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갑자기 화를 냈다. 내가 어떤 이의 근황을 물을 때였다. 친구는 경상도 억양으로 목청을 돋웠다. “보수당을 택할 수는 있어. 하지만, 사람이 그렇게 표리부동할 수 있나.” 한 때 정통 마르크시스트를 자처했지만, 사회주의권 붕괴 이후에는 포스트 마르크스주의, 포스트 모더니즘의 선구자로 재빨리 돌았다가, 얼마전 한 보수정당에서 공천을 받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친구는 최근 그가 ‘민중의 요구를 저버렸다’며 노무현 대통령을 비판한 사실을 전해 들었다고 했다.
남의 사정도 모르면서 친구 주장에 동조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보수당 안에서 ‘민중의 이익’을 구현하겠다는 것이라면,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은 분명하다. 여당의원이 표를 얻기 위해 당내에서 야당 노릇을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광고해야 했던 군사정권 시절이라면 모르겠다. 적어도 우리는 지금 그런 역설이 통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는 않다. 그런데도 진보 인사조차 선거때만 되면 부나비처럼 이름만 다를 뿐인 보수정당들을 향해 날아든다.
-선거철이면 유행처럼 “보수”-
보수정당들은 지금 여야가릴것없는돈정치와무능으로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보수정당, 우습게 볼 게 아니다. 자기생명을 연장하는 뛰어난 생존술이 있다. 새 피를 수혈해 치명적인 상처를 덮는 것이다. 어떤 보수정당은 ‘보수’로 불리기를 꺼리면서도, 비보수로 분류될까 걱정한 나머지 대기업 회장을 영입해 자기당의 ‘비시장주의’를 비판토록 하는 ‘균형감각’도 있다. 그러나 자기 정화능력을 상실한 정치구조이다. 새 피는 곧 늙은 피와 섞여 하나가 될 것이다. 들에 핀 꽃들은 이렇게 꺾이고 있다. 낙화(落花)로다! 들판은 황량해져 가는데, 보수주의 헤게모니는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요지부동인가.
모든 것을 보수정치의 틀 안에 구겨 넣을 수 있다면 얘기는 다르다. 그러나 다원화가 급속히 진행되는 사회에서 그런 것은 불가능하다. 일본이 아무리 보수정치라 해도, 사회당은 자민당과 함께 두 개의 축이었다. 다원주의 체제이면서 보수당만 모여 있는 나라, 초록동색이면서 상대를 좌파 운운하는 나라가 한국말고 또 있는지 모르겠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이라면 벗어던져야 한다. ‘진보정당의 국회진출’. 더 이상 한가할 때 멋으로 하는 공론(空論)에 머물게 할 수 없다.
“시의회 의장선거를 한다면서 후보자·추천자도 없는데 이름을 써내라니요. 102명 의원 얼굴도 모르는데 누굴 씁니까. 초등학교 반장선거도 이런 식으로는 안해요.” 민노당 심재옥 서울시의원은 2002년 7월9일 첫 회의 때부터 열을 받았다. 그는 시의회 조례와 다르다고 따졌다. 그의 ‘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동료의원의 말. “초선이라 잘 모르시는 모양인데, 원래 이렇게 합니다. 차차 익숙해질 겁니다.” 천만에. 그는 원칙과 규정, 상식에 어긋나는 관행에 한번도 익숙해진 적이 없다. 뒤바뀐 예산안 심의 순서를 기어코 되돌려 놓았다. 직업훈련학교 훈련생의 만족도·취업률이 높다는 시의 보고내용이 사실은 그 반대임을 밝혀냈다. 그를 무시하던 의원들도 요즘은 그가 발언하면 ‘뭔가 있구나’하고 생각할 정도가 되었다. 그는 지난 1월 경실련에 의해 서울시 최우수 의원으로 선정되었다.
-열성적 진보의원 선전 기대-
서울에 심의원이 있다면, 광주에는 윤난실(시민단체 선정 우수의원), 전북에는 김민아(동료의원 선정 베스트1), 부산에는 박주미 의원이 있다. 모두 일당백을 하는 각 자치단체내 유일한 민노당 여성의원이다. 이런 성공을 국회에서 보지 못할 이유가 없다. 이번 총선때 민노당의 국회진출 가능성이 높다. 심의원 같은 이가 열명만 있어도 정치판이 달라질 수 있다. 쉽게 길들여지지 않는 그들은 낡은 정치와 번번이 부딪칠 게 뻔하다. 얼마나 통쾌한 뉴스가 나올 것인가. 보수당도 정신을 바짝 차릴 것이다. 지금 보수당을 보라. 모두 지지자를 배신하고 있다. 민노당 진출은 ‘한국정치의 정상화’뿐 아니라, ‘보수당의 정상화’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심의원은 보통 밤 11시에 일을 끝내고, 새벽 1~2시 귀가도 밥먹듯 한다. 그는 “최선을 다하려고 박박 기었다”고 말했다. 당신을 위해 새벽까지 박박 기며 일하는 국회의원이 단 몇 명이라도 있다면, 당신은 지금보다 조금은 더 행복해질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