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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경전연구회 임제록 강좌 제3강 -3(2009.07.06)
10-7 演若達多(연야달다)의 얼굴
大德(대덕)아 時光可惜(시광가석)이어늘 祗擬傍家波波地(지의방가파파지)에 學禪學道(학선학도)하며
認名認句(인명인구)하며 求佛求祖(구불구조)하며 求善知識意度(구선지식의탁)이로다.
莫錯(막착)하라 道流(도류)야 儞祇有一箇父母(이지유일개부모)어니
更求何物(갱구하물)고 儞自返照看(이자반조간)하라
古人云(고인운), 演若達多失却頭(연약달다실각두)라가 求心歇處卽無事(구심헐처즉무사)로다
大德(대덕)아 且要平常(지요평상)인댄 莫作模樣 (막작모양)하라 有一般不識好惡禿奴(유일반불식호오독노)하야
便卽見神見鬼(변즉견신견귀)하며 指東劃西(지동획서)하며 好晴好雨(호청호우)하나니
如是之流(여시지류)는 盡須抵債(진수저채)하야 向閻老前(향염노전)하야 呑熱鐵丸有日(탄열철환유일)이니라
好人家男女(호인가남녀)가 被這一般野狐精魅所着(피자일반야호정매소착)하야
便卽捏怪(변즉날괴)하니 瞎屢生(할루생)이여 索飯錢有日在(색반전유일재)로다
연야달다의 얼굴이라,
이건 능엄경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임제 스님의 그 법문은 간단합니다. 핵심이 뭔고 하면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 현재 말하고 말을 듣는 바로 그 사실, 그 사람에게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그 외의 것은 전부 가짜고 지어낸 것이고 뭐 따지고 보면 허위고 그림자고 꿈이다 그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그런 것에 외적인 그런 상황으로 너무 그렇게 팔려 다니지 말라, 팔려 다니면은 진정한 자기 자신을, 무위진인을 망각하게 된다. 그거 망각하고 나면은 그만 정말 귀신에 덮어 씌인 것 같이 돼 버리고 무단히 돈 사람이 돼 버리는 그런 상황이다 하는 것입니다. 연야달다도 결국 그런 이야긴데.
大德(대덕)이여 時光(시광)을 可惜(가석)이니 시광, 시간을 가히 아껴야 하거늘
祗擬傍家波波地(지의방가파파지)에, 다만 옆집으로 부산하게, 파파지라고 하는 것은 아주 부산하게,
學禪學道(학선학도), 禪도 배우고 道도 배운다 하며 또 認名認句(인명인구), 이름을 명사들을 알고, 또 구절을 알려고 하며, 求佛求祖(구불구조), 그런 것을 통해서 부처를 구하고 조사를 구하며, 또 求善知識(구선지식), 선지식을 구해서, 意度(의탁), 생각으로 헤아림이로다. 그리들 한다 이거요. 지금 불교 공부라는 게 대개 그렇죠. 거의 뭐 99 프로가 그렇게 해서 불교 공부를 하는 것인데
莫錯(막착)하라, 착각하지 마라. 道流(도류)야. 儞祇有一箇父母(이지유일개부모)하니, 우리에게는 다만 일개 부모가 있다. 이게 뭔 말인고 하니 청법저인, 무위진인, 지금 보고 듣고 하는 바로 그 사람이 있다 이 말이여. 그걸 두고 하는 소립니다. 그게 유교적인 관점에서 부모라고 하는 것은 제일 큰 의지처고 기둥이고 전부입니다.
왜냐, 忠孝거든요. 벼슬 나간 사람은 나라에 충성하는 게 생명보다 더 중요한 일로 알고 그 외 모든 백성들은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그냥 제일 큰 과제고 그것이 생명이고 그것이 그냥 평생 할 일입니다. 우리 나라도 그 유교적인 관습 때문에 그런 것을 볼 수가 있어요. 그래서 이제 시골에서 부모들의 그 묘를 오랫동안 그냥 지켜야 하기 때문에 시골을 떠나지 못하고 하는 그런 사례들도 많이 보는데. 그래서 부모라고 하는 것은 서민들에게는 뭐 이 세상이고 이 우주고 나의 기둥이고 나의 전부가 그저 부모입니다. 그런 뜻이에요, 여기서는. 그대들에게는 다만 일개 부모가 있다. 말하자면 나의 기둥, 청법저인, 무위진인, 보고 듣는 그 사람, 그 사람이 있으니
更求何物(갱구하물)고, 다시 무슨 물건을 구하겠는가. 儞自返照看(이자반조간)하라, 그대들은 스스로 반조해서 보라, 한번 돌이켜 보라.
고인이 말하기를, 演若達多失却頭(연야달다실각두)라가, 연야달다가 머리를 잃어버렸다가, 求心歇處卽無事(구심헐처즉무사)로다, 구하는 마음, 머리를 구하는 마음을 쉰 곳에, 그 마음이 쉬어버리니까 곧 아무 일이 없었다, 그 말입니다. 참 이 한 마디를 능엄경 四권에 있는 내용을 게송으로 이렇게 간단하게 표현을 했습니다. 참 좋죠. 演若達多失却頭(연야달다실각두)라가 求心歇處(구심헐처), 구하는 마음이 쉬는 곳에서 곧 아무 일이 없더라.
연야달다가 어느 날 아침에 이제 일어나 가지고, 실라벌성에 사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실라벌성에 사는데 어느 날 아침에 이렇게 일어나 가지고 거울을 이렇게 보다가 거울에 보니까 아주 그 잘 생긴 그런 얼굴이 하나 있거든요. 그런데 그 얼굴을 보고 왜 나는, 내 머리는 어디 갔는가, 내 얼굴은 어디 갔는가, 내 머리는 어디 갔는가, 이런 생각을 문득 하게 된거요. 그게 이제 정신이 약간 이상하게 된거죠. 한 순간. 그래 가지고 아무 그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무슨 약을 잘못 먹은 것도 아닌데 그래 가지고 그만 온 데 미쳐서 돌아다니면서 내 머리 못 봤는가 내 머리 못 봤는가 이제 그렇게 하는 거요. 그런 사건이 있었어요, 실지로, 실라벌성에.
이 사람은 뭣 때문에 그렇게 아무 까닭없이 돌아다니는가. 말하자면은 그렇게 돌아다니는데 여기 이제 말은 그거에요. 그런데 사실은 머리를 잃어버린 게 아니잖아요. 문득 거울을 보다가 거울에는 아주 어여쁜 얼굴이 있는데 왜 내 얼굴은 어디 갔는가. 그렇게 생각할 까닭이 아닌데 그렇게 생각한 데서 뭐 정신이 약간 착각을 일으킬려니까 그렇게 된 거예요, 사실은. 그래서 머리를 구하려고 자기 얼굴을 자기 머리를 구하려고 찾을려고 온 동네 방네 돌아다니면서 구했는데, 어느 날, 몇 날 몇 일 돌아다니다가 어느 날, 어떤 사람이, 모두 다 ‘저 미친 사람’, ‘저 미친 사람’ 만 했지 그 사람을 깨우쳐 줄려고 생각을 못했는데 마침 어떤 사람이 아, 네 머리는 네 목 위에 그대로 있다, 아무도 누가 가져간 사람도 없고 뭐 전혀 손상도 없고 그대로 네 머리는 네 목 위에 그렇게 있다, 네가 한번 만져봐라. 그렇게 누가 용기를 내서 가르쳐 줬어요. 그러니까 떡 만져보니 있거든.
그래서 다시는 구하는 마음이 쉬어 버렸어. 더 이상 구할 필요가 없는 거야. 왜냐, 있으니까 구할 필요가 없지. 그래 求心歇處卽無(구심헐처즉무)여, 그러면은 아무 일이 없어져 버린 거죠. 야, 내 머리가 이렇게 있는 것을, 아무 탈 없이 있는 것을, 하고는 머리 찾던 일이 그만 멈춰진 거요, 스톱된 거라. 찾을 필요가 없어져 버린 거지.
그와 같이 우리가 수행을 한다, 참선을 한다, 도를 닦는다, 무슨 성불을 한다, 조사가 된다 하는 그런 어떤, 희망을 가지고 부단히 노력하는 그것이 부디 밖을 향하지 않고 정말 내면으로 내면으로 자기 자신을 返照看(반조간)하라 했잖아. 이자반조간하라, 스스로를 반조해 보아라 하는 반조하는 그것 뿐이지, 달리 딴 데서 구해지는 것은 아니다. 더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더 장엄되어지는 것도 아니고 더 보강되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야말로 부증불감이거든요.
그 존재는 부증불감이요 불생불멸이고. 그래 그 사실을 아는 것 뿐입니다, 부처라고 하는 것은. 그 사실 아는 거지 조금도 무슨 뭐 장엄을 하거나 더 보태거나 꾸미거나 그런 사실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원래 완전무결하게 존재하는 그것을 그런 것인 줄로 아는 것.
大德(대덕)아 且要平常(지요평상)인댄, 다만 평상이기를 요할진댄, 그냥 평상심 대로 살기를 요할진댄, 莫作模樣(막작모양)하라, 모양을 짓지 마라. 형식 짓지 마라 이거여. 억지 쓰지 말라.
有一般不識好惡禿奴(유일반불식호오독노)하야, 好惡, 좋고 나쁜 것을, 不識, 알지 못하는 머리 깎은 종, 이거는 중들, 이런 뜻입니다. 좋고 나쁜 것을 알지 못하는 머리 깎은 중들이 있어서, 便卽見神見鬼(변즉견신견귀), 곧바로 神을 보고 鬼를 보며, 指東劃西(지동획서), 동쪽을 가리키고 서쪽을 그으며, 好晴好雨(호청호우)하나니, 무슨 맑은 날이 좋느니 비오는 날이 좋느니 하나니.
이건 뭔 말인고 하니 무슨 수다원이다 사다함이다 아나함이다 아라한이다 십신, 십주, 십행, 십회향이다, 열반이다 보리다, 뭐 벽지불이다 성문 연각이다, 극락이다 지옥이다, 뭐 참선이다 염불이다 주력이다 다라니다 간경이다… 일체 그런 방편들을 말하자면은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귀신도 보고 東을 긋고 西를 그으며 동쪽을 가리키기도 하고 맑은 것이 좋다 비오는 것이 좋다… 그렇지 않습니까. 경전마다, 경전마다 그냥 이 경이 최고라고 하거든요.
그러니까 이걸 잘 모르면은 참 헷갈리고 초보자들이 정말 어려움을 많이 겪어요. 신심은 있는데 이게 어떻게 할 바를 모르는 거라. 누군 기도가 좋다 하고 어딜 가니까 그저 천도만 계속 권하는 데도 있어 천도만. 천도 몇 번 했느니 몇 번 했느니 그걸 자랑으로 하는 절도 있어요. 그래 뭐 사경을 얼마나 했느니 뭐 독경을 얼마나 했느니 또 어디 가니까 무슨 아비라 기도가 좋다 하고 어디는 가니까 무슨 뭐 능엄주가 좋다 하고 아니야, 대다라니, 그게 천수경에 있는 대다라니가 좋아. 아이 그런 소리 하지 마라고, 저 티베트에 가면은 옴 마니 반메 훔 만 하는데 그게 최고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느냐고. 아이 그거보다 더 할배가 있는데 그건 뭔고하니 광명진언이라고… (대중웃음).
이게 이제 見神見鬼 指東劃西 好晴好雨여. 이 임제 스님의 표현 방식은요, 참 이렇습니다. 내가 이걸 부연해서 설명 안 하면 못 알아 듣겠죠, 뭔 소린지. 요즘은 또 거기다가 비파사나까지 들어와 가지고 저기 뭐 미얀마에 가 가지고 공부하고는 와 가지고 미얀마 수련원까지 차려 놓고 안 그래도 간화선도 지금 복잡하고 어려운데 그거까지 들어와 가지고는 그게 좋다고 거기 또 껌벅 넘어간다 그냥. 전부 이게 지동획서하고 호청호우하는 짓이지 별 거 아녜요.
그러니까 우리 프로들은 전체를 다 이렇게 살펴서 알아가지고, 아주 철저히 알 필요까진 없어요. 대강만 알아가지고도 다 이렇게 전체를 관망하는, 내려다 보는 그런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래 가지고 신도들이 예를 들어서 뭐 이런 사람도 오고 저런 사람도 오는데 그런 사람들을 다치지 않게 그 근기와 그 수준에 맞게 잘 인도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그래요, 지동획서, 견신견귀하고 지동획서하고 호청호우하는 그런 상황이 돼 있거든요.
그런데 정말 올곧은 선불교의 정신 입장에 있어서는, 如是之流(여시지류)는 盡須抵債(진수저채)하야, 이와 같은 종류는 전부 다 뭐라고? 전부 빚을 짊어져 가지고서
向閻老前(향염노전), 염라대왕 앞에 가 가지고서는 呑熱鐵丸有日(탄열철환유일)이니라, 뜨거운 철환, 뜨거운 철방울, 철 덩어리를 삼키는 날이 있을 것이다. 삼킬 날. 그러니까 괴상망측하게 사람들이 돼 가지고는 그러니까 나중에 제대로 눈도 뜨지 못해 놓으니까 염라대왕 앞에 가 가지고 이제 지옥 고통을 받을 날이 있을 것이다, 그런 뜻입니다.
好人家男女(호인가남녀)가, 멀쩡한 인가 남녀, 남녀가, 被這一般野狐精魅所着(피자일반야호정매소착)하야, 여긴 이제 뭐 신도들도 그런 경우가 많고 수행자라 하더라도 어찌 보면은 어디 한 곳에 치우친 사람들은, 치우쳐 있는 사람들은 사실 그래요. 野狐精魅所着(야호정매소착)이라, 여우 귀신을 뒤집어 쓴 게 되는 거죠. 야호정매소착, 여우 귀신을 뒤집어 쓴 것이 돼서.
便卽捏怪 (변즉날괴)라, 그거 우습지도 않죠. 전체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어디 한 곳에 치우쳐 가지고 거기에 목을 매는 사람들, 정말 그건 우습지도 않아요. 여우의 귀신에 뒤집어 씌어진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받습니다, 사실 보면요. 또 신심은 있어 가지고는 하~ 열의는 대단하거든요. 그래 남의 말이 귀에 들어 가지도 않고, 그런 수가 있습니다. 사람을 정상으로 만들어 주는 게 이게 급한 일입니다. 정상적인 사람을 만들어 줘야 돼. 아주 상식적인 사람을 만들어 줘야 됩니다. 그래 가지고 변즉날괴라, 날은 누를 捏 자 괴이할 怪 자 잖아요. 아주 괴상망측하게 돼 가지고 사람이 정상이 아니고 정신이 괴상망측하게 되나니.
瞎屢生(할루생)이여, 눈 먼 이들이여. 索飯錢有日在(색반전유일재)로다, 밥값을 찾을 날이 있을 것이다. 밥값을 갚을 날이 있을 것이다, 이 말이여. 아주 뭐 법문이 참 시원 시원하고 그러면서 오늘날의 어수선한 우리의 불교의 전반을 확 그냥 추리고 깨끗하게 정리하는 그런 그 입장입니다. 프로들은 이런 입장을 알고 있어야 돼요. 알고 있고 또 어쩔 수 없이 여러 가지 방편이 또 있으니까 방편에 걸려 있는 사람들을 잘, 아주 그 딴 길로 빠지지 않도록, 또 불교를 믿어 가지고 도리어 이상하게 되지 않도록, 정신 이상이 되지 않도록 바로 잡아 주는 거, 이게 참 필요합니다.
그 사람에게 실망을 줘도 좋아요. 바로 잡아 주는 데는 실망을 줘야 됩니다, 실망을. 대개 빠져 있는 사람은, 그게 아니다, 꼭 이것은 이렇게 우리가 정리해야 할 그런 정신 세계다, 그렇게 하면 그 사람 실망하거든요. 실망하게 해야 돼요. 실망을 해야 한 계단 높이 올라가고 눈을 뜨게 됩니다. 그 사람 실망하는 게 참 미안해 가지고 바른 소리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보면은. 실망하더라도 바른 소리를 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게 오히려 그 사람은 실망하고 가지마는 나중에 가서는 그 사람에게 실제로 이익이 있습니다.
11 四照用(사조용)
示衆云(시중운), 我有時先照後用(아유시선조후용)하며 有時先用後照(유시선용후조)하고
有時照用同時(유시조용동시)하며 有時照用不同時(유시조용부동시)니라
先照後用(선조후용)은 有人在(유인재)요 先用後照(선용후조)는 有法在(유법재)요
照用同時(조용동시)는 駈耕夫之牛(구경부지우)하며 奪飢人之食(탈기인지식)이니
敲骨取髓(고골취수)하고 痛下鍼錐(통하침추)요
照用不同時(조용부동시)는 有問有答(유문유답)하며 立賓立主(입빈입주)하야
合水和泥(합수화니)하야 應機接物(응기접물)이니
若是過量人(약시과량인)인댄 向未擧已前(향미거이전)하야
撩起便行(요기변행)이라 猶較些子(유교사자)니라
示衆云(시중운),
이 四照用(사조용) 했는데 이건 어떤 임제록에는 안 나와 있어요. 안 나와 있는 임제록도 있는데 여기 서문에 보면은 照用同時는.. 하는 그런 말이 있기 때문에 이게 이제 들어 있는 게 옳습니다.
대중에게 보여 말하대, 我有時先照後用(아유시선조후용)하며 내가 有時(유시)에는 어떤 때는 先照後用, 먼저 비추고 뒤에 작용한다. 조는 비출 照 자니까 떠억 이렇게 바라 보는 거요. 그리고 보고 나서 판단하고는 거기에 뭔가 미끼를 떠억 던져 준다든지 말을 한마디 건다든지 하는 것이 用입니다.
또 有時에는 先用後照(선용후조)라, 먼저 작용을 이제 보이는 거야. 그리고는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살피는 것, 그게 後照입니다.
또 有時에는 照用同時(조용동시)라, 照와 用을 동시에 하는 거요. 이렇게 그 사람을 꿰뚫어 보면서 작용을 같이 동시에 하는 거다.
또 有時에는 照用不同時(조용부동시)다 그랬어요. 어떤 때는 照와 用을 다른 때 한다 그랬어요. 그러니까 이제 여기 설명이라.
先照後用(선조후용)은 有人在(유인재)요, 먼저 비추고 뒤에 작용하는 것은 사람을 두는 것이고, 사람을 두는 것이고. 요건 이제 주관, 주관을 살려 놓는 것이고
그 다음에 先用後照(선용후조), 먼저 작용하고 뒤에 비추는 것은 有法在(유법재)요, 법이라고 하는 건, 人, 法할 때는 법이 객관이고 인이 주관이 되는 거에요. 객관을 두는 것이고.
그 다음에 照用同時(조용동시), 조용동시 이게 이제 어려운 건데 조용동시와 조용부동시. 조용을 동시에 한다, 이거는 아주 차원이 높은 것이라 아주 매정하기 이를 데 없는 그런 표현인데 사람을 말하자면은 가르친다든지 법을 써서 그를 깨우치게 하는 그런 한 방법이죠 이게. 모두가 다.
照用同時는 駈耕夫之牛(구경부지우)라 그랬어요. 耕夫라고 하는, 밭 가는 농부의 소를, 駈, 몰고 가버려. 밭 가는 농부의 소를 빼앗아 가버리면 이건 어떻게 됩니까, 몰고 가버리면. 농부는 소가 있어야 되는데. 뭐 정말 큰일 날 일이죠. 그리고 奪飢人之食(탈기인지식)이라, 배고픈 사람의 밥을 빼앗아 버리는 거라. 지금 막 배가 고파서 밥 한 그릇 얻어 가지고 밥을 먹을려고 하는 판인데 그걸 빼앗아 버리니까 완전히 부정 당하는 겁니다. 둘 다 부정당하는 것인데 어떻게 보면은 이것이 진정 사람을 살리는 그런 그 이면이 깔려 있습니다. 그러니까 밭 가는 농부의 소를 몰고 가버리고 배고픈 사람의 밥을 빼앗는 거. 경우가 같죠, 이게, 두 개가 같은 경우인데 이것은 부정하는 것이 이면에는 긍정이 깔려져 있고
그래서 이제 敲骨取髓(고골취수)하고 痛下鍼錐(통하침추)라, 이래야 뭔가 어떤 충격이 가고 그 충격을 통해서 깨우침이 있을 수 있는 거라. 그래서 이제 그런 표현으로서 敲骨取髓(고골취수)여, 뼈를 두드려 가지고 골수를 뽑아 내고, 또 痛下鍼錐(통하침추), 아픈 데다가, 아픈 데다가 거기다 또 이제 침을 갖다가 꽂는 거요. 아프기만 해도 그게 무슨 부드러운 솜도 대기 어려운데 거기다 침을 갖다 꽂는 그런 격이다.
그 다음에 照用不同時(조용부동시)는, 조와 용이 다른 때라고 하는 것은, 有問有答(유문유답)하며, 질문이 있으면 답도 있고, 또 손을, 나그네를 세우기도 하고 주인을 세우기도 한다. 그래서 모든 것이 말하자면 순리대로 또 근기에 맞춰서 중생 교화하는 것을 조용부동시다, 이렇게 표현하는데
그 다음에 合水和泥(합수화니), 이렇게 했잖아요.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질려면은 물에도 들어가, 그게 합수여. 또 진흙에 빠진 사람 건질려면 진흙하고 和해, 한덩이가 된다 이거여. 진흙하고도 화하고 물에도 들어간다. 應機接物(응기접물)이여, 근기에 맞춰가지고서 중생을 提接(제접)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경우 따라서 이렇게도 제도하고 저렇게도 제도하고, 저기는 이제, 조용동시는 아주 그 철저히 상대를 부정해 버리는 그런 입장으로서 사람을 살리고 네 번째 조용부동시는 이건 아주 뭐 부처님의 그런 자비가 녹아나는 그런 어떤 입장이라고 할 수가 있고
만약에 過量人(과량인), 아주 근기가 특출한 사람이라면은 向未擧已前(향미거이전)하야, 未擧已前, 뭐라고 법문을 거론하기 이전을 향해 가지고서
撩起便行(요기변행)이라, 후닥닥 일어나 가지고, 撩起라고 하는 건 그런 뜻입니다. 후닥닥 일어나가지고 곧 가버린다. 선승들은 법거량엔 그런 게 더러 많죠. 그래야 그 사람은 그런 猶較些子(유교사자)다, 겨우 조금 비슷한 점이 있다, 뭐 한 오중 쯤은 된다, 이렇게 이제 표현한 것입니다. 그게 과량인이라면은 이제 그렇게 해야 그 사람에게 어울린다 그런 뜻이죠.
12- 1 貴人(귀인)
師示衆云(사시중운), 道流(도류)야 切要求取眞正見解(절요구취진정견해)하야
向天下橫行(향천하횡행)하야 免被這一般精魅惑亂(면피자일반정매혹란)이니라
無事是貴人(무사시귀인)이니 但莫造作(단막조작)이요 祇是平常(지시평상)이라
儞擬向外(이의향외)하야 傍家求過(방가구과)하야 覓脚手錯了也(멱각수착료야)로다
祇擬求佛(지의구불)하니 佛是名句(불시명구)니라 儞還識馳求底麽(이환식치구저마)아
三世十方佛祖出來(삼세시방불조출래)는 也祇爲求法(야지위구법)이요
如今參學道流(여금참학도류)도 也祇爲求法(야지위구법)이라
得法始了(득법시료)요 未得依前輪廻五道(미득의전윤회오도)니라
云何是法(운하시법)고 法者是心法(법자시심법)이니
心法無形(심법무형)하야 通貫十方(통관시방)하야 目前現用(목전현용)이언마는
人信不及(인신불급)하고 便乃認名認句(변내인명인구)하야
向文字中求(향문자중구)하야 意度佛法(의탁불법)하니 天地縣殊(천지현수)로다
그 다음 貴人(귀인)이라 그랬어요.
師示衆云(사시중운), 師가 대중에게 고해 말하대, 道流(도류)야, 切要(절요), 간절히 요구되는 것은, 求取眞正見解(구취진정견해), 眞正見解, 참되고 올바른 견해를 구취해서, 求하고 取해서, 向天下橫行(향천하횡행), 천하를 향해서 횡행해야 된다. 마음대로 돌아다녀. 진정 견해만 얻으면은, 소견만 바로 섰다면은 뭐 어디가도 겁날 게 없다 이거야. 그게 천하횡행입니다.
그래서 免被這一般野狐精魅惑亂(면피자일반야호정매혹란), 그 여우의 어떤 귀신에 뒤덮혀 가지고 미혹을 당하는 그런 것을 면하게 된다. 無事是貴人(무사시귀인)이라, 일 없는 사람이 귀한 사람이다. 진정 견해라는 게 임제 스님께서 아주 자주 말씀하시는데 또 正見이라고도 하고요, 바로 이런 점입니다.
無事是貴人이니 但莫造作(단막조작)이요, 다만 조작하지 말 것이요, 祇是平常(지시평상)이라, 다만 평상할 따름이다.
儞擬向外(이의향외)하야, 그대가 밖을 향해서 傍家求過(방가구과), 옆집으로 구하려고, 여긴 求過, 허물을 구한다는 것도 아니고 그냥 구한다는 뜻입니다. 옆집으로 구할려고 해서. 覓脚手錯了也(멱각수착료야)로다. 이건 이제 脚手(각수)라고 하는 것은 방법이에요. 멱각수착요야라, 방법과 수단을 찾아봐야 잘못 돼 버려, 錯了也라, 그르쳐 버린다. 옆집을 향해서 구하려고 해 봐야 그건 안 맞는 말이다. 뭐 앞에 여러번 나왔죠.
祇擬求佛(지의구불)하나 佛是名句(불시명구)다. 그런 식으로 다만 부처를 구하려고 하지마는 그런 부처는 이름과 글귀일 뿐이다. 그저 경전에 기록돼 있는 이름과 글귀일 뿐이다. 진짜 살아 있는 부처님 아니다 이거여. 진짜 살아 있는 부처는 그렇게 구하는 그 놈이다. 저 앞에도 있었죠. 오대산에는 문수보살이 없다. 문수보살을 찾아가는 너야말로 진짜 살아 있는 문수다. 뒤에 나오나? 그런 말, 그야말로 관음도량에는 관세음보살이 없다. 배고픈 사람을 향해서 밥 한그릇을 주는 그 사람이야말로 진짜 살아 있는 관세음보살이다, 뭐 이런 식이죠.
儞還識馳求底麽(이환식치구저마)아, 그대는 도리어 馳求하는 그 놈, 치구하는 그 사람, 치구하는 그것, 구하려고 하는 그 사람을 또 아는가? 그것은,
三世十方佛祖出來(삼세시방불조출래)는, 삼세의 시방 불조가 이 세상에 나온 것은 也祇是求法(야지시구법)이요, 또한 다만 법을 구하기 위한 것이고,
如今參學道流(여금참학도류)도, 지금의 참선 학도, 참선 학도인 도류들도 也祇爲求法(야지위구법)이다, 또한 다만 법을 구하기 위함이다.
得法始了(득법시요), 법을 얻을 것 같으면 비로소 마치고 끝내고, 未得(미득)하면, 법을 얻지 못할 것 같으면은 依前輪廻五道(의전윤회오도)니라, 오도에 그저 여전히 윤회할 뿐이다.
云何是法(운하시법)고, 뭐가 그러면 법이냐 말야. 法是心法(법시심법)이다. 心法無形(심법무형)이여. 그래서 通貫十方(통관시방)이여, 시방에 꽉 차 있어, 통해 있어. 目前現用(목전현용)이언마는, 눈 앞에서 이렇게 환하게 쓰고 있건마는, 지금 말한 소리 듣고 졸리면 졸고 갈 때 되면 가고, 바로 이 사실 이거야, 이 사람이여.
그런데 人信不及(인신불급)이여, 사람들이 그걸 믿지 못해, 아무리 이야기 해줘도 밖을 향해서 우리가 두리번거리고 찾고 하는 것이 너무 오랫동안 익숙해져 있고 업이 되어 있어서 습관이 돼 있어 가지고 정말 자기 내면을 보는 것은 너무 안 해본 일이라. 그래서 안 믿을려고 하는 거여. 인신불급이여, 사람들의 믿음이 거기에 미치지 못하고.
便乃認名認句(변내인명인구)하야, 곧 이에 이름을 오인하고 구절을 오인해 가지고서, 뭐 경전에 써놓고 어록에 써놓고 뭐라고 해 놓니까 그만 아이고 이게 불교 경전인데 하고 아주 엄청나게 그렇게 생각을 해 가지고는 그걸 이제 착각하는 거요. 向文字中求(향문자중구)라, 文字中, 문자중을 향해서 구해 가지고서 意度佛法(의탁불법)하니, 그것이 불법이다 라고 헤아리니 天地縣殊(천지현수)로다, 천지현격이다, 이 말입니다.
정말 목전에 이렇게 나타나서 분명하게 작용하고 있는데 그래서 고함을 치기도 하고 방을 때리기도 하고 三度發問에 三度彼打, 세번 물으러 가도 역시 세번 다 두드려 패는 것, 바로 그 한 가지 사실 깨우쳐 주는 거예요. 목전현용. 눈앞에서 번듯하게 쓰고 있는 것. 환하게 쓰고 있는 것. 너무나도 분명한 사실. 그래서 손가락을 세우기도 하고 또 꽃을 들어 보이기도 하고 하는 그런 일들이 다 그겁니다.
그래서 이 주인공 이거 하나 우리가 제대로 챙기고 또는 지키고, 뭐 확실하게 찾아버리면 챙길 것도 없고 지킬 것도 없어요. 늘 그 사람이니까. 그런데 이제 확실하게 찾지 못했을 때는 이제 우리가 늘 챙겨야 되고 지켜야 되고 이런 말이라도 늘 기억하고 있어서 다른 데로 휘둘리거나 팔리지 않아야 됩니다. 이게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죠.
12- 2 心地法(심지법)
道流(도류)야 山僧說法(산승설법)은 說什麽法(설십마법)고 說心地法(설심지법)이니
便能入凡入聖(변능입범입성)하며 入淨入穢(입정입예)하며 入眞入俗(입진입속)하나
要且不是儞眞俗凡聖(요차불시이진속범성)이라
能與一切眞俗凡聖(능여일체진속범성) 安著名字(안착명자)요
眞俗凡聖(진속범성)이 與此人安著名字不得(여차인안착명자부득)이니라
心地法(심지법)이라.
道流(도류)야, 山僧(산승)의 說法(설법)은 說什麽法(설십마법)고.
여러 스님들 그 사찰에서 좀 요런 데 맛을 들인 사람들이 또 신도들 중에는 더러 있을 거란 말여. 선불교 공부라 해 가지고. 요런 거 하루에 한 구절도 좋고 한 페이지도 좋고 아주 착실하게 스님들 공부 삼아, 남에게 가르칠 때 공부가 제대로 되거든요. 공부 삼아 그렇게 한번 해 보십시오. 참 권하고 싶은 그런…
요즘 뭐 선이 얼마나 유행을 합니까. 이럴 때 선법문의 최상급이거든요. 이 임제록은 선법문 중에서도 최상급입니다. 무슨 뭐 참선을 들어라, 간절하게 참선 들어라, 뭐 화두 들어라, 이런 거 다 저 하수들이 하는 일인 거야. 이 저 임제록 입장에서 보면은 그 전부 말하자면은 선법이 진짜 올곧은 선법이 좀 퇴색됐을 때 퇴보되고 변색됐을 때 그런 선법이, 간화선법이 생긴 거예요. 여기 보면 하등의 뭐 화두들고 자시고 할 필요가 없잖습니까. 그런 이야기도 없고, 아예. 그냥 그대로 생긴 대로 사는 거여. 그야말로 대매 법상 스님처럼 아! 이 맘이 부처구나! 하고 그냥 일상사 그냥 사는 거여. 시장에 갈 일 있으면 시장 가고, 밥 먹을 일 있으면 밥 먹고. 예불할 시간 되면 예불하고. 정해져 있는 그 일과, 여전히 그대로 사는 거여. 그거 뿐인 거여. 그게 아주 상식인이고 정상적인 사람이죠.
道流야 山僧說法은 說什麽法고, 무슨 법을 설하는 것인가. 說心地法(설심지법)이니라. 심지법을 설하는 것이다. 그 심지법이라고 하는 것은 뭐여, 마음은 뭐라고?
便能入凡入聖(변능입범입성)이라, 곧 능히 범부에도 들어가서 성인에도 들어가고, 청정한 데도 들어가고 더러운 데도 들어가고, 入眞入俗(입진입속), 진제에도 들어가고 속제에도 들어가나니,
且要,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이 말입니다. 且不是儞眞俗凡聖(차불시이진속범성)이라. 그대는 진속 범성 남녀 노소 승속, 비구 비구니, 그 무엇도 아니여. 그 무엇도 아니라고요. 이걸 이해하기 쉽게 내가 자주 말씀드리지마는 지금 우리가 말을 듣는 그 당체는 僧이라고 하는 조건으로 듣는 게 절대 아녀. 그냥 사람이니까 듣는 거여. 속인이라고 하는 조건도 아니고 어떤 조건도 거기에는 해당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且要,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대들이 진속범성이 아니다, 不是儞眞俗凡聖(불시이진속범성)이다. 그대는 그대일 뿐이여. 진속범성, 남녀노소, 승속 이거 아무 것도 아니라고요. 그 사실 하나. 그거 하나 깨우칠려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能與一切(능여일체)요, 그런데 능히 일체로 하여금 眞俗凡聖 노소 비구 비구니 남녀, 이런 것을 가지고 그런 명자를 安著(안착), 갖다 붙혔다, 이 말이여. 그런데 고 진속 범성 남녀 노소 비구 비구니 뭐 이런 것들이 이 사람으로 더불어 그 진짜 그 한 사람, 그 사람으로 더불어서 그 사람에게 없던 그런 이름도 安著(안착)시켜봐야 안착이 안된다. 붙혀 봐야 붙을 수가 없어, 그 자리에는. 그 자리에는요 어떤 명함도 그 갖다가 붙힐 수가 없습니다. 남자라고 하는 명함도, 뭐 종사다, 대종사다, 무슨 명사다, 무슨 이름을 갖다 붙혀도 큰 스님이다, 작은 스님이다, 무슨 행자다 사미다 뭐 비구다, 어떤 이름도 거기 붙을 자리가 아닌 거여.
그거 대단한 자리여, 그건 아주 위대한 자리고 그건 너무너무 평등한 자리고. 그래서 無位眞人, 차별없는 참사람, 무위진인, 그런 말을 하는 거죠. 참 이런 사실을 이렇게 명확하게 밝힌 법문이요, 어록을 다 뒤져봐도 그렇게 흔치 않습니다. 참 아주 흔치 않아요.
그래서 모두 이러한 법문을 알고는 우리 나라 선을 좋아하는 그 선종 전통에 있어서는 그렇게 임제 스님에게 줄을 대고 임제 스님의 정신을 이어 받았다, 임제 스님의 이런 사상을 이어 받았다 해서 임제 몇 대손, 나는 부처님의 몇 대 제자가 아니고 임제 스님의 몇 대손이다 라고 굳이 비석에다 그렇게 하고 자기 이력서에다 그렇게 하고 자기 문집에다가 그렇게 밝히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이걸 우리가 이해해 줘야 되는 거죠. 정말 이런 법문은 임제 스님 이전에 임제 없고 임제 이후에 임제 없다 라고 하는 그런 말씀을 종종 드렸는데 그렇습니다, 사실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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