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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金正喜 선생의 삶
此 國 香 也 君 子 也
김성환
1. 출생
김정희의 고조부는 金興慶, 증조부는 金漢藎, 조부는 金頤柱, 생부는 金魯敬이다.
그는 1786년 6월3일 충남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249번지에서 출생하셨다. 친가와 외가 모두 이름난 명필 집안이었으며 증조부 되는 월성위 김한신은 영조의 딸인 화순옹주와 혼인하여 영조의 사위로서 명실공히 왕가와 사돈을 맺은 남 부럽지않은 명문가의 집안이 되었다.
추사는 아버지 김노경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 기계 유씨는 김제 군수를 지낸 유준주의 딸이다. 민규호가 쓴 “완당 김공 소전” 에서는 어머니 유씨가 회임한지 24개월 만에 낳았다고 한다. 洪翰周의 저서로 추정되는 “ 智水점필 ” 을 보면 추사의 어머니는 본래 회임 기간이 비정상이 었던듯, 아우인 명희는 18개월 만에 낳고, 막내동생 상희는 약간 빨라서 12개월 만에 낳았다고 한다.
추사가 태어날 무렵 뒤편 우물이 줄어들고 뒷산인 八峯山 나무들이 시들시들 하다가 그가 태어나자 다시 샘이 솟고, 나무도 살아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추사의 천재성이 예산의 정기를 타고 났다고 말하고 싶어하는 자들이 지어낸 이야기일 것이다.
姜斅錫이 쓴 “大東寄聞” 에는 추사가 일곱 살 때 입춘첩을 써서 대문에 붙였다. 번암 蔡濟恭이 지나가다 행차를 멈추고 이것을 보고 들어와 누구의 집이냐고 물으니 참판 김노경의 집이라고 한다. 본래 김노경과 채제공 집안은 (남인과 노론) 世嫌이 있어서 만나지 않는 사이였다. 김노경은 크게 놀라 “閣下 어이해서 소인의 집을 찾아 주셨습니까? 하니, 채제공이 말하길 대문에 붙인 글씨는 누가 쓴 것이오 라고 묻는다. 노경이 대답하길 우리집 아이의 글씨라고 하자 채제공이 말하길 “이 아이는 반드시 명필로서 이름을 한세상에 떨칠 것이오. 그러나 만약 글씨를 잘 쓰게되면 필시 운명이 기구할 것이니 절대로 붓을 잡게 하지 마시오. 그러나 만약 문장으로 세상을 울리게 되면 크게 貴하게 되리다.”고 했다.
金承烈의 김정희 묘비문에도 입춘첩 이야기가 나온다 (초정 박제가가 월성위 궁 대문에 붙은 어린 추사가 쓴 입춘첩을 보고 ⋯⋯
추사가 여덟살 때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 한통이 세상에 전하고 있다.
秋史: 秋氣와 같이 맑고 맑은 품격에 義理를 위해서는 집중한다.
예산에 있는 생부에게 급히 쓴 안부 편지로 보인다.
伏不審潦炎 氣候若何伏慕區區 子侍讀 一安伏幸 伯父主行次今方離發而意味
己日熱如此伏悶伏悶命弟 幼妹亦好在否餘不備伏惟 下覽 上 白 是 癸丑 流月 初十日
子 正喜 白 是
<굽어 살피지 못하는 한 여름에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소자는 어른을 모시고 책 읽기에 한결같이 편안 하오니, 걱정 마십시오. 백부께서는 이제 곧 행차하시려고 하는데 장마가 아직도 그치질 않았고 더위도 이와 같으니 염려되고 또 염려됩니다. 아우 명희와 어린 여동생은 잘 있는지요? 제대로 갖추질 못합니다, 굽어 살펴주시옵소서. 이와 같이 사룁니다.
계축년(1793) 유월 초열흘 아들 정희가 아룁니다.
2. 燕京에서 옹방강(翁方綱)을 만나다.
24세 때 추사는 淸나라 연경에 동지부사로 떠나는 생부 김노경을 자제군관 자격으로 수행하였다. 추사는 연경에 60일간 머물면서 대학자인 옹방강, 완원, 조강 등과 교류하면서 고증학, 경학, 금석학, 청조 문인화풍 등 학문 영역을 넓혀 나가기 시작했으며, 청국 대학자들도 추사를 보고 <經術文章 海東第一>이라는 극찬의 휘호를 내렸다.(아! 해동에 이런 英物이 있었단 말인가!) 추사는 一世의 通儒로다! 라는 최대의 극찬을 내리면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고 한다.
秋史의 본은 경주. 자는 원춘. 호는 추사, 완당, 승련노인, 예당, 거사, 선객노인, 만향, 구경, 과파, 과농, 천축고 선생, 삼십육구초당, 칠십이구초당 등 ⋯⋯
추사는 24세 때 생원시에 합격함으로써 자제군관 자격으로 연경에 처음으로 갈수가 있었다. 12세 때 큰아버지(김노영)에게 양자로 입적한 것이 큰아버지와 친분이 깊었던 실학파의 거두 초정 朴齊家를 만나서 고증학, 경학, 서예, 실사구시 학문에 대해 큰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었다.
* 秋史가 燕京을 떠날 때에는 수많은 옹방강, 완원을 비롯한 청나라 학자들이 석별의 정을 금할 수가 없어서 송별연을 벌이고 또 그것을 그림으로 그려서 많은 진귀한 서적과 불경및 금석학 사본들을 한 수레 가득 선물로 보냈다 한다.
* 송별연은 북경에 있는 法源寺에서 열렸다. 淸나라의 대화가 朱鶴年은 추사에게 즉석에서 송별연 그림을 그려서 선물 하였다. 주학년이 그린 추경산수도는 아유가이 후사노신씨가 소장. 연경에서 돌아온 추사는 틈만 나면 남산에 올라가 연경이 있는 북쪽하늘을 향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밤에는 머나먼 곳에 있는 옹방강, 완원을 생각하며 밝은 달을 쳐다보면서 마음속으로 대화하며 그들의 그리운 얼굴들을 그려 보았으리라. 추사는 20세 전후에 이미 국내외에서 이름을 떨쳤다.
* 초의선사 연보에는 옹방강의 부음을 들은 완당은 南山에 올라 蠶頭峯쪽(서쪽)에 머리를 두고 스승을 기리며 통곡했다고 기록되어있다.
* 實事求是 : 淸나라 고증학자 고염무가 주창한 것으로 “사실에 의거하여
사물의 진리를 찾는다.”는 뜻
3. 歲寒圖의 탄생 < 국보 제 180호 >
1840년 헌종이 즉위한지 6년 되던 해에 다시 윤상도 사건이 불거져 나왔다. 발원은 당시 모든 권세를 쥐락펴락하던 안동김씨 일가였다. 당시 학문적 성취도가 높고 병조참판까지 지내던 金正喜가 속한 경주김씨 세력을 제압하겠다는 목적으로 尹 尙度의 옥사문제를 재거론 한 것이었다.
의금부에서 그 당시 죄인들을 다시 잡아들여 추궁한 끝에 윤상도의 초안을 김정희가 작성했다는 진술이 나왔다. 물론 전혀 근거가 없는 일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김정희의 생부 金魯敬은 결국 사약을 받아 죽게 되고, 김정희의 목숨 역시 경각에 달렸다. 의금부 감옥에 갇혀있는 김정희는 아버지에게 내려진 사약 소식을 듣고 앞일을 예감할 수 있었다.
“아버님, 이 불효자를 용서 하십시오, 10년 전 아버님을 지켜드리겠다는 약조를 끝내 지키지 못하고, 천수를 누리지 못한채 돌아가시게 하고 말았습니다. 이 恨은 저승에 서라도 꼭 풀겠습니다. 저도 곧 뒤를 따르겠으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세한도는 추사가 제주도에서 5년 동안의 유배생활을 할 때 그의 제자 藕船 李尙迪(1804-1865)이 자신을 대하는 한결같은 고마운 마음에 감격하여 그린 그림이다. 추사는 그림 왼편에 해서체로 작품을 그리게 된 연유를 다음과 같이 적어 놓았다.
그대가 지난해에 계복의 晩學集과 운경의 大運山房文庫 두 권을 부쳐주고, 올해에는 또 하장령이 편찬한 皇朝經世文編 120권을 보내주니,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흔한 일이 아니다. 천만리 먼 곳에서 구입한 것이고 몇 해에 걸쳐서 얻은 것이니 일시에 가능했던 일도 아니다.
지금의 세상은 온통 권세와 이득을 쫓는 풍조가 만연하고 있다. 그런 풍조 속에서도 서책을 구하는 일에 마음을 쓰고 힘들어 하면서도, 그대를 보살펴주는 사람에게 주지 않고 멀리서 귀양살이 하고 있는 초췌하게 시들어가는 사람에게 보내는 것이 마치 세상에서 잇속을 쫓듯이 하였으니 이 얼마나 고마운가!
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한겨울 추운 날씨가 된 다음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알 수 있다.”고 하셨다.(子罕) 세한도에 쓰인 화두를 보면 藕船 是賞이라고 쓰여 있다.
@ 제주도에 유배 온지 5년이 지난 추사 나이 59세(1844) 때 그린 최고의 작품이다. 우리나라 문인화의 최고봉 이라 할 수 있는 명품이다. (子罕) 편에 나오는 歲寒然後知 松柏之後凋也이다.
이상적은 추사를 따르는 제자이며 역관이었다. 세한도의 오른편 아래 구석에는 朱文方印 遊印이 적혀있다. 그 인문은 長毋相忘(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기를)이다. 이 글귀는 2千年 중국 막새 기와에서 발견된 명문이다. 이상적은 추사보다 18세 연하의 중인이었다. 이상적은 중국어 역관으로 12번이나 중국을 드나들었다. 스승이 닦아놓은 길을 따라 淸나라의 저명한 학자들과도 깊이 교류했다. 이상적은 벼슬길도 순탄하였고 1862년 임금의 어명으로 종신토록 지중추부사를 제수 받았다.
李尙迪은 스승의 세한도를 받아보고는 ⋯⋯ 세한도 한 폭을 엎드려 읽으매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리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어찌 그다지도 제 분수에 넘치는 칭찬을 하셨으며, 그 감개 또한 진실되고 간절하였습니다. 아아 제가 어떤 사람이기에 도도히 흐르는 세파 속에서 권세와 이익을 따르지않고 초연히 빠져나올 수 있겠습니까? 다만 구구한 작은 마음으로 스스로 하지 않을 수 없어 그렇게 했을 뿐입니다. 이번 걸음에 이 그림을 갖고 연경에 가서 표구하여 옛 지기분들에게 보이고 시, 문을 청할까 하옵니다.
세한도 두루마리는 이상적 死後 그의 제자였던 매은 김병선에게 넘어갔고, 그 뒤 세한도는 다시 훗날 평안감사를 지내고 휘문고등학교 설립자로 유명한 수장가였던 민영휘의 소유로 되었다가, 그의 아들 민규식이 안타깝게도 완당 연구가인 후지즈카 즈카시에게 팔아넘겨 오랫동안 그의 소유로 있었다.
1944년 12월 日本으로 귀국한 후지즈카를 서예가 素筌 孫在馨 선생이 세한도의 한국 인도를 간곡히 요청한 결과 마침내 그 정성에 감복하여 후지즈카는 어떤 보상도 받지 않고, 소전에게 인도하였다,
세한도의 비밀 : 20여년 추사 편찬서 자료를 통해 고증, ‘소동파 언송도’ 박철상 씨 ‘창작의 뿌리’ 스승 옹방강의 서재에 걸려있던 詩를 통해 영감을 얻다. 추사의 편찬서(복초 재적구) 추사가 옹방강 서재의 장대한 전경을 본 체험기가 들어있으며, 偃松圖에 대해 옹방강이 지은 시구를 보고 추사가 감동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상적은 훗날 스승 김정희의 부음을 듣고 지은 詩 가운데에서 知己平生 存水墨 素心蘭又歲寒松 -평생에 나를 알아준 건 수묵화 였네, 흰꽃심의 난꽃과 추운 시절의 소나무- 스승 김정희가 그려준 세한도 한 폭은 이상적에게 있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큰 보물이었을 것이다.
4. 不 作 蘭 圖 (<개인소장>
조선후기 문인서화가 金正喜의 대표적인 ‘묵란도’이며, 종이 바탕에 수묵, 세로 55센티, 가로 31,1센티 ‘불이선란도’ 라고도 한다.
추사의 예술세계의 정수는 묵란인 데 그 중에서도 이 그림이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世人들은 믿고 있다. 洪善杓 선생의 글을 인용하자면 이 작품은 문인화의 寫意와 文氣의 세계를 넘어 종교적 법열의 심오한 경지까지 느끼게 한다.
不作蘭畵二十年 偶然寫出性中天 閉門覓覓尋尋處 此是維摩不二禪
불이선이란 유마경 <불이법문품> 에 나오는 내용이다. 모든 보살이 선열에 들어가는 상황을 저마다 설명하는데, 마지막의 유마 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에 모든 보살들은 말과 글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진정한 법이라고 감탄했다는 내용이다.
若有人强要爲口實 又當以毘耶 無言謝之 -만약 누군가가 강요한다면, 또 구실을 만들고 비야리성에 있던 유마의 말없는 대답으로 거절하겠다- 만향
以草隸奇字之法爲之 世人那得知 那得好之也-溝竟 又題
초서와 예서 기자의 법으로 그렸으니, 세상 사람들이 어찌 이를 알아보며 어찌 이를 좋아할 수 있으랴.
始爲達俊放筆 只可有一不可有二- 仙客老人
처음에 달준에게 주려고 그린 것이다, 이런 그림은 한번이나 그릴 것이지, 두 번 그려서는 안될 것이다. - 선객 노인-
吳小山見而豪奪 可笑,
오소산이 보고 얼른 빼앗아 가니 가소롭다.
* 장택상은 일제시기부터 고서화 및 도자기 소장가로 이름이 높았다. 도자기 및 고서화를 보는 안목이 높을 뿐만 아니라 천하의 명품인 ‘불이선란도’를 거금을 들여 소장할 수 있었다. 해방 후에 정치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소장품을 팔기 시작하였다. 상당수는 이화여대 박물관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이 명품은 <세한도>를 소장하고 있던 손세기씨에게 넘어 가게 되었다 한다.
5. 金正喜 선생의 마지막 작품인 < 板 殿 >
1856년 10월 완당은 그때에 봉은사에 있었다
<南湖 永奇; 1820-1872> 스님이 화엄경<華嚴經隨疎演義本> 80권을 직접 손으로 베껴쓰고 이를 목판으로 찍어 인출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 화엄 경판이 마침내 완성되어 전각을 짓고 보관하게 되니 그 글씨를 완당에게 부탁한 것이다. 그때가 9월말 이었다. 완당은 병든 몸임에도 불구하고 글짜 하나의 크기가 어린애 몸통만한 大字로 <판전> 두자를 욕심 없는 필치로 완성했다. 낙관을 하기를 七十一果病中作이라 했다.
<판전> 글씨를 보면 추사체의 拙함이 극치에 달했다. 어린아이 글씨 같기도 하고 지팡이로 땅바닥에 쓴 것 같기도 한데 졸한 것의 멋과 힘이 천연스럽게 살아있다. 이쯤 되면 불계공졸도 뛰어넘은 경지라고나 할까? 아니면 극과 극이 만나는 것이라고나 할까? 나로서는 감히 비평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는 신령스런 작품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완당의 죽음에 대해서는 그 이상의 이야기나 기록이 없다. 그렇다면 하나의 의문이 남는다. 이 대작은 아무리 봐도 사흘 뒤 세상을 떠날 노인이 감당할 글씨가 아니다. 生의 마지막 기력을 <판전> 두 자를 쓰는데 바쳤다는 이야기도 된다.
어쩌면 생에 마지막 창조적 열정을 모아 만들어낸 마지막 불꽃인 셈이다. 완당이 8살 때 부친에게 보낸 글씨와 너무 닮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前 문화재 청장 유홍준씨의 저술 추사 평전에서 인용)
봉은사의 완당
완당의 살아생전 모습을 전하는 글은 드물다. 그런데 정말로 진기하게도 완당이 세상을 떠나기 5개월 전에 尙有鉉이라는 분이 쓴 <추사 방현기>가 있어서 우리는 완당의 고고한 마지막 모습을 생생히 그려볼 수 있다.
“김약슬” 선생이 인사동 고서점에서 필자 미상의 상태로 처음 발견하여 그것이 흘러나온 말죽거리 (양재동)를 찾아가 <상유현>의 글임을 밝혀내고 그의 후손을 만나 前後 사정을 소상히 알아냈다. 1955년 당시 을유문화사 간행 잡지 <冬書> 제5호에 소개하여 비로소 세상에서 빛을 보게 된 것이다.
@@@ 방 가운데 노인 한분이 앉아 계셨는데 身材가 短小하고 수염은 희기가 눈같고 많지도 적지도 않았다. 눈동자는 밝기가 칠같이 빛나고, 머리카락이 없고 중들이 쓰는 대로 짠 圓帽를 썼으며, 푸른 모시, 소매 넓은 두루마기(周衣)를 헤치고 젊고 붉은 기가 얼굴에 가득했고, 팔은 약하고 손가락은 가늘어 섬세하기 아녀자 같고, 손에 한줄 염주를 쥐고 만지며 굴리고 있엇다. 제공들은 拜禮를 하였다. 몸을 굽혀 답하고 맞는데, 그가 秋史 선생인줄 가히 알 수가 있었다. 상유현의 눈은 마침내 완당이 이미 써놓은 서예작품에까지 이르러 동편 가장자리 佛卓아래 옥색 華전 書聯 세 짝을 펴 놓고 방금 볕에 쬐어 먹 마르기를 기다리고 계셨다며 작품 내용까지 기록해 놓고 있으니 상유현 또한 당대의 금강안이었던 모양이다
@ 春風大雅能容物 秋水文章不染塵
이것은 간송 미술관에 소장 되어 있다.
@ 昨日天女下雲峯 帶得花枝灑碧空
世上凡根與凡葉 豈能安頓在基中
@ 海底泥牛含月走 昆崙騎象鷺絲牽
@ 畵法有長江萬里 書藝如孤松一枝
@ 七十二鷗草堂 @ 三十六鷗草堂
@ 且呼明月 成三友 好共梅花 住一山
@ 一讀 二好色 三飮酒 @ 寶 丁 山 房
@ 大烹豆腐瓜薑菜 高會夫妻兒女孫
@ 端 硏 竹 爐 詩 屋
* 추사의 그림중에는 耄耋圖 라는 작품이 있는데, 원래는 1893년 칠곡 출신으로
영국 에딘버러 대학을 유학, 수도 경찰국장, 국무총리를 했던 장택상씨가 소장하고
있었다. 耄는 70세, 耋은 80세를 뜻한다고 한다.
고양이 한 마리를 그린 작품인데 6. 25때 폭격으로 소실되고 지금은 사본만 존재한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제주에 귀양가는 길에 어느마을에 들러서 그린 것이라 한다.
* 崇禮門의 글씨는 추사 김정희 <완당 전집>에는 조선 초기 문신인 신장의 글씨라고 적혀있다. <지봉유설> 에 따르면 양녕대군이 썼다고 적혀 있다.
耄耋圖 : 제주도 유배길에 벗 권돈인에게 그려서 보낸 것이라 함
모질도 작품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추사가 중국어도 알고 있었는 듯하다.
훗날 소전 손재형은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선거 자금에 쪼들리게 되었을 때 그의 수장품 중 겸재의 <인광 제색도>와 <금강 전도>를 당시 삼성물산 이병철 사장에게 양도했고, <세한도>는 후지츠카의 뜻을 생각해서 차마 팔 수 없어서, 사채업자 李根泰에게 저당 잡히고 돈을 끌어다 썼다. 그러나 소전은 국회의원에 떨어져 <세한도>를 찾을 돈도 없었다. 세한도를 저당잡고 돈을 빌려준 이근태는 이를 미술품 수장가 孫世基에게 팔아 넘겼고, 지금은 그 아들인 손창근이 소장하고 있다.
연암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의 설명을 보면 만년에 제주도 귀양살이로 바다를 건너갔다 돌아온 다음날부터 “남에게 구속받고 본뜨는 경향이 다시는 없게 되고 여러 대가의 장점을 모아서 스스로 일가를 이루게 돤다”고 나온다. <귀양살이 생활은 8년 3개월인 헌종 14년 (1848> 12월 6일 마치게 된다.
@ 참고문헌 : 유홍준 저 추사 평전 외 다수
< 다음 주 강의 예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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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결혼에 관한 인문학적 성찰 |
발표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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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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