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7:6-9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외국 땅에서 종살이를 할 것인데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데리고 나오셔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게 하실 것이지만 하나님은 요셉을 시기하던 이스라엘의 족장들과 함께 하지 않으시고 그들이 팔아 넘긴 요셉과 함께 하신다.
이전 말씀에서 성전과 율법을 모독한 일이 사실이냐고 대제사장이 묻자 스데반은 조상 아브라함이 순종한 이야기로 시작하며 하나님께서는 성전에 갇혀 계신 분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인도해 내시고 함께 하시는 곳이 하나님이 계신 곳이라는 뜻으로 변론을 시작했다. 이어지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것이라며 할례의 언약을 주셨지만 족장들은 아브라함과는 달리 불순종했다는 내용이다.
6절에 보면 그 자손들이 낮선 땅에서 종으로 살면서 400년동안 학대를 받을 것까지 아브라함에게 다 알려 주셨다. 이는 아브라함이 땅도 자식도 없는 상태에서 그런 말씀까지 하시는데도 아브라함은 순종했다는 말이 함축되어 있는 말이다.
7절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종으로 부리는 민족을 하나님께서 먼저 심판하신다는 것이다. 원어에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말이 심판하신다는 말 다음에 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심판하신다는 말이 분명히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그 다음에 그 자손들은 거기서 나와 이 장소에서 나를 섬길 것이라고 했다. 이는 이집트를 치시고 이집트에서 나오게 하셔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하셔서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라는 말을 두고 팽팽한 논쟁이 계속된다. 어떤 이들은 예배한다는 말을 근거로 성전이라고 해석한다. 이렇게 해석하는 이들은 스데반의 재판의 내용 전체에서 성전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출애굽해서 이곳에서 섬긴다고 했기에 "이곳에서" 란 가나안 땅이라고 해석한다. 재판 전체의 문맥이 아닌 바로 이전에 나온 3-7절을 보면 계속해서 땅을 두고 말하고 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에서 나와 들어온 그 땅이다. 그 자손들이 이집트로 노예살이 하다가 돌아와 정착할 그 땅이다. 그 땅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이런 중요한 약속은 말로만 맺으면 안된다. 그래서 8절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할례의 언약" 을 주셨다고 한 것이다. 고대 근동의 언약이란 국가간의 조약이든 개인간의 거래나 약속이든 중요한 약속은 짐승을 둘로 쪼개 놓고 그 사이를 서로가 지나가며 언약을 맺는 것이다. 그러나 짐승을 쪼개 놓고 언약을 맺으면 쉽게 잊기 쉽다. 더구나 그 약속은 아브라함 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먼 훗날 그 자손들에게 이루실 약속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 자손들의 남자들의 생식기 포피를 잘라 언약을 맺게 하신 것이다. 몸을 반으로 자르는 대신에 생식기의 포피를 자르게 하신 것은 하루에도 몇번씩 볼 때마다 그 언약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8일만에 할례을 행했다는 것이다. 이삭이 야곱을 낳고 야곱에게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야곱은 열두 족장들을 낳고 그들에게 할례를 행했다는 것이다. 그 다음은 말하지 않았지만 계속 그렇게 해왔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렇게 순종해온 아브라함과는 달리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대리자들을 거부해왔다는 것이다. 9절에 보면 그 족장들은 요셉을 시기하여 그를 이집트에 팔아 넘겼다는 것이다. 창세기에서는 형제들이라고 되어있는데 스데반은 의도적으로 족장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스라엘 12지파의 처음 족장들 때부터 그렇게 하나님께 불순종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 계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시기하여 요셉을 팔아 넘긴 족장들과 함께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께 순종하던 요셉과 함께 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과 함께 계시는 것이지 성전이나 약속의 땅에 계시는 것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를 통해 불순종하는 자들까지도 구원하시고 돌보신다. 끊임없이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의 조상들을 한결같은 사랑으로 참아주시며 순종하는 자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을 통해 불순종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함께 계심을 보여주시고 들려주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