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가수왕이었던 최곤(박중훈)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라디오 스타’. 18년이 지난 지금 그가 노래하는 곳은 미사리(경기 하남시)의 작은 카페다. 영화에는 그를 보며 “학창시절 때 저 오빠 왕팬이었는데”라고 말하는 중년 관객들이 나온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7080 문화 밸리’로 알려진 미사리 카페촌은 이제 1970, 80년대 가수들의 무대가 아니다.
요즘 미사리 입구에 들어서면 리아, 강수지, 디바 등 1990년대 가수들이 출연한다는 안내 간판이 즐비하다. 최근 카페 ‘아테네’에 들렀을 때 5인조 무명 그룹이 SG워너비의 히트곡을 부르고 있었다. ‘라디오 스타’의 촬영지이자 가수 윤시내가 운영하는 카페 ‘열애’도 통기타 선율 대신 핫팬츠 차림의 20대 여성 4명이 춤을 추고 있었다.
나이트클럽 같은 무대가 끝나자 다른 곳에서 공연을 마치고 온 윤시내가 등장했다. 1980년대 ‘열애’ ‘공부합시다’ ‘DJ에게’ 등 히트곡을 남긴 그녀는 7년 전 미사리에 정착했다.
“예전엔 통기타 가수에 소박한 분위기였죠. 그런데 지금은 젊은 손님들 위주로 댄스 가수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가요계가 너무 빨리 변해 어제 TV에서 본 신세대 가수들이 미사리에서 공연하기도 해요. 7080 가수도 이젠 많이 사라졌어요.”
인터뷰 도중 대여섯 명의 중년 여성 팬이 사인을 요청했다. 윤시내를 보기 위해 부산에서 올라왔다는 김연순(41) 씨는 “이젠 무조건 미사리로 가지 않고 특정 가수가 공연하는 카페를 찾아 의정부나 인천 등으로 간다”고 말했다.
윤시내에게 “TV에 왜 출연하지 않느냐”고 묻자 기다렸다는 듯 대답이 쏟아져 나왔다.
“아무리 신곡을 발표해도 예전 히트곡만 부르게 해요. 7080 가수들은 늘 ‘추억의 가수’ 취급을 당하죠. 내가 설 무대가 없다는 사실에 괴로워서 한동안 TV도 끊고 음악도 안 들었어요. 그래도 미사리 무대에 선 이후로는 마음이 참 편했는데….”
1996년 미사리 카페촌이 본격적으로 형성된 후 10년이 지난 지금 7080 가수들은 미사리를 떠나 인천 분당 의정부 부산 대구 등에서 ‘전국구’ 활동을 벌이고 있다. 7080 문화 대신 ‘TV 스타’를 찾는 젊은 팬이 늘어나면서 점차 1990년대 가수들이 미사리를 장악하고 있다.
5년 전 미사리를 떠난 가수 임지훈은 최근 경기 안산시의 한 카페에서 일주일에 세 번 공연을 한다. 그는 “미사리는 추억만 있을 뿐 마치 고여 있는 물 같다”며 “트로트 가수, 댄스 가수들이 진출한 뒤 ‘미사리=7080’ 공식도 깨졌다”고 말했다.
현재 미사리에서 활동하는 7080 가수들 중 인순이 박강성심수봉 등이 A급 가수. 이들의 몸값은 한 달 출연에 1억 원 정도다. 이런 가수들과 계약하다 보니 커피 한 잔에 3만 원을 받는 카페도 있지만 운영난에 허덕이는 곳이 많다. 한 카페의 사장은 “4, 5년 전 하루 300여만 원의 매출을 올렸으나 최근에는 하루 20만 원 정도밖에 못 번다”고 말했다.
‘미사리의 서태지’로 불리며 미사리에서 두 번째 전성기를 맞은 가수 박강성은 “스스로 ‘옛날 가수’라 생각지 말고 가창력, 몸매, 심지어 개인기 등 끊임없이 적극적으로 변화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8년째 미사리에서 공연을 펼치고 있는 가수 이규석은 “한때 50여 개의 카페가 즐비했던 미사리촌이 큰 카페를 중심으로 합병돼 현재는 10여 곳만 불을 밝히고 있다”며 “설 자리를 잃은 7080 가수들은 살기 위해 전국을 돌고 있다”고 말했다.
“박미경, 듀크 출연” “웃찾사 개그맨 총출동”
미사리 카페촌 입구부터 귀와 눈을 사로잡는다. 박미경 강수지 리아 등 1990년대 가수부터 ‘디바’ 같은 여성 댄스그룹까지 그리 낯설지 않은 이름들이 걸려있다. 한 쪽에서는 두 세 명의 남자들이 SBS 개그프로그램 ‘웃음을 찾는 사람들’(웃찾사)의 개그맨들이 출연한다며 홍보하고 있었다.
미사리 카페촌의 ‘아테네’. 입구부터 홍경민의 댄스곡 ‘흔들린 우정’이 울려 퍼졌다. 현란한 조명을 받은 손님들은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추고 있었다. 카페는 이미 ‘나이트 클럽’으로 변해있었다.
노래가 끝나자 무명 가수 5명이 무대에 올랐다. “안녕하세요 저희는 5인조 남성 그룹 MCK입니다”라는 인사가 끝나자 이들은 ‘소몰이 창법’이라 불리는 리듬앤블루스 스타일로 마이클 볼튼과 ‘빅마마’의 노래를 불렀다. ‘동방신기’를 연상시키는 이들은 이어 싸이의 ‘환희’를 부르며 댄스 실력을 뽐냈다.
2003년 11월에 문을 연 이 카페는 20~30대 손님을 주고객으로 삼고 있다. 이경훈 대표는 “손님들은 더 이상 통기타 가수가 아닌 TV스타나 개인기 많은 연예인들을 보고 싶어 한다”며 “오디션을 보러오는 무명 가수들도 20대 초반의 스타를 흉내낼 정도”이라고 말했다.
손님들도 ‘미사리=통기타 문화’라는 개념을 지운 듯 하다. 직장인 양현욱(28) 씨는 “여자친구와 드라이브를 하다 분위기가 좋아 들렀다”며 “서울의 나이트 클럽과 다를 바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첫댓글 흘러가는 시간들 속에 숙연한 마음으로 따뜻함이 전해지는 사랑과 배려의 마음으로 아름다운 중년의 시간을 보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