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살게 하는 것은 누구의 속에도 계신 `그이'지 우리 피차가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생각해야 합니다.
` 그이'는 얼로만 계시기 때문입니다.
생각하면 삽니다. 생각 아니하면 죽습니다.
살았으면 죽어도 삽니다. 죽었으면 살아 있어도 벌써 죽은 것입니다. 예수가 살아 있는 것을 누가 감
히 부정할 수 있습니까? 빌라도를 누가 능히 살았다 할 수 있습니까?
자유당 때 나는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했다가 감옥에 갔던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를 잘못이라
하던 그들이 지금 어디 있습니까? 나는 지금도 `그이'가 내 속에 말씀하시는 것을 듣습니다.
생각하는 씨알이라야 삽니다. 씨알은 생각하는 것입니다.
생각하면 씨알입니다. 생각 못하면 쭉정이입니다.
씨알의 알은 하늘에서 온 것입니다. 하늘은 한 얼입니다. 하늘에서 와서 우리 속에 있는 것이 알입니
다. 생각하는 것이 알이요 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알이 들어야 합니다. 생각을 자꾸 좁혀 넣어야
알이 듭니다. 알은 물질 속에 와 있는 정신입니다. 유한 속에 와 있는 무한입니다. 시간 속에 와 있는
여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알이 들면 삽니다. 반드시 삽니다. 생각이 각 둘이 있습니다. 하는 생각과
나는 생각 생각을 하는 것은 나는 생각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둘이 본래 하나입니다.
말씀으로 세계가 지어졌다는 것은 이래서 하는 말입니다. 생각을 하는 씨에게는 그이가 자기 생각
을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삽니다. 땅 속에 들어가 썩어도 생명으로 폭발합니다. 속에서 주시는
`그이'의 이 생각을 받은 사람이 무서운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도 살고 세상을 살립니다. 우리가 사는
것은 분명히는 깨닫지 못해도 그 생각이 우리 속에 줄곧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생각 아닌 생각이
우리 속에서 끊어질 때 우리는 죽습니다. 나무통이 아무리 커도 뿌리가 마르면 죽습니다.
겨울은 생각하는 때입니다. 밖으로 아무것도 못하는 대신 속으로 맹렬히 일하는 것입니다. 잘하는
농사꾼은 봄 여름에 하는 것이 아니라 겨울에 합니다. 농사해 가지고 곡식을 거두는 것이 아니라,
추수를 다해 가지고 씨를 뿌립니다.
예수가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보면서도 못보고 들으면서도 못 듣는 사
람입니다. 죽었다가 부활한 것이 아니라 부활을 해가지고 죽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어도 죽
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가 어디 있습니까? 씨알이 깁니다. 밥알이 떨어지는 것은 벌써 그 속에 생명이, 그 속에 그냥 갇
혀 있을 수는 없는 폭발적인 생명이, 벌써 들어찼기 때문입니다. 지地·수水·화火·풍風이 다 달라붙어
도 그 알든 밤 하나를 썩히는 재주는 없습니다. 썩는 것은 상처가 났기 때문입니다. 천하의 작은 씨
알들, 몸에 상처를 내지 마십시오. 그러면 물에 들어가도 녹지도 않고, 불에 들어가도 타지도 않고
바람에 내놔도 마르지 않습니다.
씨알에 할 일은 두 가지입니다. 겉으로는 제 몸을 지키는 것이요, 속으로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 둘이 서로서로 돕습니다.
생각이 알차면 몸을 지킬 수 있고 한 몸을 상처 아니 나게 지키려 조심하고 애쓰노라면 속알이 차게
됩니다.
성이 적군에 포위를 당했을 때 구원병이 비행기를 타고 성 중에 내리듯이 자기 몸을 죽기로 지키는
씨알에게는 하늘에서 구원이 있습니다. 그것이 위에서 말한, 하는 생각에 대해 나는 생각이 오는 것
입니다.
이 알로 된 것은 자기를 스스로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보십시오. 어떤 씨알도 다 구슬처럼 돼 있습
니다. 그 뜻이 무엇입니까? 밖에서 오는 해를 될수록 받지 말자는 것입니다. 구슬은 같은 몸을 가지
고 최소의 겉가죽을 가진 것이요, 바깥과의 접촉은 오직 한 점에서만 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생명
의 지혜입니다. 다른 말로 해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생물이 이 이치를 깨닫기에는 몇 천만 년인지
만만 년인지, 허구한 세월이 들었습니다. 그만큼 생각한 것입니다. 우주적인 생각 끝에 생명의 씨를
가장 완전히 보호하기 위해 그 모양을 취하게 된 것입니다. 씨알의 구슬 모양에는 무한한 지혜가 들어
있습니다. 겸손한 자 땅을 차지한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한 점밖에 소원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위험을 이깁니다. 사람은 이 구슬 알식의 살림법을 해야 모든 환란을 이기고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씨알은 무슨 직업을 했든 간 그 참뜻에 있어서는 농사꾼입니다. 공업, 상업은 정말의 생산은 못합니다.
없는 데서 있는 것을 만들어 참 생산을 하는 것은 농사입니다. 천하를 먹여 살리는 것이, 선한 사람만
아니라 악한 것도, 고운 사람만 아니라 미운 사람도, 먹여 살리는 것이 씨알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늘 뜻, 곧 우리 속에 말하시는 `그이'의 뜻, 곧 양심의 소리입니다. 그 명령을 알아듣기 위해,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힘을 받기 위해 생각해야 합니다.
생각하는 씨알이라야 산다!
깊이 생각함으로 안녕하십시오!
사회 : 안녕하십니까? ≪계간수필≫ 제 48호, 2007년 여름 호를 위한 합평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합평 작품은 함석헌의 ≪생각하는 씨알이라야 산다≫입니다. 오늘 합평회의 지정토론자로는 홍혜랑,
유혜자, 이태동 선생님 세 분을 모셨습니다. 함석헌 선생의 일생은 어느 한 부문으로 얘기를 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넓고 방대해서, 오늘은 문학성에 초점을 맞추어 토론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우선 홍혜랑 선생께서 함석헌 선생의 연보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해 주시지요.
홍혜랑 : 함석헌 선생은 1901년 평북 용천군 부라면 원성동에서 6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으며,
부친이 한의사여서 비교적 윤택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부친은 마을에 장로교회를 세울 만큼 신앙심
이 깊었으며, 특히 서양식 장로교 학교를 세운 숙부 함일형은 이 분의 정신적 스승이었다고 합니다.
선생은 이미 어려서부터 시대를 앞서가는 선구자적인 집안 분위기 속에서 성장한 셈입니다.
1916년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며, 다음 해에 16세로 황득순과 결혼합니다. 3·1운동에도 참
가하였는데, 이 운동의 외향적 실패로 실의에 빠져 2년간 고향에 내려가 은둔자 생활을 합니다. 한편
으로는 좌익계 지식층이 형성되는 현실 앞에서 갈등을 겪다가, 오산학교 3학년에 편입을 합니다. 여
기에서 남강 이승훈과 다석 유영모를 만나 한국독립의 필연성과 노장공맹사상을 비롯한 고전을 배
우게 됩니다. 이 배움은 훗날 선생이 동양적 시각으로 기독교 성경을 해석하는 단초가 됩니다.
1924년 동경유학을 떠나서 동창생 김교신의 소개로 우치무라 간조를 만나 그의 `무교회 운동'에 깊은
감화를 받습니다. 4년 만에 귀국하여 오산학교의 역사교사로 부임하는데, 오산학교 ML당 사건에
연루 수감되어 결국은 퇴임을 합니다. 그 후 평양의 송산농산학원을 인수하여 6개월간 운영하기도
하고 ≪성서조선≫이 폐간되면서 옥고를 치르는데, 여기에서 선생은 훗날 기독교, 불교, 도교가 하
나라고 하는 `종교다원주의' 사상을 갖게 되는 여러 방면의 공부를 합니다. 그의 정신 속에는 도교,
유교, 불교, 힌두교, 무교회주의 기독교, 퀘이커주의, 과학주의, 합리주의가 혼재해 있는 것으로 나
타납니다.
해방 후 북한을 탈출해 아내와 다섯 자녀(노모와 장남과 장녀는 북한 잔류)를 남한 땅에서 만납니다.
'56년 ≪사상계≫에서 집필을 시작하고, '57년 간디와 톨스토이를 흠모하던 선생은 `씨알농장'을 창
설합니다. 그러나 후에 이 씨알농장은 내부적 경영미숙과 박 정권의 탄압으로 '73년 문을 닫게 됩니다.
이상주의자였던 함석헌이 조직가로서의 한계를 깨달은 실패의 경험이었습니다.
선생은 사상계에 실린 유명한 글 <생각하는 사람이라야 산다>가 문제가 되어 수감되고, '67년에 정
식으로 퀘이커 교도가 되어 한국의 민주화 운동과 인권운동을 전개하게 됩니다. '70년 ≪씨알의 소
리≫를 창간하였으나, 폐간과 복간을 거치게 됩니다.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을 받았으며, `인촌 언
론상'을 수상했고, 1989년 향년 88세로 생을 마칩니다.
사회 : 감사합니다. 그러면 이번엔 유혜자 선생께서 작품 세계랄까 문학적인 면모 등 다른 측면에서
평가해 주십시오.
유혜자 : 함석헌 선생은 민권운동가, 역사 철학자, 종교 사상가란 타이틀과 함께 종교시인, 역사, 정치,
사회 문제로 글을 쓰는 훌륭한 문필가로 불린 만큼 많은 저서가 있습니다. ≪뜻으로 본 한국 역사≫,
≪성서적 입장에서 본 한국 역사≫, ≪한국혁명의 역사≫ 등 기독교와 신앙생활에 대한 수상, 강의와
연구문, 번역서, 시집 등 무려 107권(重刊, 復刊을 포함)이나 있는데, 한길사에서 스무 권의 전집으로
냈습니다.
역사철학자, 사상가, 민권운동가로서 호소하는 글이 많고 영향을 주었기에, 시와 수상 등은 크게 부
각되지 않고 평론가들이 많이 다루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강연과 연설문 때문에 사실 그의 문학적인
면모가 가려져 있는 셈이지요. 선생 자신도 문학적 작품을 쓰려는 동기로 쓴 것이 아니라고, 특히 시
집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미적 감동과 설득력을 갖춘 시 작품들과 수상들의 가치를 점차
찾아가고 있는 경향이고, 인물 소개에 문필가라는 타이틀도 첨부되는 것을 보면서 그의 문학 세계와
작품에 대한 연구도 활발해지기를 기대합니다.
선생의 저서가 출간된 것은 1950년대지만 1930년대부터 ≪성서 조선≫에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를 기고했는데, 그때는 아시다시피 한문 투의 문어체를 많이 쓰던 시대로 한글 문장이 극도로
불안정한 처지였음에도 이 분은 쉬운 구어체를 많이 썼습니다. 문법적으로 단정하고 그 표현이 독특
하고 역설적이어서 선생이 아니면 도저히 쓸 수 없는 독창적인 문체라고 하겠습니다.
많은 글에 담긴 큰 주제는 `애국심과 신앙심'이라고 하겠는데, 영적인 감성과 예지로 대단한 설득력을
갖고 있는 것이 특징으로 생각됩니다.
오늘의 합평 작품은 1972년 ≪씨알의 소리≫에 쓴 글인데 문장은 무리가 없으나 이해를 위해서 주석
을 달아야 할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신앙적 영감으로 발견해낸 기독교에 대한 사상이 집약되어
있는 매우 좋은 글입니다. 그런데 생명, 일체, 불멸, 영원 등 기독교인이면 이해할 수 있으나 불신자
들에겐 다소 어려운 부분이 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이를테면 “예수가 죽었다가 부활한 것이 아니라 부활을 해 가지고 죽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
어도 죽음이 아니라.”는 부분 등입니다. 주장을 강조, 설득하기 위해서 반복하는 것이 함석헌 선생의
글의 특징이라고 볼 때 이 글도 예외는 아닙니다.
사회 : 두 분께서 조사하신 게 상당히 입체적이고 집약적으로 함석헌 선생을 부각시켜 주셨는데요.
그러면 마지막 토론지정자이신 이태동 선생께서 말씀해 주시겠습니다.
이태동 : 저는 여기서는 문학적인 것만 얘기하겠습니다. 단단하고, 살아있고, 죽었지만 살아있는 그
런 핵심적인 내용을 문장이 간결하고, 우아하고, 결곡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문장이 씨알에서 나
타내고 있는 주제를 거울처럼 잘 비춰주고 있는 그런 글입니다. 군더더기가 전혀 없습니다.
여기에서 씨알이라는 것이 영혼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죽어있지만 살아있고, 식물이지만
그 속에 생명이 나타나고, 영혼이 있는 생명체이죠. 아까 유 선생님이 “예수님은 부활해서 죽었다.”
라고 한 것이 상당히 어렵다고 하셨는데 굉장히 논리적입니다. 부활이 뭐냐. 저는 촛불이 타는 것이
바로 `부활'이라고 생각합니다. 촛불이 타지 않으면 부활할 수가 없는 거죠. 자기가 고생을 하면서
자기 자신을 깨달으면서, 바로 깨달음 자체가 부활입니다. 수련을 하고 어려움을 겪고, 남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것 그 자체가 부활입니다. 그것이 매우 논리적이죠.
요즘 수필가가 거의 이천여 명이나 되는데,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주변의 신변잡기이고 철학이나
도덕성이 없습니다. 도덕성이란 말은 어떻게 해야만 되느냐 하는 내용도 있겠습니다만, 제가 생각
하는 것은 이 우주가 어떻게 눈에 보이지 않게 만들어졌는가 그것을 밝혀내고, 그것을 따라가는 것
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여적조차도 찾기가 어려운데, 그런 면에서는 종교
철학적인 문제를 부각시키기 때문에 지적인 작업을 했다고 봅니다.
다시 돌아가서 문학적으로 볼 때 글 서두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라고 시작한 것은 문인이 하는
말이 아니고 설교 투입니다. 이건 잘못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살았으면 죽어도 삽니다.
죽었으면 살아있어도 벌써 죽은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문학적이고, 역설적 수사학입니다. 부정
하면서 긍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글에서 기독교, 예수를 되풀이 하는 것은 비신자가 듣기에는 불편합니다. 글은 기독교인만
읽는 것이 아니니까요. 보편적이지 않은 것 같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전문적인 수필가가 쓴 것
은 아니지만 상당히 잘 쓴 글이라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사회 : 고맙습니다. 아주 잘 정리해 주셨습니다. 본격적인 토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혹시 우리 중에 함
선생님을 직접 개인적으로 보셨거나 어떤 에피소드가 있으시면 작품 이해를 위해 말씀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박영자 : 저는 결혼해서 동대문에서 살았는데, 그때 처음 뵀습니다. 그 당시가 김종필이 `정신없는
사람이다.'라고 표현할 때에요. 하얀 두루마기에 하얀 수염을 기르셨는데, 그 분 몸에서 빛이 나는
것을 느꼈어요. `고아한 분'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사회 : 착각은 아니시구요? (일동 웃음) 저는 우연히 한 번 직접 뵌 적이 있는데요. 86년도라고 기억
합니다. 제가 전두환 정권 말기에 서울대에서 학생처장을 할 때였습니다. 4·19날 총학생회에서 강연
회를 준비했는데, 그 제목이 `4·19와 부활'이었습니다. 원칙적으로 허락이 안 되는 시기였지만, 우여
곡절 끝에 모시고 와서 학생 처장실에서 시대의 어려움과 학교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었습니다. 참
으로 고귀한 시간이었는데, 저는 사실 광채는 못 봤습니다.(일동 웃음) 그런데 지금도 기억이 나는데
`부활'이란 것이 기독교적인 개념이 아니고, 분명히 좀 더 복잡한 개념이었던 것 같아요. 이 정도면
우리가 함석헌 선생을 포괄적으로 조명한 셈이 아닌가 싶은데요.
김시헌 : 듣고 소화하기만도 어려워요.
고봉진 : 선생님은 사상가이시고 종교가, 사회운동가이신데요. 이 분이 문학작품을 쓴 것도 아니고,
문학적으로 이것이 어떻게 문제가 되는지 잘 모르겠어요. 유명하고 좋은 글이라는 것밖에 할 말이
없어요.
박재식 : 사회자께서 문학성에 초점을 맞추어 평가하라고 했는데, 강연이나 설교문을 방불케하는 이
글이 과연 수필의 범주에 들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 앞섭니다. 흔히 수필의 영역을 광의로 해석할
때 일기나 서한문까지 포함시키기도 합니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문학성을 전제로 한 개념에 불과
합니다. 물론 함석헌 선생의 이 글도 깔끔한 문장이나 구문構文상의 전개법이 완벽할 만큼 수준 높은
글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만, 막상 문학성에 초점을 맞추어 감상할 때 이질감과 혼란을 겪게 됩니다.
문학이나 예술은 감상이라는 인식 과정을 통해 접근되는 분야의 세계입니다. 그러니까 해석과 천착을
통해 진리에 접근하는 철학 등과는 달리, 감상을 통해 느끼는 감흥과 깨달음을 얻는 경지의 객체가
문학이나 예술의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문학적인 문장의 경지는 그 문의(文意)가 갖는 내
용의 형상법에 감상의 초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글은 그런 형상법이 무시된, 어쩌면 그것을 초월한
영적인 개념의 일방적인 표백으로 통상의 감상에 의한 접근을 거부한 느낌이 없지 않습니다. 그래서
무척 난해한 문장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본래 영적 세계는 심오하다기보다 불가사의에 속하는 분야이므로 흔히 문학 문장의 모티브가 되는
영감과는 자별합니다. 그래서 수필이라기보다는 영성이 강한 설교문에 불과한 글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회 : 저는 이것을 읽고 에머슨(Emerson)을 많이 떠올렸습니다. 에머슨의 <self―reliance:자기 신
뢰>라든지 하는 글들이요, 특히 `meta―physics club'에서 `American scholar'라는 제목으로 연설한
것이 있어요. 그것도 유명한 연설문이면서 이런 식으로 다뤄지는 작품이거든요. 그런데 문학성이 매
우 높다는 평가를 받거든요. 이 글이 보는 관점에 따라 문학성이 있는지 없는지는 좋은 토론거리가 될
것 같습니다.
변해명 : 저는 박재식 선생님의 의견에 동감입니다. 수필의 영역을 얼마까지 넓히고 어떻게 받아들
여야 되느냐가 상당히 고민거리입니다. 이번에 `철학수필'에 관계된 것을 김진섭 선생님의 작품을
다루고 난 뒤에 생각을 해 봤습니다. 문학성보다는 철학의 주제가 강하고 이렇게 신앙인이 쓰는 것
은 어디에 놓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글에서 앞부분과 끝 부분의 인사말을 빼면 나머지 글의 문
장체는 수필의 장르에 넣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일상에서 만나는 신변잡기나 수필가들이 써 내는 문학에 치중된 글하고 이런 글들을 놓고 볼
때에, 에세이라는 영역에 다 넣을 수는 있지요. 하지만 전부 다 넣을 것인가 아닌가에 관한 갈등은
여전합니다. 문학다운 수필이 최고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세상 사람들이 인정하는 수필이라는 세
계가 워낙 넓고 크다보니까, 그럼 그런 곳에도 시선을 돌려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봤습니다.
그런 점에서 제 개인으로는 이 작품이 상당히 좋다고 생각합니다.
문혜영 : 함석헌 선생이 번역하신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가 있습니다. 20대 초반에 이 책을 통해서
`씨알의 소리'를 듣었는데, 이 단어가 매우 감동적이고 인상적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는 문학의
주제성이 바로 `씨알'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항상 보이든 안보이든 문학 속에서는 크든 작든 알을
심어야 한다고 봅니다. 함 선생님의 씨알은 너무 우주적으로 큰 씨알이고, 저는 이런 영적인 글에 매
료됩니다. 20대에는 읽었어도 그 의미가 잘 전달이 되지 못했던 것이 이번 합평회에서 새롭게 인식이
되어서 좋은 기회였습니다.
정진권 : 마치 강연 원고 같아요. 이 글은 모든 사람의 공감을 얻을 수 있고 또 설득할 수 있는 그런
논리적인 문장이 아니고 `직관적인 언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니까 따르는 사람에게만 해당되
는 이야기 같아요. 수필이냐 아니냐에 대한 생각은 머릿속이 혼란하고, 문학적인 표현이 여러 군데
나오지만 이것 자체는 수필이라고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최병호 : 씨알, 얼, 양심 등 종횡무진하게 엮어가는 율조에 잠시 빠졌습니다. 앞에서 정 선생님은 그
내용을 가지고 말씀 하셨는데, 저는 이 율조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생각
의 두 행태에 `하는 생각, 나는 생각'이라는 다른 사람들이 잘 쓰지 않는 말을 동원해서 표현을 했어요.
김영만 : 이 분이 씨알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나라를 형성하고 있는 백성들 하나하나가 생각하고
머리를 써야 산다. 백성들을 여러 군데에서 씨알이라고 표현했어요. 한 가지 의문은 이렇게 글에서
특정 종교에 대해 썼을 때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되는지 하는 문제입니다.
사회 : 그런데 성경 자체도 위대한 문학작품으로 평가되고 있지 않습니까? 내용이 특정 종교를 다룬
다고 해서 문학성이 떨어진다거나 하는 것은 아닌 것 같은데요. 최병호 선생님, 율조라는 게 어떤 뜻
으로 말씀하신 거죠?
최병호 : 시적인 의미죠.
사회: 네. 저도 이것을 연설문 형태의 일종의 산문시로 보면 우리가 이해하기가 훨씬 쉽지 않을까 생
각합니다. 그러면서 메시지가 있어서 수필 형태로 볼 수 있지요. 철학적, 역사적 논제들이 여기 많이
들어있지만, 배타적으로 문학성만 꼭 따질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제가 너무 민족주의적이나 종교
적으로 흐를까봐 서두에 문학성에 맞추자고 했지만요.
이태동 : 아까 김영만 선생께서 성경 말씀을 하셨는데, 세계 문학에서 성경이 가장 오래된 문학작품
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아주 옛날 이야기이고,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수필 같은 데서
하느님 얘기하는 것은 없어요. 여기에 하나님을 집어넣으면 기독교 신자가 아니면 거부감을 느끼고
보편성이 약하죠. 그러나 철학적인 에센스는 문학에서도 필수입니다.
김영만 : 금와 선생의 글에서도 기독교적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을 많이 하시는데, 상당히 자연스럽
게 받아들여지고 거슬리지 않습니다만.
이태동 : 한용운 씨는 스님이지만 문학적 평가를 받고 있지만, 이 분은 문인으로 평가를 받지는 않습
니다. 이 글이 아주 좋긴 하지만 너무 관념에 흐르기 때문에 경험과는 괴리가 있어서 문학과는 조금
거리가 있다고 보는 거죠.
고임순 : 굉장히 뭔가를 생각하게 하고, 메시지가 강하고 신선하며 호소력이 강한 것에 매료됐습니다.
글이 사람이라고 볼 때 함석헌 선생만이 쓸 수 있는 글이라고 봅니다. 관념에 흐르고 구성이 거칠지만
문학으로서 좋은 글입니다. 우선 깨우치고, 놀라게 하고, 겨울잠에서 깨어나게 하고, 뭔가 생각이
깊어지게 하는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진식 : 생각하기 때문에 자유가 있고 본질적인 접근을 합니다. 여기서는 초월적 씨알이 나타난다는
것은 함석헌이 독자적으로 제기하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상당히 계몽주의적인 느낌이 들어서 톨스
토이가 생각났습니다. 문학으로 받아들일 가치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김명규 : 저에겐 상당히 어려웠습니다. 씨알의 상징적인 뜻은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이란 뜻이며,
또한 농사를 지어서 `알곡으로서 씨앗'을 뜻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당시 경제성장을 눈앞의 목
표로 내걸고 박정희 군사정부가 공업과 상업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을 때에, 생명의 근원을 가꾸는
농업을 소중히 해야 한다고 강조하여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사회 : 여기 씨알이 문자 그대로 쓴 말은 아니지요? 제가 알기에는 약 20가지 정도로 쓰이고 있는 것
같은데요. 상당히 복잡한 형이상학적이고 힌두교적이면서, 실체(substance)―겉으로 안 나타나 있
지만 모든 것의 근원이면서 존재 이유이기도 한 복잡한 뜻도 여기 있거든요.
김시헌 : 여기서 씨알이라는 말은 처음에는 종교적인 의미의 말을 했고, 좀 더 넓혀서 생각하는 사람
은 모두 씨알로 넓혀놓은 느낌입니다.
조한순 : 오늘 이렇게 재조명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문학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문맥적으로 저에게
가까이 다가오질 않았습니다.
박영자 : 유럽과 한국의 에세이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그 이유를 곰곰 생각해 보니
바로 이런 점에서 달라지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이 글을 읽고 저는 마음속에서 반항의식이
들고, 마치 지시를 받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우주적인 절대자에 대한 종교를 가진 것이 아닌가.
앞으로는 `붓 가는 대로 쓰는 것'은 지양해야 되지 않나 생각을 했습니다.
사회 : 아주 다양한 시각이 나오는 것 같아요. 또 다른 분은?
정부영 : 복잡해서 읽기가 어려웠어요. 만약 제가 종교적으로나 도덕적인 느낌―깨달음이 있었으면 이
글을 이해하기가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어떻게 보면 씨알이란 것은 단순하고 함축성이 있는 것 같은
데, 마치 함선생님이 방정식을 풀어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사색'을 주는 글입니다. 소재를 가
지고 쓴 것보다는 감동이 큰 글이어서 젊은이들에게 권하고 싶습니다.
김병권 : 난해한 글입니다. 문맥만을 가지고 보기보다는 시대적 배경, 사상적 궤적을 따라서 다른 연
구가 있어야 접근하기가 쉽습니다. `부자가 천당 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을 들어가기만큼 힘들다'는
말처럼, 이 글은 문자나 문맥만을 가지고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허세욱 : 우선 씨알이란 말부터 생각해야겠는데, 씨알은 원리적, 생명적인 그런 포괄성을 가진 낱말이
아닌가 싶어요.
첫째, 어느 특정 종교의 범주를 벗어난 게 함석헌 씨의 도량이고 뿌리거든요. 그이가 전개하는 모든 사
상은 대단히 보편적이고 종합적입니다. 동․서는 물론이거니와 동양에서도 묘한 것은 가령 불가, 도가,
유가를 다 섭렵했어요. 유가 중에서도 심리학과하고 성리학파를 모두 망라했어요. 예를 들어 `마음은
곧 이치다.', 이게 바로 씨알이거든요. `인간의 본성은 곧 이치다.', 즉 성리학이거든요. 성리학이 발전
해서 송나라 때는 태극, 이것도 씨알이고, 도가의 도道도 씨알이고, 공空도 사실은 씨알이라고요. 거기
서부터 모든 게 시작되니까요. 그런데 문장으로서 더 완벽한 것은 장자에 보면 “만물은 모든 씨앗을 갖
고 있는 것이다.” 씨앗 그 자체가 생명적이고 변화적이고, 생성에서 완성까지도 가지고 있다. 그런 얘
기를 했거든요.
한때 이 양반이 젊어서 노장에 심취했었는데 불가, 유가, 예수, 모든 걸 망라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
이 들어요. 그 중에서도 이 분의 전체를 보면 이기론과 아주 접근해 있어요. 이理라는 것은 원리이고,
기氣라는 것은 생명이거든요. 理는 매우 변화를 추구하면서 끝내 생명을 놓지 않아요. 그렇게 보면 상
당히 그쪽으로 가지 않았나 싶군요. 문학성이 있는가 없는가 생각해 보니 이건 상당히 `명상체 수필'입
니다. 명상체를 보면 꼭 그렇게 형상화된 것도 좋지만, 마치 파스칼의 한쪽을 보는 기분입니다. 수사상
상당히 장점을 가지고 있어요. 상당히 간결하고, 철학적 사상가임에도 불구하고 언어가 매우 감성적이
에요. 그리고 예를 들면. 상상이나 비유가 풍부하게 인용해서 설교에도 적용을 하더라는 겁니다.
이런 것들은 그 내용이 설교일지라도 문학이라는 생각입니다. 처음부터 그 접근이 `그이'로 시작했다
는 것이 자기를 벗어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사회 : 오늘은 함석헌 선생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환기시킨 데에서 만족을 해야겠네요. 그래도 쟁점은
분명히 나온 것 같습니다. 이 분이 시대에 따라 다르게 평가가 되는데요, 오늘 이 작품이 우리 에세이
스트들의 외연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길고 열렬한 토론에 정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