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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7. 묵상글 (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 더 큰 소리로.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아직 / 04:54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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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7.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11.17 04:48
- 더 큰 소리로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오늘 복음은 예리코의 눈먼 이가 자비를 받아 구원되는 얘기인데
자비를 청하는 그의 부르짖음이 사람들에 의해 저지당하자
그는 더 큰 소리로 자비를 청하는 것이 아주 인상적입니다.
사람들의 저지에 주눅 들어 죽어 가는 소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큰 소리로 외칩니다.
제가 고백성사 줄 때 고통스러운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죽어 가는 소리로 죄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뭐가 들려야 훈화도 하고 보속도 줄 텐데 죽어 가는 소리니
더 집중해야 하고 초집중해야 하니 빨리 피곤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죄를 고백하면서 큰 소리로 고백할 사람 거의 없고,
자비를 마치 맡겨놓은 것 달라듯이 달라고 할 사람 없지요.
그러니 자신만만한 바리사이와 달리 세리가 주님 앞에 나오지도 못하고
멀찍이서 불쌍히 여겨달라고 한 것처럼 그렇게 청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릅니다.
자비를 청하는 태도로는 이것이 맞지 않을까요?
뭐가 그리 당당하다고 큰 소리로 외치겠습니까?
그런데 경우가 다른 것 같습니다.
죄인은 그렇게 자비를 청함이 맞을 것입니다.
부끄럽고 죄스러워 겸손한 태도가 맞을 것입니다.
그러나 눈먼 이의 경우는 겸손 떨 계제가 아닙니다.
절실하고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쳐서는 아니 됩니다.
사실 우리도 자비를 입기 위해서는 이렇게 절실해야 합니다.
절실해야 이 소경처럼 간절히 청할 것이기 때문이고,
그래야 어떤 사람도 제지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가 사람에 의해 좌절당하지 않겠지만
사람 때문에 내가 포기함으로써 놓쳐서는 안 되겠지요.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가 사람에 의해 좌절되거나 방해받아서는 아니 됩니다.
그것을 허락지 말아야 하고 그렇기에 반작용으로 더 큰 소리를 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가만히 있으라는 말보다 더 큰 소리로 외쳐야 합니다.
자비는 하느님께 받는 것이지 인간이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내가 진정 주님의 치유와 자비가 필요한 자라면
오늘 소경처럼 인간의 눈치를 볼 것이 아니라 주님께 초집중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복음의 소경처럼
하느님의 자비가 절실히 필요한 사람인지,
그만큼 간절하게 청하는 사람인지 반성하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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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7.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개안(開眼)의 여정
“늘 새로운 시작”
이런저런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어제 제9차 세계 가난의 날, 레오 교황의 귀한 말씀입니다.
“세계 지도자들은 가난한 이들의 부르짖음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정의없이는 평화도 없다.”
“박해받는 신자들은 진리와 정의와 희망의 증인들이다.”
“하느님은 당신의 모든 자녀들에게 평화를 갈망하신다.”
레오 교황은 어제 1300명 초대한 가난한 이들로 가득한 바오로6세 홀에서 함께 점심식사를 나눴습니다. 참석한 몇 사람의 고백입니다.
“나는 직업을 잃었으나, 나의 존엄을 잃지는 않았다(I lost my job, but my dignity).”
“믿음은 우리를 계속 나아가도록 돕는다(Faith helps us keep going).”
“공동체 안에서 지지를 발견하기(Finding support in community).”
신자들의 삶에 좋은 도움이 되는 말씀들입니다.
오늘 옛 현자의 지혜입니다.
“분노는 독한 술과 같아서 내가 분노에 취하는 것이 아니라 분노가 나를 집어삼킨다.”<다산>
“한때의 분함을 참으면 백날의 근심을 면한다.”<명심보감>
그래서 저의 지론은 “미풍을 태풍으로 바꾸지 말라”는 것입니다. 순간의 분노가 미풍을 태풍으로 바꾸기 때문입니다.
어제는 제가 가난에 대해 많이 말했습니다. 깊이 들여다 보면 모두가 가난한 사람들이요 가난은 인간의 본질이라고 말입니다. 죽음앞에서 환히 드러나는 가난한 인간입니다. 저는 평생 매일 강론을 쓸때마다 한계와 부족의 가난을 체험합니다.
이렇게 평생 매일 수시간을 투입했는데도 이정도뿐이 안돼나? 참 많이 좌절했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으면서 가난과 겸손을 배웠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가난 체험은 계속될 것입니다. 아마 강론을 쓰면서 체험하는 가난은 사제의 보편적 체험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주제로한 강론 제목은 “개안의 여정”입니다. 참 자주 사용해도 늘 마음에 드는 주제입니다. 오늘 복음은 작은 복음서라 할 만큼 상징적 가르침으로 가득합니다. 위에 예로 들었던 여러 예화와 말씀들, 개안의 여정에 좋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개안하면 떠오르는 다음 대목의 고백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꽃자리 천국이옵니다.”
오늘은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입니다. 성년는 왕족의 딸로 태어나 14세에 튀링겐 영주 헤르만 1세의 둘째 아들 루트비히 4세와 결혼합니다. 비록 정략적 성격을 지닌 혼인이었지만 두 사람은 6년 동안 세자녀를 두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하지만 루트비히 4세가 십자군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염병으로 사망하자 성녀는 깊은 슬픔중에 자신의 모든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고 작은형제회 제3회원이 됩니다. 세속을 떠나 독일 헤센 지역의 한 성에 살면서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위해 헌신하며 살다가 24세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납니다. 성녀의 가난한 겸손, 봉사의 삶은 세상 사람들의 찬탄을 받았습니다.
성녀는 사후 4년, 1235년 그레고리오 9세 교황에 의해 시성됩니다. 성녀의 성화는 종종 망토 안에 장미꽃을 담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바로 왕비였던 그녀가 가난한 이들에게 주려고 몰래 빵을 감추고 나가다가 남편에게 들키자 그 빵이 장미꽃으로 변했다는 전설에 따른 것입니다. 이를 반영하듯 성녀는 빵제조업자와 빵집의 수호성인이 됩니다. 또 성녀는 자선사업의 수호성인이자 재속 프란치스코회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습니다.
2000년 가톨릭교회에는 참 다양하고 무수한 성인들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흡사 교회 하늘에 무수히 빛을 발하는 별같은 성인들이요, 명실공히 이런 명품성인들이 명품종교 천주교를 만들고 이런 성인들은 우리 삶의 좌표가 됨으로 참 많이도 보고 배움으로 우리 모두 명품인생, 명품신자로 만들어 줌을 깨닫습니다.
성인들의 특징은 끊임없는 주님과 만남을 통해 개안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했다는 것입니다. 육신은 성장을 멈추고 쇠약해지더라도 영적 성장과 성숙은 죽는 순간까지 계속됐으면 좋겠습니다. 육신의 육안 시력은 약해져도 영혼의 영안 시력은 날로 좋아지면 좋겠고 아마도 성인들의 삶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 장면이 상징적으로 참 풍부합니다. 길가에 앉아 구걸하는 어떤 눈먼 이는 삶의 방향을 찾지 못한 가난한 인간의 실존을 상징합니다. 흡사 길목에서 길이신 주님을 애타게 기다리는, 갈망하는 가난한 인간의 보편적 모습입니다.
눈은 멀었지만 영혼은 주님 갈망에 깨어있던 눈먼이는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 말하자 전광석화 반응합니다. 바로 우리가 미사가 시작하자마자 바친 자비송입니다. 새삼 미사시 자비송은 여기서 유래하며 우리의 자비송은 오늘 눈먼이처럼 간절한 갈망의 표현이어야 함을 배웁니다.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앞서 가던 이들이 잠자코 있으라 꾸짖었지만, 구원의 순간을 놓칠수 없어 더욱 큰 소리로 자비송 기도를 바칩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셨고 주님과 눈먼이와 선문답禪門答같은 대화가 오갑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복음의 눈먼이뿐 아니라 오늘 나에게 주시는 물음입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간절하면 답도 짧고 순수합니다. 영적으로 눈먼 우리들에게 역시 간청할바는 이것 하나뿐이겠습니다. 탐욕과 어리석음의 무지에, 또 편견, 선입견에 눈먼, 눈뜬 맹인들인 우리들에게 정말 청할 것은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진상을 보게 해달라는 청만큼 절실한 청도 없습니다.
어찌보면 무지에 눈먼 인간. 바로 인간의 정의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맹신, 광신 모두에 무지의 눈먼 인간을 지칭합니다. 그러고 보니 육신의 눈은 멀쩡해도 영적으로 눈먼이들 가득한 세상같습니다. 예수님의 지체없는 응답입니다.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정말 보고자 하는 갈망의 믿음이 눈먼이를 치유하여 보게 되니 갈망의 믿음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습니다. 눈먼이가 이런 갈망의 믿음으로 자비송을 바치지 않았다면 주님은 그냥 지나쳤을 것입니다.
눈먼이가 눈이 열리자 본 것은 주님이었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니 제대로의 삶의 목표와 방향을, 삶의 중심과 의미를 찾은 눈먼 이입니다. 군중도 모두 그것을 보고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니 군중 역시 주님을 만나 무지의 눈이 활짝 열린 것입니다. 새삼 주님을 보라고 있는 눈이요, 주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있는 귀요, 주님을 찬미하라 있는 입이요 주님을 따르라 있는 발임을 깨닫습니다. 저절로 나오는 감사의 고백입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잠시 오늘 제1독서 마카베오 상권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그리스제국의 치하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처지가 진퇴유곡입니다. 유다인의 ,정체성을 지키자니 순교의 죽음이요 그리스제국의 문물을 따르자니 동화와 속화로 인한 정체성의 상실이니 살아도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흡사 일제 치하에서 조선민족의 처지와 흡사합니다.
지금은 이런 위기는 아니지만 자본주의하에서 세속화의 피해가 날로 우리 신자들의 정체성을 위태롭게 합니다. 속화의 여정이 아니라 성화의 여정과 더불어 개안의 여정이 정체성의 부패와 변질을 막아주며 우리를 세상의 빛, 세상의 소금이 되어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게합니다.
새삼 날마다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시편성무일도와 미사의 공동전례기도가 개안의 여정, 성화의 여정에 얼마나 결정적 도움이 되는지 깨닫게 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을 만난 우리의 무지의 눈을 활짝 열어주시고 날로 개안의 여정에 충실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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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7.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리고의 눈먼 거지(바르티메오)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는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다른 이들의 꾸짖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악을 쓰듯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8,39)
그 당시의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에게서 나온다는 <이사야>(11,1) 예언서의 말씀을 믿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가까이 오자 물으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루카 18,41)
예수님께서는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지 않으시고,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라고 물으십니다. 곧 당신께 대한 믿음을 묻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청원기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곧 첫째는 믿음으로 청하는 일이요, 둘째는 자신이 바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해주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청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진정 청해야 할 것, 주님 뜻에 합당한 것을 청하는 일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는지 빤히 아시지만, ‘우리가 진정 원해야 할 것’과 ‘믿음’을 깨우쳐주십니다.
그러자, 거지 장님은 신뢰와 의탁으로 청합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루카 18,41)
그런데 대체 무엇을 보아야, ‘다시 본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 사용되고 있는 “보다’(anablefo)라는 단어는 ‘위를 쳐다보다’, ‘새로운 것을 보다’, ‘시력을 회복하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의 눈을 뜨기 위해서는 바라보아야 할 대상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 ‘위에’ 달리신 예수님을 쳐다보는 일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그분의 사랑’을 보게 될 때, 비로소 눈을 뜨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곧 ‘관상(theoria)의 눈’입니다.
결국, ‘그분의 사랑을 보는 눈’이 새로운 것을 보는 눈이요 믿음으로 새롭게 보는 영적인 눈입니다. 그것은 육신의 눈을 치유 받는 것을 넘어서, ‘영혼의 눈을 뜨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믿음’이 ‘다시 보게 하고 구원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8,42)
우리가 태어나면서 물질의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졌다면, 이제는 ‘믿음’을 통해서 영적인 세계, 곧 ‘새롭게 보는 눈’을 떠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그분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는 일이요, 지금 우리의 길을 사랑으로 동행하고 계시는 그분을 보는 일입니다. 그리고 “길가”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동행하시는 주님을 “따라” 따라나서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루카 18,41)
주님!
제가 보지 못함은 태양이 떠오르지 않아서가 아니라
눈을 감고 있는 까닭입니다. 마음이 완고한 까닭입니다.
성전 휘장을 찢듯, 제 눈의 가림 막을 걷어 내소서!
완고함의 겉옷을 벗어던지고, 깊이 새겨진 당신의 영혼을 보게 하소서!
제 안에 선사된 당신 사랑을 보게 하소서.
제 안에 벌어진 당신 구원을 보게 하소서.
제가 바라고 싶은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해주시고 싶은 것을 바라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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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7.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3년 만에 한국에 다녀왔습니다. 가는 날에는 본당 성가대 형제님과 함께 갔습니다. 우연히 같은 비행기에 탑승했습니다. 14시간 장거리 비행이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마일리지가 많았던 형제님은 공항 내 라운지를 이용할 수 있었습니다. 3주간의 휴가 일정 중에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부모님이 있는 ‘비봉 추모관’입니다. 아버지는 2011년 하느님의 품으로 먼저 가셨고, 어머니는 9년 후인 2020년 아버지가 있는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원래 고향의 선산은 전라북도 완주군에 있는데, 2007년 ‘비봉 추모관’에 부모님이 계실 집을 마련하였습니다. 서울에서는 한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여서 좋았습니다. 추모관에서 부모님을 위해 ‘연도’를 바치고 돌아왔습니다. 아버지는 강인하였고, 지혜로웠습니다. 어머니는 부드럽고 따뜻했습니다. 아버지는 머리카락이 일찍 하얗게 되었고, 혈압이 높았고, 치아가 좋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머리카락이 검었고, 혈압도 정상이었고, 치아가 좋았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성격과 어머니의 체질을 닮았으면 싶었는데 아버지의 체질과 어머니의 성격을 닮았습니다. 이 또한 하느님의 뜻으로 여기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프루스트는 ‘가지 않은 길’이라는 시를 남겨 주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노란 숲속에 길이 둘로 갈라져 있었다./ 안타깝게도 두 길을 한꺼번에 갈 수 없는/ 한 사람의 여행자이기에, 오랫동안 서 있었다./ 한 길이 덤불 속으로 구부러지는 데까지 눈 닿는 데까지 멀리 굽어보면서/ 그리고 다른 한길을 택했다. 똑같이 아름답고 아마 더 좋은 이유가 있는 길을, 풀이 우거지고 별로 닳지 않았기에/ 그 점을 말하자면, 발자취로 닳은 건 두 길이 사실 비슷했지만/ 그리고 그날 아침 두 길은 똑같이/ 아직 밟혀 더럽혀지지 않은 낙엽에 묻혀있었다./ 아, 나는 첫 길은 훗날을 위해 남겨두었다!/ 길은 계속 길로 이어지는 것을 알기에/ 내가 과연 여기 돌아올지 의심하면서도/ 어디에선가 먼 먼 훗날/ 나는 한숨 쉬며 이 이야기를 하고 있겠지/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그리고 나는/ 나는 사람들이 덜 걸어온 길을 택했다고,/ 그로 인해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어쩌면 신앙은 두 갈래의 길에서 선택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영광을 따르는 길이 있고, 세상의 뜻과 나의 영광을 따르는 길이 있습니다. 노아는 하느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방주를 만들었고, 방주는 하느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구원의 방주가 되었습니다. 모세는 하느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을 따라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아담은 세상의 뜻을 따랐습니다. 뱀의 유혹에 빠졌던 아담은 낙원에서 쫓겨나야 했습니다. 카인은 세상의 뜻을 따랐습니다. 시기와 질투에 빠졌던 카인은 동생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야이로의 딸은 죽었지만, 다시 살아났습니다. 세관장 자캐오는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자캐오와 그 가족은 구원받았습니다. 우리 신앙의 조상들은 하느님을 따랐습니다. 박해와 순교가 있었지만,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습니다. 파라오는 세상의 뜻을 따랐습니다. 권력을 위해서 두 살 이하의 어린아이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빌라도는 세상의 뜻을 따랐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랐던 아버지와 어머니는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다고 믿습니다.
‘견지망월(見指忘月)’이란 말이 있습니다. 손가락은 달을 향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달을 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달을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보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세상의 것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셨습니다. 이집트에서 고통 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데려오셨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땅에서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 주신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오늘 독서를 보면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이방인의 풍습을 따르게 됩니다. 자신들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으니,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는 사람들을 박해하고, 죽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달을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보려고 했을 때, 달을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는 부정한 것을 먹지 않기로 굳게 결심한 이들도 많았다. 그들은 음식으로 더럽혀지거나 거룩한 계약을 모독하느니 차라리 죽기로 작정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죽어 갔다.”
예전에 승강기의 게시판에서 읽은 글이 생각납니다. ‘눈이 오는 추운 겨울에는 소나무와 전나무가 더욱 푸르다.’ 모든 것이 푸르른 여름에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시련의 때, 고난의 때에는 유독 그 푸름이 돋보이는 나무가 있는 것처럼 주변을 보면 그렇게 자신의 길을 충실하게 걸어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신앙인은 세상의 흐름에 따라서 흘러가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거친 물살을 거슬러 올라갈 줄 아는 용기와 신념이 있어야 합니다. 흘러가는 삶은 살아지는 것이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소경은 예수님을 만나서 눈을 뜰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분께 자비를 청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들을 받아들이고, 편안하게 살아도 결국 중요한 것은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소경은 주님께 간절하게 외칩니다. ‘주님 보게 해 주십시오.’ 주님은 소경의 간절함을 보시고, 보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보아야 하는 것들은 ‘빠르고 편하고, 쉬운 길만은 아닐 것입니다.’ 비록 느리고, 힘들고 어렵다고 할지라도, 주님과 함께 가는 길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선택과 결정을 전적으로 우리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이유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의 질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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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7.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내'가 어떤 편향을 가지고 있는가?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11월 16일 일요일- 마 번째 주간 (호명환 번역):
모든 사람은 저마다 하느님께서 주신 삶의 눈을 통해 세상을 바라봅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매일 묵상은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에 뿌리를 두고 리처드 로어와 CAC 운영진, 그리고 객원 교수들의 묵상 글을 제공해 주어 우리의 영적 수양을 심화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동정(compassion)을 구현하도록 도와줍니다.
당신이 여기에 온 것은 사실을 확인하거나, 스스로를 가르치거나, 호기심을 채우거나, 소식을 전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당신이 여기에 온 것은 기도가 참되게 드려진 그 자리에서 무릎 꿇기 위함입니다.
- 티 에스 엘리엇(T.S. Eliot), 리틀 기디(Little Gddding)
리처드 로어 신부님은 예수님께서 우리 종교와 문화, 그리고 가정의 배경 속에서 형성된 세계관을 어떻게 도전하시고 새롭게 하시는지를 성찰하십니다:
모든 사람은 저마다의 렌즈, 곧 문화적으로 물려받은 성향과 가정의 영향, 그리고 삶의 경험으로 이루어진 틀을 통해 세상을 바라봅니다. 이 렌즈, 곧 세계관은 우리가 어떤 대화에 무엇을 가져가는지를 결정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나라를 말씀하실 때, 그분은 사람들의 근본적인 세계관을 새롭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은 "가난 부인과의 교제"이라는 아름다운 은유를 통해 자신의 삶의 핵심 논지를 드러냈습니다. 미국인들이 돈을 '최종 기준'이라 부를 때, 그들은 자신들의 실제 세계관을 의식하지 못한 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작동하는 세계관과 접촉하는 것이 참으로 필요합니다. 그것은 이미 우리 안에 존재하기에, 차라리 그것이 현실을 비추는 강력한 창이라는 사실을 알아두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를 움직이는 참된 동기입니다. 우리의 실제 세계관은 무엇에 주목하고 무엇을 전혀 보지 못하는지를 결정합니다. 그것은 대부분 무의식적이지만, 우리를 이 길로 가게 하고 저 길은 피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근본적인 렌즈를 의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무엇을 보지 못하는지, 또 왜 다른 것들을 왜곡된 시선으로 보는지를 결코 알지 못할 것입니다.
복음이 우리의 무의식 가장 깊은 자리까지 들어와, 실제로 작동하는 세계관을 만져주기 전에는 아무런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단지 가구를 재배치하는 것에 그칠 뿐, 새로운 방을 짓는 일이 아닙니다. 참된 회심은 새로운 방을 짓는 것—어쩌면 온전히 새로운 집을 세우는 것과도 같습니다.
우리의 작동하는 세계관은 이미 우리 안에 자리한 세 가지 이미지로 이루어집니다. 그것은 외부에서 들어온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내면에서 형성된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을 의식하는 것, 곧 깨우는 것입니다. 깨우고 변형되어야 할 세 가지 이미지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이미지, 하느님에 대한 이미지, 그리고 세상에 대한 이미지입니다. 복음을 참되게 들을 때, 이 이미지들은 새롭고 진실한 세계관으로 변모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진리이시다."라고 말할 때, 바로 이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현실을 올바르게 이름 붙이시며, 우리가 생각하거나 두려워하는 것을 넘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십니다. 현실은 우리가 상상하거나 두려워했던 것보다 언제나 더 나으며, 복음을 참되게 들을 때 기쁨이 함께합니다.
결국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삶은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왜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어떻게 그것을 고칠 수 있는가?와 가튼 질문들이 우리 안에서 답을 얻을 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안전과 목적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종종 ‘진복팔단’ 안에서 내가 어디에 속하는지 고민해 왔습니다. 그러나 ‘교만한 이를 위한 것이 아니다’라는 묵상은 마치 처음 보는 듯 팔복을 새롭게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그 단순하고 맑은 가르침은 제가 이해한다고 생각했던 것을 부드럽게 허물어 주었고,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이 결핍이나 덕목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진리를 제 눈을 열어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은 정직한 영적 필요와, 내가 스스로 온전해질 수 없다는 고요한 자각을 의미합니다. 이 가르침이 제 안에서 계속해서 무언가 새로운 것을 부드럽게 일깨워 주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드립니다.
—Jim W.
References
Adapted from Richard Rohr, The Wisdom Pattern: Order, Disorder, Reorder (Franciscan Media, 2020), 135–136, 137, 138.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Bud Helisson, untitled (detail), 2021, photo, Brazil,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이 렌즈는 우리가 본래 지닌 편향을 상징합니다. 이미 믿고 있는 것을 확인해 주는 것만을 선호하거나, 우리와 닮은 이들만을 바라보는 편향은 우리의 시야를 흐리게 합니다. 그러나 참된 깨달음은 다시 바라보고, 다르게 볼 수 있으려는 열린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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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7.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가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앞서 가던 이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루카 18,38-39)
눈먼 사람은 예수님께서 다윗의 자손이요 메시아이심을 알고 있다
눈먼 사람은 인간의 수단으로는 시력을 회복할 수 없고, 하느님의 거룩한 능력과 권위를 힘입어야만 그럴 수 있다는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그는 전능하신 히느님께 나아가듯이 예수님께로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는 주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는 것일까요? 아마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도 유대교 안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니, 율법과 예언서에 기록된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 밀씀들을 들어서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시편의 이런 노래도 분명히 들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다윗에게 맹세하셨으니 돌이키지 않으실 진실이라네. 나는 네 몸의 소생을 네 왕좌에 앉히리라”’(시편 132,11). 또한 그는 이시야 예언자의 이 말도 알았을 것입니다.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리라"(이사 11,1). 이사야는 이렇게도 말했지요.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이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이사 7,14; 마태 1,23). 그는 하느님이신 말씀께서 당신을 낮추시어 거룩한처녀의 몸을 빌려 사람 몸으로 태어 나셨다는 것을 이미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나아가듯이 지금 그분 앞에 나아가 이렇게 간정하는 것이지요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셨고,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셋째 오솔길】
돌파하여 자기 하느님을 낳기
설교 24 우리는 또 다른 그리스도들이다
당신을 밴 태와 당신께 젖을 먹인 가슴은 복됩니다!(루카 11,27).
모름지기 사람은 범사에 자기 자신을 내적으로 변모시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그 사람 안에서 그리스도의 모든 행위를 보게 될 것이고,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할수 있는 한 제 속에서 그분이 하신 모든 일과 똑같은 것을 낳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일하면, 그분께서 받으실 것입니다. 마음을 한곳에 모으고, 선한 의도를 가지고 여러분의 일을 하십시오. 무슨 일을 하든지 그분을 본떠서 하십시오.
그리스도는 우리의 삶과 일을 위한 모범이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라고 여러분은 묻는데, 내가 말하는 것을 잘 듣고 깨닫기를 바란다. 바로 앞에서 상에 따라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말했는데, 여러분은 그것만을 여러분의 생활 방식으로 삼아야 한다." 이 특별한 설교에서 그는 상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란 “여러분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도 아니고 여러분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예수가 살았고, 우리가 살아내야할 상, 곧 맑고 투명한 신성의 상이다.(505)
월요일 거룩한 독서(렉시오 디비나)의 날
야고 3,1-12
말조심
나의 형제 여러분, 많은 사람이 교사가 되려고 하지는 마십시오.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많은 실수를 저지릅니다. 누가 말을 하면서 실수를 저지르지 않으면, 그는 자기의 온몸을 다스릴 수 있는 완전한 사람입니다.
말의 입에 재갈을 물려 복종하게 만들면, 그 온몸을 조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배를 보십시오. 배가 아무리 크고 또 거센 바람에 떠밀려도, 키잡이의 의도에 따라 아주 작은 키로 조종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혀도 작은 지체에 지나지 않지만 큰일을 한다고 자랑합니다. 아주 작은 불이 얼마나 큰 수풀을 태워 버리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혀도 불입니다. 또 불의의 세계입니다. 이러한 혀가 우리의 지체 가운데에 들어앉아 온몸을 더럽히고 인생행로를 불태우며, 그 자체도 지옥 불로 타오르고 있습니다.
온갖 들짐승과 날짐승과 길짐승과 바다 생물이 인류의 손에 길들여질 수 있으며 또 길들여져 왔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혀는 아무도 길들일 수 없습니다. 혀는 쉴 사이 없이 움직이는 악한 것으로, 사람을 죽이는 독이 가득합니다.
우리는 이 혀로 주님이신 아버지를 찬미하기도 하고, 또 이 혀로 하느님과 비슷하게 창조된 사람들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같은 입에서 찬미와 저주가 나오는 것입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이래서는 안 됩니다.
같은 샘 구멍에서 단 물과 쓴 물이 솟아날 수 있습니까?
나의 형제 여러분, 무화과나무가 올리브 열매를 내고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낼 수 있습니까? 짠 샘도 단 물을 낼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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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7.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갑곳성지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예리코의 눈먼 이가 부르짖습니다. 주위 사람들은 그를 꾸짖으며 침묵하게 했지만, 그는 더욱 크게 소리쳤습니다. 결국 주님께서는 그 부르짖음을 멈추지 않으셨고, 오히려 멈춰 서서 그에게 다가가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라고 물으신 주님은 그의 믿음을 보시고 시력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이 장면은 우리 신앙인의 삶을 잘 보여 줍니다. 우리는 삶 속에서 눈이 멀어 앞길을 보지 못하는 순간들을 자주 맞이합니다. 고통, 실패, 상처, 삶의 무게 때문에 길을 분간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주님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주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단순하지만, 간절한 기도가 바로 그리스도인의 힘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자주 우리에게 침묵하라고 말합니다. “그 정도는 네가 감당해라”, “하느님이 너를 기억하시겠느냐”라는 의심의 소리가 들립니다. 하지만 복음의 눈먼 이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끊임없는 부르짖음은 결국 주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결코 우리의 부르짖음을 잊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의 신음과 눈물을 당신의 귀에 새기고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단순히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먼저 우리 마음의 깊은 소리를 물으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이말은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질문입니다. 주님 앞에 나아갈 때, 우리는 무엇을 진정으로 원합니까? 단순한 문제 해결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하는 눈을 열어 달라고 청해야 합니다. 그 눈이 열릴 때 우리는 세상을 새롭게 보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잘못된 행실을 고치는 방법
죄는 아닌데….
잘못된 행실을 일삼는 사람이 있다면….
그 행실을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을까요?
동네방네 소문을 낼까요?
그건 그 사람과의 연을 끊는 방법입니다.
법의 심판대에 세울까요?
그 정도로 심각한 범죄는 아닐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조용히, 그리고 차분하게 다가가 이렇게 말하세요.
‘나는 당신이 한 일을 알고 있어요. 저만 알고 있을 거예요. 그리고 저는 그대가 잘못된 행실을 멈추길 바래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내 행실을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브레이크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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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1차 게시 이후 묵상글(강론글)입니다
< 07시 이후 08시 사이 또는 더 늦게 추가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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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7.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상어를 아세요? 어렸을 때, 영화 ‘죠스’를 보면서 상어는 무시무시한 괴물과 같은 어류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근해에 있는 상어는 소형 어류나 갑각류 등을 먹고 생활하는 작은 상어라고 하더군요. 즉, 사람에게 전혀 위험하지 않은 생선입니다. 그래도 이 상어가 크면 2.4미터까지 자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상어가 20cm 정도 크기에서 성장을 멈추게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바다 야생에서 살면 2.4미터까지 자라는데 말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까요?
유전자 조작이 아닙니다. 약을 먹이는 것도 아닙니다. 그 방법은 상어를 어렸을 때(아직 작을 때) 수조에 넣어 키우면 그 수조 크기에 맞춰 성장을 멈춘다고 하더군요.
우리도 그렇습니다. 무한대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만드셨는데 스스로 수조에 자기를 가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돈이라는 수조, 명예라는 수조, 능력이라는 수조, 욕심과 이기심이라는 수조 등에 스스로 가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만든 수조가 아닌 남이 만든 수조에 갇히는 때도 있습니다. 남의 판단이라는 수조에 갇혀서 전혀 성장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만약 나의 성장을 가로막는 수조에 들어갔다면 얼른 탈출해야 합니다. 계속 그 안에 있으면 성장이 끝나고 맙니다. 많은 위험과 시련이 있는 수조 밖이지만, 주님의 보호 아래에서 계속 성장하게 됩니다.
눈먼 이가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습니다. 그는 당시 사회의 가장 소외되고 무력한 존재를 상징합니다. 눈이 멀어 예수님을 볼 수 없었지만, 그는 예수님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들었기 때문입니다. 들었기에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8,38)라고 외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볼 수 없다는 수조에 갇히지 않았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눈을 뜨고 있는 군중을 예수님을 그저 ‘나자렛 출신’으로만 보고 있지만, 눈먼 이는 영적인 눈으로 그분의 참된 정체성, 즉 메시아이심을 꿰뚫어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직접 볼 수 있는 사람은 이 사람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습니다. ‘다른 이의 판단’의 수조에 가두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눈먼 이의 믿음은 이 수조에 갇히지 않고 더 큰 소리로 외칩니다. 이런 간절함과 굳은 믿음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으며, 예수님께 인정받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8,42)
즉시 보게 되었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고 복음은 이야기합니다. 자기의 장애가 예수님을 따르는 데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간절함과 굳은 믿음만 있다면, 우리는 구원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영적 수조에 절대로 갇히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사람은 집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해지고 밖으로 나가면 행복에서 가장 멀어지는 법이다(J.G. 홀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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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7.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주님의 눈에 아주 특별한 존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운명의 여정 마지막 단계에 와 계십니다. 이 여정 중에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셨습니다. 이 여정은 하느님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인한 인류 구원을 위한 결정적인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여정의 마지막 단계를 훤히 밝혀 주며 우리에게 크나큰 위로가 되는 두 개의 만남이 있습니다.
하나는 눈먼 거지와의 만남이고 다른 하나는 세관장 자캐오와의 만남입니다.
예리코의 길가에서 만난 눈먼 거지의 믿음은 어둠 속에서도 환히 빛났습니다. 그의 신앙 고백은 은총의 응답을 불러왔고, 주님께서는 그의 눈을 열어주셨습니다. 바로 그 다음 만난 세관장 자캐오(루카 19장)는 회개의 은총을 체험했습니다. 사회적으로 죄인으로 여겨졌던 그가 주님을 만나 구원의 기쁨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이 두 만남은 예수님의 수난 여정이 단순히 죽음을 향한 길이 아니라, 믿음과 회개, 그리고 구원의 은총이 드러나는 거룩하고 신비로운 순간들임을 보여줍니다. 맹인의 신앙과 자캐오의 회개는 교회가 늘 강조하는 믿음과 회개의 길을 상징하며, 예수님의 사명은 모든 이에게 구원의 은총을 베푸는 것임을 드러냅니다.
이 눈먼 거지는 이 내용 바로 앞에 나오는 부자와 대조를 이룹니다.
그 부자는 육체적으로는 눈이 밝아 세상을 잘 볼 수 있었지만, 영적으로는 어두워져 있었습니다. 재물에 집착하여 예수님의 초대(모든 것을 버리고 따르라)를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에, 영적 통찰을 잃은 상태를 드러내 줍니다. 그러나 눈먼 거지는 육체적으로는 눈이 멀어 있었지만 영적으로는 눈이 열려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고백하며 굳은 믿음을 드러냈고, 그 믿음으로 치유와 구원을 얻게 됩니다.
루카 복음 18장 앞쪽을 보면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오자, 제자들은 그들을 막아서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개입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 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가 이런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18,16).
바로 이런 이들이 깊이 볼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어른의 마음은 종종 자기 지식의 빛에 눈이 멀어버립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신앙을 설명과 선언, 해명과 동일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산을 옮기기는커녕 자기 자신조차 움직이지 못하는, 때로는 무겁고 장황한 이성주의로 변질되곤 합니다. 어린이가 어떻게 그것을 따를 수 있겠습니까?
어린이의 눈으로 보는 방식 안에 하느님 나라의 열쇠가 있습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서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길들임"의 의미를 알려 주며 한 말을 기억하시지요?! "마음으로 보아야 올바르게 볼 수 있어. 본질적인 것은 눈에 보이지 않거든."
여우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길들여진다는 것은 서로에게 특별해지는 거야."라고요. 사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이미 하느님 눈에 특별한 존재들입니다. 이 진리를 볼 줄 아는 눈이 바로 본질적인 것을 보는 눈이 아닐까 합니다. 관계와 사랑의 본질은 마음의 눈으로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일전에도 언급해 드렸습니다만, 이 본질, 즉 우리가 합당하냐 부당하냐와는 관계 없이 하느님의 눈에 '내'가 특별한 존재라는 사실을 상기하고 의식하는 것은 기도의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토대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눈먼 거지는 자신이 하느님의 눈에, 예수님의 눈에 특별한 존재라는 사실을 볼 수 있었기에 주님께 자비를 청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의 혹독한 고통과 죽음을 겪으시면서까지 '나'를 사랑해 주셨다는 사실을 늘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랑으로 우리를 길들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처럼 주님의 눈에 참으로 특별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기도만큼 중요한 기도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미사를 드릴 때마다, 주님께 자비를 청합니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그런데 우리는 눈먼 거지의 마음의 눈에 보인 예수님의 사랑과 자비를 보는 마음으로 우리가 주님께 자비를 청하고 있는지를 오늘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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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7.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서하
X X X X X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8&id=2116401&menu=4770
위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리스트에서 “서하”를 찿아 들어가세요.
게재가 안되는 경우가 있습니다.(위에 X X X X X 로 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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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7.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사람의 아들은 다니엘서에 나오는데
세상 마지막 날 심판을 위해서 구름을 타고 온다고 전해집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을 말씀하시면서
미래에 있을 심판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그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을 둘로 가른 후
자기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그는 가장 작은 이들을 자기 형제들이라고 부르며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한 것이
곧 자기에게 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모세 이후로 하느님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신약에 와서 예수님을 통해 사람들은
하느님을 만날 수 있게 되었지만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으로 우리는
하느님을 우리의 감각으로 만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을 비추어 보면
우리는 또다른 모습으로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있는 가장 작은 이들이
예수님의 형제들이며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을 대하는 것이
예수님을 대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
우리에게서 멀리 계신 하느님께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옆에 계시는 하느님
직접 만날 수 있는 하느님과
관계를 맺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의 눈으로 볼 때
그들이 항상 하느님으로 보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들을 도와준다고 해도
꾸준히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려고만 하면
가장 작은 이들은 항상 우리 곁에 있는 것처럼
우리가 원하기만 하면
그들을 통해 우리는 항상 하느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작은 이들은 누구인지
찾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때로는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우리 곁에서 바로 찾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거창하게 무엇을 도와주는 것도 있지만
함께 곁에 머물러 주는 것이 필요한 이들도
또한 가장 작은 이들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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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7.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18,35-43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눈이 오는 추운 겨울에는 소나무와 전나무가 더욱 푸르다’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나무들이 서로 경쟁하듯 푸르른 잎사귀를 뽐내는 여름에는 잎이 크고 화려한 다른 나무들에 가려 소나무나 전나무의 잎이 잘 보이지 않지요. 그러나 가을을 지나면서 다른 나뭇잎들이 모두 떨어지고 온 세상에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이면, 그 흰 눈 속에서 소나무와 전나무의 가녀리지만 푸른 이파리들이 비로소 그 존재감을 드러내는 겁니다. 혹독한 환경 속에서도 그렇게 ‘독야청청’ 할 수 있는 건 여름 내내 더 크고 많은 잎들을 내는 다른 나무들의 흐름을 따라가지 않고 묵묵히 그러면서도 착실히 자기 길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 신앙인은 소나무나 전나무 같은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남들하는대로 따라가는 게 아니라, 어디로 왜 무엇을 찾아 가야하는지를 생각하며 가야 합니다. 또한 내가 가야할 길이 세상의 흐름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가시밭길’일지라도, 그래서 다른 이들로부터 비난과 배척, 핍박을 받을지라도 끝까지 가야 합니다. 오직 그 길의 끝에서만 하느님 나라를 만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눈먼 이’가 바로 그런 모습으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괜히 나서서 예수님 가시는 길을 방해하지 말고 조용히 잠자코 있으라’고 사람들이 꾸짖었지만, 주눅들거나 위축되지 않고 더욱 큰 소리로 예수님께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자신에게 다가온 단 한 번의 기회, 이 비참한 상황에서 벗어나 구원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반대와 핍박을 무릅쓰는 건 단지 그런 간절함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요. 그가 그럴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께 간절히 청하는 이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않으실 거라는 믿음, 그분은 자기가 청하기만 하면 반드시 좋은 것을 주시리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자신이 주님께 다가가는 것을 가로막는 세상의 방해를 거슬러 주님께로 나아갈 수 있었지요.
그런 그의 간절함과 믿음을 다 알고 계셨던 예수님께서 따스한 음성으로 그에게 물으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그러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즉시 대답합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을 부르는 호칭이 어느 새 ‘다윗의 자손’에서 ‘주님’으로 바뀌어 있다는 게 중요합니다. 그는 예수님과 물리적 거리만 가까워진 게 아니라, 마음의 거리까지 가까워진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는 그러나 나와는 딱히 상관없는 분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곳에 계시며 자신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 자신의 삶 전체를 주관하고 섭리하시는 ‘주님’이 된 것이지요. 그런 그의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은 그가 바라던 ‘자비’를 베풀어 주십니다. 단지 그의 시력을 회복시켜 주시는 정도가 아니라, 그가 주님께 대한 참된 믿음을 통해 자기 삶과 세상을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봄으로써 구원을 향해 나아갈 힘을 주신 겁니다. 주님께 믿음으로 세상과 삶을 ‘다시 보게’ 되면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게 되지요. 더 이상 부질 없는 것들에 연연하거나 집착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가진 게 많든 적든 상관없이, 고통이 작든 크든 문제 없이 충만한 기쁨과 평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힘들고 어려워도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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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7.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박윤식님 [big-llight]
■ 자선 사업과 재속 프란치스코회의 수호성인 /
성녀 엘리사벳은 1207년 헝가리에서 공주로 태어났다.
튀링겐 영주 헤르만 1세는 정략적 이유로
네 살밖에 되지 않은 그녀와 자신의 맏아들과의 정혼을 제의했다.
그러나 1216년 결혼하기로 약속되어 있던 헤르만이 사망하는 등 어린 나이에 많은 시련을 받았으나,
그의 동생 루트비히와 다시 약혼했다.
이렇게 궁정 안에서 많은 이의 시기를 받아 어려웠지만,
그녀의 약혼자는 적극적으로 보호해주었고,
시어머니가 될 소피아도 친어머니처럼 성녀를 잘 돌봐주었다.
교회를 등지고 야망을 빠진 영주가 사망하자,
1221년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 루트비히 4세는 성녀 엘리사벳과 결혼했다.
신랑의 나이는 21살, 신부는 14살이었다.
그녀는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며 자선과 기도생활을 열심히 했고,
남편은 성녀를 존중하고 존중해주었다.
성녀는 자녀를 세 명 두었는데, 맏아들은 일찍 죽었고,
둘째 딸에 이어 셋째 아들은 유복자로 태어났다.
1221년 작은 형제회가 독일에 정착하면서 성녀의 삶은 큰 변화를 겪었다.
그녀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에 대해 듣고 큰 감명을 받았다.
그래서 작은 형제회가 1225년 아이제나흐에 수도원을 세우도록 도움을 주었다.
그런데 1227년에 남편이 십자군으로 출정했다가 사망하자 두 자녀는 다른 곳으로 보내지고,
그녀도 성에서 나와서 주교인 숙부에게 가서 어느 기간 지냈다.
그녀의 영성 지도를 맡은 이는 매우 금욕적이며 엄격한 사람으로 그녀를 수도자와 같은 삶을 요구했다.
그리하여 남편의 유해와 유품을 정리해 자녀들을 위한 대비책을 마련하고
나머지 상당 부분을 가난한 이들을 위해 내놓았다.
그리고 1228년 작은 형제회 제3회 회원이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성 프란치스코의 자선 병원’을 세우고 스스로 병든 자,
특히 가장 혐오스러운 병에 걸린 사람들을 돌보는 일에 평생을 바치면서
성덕을 위한 자아 포기의 길에만 헌신했다.
누구나 놀랄 정도로 가난하고 겸손한 삶을 살았으며
깊은 사랑으로 모든 이들을 감싸주었다.
이렇게 여왕이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위해 직접 음식을 날라주고
옷을 지어 주는 일 등은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이런 이유로 그녀는 독일인에게 가장 사랑받았다.
성녀는 선종하기 전에 다시 옛날 거주한 성으로 돌아올 허가를 받았고,
그녀의 아들에게 백작을 승계시킬 수 있었다.
그녀는 불과 24년밖에 살지 못하고 1231년 11월 17일 마르부르크에서 선종했지만,
오늘날 작은 형제회 재속 제3회의 수호성인으로 높은 공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
그래서 선종 4년 후인 1235년 5월 28일 성령 강림 대축일에
이탈리아 페루자에서 교황 그레고리오 9세가 그녀를 성대히 성인품에 올렸다.
그녀에게 봉헌된 마르부르크의 성녀 엘리사벳 성당의 기초가 그해에 놓였고,
1249년 성인의 유해가 새로 건립된 성당에 안치되자 순례자 수가 엄청나게 늘어났다.
엘리사벳 성녀는 1207년 헝가리에서 국왕의 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신심이 깊었던 그녀는 궁중에서 남부럽지 않게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참회와 고행의 생활을 하며 많은 사람에게 자선을 베풀었다.
어린 나이에 결혼하여 세 자녀를 낳고 뜻하지 않게 많은 고통을 겪었지만,
자신이 설립한 병원에서 병자와 가난한 사람을 돌보았다.
그녀는 남편이 전쟁에서 사망하자 재속 프란치스코회에 들어가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병원을 세워 직접 병자들을 돌보았다.
그녀는 자선 사업의 수호성인이자 재속 프란치스코회의 수호성인으로 공경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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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7.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박윤식님 [big-llight]
■ 주님 물음에 언제나 준비된 우리의 답은 /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가시는 길에 예리코를 지나실 때,
누군가가 그에게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라고 알려준다.
이 군중의 소리에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큰 소리로 외쳐댔다.
그의 아버지가 ‘티매오’라고 알려진 것만으로도,
그는 아마도 부유한 가문 출신이었음을 짐작할 수가.
비록 보이지는 않을지라도, 나자렛 예수님이라는 그 소리에 막무가내 그렇게 크게 외쳐 됐다.
아마도 바르티매오는 예수님께서 여러 지역에서 많은 설교를 하시고
병든 이를 치유하신다는 귀동냥을 수도 없이 듣고는 그분이 구세주임을 단단히 믿었을 게다.
그래서 그는 감히 자비를 요청하고 있다.
주위의 눈초리는 아예 안중에도 없이,
예수님께 무조건 베풀어 달라는 것이다.
많은 이가 제발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더욱더 큰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거듭거듭 외친다.
바르티매오와 같이 요청만하면 우리 예수님은 그냥 가만히 버려두지 않으신다.
그가 온 힘을 다하여 요청하는 것을 아셨기에.
그래서 예수님은 가던 길 멈추시고는 ‘그를 불러오너라.’라고 하셨다.
사람들이 그를 부르며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그분께서 당신을 부르시네.’라며 알린다.
그분 부르심은 대단한 영광이요, 행운이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 달려갔다. 예수님의 치유의 은사를 이미 받은 게 틀림없다.
그는 쉽게 다가갔다.
예수님이 그에게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는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주저 없이 대답했다.
그는 부름에 그렇게 준비되어 있었다.
눈먼 장님이었지만 보고 있었고,
앉아있었지만 언제라도 달려갈 서 있는 거지였다.
예수님이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이르시니,
그는 곧 다시 보게 되었다.
새롭게 눈 뜬 바르티매오는 하느님께 감사드림은 물론이고 실제 예수님을 따른다.
그것도 고통과 수난을 향해 길을 가시던 예수님의 그 길을.
우리도 티매오처럼 준비된 삶을 꿈꾸며 갈아가자.
그러나 실제로 얼마나 노력하는지,
아니면 힘들다고 쉽게 포기하지는 않는지 성찰하자.
이렇게 간절한 청에, 하느님은 응답하신다.
무엇을 달라고 요청하지 않아도,
우리 요구를 들어주시고자 기다리신다.
물론 언제 어디서나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길 바라느냐?’ 라고 물으신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 막바지에 소경을 고치셨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두고 ‘나자렛 사람 예수’라 했지만,
티매오는 “다윗의 자손”, 곧 ‘메시아’라고 고백하며 자비를 청했다.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진정 깨달아 아는 눈먼 이었다.
사람들은 그의 입을 막았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자신의 믿음을 고백했다.
결국 눈먼 이만이 참으로 눈을 뜨고 구원을 얻었다.
사람들은 외형적으로 눈을 달았지만,
예수님을 알려하지 않은 눈먼 이나 다름이 없었다.
사실 우리도 예수님의 물음에 언제라도 확실한 준비를 하고 있어야만 한다.
이 준비를 가지는 게 믿는 이의 기본적 삶이리라.
거지 장님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가 예수님 자비로 다시 광명을 얻었듯이,
우리도 평소의 그 믿음으로 그분 은총을 기도로 받아야만 할 게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라며,
이 시각에도 그분께서는 물으신다.
이 끊임없는 물음에,
우리는 준비된 답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그리하면 그분께서 은총으로 들어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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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7.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김종업로마노님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제1독서 (1마카1,10-15.41-43.54-57.62-64)
"안티오쿠스는 번제 제단 위에 황폐를 부르는 혐오스러운 것을 세웠다. 이어서 사람들이 주변의 유다 성읍들에 제단을 세우고, 집 대문이나 거리에서 향을 피웠다.
율법서는 발견되는 대로 찢어 불태워 버렸다. 계약의 책을 가지고 있다가 들키거나 율법을 따르는 이는 누구든지 왕명에 따라 사형에 처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에는 부정한 것을 먹지 않기로 굳게 결심한 이들도 많았다. 그들은 음식으로 더럽혀지거나 거룩한 계약을 모독하느니차라리 죽기로 작정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죽어 갔다." (1마카 1,54~57.62~63)
마카베오 상권은 '왕조 역사'라고 부르는 것이 적합하다.
마카베오 상권은 B.C. 2세기 3세대에 걸친 유다 왕조의 역사를 이야기 형태로 전한다.
이 가문은 마카베오(유다의 별명인 '망치'에서 유래함) 가문 또는 하스몬 가문이라 불린다.
한 가문에만 초점을 모으는 것은 그 가문의 후손들에게 이스라엘에서 종교적, 군사적, 정치적 권위를 주장하는 근거를 제시하는 것일 수 있다.
마카베오서의 구조에서 책의 목적이 드러난다.
마카베오 상권은 셀류코스 왕조의 통치자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에 의해 야기된 위기와 마따디아에 의해 시작된 저항을 묘사한 뒤에(1,1-2,70) 유다 마카베오(3,1-9,22), 그의 형제들인 요나단(9,23-12,53)과 시몬(13,1-16,24)의 반란을 이야기한다.
저자는 하느님이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사용하시어 셀류코스 왕조의 억압을 제거하셨다는 것을 보여 주고, 유다의 대사제가 이 가문에서 나오게 된 경위를 설명한다.
유다와 그의 형제들은 하느님의 고유한 왕조를 대표한다.
마카베오 상권의 전망은 5,61-62에서 밝혀지는데, 여기서 요셉과 아자리야는 군사적인 용맹을 떨치려고 하였으나 패배하였다.
그 이유는 그들이 "유다와 그의 형제들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그들은 하느님을 대신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한 사람들의 후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주인공들은 사제 마따디아와 그의 다섯 아들들(요한,시몬,유다,엘르아잘,요나단) 그리고 시몬의 아들 요한 히르카누스이다.
이 책은 유다와 요나단과 시몬을 이스라엘에 '구원'을 가져다 준 인물로 제시하는데, 이때의 구원은 적대적인 정치적, 군사적 힘에서 해방되는 것으로서 이 세상의 역사에서 이해된 구원을 가리킨다.
세 형제는 군사, 종교, 정치 문제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요나단은 빈틈 없는 정치가이다. 시몬은 새로 세운 유다 행정부를 강화하고 조직화한다.
이 책의 설화 문체는 성서의 역사서들인 사무엘서와 열왕기서를 모방하여 이스라엘의 과거 영웅들과 마카베오 왕조 사이의 지속성을 제안한다.
이 계획에서 중요한 요소는 '성서적인 재창조', 곧 마카베오 왕조의 행위들이 성서의 초기 영웅들의 말과 행위와 일치한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의도적인 노력이다.
주축이 되는 메시지는 마카베오 왕조가 이스라엘의 과거의 위대한 유산을 승계한다는 것이다.
마카베오 상권의 주요 본문은 칠십인역 그리스어 성서의 본문이다.
많은 학자들은 마카베오 상권이 본디 히브리어로 작성되었으나 나중에 그리스어로 번역되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셈족화된 그리스어로 작성되었을 수도 있다.
현재의 본문은 '성서 그리스어'로 씌어 있으며 그리스어 성서의 초기 역사서들의 그리스어 본문과 매우 유사하다.
이 책은 B.C.134년부터 104년까지 유다의 대사제였던 요한 히르카누스의 공적을 요약하는 말로 끝난다.
이 책은 요한 히로카누스 재위 당시나 그 직후, 곧 기원전 1세기 초에 작성되었을 것이다.
이 책에는 여러 개의 '공적' 문서들(8,23-32;10,18-20,10,25-45;11,30-37; 11,57-59; 12,5-23;13,36-40 참조할 것)이 포함되어 있다.
이 문헌들의 진정성 문제가 논의되고 있지만 최근 학계의 동향은 기본적으로 진정한 문헌이라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시, 담론, 기도는 저자가 자유롭게 작성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좋다 (성서의 예들을 본보기로 사용하고는 있지만).
어떤 학자들은 마카베오 상권 1-7장과 마카베오 하권 3-15장에서 저자들이 공통되는 원천을 사용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마카베오 상,하권의 복잡한 전승을 생각한다면, 지금 우리가 그 원천이 된 본문을 되찾는 일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마카베오 상권의 제1부는 1장 1절 -2장 70절까지 이며, 위기와 저항을 다루고 있다.
위기(1,1-64)의 발단은 시리아의 임금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가 율법을 준수하고 성전에서 예배하며 할례를 실천하는 유다인들의 생활 방식을 없애려고 한 것이다.
알렉산더 대왕(B.C.336-323) 부터 안티오쿠스 4세(B.C.175-164)에 이르는 헬레니즘 역사에 대한 묘사는 오만("그는 마음이 우울하고 오만해졌다")과 죄악("그들은 세상을 악으로 가득 채웠다")의 주제를 부각시킨다.
안티오쿠스는 무엇보다도 악인이지만, 1장 11-15절에서는 그의 계획에 동조한 유다인들도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자, 가서 우리 주변의 민족들과 계약을 맺읍시다"(1,11).
그의 계획은 율법 대신 이민족들의 규정을 따르게 하고, 경기장을 세우며 할례 받은 흔적을 없애고, '거룩한 계약'(전통적인 유다 종교)를 저버리는 것이다.
위기는 1장 16-40절에서 커진다.
B.C.169년 안티오쿠스는 이집트를 쳐부수고 돌아가는 길에 예루살렘으로 들어가 성전을 약탈한다.
그 결과 "야곱의 온 집안은 수치로 뒤덮였다"(1,28).
그런 다음 안티오쿠스는 167년에 계속해서 예루살렘을 약탈하기 위하여 '조공 징수관'을 파견하고 항거하는 유다인들을 25년 이상 괴롭히게 될 군사 요새, 곧 성채를 쌓는다.
그 성채는 "성소를 위협하는 복병이 되고 이스라엘을 늘 괴롭히는 흉악한 원수가 되었다"(11,36).
예루살렘 성전을 약탈하고 성전 근처에 성채를 쌓은 안티오쿠스는 1장 41-50절에서 성전 예배와 희생 제사를 바치지 못하게 하고 안식일과 유다의 축제들을 지키지 못하게 하며, 남자 아이들을 할례 받지 못하게 하고 정결법을 지키지 못하게 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1장 51-61절에 따르면 안티오쿠스는 이 칙령을 내린 뒤에 "번제 제단 위에 황폐를 가져오는 혐오스러운 것"을 세우고, 유다 전역에 분향 제단들을 세우며, 율법서를 찢어 불태워버리고 제 아이들에게 할례를 베푼 여인들을 사형에 처한다.
안티오쿠스의 칙령을 묵묵히 따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스라엘에는 부정한 것을 먹지 않기로 굳게 결심한 이들"과 자기네 종교 전통을 충실히 지키기 위하여 기꺼이 죽기로 작정한 이들이 있었다(1,62-63).
위기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크나큰 진노가 이스라엘 위에 내린 것이다"(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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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년 11월 17일 월요일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예리코 소경 치유 (루카18,35-43)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제1독서 (1마카1,10-15.41-43.54-57.62-64) "안티오쿠스는 번제 제단 위에 황폐를 부르는 혐오스러운 것을 세웠다. 이어서 사람들이 주변의 유다 성읍들에 제단을 세우고, 집 대문이나 거리에서 향을 피웠다. 율법서는 발견되는 대로 찢어 불태워 버렸다. 계약의 책을 가지고 있다가 들키거나 율법을 따르는 이는 누구든지 왕명에 따라 사형에 처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에는 부정한 것을 먹지 않기로 굳게 결심한 이들도 많았다. 그들은 음식으로 더럽혀지거나 거룩한 계약을 모독하느니차라리 죽기로 작정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죽어 갔다." (1마카 1,54~57.62~63) 마카베오 상권은 '왕조 역사'라고 부르는 것이 적합하다. 마카베오 상권은 B.C. 2세기 3세대에 걸친 유다 왕조의 역사를 이야기 형태로 전한다. 이 가문은 마카베오(유다의 별명인 '망치'에서 유래함) 가문 또는 하스몬 가문이라 불린다. 한 가문에만 초점을 모으는 것은 그 가문의 후손들에게 이스라엘에서 종교적, 군사적, 정치적 권위를 주장하는 근거를 제시하는 것일 수 있다. 마카베오서의 구조에서 책의 목적이 드러난다. 마카베오 상권은 셀류코스 왕조의 통치자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에 의해 야기된 위기와 마따디아에 의해 시작된 저항을 묘사한 뒤에(1,1-2,70) 유다 마카베오(3,1-9,22), 그의 형제들인 요나단(9,23-12,53)과 시몬(13,1-16,24)의 반란을 이야기한다. 저자는 하느님이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사용하시어 셀류코스 왕조의 억압을 제거하셨다는 것을 보여 주고, 유다의 대사제가 이 가문에서 나오게 된 경위를 설명한다. 유다와 그의 형제들은 하느님의 고유한 왕조를 대표한다. 마카베오 상권의 전망은 5,61-62에서 밝혀지는데, 여기서 요셉과 아자리야는 군사적인 용맹을 떨치려고 하였으나 패배하였다. 그 이유는 그들이 "유다와 그의 형제들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그들은 하느님을 대신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한 사람들의 후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주인공들은 사제 마따디아와 그의 다섯 아들들(요한,시몬,유다,엘르아잘,요나단) 그리고 시몬의 아들 요한 히르카누스이다. 이 책은 유다와 요나단과 시몬을 이스라엘에 '구원'을 가져다 준 인물로 제시하는데, 이때의 구원은 적대적인 정치적, 군사적 힘에서 해방되는 것으로서 이 세상의 역사에서 이해된 구원을 가리킨다. 세 형제는 군사, 종교, 정치 문제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요나단은 빈틈 없는 정치가이다. 시몬은 새로 세운 유다 행정부를 강화하고 조직화한다. 이 책의 설화 문체는 성서의 역사서들인 사무엘서와 열왕기서를 모방하여 이스라엘의 과거 영웅들과 마카베오 왕조 사이의 지속성을 제안한다. 이 계획에서 중요한 요소는 '성서적인 재창조', 곧 마카베오 왕조의 행위들이 성서의 초기 영웅들의 말과 행위와 일치한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의도적인 노력이다. 주축이 되는 메시지는 마카베오 왕조가 이스라엘의 과거의 위대한 유산을 승계한다는 것이다. 마카베오 상권의 주요 본문은 칠십인역 그리스어 성서의 본문이다. 많은 학자들은 마카베오 상권이 본디 히브리어로 작성되었으나 나중에 그리스어로 번역되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셈족화된 그리스어로 작성되었을 수도 있다. 현재의 본문은 '성서 그리스어'로 씌어 있으며 그리스어 성서의 초기 역사서들의 그리스어 본문과 매우 유사하다. 이 책은 B.C.134년부터 104년까지 유다의 대사제였던 요한 히르카누스의 공적을 요약하는 말로 끝난다. 이 책은 요한 히로카누스 재위 당시나 그 직후, 곧 기원전 1세기 초에 작성되었을 것이다. 이 책에는 여러 개의 '공적' 문서들(8,23-32;10,18-20,10,25-45;11,30-37; 11,57-59; 12,5-23;13,36-40 참조할 것)이 포함되어 있다. 이 문헌들의 진정성 문제가 논의되고 있지만 최근 학계의 동향은 기본적으로 진정한 문헌이라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시, 담론, 기도는 저자가 자유롭게 작성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좋다 (성서의 예들을 본보기로 사용하고는 있지만). 어떤 학자들은 마카베오 상권 1-7장과 마카베오 하권 3-15장에서 저자들이 공통되는 원천을 사용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마카베오 상,하권의 복잡한 전승을 생각한다면, 지금 우리가 그 원천이 된 본문을 되찾는 일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마카베오 상권의 제1부는 1장 1절 -2장 70절까지 이며, 위기와 저항을 다루고 있다. 위기(1,1-64)의 발단은 시리아의 임금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가 율법을 준수하고 성전에서 예배하며 할례를 실천하는 유다인들의 생활 방식을 없애려고 한 것이다. 알렉산더 대왕(B.C.336-323) 부터 안티오쿠스 4세(B.C.175-164)에 이르는 헬레니즘 역사에 대한 묘사는 오만("그는 마음이 우울하고 오만해졌다")과 죄악("그들은 세상을 악으로 가득 채웠다")의 주제를 부각시킨다. 안티오쿠스는 무엇보다도 악인이지만, 1장 11-15절에서는 그의 계획에 동조한 유다인들도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자, 가서 우리 주변의 민족들과 계약을 맺읍시다"(1,11). 그의 계획은 율법 대신 이민족들의 규정을 따르게 하고, 경기장을 세우며 할례 받은 흔적을 없애고, '거룩한 계약'(전통적인 유다 종교)를 저버리는 것이다. 위기는 1장 16-40절에서 커진다. B.C.169년 안티오쿠스는 이집트를 쳐부수고 돌아가는 길에 예루살렘으로 들어가 성전을 약탈한다. 그 결과 "야곱의 온 집안은 수치로 뒤덮였다"(1,28). 그런 다음 안티오쿠스는 167년에 계속해서 예루살렘을 약탈하기 위하여 '조공 징수관'을 파견하고 항거하는 유다인들을 25년 이상 괴롭히게 될 군사 요새, 곧 성채를 쌓는다. 그 성채는 "성소를 위협하는 복병이 되고 이스라엘을 늘 괴롭히는 흉악한 원수가 되었다"(11,36). 예루살렘 성전을 약탈하고 성전 근처에 성채를 쌓은 안티오쿠스는 1장 41-50절에서 성전 예배와 희생 제사를 바치지 못하게 하고 안식일과 유다의 축제들을 지키지 못하게 하며, 남자 아이들을 할례 받지 못하게 하고 정결법을 지키지 못하게 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1장 51-61절에 따르면 안티오쿠스는 이 칙령을 내린 뒤에 "번제 제단 위에 황폐를 가져오는 혐오스러운 것"을 세우고, 유다 전역에 분향 제단들을 세우며, 율법서를 찢어 불태워버리고 제 아이들에게 할례를 베푼 여인들을 사형에 처한다. 안티오쿠스의 칙령을 묵묵히 따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스라엘에는 부정한 것을 먹지 않기로 굳게 결심한 이들"과 자기네 종교 전통을 충실히 지키기 위하여 기꺼이 죽기로 작정한 이들이 있었다(1,62-63). 위기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크나큰 진노가 이스라엘 위에 내린 것이다"(1,64). ------------------------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오늘의 묵상 (사제 김상우 바오로) 이번 주는 제1독서로 마카베오기 상권을 읽습니다. 이 책은 현대의 그리스도인에게 무엇을 시사합니까? 마카베오기는 상권과 하권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기원전 176년부터 134년까지 펼쳐진 이스라엘의 역사를 다룹니다. 이는 헬레니즘 시대 그리스계 왕조 셀레우코스 4세 통치 말기부터 유다의 대사제 요한 히르카노스의 즉위까지 해당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짓밟았던 비유다계 출신 왕조의 통치부터 유다계 왕조가 재정립되는 역사적 종교적 과정을 서술하기 때문에, 교회 전통은 이 두 책을 ‘역사서’로 분류합니다. 한편 마카베오기 상권은 그리스계 왕조에 대항하였던 유다 마카베오와 그의 두 형제의 무용담을 차례로 엮은 삼부작 드라마입니다. 오늘 제1독서(1마카 1장)는 유다 지방에 그리스 관습과 문화, 곧 이교 풍습을 강요한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 4세의 불경한 작태를 고발합니다. 마카베오기 상권 2장부터는 마타티아스 사제와 그의 세 아들(유다 마카베오, 요나탄, 시몬)의 반란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시나이 계약과 율법을 수호하는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이방 출신 왕조의 핍박과 박해 앞에서 유다인들이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지키고 계약의 수혜자가 되는 길은 철저한 율법 준수와 폭력까지도 마다하지 않는 이교 풍습의 거부로 제시됩니다. 그러면 오늘의 그리스도인에게 ‘율법 준수’처럼 다른 것과 타협하지 말아야 할 신앙적 가치는 무엇입니까? 복음 정신과 반대되는 현대의 ‘이교 풍습’은 모든 것을 돈과 실적으로만 환산하려는 세속적 유혹이 아닐까요? (김상우 바오로 신부) ------------------------------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복음]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복음(루카18,35-43) 35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의 일이다. 어떤 눈먼 이가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다가, 36 군중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37 사람들이 그에게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 하고 알려 주자, 38 그가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 간절함은 망설이지 않는다. 39 앞서 가던 이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 어떤 장애(障碍)도 간절한 마음을 말리지 못한다. 그리고 그 마음을 예수님께서 들으신다. 40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데려오라고 분부하셨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41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그가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 예전에는 볼 수 있었던 눈 먼 이다. 42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43ㄱ 그가 즉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 = 하느님께 찬미(讚美)로 영광을 드리는 것, 믿음, 치유, 구원의 완성(完成)이라 했다. 43ㄴ군중도 모두 그것을 보고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 오늘 본문 눈 먼 이의 이야기 전(前), 앞31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대속(代贖)의 죽음과 부활, 곧 구원의 진리를 말씀을 하시는데 제자들은 ~ (루가18,34) 34 제자들은 이 말씀 가운데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였다. 이 말씀의 뜻이 그들에게 감추어져 있어서, 말씀하신 것을 알아듣지 못하였던 것이다. = 말씀 안에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 눈 먼 것임을 예수님은 말씀하신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 계명이 아닌 사람의 뜻, 계명으로 받아 지키는 이들을 눈 먼 이라 하신다. (마태15,8-9.14) 8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9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14 그들을 내버려 두어라. 그들은 눈먼 이들의 눈먼 인도자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것이다.” = 보이는 것을 위해, 보이는 종교(宗敎)행위에 열심인 것, 눈 먼 것이다. 오늘 독서에서도~ (1마카베1,10-15) 10 죄의 뿌리가 나왔는데, 그가 안티오코스 임금의 아들로서 로마에 인질로 잡혀갔던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이다. 그는 그리스 왕국 백삼십칠년에 임금이 되었다. 11 그 무렵에 이스라엘에서 변절자들이 생겨 많은 이들을 이러한 말로 꾀었다. “자, 가서 우리 주변의 민족들과 계약을 맺읍시다. 그들을 멀리하고 지내는 동안에 우리는 재난만 숱하게 당했을 뿐이오.” = 교회(敎會)가 세상(世上)과 하나된 형국(形局)이다. 12 이 말이 마음에 들어, 13 백성 가운데 몇 사람이 임금에게 기꺼이 나아가자, 그는 그들에게 이민족(사람)들의 규정을 따라도 좋다는 허락을 내렸다. 14 그리하여 그들은 이민족들의 *풍습에 따라 예루살렘에 경기장을 세우고, = 교회 안에 세상의 풍습(風習), 사람들의 뜻에 맞춘 여러 프로그램이 들어와 있는 것과 같다. 15 할례 받은 흔적을 없애고 거룩한 계약(새 계약)을 저버렸다. 이렇게 그들은 이민족들과 *한통속이 되어 악을 저지르는 데에 열중하였다. = 요즘 우리들은 어떤가? 그리스도의 피로 거저 얻은 의로움, 곧 하늘의 용서(容恕), 구원(救援), 그 새 계약을 진리(眞理)로 지키는가? 아니라고 사도(使徒)가 미리 알려 주었다.~ (2티모4,3-4) 3 사람들이 건전한 가르침을 더 이상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을 때가 올 것입니다. 호기심에 가득 찬 그들은 자기들의 욕망에 따라 교사들을 모아들일 것입니다. 4 그리고 진리에는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고 신화 쪽으로 돌아설 것입니다. = 사도(使徒)는 오늘날 교회(敎會)에 하느님의 뜻을 깨닫기 위해 그분의 말씀에는 귀 기울이지 않고, 자신들의 뜻(이름, 욕망, 의로움, 영광)을 위해 신앙생활(信仰生活)에 열심(熱心)하는 눈 먼 이들이 많아질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한번 돌아보자, 나는 하느님의 뜻인 진리(眞理)를 얼마나 깨닫고 믿는가(요한1,17 ⇀ 14,6참조) 나는 그 진리(眞理)의 예배(禮拜)를 얼마나 드리고 있나(요한4,23-24참조) 그 진리로 이끄실 성령(聖靈)이 함께하심을 믿는가?(요한15,26-16,13참조) 그래서 보이는 것을 위한 보이는 신앙생활에 치중하고 있지는 않는지,(2코린4,18참조) 그렇다면 눈 먼 신앙(信仰)이다. (요한9,40-41) 40 예수님과 함께 있던 몇몇 바리사이가 이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 “우리도 눈먼 자라는 말은 아니겠지요?” 하고 말하였다. 4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 = 율법(律法, 제사와 윤리)의 열심히 하느님의 뜻을 지킨다고, 안다고, 보인다고 하니, 죄(罪)의 용서(容恕)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말씀이다. 사람의 열심, 의로움으로는 죄의 용서가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로마3,20-24참조) 본문 42절을 다시 보면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시 보아라.” 하고 이르시니, 그가 즉시 다시 보게 되었다.’ = 말씀으로 다시 보게 된 것이다. 다른 태생(胎生) 눈 먼 이를 고치실 때~ (요한9,6-7) 6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땅에 *침을 뱉고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 사람의 눈에 *바르신 다음, 7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 하고 그에게 이르셨다. ‘실로암’은 ‘파견된 이’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그가 가서 씻고 앞을 보게 되어 돌아왔다. = 실로암의 물, 곧 죄인들의 속죄(贖罪)제물로 파견되신 그 대속(代贖)의 그리스도의 피(새 계약)에 씻으라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다 하시고 ‘씻어라’ 곧 ‘믿어라’ 하신 것인가.(6절) 땅(태생 눈 먼 이)에 침(말씀)을 뱉고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서(눈 먼 이와 하나됨) 고치심, 곧 구원의 진리이신 그리스도, 그 진리의 말씀으로 새로 태어난 것이다. 아니, 예수님(진리)께서 새로 낳으신 것이다. (야고1,18) 18 하느님께서는 뜻을 정하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시어, 우리가 당신의 피조물 가운데 이를테면 첫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 (요한3,3.5-6) 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5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6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 = 보이는 육(肉)의 뜻을 위해 신앙하는 사람, 눈 먼 사람이다. 그는 보이는 예수님 안에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곧 자신의 뜻(욕망)을 위해 능력(能力)의 예수님을 믿는 신앙이 아닌 자신의 영(靈)을 위해 속죄 제물로 죽으시고 부활(復活)하신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2코린5,17) 17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 우리를 위해 탄식하며 기도해 주시는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와 같이 땅(흙인 우리, 나)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복음 (루카18,35-43)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41ㄴ) 마르코 복음의 병행 구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시자 바르티매오는 겉옷조차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로 갔다(마르10,50). 즉 그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외침에 응답해 주시자 너무도 기뻐한 나머지, 밤에는 이불이 되고 낮에는 거지 행세를 할 수 있는 유니폼이며 생계 수단인 '겉옷'을 벗어 던지고 예수님께로 달려 갔던 것이다. 그렇게 달려 온 바르티매오에게 예수님께서는 소원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물으신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자기 자신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을 인식하고 있는지 알고 싶으셨다. 이에 대하 바르티매오는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마태20,33; 마르10,51)라고 표현함으로써 자신의 소원을 구체적으로 고백했다. 희랍어에서 '보다'는 뜻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동사가 '블레포'(blepo)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접두사 '아나'(ana)가 붙은 '아나폴레포'(anablepo)가 사용되었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바르티매오가 보기를 간절히 원했다(I want to see)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데, 여기서의 용례는 단순히 '보다'는 뜻보다는 '다시 보다'(see again)는 뜻을 지닌다(사도9,12.17; 22,13). 이것으로 보아 그는 전에는 소경이 아니었지만 소경이 되었고, 따라서 눈을 뜨고자 하는 욕구가 다른 사람보다 더 강했다고 볼 수 있다. 원문에는 '해 주십시오'에 해당하는 동사 '텔로'(thelo; want, desire)가 생략되어 있는데, 이 '텔로'(thelo)가 접속사 '히나'(hina)앞에 있어야 완전한 문장이 된다. 그러나 소경이 이렇게 '텔로'(thelo)를 생략하고 짧게 말한 것은, 자신의 소원을 말하는 것이 너무나 급했고 절박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수난과 죽음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이었습니다. 그분께서 예리코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길가에서 구걸을 하던 눈먼 이가 그분께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습니다(18,38). 앞서 가던 이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칩니다(18,39). 예수께서는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데려오라고 하시어, 그에게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18,41) 하고 물으십니다. 그리고는 그의 원의대로 다시 보게 해주십니다. 예리코의 소경은 다시 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그저 '지나가는 나자렛 사람 예수'(18,37)로 보았던 군중들과는 달랐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 주님"(18,39.41)으로 알아보았습니다. 예리코의 소경이 다시 보기를 바란 것은 실은 주님과의 일치, 영원한 생명을 갈망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욕망을 채우려고 육신의 눈을 뜨게 해달라고 청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영의 눈을 떠서 주님을 알아뵙기를 갈망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갈망해야 할 것은 현세 물질이나 권력과 명예가 아닙니다. 우리가 갈망해야 할 것은 주님뿐입니다. 이제 예수님께 집중해봅시다. 예수께서는 수난을 향한 구원의 여정을 가시면서도 길가에 버려진 이들을 보고 계셨고, 군중의 환성에 잘 들리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은 이들의 외침을 ‘멈추어’ ‘다가가’ 들어주셨습니다. 그분은 이 모든 이들을 관대하게 받아들이시는 한없는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당신을 갈망하는 이들의 거룩한 목마름을 지나치지 않으셨지요. 우리네 삶이 영적으로 성숙하려면 예수님의 이런 처신과 말씀에 굳건히 뿌리내리고 그에 따라 살아가야겠습니다. 예수님의 지상순례가 우리 모두를 하늘나라로 이끄셨듯이, 우리도 일상의 모든 움직임이 하느님을 품은 천상순례가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우리 인생이 곧 예루살렘을 향한 순례인 셈입니다. 이 순례는 다른 이들의 갈망을 채워주기 위한 사랑의 순례입니다. 늘 사랑을 품고, 사랑의 눈길로 바라보고, 받아들이며, 견디고 기다리면 사랑을 낳습니다. 우리가 갈망해야 할 것은 사랑이신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소명은 주님의 사랑을 갈망하는 이들에게 사랑을 나누고 전하는 일입니다. 이 갈망을 주고받는데 중요한 것은 예수님처럼 가던 길을 멈추는 것입니다. 나 자신과 이웃을 사랑으로 치유하고 행복하게 하려면 ‘멈추어야’ 합니다. 자신을 하느님 앞에 두고, 하느님의 사랑을 내 안에 모셔들이도록 멈추고, 애정 어린 눈길로 다른 이들의 아픔과 한숨소리를 보고 들으려고 멈추어야 합니다. 우리는 멈춤으로써 다른 이들 안에 있는 하느님의 갈망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멈추는 것은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사랑의 행위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을 그저 스쳐 지나가는 분으로 보지 말고, 내 영의 눈을 뜨게 해주실 주님으로 고백하며 갈망해야겠습니다. 그분을 갈망하기 위해 나의 발걸음을 멈추고, 그분의 갈망을 발견하기 위해 멈춰야겠지요. 멈추어 자비이신 그분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기도하며, 그분을 갈망하고 이웃의 갈망에 다가가는 오늘이길 기도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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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7.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최원석님 공유
김건태 신부님_다시 보아라!
오늘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의 마지막 길, 예리코에 이르십니다. 앞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운명에 대하여 세 번에 걸쳐 예고를 하셨으나, 제자들은 아직 무슨 의미인지 깨닫지 못하는 상태, 눈이 먼 사람처럼 보지 못하는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예리코 성문 가까이에서 구걸하던 걸인들, 그들 가운데 한 눈먼 이가, 파스카 축제를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순례자들을 기다리고 있던 터에, 다른 사람들보다 강렬한 느낌을 받아 무엇인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지리라 느낍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 하고 알려 줍니다. 군중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업적을 드러내시는 장면은 목격했으나, 그분의 진정한 신원은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저 ‘나자렛 사람 예수님’ 정도입니다. 그러나 눈먼 사람은 좀 더 멀리 보고자 합니다. 하느님의 영이 이 사람의 마음속에 진리를 심어주자, 믿어 고백합니다: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이 소경은 오셔야 할 분이 ‘다윗의 자손, 예수 메시아’이심을 선포하며 외칩니다: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사람들은 이 사람을 잠자코 있게 하려 하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더욱 아름다운 소리로 외칩니다.
늘 성령의 움직임을 의식하고 있던 예수님은 군중의 함성 속에 묻힐 뻔했던 눈먼 이의 외침을 들으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메시아로 지칭됨을 더는 마다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이제 메시아로 처신하시며, “그를 데려오라고 분부하십니다.”
예수님은 그의 신앙을 점검하고자 질문을 던지십니다. 예수님은 늘 당신의 의지를 강요하지 않으시고, 당신께 무엇인가를 요구할 수 있는 자격과 권리를 사람에게 넘겨주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눈먼 이는 망설임 없이 유일하며 간절한 바람인 치유를 소리 높입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눈먼 이는 이제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릅니다. 이 호칭은 초대교회 신자들이 찬미가를 부를 때 외치던 호칭,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신앙의 호칭입니다.
치유 요청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은 불가피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청하는 사람에게 주실 것이며, 눈먼 이들을 보게 하려고 이 세상에 오셨음을 여러 차례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보아라.” 눈먼 이는 육체적인 치유만을 요구했지만, 예수님은 영적인 치유까지 선사해주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로 즉시 보게 된 눈먼 이는 치유의 능력을 보여주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합니다. 군중 또한 찬미가를 부르며 이 사람과 함께합니다. 하느님을 찬미하며 예수님의 뒤를 따라 걸어가는 모습, 곧 교회의 모습을 미리 내다볼 수 있습니다. 교회는 이처럼 찬미하며 따라가는 공동체로 정의됩니다.
눈먼 이의 치유 이야기는, 문자 그대로의 육체적 치유를 넘어, 보지 않고 살거나 눈을 감고 보지 않으려 했던 예수님의 제자들, 초대교회 신자들, 그리고 우리의 부족한 신앙 삶을 치유해 주는 이야기로 다가옵니다. 부족을 느낄 때마다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시기를" 청하는 용기와, 치유의 은총과 함께 “찬양하며 따르는” 자세가 필요할 뿐입니다.
오늘 하루, 청하는 우리의 기도를 기꺼이 들어 주시고, 부족한 가운데서도 정성을 다하여 따를 수 있도록 늘 이끌어주시는 주님께 감사드리며, 주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인임을 자랑스럽게 드러내는, 보람찬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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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1.”은 박 베드로 형제님이 보내주신 자료입니다.
## 공유하신 분께서 강론글이나 묵상글 수합과정에서 과년도의 자료를
사용하신 것도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 1. ================================================
♣복음말씀의 향기♣ No4411
11월17일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연중 제33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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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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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예수회 김정현 요셉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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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주님, 제 영혼의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
하느님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때가(수난과 죽음의 순간) 서서히 다가왔습니다. 예수님의 발걸음은 약속된 장소 예루살렘으로 향해가고 올라가고 계셨습니다.
예루살렘을 40여킬로 남겨둔 예리코로 들어가시기 직전이었습니다. 예리코는 지구상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해저 258미터) 오아시스 도시로 유명합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참으로 안타깝고 서글픈 일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이제 지상에서 예약된 당신 사명의 수행 기간이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최종 목적지 예루살렘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명확하게 파악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 머릿속에는 세속적인 왕권에 대한 욕심이나 세상 사람들의 환호나 열광, 승리에 찬 행군 따위는 조금도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그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쓰디쓴 고난의 잔을 피하지 않고 마시는 것, 끌려가는 한 마리 어린 양처럼 묵묵히 수난을 견디는 것, 죽음을 넘어서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에 대한 관심과 열정으로만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가에 도열한 군중들은 전혀 다른 생각을 품고 예수님을 환영합니다.
유다인들은 구약 시대 자신들의 선조들이 주님의 권능에 힘입어, 마른 발로 요르단 강을 지나, 당시 적군들이 정복하고 있던 난공불락의 요새이자 성지(聖地) 예리코를 함락시켰던 사건을 회상했습니다.
군중들은 이제 예수님께서 다시 한번 그 일을 몸소 수행하시리라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전지전능한 세속적 왕권의 행사를 잔뜩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오랜 로마 제국으로부터의 압제나 허약한 헤로데 왕권을 단숨에 제압하고, 그토록 꿈꾸던 새로운 왕국, 초강대국 건설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그런 허황된 꿈이나 기대를 완전 개무시하십니다. 그분은 군중의 대대적이고 열광적인 환영 앞에 일말의 반응도 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당신 사랑의 눈길을 필요로 하는 한 가련한 인간을 바라보십니다. 삶 자체가 고통과 눈물로 가득했던 인간에게 다가가십니다. 군중들의 환호소리와 박수소리에 묻혀 가느다랗게 들려오던 한 사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그 누구도 관심주지 않던 한 가련한 인간으로부터 들려오던 구원의 외침을 들으십니다.“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복음 18장 38절)
예수님 당신을 환영하는 수많은 군중들의 요란한 환호 소리에는 귀를 막으시고, 구걸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던 한 눈먼 사람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루카 복음 18장 41절)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군중들의 열광이나 엄청난 기적에 대한 헛된 기대, 세속적인 성공이나 승리보다, 지금 당신 눈 앞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한 인간 존재를 눈여겨봐주시고, 돌봐주시는 것이 훨씬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눈먼 사람 입장에서 얼마나 은혜롭고 감사한 일이겠습니까? 수많은 군중들의 목소리를 제쳐두고 오직 내 절박한 목소리만을 귀담아들어주신 주님이 얼마나 나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친히 물어봐주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아마 오늘도 주님께서는 가난하고 절박한 우리 각자를 눈여겨 보실 것입니다. 간절히 외치는 오늘 내 목소리를 들으시고 우리에게 친히 다가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자상한 목소리로 물어보실 것입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사실 예리코에는 눈먼 거지뿐만 아니라 수많은 눈먼 이들이 있었습니다. 안타까운 일은 그 수많은 눈먼 이들은 정작 자신들의 눈이 멀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사도들을 포함해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군중들이 아직도 새로운 눈, 신앙의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날에도 눈먼 이들은 도처에 널려있습니다. 아직도 예수님의 참된 실체와 정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 아직도 예수님으로부터 세속적인 기대만을 품고 있는 사람들, 결국 아직도 신앙의 눈을 뜨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은 또 다른 눈먼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눈만 뜨면 외쳐야겠습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주님, 제 영혼의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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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TL4sOFwrauo?si=rZDhbQRx61CYVM8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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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한 소망 하나쯤은 가지고 살아야!>
찬미 예수님!
캐나다 몬트리올의 성 십자가 수도회에 '알프레드 베셋'이라는 청년이 입회했을 때, 수도원 장상은
그를 받아주며 추천서에 이렇게 썼다고 합니다. "그는 오늘 몸이 아파 일은 거의 할 수 없지만, 기도는 열심히 하는 거룩한 영혼입니다." 그의 이름은 '안드레'가 되었고, 그가 맡은 소임은 노트르담 대학의 '문지기'였습니다. 그는 평생을 그 자리에서 문을 열고 닫고, 방문객을 안내했습니다. 글도 겨우 읽을 줄 알았고, 몸은 평생 병을 달고 살았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그는 가장 연약하고 '쓸모없는 종'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보잘것없는 수사의 마음속에는 화산처럼 타오르는 '믿음의 불'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양아버지이신 '성 요셉'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가졌습니다. 왜 하필 성 요셉이었을까요? 안드레 수사는 생각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과 성모님을 맡기실 정도로 신뢰하신 분이라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청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관장하시는 분이 아니고 누구겠는가?" 병자들이 그를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감기 환자, 다친 아이들이었습니다. 안드레 수사는 자신이 고쳐준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언제나 똑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못합니다. 성 요셉께 가십시오. 그분께 기도하십시오!"
그는 성 요셉 성상 앞 램프의 기름을 조금 묻혀 환자에게 발라주며 함께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의사들이 포기한 불치병 환자들이 낫고, 말기 암 환자들이 치유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몬트리올의 기적'이라 부르기 시작했지만, 그는 화를 내며 말했습니다. "나는 당신들의 병을 고쳐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성 요셉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사람들이 안드레 수사에게 몰려든 이유는, 그가 '불가능한 청'을 들어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안드레 수사를 단순한 문지기가 아니라, '전능하신 하느님의 대리자'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증거가 바로 지금 몬트리올 성 요셉 대성당의 한쪽 벽을 가득 메우고 있는 수천 개의 목발과 보조기들, 바로 '성 요셉의 벽'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리코의 눈먼 이는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평생 청했던 것은 고작 "적선해 주십시오", "한 푼만 주십시오"라는 '가능한 청'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자, 그는 자신의 평생 기도 제목을 바꿉니다. 그는 자신의 병이 의사 수준에서는 '불가능'하지만, 저분이라면 '가능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사람들이 그를 꾸짖으며 잠자코 있으라고 했습니다.
"시끄럽다! 네 주제에 감히 무엇을 청하느냐?" 하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던 길을 멈추시고 그에게 물으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예수님은 그에게 '불가능한 청'을 할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는 단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합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는 돈(가능한 청)이 아니라 '다시 보는 것'(불가능한 청)을 청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선포하십니다.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의 '불가능한 청'이 그의 믿음을 증명한 것입니다.
신부인 저에게 안수를 청하는 분들도 다양합니다. 감기 환자부터 말기 암 환자까지 옵니다. 병원에 가면 나을 수 있는 것으로 안수를 청하는 분들은, 저를 신부님 말씀대로 '의사 수준'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말기 암 환자가 눈물로 안수를 청할 때, 그분은 저를 '하느님의 대리자'로 보고 계신 것입니다.
제가 오산성당에 있을 때였습니다. 한 어머니가 저에게 달려와, 막 숨을 거둔 아들을 살려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곧 영안실로 들어가야 할, 이미 싸늘해진 아들의 시신이었습니다. 저는 그 어머니와 함께 영안실 문 앞에서, 이미 의학적으로는 끝난 그 아들의 몸에 손을 얹고 '불가능한 안수'를 했습니다. 물론, 아들은 다시 살아나지 못했습니다.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저는 기적보다 더 위대한 것을 보았습니다. 바로 그 '어머니의 믿음'이었습니다. 그녀는 저를 '위로해 주는 사람' 수준으로 부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저를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느님의 대리자'로 불렀습니다. 그녀의 그 '불가능한 청'은, 비록 인간적인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 자체로 이미 가장 위대한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하느님께 무엇을 청하는지가 바로 우리가 하느님을 어떻게 믿고 있는지를 말해줍니다. 우리는 불가능한 것 하나쯤은 꾸준히 청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을 '나의 아버지'로, '전능하신 하느님'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저는 처음에 주일학교 교사할 때 제가 야단쳐서 도망간 아이가 되돌아오기를 청했습니다. 들어주셨습니다. 술내기에서 이기게 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들어주셨습니다. 이렇게 믿음이 쌓여갔습니다. 지금은 모든 불가능한 것들도 청합니다. 들어주시는 것은 주님 마음이지만, 그것을 청할 수 있는 믿음은 우리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불가능한 청'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오늘 복음의 눈먼 이처럼, 안드레 수사처럼, 그리고 오산 성당의 그 어머니처럼 당당하고 꾸준하게 기도하십시오. 그 '불가능한 청'을 통해, 여러분의 믿음이 여러분을 구원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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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의정부교구 김동희 모세 신부님]
유명 관광지를 여행하다 보면 관광 체험 상품 가운데 ‘마차 투어’가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마차를 끄는 말의 두 눈 좌우에 작은 가리개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양옆의 변화를 보지 못하게 하여 말이 달리는 도중에 놀라는 것을 예방하고 안전하게 목적지에 가게 하려는 것이랍니다. 어쩌면 우리 또한 비슷하게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두루 살피기보다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 하면서 말이지요.
우리는 신앙으로 ‘눈을 뜬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이 인류의 역사 곳곳에 배어 있음을, 우리의 삶 곳곳을 꿰뚫고 있음을 보게 된 것이지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의 완고함을 꿰뚫어 주변에 고통받고 상처받아 도움을 간절히 바라는 이웃들이 있음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겪은 신앙의 사건이요 눈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리코의 눈먼 이는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루카 18,41)라고 간청합니다. ‘다시’라는 말이 아프게 다가옵니다. 오늘 독서인 마카베오기 상권에는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 임금 시절 하느님 백성인 이스라엘의 변절과 불충실이 자세히 적혀 있습니다. 그들은 이민족들을 부러워하여 거룩한 계약과 그들만의 고유한 관습을 저버린 채 이민족들과 한통속이 되어 온갖 악을 저지르고 이방의 우상들에게 희생 제물을 바치고 안식일을 더럽힙니다.
세상에 대한 관대함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잃은 채 퇴색되고 변질되어 가는 그들의 모습은 우리의 자화상일지도 모릅니다. 오늘 저도 예리코의 눈먼 이를 따라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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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8,35-43: “주님,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세상에서 안타까운 것 중 하나는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앞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단순히 신체적 장애가 아니라, 세상을 이해하고 관계를 맺는 길이 막혀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성경은 육신의 눈먼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이 마음의 눈이 먼 것이라고 가르친다. 오늘 복음의 눈먼 거지는 단순히 시력을 되찾은 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을 열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다.
예수님께서 예리코로 들어가실 때, 길가에 앉아 있던 눈먼 이가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38절) 하고 간절히 부르짖는다. 군중은 그를 꾸짖으며 조용히 하라고 하지만, 그는 더 크게 소리친다. 그의 끈질긴 부르짖음은 단순한 시력 회복을 향한 갈망이 아니라, 구원에 대한 믿음의 표현이었다. 예수님은 그에게 물으신다. “네가 나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41절). 그는 단순히 말합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41절) 예수님은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42절) 하고 응답하시며, 그의 눈을 열어 주신다. 그 결과 그는 단순히 눈을 뜬 것에 그치지 않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된다. 이는 육신의 눈과 영혼의 눈이 동시에 열린 사건이었다.
성 이레네오는 “하느님의 영광은 살아 있는 인간이며, 인간의 삶은 하느님을 보는 것”(Adversus Haereses, IV, 20,7)이라 했다. 오늘 복음의 눈먼 이가 바로 그 증거이다. 육신의 눈이 열리자,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는 삶, 곧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게 되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빛을 보기를 원했지만, 단순히 눈의 빛이 아니라 마음의 빛을 보았다. 그는 세상을 보는 눈보다 믿음을 보는 눈을 먼저 얻었다.”(Sermo 88) 교리서도 우리 신앙의 여정을 이렇게 설명한다. “신앙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마음의 눈을 열어 그분을 바라보는 것이다.”(2715항 참조)
오늘 눈먼 이가 군중의 방해에도 굴하지 않고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38절) 하고 부르짖은 것처럼, 우리도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 “주님, 제가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41절) 이것은 단순히 문제 해결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믿음의 눈, 사랑의 눈, 감사의 눈을 달라는 청원이다. 또한 그는 눈을 뜬 뒤 곧바로 예수님을 따랐다. 우리의 기도도 단순한 청원에서 멈추지 않고, 응답을 받은 뒤에는 제자의 길로 이어져야 한다.
오늘 눈먼 이는 우리 신앙인의 모범이다. 그는 믿음으로 예수님께 부르짖었고, 응답을 받자,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 우리도 같은 은총을 청해야 한다. “주님, 저희의 눈을 열어 주소서. 세상의 눈먼 삶에서 벗어나, 믿음의 눈으로 당신을 바라보고 따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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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믿음으로 다시>
루카 18,35-43 (예리코에서 눈먼 이를 고치시다)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의 일이다. 어떤 눈먼 이가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다가, 군중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사람들이 그에게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 하고 알려 주자, 그가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앞서 가던 이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데려오라고 분부하셨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그가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즉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 군중도 모두 그것을 보고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
<믿음으로 다시>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루카 18,41)“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8,42)
다시 보고픈
눈먼 사람아
그대의 믿음이
다시 보게 하리니
다시 보게나
다시 듣고픈
귀먹은 사람아
그대의 믿음이
다시 듣게 하리니
다시 듣게나
다시 외치고픈
숨죽인 사람아
그대의 믿음이
다시 외치게 하리니
다시 외치게나
다시 일어나고픈
쓰러진 사람아
그대의 믿음이
다시 일어나게 하리니
다시 일어나게나
다시 누리고픈
빼앗긴 사람아
그대의 믿음이
다시 누리게 하리니
다시 누리게나
다시 어울리고픈
쫓겨난 사람아
그대의 믿음이
다시 어울리게 하리니
다시 어울리게나
다시 이루고픈
힘없는 사람아
그대의 믿음이
다시 이루게 하리니
다시 이루게나
다시 자유롭고픈
묶인 사람아
그대의 믿음이
다시 자유롭게 하리니
다시 자유롭게나
다시 나아가고픈
가로막힌 사람아
그대의 믿음이
다시 나아가게 하리니
다시 나아가게나
다시 살고픈
죽은 사람아
그대의 믿음이
다시 살게 하리니
다시 살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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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믿음’은 곧 ‘따름’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의 일이다. 어떤 눈먼 이가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다가, 군중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사람들이 그에게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 하고 알려 주자, 그가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앞서가던 이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데려오라고 분부하셨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그가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즉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 군중도 모두 그것을 보고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루카 18,35-43)
1) ‘어떤 눈먼 이’의 이름은 ‘바르티매오’입니다(마르 10,46). 여기서 가장 중요한 말은, ‘예수님을 따랐다.’ 라는 말입니다. 이 이야기는 어떤 눈먼 이가 예수님 덕분에 눈을 고쳤다는 단순한 치유 이야기가 아니라, 암흑 속에서 살던 사람이 ‘빛이신 주님’을 만나서 ‘생명의 빛’을 얻었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따르게 되었다는 ‘구원 이야기’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향해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뒤를 따라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간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2) 어떤 눈먼 이가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었다는 말은, 마태오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마태 4,16)
눈이 멀어서 길가에 앉아 구걸을 하면서 먹고사는 바르티매오의 인생은 ‘어둠 속에’, 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래도 그에게는 ‘새 인생’에 대한 희망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바르티매오는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이미 들었고, 예수님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르티매오는 ‘빛’을 얻기를 희망하면서, 또 간절하게 기도하면서,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바르티매오의 만남은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3)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는 바르티매오의 말은, 예수님을 이미 ‘메시아’로 믿고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고, 또 예수님께 ‘새 인생’을 청하는 말입니다. 어둠에서 벗어나서 빛 속에서 걸어가는 새 인생...... 그렇지만 군중은, 그가 몇 푼의 돈을 청하는 것으로 생각했고, 그래서 예수님을 방해하지 말라고 꾸짖었습니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서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위험한 말이었고, 그래서 사람들이 그 말을 사용하지 못하게 막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군중이 가로막은 일은, 바르티매오가 극복해야 할 하나의 장벽이었는데, 그가 그 장벽 앞에서 더욱 큰소리로 외쳤다는 것은, 그의 ‘간절함’과 ‘진실함’을 나타냅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라는 말씀은, 바르티매오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믿음을 고백하기를 바라셔서 하신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르티매오의 처지를 잘 알고 계셨을 것이고, 그가 무엇을 희망하는지도 잘 알고 계셨을 텐데, 그렇지만 바르티매오 자신이 능동적으로, 또 공개적으로 자신의 믿음과 희망을 고백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 쪽에서 보면, 바르티매오의 간청은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증언한 일과 같습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는 말은, 눈을 고쳐 달라는 간청이기도 하고, ‘새 인생’을 달라는 간청이기도 합니다.
4) “다시 보아라.”라는 말씀은, 그의 눈을 고쳐 주신 말씀이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말씀은, 바르티매오의 믿음을 확인해 주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흔들림 없이 구원을 향해 나아가라고 격려해 주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구원하였다.’는 ‘구원이 시작되었다.’입니다. ‘구원의 완성’은 하느님 나라에서 이루어집니다.>
다시 보게 된 바르티매오가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는 말은, 그가 희망한 ‘새 인생’은 ‘예수님을 따르는 인생’이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바르티매오가 다시 보게 된 일은, 요한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들에 연결됩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4)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 세상에 왔다."(요한 1,9)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는 일’과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바르티매오에게서 배우게 됩니다. 예수님을 만났으면, 예수님을 믿어야 하고, 따라야 합니다. 만일에 예수님을 만났는데도 안 믿는다면, 그것은 그냥 예수님을 구경한 것이고, 아무것도 아닌 일입니다. 또 예수님을 믿긴 하는데, 따르는 일은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곧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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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영혼의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
시력이 6.0인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그는 아주 멀리 있는 것도 잘 봅니다. 그렇다고 그가 늘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볼 수 있다는 것이 행복이기도 하지만 볼 것, 안 볼 것 다 보면 오히려 힘들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외적으로는 잘 보지만 혹 자기 자신을 볼 수 없다면 그는 불행합니다. 육신의 눈이 중요하지만, 내면의 세계를 보는 마음의 눈은 더 소중하고 내세의 세계를 보는 영혼의 눈은 더욱더 고귀합니다. 우리는 감겨 진 영혼의 눈을 떠야 합니다.
어떤 눈먼 이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8,38).하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 앞서 가던 이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습니다. ‘이웃사촌’이라 했는데 아무래도 눈먼 소경은 이웃을 잘못 만난 것 같습니다.
유다인들의 표현으로 자비라는 것은 애간장, 애타는 심정을 말합니다. 호세아서에서는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마음을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11.8)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애간장이 녹는 안타까움! 이것이 바로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자비이며 사랑입니다. 눈먼 이는 바로 그 자비를 간구했습니다.
절박한 부르짖음을 외면한 사람들은 아무리 좋은 눈을 가졌다 할지라도 마음의 눈은 뜨지 못했으니 정작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외쳐야 할 사람은 눈먼 소경이 아니라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이웃의 마음을 읽고 그의 부족함을 채워야 할진대 시끄럽다고 야단을 치고 있었으니 그들이 소경입니다.
자비는 적선이 아닙니다. 함께하면 손해 볼 것 같아도 주님의 마음으로 함께 머무는 것입니다. 그의 필요를 절박함으로 함께하는 것입니다. 어려움이 있는 이들에게 이웃이 되어줄 수 있을 때 그들을 통해서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눈먼 이는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붙잡으려는 심정으로 발버둥치듯이 그렇게 절박하고 간절하게 매달렸습니다. '잠자코 있으라'는 꾸짖음에 굴하지 않고 믿음을 가지고 외쳤습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믿음은 군중이라는 장벽을 넘어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믿음은 군중의 손가락질도 마다하는 예수님께 대한 일편단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믿음을 보시고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눈먼 이는 다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즉시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하느님을 찬양하며 따랐다는 것은 단순히 외적인 눈만 뜬 것이 아니라 영적인 눈을 뜨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우리도 눈을 떠야 합니다. 믿음의 눈을 뜨면 세상이 달라 보이고 이웃의 요구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영혼의 눈이 뜨여 내가 변하면 세상이 아름답습니다.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기 전에 그의 처지와 절박한 마음을 공감하게 되고, 오히려 주님을 불러 세우고 주님께로 인도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하고 부르짖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영적인 시력을 키울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리하여 나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찬양하게 합시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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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이번 주는 제1독서로 마카베오기 상권을 읽습니다. 이 책은 현대의 그리스도인에게 무엇을 시사합니까?
마카베오기는 상권과 하권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기원전 176년부터 134년까지 펼쳐진 이스라엘의 역사를 다룹니다. 이는 헬레니즘 시대 그리스계 왕조 셀레우코스 4세 통치 말기부터 유다의 대사제 요한 히르카노스의 즉위까지 해당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짓밟았던 비유다계 출신 왕조의 통치부터 유다계 왕조가 재정립되는 역사적 종교적 과정을 서술하기 때문에, 교회 전통은 이 두 책을 ‘역사서’로 분류합니다.
한편 마카베오기 상권은 그리스계 왕조에 대항하였던 유다 마카베오와 그의 두 형제의 무용담을 차례로 엮은 삼부작 드라마입니다. 오늘 제1독서(1마카 1장)는 유다 지방에 그리스 관습과 문화, 곧 이교 풍습을 강요한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 4세의 불경한 작태를 고발합니다. 마카베오기 상권 2장부터는 마타티아스 사제와 그의 세 아들(유다 마카베오, 요나탄, 시몬)의 반란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시나이 계약과 율법을 수호하는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이방 출신 왕조의 핍박과 박해 앞에서 유다인들이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지키고 계약의 수혜자가 되는 길은 철저한 율법 준수와 폭력까지도 마다하지 않는 이교 풍습의 거부로 제시됩니다.
그러면 오늘의 그리스도인에게 ‘율법 준수’처럼 다른 것과 타협하지 말아야 할 신앙적 가치는 무엇입니까? 복음 정신과 반대되는 현대의 ‘이교 풍습’은 모든 것을 돈과 실적으로만 환산하려는 세속적 유혹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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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염철호 요한 신부님]
오늘 제1독서에 등장하는 시리아 임금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 4세는 이스라엘 민족의 기억 속에 최악의 이방 지배자로 기억됩니다. 왜냐하면 유다교 자체를 멸절하려 하였을 뿐만 아니라, 유다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성전에 자기 상을 세우며 성전을 더럽히기까지 하였던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성전에 세워진 그의 상을 두고 “황폐를 부르는 혐오스러운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스라엘의 많은 이들이 그를 따라나섰다는 데 있습니다. 그를 따라 우상을 섬기고, 하느님에게서 멀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를 따르지 않는 의인들도 많았습니다.
그중 많은 이들이 순교를 하였는데, 이것이 유다 독립 운동의 밑거름이 됩니다. 결국, 유다 땅은 마카베오로 말미암아 독립을 쟁취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의인들의 피를 잊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 막바지에 소경을 고쳐 주십니다. 그런데 이야기 속 사람들과 소경의 태도가 매우 대조적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두고 “나자렛 사람 예수”라 부르지만, 소경은 그분을 “다윗의 자손”, 곧 ‘메시아’라고 고백하며 자비를 간청합니다.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진정 깨달아 아는 사람은 눈먼 이뿐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입을 막으려 하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자신의 믿음을 고백합니다. 결국 눈먼 이만이 참으로 눈을 뜨고 구원을 얻습니다.
사람들은 눈을 지니고 있었지만 예수님을 진정으로 알아뵙지 못하는 눈먼 이로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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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차동욱 시몬 신부님]
<내가 아니라 네가 해낸 거야>
복음서의 다음 몇 장면들을 떠올려봅시다. ‘열두 해 동안 하혈하던 여인이 치유 받을 때(마태 9장)’ ‘가나안 여인의 마귀 들린 딸이 치유 받을 때(마태 15장 )’ ‘사마리아인이 자신의 나병이 나았을 때(루카 17장)’ 입니다.
이때 공통으로 나타나는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인가요? 바로 오늘 복음에서도 나오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입니다. 예수님은 치유를 받고자 하는 이의 믿음을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바라는 이의 소망과 믿음이 예수님의 은총을 온전히 모실 수 있게 만들어줍니다. 눈 먼 이가 지금 자신을 낫게 해주실 치유자이며 구원자이신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제 눈 먼 이는 자신의 간절한 믿음 덕분에 예수님의 정체를 제대로 알아보는 영적 눈이 가장 밝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비를 베풀어달라 간절히 부르짖는 눈 먼 이를 떠올리며 우리 자신이 가져야 할 신앙을 다시금 성찰해봅니다. 우리도 그 눈 먼 이처럼 뜨겁게 예수님을 부르고 있는지, 우리의 삶을 이끌어가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의심 없이 믿고 있는지 말입니다. 우리 삶에서 가장 큰 희망이요, 마지막 희망은 항상 예수님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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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루카18,41ㄴ)
<죄의 뿌리로부터의 해방!>
오늘 복음(루카18,35-43)은 '예수님께서 예리코의 눈먼 이를 고치시는 말씀'입니다.
예리코에 있는 어떤 눈먼 이가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다가, 예수님께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18,38) 사람들이 제지하자, 그는 더욱 큰 소리로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18,39ㄴ)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데려오라고 분부하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물으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루카18,41ㄱ) 그러자 눈먼 이가 대답합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루카18,41ㄴ)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18,42) 하고 이르시니, 그가 즉시 다시 보게 되는 치유기적이 일어납니다.
우리도 눈먼 이들이 아닌가?
눈에 보이는 것들을 볼 수 있는 육적인 눈은 가지고 있지만, 눈에 보이는 그 너머의 것을 보지 못하는,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신 주님을 보지 못하는 영적으로 눈이 멀어있는 이들이 아닌가?
예리코의 눈먼 거지가 다시 보게 된 치유기적은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에게도 일어날 기적입니다. 우리도 영적으로 눈이 멀었기 때문입니다. 죄의 뿌리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교만과 탐욕과 인색과 음욕과 시기(질투)와 분노와 게으름(나태)'이라는 '죄의 뿌리'에 갇혀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외칩시다!
더욱 큰 소리로 치유자이신 주님께 외칩시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11월17일인 오늘은 '자선 사업의 수호성인이자, 재속 프란치스코회의 수호성인'이신,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입니다.
죄의 뿌리로부터 해방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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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루카 18,41)
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내맡김의
진정한
신앙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눈먼 사람은
자신의 결핍과
아픔을 숨기지
않습니다.
진정한 치유는
스스로
말할 수 있는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살고자 하는
간절함이
용기있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진실한 갈망을
끌어올립니다.
우리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말할 때
치유는
시작됩니다.
눈먼 이가
눈을 뜨자
세상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달라졌기에
다르게 보이는
것입니다.
나의 이야기를
말하는 순간
그것은
신세 한탄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희망의 움직임이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이야기를,
우리의 언어로,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
직접 말하기를
기다리십니다.
하느님께
내어놓는 것이
진실한
신앙입니다.
나의 이야기를
하느님께
내어놓을 때,
상처는
빛으로 바뀌고,
나는 다시 보게 되며,
내 삶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새로운 길을
걷게 됩니다.
진실하게
말하는 것이
진실하게
보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내어놓는 것이
참된 변화이며
다시 보는
치유입니다.
내어놓는
오늘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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