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305
8월4일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연중 제18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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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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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WEtbyyu4fVk
[작은형제회 한성훈 가브리엘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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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아르스의 비안네 신부님이 성인이 된 비결 한 가지!>
오늘 우리는 본당 사제들의 수호성인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님을 기억합니다. 오늘 우리 모든 사제, 수도자들이 청빈한 사목자의 대명사, 교우들을 향한 사목적 열정으로 활활 불타올랐던 착한 목자로서의 삶을 조금이라도 본받을 수 있는 날이 되면 좋겠습니다.
위대한 대 성인의 탄생 뒤에는 항상 큰 조력자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비안네는 어린 시절부터 사제직을 꿈꾸었지만, 가정 경제가 워낙 바닥이라 그런 말을 차마 입에 꺼내지도 못했습니다. 가난한 농부의 자녀로서 매일 양을 치고 열심히 농삿일을 거들었습니다.
17세가 되어 어렵사리 용기를 내어 부모님에게 의사를 표명했습니다. 부모님은 크게 기뻐했지만, 워낙 가정 경제가 어렵다 보니, 그뿐이었습니다. 2년 이상 아무런 진척이 없을 때, 등장한 인물이 본당 주임 바레이 신부님이었습니다. 그는 가난한 시골 본당 사제였지만, 19세가 된 비안네를 사제관으로 불러들여 신학교 입학에 필요한 기초 학력을 쌓게 했습니다.
벨리오르 소신학교에 입학했지만, 너무 늦은 나이에 시작한 공부라 어려움이 정말 많았습니다. 성적은 늘 아슬아슬했습니다. 교수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해력을 있었으나 암기력이 부족했습니다.
그렇지만 바레이 신부의 영향을 받은 탓에 비안네 신학생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참회하고 고행하는 데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습니다. 그를 지도했던 교수 신부들은 현저히 부족한 신학교 성적으로 인해 퇴학을 결정했지만, 그의 깊은 신앙심과 모범적인 생활을 높이 평가하여, 가능성을 열어두었습니다.
어렵사리 사제로 수품된 비안네 사제는 자신의 영원한 은인이자 영적 아버지였던 바레이 사제의 보좌 신부로 발령을 받습니다. 비안네의 새사제로서의 모습도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는 그 무엇을 하던 항상 주임 신부의 의견을 먼저 구했고, 작은 것 하나라도 배우고자 노력했습니다.
안타깝게도 두분의 은혜로 충만했던 공동생활을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불과 3개월만에 바레이 신부의 건강은 급격히 악화되었고, 병석에서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후 비안네 신부는 아르스의 주임 신부로 임명되었습니다. 아주 작고 황폐한 마을이었습니다. 주민들 대부분이 신자였지만 많은 사람들이 쉬고 있었습니다. 주일이 되어도 미사 참례 대신 일을 했고, 술과 유흥을 즐겼습니다.
열악한 아르스 본당의 현실이었지만, 비안네 신부는 조금도 낙담하지 않았습니다. 항상 본당을 충실히 지키며 기도에 전념했습니다. 매사를 하느님께 의탁했습니다.
미사에 나오는 소수의 신자들을 따뜻하고 친절하게 대했고, 본당 공동체의 회복을 위해 목자로서 할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특히 고백성사에 큰 의의와 역점을 두고, 고해소 안에 머물러 있기를 좋아했습니다.
착한 목자 비안네 신부에 대한 소식은 즉시 쉬는 교우들에게 알려졌습니다. 본당 공동체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고, 성인 사제에 대한 소문이 인근 본당으로, 교구 전역으로, 프랑스 교회 전체로 퍼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비안네 신부님이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진 사람들에게 회개의 은총을 주기 위해 가장 먼저 노력한 것은 자신을 돌아보는 일이었습니다. 먼저 그들의 회개를 위해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고행을 열심히 했습니다. 그리고 사제로서 가장 중요한 활동이라고 할 수 있는 미사와 고백성사에 온 몸과 마음을 다 바쳤습니다.
비안네 신부님은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밥먹듯이 단식했습니다. 고백성사로 너무 바빴던 나머지 감자 몇 개 서둘러 먹고 즉시 고해소로 달려갔습니다. 막대한 후원금과 기증품이 들어왔지만 초라한 침실과 사무실은 텅텅 비어있었고, 딱딱한 침대에 담요 한 벌이 전부였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본당이나 교구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비안네 신부님에 대한 소문이 퍼져나가자 수많은 사람들이 아르스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하느님과 신앙에 등을 돌린 사람들, 오랫동안 고백성사를 보지 못했던 사람들,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이 몰려왔는데, 그를 만난 이후 기쁜 마음으로 돌아갔습니다.
비안네 신부님은 특별한 은사를 한 가지를 선물로 받았는데,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능력이었습니다. 지은 죄가 너무 커서 말을 제대로 꺼내지 못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며 먼저 건드려주니, 사람들은 깜짝 놀라곤 했습니다.
고백성사를 많이 집전한 날은 하루 17시간 고해소 안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에게 고백성사를 보러온 사람들은 일년에 2만명 가량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고백성사를 보기 위해 사흘을 기다리기까지 했습니다.
아르스의 성자께서 성인이 되신 가장 큰 비결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사제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가장 본질적인 주 업무, 매일 미사와 고백성사에 가장 큰 의미를 두고 충실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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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간절한 마음·겸손한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갈 때, 빈손으로 돌아오는 법은 없습니다!>
빵과 물고기를 많게 하신 기적에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자 협조자들인 사도들의 존재가 유난히 부각되고 있습니다. 난감한 현재 상황을 최초로 스승님께 보고한 사람들은 사도들이었습니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습니다. 그러니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십시오.”(마태오 복음 14장 15절)
또한 상황의 심각성에 대해 너무 대수롭지 않게 여기시는 스승님께, 보다 구체적으로 현실을 정확하게 알려드린 사람들 역시 사도들이었습니다.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마태오 복음 14장 17절)
뿐만 아니라 스승님께서 빵과 물고기를 많게 하시는 기적을 행하신 후, 그것들을 굶주린 백성들에게 일일이 나누어준 사람들 역시 사도들이었습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마태오 복음 14장 19절)
동시에 군중들의 식사가 모든 끝난 후 돌아다니면서 남은 조각을 모아들인 사람들 역시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남은 조각을 한 군데 모아 보니 총 12광주리였습니다. 이는 곧 12사도의 숫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마태오 복으 14장 20절)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 우리는 오늘 날의 사도들이(주교, 사제, 수도자, 평신도 지도자) 어떤 역할을 하는 사람이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은 주님과 백성 사이에서 중재자·매개자 역할을 하는 존재입니다. 그들이 백성을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거나 갈라지게 하는 존재가 되어서 참으로 곤란합니다.
사제들은 백성에게 주님의 뜻을 알려주고,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존재여야 합니다. 백성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그들은 대신해서 주님께 기도하고, 청하는 존재가 되어야 마땅합니다.
사목자는 매일 주님께서 건네시는 생명의 빵, 즉 말씀을 정성껏 봉독하고 공부합니다. 진지하게 묵상하고 풀이하여, 백성에게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사제는 백성에게 영원한 생명의 양식도 나누어 주어야 하지만, 동시에 지상의 빵·물질적인 빵도 골고루 분배해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지금 누가 너무 많은 빵을 지니고 있는지 파악해야 합니다. 그들을 잘 설득해서 내어놓게 해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 못 가진 이들이 어디 있는지 잘 살펴보고, 그들이 굶주리지 않도록 보살펴야겠습니다.
사도들이 가장 기본적으로 지니고 있어야 할 마음 자세 하나는 주님을 향한 절대적인 신뢰심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는 바처럼, 주님 앞에 불가능은 없습니다.
주님께 나아가서 그분께 간절히 청할 때, 절대로 빈손으로 돌아오는 법은 없습니다. 사제들은 우리 주님의 전지전능하심에 대한 강한 믿음의 소유자여야 합니다.
자신과 자신의 힘만 믿는 사도들에게는 죽었다 깨어나도 은총과 기적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자신은 언제나 부족한 존재임을 파악한 사제들, 주님의 권능을 굳게 믿는 사목자들, 나는 그저 나약한 한 피조물이요, 중재자라는 사실을 굳게 믿는 겸손한 봉사자의 삶에는 주님께서 베푸시는 놀라운 은총의 기적이 늘 함께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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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CPWk4gMPqS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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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를 잘하는 사람은 왜 잘 살까?>
저는 가끔 성가대 하시는 분들이 안 하시는 분들에 비해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것에 대해 생각해보곤 했습니다. ‘왜 찬미를 잘하는 사람이 잘 살까?’ 오늘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그 비밀에 대해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끔 선물을 주고도 마음이 헛헛하고, 무언가 베풀고도 괜히 손해 본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습니다. 분명 ‘주는 기쁨’이 더 크다고 배웠는데, 왜 우리의 나눔에는 이토록 씁쓸한 뒷맛이 남는 걸까요? 어쩌면 우리는 ‘주는 행위’와 ‘진짜 나눔’을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보상을 기대하며 주는 것은 진짜 주는 게 아닙니다.
마치 영화 ‘기생충’의 가족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더 나은 환경을 얻었지만 감사할 줄 몰랐습니다. 주는 척, 위하는 척하며 살았지만, 그 영혼의 본질은 주인의 것을 빨아먹고 사는 기생충이었을 뿐입니다. 감사와 찬미가 없는 삶은 결국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진짜 나눔이 무엇인지 온 삶으로 보여준 한 사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조선 시대 정조 임금 시절, 제주도에 김만덕이라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천민 중의 천민인 기녀의 신분으로 시작해, 온갖 역경을 딛고 마침내 제주 제일의 거상, 오늘날로 치면 여성 CEO가 된 입지전적인 인물입니다.
때는 1794년(정조 18년), 제주에 끔찍한 흉년이 들어 길거리에 굶어 죽는 시신들이 즐비했습니다. 바로 그때, 김만덕이 평생 모은 전 재산을 다 털어 육지에서 쌀을 사 와 도민들을 먹여 살립니다. 이 소식을 들은 정조 임금님이 너무나 기특해서 김만덕을 한양으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물었죠. “네 소원이 무엇이냐? 내 무엇이든 들어주겠다.”
자, 여러분이 김만덕이라면 무엇을 달라고 하시겠어요? 평생 먹고살 땅? 높은 벼슬? 저 같아도 귓속말로 ‘이번 새 책, 『사랑하는 조카들아, 이것만 읽고 냉담하면 안 되겠니?』 많이 팔리게 해 주세요…’라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김만덕의 대답은 모두의 예상을 완전히 뒤엎었습니다.
“소인에게는 한 가지 소원이 있사옵니다. 부디 금강산에 들어가 일만 이천 봉을 구경하게 해 주시옵소서.” 돈도, 벼슬도 아닌 금강산 유람이라니. 이게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그녀의 마음에는 ‘결핍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이미 자신이 가진 것에 감사하고, 그것을 나눌 수 있음에 기뻐하는 영혼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녀의 마음은 이미 풍요로웠기에, 나눔에 대한 보상으로 다시 물질을 채우려 하지 않았던 겁니다. 오히려 임금을 알현하고 금강산을 유람하는, 돈으로 살 수 없는 더 큰 명예와 기쁨을 얻게 되었죠.
저에게도 이 ‘결핍감’이라는 것이 가장 큰 영적 싸움이었습니다. 제 경우에는 ‘결혼하지 못한 것’에 대한 결핍감이 컸습니다. ‘나는 가정을 꾸리는 기쁨을 포기했으니, 주님께 더 많이 드리고 있고, 신자들에게 더 많이 희생하고 있다.’라는 생각이 마음 깊은 곳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는 말씀으로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은 이내 사그라졌습니다. 그러다 다시 피어난 때가 있었습니다.
어떤 피정에서 찬미를 할 때였습니다.
“갈 길 찾지 못하고 방황하던 우리들, 어둡고 캄캄한 곳에 갇혀 있던 우리들, 하느님이 어딨냐며 대들던 우리들, 알려고만 했을 뿐 느끼지 못했던 우리들. 하느님은 우리를 인도하시니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았네. 그 사랑 야훼께 모두 감사하여라, 우리에게 베푸신 기적들 모두 찬양하리니. 그 사랑 야훼께 모두 감사하여라, 기쁜 노래 부르며 감사하여라.”
이 가사들이 무심코 들어왔는데 그때 길 잃고 헤맬 때 빛을 보았던 것처럼 다시 빛을 본 느낌으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래서 찬미가 기도가 됩니다. 찬미로 느꼈던 그 충만함의 느낌. 그것이 바로 끊임없이 되풀이해야 하는 기도였습니다.
주님께서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억지로라도 성막을 짓고 매일 감사의 제사를 바치게 하신 이유를 알았습니다. 억지로라도 해야 합니다. 그 감사와 찬미라는 ‘영적 훈련’이 없다면, 한 번만으로는 사람이 변하지 않습니다. 그 결핍의 감정을 극복하고 감사의 감정을 끌어내는 데 찬미만큼 좋은 게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방금 사촌이자 동료였던 세례자 요한이 끔찍하게 참수당했다는 소식을 들으셨습니다. 인간적으로는 가장 큰 슬픔과 상실감에 빠져 계셨죠. 제자들은 어떻습니까? 수만 명의 군중을 앞에 두고 가진 것이라고는 고작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입니다.”(마태 14,17)라고 말합니다. 상황 전체가 ‘결핍’이라는 검은 천으로 뒤덮여 있습니다.
슬픔의 결핍, 물질의 결핍.
그런데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불평하거나 한탄하지 않으십니다. 그 보잘것없는 빵과 물고기를 받아 드시고는,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리십니다. 바로 이 지점입니다. 슬픔과 결핍의 한가운데서 터져 나온 ‘감사와 찬미’. 이것이 모든 것을 바꾸는 기적의 스위치였습니다. 예수님의 감사기도(에우카리스티아)가 없었다면, 빵 다섯 개는 그저 한두 명의 허기를 달래는 것으로 끝났을 겁니다. 그러나 감사와 찬미를 통해 하느님께 봉헌되었을 때, 그것은 모두를 배불리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나 남는 기적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이 찬미와 풍요의 법칙은 시대를 초월하여 나타납니다. 신자뿐 아니라 전 세계 모든 이들이 사랑하는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라는 노래가 있지요. 이 아름다운 찬미를 지은 존 뉴턴은 처음부터 거룩한 성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악명 높은 노예 상인이었습니다. 다른 이들을 착취하고 고통 속에 밀어 넣으며 살았던, 하느님의 뜻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던 사람이었죠.
그러나 그는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 위에서 극적으로 하느님의 놀라운 은총을 체험합니다. 자신의 끔찍한 죄를 눈물로 회개하자, 영혼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감사의 노래가 터져 나왔습니다. 그것이 바로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위대한 찬미가 된 것입니다. 유명해지려고 쓴 곡이 아니라, 구원받은 것에 대한 감사함이 흘러넘쳐 저절로 나온 찬미였고
그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 찾은 방법이었습니다.
우리를 가난하게 만드는 것은 텅 빈 지갑이 아니라, ‘결핍의 감정’ 바로 그것입니다. 찬미를 잘하는 사람이 잘 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찬미가 바로 감사의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결핍의 감정을 없애주기 때문입니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자신이 조건 없이 은총을 받았음을 알기에 조건 없이 나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감사하며 나눌 줄 아는 마음에 더 큰 축복을 부어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설거지할 때, 운전할 때 차 안에서 찬미를 틀어놓고 따라 불러 보십시오. 길을 걸을 때, 버스를 기다릴 때, 의미 없이 흘려보내던 자투리 시간을 찬미로 채워보는 겁니다. 완벽하게 부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저 작은 흥얼거림이, 낮은 읊조림이 우리 안에 있는 결핍의 소리를 잠재우고, 항상 내가 베푼 것의 수십 배의 풍요로움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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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동원 체제와 동행 체제’라는 주제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체제를 우리에게 보여 주셨는지 묵상하면서 강의 내용을 나누고 싶습니다. 오늘은 그런 관점에서 ‘동원 체제’와 ‘동행 체제’라는 사회 구조와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운동을 함께 알아 보고자 합니다. 동원 체제는 권력을 가진 누군가가 사람들을 위에서 아래로 끌고 가는 체제입니다. 명령이 있고, 복종이 있습니다. 사람은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여겨집니다. 과거 유대 사회에서도 존재했습니다. 제사장, 율법 학자, 바리사이들은 율법을 도구로 백성을 동원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죄인은 배제되어야 할 존재였습니다. 교회의 구조도 비슷한 면이 있었습니다. 교황, 주교,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로 이루어지는 피라미드 구조가 있었습니다. 이런 동원 체제는 데카르트, 칸트, 헤겔의 철학적 성찰로 동행 체제로 변화되었습니다. 신분과 세습으로 권력이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서 선출된 권력이 국민을 위해 권한을 행사는 것입니다.
2000년 전에 이미 동행 체제를 보여 주신 분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동행 체제는 함께 걷는 체제입니다. 사람을 존엄한 주체로 여기고, 결정에 함께 참여하게 하며, 길 위에서 서로 배우고 나누는 공동체를 이룹니다. 예수님은 동행 체제의 방식으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심판하지 않고 함께 식탁에 앉으시고, 함께 걸으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이 말씀은 강제 명령이 아니라, 초대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운동은 ‘동행 체제’입니다. 예수님께서 걸으신 길은 사람을 동원하는 길이 아니라, 사람과 함께 걷는 길이었습니다. 세리와 창녀, 병자, 죄인들과 함께 밥을 드셨습니다. 비유로 말씀하셨고, 사람들에게 스스로 깨닫게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위에서 강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 걸으며 열리는 길 위의 나라입니다.
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의 구조를 쇄신하려 하였습니다. 교회는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라고 선포하였습니다. 교회는 소공동체로 이루어진다고 선포하였습니다. 2차 바티칸 공의회는 동원 체제의 교회에서 동행 체제의 교회로 방향을 바꾸려고 하였습니다. 이 길은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길이었고, 초대교회 공동체가 함께 했던 길이었습니다. 서울 대교구는 ‘2000년대 복음화’라는 방향을 정하였고, 1990년부터 동원 체제 교회의 틀에서 동행 체제의 교회로 변화를 모색하였습니다. ‘지역, 말씀, 실천, 본당과의 연결’이라는 소공동체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복음 나누기 7단계를 시작하였습니다. 교우들이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말씀을, 공동체를 통해서 실천하려 하였습니다. 친교와 나눔이 공동체를 통해서 드러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모세는 하느님께 이렇게 탄식합니다. “제가 이 백성을 낳기라도 하였습니까? 어찌하여 저에게 그들을 품에 안고 가라 하십니까?” 모세는 백성을 동원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무게에 눌려 울부짖으며, 하느님께 함께 길을 찾자고 호소합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물고기 두 마리, 빵 다섯 개. 보잘것없는 것일지라도, 함께 내어놓을 때, 오천 명이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오늘 우리 교회의 사목과 공동체는 어떤 체제에 있을까요? 신자들을 동원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동행하고 있습니까? 사목자는 지휘자입니까? 아니면 벗이자 동반자입니까?
오늘은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프랑스의 한 작은 마을, 아르스의 본당 신부로 살아간 이 사제는 화려하지 않았습니다. 머리도 명석하지 않았고, 설교도 간결했으며, 가진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신부님은 매일 고해소에서 사람들과 함께 눈물 흘리며, 그들의 짐을 함께 나눴습니다. 신부님의 하느님 나라 운동 역시 ‘동원’이 아닌 ‘동행’이었습니다. 신부님은 사람들을 동원하지 않았습니다. 조용히, 그러나 확고하게 하느님을 향한 길을 함께 걸었습니다. 신부님이 진정한 사목자요 목자라 불리는 이유는, 교우들 위에 군림하지 않고, 교우들 곁에 머물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처럼, 성 비안네 신부님처럼, 함께 걷고, 함께 나누며, 함께 우는 교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바로 그 길 위에서 열립니다. 동원하지 말고, 동행해야 합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는 요청에 우리가 기쁨으로 응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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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요한 마리아 비안네 성인은 신학생 때 성적이 좋지 않았지만 1815년 어렵게 사제가 되어, 시골 마을 아르스로 발령을 받습니다. 성인은 아르스로 가는 길에 길을 잃었고, 그때 우연히 만난 목동에게 “네가 나에게 아르스까지 가는 길을 가르쳐 주면 나는 네게 하늘 나라로 가는 길을 가르쳐 주겠다.”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아르스에 도착해 보니 신자 대부분이 냉담하고 있었습니다. 당시는 프랑스 혁명 이후로 반가톨릭주의와 반성직 주의가 널리 퍼져, 거의 모든 이가 교회를 떠났었지요. 그러던 어느 밤 성인이 사제관에서 몰래 도망쳤는데, 예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시어 “너에게 맡겨진 저 많은 영혼은 어찌할 셈이냐?”라고 물으셨고, 그 물음을 들은 성인이 다시 본당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성인은 신자들에게 주일 미사에 나오라고 권하였고 묵주 기도를 바치며 종일 고해소에서 지냈습니다. 그러자 냉담하던 신자들이 회개하기 시작하였고, 유럽 전역에서 고해성사를 보려고 그를 찾아왔습니다. 특히 성인은 성체 신심이 강하여, 신자들에게 성체를 자주 모시라고 권고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 소개됩니다. 빵과 고기를 들어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떼어 나누어 주시는 장면은(마태 14,19 참조) 성찬 제정 이야기와(26,26 참조) 닮아 있습니다. 성체성사의 전형으로 풀이되는 이 이야기는 요한 마리아 비안네 성인의 삶을 거쳐 지금의 그리스도인들에게까지 전해집니다.
성인의 삶에 비추어 우리의 삶을 돌아봅니다. 성체 신심이 누구보다 강하였고, 두려움과 약함 가운데서도 삼위일체 하느님을 깊이 체험한 성인의 모습을 묵상합니다. 성인을 통하여 많은 이를 회개하도록 이끄신 하느님께서, 우리의 무뎌진 마음도 당신께 이끄시기를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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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4,13-21: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예수께서는 외딴곳으로 가셨다. 군중은 그분을 끝까지 따라간다.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16절) 제자들은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17절) 그들에게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었다. 예수님은 “그것들을 이리 가져오너라.”(18절) 하셨다. 빵과 물고기를 받으신 주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나누어 주셨다. 빵이 나눠지지 않았다면, 그 빵은 그 많은 군중을 먹일 수 없었다. 예수님은 이 기적으로 사랑의 실천, 서로 한 마음이 되어 모든 것을 함께 나눌 것을 가르치신다.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빵과 물고기를 주심으로써 그것을 누구나 똑같이 나누게 하신다. 빵이 사도들에게 주어졌고, 은총의 선물이 그들을 통해 분배될 것이다. 군중은 배불리 먹었다.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고 나서 남은 빵과 물고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으로 군중들은 만족하였고, 이제 이 말씀을 다른 민족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도록 열두 사도에게 거룩한 권능이 넉넉하게 남겨졌다. 제자들은 이 기적을 통하여 당신을 알아보아야 했다.
옛날 광야에서 주어진 만나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지금 역시 외딴곳에서 음식이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그분은 아낌없이 주셨다. 조그만 것을 가지고 많은 사람을 너끈히 먹이신 것은 옛날의 기적과 같다. 그때 이스라엘은 필요한 만큼 그것을 먹었고, 지금은 빵조각이 많이 남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가져가려 하지 않았다. 그때 빵과 물고기를 먹은 사람들은 장정만도 오천 명이나 되었다. 나눈 빵과 물고기로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사도들이 거둔 빵조각이 열두 광주리가 되었다. 이 빵은 이제 다른 사람들, 즉, 다른 민족들에게도 나누어질 수 있도록 사도들에게 풍성한 은총으로 돌아갔다. 우리 자신도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주님 앞에 내놓을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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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분께 드리니>
마태오 14,13-21 (오천 명을 먹이시다)
그때에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거기에서 배를 타시고 따로 외딴곳으로 물러가셨다. 그러나 여러 고을에서 그 소문을 듣고 군중이 육로로 그분을 따라나섰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 가운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습니다. 그러니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십시오.”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시니, 제자들이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것들을 이리 가져오너라.” 하시고는, 군중에게 풀밭에 자리를 잡으라고 지시하셨다. 그리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먹은 사람은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이었다.
<그분께 드리니>
“그것들을 이리 가져오너라.”(마태 14,18)
나
가진
한 그릇의 밥
그분께 드리니
그분께서
모든 이를
맛나게 먹이시네
나
가진
한 줌의 기쁨
그분께 드리니
그분께서
모든 이를
활짝 웃게 하시네
나
가진
한 모금의 시간
그분께 드리니
그분께서
모든 이를
넉넉하게 돌보시네
나
가진
한 가락의 눈길
그분께 드리니
그분께서
모든 이를
부드럽게 살피시네
나
가진
한 뼘의 손길
그분께 드리니
그분께서
모든 이를
정겹게 다독이시네
나
가진
한 올의 발길
그분께 드리니
그분께서
모든 이에게
살갑게 다가가시네
나
가진
한 옴큼의 마음
그분께 드리니
그분께서
모든 이를
따뜻하게 품으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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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은 우리에게 ‘살아갈 힘’을 주시는 분입니다.>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거기에서 배를 타시고 따로 외딴곳으로 물러가셨다. 그러나 여러 고을에서 그 소문을 듣고 군중이 육로로 그분을 따라나섰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 가운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습니다. 그러니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십시오.’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시니, 제자들이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것들을 이리 가져오너라.’ 하시고는, 군중에게 풀밭에 자리를 잡으라고 지시하셨다. 그리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먹은 사람은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이었다."(마태 14,13-21)
1) ‘빵의 기적’은, “예수님은 우리를 먹이시는 분”, 또는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력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드러낸 기적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느님 아버지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왔고 우리는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또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합니다."(1코린 8,6)
아버지 하느님은 우리를 존재하게 하시는 분이고, 성자 예수님은 우리를 살아가게 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력을 받아먹으면서 살고, 그 생명력의 힘으로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나아갑니다.
<이 말에 대해서, “믿음이 없는 사람들도 예수님 없이 잘 살기만 한다.”고 반박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현세의 인생’만 놓고 보면, 믿는 사람들과 안 믿는 사람들 사이에 별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내세, 하느님 나라, 구원, 영원한 생명을 안 믿거나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인생은 ‘죽음’을 향해서 가는 인생입니다. 그것은 결국 허무하게 끝나고 사라져버릴 ‘시한부 인생’일 뿐입니다.
반대로, 신앙인의 인생은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향해서 나아가는 인생입니다. 지금 이쪽 세상에서는 별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여도, 저쪽 세상에 가면 ‘허무’와 ‘영원’으로 갈라지게 될 것입니다. ‘허무하게 사라지는 인생’과 ‘영원한 생명을 얻어서 영원히 사는 인생’은 비교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2) 예수님은 바로 그 ‘영원’을 향해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일용할 양식’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고, 또 ‘말씀의 은총’과 ‘치유의 은총’을 통해서도 주십니다. 마태오복음에는 ‘빵의 기적’ 앞에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는 말만 있지만(14절), 마르코복음을 보면,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마르 6,34), 루카복음을 보면, “하느님 나라에 관하여 말씀해 주시고 필요한 이들에게는 병을 고쳐 주셨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루카 9,11)
세 복음을 합해서 생각하면, 예수님께서는 우선 먼저 병자들에게 ‘치유의 은총’을 주셨고, 그 다음에는 모여든 모든 사람들에게 ‘말씀의 은총’을 주셨고, 그러고 나서 ‘빵의 기적’으로 ‘일용할 양식의 은총’을 주셨습니다. 그 세 가지 은총은 모두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갈 힘’을 주는 은총입니다.
3)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는, “예수님은 우리에게 ‘살아갈 힘’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르니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마태 15,32)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이 말씀에서 ‘길’을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길에서 쓰러지다.’는, 믿음도 있고, 희망도 있지만, 힘이 부족해서 중간에 쓰러지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 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격려할 때 “조금만 더 힘을 내라.”라는 말을 흔히 사용하는데, 그 사람 ‘안에’ 남아 있는 힘이 하나도 없다면, 그런 말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안에’ 힘이 없다면, ‘밖에서’ 그 힘을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힘을 주시는 분입니다. 격려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실제로 그 힘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4) 16절의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라는 말씀은, 기적의 결과를 먼저 생각하면, “내가 먹을 것을 마련할 테니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는 내가 마련한 것을 그들에게 나누어 주어라.”로 해석됩니다. 제자들은(신앙인들은, 또는 교회는) 주님께서 주신 은총을 받아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임무를 받은 이들입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신앙인들은 우선 먼저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잘 받으려는 노력부터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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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권동성 폰시아노 신부님]
<작은 것을 나누고자 할 때 하느님께서 도구로 삼으심>
요한복음 사가는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빵을 많게 하신 기적 이야기를 전하면서 많은 군중이 예수를 따라갔다고 합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따른 것은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일으키는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군중은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을 바라보면서 예수님께 대한 저마다의 기대를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어떤 기대를 가지고 있었는지 생각해 봅니다.
우리 신앙인들 역시 예수님을 따라 나선 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왜 찾아 왔고, 예수님에게 어떤 기대를 걸고 있는지 생각해 봤으면 합니다.
군중은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을 체험한 후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러한 군중을 피해 혼자 산으로 물러가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활동에 대한 군중의 오해를 원하지 않으셨기에 군중을 떠나가십니다.
예수님의 활동은 현세적인 이익이나 성공이 아닌 하느님 나라의 선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역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그리스도교 신앙도 그러한 현세적인 이익이나 성공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것을 내어 주고, 보다 낮은 자가 되라고 요구합니다. 다시금 우리는 예수님을 왜 찾고, 그분을 섬기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빵을 많게 한 기적은 예수님 편에서 베풀어진 선물입니다. 누군가의 요청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이 당신이 하고자 하시는 일을 잘 아셨다고 전합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은 당황하게 됩니다.
마태오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고 전합니다. 그래서 그들 중의 병자를 고쳐주셨고, 하느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을 전하셨고, 이제 군중을 배불리 먹이고자 하십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청하기도 전에 미리 베풀어주시는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겪는 어려움과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당신 백성을 측은히 여기고 보살펴주시는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보리 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을 모았더니,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고 합니다. 하느님이 베풀어주시는 선물은 이처럼 풍성합니다. 모두가 함께 나누고도 남음이 있는 축복입니다. 하지만 ‘더 가지고자 하는 우리의 욕심’ 으로 인해 부족함이 발생합니다.
더 많이 가지고자 할수록 우리는 불행의 늪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지금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이, 지금 부족하다는 생각이 자신의 삶에 불만을 가져오게 합니다. 그러한 사람은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내가 더 가지고자 하면 누군가는 덜 가져야 합니다. 여기에서 폭력과 착취가 발생합니다. 그러한 곳에서는 이웃에 대한 사랑이 자리하지 못합니다. 이웃은 나의 이익을 위한 도구로 전락할 뿐입니다. 이제 나만의 불행이 아니라 이웃의 불행까지 초래하게 됩니다.
우리는 빵의 기적을 가능하게 한 또 하나의 실천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소년의 ‘내어놓음’이었습니다. 소년의 헌신, 작은 실천으로부터 시작된 예수님이 베품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가진 작은 것을 나누고자 할 때, 우리가 가진 것을 내어놓을 때, 그것이 비록 아무리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이라 해도 하느님께서는 큰 도구로 삼으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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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홍성만 미카엘 신부님]
<작은 봉헌이 예수님의 손을 거치면서 큰 축복으로 이어집니다>
오늘 복음의 배경입니다. 멀리 푸루른 갈릴래아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풀이 무성한 산등성이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자리하고 있습니다.
병자들을 고쳐주신 기적을 보았던 많은 사람들이 떼를 지어 구름처럼 밀려옵니다. 때는 뉘엿뉘엿 해가 지는 저녁이며 외딴곳이라고 마르코, 마태오, 루카 복음은 일러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몰려오는 군중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시원한 대답을 기다리지는 않으셨겠지만 그래도 무슨 말이 나올까 궁금하셨나 봅니다.
필립보가 대답합니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빵을 사다가 먹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대답입니다. 더군다나 이 외딴곳에서 말입니다.
우리가 봐도 '불가능하다'고 밖에 나올 수 없는 대답을 이미 알고 계실 예수님께서 왜 물어보셨을까? 성경은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라고 합니다.
곧이어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가 말합니다. "여기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마음속에 작정하시고 계셨던 일을 하십니다. 제자들에게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 하며 분부하십니다.
그리고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는 바로 그 빵을 손에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올리십니다. 이어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는 바로 그 물고기를 손에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올리십니다.
예수님 손에서 축성된 빵과 물고기는 오천명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나 남았습니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고 하찮게 여겨지던 아주 작은 봉헌이 예수님의 손을 거쳐 커다란 축복으로 이어집니다. 그렇습니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는 나의 하찮아 보이는 기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는 자그마한 희생과 봉사.
이러한 것이 예수님을 거치면서 나와 이웃에 대한 커다란 축복으로 이어집니다. 빵의 기적은 성체성사의 예표(豫表)입니다.
주님께 할애하는 나의 기도 시간, 자그마한 희생ㆍ봉사는 밀떡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화되듯, 이웃을 위한 축복으로 변화됩니다.
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리면서, 주님을 기억하면서 봉헌하는 나의 작은 희생과 봉사, 그리고 기도와 순종은 그 어느 때이고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화되어 나와 이웃의 평화와 위로의 양식이 됩니다.
이 평화와 위로의 양식은 수많은 사람들을 살리는 원천이 됩니다. 오늘도 주님의 살과 피로 변화될 작고 큰 봉헌을 실천하는 하루가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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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찬홍 야고보 신부님]
<감사히 먹겠습니다.>
며칠 전 좀 터프한 형제님께 ‘부부싸움 하다가 밥상을 엎어 본적이 있습니까?’라고 여쭤보았습니다. 저는 그분의 화끈한(?) 성격으로는 적어도 한두 번은 엎었으리라 생각했었는데, 그런 생각은 저의 편견이었습니다.
형제님께서는 ‘저는 아무리 화가 나도, 절대 밥상은 엎지 않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직접적인 표현을 하진 않았지만, 매일 먹는 음식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음식을 소중히 여기는 고귀한 마음이 있습니다.
매일 섭취하는 음식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있기 때문에, 음식을 함부로 다르지 않고, 또한 버리지 않습니다. ‘음식에 대해 고마워하지 않고, 무시하면 언젠가는 밥을 굶는 날이 올 것이다. 때문에 늘 음식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 는 생각이 우리 마음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음식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지니는 것!’ ‘비록, 내 손으로 수확한 음식이요, 내 노동력의 대가로 얻은 음식이라 하더라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대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녀야할 기본적인 자세요, 매 삶을 통해 기적을 체험하는 삶이 아닐까 합니다.
복음에 예수님께서 오병이어 기적을 베풉니다. 그런데, 단순하게 “빵아 많아지거라!” “물고기야! 숫자가 늘어나거라” 라는 말로써 기적을 행사하지 않습니다.
먼저, 빵과 물고기를 손에 들고 감사 기도를 드리신 후에, 제자들에게 주시고 사람들에게 나눠주라고 명하십니다.
하찮은 빵과 물고기이지만, 이런 음식을 내려주신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다시 하느님께 내어 드림으로써, 바로 기적이라는 놀라운 사건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매일 받아 모시는 성체를 통해서도 체험되는 사건입니다. 우리는 미사 때마다 예수님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빵과 포도주를 봉헌합니다.
이 빵과 포도주가 미사의 거룩한 성변화를 통해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화되고, 우리는 거룩하게 변화된 그것을 받아 모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빵과 포도주를 봉헌할 때, 단순하게 빵과 포도주만을 봉헌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빵과 물고기를 손에 들고 가사의 기도를 드리신 것처럼, 우리 역시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온 누리의 주 하느님 찬미 받으소서. 주님의 너그러우신 은혜로 저희가 땅을 일구어 얻은 이 빵을... 저희가 포도를 가꾸어 얻은 이 술을... 당신께 드리니 구원에 양식이... 음료가 되게 하소서.”
라는 감사 기도를 드린 후에 우리가 봉헌한 빵과 포도주는 예수님의 몸과 피가 되어 다시 우리에게로 되돌아오는 것입니다. 빵과 포도주는 우리의 노력, 결실, 정성을 의미합니다.
곧 우리는 미사 때마다 우리의 삶 전체를 봉헌하는 것입니다. 이런 봉헌과 함께, “당신과 함께 함으로 저희가 이렇게 살아갑니다. 오늘 이렇게 성당에 오게 되었습니다.”라는 감사 기도가 우리의 생명을 연장하고 삶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곧,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거룩한 축성으로 당신의 몸과 피로 변하는 기적을 체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진정 감사하는 마음이 없다면, 우리가 먹는 음식은 육신의 양식이 아니라, 배고픔을 없애는 것일 뿐입니다.
진정 감사하는 마음이 없다면, 우리가 미사를 통해 받아 모시는 성체는 예수님의 몸과 피가 아니라, 단순한 빵과 포도주의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에, 받아 모시는 예수님에 몸과 피에 진정 감사하는 마음이 없다면, 우리는 삶을 통해 기적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이라는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우리에게 이루신 하느님의 놀라운 업적에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는 것이, 바로 오늘날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이루시는 놀라운 기적이요, 우리가 체험해야할 오병이어 기적입니다.
문득, 방위병 훈련소에서 식사 전에 외쳤던 구호가 생각납니다.
“감사히 먹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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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자기 믿음을 따라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자기 믿음도 변하고 진화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마 어렸을 때,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의 존재를 모두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성인이 되어서도 그대로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18세기에 익사자는 엉덩이에 담배 연기를 불어 넣으면 소생한다고 믿었습니다. 또 대변을 치료 약으로, 즉 두통, 간질 등 모든 병의 만병통치약으로 믿었던 중세 시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누구도 이를 믿지 않습니다.
“나의 믿음을 버릴 수 없어.”라는 생각이 다른 믿음을 가진 사람과 싸우게 합니다. 그 상대를 미워하고 단죄합니다. 그러나 나의 믿음이 무조건 맞는 것이 아닐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많은 군중이 있었는데, 그들의 대부분은 병자였습니다. 당시 병은 죄의 결과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모든 이가 거부를 했습니다. 병자와 함께하면 자기에게도 그 더러움이 옮겨져서 부정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병자들에게 예수님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습니다. 그 병자들을 보면서 예수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모두 고쳐 주십니다. 인간의 고통에 깊이 공감하시며 치유하시는 주님의 큰 사랑입니다.
이렇게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치유된 이 사람은 보통 의사에게 무엇인가를 주고 싶지 않을까요? 병원에서라면 치료비를 낼 것입니다. 그런데 치유된 사람들은 예수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계속 무엇인가를 얻고 싶었나 봅니다. 그곳은 많은 사람이 모여야 하기에 외딴곳이었고, 그래서 먹을거리를 살 수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이 당연히 예수님 먹을거리라도 가져와야 할 것 같은데,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 14,16)
제자들은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게 하려는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이것이 맞는 답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시각은 그 이상의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일에 협력하도록, 그래서 가진 것이 적어도 내놓으라고 하시지요. 이것이 기적의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적은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시각에서 나오는 신념에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자비는 인간의 계산을 뛰어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늘 보여주셨던 겸손의 마음을 갖춰야 합니다. 하느님이면서도 인간의 육체를 취하고 가장 약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실제로는 약한 분이 아니시지요. 너무나 강한 분이시기에 겸손으로 약하게 보였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강함이 불가능할 것 같은 우리 모두의 구원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자기 믿음도 내려놓을 수 있는 겸손한 자만이 주님을 제대로 따를 수 있고 또 함께할 수 있습니다. 진짜 강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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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주님의 사랑은 찰찰 차고 넘쳐납니다>
오늘 우리는 그야말로 감격적인 사랑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그 사랑이 어떤 것인지는 제자들과 예수님의 태도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제자들은 모여든 많은 군중을 마치 좀 쉬고자 하는 것을 방해하는 훼방꾼 정도로 여긴지라, 예수님께 ‘여기는 외딴 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으니, 군중을 돌려보내시라.’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마태 14,14)에 단장의 아픔을 느끼십니다. 여기에는 바라보는 시선(관점)의 큰 차이가 있습니다. 곧 제자들은 ‘자기 중심’, 곧 자신의 처지에서 그들을 바라보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 중심’, 곧 상대의 처지에서 그들을 바라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분리되지 않는 연민의 마음을 지니신 까닭입니다. 곧 그들의 배고픔이 당신의 배고픔이요, 그들의 아픔이 곧 당신의 아픔이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저녁때가 되자,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십시오.”라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 14,16)고 이르십니다.
제자들은 자신이 가진 것을 지키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가진 것을 내어놓아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라고 하십니다. 가진 재물은 지켜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베풀어야 할 그 무엇인 까닭입니다. 제자들은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라고 있는 것마저 없는 것으로 말하며 무가치하고 하찮게 여기지만,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그것을 값지고 소중하게 여기시고 감사를 드리십니다. 그렇습니다. ‘있는 것을 보는 눈’은 감사의 눈이요, ‘없는 것을 보는 눈’은 불평의 눈임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있는 것’ 그것을 손에 드시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십니다.(마태 14,19 참조)
제자들은 예수님을 신뢰하지 못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신뢰하신 까닭입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찬미와 믿음을 통하여 아버지의 크나큰 사랑을 우리에게 드러내셨습니다. 이제 하느님의 사랑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건너오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는(마태 14,19) 행위를 통해 구체적으로 베풀어졌습니다.
이 믿음의 행위 속에서 하느님의 권능이 실현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마태 14,20) 그렇습니다. 당신의 사랑은 찰찰 차고 넘쳐납니다. 항상 너끈하게 차려진 밥상과 같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가엾이 보시는 마음으로 차린 밥상이요, 찬미로 차린 밥상이요, 아버지께 대한 믿음으로 차린 밥상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차고 넘치는 놀라운 사랑으로 ‘당신의 몸’을 건네 주십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차고 넘치는 이 사랑을 받아먹어야 할 일입니다. 이 놀라운 사랑을 찬미하며, 우리의 희망을 드려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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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 14,16)
주님!
제 몸과 생명을 제 것인 양, 독차지 하지 말게 하소서.
먹지 않고서는 못 살면서도 자신은 먹히지 않으려는 자애심과 이기심을 내려놓게 하소서.
제 몸이 찢어지고 나누어지고 쪼개지고 부수어져 타인 안에서 사라지게 하소서.
당신께서 그러하시듯, 제 자신을 양식으로 내어주게 하소서.
당신께서 저를 향하여 계시듯, 제가 늘 타인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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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동화와 육화를 하지 않는 나>
“예수께서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라온 많은 군중을 가엾이 보시어 병도 고쳐주시고 빵의 기적도 일으키시어 먹게 하십니다.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가엾은 마음에 대해 묵상해야겠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아마 가엾은 마음이 제게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겁니다.
제게 가엾은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있기는 있지만 전과 비교하면 지금 그 마음이 너무 부족하고, 주님과 비교하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부족한 것이 저입니다.
우선 가엾은 마음이 드는 사람, 즉 대상이 줄어들었습니다. 전에는 모든 사람을 가엾이 여겼습니다. 건방지다 싶을 정도로 모든 사람을 가엾이 보았고, 티브이에서 가엾은 사람들에 대한 프로그램을 즐겨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가엾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어떻게 그 많은 사람을 내가 다 보냐 하며 아예 보려 하지 않습니다.
두 번째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도 조금 아파합니다.
너무 마음이 아파하다가는 제가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기에 가여워하기는 하되 아파하는 마음이 저를 사로잡는 것은 허용치 않습니다.
그러나 전에는 가엾은 사람을 보면 그의 아픔이 그대로 저의 것이 되어 그를 위해 무엇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같이 아파했으며 정말로 오지랖 넓게 이 사람 저 사람 도우려 했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저의 마음이 좁아지고 쫄아들었을까요?
제가 저의 합리화의 이유로 자주 내세우는 것은
나이 먹어 힘이 떨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도울 힘이 떨어져 사랑도 졸아든 거라는 얘기지요.
그것도 사실이지만 오늘 생각해보니 그것만이 아닌 것 같습니다. 육화 또는 동화를 제가 하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언젠가 수녀님들을 만나 여러 가지 얘기를 나눴는데 제가 그 수녀원 총회 특강을 맡았기 때문입니다.
그분들과의 얘기를 통해서 선명하게 드러난 것은 개인주의화한 요즘 우리 사회의 부정적 현상이 수도회라고 예외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과거 집단주의적인 시대에는 나와 너, 나와 공동체의 분화가 이뤄지지 않아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동화의 삶을 살았는데, 오늘날 개인주의 시대의 우리는 <너는 너, 나는 나>가 너무도 확실합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 너무도 확실한 분화가 동화를 힘들게 하고, 동화를 하지 못하기에 육화도 못하는 것이 요즘 우리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굶주린 이들의 아픔은 그들 거라고 선 긋지 않으십니다. 당신의 것이고, 우리의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너희”가 바로 우리이고, 그리고 굶주린 이들이 바로 우리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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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마태14,20)
<가엾은 마음의 기적!>
오늘 복음(마태14,13-21)은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측은지심)을 드러내십니다. 그래서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군중에게 나누어주게 하시니 군중이 모두 배불리 먹었습니다.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고, 먹은 사람은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이나 되었습니다.
오늘은 '본당 사제들의 수호성인이신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신부님은 '프랑스 아르스의 시골 작은 본당'에서 평생을 겸손하고 가난한 사제로 사셨는데, 매년 여러 지역에서 많은 신자들이 신부님께 고해성사를 보러왔다고 합니다. 그 숫자가 매년 이만여 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가엾은 마음,(측은지심)은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더 낮은 곳으로, 더 가난한 곳으로, 더 큰 아픔이 있는 곳으로 향해 있었던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이 마음과 사랑'이 크고 작은 많은 기적들을 만들어냈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님도 예수님의 마음을 간직하셨고, 그래서 많은 신자들이 신부님께로 와서 영적으로 다시 살아나는 기적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합니다.
'가엾은 마음'이 기적을 만들어냅니다. 더 낮은 곳으로, 더 가난한 곳으로, 더 큰 아픔이 있는 곳으로 향해 있는 가엾은 마음(측은지심)이 기적을 만들어냅니다. 저는 이번에 '수해성금의 기적'을 통해서 이를 확인했습니다.
교회 안에 본당 사제들의 수호성인이신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님을 닮은 본당 신부님들이 많아지고, 또 예수님의 마음을 닮은 사제들, 수도자들, 신자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함께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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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마태 14, 16)
먹을 것과
나눌 것 사이에
배고픈 우리
이웃들이 있습니다.
먹을 것은 많아도
나눌 것이 없는
우리들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성체성사는
우리들 마음을
먼저 보게하십니다.
우리 안에 있는 것들이
실은 나누어야 할
주님의 것들입니다.
주님안에서는
빈곤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풍요로운 시작입니다.
먹이시고 입히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주님께 가져가고
주님께
내어드려야 할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결코 우리에게
올 수 없는 생명의
양식들입니다.
생명은 하늘을
향해야 합니다.
오늘도 생명을
나누어 주시고
생명을 배부르게
하시는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성체성사는
우리를 생명의
본질로
초대합니다.
생명의 본질은
언제나 사랑과
나눔입니다.
작은 사랑의 실천이
우리모두를
배부르게 하는 참된
신비임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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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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