로 돌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은 따르는 일에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제자들도, 제자들을 훈련시키는 일에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예수님도 결국은 승리를 거두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처음 부르심을 받을 때에도, 그리고 재차 부르심을 받는 이 장면에서도 그들은 마치 실패한 자처럼 보이는 변변치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제자들을 부르셔서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심으로써 놀라운 복음의 증인들이 될 수 있도록 만드셔서 귀하게 사용하신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21장은 평생 동안 하나님 앞에서 받은바 은혜를 기억하며 그 은혜를 갚기 위하여 복음의 증인으로서 헌신하며 살아가야 할 우리들에게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데, 첫째는 순종이며, 둘째는 사랑입니다. 밤이 새도록 고기를 잡지 못한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내렸더니 많은 고기를 잡게 된 것은 전도자에게 반드시 필요한 순종의 자세를 교훈하고 있으며, 세 번에 걸친 예수님의 질문에 대하여 사랑한다고 고백했던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전도자에게 반드시 필요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가짐을 깨우쳐 주고 있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전 세계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그리고 교회적으로도 사랑의 마음이 듬뿍 담긴 진정한 섬김과 돌봄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 하나님은 이 땅에 세우신 교회들을 통해서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 가시기를 원하시는데 이 거룩한 역사를 위해서 하나님의 교회 안에 먼저 부름 받은 성도들이 이러한 섬김과 돌봄의 아름다운 삶을 살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아침,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향해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묻고 계십니다. 이 거룩한 물음에 여러분들은 뭐라고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만약 베드로처럼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을 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진심이라면 그 사랑하는 마음은 이제 여러분들의 구체적인 섬김과 돌봄, 배려와 나눔의 삶을 통해서 표현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은 마지막 순교의 길을 감으로 끝까지 충성을 다했던 베드로처럼 주님 앞에 서는 그 날까지 변함없이 지켜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
김정호 목사
우리나라 말은 그 속뜻을 알면 고개가 끄덕여질 정도로 깊습니다. 예를 들어 ‘몸’이란 모든 것이 모여 있다고 해서 ‘몸’입니다. ‘얼굴’이란 얼이 들락날락 하는 구멍이라는 뜻입니다. ‘얼’은 사람의 넋, 혼, 정신입니다. 그래서 흔히 넋 나간 모습으로 있는 사람을 보고 ‘얼빠진 놈’이라고 합니다. 사람의 희로애락 진선미(喜怒哀樂 眞善美)가 얼굴에 다 나타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회사에 입사하기 전 ‘면접’을 보는 것은 얼굴을 보는 것입니다. 물론 스펙(Specification)을 보기도 하지만 면접은 얼굴을 보는 것입니다. 이상하게 면접에서 떨어지는 사람은 계속 떨어지고 붙는 사람은 그냥 한 번에 붙습니다. 그 이유는 붙는 사람의 ‘굴’에는 생기, 자신감, 여유의 ‘얼’이 있습니다. 떨어지는 사람의 ‘굴’은 뭔지 모르게 불안하고 용기가 없고 자신 없는 ‘얼’이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취업준비는 ‘얼’ 관리부터 해야 합니다. 사람의 ‘얼’이 교만, 시기, 탐욕을 품으면 그 ‘굴’은 폐허된 집처럼 됩니다. 사람의 ‘얼’이 겸손, 금식, 말씀을 품으면 그 ‘굴’은 광채가 나고 생명이 연장되고 천사가 된다는 점을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거울을 보고 나의 얼굴을 살펴봅시다. 내 얼굴에서 보이는 것은 무엇인가요? 쩨쩨한 얼굴이라도 예수 믿으면 겸손한 얼굴이 되고 날카롭고 냉정한 얼굴도 사랑을 하면 부드럽고 따뜻한 얼굴이 되고 좀스러운 얼굴도 인자한 얼굴로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 잘 믿으면 얼마든지 예쁘고 겸손하고 따뜻한 얼굴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얼굴에 모든 것이 들어 있고 표현되고 있습니다. 얼굴이 삶이고 인격이고 신앙입니다. 더 평안하고 은혜스러운 얼굴이 되기를 바랍니다.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에 비하여 열정적인 사람입니다. 신앙고백도 잘 하였고 맹세도 잘 하였고 또한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뵐 면목이 없었습니다. 후회와 반성도 많이 하였고 닭 우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통곡을 하였을 것입니다. 모든 부끄러움과 비난과 갈등을 품고 갈릴리 바다로 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 이런 상태에 있는 베드로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베드로는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두 번 대답을 하였고 세 번째는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성, 죄, 욕심, 눈물, 믿음을 다 아십니다. 우리에 대하여 모르시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시면서도 우리를 선택하시고 사랑하시고 하나님의 일꾼으로 삼아 주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위하여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1. 사랑의 사람이 됩시다
본문 15절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이 항상 잊지 말아야 할 한 가지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5)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를 사랑하지 않을 때 항상 우상숭배를 하였습니다. 부부간이나 형제나 친구 간에도 사랑이 결핍되면 서로 보기 싫어 멀리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자연적으로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가까이 합니다. 성도와 교회도 싫어집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사도 요한의 제자로 알려진 폴리갑(polycarp)이 총독 앞에서 재판을 받을 때 총독은 폴리갑이 노령이기에 황제를 두고 맹세하면서 그리스도를 저주하면 석방하고 부귀영화를 약속했습니다. 이 때 폴리갑은 ‘내가 86년 동안 하나님을 섬겼으나 그분은 나를 한 번도 저버리신 일이 없다. 어떻게 나를 구원하신 나의 왕을 저주할 수 있겠는가?’라고 응답한 후 화형을 당하였습니다.
신 칠거지악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돈돈부인-남편이 돌아오면 돈돈돈 밝히는 여자, 꼬치부인-들어오면 꼬치꼬치 뭐했어? 캐묻는 여자, 달달부인-쉬는 날 쉬고 싶은데 애들 데리고 어디 가야 된다고 달달달 볶는 여자, 비교부인-남의 남편, 남의 차, 남의 집과 비교하는 여자, 자유부인-아무런 행방을 모름. 남편 출근 후 어디 가 있는지 알 수 없는 여자, 멸시부인-시댁을 무시하고 올케 시누이를 무시하는 여자, 군림부인-네가 뭘 알아, 당신이 벌어다 준 것보다 내가 아파트 투자해서 번 돈이 더 많아 하는 여자……. 남편이 일 년 동안 열심히 번 돈보다 아파트 투자해서 어머님들이 한방에 번 돈이 더 크니까 남편들을 쳐다보면서 ‘네가 뭘 아냐’하는 겁니다. 여러분, 결혼 생활이 꿈꾸던 환상의 세계가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결혼을 통해 깨달은 것은 ‘내 안에 얼마나 많은 죄성이 있는가’하는 겁니다. 내가 얼마나 분노하고 쉽게 화내는 사람인지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결혼을 선물로 주셨을까요? 우리가 자신을 제대로 알고 할 수 있는 한 완전하게 교육되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뜻이 거기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성숙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가정을 통해서 우리의 죄성과 인간성을 발견하고, 이것밖에 안 되는 사람임을 깨닫고 서로 성숙해지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훈련시키고 성숙시키시는 교육장이 가정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이 가정을 통해서 매일매일 ‘나를 죽이고 너를 살리는’ 연습을 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내가 살아 있을 때는 결코 행복하지 않습니다. 내가 죽고 예수 그리스도가 온전히 나를 주관하도록 내어 드릴 때 그곳에서 비로소 행복이 시작됩니다.
왜 미운 사람이 많아집니까? 전쟁 위기를 조장하는 북한과 김정은이 한없이 불쌍하고 밉습니다. 우리는 돈, APT, 땅……. 너무나 많은 것들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 사람들을 사랑하되 우리 주님을 더욱 사랑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2. 사역의 사람이 됩시다
본문 17절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예수님은 아무에게나 사역을 맡기시지 않습니다. 주님을 무엇보다도 사랑해야 합니다. 세 번 사랑을 확인하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린 양은 주님의 사랑의 대상이며 동시에 연약한 교회의 모습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성도를 양으로 비유한 것은 성경에 많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랑을 다짐하신 후 주님의 양을 위탁하셨습니다. 주의 양을 먹일 자격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대한 신앙은 구원의 조건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향한 사랑은 주의 일을 맡을 조건입니다. 양을 먹이는 것은 양을 치는 일 중에 가장 중요하고 어렵습니다. 말씀과 은혜와 사랑으로 잘 먹여야 합니다. 잘못된 길로 나가는 양은 잘 인도하고 훈련해야 합니다. 몽둥이로 치라는 뜻이 아닙니다.
행복에 대하여 사람들이 그릇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행복은 개인적인 문제라는 생각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아버지가 실직하면 온 가족이 불행하여집니다. 어머니가 병이 들면 자녀 모두가 근심에 쌓입니다. 행복은 마치 바이러스처럼 전염력이 강합니다. 물론 불행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의 James Pauler 교수는 2년간의 조사연구를 통하여 행복도 불행도 전염이 된다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가족이나 친구가 행복한 사람은 행복감이 15.3%나 증가한다고 발표하였습니다. 행복바이러스는 인간관계를 통하여 전염됩니다. 옆집 사람의 친구가 행복하면 나의 행복도 9.5%가 높아집니다. 친구의 친구가 행복하면 나의 행복감이 5.6%나 늘어납니다. 한 사람이 행복하면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그의 행복 바이러스를 퍼뜨립니다. 불행이나 외로움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람이 외로우면 친구의 친구에게까지 전염됩니다. 외로움은 불신과 부정적 감정을 통하여 전염됩니다. 예를 들어 내가 외로움을 느끼면 친구나 가족에게 인상을 쓰거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말을 하게 됩니다. 그런 대우를 받은 사람은 다시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대합니다. 그런 식으로 부정적 바이러스가 번져 나가게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행복 바이러스도 불행 바이러스도 그리고 고독 바이러스도 전염력이 있음을 인식하고 행복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일에 전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가 절대로 행복하여야 하는 이유가 이점에 있습니다. 내가 불행하면 다른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기 쉽기 때문입니다. 히틀러는 어린 시절 극히 불행한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가 총통이 된 후에도 친구도 없고 유머도 없이 열등감에 시달렸습니다. 얼마 전 사살된 빈 라덴도 외국 출신 생모와 함께 살며 아버지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집 안에서 그는 “노예의 자식”으로 통하였습니다. 우리 사회도 요즘 “묻지 마 살인”이 자주 일어납니다. 불행한 사람들이 저지르는 사건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무조건 행복하여야 합니다. 타인에게 불행을 주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귀한 사명과 사역을 맡기셨습니다. 모든 사역은 다 귀하고 동등한 것입니다. 직장인들 80%가 현재의 삶과 일에 불만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양을 먹이고 치는 귀한 사역을 불평과 불만이 아닌 행복과 사랑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기쁨으로 믿고 행복하게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을 생각하면서 주께서 주신 사역을 기쁨과 행복으로 감당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3. 순종의 사람이 됩시다
본문 18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진실로 진실로’라는 문구는 엄숙한 분위기를 시사 합니다. 띠를 띠운다는 것은 묶는다는 뜻입니다. 베드로에게 주어진 소명은 이제는 거역할 수 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삶을 자의적으로 살 수 없습니다. 주님께 붙잡힌바 되었는데 그것은 억지로가 아니라 성령의 감동과 감화로 말미암아 자발적인 결단에 의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초대 교회 설립과 부흥에 맹활동한 후 노후에 끌려가서 순교한 사실을 가장 분명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터툴리안이 본 절을 인용하여 베드로의 순교를 처음으로 전하며 오리겐이 처음으로 베드로가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혔다고 전하였습니다. 64년 7월에 네로 황제에 의해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고 사역을 한다는 것은 기쁘고 즐거운 일이기도 하지만 주와 같이 죽고 주님을 위하여 순교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베드로에게는 베드로의 길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과 죽음의 모든 열쇠는 예수님께 있습니다. 인도하시는 대로 끝까지 순종하며 갈 뿐입니다.
기독교 역사상 브라더 로렌스의 얘기는 참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카르멜 수도원에 들어가 항상 후미진 자리를 좋아했습니다. 그는 정식 수도사도 아니고 평신도 수도사로서 있으면서 수도원 부엌에서 항상 음식 만들고 설거지하는 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을 정말로 기쁘게 했습니다. 그는 식당에서 정식 수도사들을 하나님이 보낸 천사로 생각하며 섬겼습니다. 수도사들이 식사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항상 흐뭇함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는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부엌이 천국이 되게 하소서” 그처럼 부엌에서 항상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체험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지친 수도사들이 이 식당에 들어서기만 하면 신기하게 마음에 하나님의 평화가 임하는 것을 느낀 것입니다. 한 두 명도 아니고 모든 사람들이 매일 식당에 갈 때마다 그런 감동을 느끼니까 그가 있는 후미진 식당은 그 수도원에서 가장 영광스런 자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했던 한 영혼이 아무도 보지 않는 장소에서 겸손하게 다른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보시고 우리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헌신하는 심령을 참으로 기뻐하십니다. 나중에 그 카르멜 수도원에서 원장을 뽑는 투표가 있게 되었습니다. 누가 되었을까요? 원장 후보조차 될 수 없었던 평신도 수도사인 브라더 로렌스가 원장에 뽑히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후미진 곳에서 헌신하는 사람을 반드시 일으켜 세우십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좋은 자리는 정말 좋아합니다. 그러나 헌신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사람들은 많지만 헌신을 해야 진짜 좋은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은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처럼 좋은 자리를 좋아하면서 헌신은 싫어하니까 싸움이 많아집니다. 사람들이 싸우는 이유를 보면 많은 경우에 자리다툼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앉으려고 싸우는 자리는 언제나 만원입니다. 자기 영광을 누리고 으스대면서 남을 이끌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주신 정말로 좋은 자리는 항상 비어 있습니다. 그 자리는 섬겨야 하고 참아야 하고 낮아져야 하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그 자리가 진정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축복보다는 사람의 영광을 더 구합니다. 그것이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주님의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켰을 때는 서로 옆자리에 앉으려 했습니다. 바다를 잔잔케 했을 때도 서로 옆자리에 앉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질 때에는 모두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향해 가다 보면 어쩌다 어려움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그때 그 어려움을 회피하고 떠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생활을 하다 보면 그런 경우를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교회가 부흥할 때는 서로 한 자리 차지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교회의 시련의 날에 슬그머니 빠지고 싶은 유혹이 생깁니다. 그때 그 유혹과 인간의 본성을 극복하고 어려움을 함께 져야 합니다. 정말 하나님의 축복된 존재가 되려면 프로 근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진정한 영적 프로(pro)가 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영적 아마추어가 아닌 끝까지 참고 충성하고 생명을 바치는 이 시대의 영적 프로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십니다. 아픔도 상처도 믿음과 사랑과 사람이 모르고 내가 모르는 것까지 다 아십니다. 우리 모두 사랑의 사람, 사역의 사람, 순종의 사람이 되어 주님을 더욱 기쁘게 해 드리는 이 시대의 베드로와 같은 일꾼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요 21:15-23 / 서명성 목사
지난 1월말부터 미주장신대에서 소그룹성경공부 과목을 가르쳤습니다. 엊그제 시작한 것 같은데 벌써 한 학기가 끝나면서 내일이면 마지막 수업을 합니다. 처음 가르치는 과목인지라 준비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고 분주한 사역일정에 쫓기다보니 잠을 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어쨌든 아주 보람 있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 깊이 들어가고 받은 은혜를 함께 나누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의미 있는 지를 새삼 깨달았습니다.
주어진 문장을 잘 이해하려면 먼저 관찰을 잘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누가 등장하고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어떻게 그리고 왜 벌어지고 있는 지 파악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을 얼마나 잘 관찰하고 계신지 두 가지를 묻겠습니다. 첫 번째, 베드로가 예수님과 대화를 나눌 때 아침식사를 나눈 바로 그 자리에서 나누었겠습니까 아니면 근처 호숫가를 걸으면서 나누었겠습니까? 두 번째, 베드로가 그 대화를 나눌 때 다른 제자들도 그 대화 내용을 곁에서 들었을까요? 아니면 아무도 들은 사람이 없었을까요?
관찰의 또 다른 중요 요소는 핵심단어가 무엇인지 찾는 것입니다. 핵심 단어는 반복해서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와 나눈 대화를 보면 두 가지 표현이 반복됩니다. 하나는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이고 다른 하나는 “나를 따르라”는 명령입니다. 핵심단어만 나열해도 주어진 문장의 윤곽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려면 먼저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관찰 단계에서 본문을 잘 이해하려면 앞부분에 어떤 내용이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베드로가 다른 여섯 명의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호수에서 밤새 그물을 던졌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때 주님이 나타나셔서 “배 오른편에 던지라” 하십니다. 말씀대로 순종하여 그물을 던졌더니 큰 고기 153마리를 잡았습니다. 힘들게 고기를 끌고 해변에 와 보니 주님은 이미 아침을 준비하여 제자들에게 떡과 생선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 번째로 나타나셨습니다. 주님은 개인적으로 찾아오셔서, 베드로를 만나시고, 용서하시고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신 후에 제자로서의 사명을 일깨우십니다. 본문을 통하여 주님이 기뻐하시는 제자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함께 살펴봅니다.
“나를 사랑하느냐”(15-17절)
아침을 먹은 후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베드로는 아마 주님이 말씀하실 때 ‘이제 올 것이 왔구나’하며 속이 뜨끔하였을지 모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예수님은 베드로를 계속해서 ‘시몬’이라고 부르십니다. 그 이유는 베드로를 처음 만나실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그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 사람들로 번역된 ‘투톤’은 사람과 사물을 다 가리키는 복수대명사입니다. “이 사람들”로 번역한다면 함께 식사하던 다른 여섯 제자들을 가리키고, ‘이것들’로 번역한다면 베드로에 관련된 모든 것, 즉 가정이나 사업, 사역 등이 다 포함됩니다. 문맥으로 볼 때 베드로에게 관련된 모든 것들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느냐 물으시면서 주님을 향한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시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실 때마다 베드로는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반복하여 대답합니다. 그런데 세 번째 질문을 던지실 때는 근심이 되었다고 요한은 기록합니다. 주님께서 반복하여 물으신 것은 베드로를 책망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의 잘못과 허물을 용서하시고 치유하시고자 함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질문에 답할 때마다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떠 올렸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베드로 깊은 곳에 있던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끄집어 내셨습니다. 베드로가 대답할 때마다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때는 ‘먹이라’를 사용하고 어떤 때는 ‘치라’를 사용할까 의문을 가질 수 있으나 단어의 변화에 특별한 의미는 없습니다. 주님의 양을 잘 돌보라는 것입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뜻하는 ‘아가파오’와 친구와의 사랑을 뜻하는 ‘필레오’가 사용되었지만 요한의 경우 구별 없이 동일한 의미로 사용합니다. 예수님께서 구약 성경의 핵심을 레위기를 근거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 하셨습니다. 둘 다 똑같이 중요하지만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을 토대로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이 맡기신 백성을 섬기려면 먼저 주님의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함으로 주님의 양을 먹이는 것이 베드로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 없이 양을 먹이는 것은 주님의 양이 아닌 자신의 양을 키우는 것이요,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양을 먹이지 않는다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기에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부인했다는 죄책감이 강하게 사로잡고 있었던 베드로는 예수님의 반복되는 사랑의 확인 앞에 녹아 내렸습니다. 전에 대제사장 집 뜰에 있던 불 곁에서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던 베드로가 지금은 주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주님에 대한 사랑을 진심으로 고백합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입니까? 주님의 일은 주님을 먼저 그리고 더 사랑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주님의 질문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주님을 더 사랑한다고 담대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를 따르라”(18-23절)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은 영혼 구원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입니다. 마가복음 3:13-15절에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제자도는 주님의 ‘부르심’과 제자들의 ‘따름’으로 이루어집니다. 1세기에는 제자들이 선생을 선택하여 제자 삼아주기를 원하는 데 비하여 예수님은 직접 자기의 제자들을 선택하시고 부르셨습니다. 원하시고, 부르시고, 세우시고, 함께 있게 하시고, 권능도 가지게 하시는 등 모든 동사의 주어가 예수님입니다. 제자도의 중심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만약 제자가 되는 것이 자원하는 것이었다면 하기 싫을 때 그만 둘 수도 있습니다. 모인 무리 중에서 즉흥적으로 뽑았으면 그 자리에서 싫다고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산에서 밤새도록 기도하시면서 제자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뽑으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요 15:16)는 말씀처럼 제자 중 어느 누구도 자원해서 주님을 따른 사람은 없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고전 9:16) 하면서 바울도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것이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로 인한 것임을 고백합니다. 스스로 택한 것이 아니기에 복음 전하는 것을 자랑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부름에 열둘이 나아 왔다는 것은 제자들의 결단보다는 부르심에 대한 순종에 초점을 둡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1) 예수님과 함께 있기 위하여
제자들은 일을 하기 전에 먼저 선생님으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배운다는 것이 단순한 지식의 전수가 아닙니다. 예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면서 그분의 삶을 배우고 그분의 사역을 배워야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셨던 사역만 할 뿐 아니라 그분의 삶을 본받아야 합니다. 제자 훈련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면서 종의 자세를 가지고 섬기는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2) 예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기 위하여
제자들은 장차 예수님을 대신하여 파송을 받아 일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제자들이 전에 듣도 보도 못한 새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저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어 쫓으시더라.”(막 1:39) 이미 예수께서 하신 사역을 제자들에게 따라 하게 하십니다. 사역의 핵심은 선포와 치유입니다. 열둘은 예수님의 메신저로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면서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 영적 권위와 능력으로 사단을 제압하며 사람들을 치유해야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라는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은 제자도에 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 예수님을 따르려면 두 가지 조건을 만족시켜야 합니다. 자기중심으로 살던 사람이 이제부터 주님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자신을 부인하는 것은 내가 나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다스리도록 나를 주님께 내어 놓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제자의 삶은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이 말씀을 듣는 순간부터 당장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지금부터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가는 그날까지 계속해서 예수님을 따라가며 그 뜻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 8:35). 예수님께만 순종, 희생,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하여 순종, 희생, 헌신해야 합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주님을 증거하고 복음을 나누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 속에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제자의 모습이 언급됩니다.
1) 사역의 열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21:18) “진실로 진실로 이르노니”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무엇인가 중대한 사실을 선포할 때 자주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베드로가 젊었을 때는 스스로 띠 띠고 다녔다고 합니다. 띠를 띤다는 것은 거침없이 행동하거나 움직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옷을 허리띠로 묶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까지는 그런 삶을 살아왔을지라도 미래에는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결박과 체포가 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장차 맡게 될 책임과 함께 어떤 위험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지, 또 어떤 식으로 죽게 될지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는 그가 두 번째 보낸 편지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 같이 나도 나의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벧후 1:14)라고 고백했을 때 이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의 죽음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 보면 끝이 좋은 사람. 그저 그런 삶, 끝이 안 좋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호수아, 사무엘, 베드로와 바울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잠재력을 다 활용하며 주의 사역에 힘쓰다가 주님 품에 안겼습니다. 그들의 죽음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삼손은 어떻습니까? 그는 누구보다도 힘이 센 장사였지만 하나님이 그 힘을 가지고 육신의 정욕을 위하여 살다가 대적 블레셋 사람들에 의하여 눈이 뽑히고 수모를 당하다가 나중에는 기둥에 깔려 죽고 말았습니다. 물론 그가 죽을 때에 죽인 블레셋 사람들이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다고 하지만(삿 16:30) 아쉬움을 남깁니다. 기드온은 이스라엘을 미디안에게서 구원한 사사이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탈취한 금으로 에봇을 만들어서 백성들이 그것이 음란하게 섬기며 기드온과 그 집에 올무가 되어 이스라엘 백성을 타락하게 하였습니다. 물론 삼손이나 기드온이 하나님의 일을 하기는 했으나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충성스럽게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였으므로 끝이 좋지 않은 사람들의 대표가 되었습니다.
2)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에 충실해야 합니다
눅 22:61를 보면 대제사장집 뜰에서 베드로가 주님을 모른다고 격렬하게 부인할 때 예수님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베드로가 창피하여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고 부끄러워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베드로는 갈릴리 호수에서 예수님과 다시 만납니다. 주님이 그를 어떻게 대하십니까? 이 배반자 하며 멱살을 잡고 분노하십니까? 자신을 배신한 것을 인하여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잔잔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22절을 보니 베드로를 책망하십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왜 책망하십니까?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하시며 말씀하실 때에, 베드로가 잠시 눈길을 돌려 뒤를 따르는 요한을 보았습니다. 이 글의 저자인 요한은 자기를“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라고 소개하며 최후의 만찬 때도 예수님 품에 안겨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회복을 경험하던 베드로가 요한을 보니 갑자기 마음에 파문이 일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주님께 질문을 던집니다. ‘주여 나는 죽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데 요한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예수님이 무엇이라 대답하십니까? 내가 다시 올 때까지 그를 살려둔다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It is none of your business). 네가 알 바 아니야. 너는 나를 따르기만 하면 돼. 내가 너에게 준 사명, 나의 양 무리를 섬기는 사명만 잘 감당하면 돼. 주님의 말씀은 가정법 문장입니다. 예수님이 실제로 그렇게 하시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이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라는 소문으로 바뀌어 형제들 사이에 퍼졌습니다. 요한은 여기에서 자신의 죽음에 대한 잘못된 소문을 정정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요한이 죽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다시 올 때까지 자기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베드로가 신경쓸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시고 싶었던 말씀은 “다른 사람의 일에 신경 쓰지 말고 네가 받은 사명에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충성은 주님을 성실하게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성도들에게 적용되는 명령입니다. 각자 하나님에게서 받은 사명이 다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과 비교할 것이 아니라 자기가 받은 사명을 붙잡고 주님의 뒤를 따라가는 것이 성도들이 마땅히 가야할 길입니다.
당신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을 때도 가만히 계시던 예수님이 왜 지금은 베드로를 책망합니까? 시기심 때문입니다. 경쟁심 때문입니다. 시기심은 공동체를 멍들게 하고 분열을 일으킵니다. 복음서 어디를 보더라도 베드로가 요한에 대하여 드러내놓고 시기하거나 비방한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베드로가 그 동안 예수님 곁에 있던 요한의 존재를 은근히 의식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남과 비교하면서 쓸데없이 우월감을 가지거나 열등감을 갖지 말고 각자에게 맡겨진 사명을 잘 감당하라는 권면입니다. 겸손은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이라 바울은 말합니다. 그렇다면 언제 시기하는 마음이 듭니까? 언제 섭섭한 마음이 듭니까? 저 사람이 나보다 못하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하지 못한 무엇인가를 했을 때 생깁니다. 저 사람 나보다 후배인데. 저 사람 나보다 가방끈이 짧은데. 저 사람 나보다 우리 교회에 늦게 왔는데 등등. 과거에 매달려 그 사람을 평가하고 현재의 모습을 인정하지 않으려 할 때 생깁니다. 마귀는 우리가 그런 마음을 가질 때 놓치지 않고 다가와 더 흔들어 놓습니다. 시기나 섭섭함은 주의 일을 하는데 걸림돌이 됩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도는 다른 사람에게 무관심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일은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의 일이나 행동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한 일에 대하여 민감하게 반응할 것이 아니라 함께 기뻐하고 위로하고 축하하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이런 열린 마음으로 가질 때 교회는 하나가 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더욱 크게 나타날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인생의 기쁨과 슬픔, 희열과 고뇌, 뼈아픈 상처와 감격적인 회복의 기억이 있는 장소가 있기 마련입니다. 베드로에게 갈릴리는 아름다운 회복의 장소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처음 만났던 장소요, 예수님이 행하신 수많은 기적과 말씀이 있던 곳입니다. 어부인 제자들에게는 삶의 장소였습니다. 다시 찾아오신 부활의 주님은 지친 제자들을 떡과 물고기로 먹이시고 회복시키셨습니다.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했던 베드로의 입을 통해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할 수 있는 기회를 세 번이나 주셨습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용서하시고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또한 베드로에게 갈릴리는 소명의 장소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그가 어떤 인생을 살게 될 것이고,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지 알려주셨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베드로를 처음 부르실 때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이제 이 땅을 떠나시기 전에 다시 한 번 “나를 따르라”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순종한 베드로는 복음을 전파하는 위대한 사명자가 됩니다.
우리가 저지른 잘못이나 실수를 인하여 가책을 느낄 수도 있고, 일이 계획한 대로 풀리지 않아 낙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붙든다면 힘이 들 때 놓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자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붙드시기에 우리의 구원은 확실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일하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영광 받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음을(롬 8:39)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회개할 것은 회개해야 합니다. 내려놓을 것은 내려놓아야 합니다. 비울 것은 비워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것으로 채움 받아 나아가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만을 굳게 신뢰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의 제자입니까? 그렇다면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각자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하며 끝까지 주 님을 따라야 합니다. 주의 일을 하다보면 때로 힘들 때도 있습니다. 방해도 있습니다. 회의도 생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우선순위를 두고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도 믿음에 굳게 서서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십니다. 우리 모두는 세상의 그 어느 것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며 맡겨진 사역에 충실하며 한 마음이 되어 서로 섬기며 나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 25:21)는 칭찬을 주님으로부터 듣게 됩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며 용서를 경험하고 회복을 경험하고 사명을 깨달으며 주님을 끝까지 성실하게 따르는 제자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내 양을 먹이라
요 21:15-19 / 이윤재 목사
오늘은 11월 마지막 주일, 2012년도 한 달을 남기고 있습니다. 한 해를 정리하고 새 해를 준비하면서 우리가 한 해동안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았는지 묻게 됩니다. 우리 교회 홈페이지를 들어가면 우리 교회 정덕연 집사님이 올린 글과 사진이 있습니다. 그가 어느 은행에 갔더니 이런 글귀가 쓰여져 있었다는 것입니다(글사진). “대추, 대추가 저절로 붉어질 리가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천둥 몇 개, 벼락, 몇 개”. 그러면서 그가 찍은 사진 한 장을 올렸습니다(대추 사진). 늦가을에 붉게 익은 대추입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작은 대추 한 알을 보면서 은행에서 보았던 글귀가 떠올랐다는 것입니다. “아, 저 작은 대추 한 알이 봄, 여름의 수많은 벼락과 천둥과 태풍 이기고 저기 맺혔구나“. 그리고 보니 그 대추 한 알이 보통 소중한 것이 아닙니다.
어떻습니까? 대추뿐이겠습니까? 세상 모든 생명이 그냥 된 것이 아닙니다. 한동안 우리 교회 정문을 향기로 가득하게 했던 국화를 기억하십니까?(국화사진). 우리 교회 안중기 집사님이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지난 10월 초부터 약 2개월 우리 교회를 환하게 밝혔습니다. 이 국화가 우리 교회 처음 올 때는 꽃이 피려고 몽오리가 막 맺힐 때입니다, 그때까지 국화는 어디 있었을까요? 안집사님에 의하면 그 국화는 온실에서 약 3개월 자라고 있었답니다. 국화의 줄기를 잘라서 분토에 심고 물주고 온도를 맞춰주면 자랍니다. 그렇게 한 3개월 지나면 뾰족하게 봉오리가 나옵니다. 그때 우리 교회로 와 두 달동안 있다가 다시 온실로 가서 내년에 그 줄기를 잘라내 심으면 또 국화가 생겨납니다. 신비하지 않습니까? 한 알의 대추, 한 송이의 국화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어떨까요? 믿음의 길을 가는 사람도 많은 돌봄과 보살핌과 정성을 통해 자라지 않을까요? 맞습니다. 그냥 피는 꽃이 없듯이, 그냥 맺는 열매가 없듯이 우리의 인격과 믿음도 많은 천둥과 먹구름,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과 영향을 받고 자랍니다. 우리 믿음이 오늘 여기까지 오도록 누가 도왔는지 생각해 보시겠습니까? 부모 말고 누구 떠오릅니까? 가장 떠 오르는 사람이 선생님들입니다. 그때는 몰랐는 데 시간이 지나도록 떠오릅니다. 초등학교때 율동과 노래를 가르쳐준 선생님, 기억 나시나요? 중고등부때 함께 수양회가서 키타치고 노래하며 캠파이어 했던 선생님들 기억하시나요? 자라서 결혼했습니다. 신혼에 바쁘기만 한 내 손을 꼭잡고 기도해주던 교회 권사님들 기억 나시나요? 아이들 키운다고 바쁠 때 구역장님이 대신 아기봐주고 친정 어머니 없을 때 어머니 역할 해주셨던 구역장님들, 기억나시나요? 어릴 때부터 신앙생활 하신 분들은 “아, 내가 혼자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구나. 그때 누가 나를 도왔지. 누가 나를 위해 기도했지. 그래서 내가 여기 있지“. 성경은 이 사람들을 ”목자“라고 부릅니다. 목자는 양을 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을 ”양“이라고 부르고 그들을 돕는 사람을 ”목자“라 부릅니다. 목축을 주업으로 하는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일하는 사람을 ”목자“라고 부르는 것만큼 좋은 이름은 없습니다. 양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목자는 그들을 위해 일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그것도 세 번이나 말씀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어떤 사명을 주신 것입니까? 목자의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이 첫 번째로 말씀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목자로 부르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을 목자로 부르셨습니다“하면 이해가 되십니까? 아마 많은 분들이 생각할 것입니다. ”나를 목자로 불렀다고? 나는 목자가 아니라 성가대원인데. 목자, 교사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야? 기도도 많이 하고 시간도 많고 성경도 많이 알고 뭘 좀 아는 사람이 목자하는 것 아니야? 나는 목자 아니야“. 좋습니다. 여러분의 겸손을 인정하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꼭 자격있는 사람들을 목자로, 교사로 부르셨습니까? 그 질문을 오늘의 말씀으로 바꾸면 이렇습니다. 베드로는 충분히 목자의 자격을 갖춘 사람입니까?
베드로가 3년간 예수님 따라 다닌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잡아 뗀 사람이 예수님의 양을 칠 자격이 있습니까? 막달라 마리아로부터 예수님의 무덤에 아무도 없다는 말을 듣고 달려갔을 때 예수님 무덤은 비어 있고 천사가 나타나 ”여기 있던 예수님은 살아 나셨다“고 선포한 것을 베드로가 직접 듣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베드로는 갈릴리로 가지 않앗습니까? 왜 갈릴리에 갔겠습니까? 전도하러 갔겠습니까? 예수님 만나러 갔겠습니까? 3년동안 따라다닌 예수님 떠나 자기 옛날 생활로 돌아가려고 간 것 아닙니까? 그런데도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오셔서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세 번이나 말씀했으니 예수님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목자의 사명을 주신 분이 아닙니다. 한번도 예수님 떠난 적도 없고 매일 새벽기도하고 하루에 성경에 10장씩 읽고 천성이 좋고 오래 믿은 사람만 목자로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창1:28절을 읽고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창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으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이 자기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신 후에 하신 말씀입니다. 특별히 누구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지음받은 모든 인간이 이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에게 땅을 다스리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그 일을 하도록 허락하시고 그것을 할 능력은 주지 않았을까요? 아닙니다. 허락과 함께 능력도 주셨습니다. 그 일을 하라고 주신 축복을 “사명”이라면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주신 능력을 “지도력”이라고 합니다. 저는 오랫동안 지도력은 특별한 사람들이나 받는 것인지 알았습니다. 목사가 된 후에도 지도력은 조용기 목사나 이중표 목사같은 분이나 있는 줄 알았습니다. 저에게는 지도력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저에게는 많은 열등의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창1:28절을 묵상하다가 하나님이 나에게도 땅을 다스릴 권세와 함께 능력도 주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2005년, 한신교회 목회를 시작하면서 조용기 목사님께 인사를 갔습니다. 바쁘신 중에도 조목사님은 저를 반갑게 맞아주시며 안수기도까지 해 주셨습니다. 그때 목사님 말씀중에서 기억에 남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보면 타고난 능력이 있는 것처럼, 타고난 지도력이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나는 매우 부족한 사람입니다. 여의도교회를 세우고 지금까지 어느 한 날 두렵지 않는 날이 없었습니다. 국민일보가 생기고 나서는 그 두려움은 더 커졌습니다. 재정 적자에 허덕이면서 매일 두려웠습니다. 지금도 저는 늘 자신이 없습니다. 다만 제가 하는 것은 매일 엎드리는 것입니다. 매일 2시간 3시간 기도하면 하나님이 능력을 주십니다. 그것외에 저에게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사명과 지도력을 주신 것이 아니라 모든 믿는 자에게 그의 위대한 사명과 지도력을 주신다“. 특별한 사람에게 보통의 은혜를 주신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에게 특별한 은혜를 주십니다. 오래전 제가 인도네시아에 갔습니다. 거기 자바섬에 ”솔로“라는 도시가 있는 데 거기에 ”하나님의 가족교회“라는 큰 교회가 있었습니다. 오바자 라는 목사님이 그 교회를 담임했는 데 오바자 목사님은 늦게 목회를 시작한 데다 공부를 많이 못한 분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교인이 13,000명이 모였습니다. 제가 더 놀란 것은 그 분에게 장모님이 있었는 데 80이 넘은 할머니였습니다. 그런데 그 할머니가 목장을 맡아 매년 배가를 거듭하여 500명이 넘는 교인을 목양한다는 것입니다. 처음에 그 할머니도 목자를 안한다고 못한다고 했답니다. 그런데 창1:28을 믿고 ”하나님이 나에게 사명과 지도력을 주셨다” 고 믿자 그때부터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제가 그때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아, 하나님은 공부를 많이 했거나 적게 했거나, 나이가 젊거나 80이 넘었거나 생육하고 번성할 사명과 능력을 주셨다. 놀라운 영적 지도력의 씨앗을 그들 에게 주셨다”. 다만 문제는 그것을 믿는 사람에게는 능력이 나타나고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번에도 중국에 갔습니다. 소주에 사는 한 가정교회 목회자 집에서 잠을 잤습니다. 간증을 부탁했더니 자기는 목사님 아들이랍니다. 그런데 하도 아버지가 쫓겨다니고 힘들게 살아 자기는 목회 안하려고 일부러 장사를 했답니다. 그래서 돈도 많이 벌었답니다. 그러나 아내가 믿음이 좋아 목회를 권하고 자기 나이도 40을 넘으면서 하나님의 일밖에 소중한 것이 없는 것을 깨닫고 뒤늦게 목회를 시작했는 데 자기는 제대로된 신학교를 다니지 못했답니다. 그런데 막상 목회를 시작했는 데 하나님이 능력을 주셔서 몇 년만에 교인이 800명이랍니다. 그러면서 말합니다. “제가 목회를 시작하기 전에는 내게 능력이 있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시작하자 내게 능력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 능력이 아니라 제 속에 하나님이 주신 능력이죠. 저는 그 능력을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지도자 이론중에 “지도자는 타고 난다”는 이론이 있습니다. “특성화 리더쉽 이론”이라고 합니다. 지도자는 태어나고 태어날 때부터 뭔가 특별한 것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후에 팔레토라는 사람은 소위 “팔레토 법칙”이란 것을 만들어 냈다. 지도력은 20%가 행사하고 80%는 그냥 따라간다. 소위 “20/80 법칙”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성경에서 하나님이 쓰시는 인물은 상위 20%에 든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약한 자를 부르시고 그를 통해 큰 일을 행하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성경적 리더쉽의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사명과 능력과 리더쉽을 주셨다. 둘째 그 리더쉽은 사용할 때 능력이 나타난다. 셋째. 하나님이 원하시는 리더쉽은 하나님의 양들을 치는 목양적 리더쉽이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에게도 하나님이 생육하고 번성하라. 축복하신 것을 믿습니까? 세상에서 승리할 사명과 함께 그 능력도 함께 주신 것을 믿습니까? 여러분안에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영적 리더쉽이 있는 것을 믿습니까? 그 리더쉽은 사용될 때 능력을 나타낸다는 것을 믿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리더쉽을 주신 것을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목양의 목적으로 주신 것을 믿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나는 목자다”. “나는 가수다”가 아닙니다. “나는 목자다”. “나는 리더다”. 아멘. 그러면 두 번째 질문이 생깁니다. 우리가 목자로서 일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이를 위해 15절을 봅니다. 요21:15, “그들이 조반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양을 먹이라 하시고”. 여기에 “사랑하라”가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가 두 번째로 아는 것은 이것입니다.
목자의 능력은 사랑에서 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목자로서의 사명을 부탁할 때 무엇을 요구하셨다고 생각합니까? 다른 것 요구한 것 없습니다. 학력, 외모, 말주변, 가정, 성경지식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딱 한 가지 물었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사랑이면 됩니다. 영상에서도 어떤 교사가 말했습니다. 교사를 시작할 때 두 가지를 두려워 했다고 합니다. 하나는 내 안에 은혜가 많아서 그것이 밖으로 흘러가야 할텐데 하는 것과 다른 하나는 내가 성경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어야 할텐데 하는 데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교사로 일하기 시작하자 그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은혜는 교사하면서 더 받고 성경은 가르치면서 배울 때 진짜 배울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다른 것은 묻지 않았습니다. 딱 한 가지 물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 사랑도 세 번 질문이 다 다릅니다. 첫 번째 15절에서는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물으셨습니다. “더”가 들어갑니다. 최상급을 사용했습니다. “사랑”이란 말도 “아가페”입니다. 그러니까 “네가 나를 최고 아가페 사랑으로 다른 사람보다 더 사랑하느냐?”.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가페 사랑은 무조건적 사랑입니다. 그 질문을 받자 베드로가 부담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지만 그 정도는 아닙니다”. 베드로가 사용한 사랑은 아가페”가 아니라 “필리야”였습니다. 필리아의 사랑은 친구가 친구를 사랑하는 정도의 사랑입니다. 두 번째로 주님이 또 물었습니다. 이번에는 “더”라는 말을 빼고 묻습니다. 16절, “그러면 네가 나를 그냥 사랑하느냐?”. 이때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그 정도로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아십니다”. 그러자 마지막 세 번째 주님이 어떻게 물으신 줄 아십니까? 아예 “아가페”란 말을 쓰지 않았습니다. 베드로가 쓴 “필리야”를 똑같이 써서 묻습니다. “그래. 네가 나를 친구수준으로 사랑하느냐? 좋다. 내 양을 먹이라”.
이것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예수님은 여러분과 제가 주님과 양을 섬길 때 최고의 사랑인 아가페의 사랑으로 그 누구와 비교가 되지 않는 최상급의 사랑으로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누가 이 기대에 보답하겠습니까? 누가 다른 사람들과 비교되지 않은 최고의 사랑으로 예수님과 양들을 사랑하겠습니까? 그래도 안되면 어떻게 합니까? 하는 데 까지 하면 됩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사랑이 사랑의 시작입니다. 사랑은 자랍니다. 처음부터 완전할 수 없습니다. 목자를 하거나 교사를 하거나 처음부터 예수님같은 사랑을 줄 수 없습니다. 자신이 하는 만큼 하면 됩니다. 사랑은 자랍니다. 일단 시작하면 자랍니다. 그러나 시작하지 않으면 자라지 않습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이 한번 간증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무슨 병이 있어 수술실로 가는 데 갑자기 주님이 이런 질문을 하시더랍니다. “네가 힘드냐?” 목사님은 즉시 대답했다고 합니다. “예, 주님. 힘들어요.” 그러자 주님이 또 물으셨습니다. “그러면 고통스러우냐?” 목사님이 또 대답했답니다. “예, 주님, 정말 고통스럽습니다.” 그때 주님이 이렇게 물으셨답니다. “그래서 불행하냐?”. 이 질문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질문이었습니다. “힘드냐?” 그래서 “예, ”고통스러우냐?“. 그래서 ”예“, 그래서 그 다음은 ”그럼 내가 고쳐줄까?“ 할 줄로 알았답니다. 그러면 또 ”예, 주님, 할렐루야“ 하려고 했는 데 ”그러면 너 불행하냐?“ 이렇게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한참 주저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내가 지금 행복한지 불행한지 생각했다고 합니다. 주님을 위해 한 해 동안 일한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여러분, 힘드셨죠?“ ”예“, ”때로 고통스러웠죠?“ ”예“. 한번 더 묻습니다. ”그래서 불행합니까?“ 요즘 경제가 안좋습니다. 밖에서 일하는 남편 분들 얼마나 고생이 많습니까? 남편들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 힘듭니까? 가끔 고통스럽습니까? 묻습니다. ”그래서 불행합니까?“ 목자, 교사들에게 묻습니다. ”목자, 교사 여러분, 지금 힘드시죠? 가끔 고통스럽기도 하시죠?“ 묻습니다. ”그래서 지금 불행합니까?“ 장로님들께 묻습니다. ”장로님, 장로의 사역을 감당하시느라 힘드시죠? 가끔 고통스럽기도 하시죠?“ 묻습니다. ”그래서 불행합니까?“ 목회자 사모님들, 목회자 세미나때마다 가장 오랫동안 울면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목회자 사모님들입니다. 묻습니다. ”사모님들, 힘드시죠? 자주 고통스러우시죠? 그래서 불행합니까?“
누구나 힘들 수 있습니다. 자주 고통스럽기도 합니다. 누구나 여기까지는 ”예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믿는 우리의 답변은 다릅니다. “그래서 불행합니까?” “아니요. 불행하지는 않아요. 힘들어요. 고통스러워요. 그래서 불편해요. 그러나 불행하지는 않아요. 불편과 불행은 달라요. 육체를 가졌기 때문에 불편해요. 그러나 불행하지 않아요. 그 이유는 예수님 때문이예요.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고 나도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불행하지 않아요. 오히려 나는 행복해요. 예수님 때문에 행복해요. 예수님 사랑 때문에 행복해요. 아멘”.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가질 가장 크고 유일한 은혜, 사랑, 예수님 사랑,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양을 치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랑과 함께 양을 사랑하는 사랑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목자로, 교사로, 장로로, 목회자로, 하나님의 일꾼으로 일하다보면 그 사랑이 늘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가끔 다른 사람들 때문에 힘들고 시험들고 다투기까지 합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합니까? 제가 아는 어떤 선교사님이 일본에서 일합니다. 그런데 이 분은 다른 데는 몰라도 일본에는 가지 말아야 할 분입니다. 아버지는 전쟁에 나가 죽었고 형도 탄광으로 끌려가 죽었습니다. 자라면서 일본사람에 대한 나쁜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듣고 자랐습니다. 그러다 선교사로 서원했습니다. 어디로 갈까 기도하는 데 하나님이 그에게 일본으로 가라고 감동했습니다. 한번도 선교지로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일본, 그래서 못간다고 했답니다. 그렇게 우기다 어느날 두 손, 두 발들고 일본으로 갔습니다. 주님의 단 한 마디 말씀때문이었습니다. 기도하는 데 “너 일본으로 가라” 하시더랍니다. 그래서 “주님, 그것은 못합니다. 일본 사람이 우리 가족에 얼마나 큰 죄가 행한지 아십니까?” 그랬더니 주님이 한참있다가 이렇게 물었답니다. “그래. 그러면 네가 나에게 행한 죄가 크냐? 일본 사람들이 너에게 행한 죄가 크냐?”. 아, 이 한 마디에 선교사는 답변을 못했답니다. 한참 머뭇거리다가 말했답니다. “제가 주님께 지은 죄가 크지요.” 그때 주님이 말씀했답니다. “내가 너를 용서했는 데 왜 너는 일본을 용서하지 못하느냐. 일본으로 가라”. 그래서 갔답니다. 어떻습니까? 교회 일꾼 여러분, 가끔 일하다 보면 사람 때문에 힘들지 않습니까? 제일 큰 방해꾼이 사람 아닙니까? 사랑은커녕 확 한번 뒤집어 엎고 싶지 않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가 그가 나에게 한 행동이 용서가 되지 않지 않습니까? 그때 주님의 질문을 떠 올리세요. “네가 나에게 행한 죄가 크냐? 그가 너에게 행한 죄가 크냐?” 다른 사람이 나에게 행한 그 어떤 죄보다 내가 주님께 범한 죄가 더 큽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받은 어떤 용서보다 내가 주님께 받은 용서가 더 큽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목자 여러분, 교사 여러분, 봉사자 여러분, 이 은혜로, 이 사랑으로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양은 목자가 가르친대로 삽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말씀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그 이후의 교회 역사는 교회안에 목자와 교사가 신자들을 가르쳐 말씀으로 양육하던 역사였습니다. 엡4:11절을 보겠습니다. 엡4: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세우셨으니”. 이 말씀은 사도 바울 시대, 그러니까 주후 1세기, 교회안에 있었던 직분을 소개합니다. 사도, 선지자, 복음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 종류로는 모두 5종류입니다만, 이 직분들이 “그리고”로 연결되지 않고 “혹은”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이 직분들은 어떤 서열이나 우열의 차이가 없다는 뜻입니다. 사도가 가장 높고 그 다음이 선지자, 그 다음이 복음전하는 자, 그 다음이 목사, 그리고 제일 마지막이 교사라는 뜻이 아닙니다. “혹은 혹은”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순서를 바꿔 놓아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문제는 이 직분중에 지금까지 남아 있는 직분은 목사와 교사라는 것입니다. 이 두 직분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양을 치는 것입니다. 양을 먹이는 것입니다. 교회사의 역사를 보면 이 두 직분이 계속 발전합니다. 그래서 이 목사라는 직분에서 교회를 감독, 치리하기 위한 목회자가 나오고 교사라는 직분에서 전문 신학자가 나옵니다. 이것은 전문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직분이 교회안에 평신도 직분으로 계속 남았습니다. 그래서 이 목사라는 직분에서 장로, 집사가 나옵니다. 그래서 장로, 집사 직분은 본질적으로 목양자입니다. 교회 계급이 아닙니다. 목회자로 전문화된 목회자를 도와 평신도로 함께 신자들을 목양하는 것입니다. 목양하라고 장로, 집사 세웠습니다. 그래서 모든 장로, 집사는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교사에서 신학자가 빠져 나가 전문적인 신학 영역에서 교회를 섬기기도 했지만 여전히 교회안에 평신도 교사가 남아 신자들을 가르치는 일을 계속했습니다. 그리고 그 외의 봉사, 성가대라든가. 안내위원, 대접, 행정같은 일은 전문직인 목사와 신학자, 평신도직인 목자와 교사의 일을 잘 되기 위해 보조적으로 존재했습니다. 이 말은 이 일들이 다른 일보다 가치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교회의 중심사역이 무엇인지를 말할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목사와 교사, 가르치고 양육하는 일, 그 일을 위해 그 후에 많은 봉사직들이 생겨났습니다. 한국에는 권찰, 권사 직분이 생겨났습니다. 다른 나라에는 다른 직분도 있습니다. 이 모든 직분은 딱 한 가지를 위하여 있습니다.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그래서 교회안에서 목자로 교사로 봉사하는 것은 최고의 일입니다. 그것은 2천년 교회사의 중심에 있던 사역이며 성경의 핵심적 사역입니다. 그것이 신약을 통해 구약으로 가면 목자였던 모세, 다윗으로 갑니다. 목자는 성경 최초의 직분이요 그것으로부터 훗날 교회 모든 사역들이 생겨났습니다. 그 모든 역사와 신앙을 오늘 예수님은 한 마디로 정리했습니다. “내 양을 먹이라”. 여러분, 교회의 최고 사명은 양을 먹이고 치는 일임을 아십니까? 목자와 교사가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우리가 양을 가르치고 먹일 때 예수님의 일을 대리하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다 목자로 부르신 것을 믿습니까? 그래서 우리 교회 모든 신자는 둘 중의 하나입니다. 현재 목자거나 다음에 목자거나, 우리 교회 모든 신자는 둘 중의 하나입니다. 지금 교사로 일하거나 다음에 교사로 일하거나, 영원히 목자, 교사 아닌 신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얼마나 목자와 교사가 중요한지 전쟁에서 한 남자가 총을 맞고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물, 물”하면서 물을 찾았습니다. 옆에 있는 전우가 입에 물을 댓더니 조금 정신이 들아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친구. 내가 죽거든 꼭 한 사람을 찾아가 주게. 내가 초등학교 4학년때 철없이 뛰돌던 나를 전도한 교회 선생님이네. 그에게 가서 정말 감사하다고 전해주게. 내가 그때 어렸지만 나를 전도해서 교회 나오게 하고 부족한 나를 사랑해준 선생님, 나는 그 뒤로 선생님이 가르친대로 살려고 정말 노력했네. 비록 전장터에서 죽지만 선생님이 전해준 예수님 믿고 오늘까지 살았고 지금 죽어서 천국에 간다고 꼭 감사의 말을 전해주게”. 친구의 유언을 듣고 친구의 고향을 찾았습니다. 물어 물어 옛날 친구를 전도한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선생님은 지금 예수믿는 것을 중단하고 있었습니다. 그도 한때 잘 믿었지만 아무리 예수 믿어도 세상이 달라지지 않는 것에 실망하여 지금은 교회를 쉬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혹시 이런 친구를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기억을 더듬어 생각해 냈습니다. 어릴 때 전도하고 가르쳤던 교회학생 어린이였습니다. 그리고 친구의 유언을 다 전해 주었습니다. 선생님은 한참동안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동안 너무 변하지 않는 세상을 보고 실망하여 교회를 쉬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러나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내가 전도하고 내가 가르친 어린이가 내가 가르친 살려고 노력했다니. 그리고 그렇게 용기 있게 죽다니. 이제야 나는 예수믿는 것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내가 전도한 친구를 나를 살릴 줄 몰랐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를 따르라
요 21:15-23 / 김광일 목사
2011년 3월2일, 파키스탄의 샤바즈 바티(Shahbaz Bhatti) 장관이 괴한들의 총격을 받고 암살을 당했습니다. 소수민족부 장관으로 신성모독법 폐지 등 소수민족과 종교인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기 위해 앞장을 서왔던 인물이었습니다. 바티 장관은 내각 내의 유일한 기독교 신자로서 이슬람 과격 세력으로부터 여러 차례 살해 위협을 받아왔었습니다. 바티 장관이 피격당하기 얼마 전 미국 LA 한인교회를 방문해서 간증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슬람 국가인 파키스탄에서 최초의 그리스도인 장관이 되는 은혜를 누리게 된 것은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핍박 받는 파키스탄의 기독교인들 그리고 형제들의 기도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장관으로 세우신 것은 예수의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하는 목적이라고 믿습니다.” 그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그리스도인을 ‘예수를 따르는 사람’ (Follower of Jesus)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자기 역시 예수를 따르는 사람으로서 예수를 위해 살고 예수를 위해 죽고 싶다고 고백했습니다. 또한 그가 죽기 전에 작성한 비디오 메시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기독교인과 소수 종교인들의 권리를 방어하기 위해 활동하다가 죽게 될 것입니다.” 결국 그는 죽음으로서 예수를 따르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명하시는 것은 먼저 따르는 일부터 하라고 하십니다. 제자가 누구입니까? 따름을 배우고 난 뒤에 세움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따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세워주시면 다른 이를 이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따르는 사람을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습니다.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따름을 훈련받지 못한 채 리더십을 발휘하려니 자꾸 문제가 생깁니다. 교만합니다. 배려가 없습니다. 결국 따르는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합니다. 이끄는 사람이 되려고 하기보다 따르는 사람이 되려고 먼저 힘써야 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께 요한복음을 통해 최종적으로 남기신 명령은 ‘나를 따르라’ 입니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제자를 부르는 일부터 먼저 하셨습니다. 제자들을 택하실 때 하신 말씀이 곧 ‘나를 따르라’ 였습니다. 예수께서 사역을 정리하시며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 도 ‘나를 따르라’ 였습니다. 즉 ‘따르라’는 명령에서 시작된 사역이 ‘따르라’는 명령에서 끝났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걸어가야 할 길이 있다면 주를 따라가는 길이 되어야 합니다.
제자로 부름을 받은 자들은 주를 따라가는 사명을 위해 존재하는 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베드로를 찾아와 하신 말씀입니다. ‘나를 따르라’ 는 말은 원어로 ‘아콜루데이 모이’입니다. 즉 자신의 방법과 주장을 버리고 예수를 따르라는 강력한 의미입니다. 예수께서 ‘나를 따르라’ 고 말씀하신 이유는 과연 무엇입니까?
첫째로 사랑에 이르기에
허드슨 테일러 (James Hudson Taylor) 선교사가 중국 대륙의 선교책임자로 있을 때 선교사를 희망하는 후보자를 면접한 적이 있었습니다. ‘왜 당신은 해외 선교사로 가기를 원합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후보자는 ‘예수께서 세계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셨기에 가기 원합니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또 다른 후보자는 ‘수백만의 사람들이 그리스도 밖에서 타락하고 있기 때문에 선교사로 나가기 원한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테일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원하는 동기들은 좋지만 시험과 시련 그리고 고생, 심지어 죽음의 순간을 당할 때 그것들은 당신을 구하지 못합니다. 단지 한 가지 동기만이 어려운 시련에서 견디게 해줄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본문 15절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낙심한 베드로의 심령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만져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를 부인하며 배신하였지만 그를 찾아오신 예수께서 계속해서 자신을 사랑하심을 실감하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선천적으로 자신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죄성이 있습니다. 여전히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더 사랑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인은 주의 뒤를 따라가야 할 제자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자신을 이길 수 있습니까? 누가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까? 누가 죄를 이길 수 있습니까? 우리의 힘으로는 부족하기에 주를 따르리라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결국 주를 따르는 자의 마음속에 있는 사랑이 모든 것을 이기게 할 것입니다. 사랑보다 위대한 것은 없습니다. 부족함이 있어도 서로 덮어 주며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서로 견제하고 긴장관계를 유지하는 만큼 시간을 낭비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를 따르라는 명령에 복종하고 주를 따라갈 때 곧 주의 사랑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둘째로 사명에 이르기에
미국 보스턴 지하 병동에 한 소녀가 격리 수용되어 있었습니다. 심한 정신병으로 그녀는 괴성을 지르며 사납게 독설을 퍼부었습니다. 의사들은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회복 불가능이라는 진단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그녀의 부모도 포기해 버리고 면회조차 오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소녀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회복 불가능이라고 낙인찍힌 아이가 회복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상을 회복시키는 위대한 생애를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무엇이 회복불가능의 아이를 회복가능의 아이로, 세상을 회복시키는 사람으로 바꿀 수 있었습니까? 은퇴한 한 늙은 간호사가 소녀를 찾아와 예수를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부모조차 포기한 회복 불가능아이였지만, 6개월 동안 끊임없이 예수의 사랑을 전했습니다. 소녀의 마음에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마음속의 어둠이 걷히고 서서히 세상을 향해 문을 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회복 불가능이라던 정신 질환마저 완전히 치료되었습니다. 마음의 빛을 찾은 소녀는 예수를 따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과 같이 정신 질환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고자 하는 사명을 찾았습니다. 그녀가 누구입니까? 헬렌 켈러를 세상의 빛으로 이끈 앤 설리번 메이시(Anne Sullivan Macy) 여사였습니다.
본문 17절입니다.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반복해서 사랑을 물은 까닭은 베드로에게 용기를 주심으로 사명을 맡기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를 배신하고 절망에 빠진 제자를 격려하여 양을 치고 먹이는 사명을 맡기시고자 함이었습니다. 결국 베드로는 주를 따르며 평생 목자가 양을 돌보듯이 성도들을 돌보고 먹이고 인도하는 사명을 감당하였습니다.
주를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싶은데 사람 때문에 낙심이 되십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주를 따라가야 합니다. 따름의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가야 할 대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믿음 없이 행동하는 사람을 바라보고 힘들어하고 시험에 드는 어리석은 일은 결코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믿음의 주요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만을 따를 때 사명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심령에 기쁨과 감격과 은혜가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열정이 불같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사명을 감당할 때 주님을 따르는 가치가 분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부디 주를 전심으로 따르시기 바랍니다. 사람이나 환경을 보지 않고 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를 따르게 될 때 사명에 이르게 하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영광에 이르기에
이태리의 조각가이며 화가였던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가 역사에 남는 위대한 예술가 될 수 있었던 계기가 있었습니다. 그가 14세 때 베르톨도 디 지오바니(Bertoldo di Giovanni)의 문하생이 되려고 찾아갑니다. 지오바니가 그의 대단한 재능을 보고 물었습니다. “너는 위대한 조각가가 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느냐?” 미켈란젤로가 대답했습니다. “예, 재능과 기술을 꾸준히 갈고 닦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자 지오바니가 정색을 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 무엇을 위해 조각하는지 그 목적을 분명히 해야 되는 것이니라.” 그러면서 그를 데리고 두 군데 구경을 시켜 줍니다. 하나는 술집 입구의 조각품이고, 다른 하나는 교회당 앞의 조각품입니다. 둘 다 아름다운 조각품이지만 그 목적이 전혀 다르다는 교훈을 준 겁니다. 스승의 의도를 알아차린 미켈란젤로는 힘을 주어 대답했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이제 저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제 재능과 기술을 갈고 닦겠습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주를 따르게 되면 과거에 볼 수 없었던 영광을 얻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세 번이나 주를 부인했으나 사랑을 회복하고 다시 주를 따라갔기에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을 수 있는 순교의 영광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본문 19절입니다.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베드로의 죽음이 결코 무가치하게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예언적 의미입니다.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고난이나 죽음을 영광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죽음은 모든 것을 빼앗아 가기에 가장 비극적인 불행으로 여깁니다. 도리어 죽음이 죽음일 뿐이지 어떻게 영광이 될 수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죽음을 통해 부활의 영광을 약속하셨습니다. 지금 당하는 고난도 먼 훗날 영광으로 돌려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제자의 길이 험하고 고통스러울지라도 낙심하지 않을 분명한 이유는 뒤에 나타날 영광이 현재의 고난과 족히 비교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조지 뮬러(George Muller)는 전무후무한 기도의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말년에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지금까지 당신은 위대한 일을 해 오셨는데 잘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비결이 있으면 말씀 해주십시오.” 그러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의 책망입니다. 또한 가장 바라고 소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 하나님의 칭찬입니다. 하나님의 칭찬 듣는 일을 위해서 최선의 선택을 기울이고, 주님이 책망하실만한 것에 대해서 조심하다보니 가장 좋은 것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삶이 변화되고 인생의 방향이 달라졌습니다. 승리의 삶을 살 수 있게 된 비결이 있다면 주님이 기뻐하시는 선택을 하기 위해 힘썼다는 것입니다.”
어떤 선택을 하기 원하십니까? 주를 따르시겠습니까? 세상을 따르겠습니까? 혹시 주를 따르고 싶어도 환경이 여의치 않아 핑계를 대는 모습은 아닙니까? 주저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주를 따르는 삶이야말로 영광을 받을 만한 선택을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를 따르라’ 는 우리를 향하신 주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를 따르리라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용기를 내어 주를 따르면 사랑에 이르게 됩니다. 주를 따르면 사명에 이르게 됩니다. 주를 따르면 영광에 이르게 됨을 믿고 목숨을 걸고 주를 따르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