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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24일 [연중 제25주일]
마태오 20,1-16
다 갚을 수도 없고, 갚았다고 믿어서도 안 되는 한 데나리온의 가치
오늘 복음은 하늘 나라에서 우리가 어떻게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지에 대한 그 비결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오늘 비유 말씀은 포도밭 일꾼들에 관한 내용입니다.
주인은 한 데나리온으로 약속하고 아침 아홉 시, 열두 시, 오후 세 시, 다섯 시에도 일꾼들을 불러 모읍니다.
다섯 시에 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일꾼들이 한 데나리온을 받는 것을 보고는 하루 종일 일한 일꾼들이 자신들은 더 많이 받을 것이라 여깁니다.
그러나 그들도 한 데나리온밖에 받지 못하자 투덜댑니다.
이에 예수님은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마태 20,16)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 나라에서 가장 높은 자는 가장 낮은 종이 되어 이웃의 발을 씻어주는 사람입니다.
겸손하지 못한 사람은 오늘 하루 종일 일한 종들처럼 자신들이 주인에게 더 해 주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한 데나리온’의 가치입니다.
우리가 받는 한 데나리온은 지옥이 가지 않고 천국에 이르게 만드는 가치가 있습니다.
바로 일만 탈렌트의 가치입니다.
우리는 일만 탈렌트로 죄가 용서받았습니다.
일만 탈렌트의 가치는 예수님의 피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가죽옷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자신을 그리스도라 할 수 없고 그러면 주님 앞에 나설 수 없게 됩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겸손해지기 위해서는 우리가 얼마나 많이 받았는지 기억해야 합니다.
제가 많은 것을 드린다고 착각했을 때 주님께서는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성체 성혈의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갈 수 없음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태양이 우리에게 주는 빛에 감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의 처지가 연꽃의 씨에 불과함을 알면 됩니다. 연꽃 씨는 물 밑 진흙 속에 묻혀있습니다.
그것이 스스로 자신을 깨고 나올 힘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태양의 따사로움이 그 씨앗에 전달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안다면 아름다운 꽃을 피웠을 때
연꽃이 어떻게 태양에게 더 많은 것을 준다고 착각할 수 있을까요?
배우 박철민 씨가 어머니가 치매에 걸려 자식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할 때 한없이 오열하던
장면이 생각납니다. 왜 슬플까요? 더는 어머니가 자신이 보답해드리는 것을 깨닫지 못하게 되어
안타까운 게 아닐까요? 그는 어머니의 음식을 맛보고도 눈물을 흘립니다.
이미 저세상에 계신 어머니의 은혜에 더는 보답해드릴 수 없다는 것이 슬픈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교만한 일꾼들처럼 주님께서 주시는 한 데나리온보다 더 일을 했다고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한 데나리온의 값은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갚을 수 없는 가치입니다.
우리를 하느님 자녀라 믿게 해 준 하느님 피의 값입니다.
교만해지지 않기 위해서는 한 데나리온이 없었으면 우리가 어떻게 될지를 생각해 보는 것도 좋습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지옥에 다녀오게 된 것이 자신을 가장 많이 변화시켰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마땅히 가야 할 지옥에서 건져주신 하느님께 감사하고 다만 한 명이라도 지옥에 가지 않게 하도록 수천 번 죽어도 괜찮다고 말합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하루 종일 일해도 언제나 그 한 데나리온에 보답할 시간이 부족합니다.
이것을 겸손함이라고 합니다.
주님의 은혜에 다 갚을 수도 없지만, 이미 다 갚았다고 믿으면 더 큰 일입니다.
제가 신학교 때 들은 말 중에 “사제가 되려고 하지 마라!”였습니다.
사제가 되고 나면 더는 할 게 없어서 이제 누리려고만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술이나, 여자, 돈이나 비싼 차, 돈 많이 드는 운동이나 여행 등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내심 ‘내가 사제인데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나?’라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제로 불러주신 분께 감사하기 위해 성인 사제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라만차의 기사에서 돈키호테를 쫓아다니는 산초란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아무 이익도 없지만 주인을 위해 목숨을 바칩니다.
알돈자가 그에게 왜 얻는 것도 없는데 그런 이상한 노인을 쫓아다니냐고 할 때 산초는 노래합니다.
우리도 우리가 받은 한 데나리온 때문에, 곧 우리가 받은 정체성 때문에 그 피에 대해 한없이 기뻐하며 영원히 찬미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좋으니까, 그냥 좋으니까. 나의 털을 몽땅 뽑는대도 괜찮아. 묻지 말아요. 이유가 뭔지.
그런 건 눈을 씻고 잘 봐도 없다오. 발가락을 썰어서 꼬치구일 한데도 꼬집고 할퀴고 물리고 뜯겨도 하늘에 외치리. 나는 주인님이 그냥 좋아 ~~~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9월24일 [연중 제25주일]
마태오 20,1-16
늦게라도
우리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하루 이틀 하고 끝낼 그 무엇이 아니라, 평생토록 지속되어야 할 긴 여행길, 즉 여정(旅程)입니다.
여행하다보면 힘겨운 오르막길이나 만만치 않은 돌밭길도 만나지만, 때로 평탄한 지름길이나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대한민국의 아름다운 길’도 만납니다.
죽음과도 같은 고통의 순간, 뜨거운 사막도 거치지만, 때로 가슴이 확 트이는 천국같은 초원도 만납니다.
활활 타오르는 꽃같은 젊음의 순간이 있는가 하면,
급격히 쇠락하는 노년의 순간도 맞이합니다.
주님 뜻에 맞갖은 정직하고 충실한 길만을 걸어가는 인생이 있는가 하면, 때로 그릇된 길로 접어 들어 갖은 방황과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아주 늦게야 주님을 만나는 인생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 사람들은 대체로 의기소침해하며 이렇게 하소연 합니다.
‘주님도 무심하시지. 왜 이토록 늦게야 당신을 만나게 하시는가?
이토록 늦은 나이에 이런 방향 전환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러나 천만의 말씀입니다.
포도밭 주인이신 주님께서는 오전 6시에 온 일꾼들에게도 하루 일당 10만원을 지불해주시지만, 오후 세시뿐만 아니라
오후 5시에 일하러온 지각생 일꾼들에게도 똑같이 일당 10만원을 손에 쥐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관건은 늦게라도 주님 부르심에 기쁘게 응답하는 것입니다.
늦게라도 그분의 포도밭을 향해 초스피드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감지덕지하게도 똑같은 일당을 주시는 주님께 백번 천번 감사드리며, 비록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을 주님 보시기에 멋지고 아름답게 계획하고 장식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초고령화 사회에 진입하면서 노화에 대한 고민을 자주 하게 됩니다.
각 가정에서는 급격히 늘어난 수명이 마냥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온 몸으로 실감합니다.
수도회·수녀회들도 예외는 아니어서, 거의 모든 수도회·수녀회들이 회원들의 노령화에 따른 대책 마련에 분주합니다.
노년기에 직면해야 하는 도전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 잘 예측하고 있습니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삶의 기쁨이나 희망은 급격히 감소되어가는 반면, 고통과 외로움, 슬픔과 번뇌는 점점 커져감을 실감합니다.
몸도 예전같지 않아 이런 저런 질병에 시달립니다.
인생의 무대에서 물러나면서 자신의 존재 가치에 대한 회의감에 사로잡힙니다.
하루하루 뭔가가 내 안에서 소멸되어간다는 느낌에 우울감도 커져갑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란 존재의 사라짐, 즉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네 삶과 신앙생활 전체를 흔들어놓습니다.
생각할수록 헛되고 허무한 것이 우리네 인생이란 것을 파악하고 실망하는 우리에게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큰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그는 이승의 삶을 얼마나 불꽃같이 살았으면,
얼마나 원없이 달릴 곳을 다 달렸으면, 이런 고백까지 서슴없이 하고 있습니다.
“형제 여러분, 나는 살든지 즉든지 나의 이 몸으로 아주 담대히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사실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 죽는 것이 곧 이득입니다.
나의 바람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 편이 훨씬 낫습니다.”(필리피서 1장 20~23절)
참으로 놀라운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의 바람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한 인간 존재가 어떻게 이런 고백을 서슴치 않고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는 이 지상에서부터 이미 그리스도를 온 몸과 마음으로 체험했고, 그분 안에 온전히 머물렀기에 그런 용감한 고백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바오로 사도처럼 나이들어갈수록 점점 지상의 것을 줄이고 천상적 삶을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지상에서부터 천상을 만끽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가 내 생의 전부이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바오로 사도처럼 용감한 신앙고백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5주일 강론>
(2023. 9. 24.)(마태 20,1-16)
<기쁨과 감사>
“저녁때가 되자 포도밭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말하였다.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이들에게까지 품삯을 내주시오.’
그리하여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이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그래서 맨 먼저 온 이들은 차례가 되자 자기들은 더 받으려니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만 받았다.
그것을 받아 들고 그들은 밭 임자에게 투덜거리면서,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하고 말하였다(마태 20,8-12).”
이 이야기를, 맨 나중에 온 사람들을 기준으로 해서, 즉 순서를 반대로 바꿔서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맨 먼저 온 이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그래서 맨 나중에 온 이들은 차례가 되자 자기들은 덜 받으려니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그것을 받아 들고 그들은 놀라고 기뻐하면서,
‘맨 나중에 온 저희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저 사람들과 똑같이 대우해 주시는군요.’ 하고 말하였다.”
그러면 포도밭 주인은 무슨 대답을 하게 될까?
아무 대답도 없이 흐뭇한 표정으로 웃기만 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든 맨 나중에 온 사람들의 심정에, 즉 그들의 ‘기쁨과 감사’에 초점을 맞추어서 이 이야기를
묵상하는 것이 예수님의 의도에 더 합당할 것 같습니다.
‘기쁨과 감사’, 바로 그것이 신앙생활의 기본자세입니다.
‘내가’ 특별히 잘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나는’ 특별히 내세울 것도 없는 사람인데, 성인 성녀들에게 주신 은총과 똑같은 은총을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누구나 놀라게 될 것이고, 기뻐할 것이고, 하느님께 감사드릴 것입니다.
그 심정을 시편 저자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시편 8,5)”
‘마리아의 노래’에 표현되어 있는 성모님의 심정도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46ㄴ-48ㄱ).”
시편 8편과 ‘마리아의 노래’를 보면, ‘기쁨과 감사’의 바탕에 ‘겸손’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나는 보잘것없는 존재일 뿐이다.” 라는 진정한 겸손에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큰 은총에 대한 기쁨과 감사가 생깁니다.
그리고 ‘겸손, 기쁨, 감사’는 ‘사랑’과 ‘순종’으로 이어집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뿐만 아니라, 이웃에 대한 사랑도.>
그렇게 기쁨과 감사와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면
남에 대해서 시기하고 질투하는 일은 없을 것이고,
기쁜 일이 생기면 함께 기뻐하고, 슬픈 일이 생기면 함께 슬퍼하고, 아픈 일이 생기면 함께 아파할 것입니다.
“나는 특별한 존재다.” 라는 교만에서는 기쁨과 감사가 생기지 않습니다.
기쁨과 감사는 없이, 특별대우를 요구하는 더 큰 교만에 빠지게 되고, 남에 대한 시기와 질투에 금방 사로잡히게 됩니다.
사울 왕이 몰락하게 된 첫 번째 원인은 부하 다윗에 대한 시기심이었습니다(1사무 18,9).
백성들이 다윗의 승전을 찬양할 때 사울이 진심으로 축하하면서 함께 기뻐했다면, 그래서 다윗을 계속 충성스러운 부하로 남게 했다면,
이스라엘 역사는 크게 달랐을 것입니다.
‘미르얌’과 ‘아론’의 이야기도 연상됩니다.
“모세가 에티오피아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는데, 미르얌과 아론은 모세가 아내로 맞아들인 그 에티오피아 여자 때문에 모세를 비방하였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모세를 통해서만 말씀하셨느냐? 우리를 통해서도 말씀하시지 않았느냐?’ 주님께서 이 말을 들으셨다.
그런데 모세라는 사람은 매우 겸손하였다. 땅 위에 사는 어떤 사람보다도 겸손하였다(민수 12,1-3).”
민수기 저자가 모세의 겸손을 특별히 강조한 것은
그 세 사람의 갈등의 원인이 모세 쪽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미르얌과 아론 쪽에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아마도 미르얌과 아론은 자기들이 긴 세월 동안 노예처럼 살면서 고생할 때, 막내 동생인 모세는 이집트 왕궁에서 왕자로 살면서 부귀영화를 누렸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았던 모세가 어느 날 갑자기 민족의 지도자가 되어서 나타난 것은 부당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고, 그것이 몹시 불편했던 것 같습니다.
미르얌과 아론의 심정은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에 나오는 ‘맨 먼저 온 이들’의 심정과 같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평생 고생만 했고 모세는 별로 고생도 안 했는데, 하느님께서는 왜, 모세는 특별대우 하시면서 지도자로 임명하시고, 우리는 모세의 조력자로 삼으셨을까?”
<사실 모세 자신이 스스로 지도자로 나선 것은 아닙니다.
여러 가지로 많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자기가 지도자로 뽑히는 것을 한사코 사양했었습니다(탈출 4,10.13).>
하느님께서는 모세의 특별한 점이 무엇인지는 말씀하시지 않고, 당신이 특별히 모세를 뽑으셨다는 말씀만 하시면서 미르얌과 아론에게 진노하셨습니다(민수 12,5-9).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어떤 특별한 점이 모세에게 있었겠지만, 어떻든 가장 특별한 점은 ‘하느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셔서 뽑으신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말장난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당신의 권한과 자비로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니 남이 받은 은총과 은사에 대해서 우리가 시기와 질투를 하는 것은 하느님의 권한과 자비를 거스르는 죄가 됩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