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낙가산 보문사
보문사는
"차별없이 모두에게 골고루 덕화가 미치는 문(普門)"
"불보살이 갖가지 인연으로 여러 모습으로 나투어
중생을 구한다(普門示現)" 는 절 이름을 갖고 있다.
어느 해 정월 초하루에 일어난 일이다.
설을 맞아 육지에 사는 사람들이
섬에 사는 사람들을 찾아보려고
수 십명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오고 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겨우내 꽁꽁 얼었던 임진강이
갑자기 녹아 얼음덩이가 외포리 바다로 흘러내렸다.
배는 빙산에 밀려 먼 바다로 표류하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며칠,
추위와 굶주림은 날로 더하고
성난 파도는 더욱 거세게 뱃전을 때렸다.
죽음의 공포가 배안에 가득했다.
그 때 어느 사람이
"우리 모두 보문사에 계시는 관세음보살을 부르자"고 외쳤다.
사람들은 간절하게 관세음보살을 부르며 보문사를 향해 절을 했다.
그러자 홀연히 낯선 스님 한 분이 뱃머리에 나타나 얼음덩이를 밀어내고 노를 저었다.
배는 순식간에 보문사 앞바다에 이르렀다.
스님은 배에서 내리자 마자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승객들 중 다친 이는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한다.
관음성지 보문사는 특이하게도 영험있는 나한기도로 유명하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다.
신라 선덕여왕 9년(640) 4월의 일이다.
어느날 매음리에 살던 한 어부가 바다에 고기를 잡으러 갔다.
어부는 그물을 쳤다가 한참만에 걷어 올렸는데 고기는 없고
이상스럽게 생긴 돌들이 그물에 가득하였다.
어부는 그 돌들을 바다에 다시 던져 버리고
배를 저어 멀리 떨어진 곳에 가서 다시 그물을 쳤다.
한참 만에 어부는 그물을 걷어 올렸다.
그런데 놀랍게도 좀 전의 그 돌덩이들이 그대로 그물에 걸려 있었다.
놀란 어부는 황급히 그물을 바다에 털어 버리고 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그날 밤 어부는 꿈을 꾸었다.
해맑은 얼굴에 수려한 풍모를 한 노스님이 나타나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먼 천축국(天竺國)에서 왔느니라.
나를 포함한 스물 두 명의 성인이 배를 타고 이곳까지 왔다.
타고 온 돌배를 돌려보내고 물 속에 있다가 그대의 그물에 따라 올라왔는데
그대는 두 번씩이나 우리들을 넣어 버리더구나.
우리가 여기에 온 것은 무진(無盡) 법문과 중생의 복락을 성취하는 법을 전하기 위해서다.
마을 뒤 낙가산에 가보면 우리가 오래도록 편안하게 쉴 곳이 있으니
그곳으로 우리를 안내해 주기 바라노라.
이 인연과 공덕으로 그대의 후손들까지 길이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이어 노스님은 낙가산으로 어부를 인도, 보문사 앞에 있는 석굴을 보여 주었다.
스님은 이곳에 쉬게 해달라고 다시 이르고 바다로 사라졌다.
꿈에서 깨어난 어부는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배를 띄웠다.
어제 석상들을 던져 버린 곳에 그물을 쳤다.
조금 후 가슴을 조이며 걷어 올린 그물에는 어제의 석상 22위(位)가 고스란히 따라 올라 왔다.
어부는 정성스레 석상을 모시고 뭍으로 올라와 물로 깨끗이 씻고 꿈에 본 석굴로 향했다.
굴 앞에 다가서니 안에서 경 읽는 소리가 나고
은은한 향내음이 굴 밖으로 스며 나오고 있었다.
어부는 굴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굴 안은 마치 사람이 일부러 다듬은 것처럼 천연적으로 만들어진 좌대가 있었다.
좌대에 석상을 모시고 어부는 거듭거듭 절을 하면서 소원을 빌었다.
그날밤 노스님이 다시 어부의 꿈에 나타났다.
"그대의 수고로 장차 무수한 중생들이 복을 얻게 될 것이다.
그대에게 먼저 복을 줄 것이니 함부로 쓰지 말며,
악하고 삿된 마음을 일으키게 되면 곧 복을 걷어 들일 것이니라.
그대에게 효성이 지극하고 복덕을 갖춘 아들을 점지할 것이니라."
보문사와 관련된 또 다른 이야기이다.
보문사에는 고려 때 왕실에서 하사한 옥등이 있었다.
이 옥등은 석굴 법당의 안등으로 사용되었는데,
어느 날 청소를 하던 사미가 실수로 법당 바닥에 떨어뜨렸다.
등은 마치 칼로 자른 듯 두 조각으로 갈라지고 기름이 흘러내렸다.
사미승은 울면서 주지 스님에게 사실대로 고했다.
옥등은 절에서 소중히 여기던 것이었으므로 주지 스님도 깜짝 놀라
석굴 법당으로 뛰어 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어두워야 할 법당안이 환하게 밝았다.
의아하게 여긴 주지 스님은 불리 켜진 등을 만져 보았다. 바로 그 옥등이었다.
깨어졌던 옥동이 감쪽같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등에는 그전보다 더 많은 기름이 채워져 있었다고 전해진다.
보문사에 전하는 사지에 의하면
635년(신라 선덕여왕 4) 금강산 보덕굴에서 수행하던 회정(懷正) 선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스님이 이곳에 와서 산세를 살펴보니 인도의 보타낙가산과 비슷하여 절을 짓고
이름을 '보문', 산이름을 '낙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회정 선사는 옛 기록에는 전혀 행적이 보이지 않는다.
근대에 작성된 <유점사본말사지>에
'금강산 보덕굴을 고려 의종 10년(1156)에 회정 선사가 중창했다'는 내용이
회정 선사에 대한 유일한 기록이다.
옛 고려 조정에서는 보문사를 지키는데 적지 않은 공을 들였다고 한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고려 현종 1년(1095)에 중국 자은종(慈恩宗) 소속의 혜인(惠忍) 스님이
31인의 성인과 함께 낙가산의 성굴(聖窟)을 친견하고자 고려 조정에 간청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친견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만큼 신성시 하고 보호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들어 한때 쇠락의 길을 걷던 보문사는
1812년(순조 12) 홍봉장(洪鳳章)의 도움으로 이뤄진 대대적인 불사로
중흥의 기틀을 다진다.
1893년(고종 30)에는 명성왕후의 전교로 요사와 객실을 중건했고,
1920년에는 대원(大圓) 스님이 화주가 되어 관음전을 중건했다.
그 후 1928년 주지 선주(善周) 스님의 원력으로 마애관음보살상 조성불사가 이루어져
보문사는 명실 공히 전국적인 관음기도 도량으로 확고히 자리잡게 되었다.
이후에도 몇 차례의 개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법당, 관음전,종각,석실 등이 있다.
석실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굴 안에는 나한상이 봉안돼 있다.
석실 입구에는 세 개의 홍예문이 설치돼 있고,
동굴 안에는 21개소의 감실이 마련돼 있다.
석실 법당 좌측 위에 천 사람이 앉을 수 있다는 암반인 천인대가 있다.
길이 40m, 촉 5m의 위용을 자랑하는 천인대는 이 절 창건 당시 인도의 한 스님이
이 바위에 불상을 모시고 날아왔다는 전설이 있다.
마애관음보살상은 절에서 1km 가량 뒤쪽으로 올라간 절벽에 조성되어 있다.
높이 32척, 너비 11척인데, 각각 관음보살의 32응신(應身)과 11면(面)을 상징한다.
낙조에 붉게 물드는 보살상의 모습은 관음진신 바로 그것이다.
고해(苦海)에 허덕이는 중생을 어머니처럼 어루만져 주는
대비보살의 따뜻한 체온을 느낄 수 있다.
보살상을 덮고 있는 기묘한 형태의 눈썹바위는
보살상을 외호하는 천혜의 지붕으로 신비감마저 들게 한다.
마애관음보살좌상은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9호로 지정되어 있다.
보문사의 볼거리 중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향나무, 느티나무, 은행나무다.
수령(樹齡) 600년이 넘은 향나무는 석실과 범종각 사이에 있는 큰바위 틈에서 자라고 있다.
높이 32m, 둘레는 굵은 곳이 2.8m이며 인천광역시 지방기념물 제17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 외에도 많은 나무와 성보문화재들이 보문사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