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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5. 묵상글 ( 연중 32주간 토요일. - 사랑하는 한 기도하는.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아직 / 05:00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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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5. 연중 32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11.15 04:55
- 사랑하는 한 기도하는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오늘 주님께서는 낙심하지 않고 끈질기게 기도하는 과부를 예로 드시는데
이 과부처럼 지체없이 하느님께서 들어주실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
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 의구심을 표시하십니다.
그런데 뜯어보면 낙심하지 않고 끈질기게 기도한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지체없이 들어주시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까?
지체없이 들어주신다는 것이 우리 인간이 청하는 즉시 들어주신다는 뜻이라면
낙심하지도 않을 것이고 끈질기게 기도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체없이 들어주신다는 것은 우리가 청하는 즉시가 아니라
당신께서 들어주시겠다고 마음먹는 즉시 들어주실 거라는 뜻일 겁니다.
문제는 하느님의 그 ‘마음먹기’가 언제입니까?
우리의 끈질김이 필요할 정도로 오랜 시간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금방 들어주시면 우리의 끈질김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므로 끈질기게 기도하기 위해선 들어주시기로 하느님께서
마음먹으실 때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마음의 각오와
청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에 맞으면 꼭 들어주시리라는 믿음과
하느님 뜻에 의탁하며 기다릴 줄 아는 끈질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저는 이런 면에서 끈질기게 기도해드리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20년 넘게 기도해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20년 넘게 하느님께서 안 들어주고 계신다는 뜻도 되는데
그런데도 계속 끈질기게 기도하는 것은 제가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이고,
기도를 놓는 순간 저는 그분에 대한 사랑을 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하느님께서 들어주시고 안 들어주시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들어주실 것 같으면 기도하고 안 들어주실 것 같으면 기도하지 않는
그런 기도가 아니라 사랑하는 한 끝까지 기도하는 그런 기도라는 뜻입니다.
요즘은 주님께서 예로 든 과부와 같은 분과 그분 아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분은 치매 시어머니를 10년 넘게 모셨고 파킨슨병 병 남편을 역시
10년 넘게 간호했으며 다시 급성 백혈병을 앓는 아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이렇게 불쌍하고 어떻게 보면 이렇게 불행한 분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분에게 어떻게 이렇게 모지신지 모릅니다.
저는 이분의 아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지만 이분을 위해서 기도하고,
이분을 위해서라도 아들을 꼭 살려달라고 떼를 쓰면서까지 기도하고,
요즘은 하느님을 원망하면서까지 기도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착한 분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냐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분을 보면서 앞서 말씀드린 것과 같은
사랑의 믿음과 사랑의 기도를 배웁니다.
사랑하기에 하느님을 믿을 수밖에 없는,
사랑하기에 하느님께 맡길 수밖에 없는,
사랑하기에 기도할 수밖에 없는 그런 기도를 배웁니다.
우리의 기도도 사랑하는 한 기도하는 그런 기도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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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5. 연중 32주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
“AI이 아니라, 기도가, 믿음이, 주님이 답이다”
“주님을 찾는 마음은 기뻐하여라.
주님과 그 권능을 구하여라.
언제나 그 얼굴을 찾아라.
그분이 이루신 기적을 기억하여라.”(시편105;3ㄴ-5ㄱ)
오늘 화답송 시편이 참 좋습니다. 기도가 답입니다. AI(인공지능)이 아니라 기도가, 믿음이, 주님이 답입니다. AI가 우상이 된 세상, 저는 기도에 대해, 믿음에 대해, 주님에 대해 끊임없이 말하려 합니다. AI에 지배당하거나 이용당하지 않고 잘 분별하여 활용할 수 있는 것도 기도의 힘입니다.
기도와 믿음은 함께 갑니다. 눈부신 기술발전과 더불어, 아니 한발 앞서 가야할 기도입니다. <사랑학>은 물론 <기도학>과 <신비학 >이란 과목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성인들은 거의가 기도가 대가들이었고, 이젠 모두가 기도의 대가들이 되어야 할 작금의 위기의 시대입니다. 지구와 인류의 생존을 위해 <탈성장>만이 답인 시대에 참으로 기도를 통한 영적혁명인 회개와 영성의 심화가 절박합니다.
기도와 삶입니다. 기도와 삶은 함께 갑니다. 기도없는 삶은 공허하고 삶이 없는 기도는 맹목입니다. 기도하는 대로 살고 사는대로 기도합니다. 삶의 꼴을 형성하는 기도입니다. 하느님과 생명과 사랑의 소통이자 일치의 친교중에 살게 하는 기도입니다. 나중에 주님이 우리를 심판하실 때도 기도한 얼굴로 당신을 닮았는지가 판단의 잣대가 될 것입니다.
사실 나중에 남는 얼굴은 기도한 얼굴인가 기도하지 않은 얼굴인가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날로 주님을 닮아 익어가는 <성화의 여정>에 기도보다 더 본질적인 것은 없습니다. 바로 오늘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불의의 재판관의 비유에서 우리는 기도의 모범이자 기도의 대가인 과부를 만납니다. 불의한 재판관이라지만 그에 대한 깊은 신뢰가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직접적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not to lose heart)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to pray always)는 뜻으로 제자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오늘 비유중 주목되는 말마디가 “올바른 판결”입니다.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재판관에게 줄기차게 <올바른 판결>을 졸라대는 과부의 끌질긴 자세를 배우자는 것입니다. “공부하다 죽어라!” 어느 고승의 말대신 저는 “기도하다 죽어라!” 말하고 싶습니다. 불의한 재판관이라지만 저변에는 깊은 신뢰가 자리하고 있음을 봅니다. 마침내 재판관의 항복을 받아내니 과부의 승리가 참 통쾌합니다.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저 과부가 나를 이토록 귀찮게 하니 그에게는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어야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끝까지 찾아와서 나를 괴롭힐 것이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것이 없듯이 기도에도 불가능한 것이 없습니다. 하느님이 아쉬워서가 아니라 내가 아쉬워서 하는 것입니다. 바로 과부가 그러했습니다. 정말 항구히 간절히 기도하다보면 원하는 것에서 필요한 것 하나만 남게 되고 그것은 그대로 하느님의 뜻과 일치된 것이 되고 올바른 판결이 되는 것입니다.
정말 꼭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진짜 부자는 가진 것이 많아서가 아니라 필요한 것이 적을수록 진짜 부자입니다. 마침내 <필요한 것 하나!> 하느님임을 깨달아 모실 때 진정 최고의 부자에 자유롭고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답변이 참 통쾌합니다. 우리의 믿음 부족을 질타하는, 단숨에 읽혀지는 주님 친히 말씀하신 대목입니다.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새겨들어라.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지체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과연 주님의 응답이 없다 실망하거나 낙심하기전 이렇게 간절히 절박하게 항구히 밤낮으로 부르짖으며 기도했는지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철석같은 신뢰의 믿음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정말 부족한 믿음을 도와달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하느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바로 홍해를 건너 믿는 이들을 구원해 주신 파스카의 주님이십니다. 지혜서가 바로 우리가 믿어야 할 주님의 정체를, 기도의 기적을 잘 보여줍니다.
“진영 위는 구름이 덮어 주고, 물이 있던 곳에서는 마른땅이 나타나는 것이 보였으며, 홍해는 장애물이 없는 길로, 거친 파도는 풀 많은 벌판으로 바뀌었습니다. 당신 손길의 보호를 받는 아들은 그 놀라운 기적을 보고, 온민족이 그곳을 건너갔습니다. 그들은 풀을 뜯는 말들 같았습니다. 또 어린양들처럼 이리저리 뛰면서, 주님, 자기들을 구해 내신 당신을 찬양하였습니다.”
정말 실감나는 기도의 기적이자 하느님의 위업입니다. 그대로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이런 하느님을 믿는 이들은 낙관적이요 긍정적일수 뿐이 없습니다. 이런 하느님께 대한 한결같은, 철석같은 믿음에서 솟아나는 항구하고 간절한 기도입니다. 잘 나갈 때 기도는 누구나 잘 합니다. 그러나 기도의 진위는 곤경중에 드러납니다. 곤경중에도 가열차게 올바른 응답을 간구懇求하며, 희구希求하며 기도하는 <믿음의 용사들>에게 불가능은 없습니다.
하느님을 탓할 것이 아니라 나의 하느님 신뢰 부족을 탓해야 할 것입니다. 바로 복음의 결론 같은 말씀이 시공을 초월하여 모든 세대에게 주는 화두같은 말씀이자 믿음을 위한 기도에 분투의 노력을 다하게 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의 부족한 믿음을 도와주시며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루카18,8ㄴ).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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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5. 연중 32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막바지 길에서 “기도”에 대한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기도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루카 18,1)는 뜻으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비유입니다.
그런데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말씀은 대체 어떤 기도를 말하는 걸까?
흔히 ‘기도의 황금률’이라 불리는 이 기도를 우리는 “끊임없는 기도”(항구한 기도, 지속적인 기도, 중단 없는 기도)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 기도는 교회전승 안에서, 주로 서방교회에서는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의 형태로, 동방교회에서는 ‘예수기도’(εύχη Ιησοû)의 형태로 전승되어 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말씀은 대체 무슨 뜻일까?
그것은 우선, ‘끊임없이 주 하느님을 향하라’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기도는 하느님을 ‘향하여’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곧 ‘마음이 동반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기도가 주님을 향하여 있지 않다면, 그것은 하나의 넋두리요, 하소연이요, 자기 한탄이요, 독백일 뿐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그 어떤 누군가가 아닌, 바로 우리 ‘주님을 향하여’ 있고, 우리 주님과 관계 안에 머무는 것을 말합니다. 곧 그것은 주님을 믿고 주님께 희망을 두고 주님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언자 사무엘은 “기도하지 않는 것은 죄”(1사무 12,23 참조)라고 말합니다. 만약 하느님과 관계 맺지 않고 하느님께 희망을 두지 않는다면, 곧 하느님이 아닌 다른 우상을 향하게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말한 대로, 인간은 ‘하느님을 향하여 방향 지워진 존재’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우리보다 앞서 우리의 주님 하느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는 그분이 계시기에, 기도하기를 포기하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희망하기를 포기하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마치 과부가 판결해주지 않는 재판관 앞에서도 실망하지 않고 간청하기를 포기하지 않았듯이 말입니다.
사실, 낙심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을 수 있음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에서 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우리의 믿음’을 찾으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루카 18,8)
그러니 이 “끊임없는 기도”는 “사람의 아들이 올 때”까지의 지속되어야 하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이를 <루카복음의 소묵시록>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기도하기를 결코 멈추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곧 하느님을 향하여 있기를 멈추지 말아야 하고,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 머물러 있기를 멈추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루카 18,1)
주님!
제 마음이 당신을 향하게 하소서.
이미 제 마음 안에 와 계신 당신을 저버리지 않게 하소서.
늘 저를 향하여 있는 당신을 외면하지 않게 하소서.
당신께 믿음을 두고 당신의 희망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당신의 희망이 저의 희망이 되게 하시고, 낙심하지 말게 하소서.
늘 제 안에 살아계신 당신을 찬미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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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5. 연중 32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제게는 아주 소중한 묵주 반지가 있습니다. 2018년에 어머니의 십자가 목걸이를 녹여서 만든 묵주 반지입니다. 그 반지는 단순한 묵주 반지가 아니라, 어머니의 신앙과 사랑이 녹아 있는 유품이자, 제 사제 인생을 함께 걸어온 동반자와 같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반지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뉴욕에 있을 때도 몇 번 잃어버린 적이 있었지만, 잘 찾았습니다. 이번에는 아무리 생각을 더듬어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사제관에도, 집무실에도, 성당 구석구석을 다 뒤졌지만, 흔적이 없었습니다. 마음속에서 ‘이제 정말 끝이구나’라는 체념이 들 무렵, 피정을 마치고 돌아온 날 책장 위에서 묵주 반지를 발견했습니다. 마치 ‘돌아온 탕자’처럼 다소곳이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제 마음은 감사와 감격으로 가득 찼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잃어버린 양’과 ‘잃어버린 동전’, 그리고 ‘돌아온 아들’의 비유가 새삼스럽게 다가왔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은 잃어버려도 다시 찾게 하시고, 멀어져도 다시 품어 주십니다. 우리가 잃었다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이, 사실은 하느님의 손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돌아보면 제 삶은 감사로 엮여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제게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일만 맡겨 주셨고, 감당하기 어려운 일에는 언제나 함께할 사람을 보내 주셨습니다. 건강이 완전하지 않아도 새벽마다 눈을 뜨게 하시고, 산책하며 기도할 수 있는 기쁨을 주셨습니다. 유행성 출혈열과 다리 골절의 고통을 겪었을 때도, 치유의 은총을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매일의 삶은 시편 23편의 고백처럼 흘러가고 있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네.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해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당신께서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김길수 교수의 글 「성삼문의 죽음과 김대건의 죽음」은 제 마음을 깊이 울렸습니다. 성삼문은 조선의 충신으로,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택했습니다. 형장에서 그가 남긴 절명시에는 인간의 허무가 서려 있습니다. “둥둥둥 북소리 울려, 내 목숨을 재촉한다. 머리 돌려 바라보니 해가 지려 하누나. 저승길에는 주막 하나 없다는데 오늘 밤은 내 어느 집에서 묵어갈까.” 그의 시는 아름답지만, 그 안에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이 없습니다. 인간의 의로움으로 죽음을 맞이했지만, 그 끝은 허무의 어둠이었습니다. 반면 김대건 신부님은 죽음 앞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환란과 고난도 주님의 허락 없이는 있지 않으니, 환란의 의미를 생각해서라도 주의 계명을 지켜라.” 그리고 덧붙이셨습니다. “나는 간다. 이제 환란도 고통도 없는 하느님의 기쁜 나라에서 다시 만나자.” 성삼문의 죽음은 인간의 신념으로 끝났지만, 김대건의 죽음은 하느님의 약속으로 이어졌습니다. 하나는 허무였고, 다른 하나는 새출발이었습니다. 믿음의 유무가 생명의 끝을 ‘종말’로 만들기도 하고, ‘시작’으로 바꾸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시겠느냐?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우리의 삶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착각 속에 살아갑니다. ‘내 남편, 내 자녀, 내 집, 내 사명’이라 부르며 모든 것을 소유하려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가진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잠시 맡겨진 것들을 관리하는 청지기일 뿐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가족을 잃을 때 슬프고, 물건을 잃을 때 화가 나지만, 그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잠시 빌려주신 선물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잃어버린 반지를 통해, 저는 그 사실을 다시 깨달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모든 것은 소유가 아니라 ‘기탁(寄託)’입니다. 내가 가진 것은 내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이기에 감사로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나누고,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살아간다면 세상의 마지막 날이 온다 해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네.” 오늘 하루, 잃어버린 것을 통해 되찾은 믿음이 우리 모두의 마음 안에서 다시 피어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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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5. 연중 32주간 토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신성한 장소들....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11월 14일 금요일- 마흔여섯 번째 주간 (호명환 번역): 성사적 현실
여러분을 거룩한 것, 곧 하느님께 더 가까이 이끄는 성스러운 장소가 있습니까?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매일 묵상은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에 뿌리를 두고 리처드 로어와 CAC 운영진, 그리고 객원 교수들의 묵상 글을 제공해 주어 우리의 영적 수양을 심화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동정(compassion)을 구현하도록 도와줍니다.
특별히 선택된 장소란 없습니다. 그저 머물러 있으면, 당신의 자리가 성소가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느님께 특별한 접근을 허락하기 때문이 아니라, 고요 속에서 어디서든 들을 수 있는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볼 수 있는 모든 것은, 올바른 눈으로 바라본다면, 우주의 어디서든 볼 수 있습니다.” —스콧 러셀 샌더스(Scott Russell Sanders), 머무름(Staying Put)
영성 작가 첼시 스타이너-스커더(Chelsea Steinauer-Scudder)는 자연 안에서 거의 모든 이가 체험하는 초월의 경험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제가 사람들에게 가장 즐겨 묻는 질문 중 하나는 '살아있는 세계 안에서 신성함을 체험한 적이 있습니까?'라는 것입니다. 이 질문을 받은 모든 이들은 거의 즉시 '예'라고 답했습니다. 비록 자신을 영적이라 부르지 않거나 '신성함'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말입니다. 그 대답은 언제나 특정한 장소나 경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저는 수없이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가 'axis mundi(세계의 중심축)' 체험이라 부르게 된 것들인데, 그것은 누군가가 자신이 서 있는 작은 땅 위에서 깊은 소속감을 느끼는 만남입니다. 그것은 매우 단순합니다. 지나가는 사슴이나 물에 몸을 씻는 새 한 마리가, 그들의 감각 세계에 창을 열어주고, 그 순간부터 관계는 ‘나와 그것’이 아니라 '나와 당신'으로 자유롭게 흐르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곁의 생명과 발밑의 땅에 주의를 기울일 때 성스러움을 만납니다.
저는 "신성함"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개인적 한계 너머로 이끌어 신비 안에 감싸며, 우리가 관계 맺고 있는 살아있는 존재들의 광대하고 얽혀 있으며 영원한 그물망을 잠시나마 보여주는 것입니다. 더 단순히 말하자면, 우리가 가장 온전히 인간다워지는 순간은 우리가 지극히 작은 세포와 전자에 이르기까지, 땅과 우주 안에 깊이 얽혀 있음을 깨닫는 순간입니다.
살아있는 세계는 이러한 깨달음을 경이와 놀라움의 형태로, 때로는 슬픔과 상실의 형태로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빛남은 언제든 우리의 의식 속에 자발적으로 떠오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성스러운 진리는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든 못하든, 언제나 지구 위 어디에나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신성한 실재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이며, 우리로 하여금 잠시라도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작은 우주의 한 부분에 마음을 정향하도록 초대합니다. 아마도 당신도 산 정상에 올랐을 때, 오래된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있을 때, 혹은 어린 시절 집에서 들었던 새소리를 다시 들을 때 이런 경험을 하셨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하느님과 신들에 대해 무엇을 믿든(혹은 믿지 않든), 성경과 순례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갖든, 우리 모두는 마음 깊은 곳에 신성한 "축"에 붙들릴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오늘날처럼 살아있는 세계와의 단절이 심하고, 숲이 파괴되고, 바다가 황폐해지며, 멸종된 종들의 메아리가 들려오는 시대에는, 이러한 성스러운 고정점들을 중심으로 삶을 정향하는 일이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합니다.
여기서 "신성한 축(sacred pole)" 성소의 중심, 십자가, 혹은 하느님께 마음을 고정하는 영적 지점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창조된 세계가 무너져가는 시대일수록, 우리가 하느님 현존을 중심으로 삶을 다시 정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제가 거룩하게 여기는 곳 안에서 고요를 느끼는 동, 새들의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아침의 고요, 제 마음과 영혼 깊은 곳의 고요가 저를 감싸고 있습니다. 정적(靜寂). 아마 다시 제 친구들의 합창을 듣기 위해 새 모이를 더 사야 할 때인가 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침묵은 제 마음을 통과하여 미소로 피어납니다.
—Tom S.
References
Chelsea Steinauer-Scudder, Mother, Creature, Kin: What We Learn from Nature’s Mothers in a Time of Unraveling (Broadleaf Books, 2025), 7, 9.
Graham Mansfield, untitled (detail), 2021,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빵과 포도주, 그리고 물이 성사 안에서 은총을 드러내듯, 자연 세계 또한 이미 주어진 풍요를 받아들이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심지어 고기가 잡히지 않는 고요한 하루조차 그 자체로 하나의 친교(Communion)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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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5. 연중 32주간 토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제자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루카 18,1)
길게 하는 기도가 아니라 끊임없이 하는 기도가 중요하다
주님께서는 복된 삶을 얻기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말을 많이 하면 더 잘 들어주시는 줄로 생각하고 많은 말로 기도하지 말라고 가르치셨지요(마태 6,7-8 참조). 주님께서는 “그분은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우리에게 필요한지 아신다면서 많은 말로 기도하지 말라고 하시고는 또 계속 기도하라고 이르시는 것은 좀 이상해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불의한 재판관에게 지치지 않고 계속 졸라 대어 결국 자신의 말을 듣게 만든 과부의 예를 드셨지요. 그 여자가 재판관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정의나 동정심에 호소해서가 아니라 지치지 않고 졸라댔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쉬지 않고 기도하면 자비롭고 의로우신 하느님께서 반드시 들어주신다는 것을 배웁니다. 불의하고 사악한 재판관조차 끊임없이 청원하는 과부를 모른척할 수 없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셋째 오솔길】
돌파하여 자기 하느님을 낳기
설교 24 우리는 또 다른 그리스도들이다
당신을 밴 태와 당신께 젖을 먹인 가슴은 복됩니다!(루카 11,27).
예수를 모범으로 여긴다는 말은 우리가 그리스도론적인 자기 도취의 유혹 내지 감정적으로만 그리스도를 떠올리려는 유혹을 떨쳐 버리고, “그리스도가 한 사역을 떠맡고” , “예수처럼 똑같이 사는 것"을 의미한다. 엑카르트는 예수를 감상적으로 그리려고 하는 모든 시도를 완강히 거부한다.
그가 말하는 그리스도블 본받음은 그리스도의 행위를 본받는 것이다. “우리도 똑같은 그리스도가 되어, 그리스도의 행위를 그대로 본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성과 그리스도의 인성은 영원한 존재의 한 실체 안에 있기” 때문이다. 엑카르트는 어떤 이름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들은 “송골매가 순대나 소시지를 이고 가는 아낙네를 뒤따르듯이, 늑대들이 짐승의 사체를 찾아다니듯이, 파리가 요강을 찾아다니듯이" 그리스도를 따른다. “하지만 그리스도가 나를 따라오너라...‘ 하고 말한 것은 이와 정반대다. ‘따라오너라’ 는 말은 행동으로 옮기라는 명령이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신성이 우리를 통하여 맑고 투명하게 드러나도록 그리스도의 행위를 따른다는 뜻이다.(504)
✝️ 토요일 이웃 종교(생태)의 날✝️
이름 없는 하느님, 김경재
종교다원론과 해석학적 이론들
종교 다원론에는 다양한 입장이 있다
‘종교적 다원주의' 라는 말이 신문 문화면에서 빈번히 사용되지만, ‘종교적 다원주의' 라는 말 자체는 ‘실존주의'나 또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어휘처럼 종교들의 ‘다원적’ 현상과 종교의 ‘다원성'을 담론의 핵심 주제로 삼는 인문학적 또는 사회과학적 담론 일반을 지칭하는 말일 뿐이다.
실존주의나 포스트모더니즘 안에도 다양한 입장과 학과가 있듯이 종교 다원주의 안에도 여러 입장이 병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 다원주의를 무조건 비판하는 보수적 논자들은 자기 자신이 지닌 종교 다원주의에 대한 ‘정의'를 당연한 듯이 전제하고서 논리를 전개시키는 잘못을 범한다
기독교권 학자들 사이에서 종교 다원 현상 및 종교 다원성에 대한 입장은 ‘배타주의' , ‘포용주의', ‘다원주의’ 라고 크게 세 가지로 대별되어 타 종교에 대한 기독교계의 대응 방식을 설명하는 방식 이 널리 통용되고 있는데 , 그렇게 분류한 사람은 앨런 레이스였다.
위 세 가지 유형론은 다양한 입장을 간추려 정리한 것으로 본질적 입장 차이가 무엇인지 알게 하는 장점을 가지지만, 단순화에 따르는 오류를 피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세 입장의 사이에 위치하여 세 가지 입장이 주장하려는 핵심 의도를 동시에 확보하려는 중첩적 입장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섬세한 차이를 일단 접어두고, 위 세 가지의 근본 주장이 무엇인지 아는 것은 중요하다.(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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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5. 연중 32주간 토요일. 갑곳성지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가장 큰 적 하나가 바로 낙심입니다.
우리는 신앙 안에서 열심히 살려고 하지만,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듯하고, 선하게 살려 하지만 세상의 불의와 냉혹함이 계속되면 마음속에 ‘소용없다’, ‘나는 혼자다’라는 생각이 스며듭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이 우리에게 던지는 유혹, 곧 낙심입니다. 낙심은 믿음을 잠식시키고, 결국 기도를 멈추게 하며, 희망을 잃게 만듭니다.
이런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낙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무정한 재판관과 같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자녀인 우리를 사랑하시어, 우리의 기도를 절대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때로는 우리가 원하는 방식이나 시간에 응답하지 않으실 수 있지만, 그 기다림 속에서 우리 믿음이 단련되고, 하느님의 뜻이 더 분명히 드러납니다.
우리가 낙심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기도를 멈추지 않아야 합니다. 기도는 우리의 영혼을 붙잡아주고, 하느님과 이어 주는 끈입니다. 또한 작은 희망을 서로 나누는 것도 중요합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건네는 따뜻한 말과 격려가 낙심한 형제에게는 큰 빛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과연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도전이자 초대입니다. 낙심의 유혹 앞에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사람, 바로 그가 참된 제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하루,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기도를 멈추지 말고, 희망을 굳게 붙들며, 낙심을 믿음으로 이겨내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또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일 층으로 내려왔습니다.
때마침 노부부가 성전 안으로 들어가고 계셨습니다.
앞에 할머니가 먼저 들어가셨고, 그 뒤를 할아버지가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때 할머니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잠시 후에 여기서 미사를 봉헌할 텐데….
이 말을 들은 할아버지가 앞의 할머니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또 해?
미사 또 해?
할머니는 노기를 띠며 돌아서서 답하셨습니다.
그건 어제고?
오늘 미사는 해야지!
당신도 어제 밥 먹고 오늘도 밥 먹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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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1차 게시 이후 묵상글(강론글)입니다
< 07시 이후 08시 사이 또는 더 늦게 추가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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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5. 연중 32주간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우리 몸은 100조 개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모든 세포는 우리가 먹는 음식에 영향을 받고 뇌의 명령에 따라 움직입니다. 따라서 나의 생각이 중요합니다. 생각하는 대로 실제로 되기 때문입니다.
“환장하겠네.”라는 말이 있습니다. 너무 놀라서 장이 뒤집어진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생각과 감정이 몸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해 주는 말입니다. 따라서 ‘에라 모르겠다’라고 생각하면, 세포들도 ‘에라 모르겠다’라는 명령을 받아서 아무렇게 살게 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생각과 감정을 가져야 할까요? 어떤 생각과 감정이 나에게 유익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부정적인 생각으로는 내게 유익함을 줄 수 없습니다. 포기, 절망의 감정은 실제로 나를 포기하게 하고 절망 속에 살게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철저히 긍정적인 감정으로 나를 이끕니다. 더군다나 하느님 나라라는 희망을 품게 해서 내 몸을 그렇게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주님의 말씀에 집중하는 믿음을 갖춰야 합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나’를 위해서 말입니다.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 말씀을 해 주십니다. 종말의 때가 오기까지 시련과 기다림의 시간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 말씀은 이 기다림의 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는 것을 첫 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즉,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루카 18,1)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가 등장합니다. 이 불의한 재판관은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루카 18,2) 인물이었습니다. 정의와 자비가 전혀 없는 최악의 재판관인 것입니다. 또 과부는 당시 사회에서 남편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가장 힘없고 가난하며 소외된 계층을 상징합니다. 그녀가 기댈 곳은 오직 재판관의 ‘올바른 판결’ 뿐입니다. 그래서 ‘줄곧... 졸랐다’(루카 18,3)라고 복음은 이야기합니다.
과부의 정의로운 청원 때문이 아니라, 오직 자신이 ‘귀찮고 괴로워서’ 판결을 내려줍니다. 하물며 하느님께서는 어떠하시겠냐는 것입니다. 포기하지도, 절망하지도 말고 하느님께 끈질기게 부르짖는 그 간절한 기도를 외면하시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루카 18,8)
이제 이 비유의 핵심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과부처럼 끊임없이 기도하며 그 믿음을 지키고 있을 것인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긍정적인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사는 방법은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에서 나옵니다. 그 믿음을 계속 청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오직 앞만 보고 뛸 것. 뒤를 돌아보는 건 나약함의 증거다(영화 ‘리틀 러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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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5. 연중 32주간 토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불확실성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 사랑의 현존입니다!
기도(祈禱)라는 한자 단어는 빌 기(祈), 즉 두 손을 모아 하느님께 비는 모습을 표현하는 글자와 빌 도(禱), 제사를 통해 기원하고 축원하는 의미를 지닌 글자가 합쳐진 말인데, 이 말은 단순히 하느님께 무언가를 빌어 얻기 위한 행위라기보다는 "하느님께 마음을 열고 사랑의 관계 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행위"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요즘 우리는 전례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시기를 보내면서 예수님으로부터 하느님께 마음을 열고 그 마음 깊은 곳으로 들어가라는 초대를 받고 있습니다. 마치 부모가 매일 자녀들에게서 사랑을 담은 말을 듣기를 기다리는 것과도 같이, 하느님께서도 우리에게서 같은 마음의 소리를 듣고 싶어 하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를 통해 우리의 어머니요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도 우리에게서 그러한 사랑의 표현을 기다리고 계시다는 사실을 예수님께서는 강조하여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우리의 기도는 그분을 향한 믿음의 목소리이며, 그분께 대한 신뢰의 표현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도가 언제나 우리의 사랑을 드러내는 표지가 된다면 참으로 좋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는 거래식의 주고받음이 아니라 믿음과 신뢰와 사랑의 표현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기 때문에 기도에 대해 잘못된 인식을 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비유을 통해 강조해 주시고자 하는 핵심은 온 마음으로 우리의 사랑을 바라시는 하느님의 마음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사실 하느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과 이 세상에 어떻게 사랑의 세상, 즉 하느님 나라가 될 수 있는지를 잘 알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러니 기도는 2 더하기 2를 5가 되게 해달라고 비는 것도 아니고, 이 세상을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청하는 것도 아닙니다. 기도는 하느님 사랑이 우리를 통해 온전히 실현되도록 하느님의 그 깊은 사랑의 마음 안으로 들어서는 일입니다.
기도는 그 근원이 되는 자리를 보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기도는 바로 마음(심장, 영혼의 중심)에서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루카 복음은 예수님의 기도에 특별히 깊은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받기 전에 기도하셨고(루카 3,21-22), 열두 사도를 선택하시기 전에도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루카 6,12). 또한 예수님께서는 기도에 관한 두 가지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루카 18,1-8)와, 끈질기게 친구에게 청하는 사람의 비유(루카 11,5-13)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자 하시는 기도의 자세에는 감상적인 요소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반대편으로 치우쳐 차갑고 무자비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런 감상주의를 벗어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마음에 들어선다는 것은 감상적인 일이 아니라 그 사랑의 진정한 현실을 의식하는 일이고, 그 사랑을 확신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 주시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무자비한 재판관과 비교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조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 불의한 재판관과 비슷하다고 말씀하신 것이 절대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에서 자주 쓰이는 "얼마나 더"라는 표현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니다. 그 좋은 예가 앞서 언급된 다른 구절에 나옵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루카 11,13).
예수님께서는 이게 바로 하느님 사랑의 마음이라는 점을 강조해 주시는 겁니다. 우리는 내일을 모릅니다. 바로 앞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불확실성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 사랑의 현존입니다. 이 하느님의 사랑이, 이 완전한 사랑의 하느님이 '나'를 온전히 감싸고 계시다는 사실 하나만은 절대 부정할 수 없는 진리라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성경 말씀들을 다른 어느 때보다 더 깊이 새겨 보면 좋겠습니다.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9).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필리 4,13).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께서 참하느님이시며,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는, 천대에 이르기까지 계약과 자애를 지키시는 진실하신 하느님이심을 알아야 한다."(신명 7,9).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4,16).
사탄이 가장 바라는 것은 이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는 일일 것입니다. 우리 양심 안에서 우리를 죄책감에 휩싸이게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다시, 또다시 이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물고자 하는 의지를 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아무리 부족하고 죄 투성이일지라도 이 사랑의 확신을 우리 마음에 깊이 심어 주시고자 하신다는 사실을 전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 근심걱정으로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붙들어야 할 확신은 바로 이런 하느님의 변함없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언제나 변함없으며 우리 생명을 영원으로 이끌어 주는 힘 그 자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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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5. 연중 32주간 토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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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8&id=2116401&menu=4770
위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리스트에서 “서하”를 찿아 들어가세요.
게재가 안되는 경우가 있습니다.(위에 X X X X X 로 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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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5. 연중 32주간 토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끊임없는 기도는 결국 이루어진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낙심하기 쉽습니다.
청하지 말아야할 것을 청해서
들어주지 않으시는 것일까
고민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내가 청하는 것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부정적으로 보기도 합니다.
이러한 생각들은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들고
그래서 기도를 이어가기가 점점 힘들어지기도 합니다.
기도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희망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오늘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아무리 불의한 재판관이라도
끊임없는 간청에는 반응을 보인다는 것으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람들이 청하는 것을
반드시 들어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재판관이 불의한 사람이라는 것으로
하느님께서는 정의로우신 분임을 강조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정의로우시다는 것은
계약을 어기지 않으신다는 것을 포함합니다.
그 계약의 내용 가운데 하나는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백성으로 머무를 때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하느님으로 머무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께 선택된 이들이라는 표현으로
끊임없이 간청하는 사람들을 말씀하십니다.
즉 기도는
우리가 하느님의 백성, 하느님의 자녀로 머물게 하며
그것으로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하느님,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그렇게 되면 기도는 받을 자격의 문제가 아니라
아버지가 자녀들을 보살피는 것으로 중심이 바뀝니다.
아버지가 자녀들을 보살피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우리를 보십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우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물론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기도를 이어갈 힘도 빠지고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도 늘어납니다.
하지만 우리의 노력이 헛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버지와 자녀 관계에서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오늘 하루이기를
기도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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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5. 연중 32주간 토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https://bbs.catholic.or.kr/bbs/bbs_list.asp?menu=4770
위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리스트에서 “박영희”님을 찿아 들어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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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5. 연중 32주간 토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박윤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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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 X X X X
https://bbs.catholic.or.kr/bbs/bbs_list.asp?menu=4770
위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리스트에서 “박윤식”님을 찿아 들어 가세요.
게재가 안되는 경우가 있습니다.(위에 X X X X X 로 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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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5. 연중 32주간 토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김종업로마노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제1독서 (지혜18,14-16 ;19,6-7)
"당신의 전능한 말씀이 하늘의 왕좌에서 사나운 전사처럼 멸망의 한가운데로 뛰어내렸습니다. (지혜18,15) ~~
당신의 명령에 따라 온 피조물의 본성이 저마다 새롭게 형성되어, 당신의 자녀들이 해를 입지 않고 보호를 받았던 것입니다." (지혜19,6)
지혜서의 제3부인 지혜서 10-19장은 이스라엘 초기 역사에서의 지혜의 역할을 다룬다.
지혜서 10장 1-21절에서 아담으로부터 모세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의 초기 역사에서 지혜가 한 역할을 추적하는 것은 지혜서 6-9장에서 지혜를 묘사한 부분을 마치고, 이 책의 나머지 부분에서 이집트 탈출 때 있었던 사건들에 초점을 맞추는 전이의 기회를 제공한다.
가장 기본이 되는 주제는 하느님 백성의 초기 역사에서도 지혜가 활동하였고, 하느님께서 역사의 흐름을 이끌어 가신 수단이 바로 지혜였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구절들에서 구체적인 이름을 대지 않으면서 성서에 나오는 여러 사람의 영웅들(과 몇몇 악인들)을 지적한다.
이 수사학적 기교는 그들의 정체를 식별해 낼 수 있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라는 것을 전제한다.
지혜서 11장 1-14절의 첫 번째 대조를 시작으로 이집트 탈출과 연관된 일곱 가지 대조가 시작된다.
일곱 가지 대조를 모두 뒷받침하는 기본 원칙은 지혜서 11장 5절에서 처음 밝혀진다.
그 원칙은 "그들의 원수들에게는 징벌의 도구가 되었던 바로 그것이 곤경에 빠진 그들에게는 득이 되었다." 는 것이다.
첫 번째 대조가 끝나면서 신학적 성찰(지혜11,15-12,27)과 우상 숭배에 관한 기록(지혜13-15장)으로 대조가 중단된다.
그리고는 지혜서 11장 1-14절에서 시작된 일련의 대조로 돌아가서, 두 번째 대조(지혜16,1-4)는 하느님께서 이집트인들과 이스라엘인들을 대하신 상이한 방식을 다룬다.
세 번째 대조(지혜16,5-14)는 메뚜기(탈출10,1-20참조)와 등에(탈출8,20-32) 재앙에서 이집트인들에게 있었던 일을 광야에서 구리뱀 이야기로 이스라엘에게 일어난 일과 비교한다(민수21,5-9참조).
네 번째 대조(지혜16,15-29)는 하늘에서 이집트인들에게 내려온 것(우박과 번개)과 이스라엘인들에게 내려온 것(만나)를 다룬다.
다섯 번재 대조(지혜17,1-18,4)는 이집트 땅을 덮친 암흑과 이스라엘이 이집트 탈출 때 체험한 빛을 다룬다.
여섯 번째 대조(지혜18,5-25)는 이집트인들과 이스라엘인들의 죽음을 다룬다.
일곱 번째 대조(지혜19,1-22)는 홍해 바다에서 있었던 사건들을 해석한다(탈출14장참조).
오늘 독서 말씀은 지혜서 18장 14-16절과 19장 6-9절로서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대조에 속하는 말씀이다.
하느님과 하느님의 백성의 적들을 파멸시킨 대행자는 "당신의 전능한 말씀"이었다(지혜18,15).
그 말씀은 역사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인 지혜, 고대 근동 문학과 히브리 성서에서 친숙한 모습인 전사이신 하느님, 그리고 "땅 위에 서서 하늘까지 닿는"(지혜18,16) 거대한 천사가 합쳐진 것이다.
하느님과 이스라엘에게 잘못이 없다는 것과 이집트인들이 재앙을 겪게 된 것은 바로 자신들의 잘못 때문이라는 사실이 줄곧 제시된다.
그래서 이집트인들은 이스라엘인들의 아기들을 죽였고(지혜18,5), 요술에 마음을 빼앗겼으며(지혜18,13), "무서운 꿈"으로 미리 알려 주었고(지혜18,17), 자기들이 그토록 고통을 받는 이유를 알았다(지혜18,19).
어린이들과 물이 이스라엘에게는 구원이었으나 이집트에게는 파괴였다.
한편 일곱 번째 대조(지혜19,1-22)에 나오는 홍해 사건에서 하느님의 뜻하신 목적은 "당신의 백성은 경이로운 여행길을 체험하는 동안 저들(이집트인들)은 이상한 죽음을 맞게 하려는 것"(지혜19,5)이었다.
지혜서 19장 1-4절에서 지혜서의 저자는 하느님께서 미리 알고 계셨다는 사실과 도망가는 이스라엘인들을 뒤쫓아가기로 결정하였기 때문에 이집트인들에게 잘못이 있다는 사실을 균형있게 점검한다.
이집트인들이 이스라엘인들을 뒤쫓아 간 것은 "저들의 고통에 아직 남아 있는 징벌을 마저 채우게"(지혜19,4) 하려는 것이었다.
지혜서 19장 6-12절에서 저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헤매는 것을 놀랍게도 긍정적으로 묘사한다(민수11장 참조).
이스라엘의 길을 평탄하게 하기 위하여 하느님께서는 창조의 다양한 요소들을사용하시어 사람들이 "온 피조물의 본성이 저마다 새롭게 형성되어" (지혜19,6)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기뻐하며 자기들을 구원해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고,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동물, 물고기 그리고 메추라기를 양식으로 주셨지만, 이집트인들은 모기와 개구리들로 징벌하셨음을 상기하였다.
그리고 지혜서 19장 13-17절에서 지혜서의 저자는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이집트인들을 징벌하시는 하느님의 정의를 주장한다(지혜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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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2주간 토요일 복음]
그리스도교는 찾아오신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다.
(루카18,1-8)
1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제자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2 “어떤 고을에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한 재판관이 있었다. 3 또 그 고을에는 과부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는 줄곧 그 재판관에게 *가서, ‘저와 저의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하고 졸랐다. 4 재판관은 한동안 들어주려고 하지 않다가 마침내 속으로 말하였다.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5 저 과부가 나를 이토록 귀찮게 하니 그에게는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어야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끝까지 찾아와서 나를 괴롭힐 것이다.’” 6 주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새겨들어라.
= 불의한 재판관의 말을 새겨보자.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그 불의한 자 이기에 오랫동안 찾아가서 호소하는 그 과부의 청을 들어주지 않고 미적 거렸던 것이다.
그 불의한 재판관이 자신을 귀찬게 하는 것이 싫어서 그 자신을 위한 판결이 올바른 것일까? 아니다 그가 올바른 판결을 해 주겠다고 한 것은 하느님의 듯을 무시한 자신의 생각, 자신을 위한 올바른 판결, 즉 불의한 판결을 내려준 것이다.
(오늘 복음을 하느님의 지혜, 뜻이 아닌 사람의 지혜로 읽었다면 불의한 재판관의 판결이라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그 자신의 생각을 다른 이에게 말한다면 불의한 깨달음, 판결을 주는 것이다.)
7그러나,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8ㄱ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 올바름을 주시기 위해 찾아오신 그 하느님께서 왜 미적 거리시겠는가? 그 하느님의 뜻을 받는 것, 올바른 판결이다. 즉, 하느님의 말씀을 하느님의 지혜로 생각, 뜻으로 읽고 깨달아 믿으면, 올바른 판결을 지체 없이 받는 것이다.
(루가4,21) 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 그러나 내 뜻, 사람의 뜻을 위한 말씀으로 들으면 지체 없이 내려주시는 올바른 판결(깨달음)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요한16,23-24) 23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이름(뜻)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24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뜻)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 말씀은 전능 하시다. 없음에서 만물을 창조하셨고 또 그 만물을 지금도 말씀으로 지탱하고 계신다.(히브1,3) 그러면 그리스도인이 받아야 할 와와 적대자와의 올바른 판결은 무엇인가?
한 분, 중재자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받는 적대자와 나의 화해, 화합이다. 그래야 나와 너, 함께 하느님께 갈 수 있다.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다.
(에페2,14-18) 14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대속)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15 또 그 모든 계명과 조문과 함께 율법을 폐지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당신 안에서 두 인간을 하나의 새 인간으로 창조하시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16 십자가를 통하여 양쪽을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어, 그 적개심을 당신 안에서 없애셨습니다. 17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시어, 멀리 있던 여러분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시고 가까이 있던 이들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 18 그래서 그분을 통하여 우리 양쪽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나와 너, 우리의 구원의 진리로 믿어 받는 올바른 판결이다.
8ㄴ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 뜻을 믿어, 구원의 믿음과 상관없는 곧 하느님의 뜻과 상관없는 신앙을 살아가고 있다는 말씀이다. 만은 사람들이 가는 길이 올바르다 생각하고 안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넓은 길은 그리스도 신앙의 길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태7,13-14) 13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14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
= 오늘 과부가 하느님의 뜻이 아닌 사람의 뜻으로 불의한 재판관을 찾아갔던 것이다. 우리를 찾아오신 보이지 않는 그 하느님을 믿을 수가 없어, 보이는 사람을 찾아가 스스로 의존하려 했던 큰 잘못인 것이다.
전능하신 분, 그 하느님을 믿지 못한, 그래서 우리의 남편이라 하신(예레31,32) 그 하느님을 잃어버린 과부인 것이고, 하느님의 뜻을 적대한 자신이 하느님의 적대자 였던 것이다.
그 적대자 과부가 세상을, 사람을 더 의존하는 우리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오늘 ‘기도하라’ 당부하시는 것이다. 아버지의 뜻을 올바로 깨달으라고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하라 하십니다. 그러면, 지체 없이 적대자인 나를 용서하는 그 올바른 판결, 깨달음을 내려 주신다는 구원의 약속을 주시는 것이다.
(로마5,10) 10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을 때에 그분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분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 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천주의 성령님, 우리와 적대자 모두를 의탁합니다. 이끌어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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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5. 연중 32주간 토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최원석님 공유
김건태 신부님_“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
여기서 기도의 유형은 청원기도를 말하는 게 분명해 보입니다. 기도에 대한 교육의 기회나 피정 등등의 시간에 강사님들이 종종 청원 기도보다는 감사 기도와 찬양 기도에 좀 더 집중하라고 일러주시는 경우가 많으나, 기도의 백미는 그래도 청원 기도입니다. 하느님께 무언가를 청한다는 것은, 청할 만큼 나는 부족한 존재이며, 하느님은 내 청을 들어주실 수 있는 능력을 지니신 분이라는 신앙고백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용은 청원이어도, 동시에 감사와 찬양의 마음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성경의 시편에 150개의 시가 실려 있는데, 그 가운데 60여 개가 청원 기도이고, 40여 개가 감사와 찬양 기도라는 사실이 이를 잘 대변해줍니다.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
기도는 항구함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한두 번의 청을 올리고 나서, 과연 들어주실 것인지 아닌지를 지켜본다는 것은, 자칫 하느님을 시험해보는, 하느님을 시험대에 올려놓는 큰 잘못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꼭 들어주신다는 믿음으로 항구하게 청하라는 말씀입니다.
청했던 대로, 바랬던 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경우,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갈립니다. 열심한 신자들은 ‘아직도 정성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하며 자기 자신을 탓하는가 하면, 많은 경우는 쉽게 포기해버리거나 불신을 표명하기도 합니다. 나아가 신앙생활까지 포기해버리니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정성이 부족해서이니, 내 뜻대로 이루어질 때까지 죽어라 기도한다! 이 역시 또 다른 큰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의식의 전환이 정말 필요합니다. 하느님을 내 뜻 안에 가두어놓는, 하느님이 하느님이 아니라 사람인 ‘나’가 되기를 바라는 모순이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우리 인간이 하지만, 들어주시는 분은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모든 것을 다 아시고 모든 것을 다 이루실 수 있는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시며 기도하신 예수님의 위대한 모범을 늘 마음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따라서 우리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뜻이 내 뜻에 맞추어질 때까지가 아니라, 내 뜻이 하느님의 뜻에 맞추어질 때까지 끝까지 인내하며 힘써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신앙인의 기도 자세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하는 주님의 걱정스러운 마음을 풀어드릴 수 있는 자세입니다.
오늘 하루도 신앙생활의 기초이며 핵심인 기도에 최선을 다하는 가운데, 먼저 내 기도가 하느님의 뜻에 맞는 기도인지 살피고, 나아가 내 뜻대로는 아니어도 하느님은 분명 내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확고한 믿음을 다져나가는, 소중한 신념의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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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1.”은 박 베드로 형제님이 보내주신 자료입니다.
## 공유하신 분께서 강론글이나 묵상글 수합과정에서 과년도의 자료를
사용하신 것도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 1. ================================================
♣복음말씀의 향기♣ No4409
11월15일 [연증 제32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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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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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박진형 비오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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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청원 기도보다는 감사와 찬미의 기도를!>
요즘 자주 드는 생각입니다. 지난 세월 주님께서 제게 너무 많은 것들을 흘러넘치도록 베풀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제가 또다시 주님께 이것 해주십시오, 저것 해주십시오, 라고 청하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한 일이라는 생각입니다.
이제는 당신께서 부르시는 그날까지 그저 감지덕지, 감사하고 찬미하며 기쁘게 살아가는 것, 그분께서 베푸신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주님과 교회, 수도회와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그 어떤 봉사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나 자신을 위한 기도보다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들을 위한 기도, 주님께 감사와 찬미와 영광을 드리는 기도가 더 많아져야겠다는 생각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집요하게 졸라대는 과부의 비유를 통해 우리의 기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제자들과 우리에게 가르치고 계십니다. 가르침의 요지는 간단합니다.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하라!”
낙심(落心)이라는 단어가 참 재미있습니다. 떨어질 락에 마음 심자입니다. 마음이 바닥으로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뭔가 추구하던 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다보니 맥이 풀리고 마음이 상함을 의미합니다.
그런 경우 많이 체험하실 것입니다. 한 가지 특정한 목표를 정해놓고, 9일 기도를 넘어 54일 기도를 바친다든지, 한 달 내내 새벽 미사를 다닌다든지, 정말 열심히 기도했지만, 목적했던 바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오히려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을 때, 우리는 그야말로 낙심(落心)합니다.
지향이 적당한 것이면 청이 수락되지 않아도 그려러니 할텐데, 심각한 문제라면, 누군가의 일생이 달려있고, 생사가 좌지우지되는 문제라면, 낙심 정도가 아니라 마음이 산산조각 부서지고 깨어지는 느낌일 것입니다.
요즘 주변을 둘러 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낙심하며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낙심을 넘어 좌절하고 절망하고, 포기하고 울부짖습니다. 더이상 한 발자국도 나아갈 힘도 없어, 엎어져 있습니다.
이런 우리를 향해 예수님께서는 조금 더 힘을 내어보라 초대하십니다. 지금 하루 두 시간 기도하고 있는 우리에게, 그것으로 부족하다, 밤낮으로 부르짖어보라고 요구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루카 18,7)
따지고 보니 지금 우리가 바치는 기도에 조금 더 추가될 사항이 있습니다. 더 간절함입니다. 더 절박함입니다.
그냥 간절한 기도가 아니라 목숨을 건 간절한 기도입니다. 육체는 물론 지니고 있는 모든 에너지를 총동원한 기도, 정신과 영혼, 일생 전체를 건 간절한 기도입니다.
그렇게 간절히 기도할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선물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런 기도를 바치는 과정에서 주님께서 내 가까이 현존하신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내 기도의 지향이 정말 올바르고 순수한 것인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청원의 수락 여부보다는 나와 하느님 사이에 주고받는 친밀한 대화, 부모와 자녀 사이에 이루어지는 진솔한 대화, 그것이 얼마나 좋은 기도인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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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죄송하지만 청하는 것을 멈출 수 없을 때 믿음의 기도가 된다>
어제 젊은 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떠나신 최 루카 형제님이 스테파니아 반장님께 카톡으로 보낸 글들을 소개시켜 드렸습니다. 오늘은 그분이 병자성사를 받으시며 느낀 ‘기도에 대한 체험’을 함께 나누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병자성사 시작 직전에 문득 제가 저지른 잘못이 제 머리를 스쳤습니다. 저는 영과 혼과 육을 포함하여 제게 있는 모든 것을 주님께 봉헌하였고, 늘 그렇게 되새기며 지냈습니다.
불면의 밤이 계속되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지쳐갔을 때, 또는 참을 수 없을 만큼의 통증이 왔을 때 ‘주님, 저는 모든 것을 주님께 드렸고, 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물론 이 몸뚱이도 당연히 제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일 뿐이요, 저는 살아가는 동안 그저 주님의 것을 선량하게 관리할 뿐입니다.
그러니 제가 잠을 못자거나, 참기 어려운 통증이 오면 그것은 주님께 큰 손해(?)입니다. 그러니 주님 뜻에 다 맡기니 알아서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라며 투정(일종의 항의??) 섞인 기도를 하곤 했습니다.
(‘이런 기도를 해도 될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초심자이니 감안해 주실 것이고, 저의 깊은 속마음까지 꿰뚫는 분이시니, 무슨 기도를 못하겠냐는 마음으로 고했습니다)
그러면, 주님은 저를 재워주셨고, 통증을 없애주셨습니다. 물론 저의 기도에 대한 응답은 언제나 저의 잘못에 대한 가슴 깊은 회개가 있었을 때에만
그러한 응답이 있었습니다.
오늘 병자성사 전, 갑자기 제가 주님께 봉헌한 저의 육신을 그리고 영과 혼을, 그동안 너무나 소홀히 다루었다는 생각에 눈물이 흘렀습니다.
조금 피곤하다는 핑계로 운동을 소홀히 하였고, 특히 기도와 성경읽기를 최근 들어 너무나 소홀히 하고 있는 제 모습을 깨닫고는 참회의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또 다시 제 기도에 바로 응답을 주신 것 같습니다. 제 왼쪽 복부에 기분 나쁜 통증(?) 같은 것이 있었는데, 성사 중에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감사하고 또 감사한 일이지요.”
루카 형제님은 세례 받으신 지 얼마 안 된 분이지만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참으로 잘 아시는 분이셨습니다.
주님께 기도로 무언가를 청할 때 그분이 당연히 그런 은총을 주셔야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분께서 이미 많은 은총을 주셨음에도 감사하지 못한 자신을 먼저 회개합니다.
이미 너무 많이 받았기에 더 청하기 민망하고 죄송하지만 청하지 않을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청하니 주님은 이런 경우엔 들어주지 않으실 수 없으십니다.
제가 강론을 공유하게 된 것도 유학 때에 저에게 강론을 원했던 몇 분들 때문이었습니다. 해외에서는 특강 같은 것이나 다른 신부님의 말씀을 들을 기회가 적기 때문에 몇 번 저를 만나신 분들이 귀찮더라도 메일로 강론을 보내주기를 청하셨습니다.
만약 그분들이 “당신은 사제이니까 당연히 목마른 양들에게 양식을 보내주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라고 말했다면 묵상을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제가 공부하러 나온 입장에서 매일 묵상을 써서 보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청하면서도 매우 미안해 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청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저도 사제로서 당연히 강론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힘든 일이긴 했지만 기꺼이 매일 강론을 올려드렸습니다.
공부를 하면서 강론을 매일 쓰는 것은 마치 피를 말리는 것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피의 값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기꺼이 흘리고 싶었습니다. 하느님께서도 우리에게 그런 마음이실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청하는 것은 성령의 은총입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피입니다. 우리는 그 피를 청할 때 죄송한 마음이지만 그것이 없으면 안 되는 것을 알기에 어쩔 수 없이 청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청할 때 은총을 충만히 받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한 과부가 재판관을 귀찮게 하는 비유말씀을 해주십니다. 그 과부처럼 지치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당신께서 세상에 오실 때 그 과부와 같은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며 가슴 아파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당연히 주셔야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없는 성령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기도는 그 성령을 달라고 청하는 것이고, 하느님은 그 성령을 주실 때 죽을 듯한 고통을 당하십니다.
그래도 그 가치를 알고 청하는 사람이라면 언제든 내어주실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기도로 받는 은총은 하느님의 피입니다. 이미 받은 것에도 너무 감사하지만 그 은총이 조금이라도 끊기면 살 수가 없기에 청할 수밖에 없을 때 성령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 은총의 필요함이 절실할 때 청하는 것을 멈출 수 없습니다. 그런 죄송하면서도 멈출 수 없는 기도가 은총을 얻게 하고 우리의 믿음을 증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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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제게는 아주 소중한 묵주 반지가 있습니다. 2018년에 어머니의 십자가 목걸이를 녹여서 만든 묵주 반지입니다. 그 반지는 단순한 묵주 반지가 아니라, 어머니의 신앙과 사랑이 녹아 있는 유품이자, 제 사제 인생을 함께 걸어온 동반자와 같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반지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뉴욕에 있을 때도 몇 번 잃어버린 적이 있었지만, 잘 찾았습니다. 이번에는 아무리 생각을 더듬어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사제관에도, 집무실에도, 성당 구석구석을 다 뒤졌지만, 흔적이 없었습니다. 마음속에서 ‘이제 정말 끝이구나’라는 체념이 들 무렵, 피정을 마치고 돌아온 날 책장 위에서 묵주 반지를 발견했습니다. 마치 ‘돌아온 탕자’처럼 다소곳이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제 마음은 감사와 감격으로 가득 찼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잃어버린 양’과 ‘잃어버린 동전’, 그리고 ‘돌아온 아들’의 비유가 새삼스럽게 다가왔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은 잃어버려도 다시 찾게 하시고, 멀어져도 다시 품어 주십니다. 우리가 잃었다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이, 사실은 하느님의 손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돌아보면 제 삶은 감사로 엮여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제게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일만 맡겨 주셨고, 감당하기 어려운 일에는 언제나 함께할 사람을 보내 주셨습니다. 건강이 완전하지 않아도 새벽마다 눈을 뜨게 하시고, 산책하며 기도할 수 있는 기쁨을 주셨습니다. 유행성 출혈열과 다리 골절의 고통을 겪었을 때도, 치유의 은총을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매일의 삶은 시편 23편의 고백처럼 흘러가고 있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네.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해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당신께서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김길수 교수의 글 「성삼문의 죽음과 김대건의 죽음」은 제 마음을 깊이 울렸습니다. 성삼문은 조선의 충신으로,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택했습니다. 형장에서 그가 남긴 절명시에는 인간의 허무가 서려 있습니다. “둥둥둥 북소리 울려, 내 목숨을 재촉한다. 머리 돌려 바라보니 해가 지려 하누나. 저승길에는 주막 하나 없다는데 오늘 밤은 내 어느 집에서 묵어갈까.” 그의 시는 아름답지만, 그 안에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이 없습니다. 인간의 의로움으로 죽음을 맞이했지만, 그 끝은 허무의 어둠이었습니다. 반면 김대건 신부님은 죽음 앞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환란과 고난도 주님의 허락 없이는 있지 않으니, 환란의 의미를 생각해서라도 주의 계명을 지켜라.” 그리고 덧붙이셨습니다. “나는 간다. 이제 환란도 고통도 없는 하느님의 기쁜 나라에서 다시 만나자.” 성삼문의 죽음은 인간의 신념으로 끝났지만, 김대건의 죽음은 하느님의 약속으로 이어졌습니다. 하나는 허무였고, 다른 하나는 새출발이었습니다. 믿음의 유무가 생명의 끝을 ‘종말’로 만들기도 하고, ‘시작’으로 바꾸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시겠느냐?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우리의 삶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착각 속에 살아갑니다. ‘내 남편, 내 자녀, 내 집, 내 사명’이라 부르며 모든 것을 소유하려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가진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잠시 맡겨진 것들을 관리하는 청지기일 뿐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가족을 잃을 때 슬프고, 물건을 잃을 때 화가 나지만, 그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잠시 빌려주신 선물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잃어버린 반지를 통해, 저는 그 사실을 다시 깨달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모든 것은 소유가 아니라 ‘기탁(寄託)’입니다. 내가 가진 것은 내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이기에 감사로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나누고,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살아간다면 세상의 마지막 날이 온다 해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네.” 오늘 하루, 잃어버린 것을 통해 되찾은 믿음이 우리 모두의 마음 안에서 다시 피어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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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의정부교구 김동희 모세 신부님]
지혜서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지혜의 인격화’입니다. 지혜서의 저자는 지혜를 하느님의 속성이라고 하면서 ‘삶의 반려자’ 곧 ‘아내’로 묘사하기도 하고(8장 참조), 지혜가 세상 처음부터 하느님과 함께 있었으며(9,9 참조), 창조된 첫 사람부터 노아, 아브라함, 야곱, 요셉 등을 줄곧 이끌었고,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억압에서 건져 냈다고 합니다.(10장 참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루카 18,1)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교우들과 면담하거나 대화하다 보면 낙심하고 체념하여 ‘그냥 그렇게’ 살고 있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해 보시면 어때요?’, ‘저렇게 해 보시면 어때요?’ 하고 권유해 보지만 대부분 “괜찮아요, 됐어요.”라고 대답하기 일쑤입니다.
오늘 복음의 과부는 “저와 저의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18,3)라고 하며 끈기 있게 매달립니다. 자기 편을 들어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일방적으로 자기 편이 되어 달라는 염치없는 부탁은 한두 번은 할 수 있어도 들어줄 때까지 끈질기게 되풀이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과부가 바라는 것은 진실을 밝혀 달라는 것입니다. 진실을 통하여 올바른 결과가 나오기를 바라는 간절함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지혜서가 알려 주듯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온 삶을 이끌어 가십니다. 사랑의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돌보아 주십니다. 낙심하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하는 이는 이러한 하느님께 믿음과 희망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과녁을 겨냥하는 화살촉처럼 그의 눈은 반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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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루카 18,1-8: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
우리의 삶 속에서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아픈 가족을 위해, 어려운 상황을 위해, 교회를 위해 눈물로 기도했지만, 하늘은 침묵하는 듯 보인다. 이런 순간에 우리는 낙심하기 쉽다. 오늘 복음은 그런 우리에게 주님의 분명한 말씀을 전한다.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1절)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불의한 재판관과 끈질긴 과부의 비유를 통해 항구한 기도의 중요성을 가르치신다. 재판관은 하느님을 두려워하지도, 사람을 존중하지도 않는 인물이지만, 과부의 집요한 청원 앞에서 결국 정의를 내린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는 선택된 이들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그들의 권리를 지켜 주실 것”이라 약속하신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사람의 아들이 올 때,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8절) 하시며, 단순히 청원이 응답되는 것보다 끝까지 믿음을 지켜내는 기도의 힘을 강조하신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기도의 본질을 이렇게 설명한다. “기도는 하느님을 설득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욕망을 정화하여 참된 행복을 향하도록 하는 것이다.”(De Sermone Domini in Monte, II, 3, 11)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역시 “끊임없는 기도란 말로만 중얼거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기억하며 모든 일을 그분과 함께하는 것”(Homilia in 1 Thess. 5)이라고 한다. 교리서도 기도를 “하느님의 자녀와 아버지 사이의 살아 있는 관계”(교리서 2565항)라 정의한다. 즉, 기도가 단순히 청하는 수단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친교 안에서 믿음을 지켜내는 길임을 드러낸다.
우리의 일상에서도 하느님께서 즉시 응답하지 않으시는 순간이 많다. 그럴 때 우리는 낙심하거나 포기하기 쉽다. 그러나 하느님은 불의한 재판관보다 훨씬 더 자비롭고 신실하시다. 개인적으로는, 기도의 응답이 더딘 것처럼 느껴질 때도 감사와 찬미의 기도를 놓지 않아야 한다.
우리의 기도는 홀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함께 드리는 기도일 때 더 큰 힘을 얻는다. 사목 헌장 38항은 “인간은 하느님과의 대화 안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가르친다. 교회는 곧 그 대화의 자리이다.
기도는 하느님을 변화시키는 수단이 아니라, 우리를 변화시키는 은총의 길이다. 항구한 기도는 마지막 때까지 믿음을 지키는 힘이 된다. 우리가 과부처럼 끈질기게 하느님께 매달릴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더 나은 때와 방법으로 응답해 주실 것이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 안에서 믿음을 발견하실 수 있도록 끝까지 기도 안에 머무는 우리가 되기를 바란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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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기도하는 사람은 홀로라도>
루카 18,1-8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제자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고을에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한 재판관이 있었다. 또 그 고을에는 과부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는 줄곧 그 재판관에게 가서, ‘저와 저의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하고 졸랐다. 재판관은 한동안 들어주려고 하지 않다가 마침내 속으로 말하였다.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저 과부가 나를 이토록 귀찮게 하니 그에게는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어야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끝까지 찾아와서 나를 괴롭힐 것이다.’”
주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새겨들어라.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기도하는 사람은 홀로라도>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제자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루카 18,1)
믿으시는 하느님께
기도하는 사람은
믿습니다
불신 가운데서
홀로라도
희망하시는 하느님께
기도하는 사람은
희망합니다
절망 가운데서
홀로라도
사랑하시는 하느님께
기도하는 사람은
사랑합니다
미움 가운데서
홀로라도
의로우신 하느님께
기도하는 사람은
의롭습니다
불의 가운데서
홀로라도
선하신 하느님께
기도하는 사람은
선합니다
사악 가운데서
홀로라도
밝으신 하느님께
기도하는 사람은
밝습니다
어둠 가운데서
홀로라도
따뜻하신 하느님께
기도하는 사람은
따뜻합니다
냉혹 가운데서
홀로라도
부드러우신 하느님께
기도하는 사람은
부드럽습니다
난폭 가운데서
홀로라도
베푸시는 하느님께
기도하는 사람은
베풉니다
탐욕 가운데서
홀로라도
살리시는 하느님께
기도하는 사람은
살립니다
죽임 가운데서
홀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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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오늘’내가 드리는 기도는...>
오늘 복음의 ‘과부의 끈질긴 간청을 들어주는 거만한 재판관의 비유’는 루카복음에만 있는 고유사료이다. 비유의 소재는 루카가 즐겨 주제로 삼아 보도하는 기도에 관한 것이다. 그것도 인내와 끈기를 동반한 기도의 자세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의 중요한 점은 비유자체의 이야기에 있다기보다는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라는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격려에 있다.
그것은 오늘 복음이 기도에 대한 단순한 가르침이 아니라 종말(8b절)을 대비한 유비무환의 뜻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즉, 어떠한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비유의 내용처럼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언제나 기도하며 용기를 잃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도하는데 있어서 얼마만큼 인내와 끈기를 가져야 하는 것인가? 오늘 복음에서 과부의 끈질긴 간청을 들어주는 거만한 재판관의 비유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으로 ‘주님의 기도’를 가르치신 후에 성가실 정도로 끈질긴 친구의 청에 빵 세 개를 내어주는 비유(11,1-13)를 상기시킨다.
성가실 정도의 끈질긴 간청을 어제는 친구가 들어주고, 오늘은 거만한 재판관이 들어줄지언정 내일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과연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8b절)는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쉽게도 예수께서는 종말을 기다리다 지쳐 이미 믿음을 포기한 사람들을 내다보시고 계신 것이다. 따라서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간청하기를 수도 없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염치 불구하고 끝까지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한다(11,9)는 것이다. 마지막까지 믿음을 지켜줄 수 있는 것은 인내와 끈기를 동반한 기도뿐이다.
이미 지나간 복음에서 인자의 재림과 종말에 관한 표징들이 언급되었다.(17,20-37) 노아의 홍수(창세 6-7장) 때나 소돔과 고모라의 최후(창세 19장)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 그리고 ‘여기’라는 일상(日常) 안으로 종말이 들이닥칠 것이 분명하다.
일상 안으로 느닷없이 들이닥치는 종말을 피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더욱이 그 날이 언제가 될지를 모르고 살아간다면 다리를 펴고 잘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잃지 말고, 언제나 기도하되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하라는 것이다. 사실 종말의 ‘그 날’이 언제일지 정확히 안다는 것도 모르고 있는 만큼 불안하고 힘든 일이다.
알고 있다면 그 날을 향하여 한 걸음씩 다가서는 두려움과 각박함, 그야말로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 찬 ‘시한부 인생’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고, 모르고 있다면 넉넉함과 막막함의 엇갈린 긴장으로 불안한 인생을, 그래서 지치고 쉽게 포기할 수도 있는 인생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그리고 ‘여기’에서 ‘그 날’을 위해 기도하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기뻐하고 감사하며 희망을 가지고 ‘오늘’ 기도하는 사람은 늘 기도하는 사람이다.(로마 12,12; 골로 4,2; 1데살 5,17) 우리들 가운데 고통을 받거나 죄를 지은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위해 ‘오늘’ 기도해 주어야 한다.
올바른 사람의 기도는 ‘오늘’이 가기 전에 바로 효과가 있을 것이다.(야고 5,13.15-16) 성령의 도우심으로 ‘오늘’ 기도하는 사람은 믿음의 터전 위에 스스로를 세우는 것이다.(유다 1,20)
그것은 하늘나라의 원로들이 향이 가득 담긴 금으로 된 대접을 가지고 어린 양 앞에 엎드리기 때문이다.
그 향은 곧 ‘오늘’ 우리가 바친 기도이다. 그 때 대천사가 금향로를 들고 와서 ‘오늘’ 우리가 바친 기도를 향에 섞어 향로에 넣고 황금제단에 태워 올린다.
그러자 대천사의 손으로부터 ‘오늘’ 우리가 바친 기도를 태운 향의 연기가 하느님 앞으로 올라가기 때문이다.(묵시 5,8; 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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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홍성만 미카엘 신부님]
<절망의 상태이지만 주님 안에서 희망할 수 있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따금, 기도에 임하는 제 자신을 뒤돌아보면 나의 기도가 얼마나 편협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예를 들어, 약 35넌 전 신학생 시절에는 남북통일에 대해 기도를 드린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때 만해도 남북통일에 대해서 일말의 작은 희망도 갖지 못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희미하나마 인간적으로 희망이 감지될 때에만 이를 바탕으로 기도를 드린다는 논리가 성립됩니다. 이는 틀림없이 저의 잘못된 믿음의 소치입니다. 그래서인지 이렇게 끝나는 오늘 복음 말씀이 특별하게 느껴집니다.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믿음은 궁극적으로 주님 안에서 희망을 하는 것입니다. 절망의 상태이지만 주님 안에서 희망할 수 있는 것이 믿음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이 불의한 재판관은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권세 당당한 재판관이지만, "저와 저의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하고 끈질기게 졸라대는 힘없는 과부에게 백기(白旗)를 들고 맙니다.
"저 과부가 나를 이토록 귀찮게 하니 그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어야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끝까지 찾아와서 나를 괴롭힐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계속 이어집니다.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새겨들어라.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사실 저를 포함해 많은 사람이, 희미하게나마 희망이 보일 때 이를 바탕으로 기도를 드립니다. 물론 이 희망이 기도를 더 적극적으로 드리는 데 매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을 했듯이, 믿음은 궁극적으로 주님 안에서 희망을 하는 것입니다. 절망의 상태이지만 주님 안에서 희망할 수 있는 것이 믿음입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을수록 더욱더 주님께 의지하고 희망을 두어야합니다.
희망하고 의지하는 나를 주님께서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당신의 방법대로 나를 거두어 주십니다. 결국 나를 거두어 주시는 주님께 의지하고 희망하는 하루가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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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윤지종 미카엘 신부님]
<어떤 과부와 재판관의 이야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면서 비유를 하나 들어주셨는데, 어떤 과부와 재판관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도시에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거들떠보지 않는 아주 고약한 재판관이한 사람 있었는데, 어느 날 과부가 찾아와 그에게 억울한 일을 호소하며 올바른 판결을 내려달라고 청합니다.
하지만 재판관은 오랫동안 그 여자의 청을 들어주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 과부는 포기하지 않고 늘 그를 찾아와서 졸라대며 성가시게 합니다.
그러자 재판관은 과부의 소원대로 재판을 해 주어야겠다고 마음먹습니다. 좋은 뜻에서가 아니라 자꾸만 졸라대니까 더 시달리지 않으려고 생각을 바꿔 먹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 말씀을 통해 그렇게 지독한 재판관도 과부가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청하니까 성가셔서라도 그 청을 들어주는데,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야 오죽 하시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을 잃지 않고 언제나 기도드리면 하느님은 지체없이 그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청하든지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계속 기도하기만 하면, 그것을 무조건 다 들어주실까요? 우리가 원하는 때에 우리가 원하는 방법으로 그렇게 다 이루어 주실까요?.... 글쎄요.
어린 아이들은 보통 부모님께 이것저것 많은 것들을 청합니다. 가지고 싶은 곳이 있으면, 온갖 떼를 다 쓰고 울며불며 그것을 사달라고 조르곤 합니다. 그러면 아이의 부모는 어떻게 합니까? 무조건 아이가 사달라고 하는 것을 다 사 줍니까? 솔직히 어느 부모인들 아이가 원하는 것을 해주고 싶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현명한 부모라면 아이가 아무리 떼를 쓰고 울어대도 그것이 아이에게 맞지 않거나 좋지 않겠다 싶으면, 결코 아이의 요구대로 해주지 않을 것입니다. 부모는 아이의 삶 전체를 보고 아이의 장래까지 생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이의 요구대로 해주지 않으면, 아이는 섭섭해 하고 부모님을 원망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래도 부모가 생각하기에 그것이 아이에게 적합한 것이 아니라면 절대로 들어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 마음도 부모들의 마음과 비슷하지 않겠습니까? 아이들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해 주고 싶어 하는 부모 마음처럼 우리를 향한 하느님 마음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 아이의 미래와 전체의 삶을 생각해서 때론 마음 아프지만 아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는 부모처럼 하느님도 우리가 청하는 모든 것들을 다 들어 주시고 싶으시지만 때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실 때도 있지 않겠습니까?
더군다나 우리가 청하는 그것이 고작 내 욕심이나 채우고 이기적인 마음에서 나온 것들이라면 어찌 하느님께서 우리가 원하는 대로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사실 우리는 우리가 청하는 그것이 우리 삶 전체에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 얼마나 좋은 것인지조차 제대로 모를 수가 있습니다.
지금은 그것이 당장 필요한 것처럼 보이고 또 그렇게 되면 좋을 것 같아 보이지만, 그것이 하느님께서 보시기에는 우리에게 맞지 않고 결국 나쁜 결과를 빚게 되어 우리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일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어찌 하느님께서 우리가 원한다고 해서 다 들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이가 매일 사탕 한 봉지만 한 봉지만 그러는데 매일 사줄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왜 그런 비유를 드시고, 마치 하느님은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졸라대면 무슨 기도든지 다 들어주실 것처럼 말씀하신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절대 거짓말을 하실 분도 아니고 쓸데없이 빈 말씀을 하실 분도 아니신데,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신 것은 용기를 잃지 않고 믿음을 가지고 언제나 기도를 드리면 하느님께서 올바른 판결을 해주신다는 것이지, 그것이 어떤 기도이든지 무조건 하느님께 매달리고 청하면 우리가 원하는 대로 다 이루어주신다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하느님은 아이가 원한다고 해서 무조건 다 해주는 그런 어리석고 무책임한 부모같은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는데도 하느님께서 잘 안 들어주시는 것 같다면, 분명히 무슨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청하는 그것이 하느님 보시기에는 청해서는 안 되는 그런 것이라든지, 하느님 보시기에 아직 때가 안 되었다든지, 혹은 하느님께서 다른 방법으로 이루어 주실 계획을 가지고 계시든지 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기도가 여러분의 욕심이나 이기심을 채우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면 실망하지 마시고 믿음을 가지고 부단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여러분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 여러분의 기도가 하느님 뜻에 맞지 않는 기도이거나 사욕을 위한 것이라면 먼저 하느님 뜻이 무엇인지부터 생각하시고, 조금 욕심을 줄이시기 바랍니다.
지금 여러분이 하는 기도는 어떤 기도입니까? 하느님 뜻에 맞는 합당한 그런 기도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사욕이나 채우려는 그런 어리석은 기도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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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우리 몸은 100조 개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모든 세포는 우리가 먹는 음식에 영향을 받고 뇌의 명령에 따라 움직입니다. 따라서 나의 생각이 중요합니다. 생각하는 대로 실제로 되기 때문입니다.
“환장하겠네.”라는 말이 있습니다. 너무 놀라서 장이 뒤집어진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생각과 감정이 몸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해 주는 말입니다. 따라서 ‘에라 모르겠다’라고 생각하면, 세포들도 ‘에라 모르겠다’라는 명령을 받아서 아무렇게 살게 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생각과 감정을 가져야 할까요? 어떤 생각과 감정이 나에게 유익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부정적인 생각으로는 내게 유익함을 줄 수 없습니다. 포기, 절망의 감정은 실제로 나를 포기하게 하고 절망 속에 살게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철저히 긍정적인 감정으로 나를 이끕니다. 더군다나 하느님 나라라는 희망을 품게 해서 내 몸을 그렇게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주님의 말씀에 집중하는 믿음을 갖춰야 합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나’를 위해서 말입니다.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 말씀을 해 주십니다. 종말의 때가 오기까지 시련과 기다림의 시간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 말씀은 이 기다림의 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는 것을 첫 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즉,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루카 18,1)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가 등장합니다. 이 불의한 재판관은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루카 18,2) 인물이었습니다. 정의와 자비가 전혀 없는 최악의 재판관인 것입니다. 또 과부는 당시 사회에서 남편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가장 힘없고 가난하며 소외된 계층을 상징합니다. 그녀가 기댈 곳은 오직 재판관의 ‘올바른 판결’ 뿐입니다. 그래서 ‘줄곧... 졸랐다’(루카 18,3)라고 복음은 이야기합니다.
과부의 정의로운 청원 때문이 아니라, 오직 자신이 ‘귀찮고 괴로워서’ 판결을 내려줍니다. 하물며 하느님께서는 어떠하시겠냐는 것입니다. 포기하지도, 절망하지도 말고 하느님께 끈질기게 부르짖는 그 간절한 기도를 외면하시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루카 18,8)
이제 이 비유의 핵심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과부처럼 끊임없이 기도하며 그 믿음을 지키고 있을 것인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긍정적인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사는 방법은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에서 나옵니다. 그 믿음을 계속 청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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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끊임없는 기도>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막바지 길에서 '기도'에 대한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기도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루카 18,1)는 뜻으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비유입니다.
그런데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말씀은 대체 어떤 기도를 말하는 걸까? 흔히 ‘기도의 황금률’이라 불리는 이 기도를 우리는 '끊임없는 기도'(항구한 기도, 지속적인 기도, 중단 없는 기도)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 기도는 교회 전승 안에서, 주로 서방 교회에서는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의 형태로, 동방 교회에서는 ‘예수 기도’(εύχη Ιησοû)의 형태로 전승되어 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말씀은 대체 무슨 뜻일까? 그것은 우선, ‘끊임없이 주 하느님을 향하라’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기도는 하느님을 ‘향하여’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곧 ‘마음이 동반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기도가 주님을 향하여 있지 않다면, 그것은 하나의 넋두리요, 하소연이요, 자기 한탄이요, 독백일 뿐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그 어떤 누군가가 아닌, 바로 우리 ‘주님을 향하여’ 있고, 우리 주님과 관계 안에 머무는 것을 말합니다. 곧 그것은 주님을 믿고 주님께 희망을 두고 주님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언자 사무엘은 “기도하지 않는 것은 죄”(1사무 12,23 참조)라고 말합니다. 만약 하느님과 관계 맺지 않고 하느님께 희망을 두지 않는다면, 곧 하느님이 아닌 다른 우상을 향하게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말한 대로, 인간은 ‘하느님을 향하여 방향 지워진 존재’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우리보다 앞서 우리의 주님 하느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는 그분이 계시기에 기도하기를 포기하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희망하기를 포기하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마치 과부가 판결해주지 않는 재판관 앞에서도 실망하지 않고 간청하기를 포기하지 않았듯이 말입니다. 사실 낙심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을 수 있음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에서 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우리의 믿음’을 찾으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루카 18,8)
그러니 이 '끊임없는 기도'는 '사람의 아들이 올 때'까지 지속되어야 하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이를 '루카복음의 소묵시록'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기도하기를 결코 멈추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곧 하느님을 향하여 있기를 멈추지 말아야 하고,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 머물러 있기를 멈추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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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루카 18,1)
주님!
제 마음이 당신을 향하게 하소서.
이미 제 마음 안에 와 계신 당신을 저버리지 않게 하소서.
늘 저를 향하여 있는 당신을 외면하지 않게 하소서.
당신께 믿음을 두고 당신의 희망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당신의 희망이 저의 희망이 되게 하시고, 낙심하지 말게 하소서.
늘 제 안에 살아계신 당신을 찬미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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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
“AI이 아니라, 기도가, 믿음이, 주님이 답이다”
“주님을 찾는 마음은 기뻐하여라.주님과 그 권능을 구하여라.언제나 그 얼굴을 찾아라.그분이 이루신 기적을 기억하여라.”(시편 105;3ㄴ-5ㄱ)
오늘 화답송 시편이 참 좋습니다. 기도가 답입니다. AI(인공지능)이 아니라 기도가, 믿음이, 주님이 답입니다. AI가 우상이 된 세상, 저는 기도에 대해, 믿음에 대해, 주님에 대해 끊임없이 말하려 합니다. AI에 지배당하거나 이용당하지 않고 잘 분별하여 활용할 수 있는 것도 기도의 힘입니다.
기도와 믿음은 함께 갑니다. 눈부신 기술발전과 더불어, 아니 한발 앞서 가야할 기도입니다. <사랑학>은 물론 <기도학>과 <신비학 >이란 과목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성인들은 거의가 기도가 대가들이었고, 이젠 모두가 기도의 대가들이 되어야 할 작금의 위기의 시대입니다. 지구와 인류의 생존을 위해 <탈성장>만이 답인 시대에 참으로 기도를 통한 영적혁명인 회개와 영성의 심화가 절박합니다.
기도와 삶입니다. 기도와 삶은 함께 갑니다. 기도없는 삶은 공허하고 삶이 없는 기도는 맹목입니다. 기도하는 대로 살고 사는대로 기도합니다. 삶의 꼴을 형성하는 기도입니다. 하느님과 생명과 사랑의 소통이자 일치의 친교중에 살게 하는 기도입니다. 나중에 주님이 우리를 심판하실 때도 기도한 얼굴로 당신을 닮았는지가 판단의 잣대가 될 것입니다.
사실 나중에 남는 얼굴은 기도한 얼굴인가 기도하지 않은 얼굴인가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날로 주님을 닮아 익어가는 <성화의 여정>에 기도보다 더 본질적인 것은 없습니다. 바로 오늘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불의의 재판관의 비유에서 우리는 기도의 모범이자 기도의 대가인 과부를 만납니다. 불의한 재판관이라지만 그에 대한 깊은 신뢰가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직접적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not to lose heart)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to pray always)는 뜻으로 제자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오늘 비유중 주목되는 말마디가 “올바른 판결”입니다.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재판관에게 줄기차게 <올바른 판결>을 졸라대는 과부의 끌질긴 자세를 배우자는 것입니다. “공부하다 죽어라!”
어느 고승의 말대신 저는 “기도하다 죽어라!” 말하고 싶습니다. 불의한 재판관이라지만 저변에는 깊은 신뢰가 자리하고 있음을 봅니다. 마침내 재판관의 항복을 받아내니 과부의 승리가 참 통쾌합니다.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저 과부가 나를 이토록 귀찮게 하니 그에게는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어야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끝까지 찾아와서 나를 괴롭힐 것이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것이 없듯이 기도에도 불가능한 것이 없습니다. 하느님이 아쉬워서가 아니라 내가 아쉬워서 하는 것입니다. 바로 과부가 그러했습니다. 정말 항구히 간절히 기도하다보면 원하는 것에서 필요한 것 하나만 남게 되고 그것은 그대로 하느님의 뜻과 일치된 것이 되고 올바른 판결이 되는 것입니다.
정말 꼭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진짜 부자는 가진 것이 많아서가 아니라 필요한 것이 적을수록 진짜 부자입니다. 마침내 <필요한 것 하나!> 하느님임을 깨달아 모실 때 진정 최고의 부자에 자유롭고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답변이 참 통쾌합니다. 우리의 믿음 부족을 질타하는, 단숨에 읽혀지는 주님 친히 말씀하신 대목입니다.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새겨들어라.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지체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과연 주님의 응답이 없다 실망하거나 낙심하기전 이렇게 간절히 절박하게 항구히 밤낮으로 부르짖으며 기도했는지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철석같은 신뢰의 믿음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정말 부족한 믿음을 도와달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하느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바로 홍해를 건너 믿는 이들을 구원해 주신 파스카의 주님이십니다. 지혜서가 바로 우리가 믿어야 할 주님의 정체를, 기도의 기적을 잘 보여줍니다.
“진영 위는 구름이 덮어 주고, 물이 있던 곳에서는 마른땅이 나타나는 것이 보였으며, 홍해는 장애물이 없는 길로, 거친 파도는 풀 많은 벌판으로 바뀌었습니다. 당신 손길의 보호를 받는 아들은 그 놀라운 기적을 보고, 온민족이 그곳을 건너갔습니다. 그들은 풀을 뜯는 말들 같았습니다. 또 어린양들처럼 이리저리 뛰면서, 주님, 자기들을 구해 내신 당신을 찬양하였습니다.”
정말 실감나는 기도의 기적이자 하느님의 위업입니다. 그대로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이런 하느님을 믿는 이들은 낙관적이요 긍정적일수 뿐이 없습니다. 이런 하느님께 대한 한결같은, 철석같은 믿음에서 솟아나는 항구하고 간절한 기도입니다. 잘 나갈 때 기도는 누구나 잘 합니다. 그러나 기도의 진위는 곤경중에 드러납니다. 곤경중에도 가열차게 올바른 응답을 간구懇求하며, 희구希求하며 기도하는 <믿음의 용사들>에게 불가능은 없습니다.
하느님을 탓할 것이 아니라 나의 하느님 신뢰 부족을 탓해야 할 것입니다. 바로 복음의 결론 같은 말씀이 시공을 초월하여 모든 세대에게 주는 화두같은 말씀이자 믿음을 위한 기도에 분투의 노력을 다하게 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의 부족한 믿음을 도와주시며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루카18,8ㄴ).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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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루카 18,1)
흔들리는 낙엽도
바람 속에서
뿌리를 지키듯
흔들림 속에서도
자신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는
마무리의 빛나는
낙엽의 길입니다.
낙엽은 결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낙심은
기도의
장애가 아니라,
우리의 기도가
가장 깊어지는
은총의
순간입니다.
신앙 안에서
낙심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심을
우리가 믿는
믿음의 뜨거운
결단입니다.
믿음의 본질은
관계의 신뢰이며
관계의 신뢰는
기도로
드러납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시간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내적인 힘입니다.
세상의 냉소와
무관심과
불의와 불안에도
굴복하지 않는
힘입니다.
끊임없는 기도는
관계의 충실성과
지속성으로
드러납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한
외침이기보다
우리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지속하는 생명선이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는 믿음을
강화합니다.
기도 없는
믿음은 공허하고,
믿음 없는 기도는
금세 지쳐버립니다.
기도와 믿음은
서로를 살리고
서로를 도와주는
하나의 생명입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의 흔들리는
순간조차
끊임없는 기도로
봉헌합니다.
낙심 속에서도
우리가
끊임없이 기도할 때,
우리의 믿음은
다시 살아나고,
우리와
하느님과의 관계는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그것이
기도의 삶이며,
그것이 진정한
믿음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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