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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서라벌 기행(1)
- 천마天馬를 찾아서
우한용
서울에서 경주까지, KTX로 2시간 반이 못 미치는 거리였다. 그것은 일종의 시간여행이었다. KTX가 Korea Train Express, 한국 고속철도라는 걸 모르는 바 아니었다. 그러나 ‘기차’라는 말이 더 익숙했다.
서울역에서 9시에 기차를 탔다. 기차를 철마鐵馬라고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물론 그때는 석탄을 때어 스팀을 일으켜 피스톤 가동하는, 말 그대로 기차汽車였다. “철마는 달리고 싶다.” 철원 월정리역에 붙어 있는 표어였다. 남북이 갈려 오고 가지 못하는 기차가 그런 구호 가운데 녹슬어가고 있었다. 북을 향해 달리고 싶은 철마. 북방은 고구려를 떠올리게 한다.
신경주역에 내리면. 승용차를 가지고 마중을 나오마고, 나신엽이 전화를 해왔다. 고마운 일이었다.
-내가 마중 나갈까 그러는데, 어때?
-어떻긴 좋지. 나를 태워준다고? 계환수는 음충맞게 웃었다. 크크크… 그 웃음이 나신엽에게 들린 모양이었다. 나신엽이 자기를 태워준다니… 태워준다는 건 둘만 아는 암호였다. ‘한번 태워줄래?’ 그건 살 섞기를 한판 하다는 뜻이었다.
-지금 무슨 생각 하는 거야? 계환수는 입을 닫았다. 그리고 차 도착하는 시간을 얘기했다. ‘나 요새 딴 사람 태워주거든… 잊을 건 잊고 살자.’ 나신엽은 속삭이듯 말했다. 어차피 지나가는 사람이라고 접어두기는 했지만, 자줏빛 노을처럼 아쉬웠다. 불국사의 자하문紫霞門, 보랏빛 노을이 물드는 문루라는 뜻이었다.
기차는 예정 시간에 정확하게 도착했다. 신경주역에 내렸을 때, 나신엽은 나와 있지 않았다. 두 팔을 벌리고 다가와 폭 안길 장면을 생각했다. 그 기대는 빗나갔다. 딴 사람 태운다는 게 이런 뜻이었나 싶었다. 계환수는 대합실에서 바장이고 있었다.
신경주역 대합실 주랑은 십이지신상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아직은 돌에 시간의 때가 묻지 않아 석질이 곱게 살아 있었다. 계환수는 십이지신상 사이를 빙빙 돌면서 조각상을 살폈다. 조각 솜씨가 탁월했다. 인간 운명 혹은 DNA를 의인화한 12신. 그것은 불교보다는 동양의 음양오행 사상과 연관되는 석조예술이었다.
계환수는 말조각, 마신馬神 앞에 섰다. 말머리에 사람 몸을 한 마신은 평복을 입고 손에 창을 들고 있었다. 옷자락 안에 ‘물건’이 살아 있는지 불뚝하게 돋아올라 보이게 조각한 의장意匠이 웃음을 자아내게 했다. 석공의 장난이었을까. 어찌 보면 그저 옷자락이 비슷하게 흘러내린 모양일 뿐이었다.
그는 말띠였다. 1990년 3월 15일생. 계환수桂歡樹. 지금은 수안遂安으로 본관이 통합되었지만 본래 경주 계씨의 후손이었다. 부친은 성씨의 연원을 신라까지 밀어 올렸다. 시림始林이라고도 불리는 계림鷄林은 계림桂林으로 쓰는 일도 있었다. 거기가 자기 조상 태어난 곳이라고 했다.
‘말과 인간’ 계환수는 학회 주제를 음미하는 중이었다. ‘한국발굴고고학회’에서 개최하는 ‘천마총 발굴 50주년 기념 국제 학술대회’를 경주에서 개최한다는 것이었다. 계환수에게 주어진 주제는 ‘동아시아 말 문화와 신라의 천마 이미지’라는 것이었다.
학회의 지향과는 약간 거리가 있는 주제였다. 학회는 실증을 중시했고, 발표문은 상상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천마총의 말다래 그림이 말의 형상이고, 그 말다래를 단 말을 타고 다니던 주인공은 지증왕이 확실하다는 주장을 펼 생각이었다. 지증왕과 전해오는 설화를 방증 자료로 이용할 셈이었다. 그런 생각을 굴리면서 12지신상을 돌아보고 있는데 전화가 울렸다.
-차가 키스를 당했어.
-그래? 어떤 놈이 신엽이 잡아먹으려고 했나 보네.
-무슨 말이 그래, 어디 크게 다치지 않았나 먼저 물어야 하는 거잖아.
-일 없으니까 전화하고 그러는 거 아냐?
-그 꼬는 말투 여전하네. 암튼, 거기, 신경주역에서 700번 버스 타면, 엑스포 컨벤션센터 가거든. 그렇게 타고 와… 그럼 회의장에서 만나자구.
전화가 끝나고 십여 분 지나서 700번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했다. 계환수는 목적지를 확인하지 않은 채 버스에 올랐다. 차내 방송이 지금 서는 정류장과 다음 정류장을 계속 방송하고 있었다. 옆에 사람이 없으니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백매화가 봉오리가 벌어 화사하게 피어 있고, 사이사이 살구꽃 분홍빛깔도 풍경에 색조를 더했다. 저런 꽃들이 신라 시대에도 이맘때 저렇게 피었거니, 생각하매 눈알이 알알해졌다. 멀리 산자락에 솔들이 퍼렇게 생기를 피워내고 있었다. 버드나무는 버들개지를 달고 조용히 가지를 뻗고 숨을 가다듬었다.
남쪽 차창으로 따가운 햇살이 비쳐 들었다. 봄날치고는 따가운 햇살이었다. 계환수는 햇살 가득한 들판을 바라보며 생각에 빠져들었다.
머리에 두건을 쓴 병졸들이 말을 다루고 있었다. 들판을 달리고, 작은 언덕을 뛰어넘고, 통나무를 갈지자로 세워 놓은 사이를 요리조리 피하면서 재빠르게 빠져나갔다. 말 우리에서는 젊은이가 암수 교접하는 걸 고개를 앞으로 빼고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 수놈이 코끼리 코 닮은 마장馬藏을 암놈의 밑에다가 밀어 넣느라고 입에다 거품을 물고 씨근덕거렸다. 그 콧바람은 어쩌면 고구려 평원에서 불어오는 북풍 한 자락인지도 몰랐다.
“손님 예, 창문 쫌 열어주이소.” 창문을 여는 손에 땀이 배어나 찐득거렸다. 교접하는 말의 환상을 좇고 있는 사이 속으로 잔뜩 긴장한 모양이었다.
나신엽의 해맑은 얼굴이 떠올랐다. 나신엽은 생강나무 꽃향기를 흘리면서 계환수에게 다가들곤 했다. 계환수를 태워준 건 꼭 한 번 있던 일이었다.
-몸의 요구를 속이는 것은 죄가 아닐까? 나신엽은 가느다란 눈꼬리를 꼬부장하니 아래로 접으면서 계환수에게 다가들어 허리를 두 팔로 감아 안았다. 느릅나무가 물이 오르는 계절이었다. 계환수는 나신엽과 더불어 몸의 요구를 확인하면서 이십 대로 접어들었다.
-물이 오를 때는 물오른 대로 숨을 쉬는 거야. 계환수는 말을 꺼내려다가 입을 닫았다. 말을 늘어놓는 게 오히려 죄가 될 듯싶었다. 말은 존재를 가리는 장막이었다.
세미나 홀에는 아는 얼굴들이 이미 여럿 와 있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나신엽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기 전이었다. 차 사고라니, 아무래도 처리하는 데 시간이 걸릴 터였다.
그런데 발표자와 토론자가 섞여 있는 가운데 아프리카 세네갈에서 온 젊은이가 눈에 확 들어왔다. 그야말로 얼굴이 숯 빛깔로 까만 ‘흑인’이었다. 이름이 ‘응코아’라고 했다. 그는 불어를 썼다. 영어는 서툴러서 불어로 이야기한다고 하다가 멈칫거린 끝에, 어색한 한국어로 인사를 건네왔다. 처가가 제주라 했다. 제주 ‘종마양성원’에서 일한다고 했다. 참으로 기연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프리카, 세네갈, 제주, 경주, 말, 연결이 정연하지 못했다.
-한국인 아내를 어떻게 만났습니까? 좀 식상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궁금했다.
-진수기가 먼저 나를 올라탔습니다. 아니, 이 친구가 한다는 소리가… 그래서 뒤에는 당신이 올라탔다는 거냐고 물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대신 키키키 웃었다. 응코아도 따라 웃었다.
-한국 여자들 용감해요. 암말처럼, 쿠라주 콤므 위느 쥐망… 계환수는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 암말이라는 ‘쥐망’은 종마種馬를 가리키기도 했다. 아내를 종마로 생각하다니? 빌어먹을 작자 아닌가.
-아내는 언제 만났는데? 계환수는 발표에 대한 건 까맣게 잊고 응코아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응코아가 세네갈 승마장에서 종마 관리사로 일할 때였다. 종마 관리라는 게 일이 그다지 번거롭지 않은 편이었다. 한가할 때는 부설로 운영하는 승마장에서 승마 배우는 초보자들을 돕는 일을 했다. 세네갈에 코이카 요원으로 일하던 진수기陳秀器가 귀국할 무렵이었다. 아프리카 아니면 다른 데서 하기 어려운 게 무어 있는가 생각하던 중에, 승마를 배우고 싶었다. 승마장에서 말에 오르고 내리는 것은 물론, 말이 앞으로 가고 돌고 멈추고 하는 과정을 일러주는 청년이 응코아였다. Mcore라고 쓰고 응코아라고 읽었다. 진수기는 그 이름을 고쳐주었다. M-Corée. 한자로 은고려殷高麗라고 써 주었으나, 그는 응꼬레, 응꼬레 그렇게 발음했다.
-진수기가 무슨 뜻입니까? 불어로 물었다. 할아버지가 너는 집안의 명품이라고 붙여준 이름이었다. 자식이 명품 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진정이었다.
-세 프로디 마르께...? (명품인가?) 응코아가 물었다.
-정말로? 반갑소! 엉샹테! 그렇게 지내는 동안 둘이는 털 빛깔 다른 강아지들처럼 어르고 얼리면서 아프리카 대지 위에 뿌리를 내리며 지냈다. 마침내 둘의 뿌리가 바오밥나무 뿌리처럼 얽혀들었다. ‘응코아’의 집안은 세네갈의 왕족 가운데 하나였다. 세네갈은 종족이 하도 다양해서 왕족이래야 동네 이장 경력 있는 정도 집안일지도 모른다고 짐작했다. 그러나 응코아는 우람한 나무처럼 믿음직하고, 인간 자체가 아름다웠다. 검은 대리석으로 조작한 작품 같았다. 따뜻한 품은 넓고 어깨는 참나무처럼 단단했다.
응코아와 얽힌 인연 다 잘라버린 듯, 진수기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둘의 결합은 도무지 감당이 안 되는 일이었다. 한국에 가서 얼굴 까만 애를 낳는다는 걸 생각하기만 해도 머리가 내둘렸다. 한국은 피부 검은 아이를 너그럽게 품어줄 문화풍토가 아니었다. 그리고 응코아의 직장도 문제였다. 진기수는 자기가 사랑이 아니라 결혼의 여건을 계산하고 있었다. 그런 알량한 계산이 혐오스러웠다. 끝내 아프리카에 뼈를 묻을 생각을 못 하는 자신이 야속했다.
진수기가 한국에 돌아와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세네갈에서 응코아가 진수기를 찾아왔다. 응코아를 못 본 지 두 해가 되어가는 시점이었다. 진수기가 통역을 해서 부모들에게 인사를 시켰다. 어떻게 알았는지 응코아는 넙죽하니 엎드려 큰절을 했다. 그리고 한국어를 뜨덤뜨덤 구사했다.
-나는 당신의 딸님 진수기를 내 목숨처럼, 꼼므 라비 드 무아, 내 생명처럼 사랑합니다. 무릎을 꿇은 채 진수기 어른들에게 하는 말이었다.
-죽을 때까지 둘이 사랑할 수 있겠는가? 진수기 아버지가 다짐받는 듯이 물었다.
-죽음은 지평선 저쪽에 있습니다. 어떻게 알아들었는지 진수기의 아버지는, 암 그렇지 하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가, 뭐라고, 한주먹거리나 되겄냐, 그런 너를 찾아 아프리카에서 한국에 온 저건 진정, 아니 사랑이다… 살아보고 못 살겠으면 물리더라도, 둘이 결혼해라. 진수기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단호했다.
-메르씨 보꾸, 보꾸, 오 몽 디우!” (고맙고 고맙습니다, 오 하느님!) 응코아는 진수기 어머니를 끌어안고 볼에 입을 맞췄다.
-이보게 손 좀 만져보세. 진수기 어머니는 응코아의 손등을 쓸어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말을 다루던 손치고는 너무 곱고 살결이 부드러웠다.
-저 친구 속살은 더 부드러워요. 비단결처럼.
-무어라? 진수기 어머니는 딸을 쳐다보며 눈을 하얗게 흘겼다.
발표가 시작되기 직전, 나신엽은 왼팔을 붕대로 감은 채, 어깨끈으로 둘러메고 학회장에 나타났다.
-아니 어떻게 된 거야? 팔이 부러진 모양이네. 한참 고생하게 생겼구만.
-하아, 사람 달라진 거 같아. 균형 맞추려면 오른팔도 부러져야 하지 않느냐고 할 줄 알았지. 생각해보니 말투가 꼬여서, 그랬던 거 같았다. 계환수는 겸연쩍게 뒤꼭지를 긁었다.
-금방 내 발표 차례가 돼, 어디 가서 좀 쉬다가 만나자구.
-내 걱정은 말고 발표나 잘하셔. 너무 주관적으로 왜곡하지 말고. 계환수는 알았다고, 나신엽을 향해 손사래를 쳐 주었다.
-발표의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천마와 관련된 제 개인적 경험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나 스스로 천마가 되기를 꿈꾸어 왔습니다. 천마를 몰고 하늘을 치달려 저쪽, 예컨대 도솔천, 그런 세계로 초월을 시도했습니다. 그 초월이란 나 자신의 초월로 연결되는 구도의 과정이었습니다. 그것은 상상의 세계이지 현실 세계는 아닙니다. 꿈꾸는 인간이 그리는 그림은, 사실성 여부를 따질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역사에서 발굴과 해석의 문제는… 말이지요. 계환수의 말이 길어질 조짐을 보였다.
-자아,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시지요. 좌장이 계환수의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고대사에서 50년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닙니다. 우리가 다루는 ‘천마도’는 세상에 실체를 드러낸 지 오십 년, 그 제작은 15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우리는 지금 1500년 전의 그림 한 폭을 두고 논의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연구사를 검토하는 중에, 이 그림이 말인가, 기린인가 하는 논의가 있었다는 걸 알았습니다. 거기 논문요약집 22쪽에 써 놓았습니다.
결론을 먼저 말씀드리자면, 말과 기린을 갈라보는 것은 학술적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전제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건 실재, 혹은 실물을 그린 것이 아니라 신라인이 꿈꾸던 세계, 꿈꾸던 세계에서 인간을 저쪽 세계로 이끌고 가는 존재, 그리스 신화의 헤르메스 같은 존재를 그린 걸로 보아야 합니다. 뒤쪽에서 방청객 하나가 하품을 했다. 계환수는 말을 멈추었다.
-요약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계환수는 예술의 상상과 실재의 관계에 대한 전제를 제시하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고구려와 신라의 소통이 있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더 실증적인 고구가 있어야 합니다. 말다래 만든 백화수피, 자작나무 껍데기가 신라지역에서 안 나온다는 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불교 유입과 문화 전파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북쪽에서 신라로 들어올 수 있다고 추정됩니다. 백화수피에다가 글을 쓴 일은 당시 동아시아 문화 보편성의 맥락에서 보아야 합니다. 아울러 그림을 그리는 일 또한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당시 그림을 그린 안료에 대한 과학적 분석이 필요합니다. 이는 제가 고구할 과제 범위를 넘어섭니다.
그 그림이 말인지 기린인지 가리는 것은 발굴 중심의 실증사학에서는 중요한 문제가 될 수도 있지만, 문화 사학에서는 달리 해석할 소지가 충분합니다. 그게 말인지 기린인지는 크게 문제가 되질 않습니다. 그 말을 타는 존재가, 그게 왕이든지, 지체 높은 귀족이든지, 신령한 대상이라면, 그가 타는 말은 신화적 메신저입니다. 꿈을 향해 달리는 말은 입에서는 불을 내뿜고 발굽이 땅을 박찰 때마다, 지기를 쳐대는 ‘영기’가 꽃구름처럼 피어납니다. 이를 구태여 중국이나 고구려와 연관을 댈 필요는 없을 겁니다. 신라인의 상상력이 불교적 상상력으로 제한하는 것도 단견이라고, 저는, 그렇게 생각하는 편입니다.
기린은 중국 중심 상상의 동물입니다만, 말은 다릅니다. 세계 보편의 실재하는 동물입니다. 저기 아프리카 세네갈에서 온 말 전문가 응코아 씨가 이 학회에 함께 참가하고 있습니다만, 지구상에 말이 존재하지 않는 대륙은 없습니다. 그리고 말을 타는 인간은, 기마민족의 경우 말고는, 해당 사회의 지배권력에 해당하는 존재들입니다. 따라서 말이라는 존재는 문화자본의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보아야 할 겁니다. 말다래, 한자로는 장니障泥라고 하는 물건은, 아니 거기 그려진 그림은 그 말을 탄 인물이 고귀한 존재라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아마 신라에서는 왕일 터인데, 그동안 고고학에서 밝힌 바로는 문서기록과 일치하는 점이 많습니다. 다만 문서를 해석하는 안목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천마총의 주인을 지증왕으로 추정하는 관점에 저는 동의합니다. 그런데 기록된 사항은 문화 사학적으로 해석이 요구됩니다. 예를 들어 지증왕의 신체 형상에 대한 기록이 문제가 될 겁니다.
여러분이 잘 아실 터이지만, 자료를 보여드리겠습니다. 발표자료집 33쪽에 자료가 들어 있습니다. 계환수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자료집을 펼쳤다.
《(전략)… 지증왕의 음경의 길이는 무려 1자 5치나 되었는데, 음경이 너무 큰 관계로 마땅한 신붓감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이 탓에 처녀들은 사랑을 나누려 하면 너무 아파 울면서 도망갔다. 그래서 지증왕은 각 지방에 사자를 보내 자기의 음경을 능히 감당할 만한 처녀를 수소문하였다. 어느 날 지증왕이 보낸 한 사자가 모량부에 도착해 동로수冬老樹 아래에 쉬고 있는데, 큰 개 2마리가 북통만 한 누런 똥을 양쪽에서 물고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이것을 본 사자는 쾌재를 부르며 마을로 내려가 그 커다란 똥 덩이의 주인이 누구냐고 물었다. 그러자 한 소녀가 말했다.”아, 그거요? 그것은 모량부 상공 어른의 따님께서 빨래를 하다 숲속에 숨어서 눈 똥입니다요.”사자가 그 집을 찾아가 소녀가 말한 처녀를 보니 정말로 키가 큰 여자였다. 보니 키가 7자 5치나 되었다. 사자는 급히 지증왕에게 그 처녀를 소개했고, 지증왕은 수레를 보내 궁중으로 불러 왕비로 삼았다. 『삼국유사』》
잘 아시는 자료이기 때문에 자세한 설명은 피합니다. 청중이 자료에서 눈을 떼고 발표자 계환수에게 눈길을 집중했다. 계환수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 자료는 물론 설화입니다. 여기 나오는 수치들이 사실과 잘 맞아들어가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신뢰하기 어렵다는 관점들이 있습니다만, 텍스트의 성격을 고려해야 합니다. 계환수는 자기 설명을 이어갔다.
설화적 화법은 대상의 성격에 따라 특정한 방식으로 과장됩니다. 일상적으로도 키가 큰 사람은 키가 육 척이나 된다고 합니다. 육 척이면 대개 190cm가 넘습니다. 여자들의 경우 허리통이 깍짓동만 하다는 식으로 표현합니다. 하물며 왕인데 키가 오척단구라든지 짜리몽땅했다는 식으로는 표현하지 못하는 게 설화적 어법입니다. 성기 크기를 과장해서 왕의 위대함을 드러내려 했다는 사례가 없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부처의 32상호 잘 아시지요? 그게 무슨 뜻인가 하면, 부처님의 남경이, 말의 음경이 숨어있는 모양이란 뜻입니다. 색욕을 잘 다스려 말이 음경을 오그라들게 해서 뱃속에 감추고 있는 것처럼, 말하자면 번데기만 하게 뱃속에 지니고 다니라 하는 것은, 비구들을 향한 계율적 의미를 지닙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그 성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말의 음경과 같다는 뜻입니다. 부처님의 상호를 임금에게 전이하는 방식을 거부하거나 부정할 이유가 없습니다.
지증왕의 신체 치수를 실측 차원에서 고증하는 것은 상상력을 제한합니다. 고귀한 존재는 지상적 존재의 삶을 벗어나야 합니다. 그런 말도 있습니다. 정혁중인가 하는 변호사가 어디선가 한 말인데, “시종의 눈에 영웅은 없다.”라고 합니다. 가까이서 보면, 천하를 호령하는 영웅도, 시종이나 똑같이 먹고 싸고 하는 존재일 뿐입니다.
영웅은 거리두기에서 탄생합니다. 여러분 ‘지귀설화’ 아시지요? 선덕여왕 사모하다가 가슴에서 불이 나서 탑을 돌다가, 불길이, 가슴에서 불길이 일어 탑과 함께 타죽어 불귀신이 되었다는 그 이야기, 거기서는 지귀가 선덕여왕을 끌어안고 접문, 키스를 했다든지, 함께 밤을 지냈다든지, 그렇게 세속화하지 않고 그리움의 대상으로, 거리 유지를 하고 있습니다. 임금이 신하와 똑같다든지, 부처님도 똥 누고 오줌 싼다는 그런 서사 문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주제로 돌아와서, 말을 탄 임금의 말다래에 꼭 말을 그려 넣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는 분도 있습니다만, 그건 ‘말 상투’를 한 진짜 말이 아니라 저 세계를 향해 가는 천마고, 하늘을 나니 비마飛馬입니다. 이 말은 입에서 불을 뿜어 용의 수준으로 향상된 존재입니다. 결론을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계환수는 탁자에 놓인 물병을 들어, 목에 콸콸 소리가 나게 물을 따라 넣었다.
-제가 이야기하는 이 그림은, 1,500여 년 전, 더 높은 세계를 꿈꾸던 신라인들의 소망을 그린 그림으로 보아야 한다는 게, 그게 저의 결론입니다.
청중들의 박수 소리가 자글자글 끓어올랐다. 질문이 있는 분들은 토론자의 토론이 끝난 다음, 종합토론 시간에 이야기 나누기로 하겠다고 좌장이 언급하고, 발표를 이어갔다.
나신엽은 발표회장 로비에서 계환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응코아가 다가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어머, 반가워라, 나 진수기 친구예요.
-엉샹떼… (반갑습니다!) 나신엽과 응코아는 볼에다 키스를 주고받는 비주인사를 했다. 진수기가 아프리카로 코이카 봉사활동 간다고 이야기하고, 세네갈에서 근무하는 동안, 나신엽에게 아무 연락이 없었다. 삼 년 전이었다. 진수기가 전화를 해왔다.
-나 말야, 세네갈에 눌러앉을까 하는데 갑자기 나신엽이 보고싶네.
-세네갈, 거기 흑인들 나라, 이슬람교도 나라 아냐? 네가 그런 종교 문화 소화능력이 있겠어?
-애기가 생겼거든…
-정말야? 너 혼자 그 애 키울 수 있겠어?
-왜 그런 생각을 하는데?
-애 키우는 거, 그거 장난이 아니거든. 전화기 속에서 진수기는 흐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삼 년이 지난 작년이었다. 진수기는 남편과 함께 제주에 와서 살게 되었다면서, 한번 놀러 오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남편이 제주도 종마연구소에서 근무한다고 이야기했다. 인연 참 희한하다고 생각했다.
-진행 측에서 말야, 점심은 작가 먹으래. 잘 되었네. 내가 보여줄 데가 있는데 같이 가자고. 가 보고 나서 식사하고 들어오자구. 응코아씨는 발표가 끝 순서던데 같이 가요. 나신엽은 어딘가로 전화를 했다.
-금방 와야 해, 알았다구? 나신엽이 태운다는 그 사내인 모양이었다.
낡은 테라칸에서 내리는 사내는 기골이 장대했다. 턱수염이 부글부글하고, 선글라스로 눈을 가려 표정은 정확히 알기 어려웠다. 괘릉의 페르시아인 상을 떠올리게 하는 풍모였다.
-신세를 지게 되어 미안합니다. 계환수가 운전대를 잡고 있는 사내에게 말했다.
-편히 갑시다, 우리. 말투가 편하지 않았다.
토함산을 향해 올라가는 소로길은 지나는 사람이 드물었다. 차량 또한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이따금 매화꽃이 화사하게 피어 아직 잎이 나지 않은 나무들과 을씨년스런 대조를 이루었다. 살구꽃은 연분홍 향기를 흘리고 서 있었다. 살구꽃에 특별한 향기가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그러나 연분홍 치마를 떠올리게 했다. 봄날은 간다… 꽃이 피면…
-저 앞에서 좌회전!
마당에 차가 멈췄다. 일행이 내리고, 일행 앞에서 차를 몰고 온 사내가 선글라스를 벗고 인사를 했다.
-장동경입니다. 반갑습니다. 본관이 덕수, 덕수장씨일 거라는 짐작이 들었다. 그러나 묻지는 않았다. 회회인, 즉 페르시아인 후손이라는 이야기를 나눌 기회는 아니었다.
아담한 고패집이었다. 마당 섬돌 밑에 수선화가 줄지어 피어 있었다. 장독대와 담장 사이에 살구꽃이 마치 꽃등처럼 환하게 피어 흐드러졌다. 뒷산 숲에서 꾹국이가 울었다. 그런데 아무도 나와 보는 사람이 없었다. 빈집 같은 썰렁한 기운이 응달 마루에서 흘러나왔다.
창틀의 작년에 자란 환삼덩굴이 얼기설기 마른 채 얽혀 있었다. 전체적으로 아담하기는 하지만 사람의 훈김이 사라져 냉기가 감돌았다.
-문 안 열고 뭐 해? 장동경이 마루로 올라갔다. 안방으로 짐작되는 방에는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장동경이 문을 열었다. 향을 사른 냄새가 풍겨 나왔다.
-할머니가, 과수댁으로, 여기서 75년을 살았어요. 배꼽도 안 떨어진 아들 하나 키우면서 말이지요. 우리 아버지가 올해 75세거든요. 할아버지? 만주를 거쳐 몽골까지 가서, 거기서 말 그림 그리면서 살다가, 소식 끊기자 할머니는 할아버지 따라가듯이 저승으로 갔어요.
-그게 언젠데? 꼭 한 해 전이라며 나신엽은 눈가가 젖어왔다.
-할머니가 평생 안 찾던 분 곽을 찾아달라는 거예요. 저기 저 침상에 앉아 반야심경을 외면서, 나더러 얼굴에 분을 발라 달라는 거지 뭐야. 그게 박가분이었는데, 할아버지 출분하고 나서, 사내들이 할머니한테 홀려, 연지분 사 들고 찾아와 문전을 어정거렸어. 그건 나도 눈으로 봤어. 산수유가, 오늘처럼, 질펀하게 필 때면, 할머니는 신열을 앓곤 했어. 그게 무병이었을지도 몰라. 무병을 혼자 다스리는 건 죽기보다 어려운 일이라구. 아무튼… 할머니는 오뉴월 땡볕에 덴 사람처럼 열이 풀풀 났어. 그러면 뒤뜰에 나가 물을 죽죽 들러썼는데…있지… 젖꼭지가 발갛게 복사꽃처럼 돋아나고, 거웃에 햇살이 어룽거리면 두 다리 사이에 무지개가 서는 거야… 계환수가 크음, 헛기침을 했다.
-계환수 씨한테, 보여줄 게 있어서 가자고 한 건데… 장동경 씨한테도 안 보여줬던 거야. 저이가 이 집 저 아래채에 화실을 꾸미고 작업을 해. 그건 그렇고, 할아버지 그림 좀 볼래? 나신엽이 안방에 이어진 웃방 문에 걸린 자물쇠를 열었다. 자그마한 신당이 꾸려져 있었다. 소반 위에 향로와 함께 정화수 그릇이 놓여 있었다. 그 뒤로 길쭉한 탁자가 자리 잡아 배치했다. 다시 그 뒤로 한지로 깔끔하게 바른 벽에 그림이 붙어 있었다.
양피지? 그건 적절한 말이 아니었다. 양 껍질이었다. 양 한 마리를 잡아, 통째로 껍질을 벗긴 후 무두질을 하면 뽀얀 양피(지)가 만들어진다. 그 양피(지) 위에 바탕색을 칠하고 그 위에 그림을 그렸다. 천산산맥을 넘어가는 비마상이었다. 날개 다린 말 세 마리가 발굽에 영기를 피워올리며, 입에서는 불길을 내뿜었다. 말머리가 향하고 있는 산맥의 연봉은 하얀 눈을 들러쓰고 있는 설산이었다. 설산 위로 엷은 보랏빛 노을이 비껴 지나갔다. 말의 머리에는 ‘말 상투’가 외뿔소 뿔처럼 돋아올라 있었다. 머리를 흔들며 달려가는 말의 머리 위로는 꽃구름이 피어올랐다. 그것은 천마총에서 나온, 자작나무 껍질 말다래에 그려진 천마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신라, 경주, 몽골….
계환수는 그림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깍지끼어 잡았다. 마치 간절한 기도를 올리는 듯한 자세로 한참을 앉아 있었다. 이마에 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뭔 영감이 와? 나신엽이 물었다. 그건 영감이 아니라 사실의 확인 같은 것이었다. 하늘을 나는 말을 상상하는 것은, 어쩌면, 유라시아를 넘어 세계적인 보편성을 지니는 인간 현상인 것 같았다. 그것은 그림 한 장이 불러오는 환상이면서 현실적 실상이었다. 앞치마만이나 한 말다래에 그려진 천마도 한 폭과, 양 껍질 한 장에 그린 비마도가 사람의 영혼을 휘저어놓는 것은 일종의 종교적 이적의 체험이었다. 나신엽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이 눈을 찔렀다.
-나 이거 좀 거들어줘. 나신엽이 종이 쇼핑백에다가 옷가지를 넣다가 한숨을 쉬었다. 한 손을 붕대로 묶어 둘러메었기 때문에 행동이 자유롭지 못했다.
-아니, 이건 뭐야.
-어머, 피 묻은 게 아직 그대로 있네. 나신엽의 어머니는 벽장에 넣어둔 당목 치마를 보자기로 잘 싸 두기는 했지만 세탁을 한 적은 없었다. 할머니가 남긴 신물神物 같은 것이었다. 첫날밤을 지낸 핏빛 기억이 담긴 옷가지였다. 할머니가 아버지 낳고 삼 일이 안 되어 할아버지는 화구 몇 가지 꾸려 가지고 집을 나갔다. “내 뒷일은 당신 알아서 하시오,” 그 한마디를 남기고서였다. 미안하다는 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저어기, 혹시 들어봤어? 경주시에서 ‘세계마예박물관’을 건립한다고 이야기했다. 천마도를 비롯해서 전 세계에 널리 퍼져 있는 말 그림을 체계 세워 정리하겠다는 기획이었다. 계환수는 마화馬畵가 아니라 왜 마예馬藝라고 했는가, 그 까닭을 물었다. 말을 소재로 한 그림을 위시해서 말 조각상, 말을 기르는 과정, 마구, 말 신앙 등 자료를 종합적으로 전시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렇게 해서 실크로드가 경주에서 출발해서 로마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가운데 말의 역할을 종합적으로 부각하자는 의도라 했다. 말과 연관된 상상력의 자장磁場을 확장하는 문화사적 기획인 셈이었다.
함께 간 사람들은 대청에 앉아서 마당 가에 피어난 살구꽃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계환수의 전화가 울렸다. 응코아의 발표 순서가 되었다는 것과, 계환수에게는 종합토론에 참여할 준비를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학회장에 앉아서, 응코아의 발표를 듣는 동안, 계환수는 천산을 넘어가는 천마의 행렬 환상에 휘달리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꿈이 소용돌이치는 과정과도 겹치는 것이었다. 상상력의 문화사를 공부하고 싶었다. 동서를 갈라놓는 인식체계를 뒤섞어 동서의 보편성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런데 학계는 실증사학 중심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냉큼 용납되어 들어갈 틈새가 보이지 않았다. 새로운 유물 유적이 발굴되어야 논문이 몇 편 나오는 형편이었다.
-아프리카 사막을 건너는 데는 말보다는 낙타가 유용성이 뛰어납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낙타에 날개를 달지 않습니다. 대륙에서는 시간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흐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이 사는 나라에 따라, 그 형상이 달라집니다. 그렇게 말하고 푸우 한숨을 쉬었다.
-정지용이라는 시인의 작품에 ‘말’이라는 게 있습니다. 원문은 발표집 32쪽에 있습니다. 계환수는 자료집을 펴 보았다. 거기 이런 시가 적혀 있었다.
<말아, 다락같은 말아,/ 너는 점잔도 하다마는// 너는 왜 그리 슬퍼 뵈니?/ 말아, 사람 편인 말아,/ 검정콩 푸렁콩을 주마.// 이 말은 누가 난 줄도 모르고/ 밤이면 먼 데 달을 보며 잔다.>
-식민지 조선에 태어난 말은 초월을 향해 치달리며 흙먼지 피워내는 말과는 근본이 다릅니다.
인문학적인 상상을 펼치다가 이야기 가닥이 확 바뀌었다. 말의 인공수정에 관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야생마를 붙잡아 매 놓고 기르기 때문에 생산력이 약화한다는 사례를 들고 있었다. 계환수의 말과는 층위가 다른 말 이야기였다. 달리 생각하면, 상상력 공간에 존재하는 말만이 말의 원형적 심상을 환기하는 것은 아닐 터였다. 본질 이전의 말, 현존재로서의 말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중에, 박수 소리가 강당을 울렸다.
종합토론에서 계환수가 받은 질문은 하늘을 나는 말들에 관한 것이었다. 동명왕 신화에 나오는 ‘오룡거五龍車’가 천마가 아닌가 하는 질문이었다.
-인간세계와 천상 세계를 운행하는 수단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장자’의 붕새라든지, 인도 신화의 가루다, 신라의 천마 그런 것들이 지상 세계와 천상 세계를 연결하는 수단들입니다. 이들은 형상은 서로 다르지만, 기능은 동일합니다. 그 기능은 해석의 영역이지 실증의 대상이 아닙니다. 사실 계환수는 자신 없는 대답을 우겨대고 있었다. 다른 질의가 있었다.
-천마 혹은 비마를 그리는 상상력이 보편성을 띠자면 동서가 함께하는 모티프가 있어야 할 것인데, 기독교에서는 천마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혹시, 아시면 말씀해주세요. 질문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대답이 어려울 걸, 그런 눈치였다.
-제가 신자가 아니라서, 읽은 기억에 따라 말씀드리겠습니다. 열왕기列王記는 영어로 킹스라고 하잖습니까. 열왕기 하권에 선지자 엘리야와 그를 스승으로 모시며 따르는 엘리사 이야기가 나옵니다. 자기를 끝까지 따라오겠다는 엘리사를 지상에 남겨두고 천상으로 올라가는 엘리야는 ‘불 전차와 불말’에 태워 회오리바람과 함께 하늘로 올라가는 걸로 되어 있습니다. 그 불말 즉 화마火馬를 그림으로 그린다면, 천마총에서 나온 백화수피에 그린 천마와 흡사한 형상이 되지 않겠나 그런 생각을 합니다. 다만, 이스라엘은 말보다는 당나귀를 이용하는 게 편한 지형입니다. 프랑스의 시인 프랑시스 잠은 천국에 갈 때 당나귀와 함께 가고 싶다고 노래합니다. ‘영원한 사랑의 투명함’을 당나귀의 속성으로 상상합니다. 이건 인간의 존재 조건을 초월하기 위한 상상력의 작업으로 생각됩니다. 대답이 엉뚱한 데로 가는 것 같습니다. 요컨대, 상상력의 산물을 실증으로 규명하려 하는 노력은 언제든지 한계에 봉착한다는 점입니다. 계환수는 말을 멈추고 청중을 돌아보았다. 질문을 하겠다고 손을 드는 이는 없었다.
차시간이 촉박해서 뒤풀이에 참여하기는 어려웠다. 나신엽과 그의 아버지, 그리고 그 할머니의 생애가 궁금했다. 그보다 더 궁금한 것은, 애 낳은 지 일주일이 되기도 전에 출분한 그의 할아버지, 양가죽에 천마도를 그려 보낸 그 할아버지의 행적이었다.
-마예박물관 개관할 때 부를께, 그때는 팔 다 낫겠지. 나신엽이 오른팔을 계환수의 팔에 걸었다.
-제주도에도 오세요. 응코아가 손을 내밀었다.
학회장 현관 앞에 ‘에쿠스’ 승용차가 와서 멈췄다. 중년 남자가 차에서 내렸다. 계환수가 뜨악하니 서 있자, 나신엽이 깔깔 웃었다.
-우리 아버님이셔, 인사해… 친아버진지 시아버진지는 말하지 않았다.
-내가 장동경 애비되는 사람입니다. 그는 지갑을 꺼내 명함을 건네주었다. 대한마사회 회장 장균정. 경주에도 마사회가 있던가, 그런 의문이 들었다.
-우리 아들이 선약이 있다 해서 내가 나왔습니다. 신경주역까지 간다고 들었는데…
차는 경주 시내를 비켜 우회도로로 달렸다. 차창으로 벌판이 다가오고 지나가고 했다. 길가에 늙은 벚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아침에 보았던 벚나무 꽃봉오리가 유두만하게 부풀어 있던 게 떠올랐다. 천마가 이 길을 지나 토함산으로 해서 하늘로 날아올랐을 것 같았다.
-저어기, 뒷자리 옆에 책 하나 있는데, 챙겨가이소. 매운향이라는 시조 시인이 거기 계환수씨 강의 듣고 감동했다고, 전해달래서… 계환수는 자리 옆에 놓인 책을 집어 들었다. 중간에 ‘천마상’이 새겨진 간지가 꽂혀 있었다. ‘그 여자를 위한 변명’이라는 시가 실린 면이었다. 무슨 연인지 그 페이지가 108쪽이었다.
-아버님, 창문 좀 열까요. 삼월 햇살이 오뉴월 땡볕 같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 창이 스스로 아래로 밀려 내려갔다. 들판을 치달려온 천마는 막 형산강을 건너는 중이었다.*
(2023.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