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9일(목)
오늘부터는 두 팀으로 나눠져서 우리(태용, 민성, 나)는 배낭을 호텔에 맡겨 놓고 8시에 제주연안여객터미널로 갔다. 예약한 표를 발급받아 약국에서 멀미약(기미테)을 사서 붙이고 9시반 출발 퀸스타2호에 승선했다. 쾌속정이라 크기는 작다. 승객들은 대부분 뒤편 좌석에 앉아 있다. 배 뒤편이 멀미가 덜 하다고 한다. 승무원이 안전 안내를 하면서 구토 봉지를 나눠준다. 배가 내항을 벗어나 외항으로 나오니 푸른 물결이 넘실거리고 파도로 배가 왼편 오른편으로 규칙적으로 흔들린다. 배멀미를 걱정했는데 다행히 견딜만하다. 다른 승객들도 모두 멀미를 하지 않는 모양이다. 한 시간여 후에 추자도 상추자항에 도착했다. 해변 방파제를 중심으로 해안가에 집들이 죽 늘어서 있는 아담한 항구다. 추자도에서 많이 잡히는 참조기 등 해산물을 파는 상점들과 민박집, 면사무소, 보건소 등 공공건물과 민가가 아기자기하게 모여 있다. 추자도는 상추자도, 하추자도, 횡간도, 추포도 등 4개의 유인도와 38개의 크고 작은 무인도가 모여 있는 군도이다. 바다에 떠 있는 섬의 높은 봉우리들은 마치 깊은 산중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추자도는 고려시대까지 候風島라고 불렀으며 제주로 갈 때 거센 바람을 피하던 섬이었다. 그후 섬에 추자나무가 무성하여 추자도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예전에는 전라남도에 속해 있다가 100여년 전에 제주에 속하게 되었다. 그래선지 돌과 나무 등 풍광과 문화가 제주 본섬과는 자못 다른 느낌을 준다.
매 정시마다 상추자항에서 출발하는 추자도 유일의 공영버스를 타고 하추자도 쪽으로 갔다. 마을길을 벗어나자 바로 두 개 섬을 이어주는 추자교가 나온다. 추자교를 건너니 바로 하추자도이다. 신양항을 지나 언덕에 내려서 왼편으로 오르니 추자도에서 제일 높은 해발 164m 돈대산 정상이다. 전망대 옆에 있는 올레스탬프를 찍고 정자에 올라서니 왼편으로 상추자항, 오른편으로 하추자도 신양항 전경이 한눈에 보이고 짙푸른 망망대해가 끝없이 펼쳐져 있다. 날씨가 좋으면 멀리 바다 너머로 한라산 정상까지 보인다고 하는데 오늘은 구름이 시야를 막고 있다. 가까이에는 사람이 사는 횡간도, 추포도 등 추자군도가 점점이 떠 있고 바람이 세차게 불어온다. 신양항으로 내려와서 버스를 타고 종점인 예초리로 가서 마을길을 따라 하추자도 동쪽 끝머리에 있는 신대산 전망대에 오르니 그 너머 바닷가 바위 위에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 나무 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물생이 끝’ 바위 위에 ‘눈물의 십자가’가 서 있다. 십자가를 향해 여인이 아기를 안고 앉아 있는 동상이 보인다. 두살배기 아기 황경한과 어머니 정난주 마리아를 형상화한 모습이다. 투명한 십자가에는 방울이 맺혀져 있는데 애끓는 슬픔의 눈물이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1801년 신유박해 당시 순교한 황사영은 1775년 남인가문에서 태어나 16세 때 진사시에 장원급제할 만큼 영특하였다. 그러나 1790년 주문모 신부에게 영세를 받은 후 카톨릭에 귀의하게 된다.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충북 배론에 피신하여 이른바 ‘황사영 백서’를 써서 이를 북경에 있는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려다 발각되고, 체포되어 대역죄인으로 처형되었고, 어머니 이윤혜는 거제도로, 아내 정난주는 제주 관노로 유배된 것이다. 정난주는 다산 정약용의 형인 정약현의 딸로 아들이 평생 죄인으로 살아가야 함을 걱정하여 이름과 내력을 적은 헝겊을 아기 옷에 붙여 예초리 바닷가 갯바위에 내려놓은 것이다. 아기 황경한은 그 울음소리를 듣고 찾아온 예초리 주민 오씨부인에게 발견되어, 오씨 부부가 아기를 거두어 키우게 되었고, 황씨가 없던 추자도에서 창원 황씨 入島祖가 되어 성장한 뒤에 혼인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 지금 그의 후손들이 하추자도에 살고 있으며, 그로써 추자도에서는 황씨와 오씨가 한 집안이라고 하여 결혼하지 아니하는 풍습도 생겨났다.
한편 제주 대정현 관노로 유배된 정마리아는 38년간 풍부한 학식과 교양으로 주민들을 교화하여, 노비의 신분이면서도 ‘서울 할머니’라는 칭송을 받으며 살아가다가 1838년에 선종하여 대정성지에 묻히게 되었다. 어머니 정마리아는 아들의 소식을 듣고도 혹시나 아들의 신상에 해가 될 것을 염려하여 사는 동안 그리운 아들을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신대산 전망대에서 올레길을 따라 오른편 추석산 언덕을 조금 올라오면 멀리 제주도가 바라 보이는 양지바른 언덕에 ‘황경한의 묘’가 조성되어 있다. 앞쪽으로 둘러진 대리석 담에 안타까운 이별의 모습을 그림과 사연으로 새겨 놓았다. 이곳이 추자도에서 제주도가 가장 가까이 보이는 언덕인데 당시 어린 아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어머니를 그리워했을 모습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