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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내고향 안동 원문보기 글쓴이: 송현 새댁
안녕하시껴? 품격 높은 도시 내고향 안동 입니다.
***** 안동을 빛낸 인물들 *****
○ 우탁
역동 우탁(禹倬 : 1263, 원종4-1342, 충혜왕 3) 자는 천장(天章) 또는 탁부(倬夫) 호는 백운당(白雲當) 또는 역동(易東)으로 회헌 안향(1243-1306) 의 문인이다. 17세인 1278년(충렬왕4) 향공진사가 되었으며 곧 발탁되어 홍문관 수찬에 임명되었다. 1290년 문과에 급제하여 영해 사록으로 나가 미신 타파에 힘썼다. 이후 성균관 좨주, 진주목사, 사인 ,감찰규정, 진현관 직제학 등 지을 역임했다. 『주역』이 우리나라에 전래되었을 때 아무도 이해하는 이가 없었는데 선생은 월여 동안 연구하여 그 오묘한 이치를 해득했다 한다. 선비 정신을 바탕으로 충선왕의 실덕(失德)을 간했으니 그것이 유명한 지부상소(持斧上疏)였다. 선생은 고매한 인품과 학문 외에도 의리를 실천한 인물로 후세에 추앙을 받았다.
○ 이황
퇴계 이황 선생은 연산군 7년(1501) 현재의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출생하여 선조 3년(1570)에 돌아가셨다. 34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단양군수, 풍기군수, 공조판서, 예조판서, 우찬성, 대제학을 지냈으며 사후에 영의정으로 추중되었다. 70여회나 벼슬을 사양하고 학문연구, 인격도야, 후진양성에 힘써 이나라 교육 및 사상의 큰 줄기를 이루었고 만대의 정신적 사표가 되었다. 선생은 명종 16년(1561)에 도산서당을 세웠고 사후 4년만인 선조 7년(1574)에 문인과 유리이 서원을 세웠으며 선조 임금은 한석봉 친필인 도산서원의 현판을 사액하였다.
주요 저서로 계몽전의, 성학십도, 도산십이곡, 주자서절요, 심경후론, 활인심방, 예안향약, 자성록 등이 있다.
○ 이현보
이현보 선생(1467, 세조13~1555, 명종10)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시조작가로 본관은 영천이며 자는 비중, 호는 농암, 설빈옹으로 참찬 흠의 아들이다.
1498년(연산군4)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32 세에 벼슬길에 올라 예문관검열, 춘추관기사, 예문관봉교를 거쳐, 1504년 38세때 사간원정언이 되었으나 서연관의 비행을 논하였다가 안동에 유배되었다.
그후 중종반정으로 지평에 복직되어 밀양부사, 안동부사, 충주목사를 지냈고, 1523년에는 성주목사로 선정을 베풀어 표리를 하사받았으며, 병조참지, 동부승지, 부제학 등을 거쳐 대구부윤, 경주부윤, 경상도관찰사, 형조참판, 호조참판 을 지냈다. 1542년 76세 때 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만년을 강호에 묻혀 시를 지으며 한거하였다.
홍귀달 선생의 문인이며, 후배인 이황, 황준량 선생 등과 친하였다. 조선시대에 자연을 노래한 대표적인 문인으로 국문학사상 강호시조의 작가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작품으로는 전하여오던 <어부가>를 장가 9장, 단가 5장으로 고쳐 지은 것과 <효빈가>, <농암가 >,<생일가> 등의 시조작품 8수가 전하고 있다. 저서로는 <<농암문집>>이 전해지며 시호는 효절이다.
○ 류성룡( 1542 - 1607 )
자는 이현 호는 서애로 입암 중영의 둘째 아들이요 겸암 운룡의 아우이다. 퇴계 선생의 문인으로 태어날 때부터 뛰어난 자질이 있어 퇴계 선생은 <이 사람은 하늘이 낸 사람이다.>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다.
강명천리로 선생의 연원정맥이 되었다. 명종 19년(1564)에 생원과 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명종 21년(1566) 별시문과에 병과 11인 으로 급제하여 호당과 대제학을 거쳐 광국과 호성의 양훈에 봉해졌고 풍원부원군에 되었 다. 임진왜란 때 출장입상하여 경세대업이 당대 제일로 사람에서 태산북두로 추앙하였다. 관은 영의정에 이르렀다. 도학과 문장, 그리고 덕행과 글씨 등 모든 분야에 있어서 명성을 떨쳤다.
시호는 문충이며 병산서원에 제향 되었다. 향년 66세. 서애 류성룡 선생은 하회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선생은 당쟁이 극심했음은 물론 그 유래를 찾기 어려운 국난기 였던 임진왜란을 몸소 겪으면서 그 최고 책임 하에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훼예가 일정할수만은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서애 선생의 졸기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선조 40년(1607) 5월 13일(을해). 전 의정부 영의정 풍원 부원군 류성룡이 졸하였다. 류성룡은 경상도 안동 풍산현 사람이다.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기상이 단아하였다. 어린 나이에 퇴계 선생의 문하에 종유하여 예로써 자신을 단속하니 보는 사람들이 그릇으로 여겼다.
류성룡은 조정에 선 지 30여 년 동안 재상으로 있은 것이 10여 년이었는데, 경악에서 선한 말을 올리고 임금의 잘못을 막을 적엔 겸손하고 뜻이 극진하였다. 그러나 규모가 조금 좁고 마음이 굳세지 못하여 이해가 눈앞에 닥치면 흔들림을 면치 못하였다. 그러므로 임금의 신임을 얻은 것이 오래였었지만 직간(直諫)했다는 말을 들을 수 없었고 나라 일을 비록 혼자 처리하였으나 나빠진 풍습을 구하지 못하였다.
○ 이육사
이육사(李陸史, 본명 이활 李活, 이원록, 이원삼 1905-1944)
시인, 독립운동가. 경북 안동군 도산면 원촌리 생. 진성 이씨. 퇴계 이황의 14대 손 5세 때부터 조부로부터 한문 수학, 그후 신학문 수학, 20세 때 대구 남산동 662 번지로 이사 1927년 형(원기), 동생(원조-문학평론가, 원일)과 함께 독립운동단체인 정의부 군정서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여 독입운동을 하다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의 피의자로 검거, 이 때 학생인 원조는 풀려 나오고 3형제는 2년 7개월간 옥고를 치름 (아호인 '육사'는 이 때의 수인 (囚人) 번호 64 혹은 264번의 음을 딴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29년(26세)에 조선일보 대구 지사를 경영하면서 기자로 활동, 1930년(27세) 대구격문사선에 연루되어 원일과 함께 대구경찰서에 피검, 6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외삼촌의 독립운동 자금관계로 만주에 들어갔다가 군관학교 학생모집을 위해 귀국, 원조를 포함한 3인을 데리고 북경으로 가는 도중, 만주사변이 발생하여 3인은 3개월만에 돌아오고 육사는 봉천에 머물렀다. 1932년(29세)에 만주의 군관학교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간부훈련반에 입교, 30세 졸업. 31세에 서울서 일본헌병에 피검되는 등 생전 17회 이상 투옥됨
데뷔작은 1930년 1월 3일자 [조선일보] 발표작인 <말>이다. 그후 [조광]지에 <계절의 표정> 을 발표한 1942년까지 약 13년간 작품활동을 함 1932년 [신조선]에 <황혼>을 발표하여 등단 1937년 신석초, 윤곤강, 김광균 등과 [자오선] 동인. 1943년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 투옥. 1944년 1월 16일 북경 감옥에서 옥사. 이상화, 윤동주와 함께 대표적 저항시인.
【대표작】
<절정>, <교목>, <광야>, <청포도> 등 한결같이 남성적 어조로 민족사의 창조에 대한 강인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음.
【유고시집】으로 (육사시집)이 있다.
☞사후 그가 환갑이 되는 1964년에는 그의 큰조카 이동영(모 전문대교수)이 신석초, 이효상, 조지훈 등의 협조를 얻어 [육사시집]을 [청포도]로 개제하여 다시 증보 발행하기도 했으며, 1968 년 어린이날에는 안동 낙동강 가에 육사시비를 세웠으며 여기에 <광야>가 새겨져 있다.
【이육사의 작품 세계】
☞ 초기 : 일제 강점하의 현실 소재, 강렬한 저항의식 - <광야>, <절정>
☞ 중기 : 실향 의식과 비애 표출 - <청포도>, <자야곡>, <교목>
☞ 후기 : 향토색을 띤 목가풍의 서정시로 높은 인간애 - <황혼>
○ 김성일(金誠一, 1538∼1593)
조선 선조 때의 문신, 학자.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峰)이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538년(중종 33)에 나서 1564(명종 19) 27세에 사마시(司馬試)에 뽑혔고 1586년(선조 1) 31세때 문과에 급제하여 사국(史局)에 들어갔으며 한림(翰林), 삼사(三司), 이랑(吏郞), 사인(舍人), 대사성(大司成)을 역임하고 호당 (湖當)을 거쳐 부제학(副提學)을 지냈다.
1591년(선조 24)에는 통신사가 되어 부사(副使)로 정사(正使) 황윤길과 함께 일본에 다녀왔다. 정사는 일본의 침략이 있을 것이라고 고하였으나 부사는 민심의 동요를 우려해서 그와 상반되는 의견을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로 인하여 공이 경상도 우병사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대노하여 교서를 내려 말하기를 '김성일이 일찌기 왜(倭)가 오지 않는다 하여 변정(邊情)이 해이했기 때문에 적변이 생겪으니 내 장차 국문하리라'하고 금부에 명하여 잡아 오라 하였다.
이에 우의정 류성룡과 대간이 변호하니 선조는 묻기를 '김성일의 장계에 일사보국(一死報國)이라는 말이 있었으니 성일 과연 능히 할 수 있을까'하니 류성룡과 최황이 '성일이 평생 마음이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것 뿐이었으니 진충(盡忠) 보국 하리라 믿습니다.'하고 왕세자 또한 극히 간하니 선조는 노여움이 풀려 선전관을 보내어 용서하게 하고 또 초유사(招諭使)를 제수하니 공이 직산(稷山)에 이르러 명을 받고 남쪽으로 돌아갔다.
공은 초유사로 종군하여 죽산, 함양 등지에서 격문(檄文)을 돌려 김면, 정인홍, 곽재우 등의 도움을 받아 의병을 일으켜 진주성을 사수하다가 순직하였다.
공이 56세에 졸한지 두달째 성이 함락되고 강우(江右)가 도륙(屠戮)이 되어 적의 소굴이 되니 식자(識者)가 말하기를 '하늘이 만일 공의 한번 죽음을 늦추어 주었다면 일이 어찌 여기에 이르리오'하였다.
여러번 증직(贈職)을 내려 이조판서에 이르렀고 숙종 기미년에 문충공의 시호가 내렸다.
안동 임천서원에 향사했다. 저서로는 <학봉집> 이 있다.
선생은 일찌기 퇴계 문하에서 성리학적 수양을 쌓고 인격을 도야하였으며, 그 윤리와 가치를 직접 실천해 나가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 하위지(河緯地)
공은 사람됨이 침정 과묵하고 공손하여 예의가 있어 대궐앞을 지날 때면 반드시 말에서 내렸고 비록 비가 와서 질더라도 일을 피하지 않았다.
공의 자는 천장(天章), 중장(仲章) 호는 단계(丹溪), 연풍(延風)이요, 본관은 진주이다. 1387년(고려 우왕 13년) 擔의 아들로 태어났다.
1435년(세종 17년) 생원에 합격, 1438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호당(湖에堂) 들어가 독서하고 1444년 집현전 교리가 되어 오예의주(五禮儀註) 상정(詳에定) 참여했다.
집현전에서 경(經筵에) 왕을 모시면서 학문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일찍이 세종대 왕명으로 역대병요(歷代兵要)의 편집에 착수하였는데 세조가 당사 수양대군으로 이를 총재하게 했다. 그 책이 1453년(단종 1년) 봄에 간행되니 공로가 많은 사람에게 가자(加資)하게 되었다. 공은 당시 집의(執義)로 중직(中直)에 승진외었으나 이를 굳이 사퇴하면서 임금의 나이가 어려서 나라가 위태로운데 왕족이 작상(爵賞)을 가지고 조신(朝臣)을 농락하면 안된다고 말했다.
1453년 10월 수양대군이 김종서를 죽이고 영의정이 되자 공은 벼슬을 버리고 선산에 가 있었는데 수양대군이 단종에게 청하여 좌사관(左司諫)으로 불렀으나 사퇴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1455년(단종 3, 세조 1년)세조가 왕위를 빼앗아 즉위하고 공을 예조 참판으로 불러 마지 못해 취임했으나 녹을 먹는 것을 부끄러워 하면서 별실이 쌓아 두었다.
1456년(세조 2) 단종복위를 모의하다가 동모자 김질의 고변으로 적발되어 1.2사화에 걸려 성삼문, 박팽년, 이개, 유응부, 류성원등과 함께 순절하니 이를 사육신(死六臣)이라 한다.
세조는 공의 재주를 아끼고 몰래 그를 대하고 모의한 사실을 고백하면 용서해 주겠다고 회유하였으나 공은 일소에 부쳤다.
두 아들 호(琥)와 박(珀)도 연좌되어 사형을 받게 되었다. 작은 아들 박은 어린 나이였으나 죽음을 두려워함이 없이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죽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아버지도 이미 살해되었는데 제가 어찌 혼자 살아남겠습니까" 하고 태연히 죽음을 받으니 그 아버지에 부끄럽지 않는 아들이라 칭찬했다.
공이 옥중에 있을 때 종자(從子) 국(國)에게 후사(後嗣)를 부탁하니 국은 나이 어렸으므로 죽음을 면했다. 이름을 원(源)이라 고쳤고 안동에서 살았다. 1705년(숙종 31) 민진후(閔鎭厚)가 그 일을 임금께 아뢰어 원(源운)으로 공의 후사를 잇게 하였다.
해재(晦齋)와 퇴계의 사어록(私에語錄) "동방의 절의와 도학(道學)의 전함이 포은(圃隱) 이후로 하위지·박팽년 두 분이 첫머리가 된다"하였다.
1774년(영조 20) 이조판서가 증직되고 충렬공의 시호가 내렸다.
1776년(정조 1)에 정려(旌閭)를 내렸고 유림들은 영월 창절사(彰節祠), 과천 민절사(愍節祠), 선산 월암서원, 홍천 녹운서원, 대구 낙빈서원, 의성 충렬사(忠烈祠에) 봉향하고 장능(莊陵) 충신단(忠臣壇)에 배향했다. 지금 안동시 서후면 교리에 공을 모시는 창열서원(彰烈書院) 있다.
첫댓글 선비의 도시 안동에는 문화적 가치가 대단한 지역이죠. 그 중에서도 우리 역동할아버지는 그 위상이 돋보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