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산 이효석의 생애
주 소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남안리 681번지(이효석 생가터)
가 족 부 - 이시후 모 - 강홍경 사이에서
장남으로 출생일 : 1907년 2월 23일
결 혼 1931년 7월 결혼(25세) 처 - 이경원(함북 경성 출신으로
나진고등여학교 출신임) 장녀 - 1932년 나미 출생(생존)
차녀 - 1935년 유미 출생(생존) 장남 - 1937년 우현 출생(생존.
도미) 차남 - 1940년 영주 출생(사망)
출생과 유년시절 1907년 2월23일,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의 본마을 창동리 서남쪽에 있는
성황당을 지나 봉평마을 건너 쭉 빠진 협곡의 마을인데 효석의 생가는 이 마을의 중간쯤 되는
우경산밑이다.
뒷산은 둥그스럼하게 치달린 산으로서 산세가 우악하게 생겨 주변경관을 맑게 한다.
이 산 좌편으로 폭 약80m, 길이 약 900m로 흘러내린 경사진 밭이 완만하게 놓여있다.
생가 앞으로는 작은
들이라고 할 수 있는 비옥한 전답이 펼쳐져 있다.
생가 뒷편 언덕에는 밤나무 몇그루, 돌배나무 한그루 등이 큰나무로 서
있고
앞마당에는 물푸레나무와 단풍나무가 각 한그루씩 서 있다.
생가 중심으로 우편에 사립문이 있어 마을로 나아가는 길이
있고,
앞마당을 지나 좌편 측면으로 돌아가면 우물이 있다.
말하자면 이생가는 전형적인 산촌의 반가라 할 수 있어서 운치가 잘 어울린
집이다.
이 집에서 효석은 산촌의 자연을 뼈마디에 새기며 8세에 이르렀다.
1914년 8세때 외학을 하게되어 봉평에서 100리가 떨어진
군 소재지 평창공립보통학교 (현 평창초등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평창에서는 하숙을 하였는데 봉평집에 다니곤 했다
. 이때의 교통수단은 우마차 아니면 도보가 고작이었다.
그러므로
효석은 봉평과 평창 사이 100리를 거의 걸어서 다녔다.
그래서 그 길은 자연 집에서 나와 남안리 마을을 거쳐 봉평천(흥정천)에 다다르고
여기에서는 좌편 강변에 있는
동리 물레방아를 만나게 되고 그 다음은 봉평천 징검다리를
건너 봉평의 성황당을 지나면서 봉평의 본 마을 창동리에 들어와 상가와 주점,
즉 봉평장터 걸리를 뚫고 시내를
빠져나육?되는데
이중 충주집(훗날 '메밀꽃 필 무렵'의 작품 속에 나오는 주점)이란 주점도 지나왔었다.
봉평시내를 빠져나와서는 장평까지 20리,
노루목고개('메밀꽃 필 무렵' 작품 속에 나오는 고개)를 넘게
되면
장평의 개울(동작품속에 나오는 개울)에 이르며
이 개울을 건너서는 장평 삼거리(한길은 봉평으로 가는길, 한길은 강릉, 하길은
평창길)에 닿게되고
장평에서 대화까지는 30리, 하장평, 재산, 재재(고개이름)를 넘어 신리, 상대화리, 대화로 이어진다.
대화면의 대화거리는 곧 대화장터인데 이 거리도 효석이 걸어다녔던 길목이 된다
. 대화에서 평창까지는 40리,
다시 이 길을 거쳐 평창 하숙집에 오게 된다.
6년 동안 효석은 이 100리 길을 왕래하였는데
그렇다면 효석은 이 길을 몇 번이나
걸어서 내왕했겠는가는 그 자신도 모르리라.
효석은 이 100리 길 속에서 자연을 배웠다.
봄에는 꽃피는 동산구비를, 여름에는 들판에 깔린 오곡의 청파,
뜨거운 햇빛, 소나기, 숲의 청산들을 바라보며
가을은 자즈러지게 피어있는 메밀꽃밭을
지나면서 멀리 물들어가는 단풍산의 원경에 취하고 낙엽도 밟게 되며
겨울은 산촌에 내리는 눈을 맞이하였고 산악
지대의 설경에 파묻혀 살았다.
절기마다 다른 분위기와 변화해가는 자연의 순환을 맛보게 되었다.
또 절기마다 하늘과 구름의 색깔이 다르게
변하였고,
바람결 또한 그렇게 변하며 불던 것을 직접 피부로 느끼며 유년시절을 지내왔던 것이다.
후에 그의 작품속에 나오는 자연의 숨소리가 싱그러운 것은 이 유년시절에 체험하고
몸에 밴 소질에서 풀어져 나온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효석은 외학을 하면서도 우등생으로 평창공립보통학교 6년간 과정을 전부 마쳤던 것이다.
여기까지를
유년기로 정의한다.
다시 1920년(14세)에 효석은 청운의 꿈을 가슴에 싣고 더 먼 외학의 길을 경성으로
오른다.
경성제1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이 학교에서 현민 유진오를 만나게 된다
. 처음은 학교 기숙사에서 지냈지만 그의 생리에
맞지 않아 곧 수송동 하숙으로 옮기고
그야말로 타관살이가 제대로 시작되었고 또 본격적인 공부생활도 자리를 잡게 되었다.
학교에서 효석과 진오는 수재라는 이름으로 알려졌교
이때 벌써 두사람은 깊은 우정을 맺고 문학쪽으로 재질을
드러내 효석은 산문을,
진오는 시를 창작하면서 서로 평을 주고 받는 수학과정을 거치며
서구문학을 섭렵하기도 하고 자작소품들을
투고하기도 하였다.
직업생활과 작품활동 가난한 가운데 직업을 구하였지만
이웃의 눈총,
또 스스로도 못마땅하여 경성농업학교로 직업을 옮겨 하향하다시피한 그였지만 작품에 대한
집념은 대단하여 중앙의 신문, 문예지, 월간잡지 등을 통하여 왕성한 발표를 해 나갔다.
가난한 와중에서도 이와
같이 문학에 있어서만은
정력을 다 바쳐 빈틈없는 작업을 하는 정열을 보였다.
이런 시기에 1932년 현민(유진오)이 경성을 찾아왔다
. 그의 끊임없는 작품활동에 대하여 찬사를 주고 싶었던
것이며,
또 그의 생활근황을 직접 보고 싶기도 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현민이 찾아오기 이전 장녀 나미가 태어났기에 이런 소식을
접하고
축하를 겸한 나들이기도 하였음을 짐작케 한다.
아무튼 효석은 여기 경성농업학교에서 3년간(1931~1934초까지)을 있었는데,
이 기간동안 경제적 궁핍을
무던히 겪으면서도 거기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창작의욕에 불탔던 것이다.
이 때에 쏟아져 나온 작품량은 일생의 3분지 1에
해당하는 분량쯤 되었다 하고
질도 순수했음이라 한다.
이 당시 문학의 분류는 정리가 미비하였는데, 소설 그것도 단편소설의 범주를
열어놓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가운데 다시 직장을 옮기게 되었으니 평양의 숭실전문학교였다.
그 때가 1934년, 그가 28세가 되던
해이다.
그는 이곳에 가서도 창작의욕을 잃지 않았다.
창작, 수필, 서간논평, 번역 등 여러 방면에서 작품을 다루고 徘?게재지 또한
다양하게
취급되었다.
등단의 위세로서가 아니라 중견작가로서의 발돋움을 해 가는 그이 이름은
경향을 막론하고 명성을
날려갔고 따라서 문명을 드날리는 이름만큼이나
그의 작품은 깔끔하게 그리고 다량으로 각 지상에 얼굴을 내밀었다.
병적으로 침식을 딪고
작품활동을 하였기에 가족 들은 상당히 깊은 우려를 금할 수
없었다고 한다.
전직 1년 후인 1935년에 차녀 유미가 출생하였다.
그의 직계는 본인을 합하여 4명이 되었기 단란한 가족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그는 가족과의 시간보다는 자기 시간에 치중하여 작품에 몰두하였다.
유미가 출생한 다음해인 1936년에 그의 대표작 '메밀꽃 필 무렵'이 쓰여지기도 하였다.
다시 1937년에
장남 우현이 출생하여 가족은 5명이 되었고,
생활에 대한 빈곤에서도 어느 정도 벗어났다.
이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가족과 시간을 나누고
자녀들과 같이 놀기도 하였다지만
작품에 대한 의욕은 변함이 없어 가족과는 잠깐씩이었고 계속 작품 쓰기에 힘을 쏟았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1921년부터 1932년까지 11년여간 경성농업학교 및 숭실전문학교에서 재직하는
동안 그의 작품은 거의 쓰여졌다고 할 수 있으리라 만큼 왕성한 면을 보였던 것이다.
병과 사 1941년 35세 되던 해에 뇌막염으로 자리에 눕게 되고
계속하여 큰 수술을 받는 곤욕을
치루었다.
그 와중에도 작품은 계속 발표되었으나 병은 그를 가만히 두지 않고
1년후인 1942년 36세가 되는 5월에 다시 눕게
되었고,
5월 6일에는 평양도립병원에 입원하였고, 5월 10일에는 치유될 수 없는 형편에서 퇴원하여
귀가하게 되는 불행을 맞이하게
되었다
혼수상태 무의식의 나날과 시간이 흐르다가 결국 25일 하오에 별세하고 말았다.
시신은 화장되었으며 유해는
엄친에 의하여 당시 부모가 사시던 곳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고등골 산가에 안장하게 되었으나
그후 용평면 장평리 영동고속도로변 산록으로
묘소를 이장 하였다.
1998년9월9일 다시 묘소가 경기도 파주시 동화 경모묘지공원으로 이장됨.
이효석의 묘가 생가터 부근으로
이전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면서 이효석의 생을 더듬어 봤습니다.
첫댓글 메밀꽃필 무렵! 메밀국수 유명환 봉평장 한번 다녀오고 싶네요...........
4~5년 전에 한번 다녀온적이 있는대 많이 변한듯 하군요. 허생원이 절로 만들어진게 아닙니다.
메밀은 척박한땅에서 자라는데...강원도 오지에 다른 농사가 마땅치 않아서 지었나봐요...우악한 산기슭 청정한 땅에서 그런 문학이 탄생 했나봐요...그분이 종로네거리에서 태어나셨다면...이런 문학이 태어나지 못했을 꺼예요....
너무나 짧은 삶이 안타깝네요.메밀꽃 필 무렵 보다 더 좋은 작품! 저 세상에 가면 읽을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