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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굿뉴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복음: 마태 11,25-27
양 한 마리 프로젝트!
드디어 8박 9일의 몽골 자연 피정을 끝내고 귀국합니다.
처음 시도하는 피정이라 시행착오도 참 많았습니다.
그러나 숱한 부족함과 다양한 결핍조차 선으로 결론 맺으시는 주님, 항상 순례 여정을 동반하시는 성모님의 현존에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어젯밤에는 숙소 근처에 있는 몽골 살레시오회 지부를 찾았습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묵묵히 아이들 사이에 현존하고 있는 형제들을 만났습니다.
수도원에 막 도착했을 무렵 살레시안들이 운영하고 있는 생활 시설 청소년들이 신나게 축구 시합을 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참 좋았습니다.
독일에서 온 자원봉사자 여자 청년 한 분은 골문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다른 한 분은 심판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나게 뛰어놀고 있는 아이들 사이에 낯익은 분, 살레시오회 몽골 지부장 최원철 티모테오 신부님이 세상 행복한 얼굴로 공을 몰고 다녔습니다.
지부장이면서도 마치 철부지 어린이처럼 신나게 뛰어다니는 모습과 오늘 예수님의 말씀이 묘하게 교차되었습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 11,25)
우리 모든 살레시안들이 해맑은 철부지의 얼굴로 언제나 아이들 사이에 굳건히 현존하기를 기도했습니다.
어제는 밤늦도록 지부장 신부님과 지부 재정 담당 수사님을 만나서 대화를 나누다 보니, 현지의 재정 상황이 심각했습니다.
최근 몽골의 물가가 고공행진하고 있답니다.
저희가 고용하고 있는 교사나 직원들의 임금 인상도 불가피해졌답니다.
정부나 지역 교회의 후원이 전무한 상황에서 30년 이상, 초중고등학교, 공업학교, 오라토리오, 방과 후 교실, 본당 등에서 아이들 사이에 현존하느라 우리 살레시오 형제들이 감내해야 할 고통이 혹독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초대 지부장은 뇌출혈로 인한 충격으로 거동이 불편하게 되어 본국으로 귀국해 요양 중입니다.
슬프게도 다음 지부장은 거듭되는 과로로 고생하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 형제는 구안와사로 죽을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순례자들을 안내해주신 수사님도 걸음이 불편해서 물어보니 요르단강을 거의 건너갔다고 왔답니다.
이런 와중에 작년부터 한국 관구에서 몽골 지부 운영을 맡게 되었고, 최초의 한국 지부장으로 최원철 신부님이 임명되었는데, 앞으로 그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다들 걱정하고 있습니다.
저는 몽골 살레시안들을 만나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선교사들을 위한 후원은 2차적인 부분이로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 위한 보다 적극적이고 열렬한 기도로구나.
머나먼 타국에서, 물설고 낯선 곳에서의 선교지에서의 생활이 결코 만만치 않고, 육체적인 어려움은 물론이고 영적, 정서적, 심리적 메마름에 수시로 노출되니, 기도가 제일 중요하겠구나.’
인생 여정을 걸어가는 길에서 직면하게 될 이런저런 고통과 시련 앞에 설 때 마다 선교지에서 묵묵히 헌신하는 선교사들 떠올리며 그들을 위한 기도를 아끼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작은 불편함과 고통을 기쁘게 참아내야 하겠습니다.
그분들의 노고와 희생을 생각하며 기꺼이 희생하고 감내해야 하겠습니다.
그런 노력을 통해 우리 역시 선교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지부 경리 안드레아 수사님은 베트남 출신인데, 23년간 몽골에서 헌신하고 계신답니다.
몽골 지부의 어머니요 보물같은 존재로 형제들로부터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습니다.
최근 안드레아 수사님이 현지 아이들을 위해 기획한 프로젝트가 하나 있습니다.
이른 바 ‘양 한 마리 프로젝트’입니다.
통상 목자 한 명이 양 100마리 정도를 이끌고 다닌답니다.
성장한 암양은 1년에 1~2마리의 새끼를 낳습니다.
어린 숫양들은 겨울이 다가오면서 통통해지는데, 도축된 친구들은 겨우내 먹을 아이들의 양식으로 저장됩니다.
현재 160마리의 양들을 키우고 있습니다.
양 한 마리의 가격은 10만원입니다.
꽤 큰 금액이지만, 양 한 마리만 후원해주신다면, 심각한 경영난에 휘청거리는 몽골 지부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점심을 건너뛰는 기술학교 청소년들, 학비를 감당할 수 없어 주변에서 서성거리는 방과 후 교실 아이들에게 큰 격려와 기쁨이 될 것입니다.
양 한 마리 후원하기
양 한 마리 가격: 10만원
살레시오회 몽골지부 후원 계좌
국민은행 090-01-0323-505
예금주: (재) 천주교 살레시오회 선교국
*송금시 반드시 ‘양 한 마리’라고 명기해주시기 바랍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안식년
마태오 11,25-27
사람을 알려거든 순종해 보라
오늘 복음은 왜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는지에 대한 설명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라고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앞에서 철부지이십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아십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철부지 자녀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아는 것이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사람은 위에서 내려다보아서는 잘 모릅니다. 아래에서 올려다보아야 합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그 사람이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변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아래에서 보니 잘 보인다는 말입니다.
그 사람은 높은 자리에 오르기 전의 모습이지만
그 사람에게 순종해야 하는 철부지 같은 처지가 되면 그 사람의 보이지 않는 면이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보다 약한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본성을 쉽게 드러냅니다.
그래서 사람을 알려면 철부지처럼 낮아질 필요가 있습니다.
영화 ‘의뢰인’(2019)은 칠곡 어린이 학대 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영화 보는 내내 분노와 슬픔이 가득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영화는 그나마 보는 이들에게
충격을 덜 주게 하려고 현실보다 많이 순화되어 제작되었다고 합니다.
새엄마는 아빠의 묵인하에 어린 남매를 학대합니다.
문제는 아이들이 그렇게 사정을 하는데도 경찰도, 복지센터도, 학교 선생님도 그냥 골치 아파질까 봐 모든 것을 묵인한다는 것입니다.
아이들 앞에서 그들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은 그래도 괜찮은 사회 분위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그들을 알아볼 수 있게 되고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가 아이들 앞에서 발각되게 됩니다.
너무 솔직해서 진급하지 못하던 한 변호사만이 직장을 때려치우고 남은 아이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칩니다.
처음엔 성공만을 바랐던 그였지만 아이들은 그의 마음을 알아보았습니다.
아이들의 시각으로 누가 착한 사람이고 누가 나쁜 사람인지 쉽게 구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변호사는 아이들에게까지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어쩌면 유일하게 아이들을 이해할 수 있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도 멀리서 들리는 한 음성에 순종할 수 있어서 153마리의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이해할 수 있어야 사랑할 수 있는데 이해하려면 이렇게 누구에게나 순종할 수 있는 사람으로 낮아져야 합니다.
미국에서 한 아버지가 아들이 마약을 한다며 상담을 신청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매우 화가 나 있었습니다.
의사는 역할극을 시켜보았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이 뭘 못 해줘서 그렇게까지 아이가 망가졌는지 답답해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 앞에서 주눅 들어 있었습니다.
의사가 이제 역할을 바꿔보라고 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가 되고 아버지가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때 아버지가 “내가 마약 중독자입니까?
나는 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며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습니다.
사실, 이 아버지는 자신이 마약 중독자 아들의 역할을 하기를 꺼린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될까 봐 두려워 그 역할을 맡지 못한 것입니다.
지금은 높이 있어서 자신이 보이지 않지만, 아들의 위치로 낮아지면 자신의 모습이 보이게 될까봐 그것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을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
성경에서는 아는 것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예수님도 몰랐고 그래서 아버지도 몰랐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철부지가 되어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하느님보다 높은 위치에 있으니 하느님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 어린이처럼 진정으로 순종해 본 적이 없어서 그분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마태 11,29)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이 철부지의 마음입니다. 순종하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낮아져서 누군가에게 순종하게 될 때 그 사람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 모든 사람을 알고 싶거든 모든 사람에게 순종해 보십시오.
물론 죄가 되지 않는 한계 내에서.
그러면 그 사람이 보일 것입니다.
교만하게 위에서 명령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자신도 모르고 이웃도 모르게 됩니다.
아는 것이 사랑이기에 누구도 사랑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알고 싶으면 철부지처럼 순종해 보십시오. 그리스도를 알고 싶거든 그렇게 해보십시오.
그러면 그것이 사랑하는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순종하는 대상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성사담당사제
복음: 마태 11,25-27: 그렇습니다, 아버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신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25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지혜로운 자와 철부지는 단순히 지식이나 나이의 문제를 의미하지 않는다. 지혜롭다는 자는 세속적 지혜와 자기 의로움에 의존하는 사람,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려는 사람이며, 철부지는 세속적 교활함이나 죄에서 멀리 떨어진 순수한 마음, 겸손한 사람을 의미한다. 주님의 은총과 구원의 신비는 교만한 지혜를 가진 자에게는 감추어지고, 겸손한 마음을 가진 자에게 드러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하느님은 자기를 낮추는 이에게 자신을 드러내시고, 자기를 높이는 이에게는 감추신다.”(De Trinitate, 8,10 요약) 우리는 세례를 받고 신앙인이 되었지만, 마음을 열지 않으면 하느님의 깊은 뜻은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는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이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27절)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아들에게 맡기셨다는 것은 하느님의 구원 계획과 사랑의 모든 것이 아들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의미이다. 아들을 통해서만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를 통해서만 아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하느님을 알고자 한다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를 알고, 그 안에서 순종과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성 보나벤투라는 이를 이렇게 해석한다. “아버지와 아들을 아는 신비는 성령 안에서만 완전히 드러난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믿음과 순종, 그리고 사랑이다.”
우리는 항상 철부지 같은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가야 한다. 교만하거나 자기 힘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려는 태도는 하느님의 신비를 막는다. 예수님을 깊이 알고, 그분의 말씀과 삶을 본받는 것이, 곧 하느님을 아는 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을 아는 삶을 살 때, 진정한 순종과 사랑이 나타난다. 하느님을 아는 사람은 단지 지식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드러낸다. 기도와 사랑, 용서와 봉사로 하느님의 뜻을 살아내는 삶이 필요할 것이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겸손과 신뢰, 그리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아버지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가르친다. 지혜로운 세상 사람들의 교만함을 피하고, 철부지와 같이 순수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아들과 아버지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배우고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신비를 이해하며 참된 구원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비평가나 평론가의 글이나 말을 통해 작품에 대한 이해를 갖게 됩니다. 어느 책을 읽었는데 도무지 그 내용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제대로 책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어느 평론가의 글이 작품 설명을 돕고 있었습니다. 그 글을 읽으며 깜짝 놀랐습니다. ‘이 글에 이런 뜻이 담겨있었다니….’라면서 다시 읽으며 그 의미를 새길 수가 있었습니다.
작가의 해설이야 그럴 수 있다고 할 수 있지만, 평론가의 글은 작품의 깊이를 더해주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평론을 쓸 수 있었을까요? 아마 많이 읽고, 많이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세상이라는 하느님의 작품을 보십시오. 과연 설명 없이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너무 쉽게 판단하는 우리가 아니었을까요?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나오는 판단은 제대로 될 수 없습니다.
평론가의 노력을 떠올리며 우리 역시 주님을 알기 위해 그분의 말씀을 계속 읽고 기도와 묵상으로 그 뜻을 계속 생각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그래야 좋으신 주님을 제대로 알고, 그분과 함께할 수 있습니다.
어제 우리는 주님께서 당신의 신적 기원을 드러내는 많은 기적을 보여주셨음에도, 믿고 받아들이는 데 더뎠던 세 고을의 사람들을 엄하게 꾸짖으시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게 된 이들을 따듯하게 칭찬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기도 안에서,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깨닫는 은총을 받은 사람들은 많이 배우고 영리하다고 자부하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 곧 종교 지도자들이 아니라 ‘철부지들’이라고 하십니다.
철부지는 단순히 학식이나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겸손하고,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인정하며, 오직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어린아이처럼 하느님께 철저히 내맡기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초대 교회를 떠올리면, 주로 사회의 낮은 계층과 노예들 사이에서 널리 퍼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철부지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알려진 것을 아버지의 뜻이라고 말씀하시지요.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26)
그러면서 당신을 알고, 당신을 통하여 아버지를 아는 것이 당신께서 주시는 선물임을 말씀하십니다. 그 선물이 2,000년 전에만 주어진 것일까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그 선물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만에 빠져서는 절대로 그 선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 철부지와 같은 겸손을 갖추고, 자기 부족을 인정하면서 주님을 알려고 노력하면서 기도와 묵상으로 주님 안에서 머물러야 선물을 온전하게 받을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입니다. 예술의 반대는 추함이 아니라 무관심입니다. 신앙의 반대는 이단이 아니라 무관심입니다. 그리고 삶의 반대는 죽음이 아니라 무관심입니다(엘리 위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07.15.수.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26)
먼저 아버지 하느님의
선하신 뜻을 더 신뢰하며
찬미합니다.
선하신 뜻은
생명을 살리고,
잃은 이를 찾으며,
죄인을 구원하는
사랑의 뜻입니다.
우리의 뜻을 비울수록
우리의 뜻은 작아지고,
하느님의 선하신 뜻은
더욱 선명하게
우리 삶 안에 드러납니다.
하느님의 선하신 뜻은
우리의 계획을 넘어서는
가장 좋으신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순간에도
하느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선하심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현실을 받아들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찾고 있는지,
아니면 하느님을 우리 뜻에
맞추려 하고 있는지를
묻게 됩니다.
하느님의 뜻은
겸손 안에서
모습을 드러냅니다.
하느님의 선하신 뜻에
삶을 온전히 맡길 때
우리의 일상은
은총의 길이 됩니다.
성 보나벤투라는
지식보다 사랑을,
성공보다 하느님과의 일치를
더 소중히 여기며,
하느님의 선하신 뜻 안에서
참된 지혜를 찾았습니다.
하느님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지는 곳에
참된 믿음이 있고
참된 기쁨이 있습니다.
선하신 뜻을 드러내는
가장 깊은 겸손입니다.
※카톡 신부님 - 굿뉴스
예수님께서 행하신
하느님을 향한 예배는 죽음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들에게 요구한 예배 방법은
이토록 처참하고 참혹했습니다.
하느님을 예배할 줄 모르는 세상을 위해서
그분처럼 죽는 일
그분처럼 당하는 일
그분처럼 손해 보는 일이
그리스도인의 예배라는 사실을 기억하십니까?
참된 예배를 원하시는
그분 앞에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를 고민하는
오늘이면 좋겠습니다.
무엇을 벗어야 할지 헤아려
참으로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예배자의 모습을 갖추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이미
“모든 것을 넘겨”받아 아버지를 알고 있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김경진 베드로 신부님 - 한마음청소년수련원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예수님의 지혜는 하느님에게서 온 것입니다.
세상에서 오는 지혜가 아니였기에 권위가 있었습니다.
우리의 지혜도 세상의 지식에서 오는 게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올 때 비로소
참으로 권위 있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아는 것은 안다고 얘기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애기할 수 있는 것이 지혜입니다.
지혜로 나아가는 길은
나를 제대로 아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혜는 겸손합니다.
지혜는 내가 모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도 내가 죄인임을 아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마태11,27ㄱ)
'오, 보나벤투라!'
오늘 복음(마태11,25-27)은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11,25-26)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마태11,27)
오늘은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형제요 제자인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입니다.
먼저 오늘 뜻깊은 영명축일을 맞이하신 형제자매님들께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오, 보나벤투라!'
'오, 좋은 일이여!'
'보나벤투라(Bonaventura)'는 '좋은 운명', '뜻밖의 행운'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보나벤투라 성인이 어렸을 적에 중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일 때, 어머니가 그를 성 프란치스코에게 데려가 기도를 요청했는데, 프란치스코의 중재기도로 치유되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그를 두고 "오, 좋은 일이여!"(보나벤투라)라고 외쳤는데, 그때부터 '보나벤투라'라는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만인의 형제'라고 부릅니다.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완전한 계시(드러남)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온전하게 하나가 되는 것'이 그의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그런 표지로 '그리스도의 오상(다섯상처)'을 받으셨고, 훗날 사람들로부터 '또 하나의 그리스도'(Alter Christus)라는 칭호도 받으셨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형제요 제자인 성 보나벤투라는 '진리의 깨달음'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이성은 분명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빛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진리를 알 수 없으며, 진리란 명상과 기도로 영혼을 끊임없이 단련하여 하느님과 직접 일치할 때 알 수 있는 것이다."(나무위키사전 참조)
보나벤투라 성인의 천상 탄신일을 맞이하여 성찰합니다.
나는 어떤 방법으로 진리이신 예수님과 하나가 되려 하고 있는가? '머리와 지식으로', 아니면 '몸으로', 아니면 '명상과 기도로' 하고 있는가?
다 중요합니다.
저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 지금이 '명상과 기도로' 예수님과 하나가 되려고 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이 그런 삶에 부족한 결과'라는 깊은 성찰도 하게 됩니다.
보다 더 명상과 기도로 예수님과 하나가 되려고 노력한다면, 조금 후에 지금을 두고 "오, 보나벤투라!"라고 외치게 되지 않을까?
우리네 삶 속에서 '보나벤투라'가 넘쳐났으면 좋겠습니다. 지금은 힘들지만 잘 견디어 내어서 훗날 "참으로 그때가 보나벤투라였어!" 라고 외쳤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날마다 더욱 더 명상과 기도로 예수님 사랑 안에 머물려고 노력하는 철부지들이 됩시다!
(~시편102,29)
복음말씀
제1독서
<도끼가 도끼질하는 사람에게 뽐낼 수 있느냐?>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10,5-7.13-16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5 “불행하여라, 내 진노의 막대인 아시리아!
그의 손에 들린 몽둥이는 나의 분노이다.
6 나는 그를 무도한 민족에게 보내고
나를 노엽게 한 백성을 거슬러 명령을 내렸으니
약탈질을 하고 강탈질을 하며
그들을 길거리의 진흙처럼 짓밟게 하려는 것이었다.
7 그러나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그러한 뜻을 마음에 품지도 않았다.
오로지 그의 마음속에는 멸망시키려는 생각과
적지 않은 수의 민족들을 파멸시키려는 생각뿐이었다.”
13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 손의 힘으로 이것을 이루었다.
나는 현명한 사람이기에 내 지혜로 이루었다.
나는 민족들의 경계선을 치워 버렸고 그들의 재산을 빼앗았으며
왕좌에 앉은 자들을 힘센 장사처럼 끌어내렸다.
14 내 손이 민족들의 재물을 새 둥지인 양 움켜잡고,
버려진 알들을 거두어들이듯 내가 온 세상을 거두어들였지만
날개를 치거나 입을 열거나 재잘거리는 자가 없었다.”
15 도끼가 도끼질하는 사람에게 뽐낼 수 있느냐?
톱이 톱질하는 사람에게 으스댈 수 있느냐?
마치 몽둥이가 저를 들어 올리는 사람을 휘두르고
막대가 나무도 아닌 사람을 들어 올리려는 것과 같지 않으냐?
16 그러므로 주 만군의 주님께서는
그 비대한 자들에게 질병을 보내어 야위게 하시리라.
마치 불로 태우듯 그 영화를 불꽃으로 태워 버리시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지혜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1,25-27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26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7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