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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
<여기가 끝이 아닙니다.>
나이를 점점 먹어갈수록
세례를 받았다는 것, 그래서 그리스도인으로,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간다는 것이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 하느님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생 곡선을 한번 보십시오.
완만한 상승곡선을 그리다가 마침내 정상에 오릅니다.
인생의 절정기인 그 순간, 삶은 철저하게도 호의적입니다.
만사가 OK입니다.
무얼 하든 다 잘 풀리고 세상 사람들이 모두다 내편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빛나는 순간은 너무도 잠시입니다.
요즘 우리 눈을 즐겁게 하는 아름다운 단풍잎처럼 찬란하던 인생은 순식간에 퇴색됩니다.
어느새 급격한 내리막길에 접어듭니다.
더 이상 사람들의 환호도 박수갈채도 없습니다.
남아있는 것이라곤 단맛이 다 빠져나가버린 인생의 쓴맛,
그리고 주어진 모진 목숨 다하는 순간까지 견뎌내는 일입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인생은 철저하게도 다릅니다.
물론 생로병사의 사슬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인이건 아니건 누구나 거쳐야 할 육체적 쇠락 과정에서 예외는 없습니다.
그러나 육체의 쇠락이 곧 영혼과 정신의 쇠락에 직결되지 않습니다.
육체는 시들고 약해지지만
영혼과 정신은 더 맑아지고, 더 순수해지고, 더 찬란하게 빛날 수 있습니다.
은혜롭게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나이 들수록 더 행복하고, 더 충만하고, 더 열렬하게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더 기쁘고, 더 희망하며, 더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눈에 보이는 것에 목숨을 걸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현실에 모든 것을 걸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에만 모든 것을 거는 것은 정말 불행한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진정한' 희망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 건너가고 있는 ‘인생’이란 이 강,
때로 거센 물살, 큰 암초에 힘겹기도 하겠지만
꾸준히 노를 저어 건너가다 보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피안의 언덕에 가닿을 것입니다.
그때 맞이하게 될 영광, 기쁨, 행복을 생각한다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결국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희망하는 일입니다.
우리 안에, 우리 인생 안에, 우리 공동체 안에 뿌려진 겨자씨 한 알,
소중히 여기며 열심히 가꾸어나갈 때 언젠가 큰 나무로 성장할 것이라는 진리를 확신하는 일입니다.
비록 오늘 우리 사랑과 정성이 너무나 부족하고 보잘 것 없다할지라도
하느님의 크신 자비, 하느님 나라의 가능성을 믿는 일입니다.
여기가 세상의 끝이 아니라는 것, 이 세상이 다가 아니라는 것,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요.
이 세상 너머에 사랑과 자비로 충만한 하느님 나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
얼마나 큰 은총인지 모릅니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견디는 일입니다.
인생의 쓴맛도 견디고,
때로 참혹함도 견디고...
또한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희망하는 일입니다.
고통 앞에서도 희망하고,
슬픔 앞에서도 희망하고,
나 자신의 나약함과 무력함 앞에서도 희망하고...
- 살레시오회 수련원장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
<꿈과 현실>
- 하느님을 꿈꾸는 사람들
꿈꾸는 사람이 아름답습니다.
행복합니다.
살아있습니다.
꿈이 없는 삶은 살아있으나 실상 죽어있는 삶입니다.
꿈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입니다.
누구나의 가슴 속에 있는 꿈이며
이 꿈을 키우고 이뤄야 행복입니다.
젊음은 나이에 있는 게 아니라 꿈에 있습니다.
꿈이 있으면 나이에 상관없이 언제나 영원한 젊음입니다.
영혼에 세월의 풍화 작용을 막아주는 게 꿈입니다.
꿈이 있을 때 샘솟는 열정에 순수요,
그 영혼은 영원한 청춘입니다.
꿈과 현실은 함께 갑니다.
혼자 꾸면 꿈이지만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됩니다.
종교가 꿈이라면
이 꿈의 현실화가 정치입니다.
오늘은 꿈과 현실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성경의 사람들은 모두가 꿈꾸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느님을 꿈꾸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도 독서의 사도 바오로도 꿈꾸는 사람들입니다.
끊임없이 꿈을 현실화했던 꿈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성령의 힘이 바로 꿈을 현실화 시킵니다.
창세기의 요셉도 야곱도 꿈꾸는 사람이었고
마리아와 요셉도 꿈꾸는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예언자들 역시 하느님을 닮아 하느님을 꿈꾸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느님을 꿈꿀 때 하느님을 닮아
진선미의 사람이, 신망애의 사람의 현실이 됩니다.
하느님의 꿈이 우리의 모든 꿈을 정화합니다.
꿈도 잘 꿔야지 잘 못 꾸면 자신도 사회도 망칩니다.
바로 독재자의 꿈이 그러합니다.
우리 수도자들은 물론 믿는 이들 모두가
하느님을 꿈꾸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도 밤마다 별꿈을 꾸시기에 영롱하게 빛나는 밤하늘입니다.
별 총총히 빛나는 새벽하늘 바라보고 배밭 길을 걸으며 하느님을 꿈꾸는 묵상의 행복을 어디다 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수도승들이 매일 바치는 공동전례기도 시간 역시
하느님을 꿈꾸는 천상의 시간들입니다.
평생 하느님을 찾는 삶, 평생 하느님을 꿈꾸는 삶을 살라고 불림 받는 우리 수도승들입니다.
단풍 짙어가는 아름다운 자연 역시 하느님 꿈이 현실화 된 것입니다.
꿈, 희망, 비전이란 말만 들어도 기분이 좋고 힘이 납니다.
모두가 같은 말입니다.
어제 안철수 씨의 말에서 꿈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상식에 바탕해 미래를 꿈꾸는 사회’,
바로 그가 희구하는 사회상이었습니다.
꿈을 잃어 절망하는 젊은 세대입니다.
박원순과 안철수에게 젊은이들이 열광하는 까닭은
경쟁에 상처받고 지치고 절망하는 이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꿈을 주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할 말을 그가 했습니다.
꿈의 현실화를 바라는 그의 열망입니다.
“이번 시장 선거는 부자 대 서민, 노인과 젊은이, 강남과 강북의 대결이 아니고 보수 대 진보의 대립은 더더욱 아닙니다.
이번 선거만은 이념과 정파의 벽을 넘어 누가 대립이 아닌 화합을 이끌어낼 수 있는지,
누구의 말이 진실한지, 또 누가 과거가 아닌 미래를 말하고 있는지를 묻는 선거여야 합니다.
선거 참여야말로 시민이 주인이 되는 편법과 특권을 이기는 길이며 상식이 비상식을 이기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정성 가득 담긴 꿈의 현실화를 바라는 소망이 담긴 고백입니다.
꿈을 발견케 해주고 키워주고 이루어주는 사회가 좋은 사회입니다.
어느 분의 안철수와 박철순의 비교도 의미심장했습니다.
“안철수가 실리콘밸리 출신의 주류 혁신가라면,
박원순은 사하라사막 출신의 비주류 개혁가다.
박원순은 많은 민주화 운동 인사들이 정치로 몰려가고 나처럼 기업에 투신할 때에도
가장 어렵고 외로운 시민 운동에 남아 풀뿌리 운동의 모델을 만든 사람이다.
안철수가 컴퓨터 백신 프로그래머라면
박원순은 사회적 백신 프로그래머다.
그 점에서 안철수는 박원순이 자신의 양보를 받을 충분한 준비와 자격을 갖췄다고 인정한 것이다.
선수가 선수를 알아 본 것이다.
그런 만남을 386들도 오래 갈구해 왔다,
서로 다른 경로로 같은 목표를 꿈꾸던 사람들 간의 배려와 협업,
돌이켜보면 나도 기업이란 플랫폼에서 그것을 실현해 보고 싶었는데 실패했다.
그 점에서 나는 안철수가 정말 부럽다.
박원순에게서는 안치환의 노래가 떠오르고 안철수에게서는 윤도현이 보인다.
안치환이 사회를 통해 자기 노래를 찾아갔다면,
윤도현은 자기 노래와 일을 통해 사회를 발견했다.
사람들은 촛불문화제나 집회에 윤도현이 나오는 게 안치환보다 반갑다.
주류 속에서 성공한 착한 이가 우리 편이라서 고마운 거다.
그러나 만약 안치환이 없다면 과연 그 자리는 어떨까?”
장황한 소개였지만 시사하는 크고 깊습니다.
모두가 꿈의 사람들입니다.
꿈과 비전, 희망이 있을 때 타락하거나 속화되지 않습니다.
세상에 오염, 속화되지 않고 언제나 순수하고 진실하고 겸손한 삶을 삽니다.
바로 이게 꿈의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꿈 중에 꿈이 하느님 꿈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꿈이, 희망이 큰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희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피조물도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음을 압니다.
그러나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우리의 몸이 속량되기를 기다리며 속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
내용이 좋아 그대로 많이 인용했습니다.
사도 바오로,
진정 하느님을 꿈꾸는 꿈의 사람, 희망의 사람입니다.
성령의 힘이, 성령의 지혜가 이런 꿈의 원천입니다.
우리에게 부단히 꿈을 발견케 해주고 키워주고 이루어주는 성령의 활동,
하느님의 활동입니다.
예수님 역시 하느님을 꿈꾸는 분입니다.
늘 하느님의 나라를 꿈꾸며 현실화 시켰던 분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하느님의 나라는 누룩과 같다.”
겨자씨와 같은 작은 꿈이, 누룩과 같은 보잘 것 없는 꿈이
성령의 힘으로 현실화 될 때 지금 여기 하느님 나라가 실현됩니다.
하느님을 꿈꾸는 이 은혜로운 미사 간,
주님은 겨자씨의 말씀과 누룩의 성체의 꿈으로 우리에게 오시어
오늘도 하느님 나라의 현실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 성베네딕토수도회 성요셉수도원 원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
긍정심리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마틴 셀리그만은
‘긍정적인 사고는 더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게 해주지만,
부정적인 사고는 결국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망쳐놓는다.’고 말합니다.
해가 쨍쨍 내리쬐는 사막 한 가운데에서 길을 잃었을 때
물통 속에 남아 있는 물의 양을 가지고 예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즉, 물통 안의 물이 반만 남았을 때,
‘물이 반이나 남았다.’라고 또 ‘물이 반 밖에 안 남았다.’고 말할 수 있지요.
과연 어떤 사람이 길 잃은 사막 안에서 희망을 간직하며 살 수 있을까요?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더 살아날 확률이 많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위급한 상황에서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은
이로 인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스스로를 초조하게 만들고,
결국 의사 정에 큰 오류를 범할 수 있다고 하지요.
그런 차원에서 행복이란 단순히 우리에게 일어난 일을 통해서 얻는 것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많은 돈이 생겼기 때문에, 높은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많은 일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보다는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그리고 내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행복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God is nowhere’(하느님은 어디에도 없다)라는 문구를 버스 등에 붙여놓고 사람들에게 선전했다고 합니다.
이에 어떤 젊은이가 병원에 입원해있으면서 천장에 이 문구를 붙여 놓고는 항상 이 말을 되뇌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간호사가 천장에 이 문구를 이렇게 슬그머니 고쳐 놓았다고 하지요.
‘God is now here’(하느님은 지금 여기에 있다)
띄어쓰기 하나로 어디에도 없다가 지금 여기에 있다고 바뀐 것이지요.
천장의 고쳐진 이 글에 큰 감동을 받은 병원의 이 젊은이는
긍정적인 마음으로 세상을 바로 볼 수 있게 되어, 병을 치료한 뒤 주님을 증거하며 살고 있다고 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겨자씨와 누룩에 비유하십니다.
아주 자그마한 겨자씨가 커다란 나무가 되는 것처럼
또 누룩을 통해 크게 부풀어 오르는 것처럼,
우리 삶의 자그마한 것들을 통해서도 하느님의 일은 크게 성장할 수 있음을 분명하게 말씀하시지요.
따라서 세상의 모든 것을 어떻게 바라보고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합니다.
큰 것만을 얻으려는 마음보다 작은 것에도 감사하는 마음에서,
일어나지 않을 일을 염려하기보다 이미 일어난 일만을 해결하려는 마음에서,
또 가질 수 없는 것을 바라보려는 마음보다 이미 갖고 있는 것을 즐길 수 있는 마음에서
행복은 시작됩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 한기철 신부님의 묵상글 *
<그곳에 가고 싶다>
제가 다니던 본당은 신축을 하는 곳이었습니다.
수도회에 들어올 때까지 아직 외벽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습니다.
사무실도 임시로 합판을 가지고 만든 허름한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장마철에는 비가 들어와 온통 물바다가 되고 한겨울에는 꽁꽁 얼어붙곤 했습니다.
워낙 가난한 동네라 공사 기간도 오래 걸렸습니다.
공사 기간이 길다 보니 실질적으로 성당 일을 맡고 계시던 분들은 차츰 지치셨고 가끔 의견이 충돌하기도 했습니다.
그때도 여느 날처럼 이런저런 일을 처리하기 위해 아침 일찍 성당에 갔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곳에 들어서자마자 입을 다물 수 없었습니다.
그 전날 쏟아진 비로 대홍수가 나 임시 사무실 안까지 물이 들어온 것이었습니다.
당혹스럽고 화도 나고 슬펐습니다.
저녁 미사를 위해 물을 바깥으로 퍼내고 있는데
저 혼자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신자 분들이 한 분 두 분 오셨고,
오시는 분마다 걸레와 먼지받이·물통·빗자루 등 필요한 것을 하나씩 들고 물을 퍼내기 시작했습니다.
그중에는 연로하셔서 허리를 제대로 펴지 못하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그분들은 묵묵히 기꺼운 마음으로 그 일을 하셨습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일을 말입니다.
하지만 그분들의 모습을 보면서 저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이 순간이 좋다. 이대로도 좋다.’
너무 훈훈해 잠시 그것을 지켜보는 것이 행복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늘나라는 어떤 곳일까요?
분명 하늘나라는 우리를 위한 나라입니다.
우리가 그곳에 갈 수 없다면
그곳은 존재할 수 없는 곳이 됩니다.
겨자씨처럼 작지만 자라나 모든 것을 품는 사람들,
누룩처럼 자신의 존재는 사라지지만 그로써 다른 이들의 존재를 풍성하게 해주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
그곳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일 것입니다.
그곳에 가고 싶지 않으십니까?
- 성바오로수도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
<겨자씨, 누룩>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이 말씀은 일차적으로
'너희가 보기에는 내가 선포하는 하느님의 나라가 아주 작은 겨자씨처럼 보잘것없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라는 뜻이지만,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하면,
씨앗 속에 들어 있는 생명력을 강조하기 위한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겨자씨라고 하든지 다른 어떤 씨라고 하든지
씨앗이란 겉모습이나 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그 속에 들어 있는 생명력이 중요합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항상 겨자씨처럼 작은 모습으로 시작되는 것도 아니고,
하느님 나라의 출발점이 겨자씨처럼 작아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겨자씨 안에 생명력이 없다면 그것은 그냥 먼지입니다.
겨자씨보다 몇 십 배, 몇 백 배 더 큰 씨앗이라고 해도
생명력이 없다면 우리에게는 무의미한 식물로 전락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든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처럼 겉으로는 아주 작고 하찮게 보이더라도
그 속에는 엄청난 생명력이 들어 있다는 것이 예수님 말씀의 뜻입니다.
그러니 겉모습을 보지 말고 그 속의 생명력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위해서 하는 작은 신심, 작은 선행, 작은 사랑 실천에도
바로 그런 생명력이 들어 있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작고 보잘것없는 일일 수도 있지만,
그 생명력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큰 결과를 낳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 누룩과 같다."
이 말씀은
'하느님 나라는 밀가루 속에 들어 있는 누룩과 같다.
겉으로는 보이지 않아도 밀가루 전체를 변화시키는 누룩처럼 그렇게 온 세상을 변화시킬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하느님 나라에 관한 복음이 온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변화시킬 것이라는 뜻입니다.
누룩의 작용은 눈에는 잘 안 보이지만
누룩은 쉬지 않고 밀가루를 변화시킵니다.
성질 급한 사람은 그 시간을 기다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으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고 의심할 수도 있습니다.
기다리지 못하면 맛있는 빵을 먹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곧 기다림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겨자씨의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겨자씨의 생명력을 믿는다면 큰 나무로 자랄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지난 이천 년 동안 아버지의 나라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주님의 기도를 바쳤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지난 이천 년 동안 복음을 선포하면서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왜 아직도 아버지의 나라가 안 오는 것이냐?' 라고 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글자 그대로 주님의 기도입니다.
주님께서 바치신 기도가,
그리고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고 수많은 사람들이 긴 세월 동안 바친 기도가
무의미하게 흘러가 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지난 세월 동안의 복음 선포가, 사랑 실천이, 여러 가지 신심 활동이
그냥 헛되게 버려진 것은 아니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주님의 기도뿐만 아니라
우리가 바치는 모든 기도는 겨자씨이기도 하고 누룩이기도 합니다.
지금 바치는 짧은 기도 하나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 됩니다.
(물론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힘으로도 작용합니다.)
지금 행하는 작은 선행과 사랑이
누룩처럼 온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으로 작용합니다.
신앙인 한 사람 한 사람이 겨자씨이고 누룩입니다.
- 전주교구 함열 본당 상지원 공소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
<어떤 나무에 물을 줄 것인가?>
어떤 피정을 다녀온 노처녀 자매님을 만났습니다.
그 자매가 피정 가서 여러 사람을 만났는데
그분들은 이전에 수녀원 들어갈 생각을 하다가 결국엔 결혼해서 사시는 분들이었습니다.
그분들은 그 자매가 아직 미혼인 것을 알고 또 노처녀임에도 아직 결혼하려는 마음이 있는 것을 알자,
결혼하기 전에 정말 생각 잘해야 한다고 여러 번씩 당부하더란 것입니다.
그 사람들 대부분은 결혼한 것을 후회하며
‘그 때 내가 수녀원 들어갔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선택한 길이 아닌 다른 길을 자꾸 바라보게 된다면
지금의 삶이 행복하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해지고 싶어 하지만
그 행복을 다 찾아 누리지는 못합니다.
저는 결혼을 장려하지는 않습니다.
특히 여자가 결혼하여 행복해지기는 남자보다 더 어렵습니다.
남자가 결혼하면 잃는 것보다는 얻는 것이 더 많지만,
여자는 잃어야 하는 것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도 세상에서 주는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 상태로 살아가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으로만 충분하지 못하여 결혼도 하고 싶다면
그런 사람은 결혼하는 편이 낫다고 합니다.
그러나 특히 결혼한 여자는 남편에게 결혼 이전보다 더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기도 힘들고,
자녀가 태어나면 자녀를 위해 모든 에너지를 쏟지만 자녀들은 좀처럼 그 사랑에 만족하지 못합니다.
남편은 남편대로 자녀들은 자녀들대로
어머니보다는 세상의 다른 것들에 더 만족해하며 살아가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면서 나이가 들어 몸도 불고 주름도 늘어나고
그렇게 가족이 있음에도 혼자 남겨진 외로운 마음이 가슴깊이 파고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런 때면 결혼이 후회되기도 하고 다른 쪽을 바라보게도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혼했다고 하여 자꾸 다른 삶을 바라보며 부러워만 해야 할까요?
오늘 예수님은 하느님나라를 겨자씨와 누룩에 비유합니다.
다시 말해 결혼을 하고 안 하고, 혹은 어떤 처지에서 사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 겨자나무가 자라고 있는지, 혹은 누룩이 들어있어 작용하고 있는지가
행복을 위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지금 행복하지 않다면
그 사람은 지금까지 겨자나무가 아닌 다른 나무에만 물을 주며 살아온 것입니다.
혹은 참다운 빵이 되기 위해 누룩이 꼭 필요했지만
자신 안에 다른 것들만 집어넣으며 살아온 것입니다.
이제부터라도 내가 키워야 할 나무가 무엇이고 나에게 집어넣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올바로 알고 그렇게 살아가면
지금부터라도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행복은 환경이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것을 키우는 것이기에
다 나에게 달려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도 한 인생 사는데 우울하게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시골에서 가난하게 컸지만 행복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공부도 열심히 했고 운동도 열심히 했고 사람들과도 잘 지내려 노력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런 행복을 위한 노력들이
겨자나무가 아닌 다른 나무들에 물을 주고 있었던 것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다행히 내 안에 심겨졌던 겨자씨도 다른 것들에 주는 물을 조금씩 먹고 자라났습니다.
그 겨자씨는 ‘믿음’이었습니다.
처음엔 죽음의 공포를 이겨야 하는 이유로 믿기 시작하였고
무심하게 그대로 내버려 두었던 것이지만,
나이가 들면서 유일하게 물을 주어 키워야 하는 나무가 그것뿐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작은 믿음이었지만
죽음의 공포만 몰아내게 해 주었던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부분에 작용하는 것임을 조금씩 깨닫게 되었습니다.
마치 밀가루 반죽에 들어간 누룩이 어느 한 곳 작용하지 않는 부분이 없는 것처럼,
삶의 모든 부분에서 믿음은 사랑과 기쁨과 평화를 가져다주었습니다.
다행히 결혼해서는 그 나무에 물을 주는 것에만 집중하며 사는 것이 쉽지 않음을 알았기에
사제가 되기로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내 자신을 행복으로 부풀리는 것에만 노력하니
나중에는 내가 이웃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매우 커진 겨자나무에는 새들이 모여들이 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키우는 데는 남녀노소, 지위 고하가 따로 없습니다.
개인의 노력이 필요한 것이기에
누구나 자신 안에 떨어진 믿음의 씨앗을 키워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선은 하루 중 내 안에 있는 믿음을 키우기 위해 어느 정도나 물을 주며 살아가고 있는지부터 돌아보고,
조금씩이라도 규칙적으로 유일하기 키울 필요가 있는 그 한 가지에 투자하는 시간을 늘려나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에만 집중하면 금방 자라나는 것이 겨자나무고,
또 알고 넣기만 하면 금방 부풀게 하는 것이 누룩입니다.
- 수원교구 오산 본당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
<성장과 변화에 감사합니다>
매괴성모성당 초대신부 임 가밀로 신부님 64주기 기일미사를 봉헌합니다.
파리외방전교회 사제로 1893년 서품되어 한국에 오셨고,
1896년 매괴성모성당 본당신부로 부임하셨습니다.
본당이 설립되기 전부터 성당터를 매괴성모님께 봉헌하고 기도하였으며
51년1개월 동안 사목활동을 하시면서 1896년 사제관과 경당을 신축하셨고,
1903년에는 80여 평의 한옥성당을, 다시 1930년에는 현재의 대성당을 건축하여 봉헌하셨습니다.
지금도 이렇게 아름답고 멋진 성당은 당시의 상황으로 볼 때 얼마나 장엄하고 웅장한 성당이었는지 모릅니다.
미래를 보시고 어머님께 봉헌하셨습니다.
1934년에는 사제관을 건립하셨는데 충북 최초의 석조 건물이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늘 “나는 여러분을 만나기 전부터 사랑했습니다.”하시며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시고 관심을 두셨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신부님을 통하여 주님을 사랑하게 되었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일본 강점기에는 신사터를 닦는 일본사람들의 행동에
주님의 능력을 간구하며 기적의 패를 땅에 묻고 성모님의 전구를 소망하여 응답을 받으셨고
그리하여 성모광장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성모님의 전구를 통하여 예수님께로 가야 한다는 가르침으로
1913년 성령강림축일에는 매괴동산 정상에 십자가를 세우시고 십자가를 통한 구원을 선포하셨으며
1914년 성체축일에 한국 최초의 ‘성체 거동’을 시작하여 성체신심을 고양하였으며
우리에게 주어진 특권중의 특권이 ‘영성체’를 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1947년 9월13일 십자가 현양축일에 성모광장에 오르시어
“이곳의 성모님께 루르드 미사비엘 동굴을 만들어 드리지 못한게 한이다.”하시며 성모님께 대한 존경의 마음을 표현하셨고
“아직도 이 지방에 불쌍한 영혼들이 주님품에 모두 안기지 못했으니 죽는다 해도 눈을 못 감겠다.”하시며
백성에 대한 한없는 사랑의 마음을 드러내셨습니다.
1947년 10월25일 11시 “성모여, 저를 구하소서.”를 반복하며 조용히 임종을 맞으셨습니다.
이 시간 신부님의 영혼이 하느님의 자비로 영생을 누리리라 확신하며 기도합니다.
우리 모두가 한생을 주님의 영광과 백성의 구원을 위해 헌신하신 신부님의 사랑과 전교 열정을 본받고 더욱 정진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콩나물을 키울 때 콩나물에 물을 부으면 물이 다 빠져나가는듯 하지만 콩나물은 크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믿음의 성장과 변화는 드러나지 않게 이루어집니다.
실망과 좌절 안에서도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신부님의 삶을 보면서 믿음을 점검하고 순간순간을 새롭게 주님께 의탁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활동을 통해서 드러나게 되었는데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이미 왔는데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천만다행입니다.
왜냐하면 완성에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은 시작과 완성 사이의 긴장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속을 스쳐가는 순간순간의 생각,
꿈같이 왔다 갔다 하는 우리의 상상,
마음 속 깊이 숨은 티끌 같은 비밀 하나까지
하느님의 전지전능하신 눈앞에 숨겨져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
그러므로 정신을 바짝 차려 깨어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도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
(로마 2,6).
이 말씀은 믿는 이들에게는 두려움 보다는 희망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겨자씨의 비유를 통해서 성장을,
그리고 누룩의 비유를 통해서 자연스런 변화를 말해줍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주님의 가르침이 마음 안에 새겨져서
자연스런 삶의 변화를 통해 증거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나라가 언제 오겠느냐는 바리사이들의 질문을 받으시고
“하느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 (루카 17,21)
고 하셨습니다.
결국 지금 내가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고 있다면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내 안에 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하든지 따지지 마십시오.
자동차 운전을 하든지, 부엌일을 하든지, 짐을 나르든지 상관없이
마치 사제가 성체를 모시고 가듯이 하십시오.
매 순간마다 이렇게 ‘천국을 위하여 일하십시오.”
(알베리오네)
천국을 위해 일하는 가운데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성모의 매괴 본당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
<시작도 과정도 그 결과도 모두>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하느님 나라는 누룩과 같다.”
제가 관구 봉사자를 할 때 저희 수도회 이름을 '프란치스코회'에서 '작은 형제회'로 바꾸었습니다.
그때 참으로 많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작은 형제회'라고 하면 사람들이 '작은 예수회'나 “'예수의 작은 형제회'와 혼동을 할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고,
프란치스코가 세운 수도회라는 것을 알 수 없다는 주장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성소자의 수도 줄어들을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이런 반대에도 불구하고 저희가 이름을 바꾼 것은
프란치스코가 수도회를 창설하며 원래 '작은 형제회'라고 이름을 지었고 그렇게 불리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작음을 추구하는 수도회의 회원이고,
제가 관구 봉사자 때 그렇게 이름을 바꾸었음에도
저는 자주 작은 형제로서 작음을 사는 데 실패를 하곤 합니다.
즉, 제가 하는 후원 단체들이 커지기를 바라고
제가 하는 미사에 많은 분들이 오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제가 하는 단체가 커지지 말아야 할까요?
커지면 안 되는 것일까요?
오늘 복음 말씀처럼 하늘나라는 커질 것이고 작게 시작하지만 커져야 하겠지요.
문제는 하느님 나라가 커지는 것과 내가 커지는 것의 차이겠습니다.
제가 하는 후원 단체가 저의 사업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업이라면 당연히 커져야 하겠지요.
그런데 우리는 종종 그것을 혼동합니다.
내가 잘해서 이 사업이 커진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하느님 사업이고 그래서 하느님께서 해 주신다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그 것을 자기 자랑 삼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으로 자기를 위안 삼는 경우로서
“지금은 비록 작지만 나중에는 커질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작은 자의 태도라면 좋은데
이 역시 성공주의나 성공에 대한 욕심의 불순물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커진다는 것, 성공이라는 것을 애초에 생각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저 하느님께서 원하시니 하는 것입니다.
그 시작이 하느님께서 원하시기에 하는 것이니 내가 최선을 다 하는 것이 있을 뿐
결과에 내가 집착치 않습니다.
시작도 과정도 그 결과도 모조리
하느님의 것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 작은 형제회
* <굿뉴스> '매일미사' 담당 신부님의 묵상글 *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삶의 기본’을 충실히 지키며 사는 것입니다.
삶의 기본은 자신과 인연을 맺고 있는 가장 가까운 사람에 대하여
사랑과 믿음을 잃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의 삶에 운명처럼 엮여 있는 사람들을 끝까지 믿고 이해하며 살아가는 사람을 두고
삶의 기본에 충실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출세했다는 사람들,
그들이 정말 인생에서 성공한 사람들인지요?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남부럽지 않게 재산을 모으고 성공을 했지만,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들에게 신뢰받지 못하고 사랑의 관계가 깨져 있습니다.
이렇게 삶의 기본이 무너져 있으면
겉으로는 성공한 것처럼 보이지만, 모든 것을 잃은 삶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재물이나 사회적 성공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말한 하느님 나라의 씨앗, 바로 겨자씨는
우리 인간과 인간의 만남, 곧 ‘인연의 씨앗’입니다.
수십 억 년 우리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지금 나와 만나고 있는 신비스러운 인연 안에
하느님 나라가 있습니다.
누군가를 자라게 하고 누군가에게 의미가 되어 주는 인연,
그래서 그들의 삶에 축복이 되어 주는 인연 안에 하느님 나라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인연의 씨앗을 물 주고 가꾸어 성장시켜서 하느님 나라를 이루어야 합니다.
비록 세상에서는 가진 것이 없고, 한평생 아무것도 제대로 이루어 놓은 것이 없어 보일지라도,
운명처럼 만난 사람들과 신뢰를 잃지 않고 서로 사랑하며 살았다면,
참으로 아름답고 복된 삶일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니 어서 ‘삶의 기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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