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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퀴의 발명에서 자동 탈것까지 수메르인들이 바퀴 달린 수레 처음 만들었다
4천년의 한국 역사 중 국토가 가장 광대했던 때는 기원전 2천년 경에 세운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서부터 삼국시대를 거처 발해국까지였다. 만주 전역을 포함한 광대한 나라를 이룩하고 번영을 누릴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고조선 중엽인 BC 1천년 경부터 수레와 배를 전쟁과 경제발전에 이용했기 때문이었다.
신라시대로 들어와서는 계급별로 수레를 구분해 다양하게 활용했고, 해상왕 장보고가 해양선을 만들어 삼면 바다와 멀리 동남아 바다까지 장악했을 만큼 우리나라의 수레와 배의 역사는 웅장했다. 이렇게 찬란했던 수레와 배의 문화가 쇠퇴한 것은 고려 중기부터 일어난 왕권과 권력쟁탈을 위한 잦은 내란, 몽고, 일본 등의 극심한 외침에 따른 폐쇄적인 정치 등의 이유로 교통을 외면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지금까지 나타난 역사적 기록과 유물에 의하면 우리 민족은 바퀴나 수레 또는 배를 직접 발명하지 못하고 그 제조기술과 사용법을 중국으로부터 이어받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중국 역시 이들 육·수상 교통기구들을 인류문명의 발상지인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로부터 전해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우리나라의 고대 교통사를 돌아보려면 이 나라들의 수레나 배의 발전과 전파과정을 빼놓을 수 없다.
수레의 시조 썰매, 바퀴의 원형 굴대
기원전 4천년 경 발명된 바퀴는 오늘날의 자동차를 탄생시킨 인간의 위대한 업적이다. 자동차에 대한 인류의 꿈은 바퀴를 발명하고 수레를 만들어 사용하면서부터 태동하기 시작했고, 바퀴는 세계를 가깝게 만들어 인류문명을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인간이 바퀴를 발명하기까지는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여러 단계를 거쳐왔다. 시초에는 사람의 힘으로 물건을 운반했고, 다음으로 나무썰매를 만들어 이용하고, 가축을 길들여 사용하다가 좀더 지혜가 발달하면서 굴대(롤러)를 사용한 단계를 거쳐 바퀴가 발명되었다.
구석기시대의 인간들은 돌 무기나 나무토막으로 잡은 동물을 가족의 음식으로 이용하고, 그 가죽으로 옷을 만들기 위해 등에 지거나 끌고 집까지 운반했다. 또 물이 있고 따뜻하며 먹을 것이 많은 곳으로 이동할 때마다 필요한 모든 생활도구들을 인간이 힘으로 운반했다. 이 시대에도 개나 말, 소, 당나귀, 낙타 등 순한 동물들이 있었지만 훈련시켜 운반수단으로 사용할 만큼 지혜가 발달되지 못했다.
신석기시대로 넘어올 무렵에는 오랜 원시생활에서 얻은 경험으로 지혜가 발달되어 나무토막을 널판지처럼 엮거나 평평한 나무조각에 끈을 달아 그 뒤에 짐을 싣고 운반하는 썰매를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7천년 경에 사용했던 썰매가 핀란드 북부의 단층 늪지대서 발견되어 구석기 말부터 인간이 썰매를 만들어 운반도구로 사용했음이 알려졌다. 이 썰매는 사람의 힘으로 운반하는 것보다는 쉬웠지만 무거운 짐을 싣고 멀리 가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인류가 동물을 사육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5천년부터라고 한다. 처음에는 소, 양, 염소, 돼지를 기르다가 끈기 있고 힘이 강한 낙타, 노새, 말을 사육했다. 그 중에서 운반도구로 소와 말을 길들여 사용하면서 사람의 힘을 덜게 되었다. 동물들이 최초의 운송 동력으로 이용된 셈이다.
가축을 이용해 사람보다 많은 짐을 운반하고 사람이 타고 다닐 줄 알게 되었지만 더 많은 짐을 수송할 수 없게 되자 소나 말이 끄는 바퀴 없는 썰매를 발명해 사용했다. 이것은 평탄한 곳에서는 유용했지만 굴곡이 많은 험한 땅에서는 사용할 수 없고 멀리 갈 수도 없었다. 이러한 원시적인 썰매형 소달구지가 생긴 것이 기원전 6천년 경으로 신석기시대 초기였고, 유럽 북쪽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미국 북쪽 알래스카 지방에서 그 자취가 발견되었다.
어떻게 하면 이런 불편한 썰매보다 적은 힘으로 무거운 짐을 운반할 수 있을까 끊임없이 생각한 끝에 발명한 것이 굴대였다. 지면과 무거운 물건 사이에 둥근 통나무 굴대를 넣어 밀면 훨씬 적은 힘으로 짐을 운반할 수 있음을 알았다. 고고학자들은 이런 굴대를 기원전 5천년 경부터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아시리아 사람들이 사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집트나 아시리아 같은 고대왕국에서는 궁전이나 사원을 짓기 위해 거대한 돌이나 목재를 운반할 때 수많은 노예들로 하여금 커다란 바퀴 없는 수레를 끌게 했다. 그러나 인간의 지혜가 발달함에 따라 이 불편하고 힘든 썰매 밑에 둥근 굴대를 넣고 말과 소 또는 코끼리 같은 힘센 동물이 끌게 하면 쉽게 운반할 수 있음을 알았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신비의 피라밋을 만든 것도 굴대를 이용한 인간의 지혜였다.
BC 2천500년 경에 축조된 이집트의 피라밋은 1.5톤∼최대 20톤짜리 화강석 230만 개를 145m의 높이로 쌓아 올린 세계 최대의 석탑 무덤이다. 당시 사람들은 여러 개의 통나무 굴대 가운데에 구멍을 뚫고 긴 축을 끼운 다음 나무막대를 양쪽 통나무 굴대 축에 앞뒤로 연결해 굴대가 돌아가게 한 일종의 통나무 수레를 만들어 동물이 끌도록 함으로써 무거운 돌을 운반했다. 이때는 바퀴가 발명된 15년 후지만 당시의 원시적인 작은 바퀴로는 거대한 돌을 운반할 수레를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굴대는 바퀴 발명 후에도 사용되었고, 무거운 돌을 쌓는 데는 지랫대도 이용되었다.
피라밋 축조를 위한 특수한 굴림대 말고 일반인들이 사용하던 굴대는 훨씬 손쉽게 무거운 물건들을 운반할 수 있었지만 지형이 험한 곳에서는 장애물 때문에 연속적으로 사용할 수 없었고 장거리 수송이 불가능해지자 좀더 편리한 굴대를 생각하게 됐다. 이것이 바퀴를 만들어낸 동기였다.
바퀴의 발명과 발전
공구의 발달은 생활도구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석기시대의 돌을 깎아 만든 공구는 날이 둔해 바퀴 같이 섬세한 것을 깎고 맞추기가 어려웠지만 기원전 4천500년 경부터 시작된 청동기시대는 인간의 문명을 크게 발전시켰다. 그 중 하나가 돌보다 강한 구리로 공구를 만들어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청동 도끼, 자귀, 칼, 끌 등 예리하고 단단한 공구는 나무로 필요한 생활도구를 훨씬 쉽고 정교하게 만들 수 있게 했다. 이러한 공구와 굴림대, 인간의 지혜가 바퀴를 발명토록 만들었다.
인류가 바퀴를 발명한 것은 청동기시대 초기로, 청동공구를 만들어 사용하던 시기다. 인류문명의 4대 발상지로 그 선두를 장식했던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이 만나는 삼각분지인 메소포타미아에 살던 수메르인들이 처음 바퀴를 발명했다고 한다.
최초의 바퀴는 커다란 둥근 통나무를 얇게 잘라 만든 것이 아니라 세 조각의 두꺼운 판자를 짜맞춰 연결대를 대고 구리못을 박아 만든 것이었다. 이런 바퀴는 BC 3천500년 메소포타미아의 우르(Ur)왕조 때 이미 사용되고 있었다. 이 나무바퀴는 두께 4.5cm, 무게 30∼70kg 정도로 오늘날의 소형차 타이어보다 훨씬 무거웠다. 톱을 만들 줄 몰랐던 청동기 초기라서 도끼, 자귀, 끌, 칼 등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크게 만들 수 없었다. 최근 이라크의 고대 수메르 지방에서 발견된 바퀴의 흔적은 BC 3천∼2천800년 경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수메르의 그림에도 판자조각 조립형 바퀴가 묘사되어 있다.
바퀴의 실용성이 인식되면서 원시적인 통나무바퀴의 결점을 보완하는 지혜가 발달했다. 충격을 해소하고 마모를 방지하기 위해 테두리에 두꺼운 동물가죽 띠를 둘렀고, BC 3천500년 경에는 견고한 바퀴를 만들기 위해 테두리에 청동못을 만들어 청동판을 입히는 기술로 발전했다.
이후 보다 가볍고 충격을 잘 흡수하면서 튼튼한 바퀴를 원한 결과 BC 3천년 경에는 스포크식 나무바퀴가 등장했다. 축대를 끼우는 허브인 중심의 바퀴통에 테두리 바퀴를 연결하고 지탱하는 2∼4개의 나무 스포크로 만든 바퀴다. 바깥쪽의 나무테는 몇 개로 나누었는데 둥글게 반달형으로 깎아 스포크 대에 끼어 조립한 다음 구리못으로 고정했다. 사용하다가 테두리가 마모되면 새 테두리로 바꾸어 바퀴의 수명을 연장했다. 이렇게 발전한 바퀴는 훨씬 가벼워진 데다가 충격을 잘 흡수하고 수명도 길었다.
바퀴의 보강소재는 구리에서 쇠로 발전했다. BC 3천700년 경 코카사스 산맥을 넘어 소아시아로 들어와 BC 1천900년 경 핫치(Hatti)왕국을 세운 시리아민족의 일파인 힛타이트족(Hittites)이 구리보다 강한 철을 BC 2천700년 경 발견해 철기시대를 열었고, 왕국을 세울 때 이들은 이미 전차와 철제 무기를 사용했다.
철기시대는 인류의 문명을 빠르게 발전시켜 온갖 도구를 만들어 사용했다. 그 중 톱의 발명은 바퀴를 혁명시켰다. 이전의 두꺼운 바퀴테를 보다 얇게 하고, 여러 개의 바퀴살, 허브인 바퀴통, 축인 굴대로 나누어 보다 정교하게 만든 후 이들을 쇠못으로 고정해 조립하고 쇠테를 입혀 더욱 가볍고 튼튼하게 만들었다.
BC 2천500년 경에 와서는 바퀴 자체의 회전 마찰로 생기는 바퀴통의 마모를 줄이기 위해 롤러 베어링까지 사용한 바퀴로 발전했다. 바퀴살은 무게와 충격을 줄였지만 굴대에 끼워져 회전하는 바퀴통이 쉽게 달아 바퀴가 부서지자 바퀴통 중심 내부에 작은 반원의 홈을 여러 개 판 다음 여기에 둥근 떡갈나무를 끼워 넣어 롤러 역할을 하도록 만들었다. 바로 지금의 베어링인데, 이로써 바퀴는 굴대를 마모시키지 않고 훨씬 더 잘 돌아가게 되었다. BC 2천400년 경에는 바퀴테뿐만 아니라 바퀴통 겉에도 철판을 둘러 씌워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다. 이런 바퀴 제조기술은 곧 소아시아에서 중국으로 전파되었다.
수메르인들의 수레
바퀴의 발명은 필연적으로 수레를 탄생시켰다. 수메르인들은 발명한 바퀴를 곧 수레에 달았다. 기원전 3천800년 경, 긴 축을 썰매 밑바닥에 고정시킨 다음 축의 양 끝에 바퀴를 끼우고 빠지지 않도록 나무 쐐기를 박아 만든 최초의 원시형 수레가 등장했다. 이 수레는 그 후 조금씩 편리하게 발전해 BC 3천500년 경에는 수메르족 상류층에서 사용되었음이 여러 유적에서 나타나고 있다.
수레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이를 끌어줄 동력이 필요했다. 최초에는 동물을 수레의 동력으로 이용할 줄을 몰라 사람이 끌었으므로 초기의 원시형 수레는 크지 않았다. 이라크의 고대 도시국가 지역에서 발견된 상현문자 벽화에서 BC 3천500년 경으로 추정되는 4륜 수레가 처음 발견되었는데, 이 수레는 최초의 판자 조립형 바퀴를 썰매에 달아 사람밖에는 끌 수 없도록 만들어졌다.
스케이트 날처럼 손잡이가 앞쪽에서 위로 휘어지고 위가 날카롭게 솟아오른 지붕이 달린 상자형 차체로 만들어졌으며, 사방이 휘장으로 둘러쳐진 것을 보면 귀족들이 타던 승용수레로 추정된다. 같은 시기에 수메르인들은 4륜 수레와 함께 물건을 운반하는 2륜 수레도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했다.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발굴된 벽화에 판자조립형 바퀴 두 개를 단 수레에 물건을 싣고 네 필의 말이 끄는 그림이 새겨진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시대가 흐르면서 수레를 이용한 경제활동 범위가 넓어지자 더 많은 물건을 운반하기 위해 수레가 커졌으므로 인간이 끌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인간 대신 수레를 끌 수 있는 보다 강력한 힘을 가축에서 찾았다. 그것은 바로 BC 5천년 경부터 식용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염소 양 돼지 소 말 낙타 등인데, 가장 적합한 것이 소와 말, 낙타였다. 수레를 끌기 위해 힘이 강하며 빠르고 순한 동물로는 소나 말이 적합했고, 길들이기 힘든 말보다 유순한 소가 훨씬 힘이 세고 인내력이 강해 처음에는 소가 수레를 끌었다.
수레를 본격적으로 사용한 것은 BC 2천500년 경 이라크 동남부 유프라테스강 유역의 수메르족이 세운 우르(Ur)왕조 때부터였다. 이 시대는 네 바퀴와 두 바퀴 수레가 사용되었는데, 이들 사이에는 계급이 구분되어 네 바퀴 수레는 왕이나 귀족용, 두 바퀴 수레는 화물운반용으로 사용되었다.
BC 2천년 경부터는 전투용 전차가 개발되어 전쟁의 중요한 무기로 사용되었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가벼운 스포크식 바퀴를 두 개 단 2륜 전차에 두 사람의 전사가 타고 전장을 달리면서 한 병사는 달리는 두 필의 말을 조종하고 나머지 한 병사는 적을 향해 활을 쏘는 장면이 조각된 벽화가 발견됐다. 말이 끄는 가볍고 빠른 2륜 수레는 평화시에는 수렵용으로도 사용했다. 전차를 많이 사용할수록 막강한 왕국을 세울 수 있었고 전차가 없으면 패망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고대 왕국에서는 전차의 위력이 대단했다.
BC 1천750년 경에는 유라시아(시리아) 초원에 살던 힉소스(Hyksos)족이 전차와 말로 이집트를 침입했을 때 이 전차를 본 이집트인들이 그 후 전차를 많이 만들어 BC 1천550년 경 힛타이트와 아시리아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일도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이집트에서 발견된 고대벽화에 그려진 전투 장면을 통해 알 수 있다.
속도가 필요한 승용 수레와 전차의 등장은 동력원 역시 소에서 빠른 말로 바꾸어 놓았다. 속도가 절대 필요한 전차나 수렵용 2륜마차 때문에 빠른 말의 사육법이 바퀴제조업과 같이 번성하기 시작했고, 고대국가들간의 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면서 전차와 군수품의 빠른 수송에 빠르고 힘센 말이 대거 이용되었다.
이륜 전차의 등장은 전투법과 군사조직법을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와 경제구조 변화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차체와 바퀴, 공구의 제조업이 번성했기 때문이다. 특히 바퀴와 전차 등 수레의 제조는 고대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에서는 하이테크 산업이었음을 생각할 수 있다.
자료를 종합해 보면 고대사회에서 수레는 몇 가지 용도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종교적인 일이나 장례 같은 성스러운 의식에 사용된 듯하다. 고대 문명을 나타낸 조각이나 벽화 대부분이 신성을 띤 종교적 인물이나 왕의 장례식에 수레를 묘사하고 있고, 성서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유일한 신인 여호와의 법괴는 절대로 인간의 손으로 운반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즉 사람의 손이 아닌 바퀴 달린 수레에 실어 운반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또 하나의 목적은 먹고 남은 잉여 농산물을 운반해 물물교환을 하는 데 사용했을 것이다. 비옥한 메소포타미아 삼각주에 살던 수메르인들은 풍부한 곡물을 수확할 수 있었다. 그들은 먹고 남은 곡물을 수레에 실어 다른 도시로 운반, 도시에서 생산되는 생활용품들과 교환했다. 교역경제가 발달함에 따라 운송수단으로써 수레의 필요성은 절대적이었다.
세 번째 목적은 전쟁을 효율적으로 치르기 위해서였다. 빠른 말이 끌고 달리는 전차는 속전속결의 중요한 무기로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된 것이다. 보다 많은 전차를 가진 쪽이 우세한 군사력을 확보할 수 있었고 강력한 왕국을 세울 수 있었다. BC 1천550∼1천300년 사이에 아시리아와 이집트는 전차를 많이 소유한 덕분에 강대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