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6: 8-12
그러나 노아는
성경이 하나님의 사람을 표기할 때 사용하는 말이 있는데 그것이 “은혜를 입은 자”입니다. 그 말씀의 깊이는 그 사람을 예정하심에서부터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는 사실까지를 이 한마디로 표시합니다. 그의 선택이 그를 부르심이 그의 칭의가 그리고 그의 성화가 그러하고 그의 영화까지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은혜가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 당세에 믿음의 족적을 남기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과 동행하게 하는 것이요, 그 당대의 사람들과 구별 되이 살게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이 고달플지라도 그 자체가 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실이 가장 통합적인 헌신의 사상입니다. 동정녀 마리아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은혜 개념의 반대편에 공로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처럼 신앙생활을 망치는 것 또한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참으로 입어서 사는 사람은 사도 바울처럼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면서 일생을 사는 것입니다.
1. 본문 8절은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입니다.
이것은 히브리어 문구인데 그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호의를 베풀고 사랑하셨다는 말입니다. 히브리인들이 말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즉 히브리인들은 ‘만약 당신 보시는 앞에서 내가 은혜를 받았다면’ 그리고 ‘만약 내가 당신에게 받아들여 질만하다면’ 또는 ‘만약 당신이 저에게 당신의 자비나 호의를 베풀어주신다면’ 의 식으로 말하는 것에 익숙해 있습니다. 그 문구는 상당히 주의를 끌고 있는 부분입니다.
그것은 어떤 무식한 사람들은 헛된 교묘한 방법으로 추론하기를 만약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는다면 그것은 그들이 노력하고 그들이 그럴만한 장점을 가지고 은혜를 추구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진실로 노아가 여기서 정직하고 거룩하게 생활함으로 세상의 공통적인 타락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지켰기 때문에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다고 선포되고 있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호해 주시는 은혜를 떠나서 어떻게 이 순수성을 취득하였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호의를 받은 시초는 그분의 은혜스런 긍휼에서 기원되었습니다. 그리고 일단 그를 껴안으신 후에는 주 여호와께서 세상의 나머지 사람들과 함께 멸망되지 않도록 그분의 손에서 지켜 주셨습니다.
2. 본문 9-10절을
“⑨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⑩그가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입니다.
“사적”으로 기록된 히브리어 (톨-레돋-)이라는 말은 원래는 세대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때로는 보다 확대된 의미를 지니게 될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생의 전 역사를 가리키는 말에도 적용되기도 합니다. 이것은 정말로 지금 이 성경 말씀에서 가지고 있는 의미인 듯합니다. 하나님이 세상 전체를 멸망시키려고 결정하셨을 때에도 그분이 보존하시기를 원하셨던 한 사람이 발견되었다고 모세가 언급하였을 때 그는 간단하게 그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었는가를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노아가 그 당시의 사람들 가운데서 정직하고 공의로운 사람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원서에 나타난 히브리어 명사 (도르)라는 말이 다르기 때문인데 그 의미는 한 시대 또는 삶의 기간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타밈-)이라는 말은 고대 해석가들이 곧잘 완전이라는 말로 번역했는데 그 말은 ‘정’이나 ‘진실’이라는 말과 똑같은 효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만적이며 가식적인 것과 헛된 것들과는 정반대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모세는 이 두 가지 사실을 성급하게 서로 관련시키지 않습니다. 언제나 외부적인 탁월함으로 영향을 받고 있는 이 세상이 마음 깊은 사랑으로 정의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고 순전히 행위로만 평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그분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우리의 손과 눈과 그리고 발을 제재하여 그분의 율법에 순종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순수성이 무엇보다 우선하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의(義)에 대한 진정한 개념에서 가장 주요한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의롭고 완전하다고 불리어지고 있는 자들이 반드시 모든 면에서 완전하고 그들 안에는 전혀 결점이 없어서 그렇게 불리어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순수하게 의를 계발하는 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의 진정한 마음으로부터 그것을 순수하게 계발하는 자를 그렇게 일컬은 것입니다.
우리가 확신하기는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을 향해서는 율법의 완전한 규칙대로 엄격하게 생활하는 것을 요구하시면서 그렇게 서릿발치는 존엄한 공의로 대하시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만약 그들 안에서 전혀 위선이 없이 순수하게 생활하고 방정한 사랑의 순결성이 흘러 넘치며 그들의 마음도 그 사랑으로 가득 찬다면 하나님은 그분의 인자함을 베풀어 그들을 의로운 자들이라고 선언하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당세에’ 라는 말은 상당히 강조적인 형식입니다. 모세는 이미 빈번히 말해 왔으며 곧 되풀이하게 될 말은 그 시대보다 더 부패했던 시대는 없었다는 것을 시사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방으로 죄악의 음행에 둘러싸여 있는 노아는 전혀 그런 죄악에 오염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시종 변함이 없이 일관하는 놀라운 생활의 모범이 되고 있었던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런 풍습이 얼마나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었는가를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악한 자들 가운데서 거룩한 생활을 하며 그들의 죄악에 말려들지 않기 위하여 피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없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아마 그 당시에는 ‘우리가 늑대들 가운데 있으며 우리도 또한 그렇게 울부짖으며 늑대와 같이 살아야 한다’ 고 하는 악마의 속담을 입에 담지 않은 자들은 백명 중에 하나도 찾아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더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인 관례에 근거하여 자기들 나름대로 한 규칙을 설정해 놓고 일반적으로 대중들이 받아들이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합법적이라고 판단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의 독특한 도덕성은 여기서 잘 묘사되고 찬사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사실을 본 우리는 비록 전 세상이 멸망을 향해서 줄달음쳐 가지만 우리가 해야 될 일을 분명히 지시 받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현재 사람들의 도덕이 그와 같이 부패되었으며 생활의 모든 방법들이 너무도 혼동되어서 청렴 결백이라고는 찾아보기가 힘들게 되어 있는 시대라고 할지라도 그래도 노아 시대에는 더욱 더 사악하고 무서운 혼동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한 모임이라고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노아를 제외하고는 거룩을 추구하는 자는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노아가 그렇게 온 세상이 부패해 있는 상태에서 그리고 그토록 끊임없이 격렬하게 죄악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이기고 버티어 낼 수가 있었습니다. 만약 오늘날 우리가 그와 같은 견인불발의 마음으로 수없이 많은 악의 장애물들을 견디어 내면서 올바른 노선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전혀 우리에게 변명할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모세가 ‘시대들’이라는 말을 복수로 사용하여 보다 충분히 노아가 불요불굴하며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전투적인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묘사하고 있다는 것은 가능성이 없는 말은 아닙니다 수세기를 걸쳐서 노아는 전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지조를 지키며 살았던 자였습니다. 그 외에도 그가 취하고 있는 의를 계발하는 방법이 본문의 문맥에서 설명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말입니다. 그 표현은 모세가 이전 장에서 거룩한 조상 에녹에 대하여 설명할 때에 사용했던 말이기도 한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표현입니다.
이전 장에서 우리는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도덕의 부패가 이 지구상에서 극대화 되었을 때에 만약 노아가 인간과 관계를 맺고 그 인간들을 존경의 대상으로 삼았다면 그는 틀림없이 헤어날 수 없는 깊은 미궁에 던져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아가 오직 하나의 치료책으로 보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그의 모든 사상을 완전히 하나님에게만 고정시키기 위하여 그리고 그분만이 그의 생애의 전적인 결재자로 삼기 위하여서는 인간을 상관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사실에서 생각해 볼 때에 카톨릭교도들이 우리는 반드시 신부들을 따라가야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미련한 짓인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로 우리를 인도해 가는 것외에는 성령님께서 인간들의 모방에서 뛰쳐나오라고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고 계시는데 그들은 그런 어리석은 주장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다시 노아의 세 아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노아 자신이 거의 소멸될 가장 침통한 슬픔 가운데서도 그는 자손을 가져서 하나님이 그분 자신을 위하여 씨로 삼으실 소수의 남은 자를 갖게 할 수가 있었다는 사실을 제시해 주려는 목적에서 이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노아에게 베푸신 은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3. 본문 11-12절은
“⑪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한지라
⑫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패괴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함이었더라” 입니다.
1) 이 11절 전반부에서 모세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망령되게 멸시하는 것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에 세상에는 전혀 진정한 종교라고는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모든 공평성은 말살됐습니다. 모든 인간들은 한결같이 죄를 짓는 데에 몰두했습니다. 본문에는 사실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2) 그리고 11절의 두 번째 부분에서는 압박 당하는 사람과 그 당시에 팽배해 있는 사기와 남을 해치는 것들과 약탈과 그밖에 모든 종류의 죄악들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모두가 불경건의 열매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하나님을 배신하고 대항할 때 그들 자신들 가운데서 우선적으로 상호간의 공정성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오직 그들이 향하여 나아가는 것은 미친 사람과 같은 광포성과 약탈과 기타 모든 종류의 압박들입니다.
3) 본문 12절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다시 선포하시기를 하나님께서 이 사실을 ‘보셨다’고 하십니다.
이 같은 표현방식은 우리에게 그분의 오래 참으심을 보여주시기 위한 말씀입니다. 여기서 “땅”으로 표현된 세상이란 말은 바로 세상에 사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설명이 곧 따라 나옵니다.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함이었더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노아와 그 당시 사람들을 구별하는 표현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