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의 광복을 도모한 지 십여 년/ 가정도 목숨도 돌아보지 않았노라 / 뇌락한 나의 일생 백일하에 분명하거늘/ 고문을 야단스럽게 벌일 필요가 무엇이뇨[籌謀光復十年間 性命身家摠不關 磊落平生如白日 何須刑訊故多端]
일제의 악독한 고문에 전쟁포로 대접을 하라며 호통치다 끝내 앉은뱅이가 된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선생. 스스로 호(號)를 벽옹(躄翁 앉은뱅이 노인)이라 했다. 총독부 반대 방향으로 집을 지은 만해 한용운, 일제 치하에선 허리를 굽히지 않겠다며 ‘꼿꼿세수’로 유명한 단재 신채호와 더불어 일제 강점기에 ‘3절(三節)’이라 불렸던 심산의 한시를 접하니 새삼 간담이 서늘해진다. 내달 15일 광복 70년, 29일 경술국치 105년이 되는 날이니 더욱 그러할 터. 심산의 일생과 정신을 기려본다.
시간은, 세월은 많은 위인을 잊게도 만들고 떠올리게도 한다. 한 나라를 쥐락펴락하던 정치가도 매도되거나 잊혀지는 게 인지상정. 하지만 시대가 갈수록 광휘가 나는 위인, 바로 심산이다. 왜 그러한가. 심산은 국운이 기울어가던 1879년 경북 성주에서 조선조 명유(明儒) 동강 김우옹의 13대 종손으로 태어나 1962년 84세로 타계하기까지 우리 민족사상 가장 험난한 시기에 오직 꺾일 줄 모르는 투지,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선비정신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산 지사 중의 지사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27세의 나이에 서울에 올라와 오적(五賊)의 목을 베라고 상소를 올렸으며, 1909년 일진회(一進會)와 그 앞잡이들이 한일합방론을 들고 나오자 이를 성토하고 저지하기 위한 건의서 사건으로 8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나라가 망한 후 술과 방랑으로 광인처럼 지내다 3·1운동 민족대표에 유림만 빠진 천추의 한을 씻고자 동분서주했으며, 137명이 서명한 독립청원서를 갖고 상해로 망명했다. 이렇게 된 데는 “나라의 광복을 도모하는 것이 선비의 의무”라는 어머니의 엄한 채찍이 있었다. 파리평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케 한 것이 500여 명이 체포된 제1차 유림단사건이자 파리장서사건이다. 1916년 동지 송준필에게 보낸 서간의 “현실에 대처하기 위한 실유소사(實有所事)에 힘을 써 진부한 옛 생각에 빠지지 말 것과 오늘의 상황 속에 살면서 종래의 편견 체식에 고식하지 말 것 그리고 성리(性理)의 공담에 급급하지 말고 강상을 부식하는 일과 도의를 밝히고 바로잡는 일에 앞세워야 한다”는 구절만 보아도 심산은 진보적 유학정신을 가진 민족주의자임을 알 수 있다.
그 후 선생은 상해임시정부 의정원 의원과 부의장이 되었으며, 한때 만주독립군 군사부고문을 맡았다. 군자금 조달을 위하여 동지들을 밀파하거나 영남지역에서 직접 모금을 했다. 모금 운동(나석주 의사에게 자금과 무기를 제공, 동양척식회사와 식산은행에 폭탄을 던지게 했다)이 탄로 나 유림인사 600여 명이 체포되었으니, 이것이 제2차 유림단사건이다. 심산의 항일 민족독립운동은 단재, 백범 김구, 도산 안창호 등과 힘을 모았으며, 두 아들까지 민족의 제단에 바쳤다.
심산은 20여 년에 걸친 네 차례의 투옥과 고문에도 백절불굴(百折不屈)의 표상이었다. 해방 이후 백범과 함께 신탁통치와 남한 단정(單政) 수립 반대투쟁에 앞장섰으며, 사이비 황도유학(皇道儒學)을 척결하고 피폐된 성균관 조직을 재정비하여 성균관대학을 설립한 교육사상가이기도 했다. 한국전쟁 때에는 총칼 앞에서도 김일성과는 죽어도 함께 할 수 없다고 거절했으며, 헌법을 고치며 독재를 굳혀가는 이승만정부에 반대하여 대통령 하야를 촉구하는 사자후를 토했다.
1958년 아시아경기 운동장을 건립한다는 미명 아래 일곱 분의 순국선열의 혼(백범,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이동녕, 차이석, 조성환, 안중근의사 가묘)이 잠든 효창공원을 교외로 이전하려는 음모에 불편한 노구를 이끌고 ‘1인 시위’를 벌여 축소된 채로나마 현재의 추모공원을 유지할 수 있었다. 오죽했으면 1962년 7월 18일 치러진 사회장에서 당시 박정희 국가최고회의 의장은 “선생의 일생은 건국의 공로로 새겨진 명예의 상처로 엮어졌으며 대쪽같이 강직한 선생의 애국심은 항상 국민의 대변자로서 국정을 바로 비판했다”며 “선각자이자 직언거사(直言居士)인 선생의 정신을 이어받자”고 추모사를 했을 것인가. 당시 ‘백세사 천하법(百世師 天下法)’이라는 만장(挽章)의 문구가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휘날렸다고 한다.
▶ 왼쪽: 심산 김창숙 선생 유영(遺影)
오른쪽: 「병상에서 잠못들고 백범과 단재를 생각하며[病枕無寐憶白凡丹齋二公]」
백범은 흉탄 앞에 쓰러지고/ 단재는 수문랑*으로 멀리 갔네/ 가련할손, 홀로 남은 심산 노벽자/ 여섯 해 삼각산 아래 몸져누웠도다[白凡化爲凶彈鬼 丹齋去作修文郞 獨憐心山老躄子 六年臥病三角陽] -심산(心山)- 『김창숙문존』에서 인용.
* 수문랑은 천상의 옥경에서 문한을 담당하는 벼슬이다.
평생 집 한 칸 남기지 않고 대쪽같이 강직했던 선생은 불의를 보면 결코 타협하지 않았던 충정(忠正)의 인간이었다. 시인 고은은 ‘김창숙’이라는 제목의 시에서 심산을 명징한 칼처럼 이렇게 정의했다.
“…/ 긴 세월/ 16년 감옥살이/ 고문으로 다리병신 되어/ 제 걸음 걷지 못하는 세월/ 조선 유교/ 이만한 사람 있기 위하여/ 5백 년 수작 헛되지 않았다/ 하늘 놀지 않았다/ 그에게는 사나이 눈물 있고/ 사나이 노기 있고/ 사나이 쓰라린 기상 있다/…”
- 『만인보』 제2권-
‘조선 유교 이만한 사람 있기 위하여 5백 년 수작 헛되지 않았다’니? 이만한 상찬이 어디 있을 수 있겠는가. 그 누가 이런 상찬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시인의 혜안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비록 심산이 그토록 원하던 민족 통일과 민주주의의 꽃이 활짝 피는 것을 보지 못했다 하여도 어찌 심산의 생을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부박한 세상에도 세월의 더께가 쌓일수록 청사에 빛날 그 이름인 것을.
심산 선생의 동상에는 1957년 청천서당(晴川書堂)에서 기거하며 병상에서 지은 고시(古詩)의 일부분 ‘평화는 어느 때나 실현되려는가/ 통일은 어느 때에 이루어지려는가/ 밝은 하늘 정녕 다시 안 오면/ 차라리 죽음이여 빨리 오려무나[和平幾時現 統一幾時圓 皓天苟不復 無寧遄溘然]’가 유언처럼 새겨져 있다.
선생의 문집인 『심산유고(心山遺稿)』에 어디 음풍농월한 시 한 편이 있던가. 모두가 우국충절과 통일조국을 염원하며 소인배들이 판치는 세상을 경계할 뿐이었다. 선생의 「반귀거래사(反歸去來辭)」 중 끝부분을 보자. ‘남북을 가르는 흑풍회오리/ 화평을 이룩할 기약은 없고/ 저기 저 사이비 군자들/ 맹세코 이 땅에서 쓸어버리리/ 길에서 죽기로니 무슨 한이랴[南北黑風惡 和平未易期 彼叢莠之苗 矢竭蹶而耘耔 死道路兮亦何恨]’
선생은 애초부터 고리타분한 유학자가 아니었으며, 참다운 지식인이자 참여 시인이었고 문장가이기도 했다. 도올 김용옥은 선생이 쓴 ‘누이동생 성산 이실 영전에[祭中妹星山李氏婦文]’ 제문을 천하의 명문이라고 극찬했다.
한편 심산의 애국 사상과 선비 정신을 연구하고 뜻을 기리는 ‘심산사상연구회’가 1978년 대학 교수들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심산사상연구회는 1986년부터 ‘시대의 불의에 대한 저항과 민족의 창조적 역량을 고양하는 학술 및 실천 활동에 공로가 큰’ 대상자들을 선정하여 ‘심산상(心山賞)’을 수여해 왔다. 『한국현대인물사론』을 지은 언론인 송건호 선생이 제1회 수상자였으며, 백낙청, 장을병, 강만길, 이효재, 임종국, 김정한, 송남헌, 장회익 선생 등이 그 뒤를 이었다.
2001년에는 김수환 추기경이 그 상을 받았다. 김 추기경은 수유리 심산 묘소를 참배, 절을 하여 당시 세간의 화제가 되었는데, “이런 분한테 절을 안 하고 어느 분한테 절을 하느냐”며 주위의 시선을 일축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수상금 700만 원에 300만 원을 보태 1천만 원을 재정이 열악한 심산사상연구회에 되돌려주었다. 그런 심산상이 2006년 17회 리영희 선생 수상을 끝으로 지금까지 중단되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뜻있는 분들이 합심하여 하루빨리 심산상을 부활, 선생의 정신이 널리 현창되었으면 좋겠다.
『김창숙문존』(2006년 심산사상연구회 발간)을 덮으며 표지의 심산 선생의 유영(遺影)을 지긋이 응시해 본다. 금방이라도 ‘이 나라가 어떤 나라인데, 너희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호통이 튀어나올 듯하다. 8월 광복의 달이자 민족 수치의 달에 마지막 선비다운 단호한 존안에 꽉 다무신 선생의 입을 바로 보기가 겸연쩍다. 삼가 옷깃을 여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