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녹내장으로 시력을 잃은 이효준의 부탁으로 원고를 넘겨받아 올리는 글입니다.
안골왜성에서 안골만과 웅동만의 해안도로를 따라 2시간 걸어가면 창원시 진해구 남문동의 흰돌메공원이다. 흰 돌이 많은 산이라고 백석산이라 부르는데 우리말로 흰돌메다. 백석산은 산이 바다 쪽으로 뾰족하게 튀어나와 있다. 이곳을 조선시대에는 백석말이라고 불렀다. 말末은 땅의 끝이라는 의미로 곶과 같은 말이다. 공원 도로변의 남문전망대에 웅포해전비가 있다. 당시에는 이 부근을 웅포하고 불렀다. 비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1년쯤 지난 1593년 2월부터 3월 초까지 총 7차례에 걸쳐 지금의 창원(진해) 웅포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조선 수군이 공격하여 승리한 해전이다. (중략) 이 해전은 일본군의 서진 의지를 좌절시킨 의미가 컸으며 7차례 해전에서 각기 다른 전술을 구사하여 승리를 거둔 것이 특징이다.’
웅포해전비 바다 너머에는 삿갓 모양의 남산(184m)이 우뚝 솟아 있다. 남산 남쪽에는 바다를 매립하여 진해신항을 조성 중이다. 바다 위로 고가도로가 남산 옆의 진해신항으로 뻗어 있다. 진례에서 출발한 왕복 4차선의 남해고속도로 제3지선이다. 진해신항에서는 옆의 부산신항과 도로가 연결된다. 진해신항은 동북아 항만물류의 중심이 되는 물류전진기지이며, 경남의 새로운 미래가 시작되고 있는 곳이다. 남산의 북쪽 산기슭부터는 남문동 진해신항 배후 신도시가 조성되어 있어 고층 아파트가 즐비하다. 활기가 넘치고 고급스러운 타운이다.
남산은 임진왜란 때 웅천왜성(남산왜성)이 있던 곳이다. 웅천왜성은 전체 왜성 가운데 울산 서생포왜성 다음으로 크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진을 치고 있던 일본 수군의 전진기지였다. 부산포 다음의 제2거점이다.
이순신 함대는 1592년 9월 1일, 일본 수군의 본진인 부산포를 공략하여 적선 100대를 격침시키고 대승했다. 부산포해전이다. 그 이후로는 전투가 소강상태에 있었다.
1593년 1월 9일 조명연합군은 평양성을 탈환했다.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가 군은 한성으로 퇴각했다. 의주에 피신해 있던 선조는 이순신에게 1월 25일과 1월 29일, 잇달아 두 번에 걸쳐 출전 명령서를 내려보냈다. 명나라 군사들이 이미 평양을 탈환하고 기세를 몰아치니 적들은 반드시 도망갈 것이다. 그대는 수군을 남김없이 이끌고 배 한 척도 돌아가지 못하도록 하여라는 내용이었다. 조정의 성화와 같은 독촉에 2월 8일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전라우수사 이억기, 경상우수사 원균의 수군과 합류하였다. 판옥선 89척으로 3도 수군을 편성하여 거제도 북쪽 칠천도에서 이틀을 묵고 2월 10일 출전을 하였다. 안골포해전의 7개월 뒤다.
일본 수군의 본진인 부산포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웅포를 지나야 했다. 웅포를 지나치고 부산포로 향한다면 협공을 당할 수도 있다. 그래서 먼저 웅포부터 쓸어버리기로 한다.
흰돌메공원에서 마주보이는 남산 사이에는 와성만이라는 길고 좁은 바다가 있었다. 여기가 웅포해전의 현장이다. 일본군은 양안에 진지를 구축하고 조총과 포로 무장하였다. 만 깊숙이에 함선 115척이 정박되어 있었다. 남산에는 육군 10,000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남산으로 걸어가는데 지금은 와성만의 바다가 거의 매립되어 한때 바다였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옛날의 바다 위로 걸어가고 있다. 지금은 와성만이라는 말이 없어졌다. 와성지구로 부른다. 남산 기슭 바다 끝에는 ‘와성마을’이라고 새겨진 표지석이 있다. 몇 호 되지 않는 마을인데 깨끗하다. 바다 건너 맞은편에는 흰돌메공원이 마주 보인다. 그 사이가 600미터 정도 된다고 한다.
이순신은 와성만 앞에서 남산 꼭대기의 웅장하고 화려한 일본 성을 보고 놀랐다. 그 밑에도 성들과 성곽들이 보이고 산 전체가 요새 같은 성이었다. 지난 해 9월 1일에 부산포 공략을 하러 가면서 이리로 지나갔다. 그때는 성이 없었다. 불과 5개월 만에 저런 규모의 견고한 성을 지었다는 것이 믿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이때 고니시 유키나가는 이 성에 없었다. 두 달 뒤인 4월 한양에서 철수한 이후 7월경에 본격적으로 이곳에 머물렀다.
와성만은 좁아서 포구 깊숙이 들어갈 수가 없었다. 폭 600m의 바다에는 판옥선 몇 대밖에 들어갈 수가 없다. 조선 함대는 일본 수군을 넓은 바다로 유인해서 전투를 벌이기로 했다. 계속 도발을 해도 일본 수군은 대응을 하지 않았다. 이미 이순신의 전술을 알고 있기 때문에 겁을 먹고 꿈쩍도 않고 있었다.
난중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2월 10일.
아침에 흐렸으나 늦게 갰다. 오전 6시에 출항하여 곧장 웅천과 웅포(진해 남문동)에 이르니, 적선이 여전히 줄지어 정박해 있었다. 두 차례 유인했으나, 우리 수군에 이미 겁을 먹고는 나왔다가 돌아갔다 하여 끝내 잡아 섬멸하지 못하였다. 매우 통분한 일이다. 밤 10시경에 영등포 뒤 소진포(거제 장목 송진포리)로 돌아가 정박하고서 밤을 지냈다.
2월 12일.
이 날도 역시 유인했으나 왜적들은 끝내 바다로 나오지 않았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