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한 롯데. 롯데는 전반기를 하위권으로 마치고, 후반기 상위권에 올라서고서 한국시리즈까지 거머쥔 행운의 팀이다
열전을 거듭한 전반기가 끝나고 후반기가 진행 중이다. 전반기처럼 후반기 순위 싸움도 앞을 내다볼 수 없을 만큼 혼전을 거듭하고 있다. 전반기 부동의 1위를 달리던 삼성이 주춤한 사이 3위였던 두산이 1위와 2,5경기 차로 2위를 달리고 있다. 전반기 2위였던 롯데는 3위로 떨어지며 숨 고르기를 하고 있다.
3위 넥센은 6위로 떨어진 반면, 6위 SK는 3위 롯데와 승차 없는 4위로 올라섰다. 주목할 팀은 KIA다. KIA는 최근 3연승으로 롯데, SK에 승차 없이 5위를 지키고 있다. 7위 LG의 고전이 눈에 띄나, 4위 SK와의 승차는 6.5경기 차다. 아직 포기하기엔 이르다는 뜻이다.
<스포츠춘추>에서 프로야구 30년 동안 전반기 하위권에 있다가 후반기 상위권으로 도약한 팀들과 반대로 전반기 승승장구하다가 후반기 나락으로 떨어진 팀들을 찾았다. 전반기 4위권 밖이던 팀 가운데 후반기 대반전에 성공해 포스트 시즌 진출에 성공한 대표적인 4개 팀과 그 반대인 1개팀은 아래와 같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라는 야구의 명언처럼 아직 시즌은 끝나지 않았다.
롯데의 전설 고 최동원
1984년 : 롯데
전반기 성적 : 21승 1무 28패 (4위) / 후반기 성적 : 29승 1무 20패 (1위) / 종합 성적 : 50승 2무 48패 (1위)
+ 1982년 프로야구 출범 이후 롯데는 3위권 이내에 단 한 번도 들지 못했다. 하지만, 부산 팬들은 실망하지 않고, 구덕구장에 ‘올해를 기다렸습니다!’란 구호가 새겨진 현수막을 내걸었다. 그러나 1984시즌도 출발은 좋지 못했다. 주포 김용희를 비롯한 중심타선이 ‘영’ 힘을 쓰지 못했다. 급기야 구덕구장에 내걸렸던 현수막은 찢기고, 성난 부산 팬들은 구단을 비난하는 유인물을 돌렸다.
전기리그를 4위로 마친 롯데는 터닝포인트가 필요했다. 그때 에이스 최동원이 나섰다. 최동원은 자신이 후반기 역습의 선봉장이 되길 마다하지 않았다. 7월 8일 후기리그 첫 경기에서 최동원은 삼미전에 등판해 4안타 무실점으로 4-0 완봉승을 거둔다. 그러나 최동원 혼자 힘으로 상위권 진출을 역부족이었다. 롯데는 후기리그에서도 8월 초까지 5위에 머물며 3년 연속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하는 듯했다.
이때 ‘뜻밖에도’ 좌절하던 롯데의 손을 잡아준 이가 있었다. 삼성이었다. 당시 삼성은 전기리그에서 우승하며 후기리그까지 제패해 한국시리즈 없이 통합우승컵을 안을 심산이었다. 그러나 후기리그 들어 우승할 길이 멀어지자 ‘입맛에 맞는’ 파트너를 선택하는 것으로 전략을 바꿨다. 당시 삼성은 ‘손쉽게 이길 수 있는 팀’으로 전기리그 4위였던 롯데를 선택했고, 롯데의 후기리그 우승을 위해 눈물겨운 지원을 실행한다.
9월 22, 23일은 프로야구 역사에 남을 져주기 게임이 펼쳐진 날이었다. 후기리그 1위를 달리던 롯데는 홈인 부산에서 삼성과, 1경기 차로 2위를 달리던 OB는 제주에서 해태와 2경기를 치를 예정이었다.
OB가 제주경기에서 2승을 따내고, 롯데가 2연패하면 후기리그 우승은 OB의 차지였다. OB는 삼성이 최소한 1경기 만이라도 이기길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삼성 김영덕 감독 입장에선 있을 수 없는 시나리오였다.
당시 야구계엔 김 감독과 OB의 악연을 들어 “삼성이 롯데에 져줄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흘러나왔다. 실제로 김 감독과 OB의 악연은 유명했다. 악연의 시작은 성적부진과 박철순의 부상에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김 감독이 OB 사령탑에서 물러난 1983년 10월부터였다. 김 감독은 사퇴 후 거취를 묻는 말에 “다시 야구이론을 정립하겠다”며 일본 유학을 선언했다. 그러나 정작 김 감독의 발길이 닿은 곳은 일본이 아니라 대구였다. 전격적으로 삼성 감독에 취임한 것이었다.
OB 감독을 사퇴하고서 정확히 11일 뒤 삼성 감독에 취임하자 친정팀 OB는 김 감독을 “배신자”라며 맹비난했다. OB는 분을 삭이지 못하고, 1983년 5월 삼성 감독에서 물러난 ‘대구야구의 대부’ 서영무를 1984년 2월 관리이사로 영입하며 삼성을 곤혹스럽게 만든다.
김 감독과 OB의 갈등은 선수들의 감정싸움으로까지 번져 1984년 전기리그에서 두 팀 선수들은 자주 몸싸움을 벌였다. 김 감독 입장에서 OB의 한국시리즈 진출은 가장 피하고 싶은 시나리오였던 것이다. 결국 김 감독은 롯데와의 2연전에서 온갖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져주기 경기를 감행했고, 원하던 데로 롯데를 후기리그 1위로 올려놨다.
그러나 역사는 김 감독의 시나리오에 동의하지 않았다. 한국시리즈에서 삼성은 롯데에 3승4패로 패했고, 2001년까지 삼성은 한국시리즈에서 한 번도 우승하지 못했다.
1988년 삼성 장효조는 트레이드 압박에 전반기 부진했지만, 후반기 들어 타율 3할1푼4리를 기록했다
1988년 : 삼성
전반기 성적 : 23승 1무 30패 (5위) / 후반기 성적 : 33승 1무 20패 (1위) / 종합 성적 : 56승 2무 50패 (4위)
+ 삼성은 ‘슈퍼스타들의 집합소’였다. 선수 개인 능력만 보자면 최고였다. 실제로 삼성은 1983년 이후 개인 타이틀을 휩쓸었다. 타율, 타점, 홈런, 최다승, 최고구원투수상 등 해마다 2, 3개씩의 개인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하지만, 1988년엔 김성래의 출루율 1위가 유일했다. 주전 선수들의 부상이 그만큼 많았던 까닭이다.
일본 노베오카 스프링캠프서부터 부상자들이 속출했다. 시즌이 시작하고서도 연쇄 부상은 멈출 줄 몰랐다. 이만수, 장효조, 허규옥, 오대석, 류중일 등 주전 야수뿐만 아니라 권영호, 양일환 등 주전투수들도 부상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아니나다를까. 전반기 초반 12경기에서 삼성은 5승7패로 부진했다. 급기야 에이스 김시진이 5월 12일 대구 롯데전에서 마무리로 등판했다가 유두열의 타구에 맞아 오른손 엄지를 다치며 삼성은 끝을 모르고 추락했다.
삼성은 5월 말이 되자 일찌감치 전기리그를 포기했다. 당시 프로야구는 전·후기리그로 나눠 진행됐다. 전기리그 1, 2위 팀과 후기리그 1, 2위 팀이 포스트 시즌에서 맞붙는 방식이었다. 결국 삼성은 23승1무30패로 전기리그 5위에 그쳤다.
6월 초부터 경기보단 훈련에 치중한 삼성은 6월 19일 올스타전이 끝나자 이전과는 다른 팀으로 변신했다. 전기리그에서 타율 2할6푼9리에 머물렀던 장효조는 후기리그에서 타율 3할1푼4리로 살아났고, 손가락 부상 여파로 전기리그 4승에 그쳤던 김시진은 후반기에만 7승을 거뒀다.
삼성은 33승1무20패로 후기리그 2위에 오르며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한다. 그러나 삼성은 창단 3년 만에 플레이오프에 오른 빙그레(한화의 전신)와의 승부에서 내리 3연패하며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하고 만다. 이 패배로 1986년 이후 삼성은 포스트 시즌에서만 10연패하는 수모를 겪는다.
‘플레이오프 완패’ 후폭풍은 거셌다. 삼성은 프로구단 가운데 최초로 모그룹의 감사를 받았다. 박영길 감독 역시 완패 책임을 지고 해임됐다. 삼성은 장기발전 5개년 계획을 세우며 ‘새출발’을 선언했다. 당시 삼성이 약속한 장기발전의 핵심 내용은 ‘전용구장 건설’, ‘스포츠 주식회사로의 전환’, ‘대구구장의 대폭적인 보수’였다. 놀랍게도 24년이 지난 지금도 전용구장 건설과 대구구장의 대폭적인 보수는 제자리다.
1997년 : OB
전반기 성적 : 36승 3무 28패 (4위) / 후반기 성적 : 21승 2무 39패 (8위) / 종합 성적 : 57승 5무 64패 (5위)
+ OB(두산의 전신)는 2년 동안 천국과 지옥을 경험했다. 1995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맛볼 때만 해도 천국도 그런 천국이 없었다. 그러나 1996년 꼴찌로 내려앉자 지옥문이 열렸다. 1997시즌을 준비하는 OB는 그래서 혼란 그 자체였다. 일단 전망은 밝았다.
에이스 김상진, 내야수 김민호와 이명수가 부상에서 탈출한데다 루키 포수 진갑용, 투수 이경필 등 대어급 신인이 속속 보강됐다. 여기다 스위치 히터 장원진과 권명철이 공익근무을 마치고 후반기에 복귀할 예정이었다. 김인식 감독은 “올 시즌은 해볼 만 하다”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전반기는 김 감독의 자신감이 빈소리가 아님을 증명한 무대였다. 투수들의 분전과 정수근, 김민호의 불붙은 타격으로 두산은 전반기를 36승3무28패로 마감했다. 별다른 악재가 없다면 포스트 시즌은 당연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후반기 들어서자 예상하지 못했던 변수들이 발목을 잡았다. 7월 18일부터 시작한 광주 해태 3연전이 악몽의 출발이었다. 이 3연전에서 안경현은 팔꿈치 부상으로 엔트리에서 제외됐고, 선발 이경필은 느닷없는 복통으로 마운드에 오르지 못했다. 결국 해태에 3연패당한 OB는 정수근마저 손가락 골절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하며 비틀거리기 시작한다.
급기야 믿었던 선발진마저 무너지고, 이명수와 심정수도 부상으로 개점휴업에 들어가자 OB는 연패를 거듭한다. 특히나 좌완 몰락이 결정타로 작용했다. 이해 OB는 김영수, 류택현, 한명윤 등 좌완을 차례로 마운드에 올리지만, 4월 15일 전주 쌍방울전에서 한명윤이 구원승을 따냈을 뿐 다른 좌완은 1승도 거두지 못했다.
후반기를 21승2무39패로 끝낸 OB는 종합 성적 57승5무64패로 포스트 시즌 진출에 실패한다. 그나마 얻은 소득이라곤 마무리 김경원이었다. 이해 김경원은 36경기 무패 행진을 하는 등 48경기에 등판해 3승24세이브 평균자책 1.96으로 두산의 별이 됐다.
2002년 LG 기적을 이끌었던 이상훈
2002년 : LG 전반기 성적 : 35승 3무 36패 (5위) / 후반기 성적 : 31승 3무 25패 (2위) / 종합 성적 : 66승 6무 61패 (2위) + LG그룹의 사명은 원래 ‘럭키금성’이었다. LG 트윈스의 출발은 ‘럭키(Lucky, 행운)’했다. 1990년 MBC 청룡을 인수해 창단하자마자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모그룹의 전폭적인 지원과 선진적인 프런트, ‘신바람 야구’로 대변하는 독특하고 패기 넘치는 플레이로 LG는 1994년에도 한국시리즈 우승을 거머쥔다. 이후로도 LG는 1990년대 대표적인 강팀으로 리그를 지배한다. 하지만, 2000년 들어 주춤하기 시작했다. 2000년 4위에 이어, 2001년엔 6위로 내려앉았다. 2002시즌 전망도 그리 밝지 않았다. 모 구단 감독은 “LG가 한국시리즈에 오르면 손에 장을 지지겠다”고까지 했다. 역시나.
LG의 개막 9연전 성적은 2승7패로 몹시 부진했다. 외국인 야수 매니 마르티네스는 개막전 당일 벤치에서 오른손이 찢어져 쉬었고, 외국인 투수 라벨로 만자니오와 안병원의 ‘원투펀치’는 한달을 버티지 못했다. 김성근 감독이 회심의 카드로 선보였던 선발 전승남과 마무리 신윤호도 부진을 거듭하며 전승남은 아예 2군으로 내려간다.
게다가 ‘제2의 신윤호’로 불리던 기대주 방동민은 시즌 중 KIA로 트레이드됐으며, 프런트와 현장은 끊임없이 불협화음을 연출했다. LG는 5월에만 4연패, 2연패, 3연패, 2연패를 당하며 선두권과의 격차를 좁이지 못했다. 6월 7일까지 LG의 순위는 7위였다.
하지만, LG는 5월 중순부터 조금씩 다른 팀이 되기 시작했다. 뜻하지 않은 ‘행운’이 따랐다. 첫 번째 행운은 좌완 이상훈의 복귀였다. 이상훈은 1군 복귀 3경기 만에 마무리 를 꿰차며 LG의 뒷문을 단단하게 지켰다. 장문석-이동현의 셋업조도 이상훈의 가세로 더 탄탄해졌다.
두 번째 행운은 ‘꾀돌이’ 유지현의 복귀였다. 수술로 시즌 아웃까지 예상됐던 유지현은 5월 말 팀에 합류해 공수의 플레이메이커 역할을 톡톡히 한다. 세번째 행운은 우완 최원호와 최향남의 컴백이었다. 최원호는 부상에서 복귀한 뒤 시즌이 끝날 때까지 풀타임을 소화하며 팀의 주축투수로 맹활약한다.
부상선수들이 복귀해 선전을 펼치며 LG는 전반기를 5위로 마감한다. 이때 등장한 4번째 행운이 바로 최향남이었다. 최향남은 전반기에 1승만을 거뒀을 뿐이었다. 하지만, 후반기 들어 6승을 거두며 팀 상승세를 이끌었다.
화려한 개인 능력보다 탄탄한 팀 워크가 돋보인 LG는, 김 감독의 세밀하고 철저한 야구가 더해지며 후반기 내내 4위 자리를 놓치지 않는다. 그리고 결국 4위로 시즌을 마감하고 포스트 시즌에 진출한다.
LG의 기적은 포스트 시즌이 더 강렬했다. ‘객관적 전력에서 두 수 위’라던 현대를 맞아 준플레이오프에서 승리를 거뒀다. LG는 KIA와의 플레이오프에서도 믿을 수 없는 방식으로 승리를 챙겼고, 한국시리즈까지 진출하는 경사를 누렸다. 비록 패하긴 했지만, ‘올스타팀’ 삼성과의 한국시리즈에서도 6차전까지 가는 끈질긴 면모를 보였다.
당시 야구관계자들은 “지금의 LG보다 앞으로의 LG가 더 기대된다”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김 감독은 프런트와의 반목으로 해임됐고, 베테랑 선수들은 차례로 팀을 떠났다. 그리고 LG는 이해 이후 9년간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지 못했다.
KIA 전 감독 김성한은 현역시절엔 슈퍼스타였으나, 지도자가 된 이후엔 행운이 따르지 않았다
2003년 : KIA
전반기 성적 : 36승 2무 33패 (5위) / 후반기 성적 : 42승 3무 17패 (1위) / 종합 성적 : 78승 5무 50패 (3위)
+ 2002년 전반기 KIA는 KIA였다. 전신 해태와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막대한 투자를 하고도 전반기 성적은 그저 그랬다. 실제로 KIA는 한국시리즈 우승을 위해 2003년 1월 15일 현금 10억 원과 3루수 정성훈을 내주고 현대에서 거포 박재홍을 영입했다. 이튿날엔 현금 8억 원과 외야수 김창희, 투수 손혁을 내주고, 두산 마무리 진필중을 영입하는 파격적인 투자를 실행했다.
당시 야구계는 두 건의 트레이드를 지켜보며 “KIA가 드디어 한국시리즈 우승 베팅을 했다”고 분석했다. 역시 시즌 시작은 좋았다. KIA는 4월 5일 광주 한화와의 시즌 개막전에 승리하면서 8연승을 달렸다. 외국인 투수 다니엘 리오스와 김진우, 최상덕으로 구성된 선발진은 막강했고, 타선도 승부처에서 적시타를 치면서 선발진의 호투를 든든히 받쳤다.
하지만, 4월 19일 에이스 김진우가 새벽 광주 시내에서 폭행사건에 휘말렸다가 오른손을 다치면서 불행이 시작됐다. 여기다 3번 타자 장성호가 왼쪽 팔꿈치에 웃자란 뼈 때문에 날카로운 스윙을 하지 못하면서 타선마저 침체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우승청부사’ 박재홍마저 4월 26일 대구 삼성전에서 주루 도중 햄스트링으로 쓰러지며 KIA는 걷잡을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진다.
5월 4일 수원 현대전은 KIA 구단 사상 잊을 수 없는 경기였다. 그날 KIA는 10대 1로 이기고 있었다. 하지만, 마무리 진필중이 9회 말 심정수에게 끝내기 3점 홈런을 맞으며 10-12로 대역전패한다. 이때의 충격이 컸는지 KIA는 내리 7연패의 수렁에 빠지며, 전반기를 5위로 마감한다.
그러나 후반기 KIA는 해태의 재림이었다. 올스타 브레이크에 휴식을 반납한 채 훈련에 몰두한 KIA는 8월에만 19승2무4패 승률 8할2푼6리를 거두며 대반격에 성공한다. 진필중을 대신해 새로운 마무리로 등장한 고졸 2년 차 신용운은 제몫을 다했고, 새로운 외국인 투수 마이클 존슨이 깜짝 8연승을 거둔 게 원동력이었다.
그해 나란히 100타점을 올린 신세대 듀오 장성호(105개)와 홍세완(100개)이 타선을 주도하고, 후반기부터 박재홍이 연일 적시타를 친 것도 큰 도움이 됐다. 전반기를 5위로 마감했던 KIA는 후반기 들어 기적같은 승률 7할을 기록하며 정규 시즌 2위까지 점프한다.
9월 29일 광주 현대전에서 승리한다면 1위로 시즌을 마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대 에이스 정민태의 호투에 밀려 1-5로 패하며 KIA의 한국시리즈 직행은 무산되고 만다.
결국 KIA는 준플레이오프에서 삼성을 2연승으로 꺾고 올라온 SK를 맞아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3연패하며 플레이오프에서 패자가 된다.
KIA는 2년 연속 한국시리즈 진출 실패의 문제점을 분석하고서 다시 한번 ‘통큰’ 투자를 결행한다. 스토브리그에서 40억 원을 투입해 FA(자유계약선수) 최대어 마해영을 영입한 것이었다. 결과는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