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있는 남산의 팔각정을 지나 국립극장쪽으로 내려오다보면
남산 속 '비밀의 정원'이라 불리우는곳이 있읍니다
국립극장을 넘어 반얀트리호텔(예전 타워호텔) 클럽동 뒤로 이어진 도심속 무성한 숲길 입니다
하지만 자유총연맹(예전 반공센터), 그리고 신라호텔 뒤로 이어지는 길은
5.16 쿠데타 이후 권력자들만의 내밀한 공간으로 90년대 중반까지 일반인들은 얼씬도 할수 없었던
그야말로 남산 속 '비밀의 정원'이었는데 그곳에 서울클럽(아시아 사파리클럽, 장충동 사파리클럽)이 있읍니다
전두환 대통령이 철권을 휘두르던 1982년도에
서울 남산 자락에 위치한 사파리 클럽에서는 역사적(?)인 결혼식이 두건이 열렸었읍니다.
그해 2월에 열린 이철희(1923년생), 장영자(1944년생)의 결혼식에는 한국의 고급 승용차들을 총집결시킨 듯
장충동로터리 사방이 정·군·관·재계 거물들이 타고 온 차량들로
이일대의 교통이 마비될 정도의 북새통을 이루었다는데
예식비용으로 거금 1억원(당시 경력 10년 이상의 교사 월급이 50만원)이 들었다는 초호화판 결혼식 이었읍니다
그리고 그해 10월에는 대도 조세형이 이곳에서 결혼식을 올렸읍니다
이 클럽은 1981년에 박종규(박정희대통령 청와대 경호실)가 만들고 초대 이사장을 맡은 사교 클럽인
아시아 사파리클럽으로,
노태우·정호용·유학성씨 등 신군부 실세들과 한진·쌍용·진로 등 국내 굴지의 대기업 총수들이 망라돼 있고
조선·한국 등 언론사의 사주들도 이 클럽의 멤버로 활동했다고 합니다
박종규(1930~1985) 전 청와대 경호실장이 수십년간 후견인 역할을 해온
신군부 핵심 세력이 모두 가입한 사파리클럽이
정관계와 재계, 언론계를 잇는 통로로 활용 되었으리라 추측이 됩니다
박종규씨는 카지노 업계 대부라던 전락원의 후원자로 알려져 있기도한데
아시아 사파리클럽이 임대해 운영하던 카지노는 당국의 허가를 받지 않고
내외국인을 상대로 84년부터 60억여원 상당의 부당 수익을 올린 혐의로
대표가 구속되는 등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읍니다
또 무기 로비 사건인 노드롭사건은 F-20을 한국에 팔고 싶었던 노드롭사가
IOC의원 신분으로 술과 여자로 정치인들을 접대하는 사파리클럽의 주인인 박종규를
775만 달러짜리 로비스트로 고용하였다는데 F20의 시험비행 추락사고로 거래가 이뤄지지 않았읍니다
이 사파리 클럽과 지근거리에 있는 중앙정보부에서
군사독재에 저항하는 인사들이 붙잡혀와 사선을 넘나드는 악랄하고 모진 고문에 신음을 하던 동시대에
사파리 클럽에서는 대한민국의 품격과 국민들의 자존심과 인권이
유신잔당들과 신군부에 의해 모양이 마구 구겨지고 있었읍니다
아시아 사파리 클럽은 장영자 사건과 호스트(손님을 접대하는 주인)개념인
박종규씨의 사망(1985년)후 소멸하고 "서울클럽"으로 이름이 바뀌는데
얼마전에 아나운서 김성주가 이곳의 회원임이 알려져 화제(MBC파업때 홀로 부를누리는)가 되기도 했을 정도로
지금도 최상류층 사교클럽으로 오직 회원제만을 고수하고
양도도 직계존속에게만 할수 있어 아직도 부자들이 선호하는 곳 입니다
현재 국내에서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사교클럽으로 중구 장충동에 위치한 '서울클럽'을 들 수 있다.
서울클럽은 고종황제의 칙령으로 1904년 설립된 사교클럽으로 110년의 오랜 전통을 자랑한다.
덕수궁 내 왕실도서관으로 건립됐던 중명전을 외국인의 사교장소로 제공했던 것이 시초가 됐다.
식민지배와 전쟁을 겪으며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가 1985년 장충동의 현재 자리에 터를 잡았다.
30년이 넘은 노후시설 탓에 특급호텔과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오랜 '전통과 인맥'의 힘으로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서울클럽은 현재 52개 국가 내ㆍ외국인 1,000여명이 회원으로 등록돼 있다.
가입비 7,500만원에 월회비 35만원으로, 외국인과 내국인 회원이 각각 절반을 차지한다.
외국인의 경우 내국인보다 가입비가 더 높아서 외교관, 다국적기업 간부, 특파원 등이 주로 이용한다고 한다.
서울클럽은 레스토랑ㆍ카페ㆍ바ㆍ수영장ㆍ피트니스센터ㆍ스쿼시코트ㆍ
골프라운지ㆍ회의실ㆍ도서관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가입비도 고가이지만 기존 회원 2명의 추천이 있어야 심사 자격을 얻는다.
여기에 회원수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대기자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몇 년씩 기다려야 차례가 돌아온다.
기존 회원이 탈퇴해 자리가 생길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데일리 한국2014/07/19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의 33주기 추도식장의 박근혜와 은희만 은지원 부자 (2012.10.26)
가수 은지원의 아버지라는 은희만(1926년생)은 박근혜와 고종사촌 사이로
박정희 대통령의 큰누나의 아들 이라고 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형인 박상희의 사위인 김종필과 처남매제 사이가 되겠지요
박정희 대통령의 조카로 대통령의 지근거리(경호실)에 있던 은희만(1926년생)
박정희 대통령의 조카사위로 남산 중앙정보부의 김종필(1926년생)
박정희 대통령의 절대신임을 받던 청와대 경호실장 이었던 박종규(1930년생)
박정희 대통령의 신임과 박종규의 보호를 받던 전두환(1931년생)등의 정치군인들
은희만씨는 경호실을 나온후
장충동 사파리클럽을 운영했다고 알려져 있읍니다
1957년에 세워진 당시 동양 최대 규모의 종합영화촬영소였던 안양영화촬영소는
1963년 신상옥 감독의 영화사 신필름에 인수되어 신상옥, 최은희(안양예고 교장)부부부 의 명성과
내노라하는 배우들의 출신학교로 명성이 자자했읍니다
1954년 2월 주한미군 위문 공연차 대구 동촌비행장에 도착한 미국 영화배우 마릴린 먼로(오른쪽)가
환영행사에서 최은희씨와 활짝 웃고 있는 모습
최은희
1997년 후반에 우리나라에 닥친 IMF(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의 구렁텅이 속에는 저도 있었읍니다
졸지에 일자리를 잃고(생각지도 못하거나 하지 않았던 빚까지 지고) 구월동의 반지하 삵월셋방으로 이사를 하고
일용노무자나 다름없는 하루벌이 일자리를 찾아다녀야 했읍니다
다행히 기술(붙박이장 설계시공)이 있었기에 나름대로 일할곳은 어렵지않게 생겼고
안양에 있는 안양예고 교문앞의 한상가건물에서 1주일여동안 일을 했던적이 있었읍니다
그곳에서 일을 하면서 안양예고가 마주보이는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할때에
고교시절의 어떤봄날 친구와 함께 옛 수인선송도역에서 협궤열차를 타고 수원의 딸기밭에 놀러갔다가
그곳에서 우연히 만났던 당시 안양영화예술고등학교 2학년 여학생들의 모습이 생각이 났고
그 이야기를 저의 일행들에게 하였더니 다들 별로 관심이 없는듯 하였지만(안양예고의 명성을 모르니,,,)
식당주인 아주머니 께서는 저의 이야기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과 말투로 저에게 사실여부를 다시 물어왔읍니다
예나 지금이나 안양예술고등학교 출신 연예인(특히 여성 연예인)들의 명성은 새삼스러운것이 아니지만
제 또래의 안양예고 출신의 여학생중들에서 남다르게 매우 특별한 공통점을 가진 두여인이 있읍니다
가수 은지원의 어머니인 김성아씨 (1954년생)와
롯데 신격호씨의 3번째 여인으로 알려진 서미경씨 입니다
릴리 씨스터즈(백합자매)의 김성아
1970년 8월호 여성동아에 실린 1954년생 쌍동이자매(김성아, 김성경)인
릴리씨스터즈(당시 안양예고 2학년 )의 사진 입니다
69년 7월 동아방송 주최 예능 콩쿨에서 새타령으로 픽업된 쌍동이 자매라고 소개 되고 있읍니다
릴리씨스터즈는 당시 펄씨스터즈의 인기에 필적을 하며 가수와 배우로 활발한 황동을 하며
야마하, 파이오니어, 빅터등 일본의 여러 레코드사로부터 취입제의를 받았던 인기자매그룹 이었읍니다
종로2가 국일관 순생맥주홀 '팔도강산'광고
사진아랫부분에 릴리씨스터즈의 모습이 보이는데
당시 그녀들의 인기를 광고에 얼굴만 나타나있는 다른 가수들과 비교하여 알수 있읍니다
최현민 감독의 영화 젊은도시(1976년)
하지만 1977년도에 언니인 김성아가
28년 연상의 은희만(박정희의 외조카로 당시 청와대 경호실 근무)의 아이를 갖게된후
화려했던 그녀들의 시대를 접고 대중들의 곁을 떠나게 됩니다
가수 은지원의 아버지인 은희만의 당시 나이는 51세 이었고 어머니인 김성아의 나이는 23세 였읍니다
은희만,김성아 부부
1999년 당시
김성아가 은희만의 아이를 갖은 대한민국의 1977년도 시절이
아무리 성인남자와 여자가 손만 붙잡아도 아이가 생기는줄 알고
육체의 연까지 이어지면 부부로 지내야 함을 당연시하던 유교사상이 깊은 시대였지만
23살의 꽃다운 처녀가 어떻게 18살도 아니고
28살이나 많은 당시 51세의 남성과 부부의 연을 맺을수 있었을까? !,,,,,
아래 글상자의 내용에서
릴리시스터즈가 인기를 구가했던 시절의 시대배경으로
이해하고 싶지않은 퍼즐을 맞추어 봅니다
박정희의 엽기 행각
10·26사건(1979년)을 수사한 합동수사본부 수사 제1국장 백동림은
박정희에 대한 김재규의 불만과 비판이 마침내 미움으로까지 증폭된 데는
박정희의 복잡한 여자 관계도 작용하였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김재규는 박 대통령의 여자 관계가 지나칠 정도로 난잡하다고 여러차례 불평을 했답니다.
10·26사건을 수사하면서 대통령의 여자 관계를 수사했는데,
대상이 너무 광범위하여 중간에 그만두었습니다"7)
10·26사건의 현장이었던 궁정동 안가와 같은 대통령 전용 '관립요정' 모두 5곳이나 있었다.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는 박정희를 위한 '채홍사'역할을 맡았는데,
그의 증언에 따르면 그런 음탕한 술자리를 한 달에 10여 차례나 열었으며
궁정동 안가를 다녀간 연예인만 해도 1백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경호실장 차지철도 '채홍사'역할을 맡았는데 그가 TV를 보다가 지명한 경우가 30%쯤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저기 걸린 달력에 나온 미녀 모두가 안가를 다녀갔다 라는 박선호의 말이 나오게 된 것이다.
박세길의 말마따나, 그건 '패륜의 극치'였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채홍사가 구해온 여자들은 먼저 경호실장 차지철이 심사했다.
차지철은 채홍사에게 '돈은 얼마든지 주더라도 좋은 여자를 구해 오라'고 투정을 부리곤 했다.
그래서 대통령의 채홍사란 중정 의전과장보다는 경호실장 차지철에게 붙여져야할 이름이었다.
차지철의 심사에 이어 여인들은 술자리에 들어가기 전 경호실의 규칙에 따라
보안 서약과 함께 그 날의 접대법을 엄격하게 교육받았다.
박정희 자신이 여자들을 직접 지명하기도 했다.
그가 영화나 TV를 보다가 맘에 든 배우나 가수의 이름을 대며
'한번 보고 싶다'고 그러면 즉시 불려왔다고 한다
그리하여 수십 명의 일류 연예인들, '누구나 한번 듣기만 하면
입을 딱 벌릴 만한 TV드라마와 은막의 스타들'이 궁정동 안가의 밤 연회에 왔다는 것이다.
김교식은 "모든 증언들이 일치하듯 박정희의 여자 관계는 가학적이고 철저하게 자기만족 위주였다"면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것은 심리학적으로 표현할 때 일종의 자아도취이며 불안으로부터의 탈출 심리에 준한 것이었다. …
박정희는 자신이 이순신이나 세종대왕 같은 위대한 역사의 인물로 남기를 원했다.
그러나 장기집권과 독재를 통해 스스로 확인할 수 있었던 건 수많은 비판과 '독재자'라는 오명이었다.
그 오명이 박정희에게는 일종의 열등의식으로 전화했고,
그 열등의식을 해소하는 방법으로 여자에 대한 철저한 유린과 정복이 동원됐던 것이다.
그가 말년에 특히 젊은 여자를 선호했던 것도 노쇠현상에서 오는 열등감을 해소하려는 하나의 방편이었다
또다른 이유가 있었을 법하다.
박정희는 "일본 육사를 다녔고 그들의 군인 정신이 몸에 배어 있어
섹스에 관한 한 자신에게나 부하에게나 매우 관대했"는데,
그건 박정희가 "사나이 세계에서 관능의 발산은 죄가 되지 않는다는 일본적인 섹스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다가 일본 무협소설의 무사도라는 것이 가미되었다.
일본 무사들은 거침없이 여자들을 정복하고도 아무런 죄악감을 느끼지 않는다.
박정희도 그 무사관의 영향으로 마구잡이로 여러 여자들과 복잡한 관계를 가지면서도
죄의식이나 양심의 가책 따위를 전혀 느끼지않았을 것이다
물론 박정희에게 접근하기 위해 애쓰는 여자들도 많았으며
박정희와 관계한 것을 과시하는 여자들도 있었다고 한다.
여가수 K는 음주 교통 위반으로 단속당하자 경찰에게 "야, 너 국모를 이렇게 할 수 있어?!라고 호통을 쳤고
한번 '인연'을 맺은 후 스스로 '후처'가 되겠다고 나선 영화스타 C의 경우엔
그녀의 어머니가 중정 의전과장에게
"각하께서 우리 아이를 좋아하는데 당신들이 중간에서 차단해도 되는 거요?"라는 항의를 한 일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