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화동 산8반지는 마포구의 도화동에 있는 산꼭대기의 지번이다. 서남쪽으는 한강의 물결이
하염없이 서해로 흘러간다. 저 멀리에는 당인리 발전에서에서 하얀 연기가 모락 모락 올라오고
지금의 여의도로 들어가는 대교 부근에는 전철의 종점이 되어 전차들이 몇 대씩 대기하고 있
으며 ,은방울 자매의'마포종점'의 노래처럼, 여의도 섬에는 미루마무들이 바람결에 나브끼고 있
으며 가끔 여의도의 모래들이 바람에 휘날리어 바람과 함께 날리고 있다.
우리 집안은 이곳 마포의 산꼭대기에 서울 생활의 터전을 잡았다. 무허가 판자집,7십년대의 산꼭
대기에 우수죽순으로 들어서는 '판자집들' 아마도 서울시청이나 구청등에서는 하루가 다르게
산꼭대기에서 늘어나는 '판자집' 그리고 루핑집으로 늘어나는 집들이 골치가 아플것이다. 건물은
엄연히 행정기관의 건축허가를 받아 집을 짓고 준공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
7십년대의 농촌에서 가난하여 살수가 없어 야간열차를 타고 살아보기 위하여 서울로 서울로 모여
서울의 빈민촌을 형성하여 옹기 종기 살아 갈려고 하는 사람들이 전국에서 모여들고 있다. 거기게
나는 먼저 대학을 가기 위하여 상경을 하였고, 뒤이어서 나이많으신 부모님이 나주의 산골의 논.
밭을 정리를 하고 살림을 가지고 이사를 오셨다. 어머니께서 시집올때 가지고 오신 놋그릇 오강도
잘다듬어진 다듬이돌도 가지고 오셨다. 아버지는 괘짝에 족보를 잘챙겨서 가지고 오셨다 .
부모님들은 1902년생으,로 고스란히 일제강점기를 살아오신 강탈과 수탈 소작쟁이로 전락한 가
난하고 일제의 핍박을 받고 살아온 세대이다, 그래도 북간도로 살려고 가지는 않고 고향에서 가난
과 함께 동거동락을 하는 세대였다 그러나 교육열는 높아서 나를 고등학교까지 보내고 대학을 다
일형편도 못되는 가정에 서울로 대학을 가겠다고 상경한 아들이 있었다 . 유일한 기대를 걸고 가르
친 아들이다.
도화동 산꼭대기는 용산구 도원동의 철도길에서 올라올수가 있으며, 겨울철에 눈이 많이 오면 쓰레기
차가 올라 올수가 없어 산동데 사람들이 연탄재 쓰리기등이 산더미같이 쌓여서 구청에서 골치를
아픈 일거리들이다. 수도물은 공동수도로 아침일찍에 일아나야 물을 받아서 먹을 수가 있다. 아마도
이른새벽이 아니면 물도 받을수가 없고 공동수도 물이 시간제로 나온다. 화장실은 공동으로 마련되어
줄을 서서 화장실을 이용하여야 한다. 어머니는 노력형이시라 도로변에서 아이들을 상대로 뽑기장사
를 하여 몇푼씩 받곤 하셨다.
나는 한가정의 가장이 되어 노 부모님을 부양을 하여야 하고 ,다니던 대학교를 멈추고 누나가 이야기하여
인쇄소의 문선공으로 글자를 뽑는 노동자로 도시락을 싸 가지고 인쇄소로 츨근을 하여야 한다. 대학의
캠퍼스가 아니고 도서관이 아닌 인쇄소로 먹고 살기 위하여 .......계속
첫댓글 동구리님~
옛 추억을 더듬으면서
글로 나타 내셨네요
다음편이 기다려 집니다
마치 한 편의 소설을 읽는 거 같습니다.
전차 이야기를 보니
중학교1학년 때 청량리에서 전차를 타고 학교에 다녔던 생각이 나네요.
청량리에서 서대문 영천을 오가던 전차 였지요.
아버지께서 한전에 근무하셔서 1년 무료로 탈 수 있는 카드 같은 게 있었어요
동구리님 글 보면서~~
까마득한 전차로 통학하던 그 때를 추억해 봅니다.
영랑 생가에 핀 모란을 보며
두 번이나 그 댁을 답사했던게 옛일 되었습니다
옛 일을 수 놓듯이 펼쳐놓으신 글 잘 읽었습니다
지금은 동구리선배님께서 옛날에
사이던 도화동 꼭대기 판자존들이
전부 고급 아파트가 되었습니디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