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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6: 13-17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여전히 창조주와 구속주로 계시고 그분의 은혜의 혜택 아래 노아와 그의 가족이 존재하고 있고 살아가고 있다는데 하나님의 은혜 베풀어주심이 있습니다. 그것 뿐 만이 아닙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역사선상에 결행하시고저 하시는 일을 숨김없이 알려주시려고 노아를 향해서 말씀하시고 계시는 그 자체가 또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상에 교회를 유지하시고 보존하실 계획을 노아에게 말씀하시고 그 당사자가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되리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선하신 하나님의 의지와 그분의 영원하신 안목으로 결행하실 일을 그의 귀로 듣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지의 실행이 될 그분의 엄위로우신 음성을 듣고 있습니다. 이것이 노아의 복된 상태입니다.
1. 본문 13절은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血肉)있는 자의 강포(强暴)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입니다.
1) 여기서 모세는 어떻게 노아가 멸망되지 않고 보존되어질 것인가에 대하여 해설합니다.
그리고 첫 번째로 하나님이 이 세상을 멸망시키실 것에 관하여 계획하신 것이 그에게 계시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두 번째로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방주 안에 피하게 되면 그런 안전이 그에게 임할 것이라고 약속하신 사실입니다. 이런 주요한 점들을 분명하게 눈여겨보아야 될 것입니다. 그것은 사도가 노아의 신앙에 대하여 선언할 때에 경외하심과 순종에 확신을 병합시키고 있는 때도 마찬가지 의미입니다(히11:7). 그리고 노아가 다가오는 무서운 보복에 대하여 경고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거룩한 목적에 그가 확신을 갖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려움으로 제재를 받은 그가 그 자신에게 주어진 호의를 더욱 더 열심히 추구해 나가도록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때로 악한 자들의 형벌을 받지 않을 경우가 흔히 선한 사람들을 범죄하도록 유혹하는 경우가 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미래의 형벌에 대한 고발이 거룩한 사람의 마음을 억제하는 때에 보다 더 좋은 효력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가 점진적인 타락으로 마침내 그들과 똑같은 호색에 빠지지 않게 하려고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른 점에 관하여 특별한 시사를 하고 계십니다.
세상의 무서운 멸망을 계속 생각하게 하심으로 노아가 더욱 더 두려워하고 마음 졸이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어느 곳에서도 도움은 찾을 수가 없는 철저한 절망 가운데서 노아가 오직 믿음으로 방주 안에서 안전하게 구출되는 것만을 추구해야 되는 것이 절대로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생명이 약속되어져 있는 한, 그는 방주를 만드는 데에 그렇게 자기가 마땅히 해야 될 열심을 쏟아서 그 일을 수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대신에 하나님에게서 심판에 대한 경고를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어진 생명의 약속을 그토록 열심히 붙잡았던 것입니다. 그는 더 이상 자연적인 원인이나 생활의 방편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전적으로 하나님의 언약에 모든 것을 맡겼습니다. 그래서 그런 하나님의 언약으로 기적적으로 보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제 아무리 고된 일이나 어려운 노동이라고 할지라도 그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길고 지루한 노역에도 그는 좌절하지 않고 견딜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자극이 그를 너무도 예리하게 찔렀기 때문에 잠시라도 육신적인 쾌락에 도취되어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시험을 받으면서 맥빠져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헛된 소망으로 자기의 일을 지연시킬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을 더욱 더 자극시켜 정신을 차리고 죄를 멀리하고 치료 방법을 찾는 데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사도도 가르치기를 보지 못한 일들에 대하여 경외심을 갖고 노아가 방주를 마련했다는 사실이 그의 신앙의 극히 적은 부분이 절대로 아니었다고 합니다
신앙이 단순히 긍휼과 관련되어 무상의 약속이 주어질 때 그리고 또한 우리가 그 모든 것을 표현하기를 원하고 그것의 전체적인 위력과 성질을 발휘하기를 원할 때는 역시 경외심이 그 믿음과 함께 수반되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상 아무도 하나님의 긍휼에 그렇게 진지하게 의지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오직 그분의 위협으로 감동을 받은 자들만이 사람들 자신이 비난하는 영원한 죽음의 심판을 두려워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감동을 받은 자만이 자신의 죄를 생각하고 자기 자신을 미워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조심성 없이 자기의 사악한 일을 탐닉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부패된 생활 가운데서 천하태평으로 잠만 자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의 죄악에 대한 치유책을 찾는 데에 열심을 다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장차 되어질 홍수에 대하여 경고하신 그 사실이 정말로 특이한 은혜였습니다. 사실은 노아에게 주신 말씀 그 자체는 흔히 하나님의 위협을 선택된 자들과 일반적으로 그분에게서 버림을 받을 자들에게 제안되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들 두 분류를 회개하도록 초대함으로 선택된 자들은 겸손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버림받은 자들에게는 도저히 변명할 수 없는 상태로 이끌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류의 훨씬 많은 사람들이 귀머거리가 되어 그들에게 말해지고 있는 것을 무엇이든지 배척해 버리고 있습니다.
모세는 여기서 특별히 그의 이야기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치유될 수 있는 희망이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들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두려움을 갖게 함으로 단련시켜서 경건에 이르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악한 자들의 상태는 거룩한 노아의 열심과 비교해 보면 바람직한 것으로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조금도 염려하지 않고 그들의 쾌락에 도취되어 놀아났습니다. 그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그 시대의 사치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눅17:26). 한편 그 거룩한 사람은 세상이 파멸 직전에 있는 것처럼 걱정스럽게 그리고 슬픔에 잠겨서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종말을 생각해 보면 하나님이 장차 닥쳐오는 위험에 대하여 알려주시고 그것에 대하여 조심하라고 말씀해 주시면서 그분의 종에게 헤아릴 수 없는 혜택을 허락하신 사실을 보게 됩니다.
2)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라는 말씀에 하나님은 인간들을 이 땅에서 치워버리고 그렇게 악한 존재들이 이 땅에 있으므로 오염된 땅을 정결하게 하시려는 의도를 암시하고 계십니다.
그들 인간들이 서로를 향하여 기만하고 약탈하는 범죄와 포악에 대해서만 언급하시면서 암시하시는 것은 그것들에 관한 그분의 주장을 완화시키려는 의도가 아니라 그 죄악이 더욱 더 심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죄악성이 이것을 통하여 더욱 더 명료하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에 그것만을 언급하고 계신 것입니다.
2. 본문 14-17절은
“⑭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
⑮그 방주의 제도는 이러하니 장이 삼백 규빗, 광이 오십 규빗, 고가 삼십 규빗이며 거기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중하 삼층으로 할지니라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식 있는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자가 다 죽으리라” 입니다.
여기서는 방주를 지으라는 명령이 따르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종 노아의 신앙과 순종을 놀라웁게 입증하고 계십니다. 그 방주의 구조에 관하여는 우리 자신들의 교훈이 관련되는 것을 제외하고는 우리가 그렇게 열심을 내서 따지고 들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첫째로 유대인들은 방주가 만들어진 나무의 종류에 관해서도 그들 사이에 의견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어떤 자들은 이 잣나무라는 말을 백향목이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다른 자들은 전나무라고 하며 또 다른 자들은 소나무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배의 구조에 대하여도 의견이 각각 다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그 방주의 수채통이 네 번째 장소로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실상 배설물과 더러운 찌꺼기들을 받는 곳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방주가 세 층으로 되어서 다섯 칸으로 되었다고 하며 맨 윗칸에는 새들을 두는 곳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높이로는 삼층이지만 이것들이 중간 칸막이를 설치해서 분리시켜져 있었다고 생각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 외에도 그들은 창문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어떤 자들에게는 그 배에는 창문이 한 개 뿐만 아니라 많은 창문들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자들은 말하기를 그 문들이 공기 유통을 위하여 항상 열려져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주장하기를 그것들은 오직 빛을 받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것들이 수정 같은 것으로 가리워져 있었으며 안팎에는 역청같은 것으로 둘러가며 봉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 방주에는 문이 하나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채광용으로 열어 놓은 것이 아니라 뒤에 보면 알게 되겠지만 필요할 때를 제외하고는 그것을 닫아 놓았던 것으로 보는 것이 보다 타당성이 있는 듯합니다. 더 나아가서 거기에는 삼층으로 되어 있었으며 방들도 우리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방법으로 각각 분리되었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더 가능성이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그것의 크기에 관해서는 더욱 더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모독하는 사람들은 모세를 공식적으로 비웃으면서 그토록 많은 동물들을 그렇게 작은 곳에다 쳐박아 놓았다고 하여 그들 터무니없는 망상을 하는 자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조소하며 주장하기를 삼층에는 코끼리 네 마리만 들어가도 겨우 들어 갈 듯 말 듯 하였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리겐이 이 문제를 해결하고 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모세는 기하학적인 규빗을 언급하고 있으며 그것은 일반적인 것보다 6배가 더 큰 측량 단위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의 의견에 대하여 어거스틴도 역시 동의하고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그의 저서 [하나님의 도성] 제 15번째의 책에서와 [창세기에 관한 문제점들]이라는 첫 번째 책에서 그 사실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추측하고 있는 것을 용납하고 있습니다. 즉 이집트의 과학을 다 교육받은 모세가 그런 기하학에 대하여 무식했을 리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모든 곳에서 그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해 역량에 적합한 일반적인 문제를 사용하여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고 의도적으로 예민한 논쟁에서 되도록 피하여 학파와 그리고 보다 깊은 학식에 대한 냄새를 풍기지 않으려고 삼가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모세가 자기의 일반적인 방법에 상반되는 그런 기하학적인 정교한 단위를 사용하였다고는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우리 자신을 절대로 설득시킬 수가 없습니다.
확실히 첫 번째 장에서는 보통 철학자들이 하는 대로 별들에 대하여 과학적으로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그 대신에 모세는 그 당시의 통속적인 방법으로 진리에 근거해서 말하기보다는 무식한 사람들에게 보이고 있는 대로 ‘두 큰 광채’ 라고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느 곳에서나 모세가 그 당시 사람들의 풍습에 젖어있는 명칭들을 가지고 모든 것들을 지칭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결론으로 나간다면 과연 그 규빗이 어느 정도이었는가는 우리도 모릅니다. 그러나 조금도 논란이 없이 하나님이 그 방주의 원 설계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바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그분의 종에게 어느 곳은 무슨 동물을 위해서 지으며 그것들을 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자세하게 말씀하신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정확하게 용도를 알고 지시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 없이 믿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특별하신 능력을 배제해 버린다면 여기서 모든 말들은 단지 우화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선포하는 결과에 이르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나머지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불가사의한 기적으로 보존되었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우리에게는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놀라운 많은 일들은 절대로 불합리한 것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기록된 것은 우리의 모든 지각을 훨씬 능가하는 하나님의 은밀하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막대한 능력을 보다 분명하게 제시하려는 것이라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포피리나 기타의 다른 트집쟁이들은 그것에 대한 이유가 나타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또는 그것은 도저히 비정상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그 사실은 자연의 공통적인 질서에 모순되기 때문에 부질없는 이야기라고 하며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반문에 대하여 이렇게 답변합니다. 즉 모세의 이 모든 해설들이 기적들로서 가득 차 있지 않다면 그것들은 냉담한 내용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시시하고 우스꽝스러운 이야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 가운데서 하나님의 전능성의 심오한 주도면밀하심을 올바로 다시 생각해 보는 사람은 이 내용에 대하여 모독적인 조소에 급급하기보다는 도리어 경외하는 놀라움에 도취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어거스틴이 이 방주의 비유를 그리스도의 몸에 적용하는 우화적인 방법으로 해석하는 것을 고의적으로 그냥 지나쳐 버리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도성] 이라는 그의 15번째의 책에서와 파우스트에 반박하여 기록한 그의 12번째의 책에서 그 비유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지나쳐 버리는 이유는 거기에서 거의 확고한 근거를 발견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리겐은 아직도 더욱 담대하게 그런 우화적인 해석으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들을 자연스럽게 다루는 것을 고수하는 것보다 더 보람된 것은 없습니다. 그 방주가 교회의 형상이라는 것은 베드로의 간증에서 보아도 확실합니다(벧전3:21). 그러나 그 방주의 여러 가지 부분을 모두 그대로 교회에 적용시키는 것은 절대로 적절하지 않은 주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