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수필)
< 우리 동네 빨간 우체통 >
- 정영인-
5년 전에 인천 변두리로 이사 와서 우선 찾아본 곳이 이발소, 목욕탕, 우체국이나 우체통이다.
이발소는 남성 커트 전문점은 있지만 밀레의 만종 모사화가 걸린 그런 집은 찾기가 어려웠다. 또한 동네 목욕탕은 사양길이라 버스를 타고 서너 정류장을 가야 겨우 허름한 사우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우체국도 마찬가지라 지하철로 한 정거장을 가야 찾을 수 있다. 빨간 우체통은 여러 군데를 찾아 헤매고서야 큰 길 옆에 있는 것을 찾았다. 그런데 등잔 밑이 어둡다고 우리 집에서 몇 걸음 안 가면 아파트 길가에 빨간 우체통이 있는 것을 뒤늦게야 발견하였다. 업은 자식 3년 찾는다는 속담이 하나도 그르지 않다.
낭만의 산물 같던 우체통, 공중전화 부스, 우표, 편지 시대가 시나브로 사라지고 있다. 내가 손편지를 쓰고, 손편지를 받은 지가 머언 옛날 같이 느껴지고 있다. 편지지와 편지봉투에 사연을 적어 우표를 붙여 빨간 우체통에 넣는다. 그나마 풋사랑의 연서쯤만 되어도 이리저리 신경을 쓰게 된다. 편지지는 어떤 걸로, 만년필로 쓸 것인가 볼펜으로 쓸 것인가. 잉크 색깔은 어떤 색으로 쓸 것인가를 여러 모로 생각하게 한다. 거가다거 어떤 필체로 쓰며 꾹꾹 눌러 쓸 것인가 살짝 쓸 것인가의 필압(筆壓)도 생각하게 한다.
손편지는 어찌 보면 답장의 기다림의 시간이 존재한다. 그전에는 가고 오고 20여일이 걸릴 때도 있었다. 아날로그의 심정이 담겨져 있었다. 이젠 디지털 편지인 이메일은 광속도인 1초에 30만 킬로미터의 광속도를 가고 오고 간다. 과연 통신혁명이라고는 하지만 자판글씨에 의한 기계 글씨는 살가운 느낌이 적은 편지시대다. 이젠 편지함에 그나마 들어차는 것은 고지서 아니면 선전물이나 범칙금 고지서 등이다.
디지털 편지는 쓰자마자 가기 때문에 즉시 답을 요구하기도 한다. 더구나 소셜미디어의 발전은 그 현상을 더욱 부추긴다. 그래서 인증 샷이 겉도는 시간으로 우리를 괴롭히기도 한다.
디지털 편지는 필체, 필압, 필기구, 글자의 색깔 등을 찾아볼 수 없으니 서정(書情)을 느끼기가 어렵다. 디지털 글을 보내자마자 상대방이 읽었는가를 앉은자리에서 확인할 수가 있다. 이메일 편지는 거리감이 희박하다. 즉시 오고감이 하루에도 수도 없이 쓰고 보낸다.
더구나 이리저리 전달하는 행복이나 건강타령 등은 그저 하나의 형식 속에서 기계적으로 오고 가기도 한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내 마음에 젖어드는 것이 아니라 소낙비처럼 급히 흘러가 버리기가 일쑤이다. 정경(情景)이나 풍정(風情)이 담겨있지 않다. 거기다가 어떤 사연들은 돌고 돌아서 같은 것이 또 오기가 일쑤이다. 자기가 선물로 보낸 구두 상표권이 돌고 돌아서 도로 자기에게 오는 것처럼 말이다. 그 말에 그 말, 대개가 어떤 때는 지우기에 바쁘다. K팝 쓰레기라는 것처럼 앨범 속의 노래를 듣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그 안이 밀봉된 가수의 사진을 얻기 위해서 앨범을 쓰레기통에 버리니 K팝의 또 다른 양면성을 보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광속 시대에 살고 있다. 나는 가끔 손편지를 쓰고 싶다. 박제가처럼 “가랑비가 아지랑이 속에서 나은 봄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라고 말이다. 메일로는 도저히 쓸 수 없는 가랑비에 옷 젖는 듯한 그런 손편지를 쓰고 싶다. 그러나 우리는 저무는 편지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편지도 AI에 맡기면 내가 쓴 편지보다 더 그럴 듯한 편지를 써준다고 하나 나이 든 우리는 AI의 유목민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우리 동네 빨간 우체통에다 손편지를 써서 넣고 싶다. 공중전화 부스처럼 점점 용도 폐기 되는 빨간 우체통에 편지지와 편지봉투, 만년필로 꾹꾹 눌러 써서 우표를 붙여서 누군가에게 보내고 싶다.
과연 우표 붙인 손글씨로 쓴 답장 편지가 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