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 사직, 군주. 이 셋을 맹자가 중요하게 여긴 순서대로 나열하시오.” 『맹자』 수업의 시험에 이런 문제를 낸 적이 있다. 『맹자』를 읽은 사람에게 이 문제는 사실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웬일인가? 상당수의 학생이 군주나 사직을 맨 앞에 놓았다. 읽기는 읽었지만 주의 깊게 기억하지 않은 것일까? 혹은 무의식적으로 봉건시대의 고리타분한(?) 유학자가 백성을 가장 중요하게 여길 리가 없었다고 여겼던 것일까?
백성이 가장 존귀하고 사직은 다음이며 군주는 가장 가볍다. 그러므로 구민(丘民)의 마음을 얻은 사람은 천자(天子)가 되고, 천자의 마음을 얻은 사람은 제후(諸侯)가 되고, 제후의 마음을 얻은 사람은 대부(大夫)가 된다. 제후가 사직을 위태롭게 하면 갈아치운다. 희생이 갖춰지고 자성(粢盛)이 정결하여 제때에 제사를 지냈는데도 가뭄이 들고 홍수가 넘치면 사직(社稷)을 바꾸어 설치한다.[民爲貴, 社稷次之, 君爲輕. 是故得乎丘民而爲天子, 得乎天子爲諸侯, 得乎諸侯爲大夫. 諸侯危社稷, 則變置. 犧牲旣成, 粢盛旣絜, 祭祀以時, 然而旱乾水溢, 則變置社稷.]
『맹자』를 읽다 보면, 그 혼란의 와중에 어떻게 이토록 꿋꿋하게 백성을 중심에 놓는 이상 사회(理想社會)를 꿈꿀 수 있었을까 하는 감탄이 절로 솟아오른다. 아니, 맹자는 이상 사회를 ‘꿈꾼’ 것이 아니다. 그 실현 가능성을 믿고 털끝만큼도 의심하지 않았던 사상가이다. 부국강병의 패도주의가 오히려 비현실적인 뜬구름이라며 군주들을 꼼짝 못 하게 만드는 장면을 보면 통쾌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맹자 이후 2300년의 세월 동안 그가 그토록 믿어 의심치 않았던 민본주의 이상 사회는 실현된 적이 없다. 다만 최근에 민주주의 시대가 열린 것만 해도 인류 역사의 큰 성취이니, 이를 위안으로 삼아야 할까.
철두철미하게 백성을 근본으로 생각했던 민본주의 사상가 맹자. 그런데 만약 그가 살아 돌아와서 지금의 민주주의 사회를 보면 뭐라고 할까? 그토록 갈망하던 ‘백성이 주인[民主]’인 시대가 열렸다고 기뻐할까? 민주주의라는 이름만 듣고는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내막을 들여다보면 크게 실망하며 호통을 치지 않을까?
맹자의 민본주의는 말 그대로 백성을 ‘뿌리’라고 생각하는 사상이다. 맹자가 생각한 백성은 ‘보이지는 않지만 지면 위에 서 있는 나무를 지탱해 주는 뿌리’와 같은 존재였다. 비록 정치적인 힘은 없지만, 백성이 없으면 국가의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다. 나무의 뿌리가 조금이라도 상하면 나무 전체의 생명이 위태롭듯, 백성 역시 누구 하나 소외되어서는 안 될 소중한 존재였다. 더욱이 누구나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니, 누구에게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고귀한 존재가 백성인 것이다.
오늘날의 민주주의 역시 일견 이와 비슷해 보인다.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최고 권위의 법에 명시하듯,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며 정치가는 그 머슴이나 심부름꾼일 뿐이라고 부르짖는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맹자가 직접 현대사회를 목도한다면 분명 적지 않게 의아해 할 것이다. 어떤 정신 나간 사람이 ‘머슴’이 되기 위해 막대한 돈을 쏟아 부으며 머슴살이 시켜달라고 애원하고 다니겠는가? 자기들보다 몇 배 더 잘 살도록 돈을 걷어서까지 머슴 월급을 줄 주인이 과연 어디 있을까? 이러한 현상을 보면 아마도 맹자는 명(名)과 실(實)이 맞지 않으니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고치거나 이름에 맞는 진짜 민주주의를 시행할 것을 요구하지 않을까 싶다.
현대 민주주의 체제에서 국민이 주인 노릇을 하는 경우는 기껏해야 선거에서 한 표를 던지는 일 밖에 없다. 국민은 선거철에 일시적으로 주인이 되는데, 그조차도 그렇게 보일 뿐 진짜 주인이 된 것은 아니다. 선거민주주의 체제에서 피선거자는 국민을 ‘뿌리’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국민 전체를 챙길 이유가 없다. 자신에게 표를 던져줄 사람, 그러니까 아무리 많아도 전체의 반만 내 것으로 만들면 된다. 그들에게 국민은 뿌리가 아니라 밭에 널려 있는 무청과 같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다 가져가봐야 처치 곤란이니 먹을 만큼만 가져가서 시래기를 만들면 된다. 언론에서 당연하다는 듯 사용하는 ‘표밭’이라는 말도 맹자의 귀에는 거슬릴 것이다. 이러한 선거민주주의 제도에서는 모든 국민을 챙기는 정치인이 나오기가 근본적으로 어렵다. 모두를 챙기는 정치인은 효율성의 원리도 모르는 바보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선거민주주의의 결정적 맹점이다. 적어도 독재의 위험성이 적다는 점에서 현재로서는 선거민주주의를 대체할 제도는 없는 듯 보이지만, 그래도 맹자의 눈에는 차지 않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맹자의 사상 속에서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실질에 부합시킬 길을 하나 찾을 수 있다. 바로 민주주의라는 이름에 걸맞게 국민이 진짜 주인이 되는 것이다. 국민이 권력추구자의 정치놀음에 놀아나지 않고, 모두가 깨어나서 냉철한 눈으로 권력자를 바라볼 때, 비로소 국민이 주인이 되고 권력자들의 술수는 설 자리를 잃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불가능하거나 요원한 일이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지(智)의 능력, 시비지심을 가지고 있고, 상서지교(庠序之敎)를 펼 환경적 조건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특히 “사단(四端)을 확충하면 온 세상을 지킬 수 있고, 확충하지 못하면 자기 부모도 섬기지 못한다.”는 맹자의 말이 뼈에 와 닿는다. 정치가 이 모양인 것은 사단을 확충하지 못한 우리에게 근본적인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제도의 한계나 권력추구자의 행태를 탓하기에 앞서, 우리 자신이 의(義)가 아닌 이(利)에 눈이 멀어 ‘표밭’의 노예가 되기를 자처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보아야 할 것 같다. 명실상부한 민주주의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주인’인 국민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