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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한 음성으로 찾아오세요!
참고말씀: 창15:1; 출19:18; 20:19; 24:17; 삼상14:15; 왕상19:3,4; 시62:1; 렘1:2; 2:1; 겔1:3; 호1:1; 욜1:1; 행4:31; 고전10:12; 히13:5; 계2:5
읽을말씀: 왕상19:9-13
주제말씀: 왕상19:12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니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첫째, 바람도, 지진도, 불도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왕상19:11)
하나님은 선지 사역을 감당하다가 낙심한 엘리야에게 특별교육을 하셨습니다. 즉 호렙 산의 그 굴에서 일대일 맞춤형 교육을 하시되, 바람, 지진, 불 등을 통해 시청각 교육을 하셨습니다. 친히 보여주시고 들려주시면서 그가 미처 놓치고 있는 부분을 깨닫게 하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왜 그리 하신 것입니까? 누구든지 낙심하고 넘어질 수 있는데,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 이처럼 넘어졌다고 해서 하나님은 결코 포기하시거나 버리시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13:5 하)
버리지 않으시는 대신 무슨 과정을 거치게 하십니까? 재교육입니다. 즉 그가 ‘왜 넘어졌는지, 왜 떨어졌는지, 왜 실패했는지, 어디서부터 어긋나거나 이탈하게 되었는지’ 등을 스스로 되짚어보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계2:5 상) 그리 해야만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의 경우는 어떤 식으로 재교육하셨습니까? 그를 ‘그 굴’(9절) 어귀에 세워놓고,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11절 상) 크고 강한 바람, 지진, 불을 그 앞에 차례대로 지나가게 하심으로써 교육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11,12절)
왜 이 세 가지를 지나가게 하셨습니까? 이는 모두 하나님의 임재나 그 위엄하신 능력의 표현들로 간주되어 온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바람(헬, 프로에스)은 ‘폭풍처럼 강하게 휘몰아 부는 바람’을 뜻하는 것으로, 형체는 보이지 않으면서도 강하고 분명한 역사를 일으키는 것이 하나님의 임재나 그 역사를 상징할 만하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11절 중)
지진(地震) 역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권능을 온 몸으로 느끼고 체험하게 한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임재나 그 역사를 상징할 만 하며,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출19:18 하) / “들에 있는 진영과 모든 백성들이 공포에 떨었고 부대와 노략꾼들도 떨었으며 땅도 진동하였으니 이는 큰 떨림이었더라(하나님이 떨리게 하심이었더라).”(삼상14:15) /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4:31)
맹렬한 불길 역시 죄악 되고 더러운 것을 태워 없애고 또 정결하게 한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할 만 했습니다.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출19:18 상) / “산 위의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 자손의 눈에 맹렬한 불 같이 보였고.”(출24:17)
그러나 본문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께서 무엇을 일일이 확인시켜 주셨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바람이나 지진, 불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아니 계신다는 점입니다.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11,12절)
왜 이 같이 확인시켜주신 것입니까? 하나님을 따른다면서도 자칫 엉뚱한 것을 좇았고,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자칫 화려한 겉모습에만 취해있었으며, 하나님을 잘 안다고 자부하면서도 정작 하나님과의 교제 방법에는 무지했으며, 하나님과 동행한다면서도 정작 하나님의 음성 듣는 일에 소홀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경우는 지금 어떻습니까? 우리도 하나님을 따른다면서도 자칫 엉뚱한 것을 좇고 있고,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자칫 화려한 겉모습에만 취해있지는 않습니까? 또한 하나님을 잘 안다고 자부하면서도 정작 하나님과의 교제 방법에는 무지하고, 하나님과 동행한다면서도 정작 하나님의 음성 듣는 일에 소홀하고 있지 않습니까?
원컨대 이제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좇고 있는지, 아니면 엉뚱한 바람이나 지진, 불 등을 좇고 있는지 점검해보기를 원합니다. 즉 크고 강한 바람 같은 역사나 온 땅을 뒤흔드는 진동, 맹렬히 타오르는 불길 등이 아닌 하나님만을 좇아갈 수 있기를 원합니다.
둘째, 세미한 음성으로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만나세요.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왕상19:12)
앞서 하나님은 자신이 크고 강한 바람 가운데에도, 지진 가운데에도, 불 가운데도 계시지 않으셨음을 일일이 확인시켜주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에게 무엇으로 임하셨습니까? 말씀, 곧 음성입니다.
이전에도 자주 그리해 오셨으며, 이후에도 자주 그리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이후에도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창15:1 상) /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가 다스린 지 십삼 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고.”(렘1:2) /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렘2:1) / “갈대아 땅 그발 강가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부시의 아들 제사장 나 에스겔에게 특별히 임하고 여호와의 권능이 내 위에 있으니라.”(겔1:3) /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가 이어 유다 왕이 된 시대 곧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왕이 된 시대에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호1:1) / “브두엘의 아들 요엘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욜1:1)
이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사람들에게 통상적으로 무엇으로 임하셨습니까? 말씀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은 구체적으로 어떤 말씀으로 임하신다고 했습니까? 세미한 음성, 즉 아주 작은 소리입니다.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12절 하) 왜 이같이 작은 소리로 임하시는 것입니까? 세상의 잡다한 소리를 모두 뒤로 한 채, 오직 하나님의 음성에만 귀 기울이기를 원하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니 이 같은 세미한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어찌 해야 합니까?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고,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시62:1) 고요한 중에 그 음성 듣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항상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시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때로는 크고 위엄에 찬 음성으로 말씀하기도 하셨습니다. “모세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출20:19) 하지만 우리와 친밀한 교제를 나눌 때는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를 만나기를 힘써야 합니까? 세미한 음성으로 찾아오는 하나님입니다. 언제 만날 수 있습니까? 말씀을 묵상하거나 조용히 묵상으로 기도할 때 등입니다. 이런 시간이 우리에게 많으면 많을수록, 쌓이면 쌓일수록 어떤 유익이 있습니까? 우리의 믿음이 자라고 우리의 인격이 변화되며 신앙의 깊은 데로 나아가게 됩니다.
우리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우리에게는 이런 시간이 많습니까?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와 교통하심이 날마다 지속되고 있습니까? 명심하십시오. 이런 시간이 많고 이런 경험이 많은 사람일수록 단단하여서 어떠한 충격이나 위기 앞에서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한편, 엘리야의 삶은 이제까지 이적과 충격으로 가득한 극적이고도 드라마틱한 삶 자체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일 순 없으며, 또 전부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통해 날마다 신앙의 깊은 데로 나아가야 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고요.
허나 그러지 못했기에 그는 속절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었고 삼십육계 줄행랑을 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왕상19:3,4)
비록 그가 갈멜산 상의 승리로 대변되는 크고 강한 바람처럼, 강력한 지진처럼, 맹렬한 불꽃과 같은 역사들을 이루었다고 해도,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와 교통하심이 날마다 지속되고 않으기에, 언제든지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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