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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곽노현과 함께하는 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희망2012
" 우리는 부처님을 지혜와 자비가 구족하신 분이라고 하며, 보살을 '상구보리 하화중생,' 즉 지혜를 구하고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의 상,하는 귀천이나 우열, 선후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이것을 선후개념으로 이해하는 이유는 전체와 자신을 분리시키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에 익숙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흔히들 먼저 세간의 시비를 떠나 도를 깨닫고 난 후에야 세속에 나가 중생을 구제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진리를 볼 수 있는 지혜는 중생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끼며 해결해 나가는 과정 속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진리는 인간의 고통을 올바로 보고 그 원인을 찾아 소멸시켜 모든 중생을 불국 정토에 이르게 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것 자체가 부처님의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목적을 잘 못 알았을 경우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올바른 진리를 구할 수 없게 됩니다.
이렇게 진리증득과 중생구제는 선후개념이 아니라 동시개념이며 상호의존적인 개념입니다. .... 깨달음을 얻기 위한 목적은 오로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굳이 선후를 따진다면 중생구제가 먼저입니다. 중생구제의 길을 통해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진리가 연기법 그 자체인데 인간관계를 부정하고 세간을 떠나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를 갖겠습니까? 아무리 진리를 구하고자 할지라도 그 행위가 중생의 고통을 가슴에 안고, 그 아픔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그런 진리는 형이상학적인 관념론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서원을 세운 보살은 어디에 머물러야겠습니까? 중생계에 중생의 모습으로 있어야 합니다. 중생으로 화하여 중생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면서 혼자가 아니라 다 함께 부처님의 세계로 가고자 하는 사람이 보살입니다. 그러므로 불국 정토에 들기 위해서는 중생의 세계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중생의 세계에 있으면서 끊임없이 보살행을 해야만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