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 6: 18-22
그러나 너와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알리시고 그분의 뜻을 준행 하게 하시는 방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무한하신 은혜와 신령한 복을 약속하시고 명령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명을 준행 할 수 있는 각가지 은혜도 더하여 주십니다.
1. 본문 18절은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입니다.
방주 건조가 매우 어렵고 또 그 일이 시작되면 진행하는 과정에서 방해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대두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분의 종에게 추가된 약속으로 확신시키십니다. 그래서 노아는 하나님을 순종할 용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의지하고 자기와 하는 일이 절대로 헛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던 사실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약속이 수반되게 되면 자연히 우리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분의 명령을 수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실은 우리의 모든 힘이 절대로 헛되게 낭비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근거하여 생각해 볼 때 천주교인들은 얼마나 어리석게도 기만을 당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시시하게 주장하기를 사람들이 교리로 인하여 선행을 행하려는 소원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가게 된다고 합니다.
신앙이 우리를 깨우쳐 주지 않으면 선행에서 우리가 어느 정도의 민첩성을 발휘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만으로 우리에게 의욕을 주고 하나님을 순종하도록 우리 각자를 감동시켜 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약속이 없이는 나태하게 누워서 딩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거의 무기력하게 되어 손발이 해야 될 의욕마저 저버리고 손끝도 까딱하기 싫어하는 자들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우리가 맥이 없게 되면 될수록 또는 지나치게 선행을 하는 일에 태만 할 때마다 우리는 다시 한번 하나님의 약속을 되새겨서 우리의 완만한 행동을 교정해 나가야 되겠습니다. 바울의 간증에 비추어 보면(골1:5) 그렇게 하여 하늘나라에서 성도들을 위하여 쌓여진 소망을 바라보고 그들의 마음 속에서 사랑이 넘쳐나는 것이라고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신실하게 믿는 자들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증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말할 때에 허공을 치는 결과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이 확실하게 하려는 것이며 오직 그들에게 주어진 약속들을 묵묵히 따르며 또한 성공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그들을 불러 주신 하나님을 따르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때에 가서 다음의 관계가 마음 속에서 태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종 모세에게 그가 할 일을 지시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자신을 잘 순종하게 하려고 절대로 헛되게 그를 요구하시지 않으신다고 분명하게 선언하고 계십니다. 이제 모세가 말하고 있는 이 언약의 요약을 정리해 보면 비록 온 세상이 홍수로 멸망을 당하게 될 때에도 노아는 절대로 안전하게 보호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세상 전체를 완전히 배격해 버리시고 하나님은 노아 혼자에게만 관계하여 특이한 언약을 세우시는 납득된 상대적인 대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치 철판 벽과 같이 이 죽음의 공포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버티고 퇴치시키는 것이 노아의 의무였던 것입니다. 그는 마치 이 순전한 말씀으로 생명과 죽음을 구별시키시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인 것처럼 약속을 의지하고 사망을 버티어 내야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내려진 그 언약이 이와 같은 추가된 조건으로 재확증이 되고 있습니다. 그의 가족은 노아 자신 때문에 안전하게 보호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또한 새로운 세계를 다시 세우기 위하여 짐승들도 역시 보호될 것이라고 하는 사실로 확증되고 있습니다.
2. 본문 19-21절은
“혈육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 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케 하되 새가 그 종류대로, 육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케 하라 (21)너는 먹을 모든 식물을 네게로 가져다가 저축하라 이것이 너와 그들의 식물이 되리라” 입니다.
‘혈육 있는’ 이란 말은 모세가 모든 동물 종류를 총망라해서 지칭하고 있는 이름입니다. 모세께서는 그 동물들이 각각 둘씩 갔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한 쌍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방주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방주안에 깨끗한 것으로 선정된 동물들의 세 쌍이 있는 것도 보게 될 것입니다 후에 노아는 그것들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단지 씨로 쓰일 것에만 중점적으로 언급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수효에 대하여는 언급하지 않고 다만 단순히 암수 한 쌍씩 들어갔다고 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노아가 어떻게 세상이 다시 전개되었는가에 대하여 이것을 보고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3. 본문 22절은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입니다.
1) 이 부분은 몇 마디로 요약되었지만 웅장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씀입니다.
모세는 여기서 노아의 신앙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민감하지 못한 자들은 히브리서 저자가 노아를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다”(히11:7)고 하는 말을 상당히 의아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마치 사실상 모든 덕성들이 그리고 그밖에 이 거룩한 사람 안에 있는 칭찬을 받을 가치가 있는 것들이 이 믿음이라는 근원에서 나오지 않은 것처럼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의 마음은 계속적으로 그 자신을 향하여 밀려오는 모든 육축의 공격들을 직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아야 될 것입니다. 그 시험의 공격들을 살펴보면 첫째로 엄청난 방주의 규모가 그로 하여금 감히 손을 대서 일을 착수하려는 엄두를 내지 못하게 그의 모든 것을 완전히 압도해 버렸을 것입니다. 이제 어떤 사람들은 그 배를 건조하기 위하여는 수많은 나무를 베어 넘겨야 하며 그것을 운반하려면 많은 인부와 수고가 뒤따라야 되며 그와 동시에 많은 어려움이 그것들에 수반되는 것을 생각해야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2) 그리고 그 일은 단시일에 끝나는 것이 아니고 장기간에 계속되는 일이었습니다.
이 거룩한 사람은 그와 같이 엄청나게 고된 노동을 하는 가운데서 무려 100여 년이나 되는 긴 세월동안을 계속해서 살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노아가 이런 장애들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그토록 미흡한 사람이라고 추측할 수도 없습니다. 그밖에도 그 당시의 사람들이 끈질기게 그를 이해하고 함께 동참했으리라고는 거의 바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자신에게는 절대적인 구원이 약속되어 있는 그 일이 사실상 그들 자신들에게는 수치를 동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정상을 벗어난 광포성은 그들이 날마다 무작정 이유도 없이 천진하고 양순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들을 귀찮게 굴며 괴롭혔을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모욕거리가 되는 그럴싸한 계기가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즉 사방에서 노아가 나무를 베어냄으로 그곳 땅을 벌거숭이로 만들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여러 가지 유리한 것들을 속여 빼앗고 있다고 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모욕적인 처사의 그럴싸한 원인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비뚤어지고 다투기를 좋아하는 자는 나귀 그림자를 가지고 시비를 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 당시에 노아는 과연 그 애꾸눈처럼 사물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 잔혹한 그들이 그토록 많은 나무에 관련하여 무슨 짓들을 할 것이고 생각했겠습니까? 아마 그들은 수많은 범죄를 자행하면서 사방에서 열심을 가지고 그들의 잔인성을 발휘하는 데에 도취할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들의 분노를 부채질한 주요한 원인은 아니었습니다. 노아가 자기 자신을 위해서 보호소를 짓는 것으로써 그들을 멸망의 운명으로 못박아 놓고 도저히 그들을 다시 헤어날 수가 없는 존재라고 암시했기 때문에 그들이 화가 난 것이었습니다. 분명히 말하거니와 그들이 하나님의 능력 있는 손에 의하여 제재를 받지 않았다면 이 거룩한 사람에게 수백 번이나 돌을 던져서 고통을 당하게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그들이 간헐적으로 조소와 냉소를 퍼부으며 공격하는 짓들과 그를 수없이 비난하며 말할 수 없는 지독한 위협을 하지 못하게 그들의 극성을 하나님이 완전히 제지하지는 않으셨다는 것은 가능성이 있는 말입니다.
우리도 노아가 하는 일을 방해하는 것에 마음놓고 횡포를 부렸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므로 비록 그가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 대하여 민첩하게 적응하며 실천을 했지만 그러나 그의 지조가 그렇게 오랜 기간에서 확고하게 뿌리를 깊이 박고 있지 않았다면 아마 천 번 이상이나 실망하고 좌절되었을 것입디다. 더욱이 그일 자체가 비실재적인 것으로 보일 때는 장차 그 수많은 세월동안 어디에서 양식들을 구하며 그렇게 많은 동물들을 먹일 만한 먹이를 어디서 구할 수가 있는가? 하고 자문자답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에게서 명령을 받기는 10개월 동안에 그의 모든 가족들과 가축들과 야생동물들과 심지어는 새들을 위하여 충분히 먹을 수 있는 식량을 쌓아 저장해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노아는 방주를 건조하려고 모든 농사일에 손을 떼고 있는데 2년 먹을 식량창고를 채우라는 명령을 받았으니 이 얼마나 암담한 일처럼 보이겠습니까? 그러나 더 문제를 야기시킨 것은 동물들에게 먹이를 마련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노아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놀리고 계시는구나 하고 의심했을 것입니다.
그가 하는 마지막 일은 모든 종류의 동물들을 다 함께 모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그 숲속에서의 그의 명령일하에 모든 야생짐승들이 움직이거나 또는 그들을 길들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처럼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늑대가 양들과 함께 거하게 하며 표범이 사슴들과 함께 있게 하며 사자가 소와 함께 있게 했던 것처럼 묘사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가장 가혹한 시험은 자신의 사명을 보존하기 위하여 마치 무덤 속에 들어가는 것처럼 내려가라는 것과 자진하여 자신에게서 공기와 생명력을 박탈시키라는 명령이었습니다. 밀폐된 다시 말하자면 빽빽하게 가득차 있는 곳에 오직 똥냄새만이 가득차서 삼일간의 기간에 방주 안에 있는 모든 생물체들을 질식시켰을지도 모릅니다. 이제 그 거룩한 사람 노아가 당면하고 있는 여러 가지 갈등들을 돌이켜 생각해 봅시다. 그토록 가혹하고 그의 전체를 지배하다시피 주위에 에워싸여 있으면서 팽배한, 그리고 그토록 오랫동안 계속되는 그 사람의 갈등들을 돌이켜 보아야 하나님이 그에게 하라고 명령하신 것을 그가 얼마나 영웅적으로 용기를 가지고 최선을 다하여 수행했는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모세는 여기서 정말 간단한 말로 그가 그 명령을 다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수행하는 것이 인간 능력으로는 얼마나 불가능한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또한 현재 그가 처하고 있는 생활보다 더 차원 높은 것을 보지 않았다면 차라리 그토록 엄청난 중노동을 하느니 보다 백 번의 죽음을 택하는 편이 더 나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종에 대한 괄목할 만한 본보기가 여기서 우리에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노아가 자신을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의탁하고 그분이 마땅히 받으실 존경을 드렸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부패된 성품에서 사람들이 핑계를 대는데는 얼마나 약삭빠르며 하나님을 불순종하는 것에 구실을 붙이는 데에 얼마나 교묘하게 머리가 잘 돌아가는지는 우리가 주지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또한 이런 여러 가지 장애물들을 돌파하고 나가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대결하고 나서는 악한 사상들이 절대로 자리잡지 못하도록 양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 말씀 가운데서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사단은 그런 악한 사상을 가지고 우리의 마음을 혼란시켜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지 못하게 한다는 사실도 배워야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특별히 이런 존귀를 그분 자신에게 돌리기를 요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하시는 분으로 나타나시지 않게 해주기를 요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분의 명령을 어느 것 하나라도 모두 만족하고 옷깃을 여미며 그것을 수행하여 사단이 우리가 가는 길에 어떤 장애물을 놓고 방해를 하든지 절대로 우리의 본분에서 이탈되지 않고 오직 이 세상을 초월하여 믿음의 날개를 타고 가는 것이 바로 신앙에 대한 진정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모세는 또한 우리에게 제시하기를 노아가 특별히 한가지에만 하나님을 순종한 것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 그분을 순종했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자신들을 하나님께 남김없이 복종시키지 못하는 그 사실이 우리들의 생애 가운데서 주로 무서운 혼동을 야기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분명히 관찰해 보아야 될 것입니다. 오직 우리의 의무 가운데 일부만을 수행할 때에 흔히 우리는 우리 자신의 감정과 그분의 말씀을 뒤범벅으로 만들어 혼합시키게 됩니다.
그러나 노아의 순종은 이 사실에 관하여 찬사를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일부의 부분적인 순종이 아니라 전체적인 순종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들 가운데 한가지도 빠뜨리지 않고 완전히 다 순종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참되이 아는 지식을 받아드리는 만큼 자신과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을 향하여 내어드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