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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의 아들 시몬아 내 양을 먹이라(3)
나를 찾아오시는 하나님
배의신 목사
** 들어가는 말
해마다 돌아오는 성탄의 계절입니다. 사람들은 같은 일이 주기적으로 반복되면 습관적인 행동을 하게 됩니다. 성탄절도 마찬가지로 어릴 때는 성탄절이 다가오면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고 무엇인가를 기대하기도 하면서 설렘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계속적으로 반복이 되면서 사람들은 ‘그러려니’하는 마음으로 바뀌면서 습관적인 행사로 대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은 시간이든지 일이든지 반복이 된다고 하더라도 똑같은 것은 없습니다. 설령 매일 반복이 된다고 하더라도 시간도 다르고, 환경도 다르고, 상황도 달라집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오늘이라는 시간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날이며 새로운 기회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매일 주어지는 반복되는 일을 하더라도 우리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날, 새로운 일, 새로운 기회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3:13절에서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지금’ ‘현재’라는 시간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2019년 성탄절을 맞이하는 우리는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새롭게 받아들이며 감사하며 기뻐해야 합니다. 비록 세상 사람들은 성탄절을 몽환적인 분위기를 즐기며 자신들의 기쁨을 추구하겠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마음에 성탄절의 의미를 새롭게 일으켜야 합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본문말씀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숫가에 찾아오셨을 때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자 제자들은 두려웠고, 생계를 위하여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셨고, 갈릴리에서 다시 만날 것을 미리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믿지를 않았습니다. 일곱 제자들이 갈릴리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을 때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곳으로 찾아오셨습니다. 빈 그물로 허탈하게 돌아올 제자들을 위하여 예수님은 그 새벽에 해변에서 불을 피워두셨고 아침식사까지 준비해 두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3년 전에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 형제들을 제자로 부르실 때에 행하셨던 이적을 다시 한 번 보이셨습니다. 빈 배로 돌아오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말씀대로 순종하여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큰 물고기 153마리를 잡았습니다. 이 제자들은 아마도 3년 전에 자신들이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상황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앞 12절에서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고 했습니다.
미안함과 부끄러운 마음에 제자들은 말없이 아침 식사를 했습니다. 그 때 침묵을 깨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느닷없는 질문에 베드로는 무척 당황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직전에 베드로는 ‘자신은 결코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 했었지만 불과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모른다고 부인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잖아도 이 사실이 기억나서 고개조차 못 들고 있을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하셨으니 얼마나 무안했겠습니까! 베드로는 “주여,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며, 예수님께서 물으신 그 ‘아가페’ 사랑이 아닌 ‘필레오’ 사랑으로 대답했습니다. 아가페는 ‘대가없는 무조건적인 헌신적사랑’이며, 필레오는 ‘가족이나 형제간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일이 세 번 반복되었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는 예수님께서 필레오 사랑으로 물으셨습니다. 그리고는 훗날에 있을 베드로의 상황까지도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님께서 상하고 낙심한 사람들에게까지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대하게 됩니다.
※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찾아오십니까?
■ ‘파파파노의 크리스마스’라는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러시아의 한 작은 마을에 ‘파파파노’라는 착한 구두 수선공 할아버지가 살았습니다. 어느 크리스마스 전날이었습니다. 그는 잠이 들었는데 꿈에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내일 크리스마스에 할아버지를 방문하고자 합니다.” 잠이 깨었을 때는 눈 속에서 솟아오르는 찬란한 태양이 밝게 비치는 크리스마스였습니다. 예수님의 방문을 약속 받은 할아버지는 크리스마스 때만 특별히 쓰는 커피 주전자를 난로 위에 올려놓고 구둣방을 깨끗이 청소하고 예수님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밖을 내다보니 청소부 외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는 길 건너편을 향해 “이리 들어와요. 추운데 몸이나 녹이고 커피라도 들어요.” 청소부는 너무나 좋아서 빗자루를 던져두고 언 몸을 녹이고 커피를 마셨습니다. 점심때가 되어도 예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대신 한 누더기 옷을 입은 여인이 홑이불에 어린 아이를 싸들고 걸어옵니다. 노인은 측은하여 그를 가게 안으로 들어오게 했습니다. 무심코 아기의 발을 보니 빨갛다 못해 파랗게 얼어 있었습니다. ‘아기가 신발이 필요할 텐데. 쯧쯧.’하면서 어젯밤 보았던 조그마한 신발을 신겨보았습니다. 신기하게도 꼭 맞았습니다. 아기와 여인은 행복한 듯 미소를 지었습니다. 겨울의 해는 빨리도 넘어갑니다. 이미 땅거미가 깔리기 시작했습니다. 저녁준비를 위해 올려둔 스프와 빵이 데워지고 있을 때 한 무리의 거지들이 나타났습니다. 늘 하던 대로 할아버지는 그들에게 자신이 먹을 스프와 빵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거지들은 모처럼 성탄절에 행복했고 파파파노는 기뻤습니다. 그러나 결국 저녁이 되어도 예수님은 오시지 않자 할아버지는 의자에 털썩 주저 않았습니다. ‘결국 꿈이었단 말이지. 혹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놓쳐버렸나!’ 이때 갑자기 어디선가 “파파파노 할아버지, 나를 보셨지요?” 꿈속에서 들었던 예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어디 계십니까?” 묻자 “나는 오늘 할아버지 가게에 세 번이나 방문하였지요. 한 번은 청소부로. 한번은 아기를 안은 누추한 여인으로. 한 번은 거지로 말이에요. 나에게 베푸신 따스한 사랑. 정말 감사했습니다.”
예수님의 이야기에는 언제나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찾아오시는 모습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기억해야 하는 성탄절의 의미는 ‘인간을 찾아오신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14절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하나님을 떠나 죄로 인한 고통의 삶을 사는 인생들에게 평안과 쉼을 주시기 위하여 창조주 하나님이 피조물의 사람의 형상으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5:16절입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파파파노 할아버지를 찾아오신 주님께서 할아버지로 하여금 아름다운 삶의 열매를 맺게 하신 것처럼, 주님은 우리의 삶에 향기로운 열매를 위하여 우리를 찾아오시고 여러 모양으로 만나주십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신들이 꿈꾸었던 그리스도의 왕국의 꿈이 무너지자 실망과 좌절감으로 인생의 패잔병처럼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약속을 저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마태복음 26:31-32절입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고 하셨습니다. 실망과 좌절감으로 다시 예전의 삶으로 돌아간 베드로와 다른 여섯 제자들은 생계를 위하여 다시 그물을 잡았습니다. 밤새도록 그물질을 했지만 고기는 없었습니다. 그렇잖아도 마음이 슬프고 무거운데 고기마저 잡히지 않았으니 얼마나 허탈했겠습니까! 제자들은 ‘지금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고 살아나셔서 그 실망과 좌절로 허탈한 제자들을 위하여 숯불을 피워두시고 따뜻한 음식까지 준비하셨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지금의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서 실망하고 계획한 뜻이 이루어지지 않아 좌절하고 허탈할 때에 주님께서 우리의 삶을 아시고 따뜻한 사랑으로 준비해 두신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삽니다. 하지만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형편과 처지를 아시고 미리 준비해두십니다.
그런데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4:27-29절을 봅시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라면 내가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 이제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은 우리가 세상의 환경 때문에 염려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도록 약속하신 것입니다. 다만 우리에게는 나를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진정으로 신뢰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우리에게 장래의 일들을 미리 알려주신 것은 그런 일들이 일어날 때에 ‘주님께서 이 일을 하시는구나!’라고 믿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약속을 믿고 신뢰한다면 반드시 이루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나를 찾아오시는 주님을 주의 깊게 살피며 기대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물으셨던 그 물음을 봅시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왜 베드로에게 이렇게 물으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요한복음 14:23-24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을 듣고 지킬 것입니다. 베드로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할 때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주님의 일도 소홀히 할 것이며, 당연히 주님께서도 일을 맡기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할 때에 우리에게 일을 맡기시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도 부어집니다. 주님께서 나를 찾아오시는 것은 나에게 주님의 일을 맡기기 위함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는 종교에서 어떤 교주나 우상이 먼저 사람을 찾아왔다는 곳이 있습니까? 세상의 모든 비방 종교는 모두가 사람이 신을 찾아갑니다. 그러나 사람이 만든 우상이나 스스로 신이 된 인간은 이사야 46:6-7절 말씀처럼 어떤 도움도 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주머니에서 금을 쏟아내며 은을 저울에 달아 도금장이에게 주고 그것으로 신을 만들게 하고 그것에게 엎드려 경배하며 그것을 들어 어깨에 메어다가 그의 처소에 두면 그것이 서 있고 거기에서 능히 움직이지 못하며 그에게 부르짖어도 능히 응답하지 못하며 고난에서 구하여 내지도 못하느니라.”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불교인이 부처를 찾아가서 자신의 어려운 형편을 하소연하며 자신을 도와줄 것을 호소했습니다. 그러자 부처는 ‘인간의 모든 고통은 전생의 업보이며 욕심으로부터 오는 것이니 고행을 통하여 마음을 비우라.’고 했습니다. 이 불교인은 아무런 해결도 주지 않고 도움도 되지 않는 부처의 가르침에 실망했습니다. 그가 교회를 찾아와서 목사님께 자신의 형편과 처지를 말하며 ‘하나님이 자신을 도울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목사님은 마태복음 11:28-30절을 읽어주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그러면서 목사님은 요한복음 6:65절의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는 말씀을 보여주면서 ‘하나님께서 당신을 부르셔서 여기 오셨으니, 하나님께서 당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불교인은 그날로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성탄절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나를 찾아오신 날입니다. 이번 성탄절에는 나를 찾아오신 주님을 생각하며 진정한 감사를 합시다. 그리고 파파파노 할아버지처럼 내 생활 속에서 찾아오시는 주님을 기쁘게 섬기는 삶을 통하여 우리를 부르러 다시 오실 주님을 기쁘게 기다리는 행복한 삶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까
송인설 목사
한 영국 방송사에서 공개적으로 퀴즈 문제를 내었습니다. “런던에서 에든버러까지 가는 가장 빠른 길이 무엇일까요?” 사람들이 여러 가지 답을 엽서로 보냈습니다.
어디까지 자동차를 타고 가서, 어디까지 기차를 타고, 어디서부터 버스를 탄다.
공항으로 가서 비행기를 타고 공항에 내려 택시를 탄다. 아예 헬리콥터로 날아간다.
그런데 그 중에 일등으로 당첨된 것은 이런 답이 아니었습니다.
일등은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여행한다.”였습니다.
상대성 원리에 의하면, 공간이 시간을 지배합니다.
그러나 이 퀴즈에 의하면, 사랑이 시간을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순간적으로 시간을 벗어나게 합니다. 영원의 세계로 빠져들게 합니다.
만추의 계절입니다. 이 맘 때면 사람들은 사랑을 찾습니다. 추운 계절을 따뜻하게 해 줄 사람을 찾습니다. 첫눈에 반하는 사랑을 갈망합니다. 사랑에 빠지는 falling in love의 경험을 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정신분석전문의, 김혜남 박사가 “나는 너를 정말 너를 사랑하는 걸까?”라는 책에서 아주 재미있는 분석을 해 놓았습니다. 우리는 사랑에 빠질 때 아무 조건 없이 그냥 필이 꽂혀 운명적으로 사랑에 빠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김혜남 박사는 모든 사랑은 다 조건적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무의식이 움직여 조건적으로 사랑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이름은 혜수씨. (물론 가명이겠지요.) 29의 나이에 직업은 의상 디자이너. 그녀는 성실하고 의욕의 많아 의류 업계에서 성공했습니다. 너무 바빠 연애할 시간도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같이 입사한 남자 동료와 친해지면서 사랑을 쌓아가고 결혼을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결혼 날짜가 다가오면서 자꾸만 불안해졌습니다. “이게 정말 사랑일까?” 결혼 날짜를 잡아 놓고 사랑을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친구가 결혼을 앞두고 심란해 하는 그녀를 동호회 모임에 초대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구석에 조용히 술을 마시는 왠지 슬퍼 보이는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난생 처음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외의 다른 사람의 말은 들려오지 않습니다. 그가 조금만 움직여도 가슴이 같이 움직였습니다. 그가 희미하게 미소만 지어도 가슴이 시려왔습니다. 내성적이고 수줍어하는 그녀가 어느새 그에게 말을 걸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만나, 사랑에 빠져, 파혼을 하고, 그와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부터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그는 열등감이 많아 콤플렉스가 작용하면 직장을 옮겼습니다. 그리고 직장을 그만두고 온 날이면 어김없이 조용하고 슬프게 술을 마셨습니다. 이제 그녀는 혼란스러웠습니다. ‘아니, 내가 저 모습을 보고 첫눈에 반했단 말인가?’
힘든 결혼 생활을 참다못해 혜수씨는 상담가를 찾았습니다. 상담을 받는 도중 그녀는 스스로 남편의 모습 속에서 예전의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외항 선원이어서 자주 집을 비웠습니다. 아버지는 바다에서 거친 파도와 싸우고 동료들과 힘들게 부대끼다가 집에 돌아오면 어김없이 조용히 슬프게 술을 마셨습니다. 그녀는 아버지를 항상 그리워했지만 정작 아버지와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저 술을 자시는 아버지의 쓸쓸한 뒷모습만 물끄러미 쳐다볼 뿐이었습니다.
김혜남 박사는 이렇게 분석했습니다. 혜수씨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해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싶은 갈망이 있었다. 그러다가 조용히 술 마시는 남편의 모습 속에서 아버지를 발견했다. 그래서 한 눈에 남편에게 반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있던 무의식이 작용한 것이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남편을 사랑하게 만든 것이다. 그것은 운명적 사랑이 아니라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일어난 조건적 사랑이었다.
무슨 말입니까? 인간은 사랑 없이 살 수 없으나, 인간의 사랑에 문제가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에는 너무 자기 사랑의 측면이 많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고 살도록 창조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하고 난 후 인간의 사랑은 너무 변질되었습니다. 자기애적 요소가 너무 강합니다. 나를 위해서 그 사람을 사랑합니다.
성경의 중심 주제도 사랑입니다. 어느 날 한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질문했습니다. “율법의 계명 중에 어느 계명이 큽니까? 가장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나”(마 22:37-40)
저는 20대 때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 열심히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깨닫는 데도 오래 걸렸습니다. 30대 때는 목사가 되어 교회를 섬기며 사람들을 사랑하는 데 열심을 내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필요를 잘 채워주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잘 안되었으나 노력은 했습니다. 이제 저는 40대입니다. 40대 중반이 된 지금, 저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구하고 있습니다.
요즘 가끔 주께서 묵상 중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보다 신학을 더 사랑하는 구나. 신학이 너의 우상이구나. 너는 나보다 교회를 더 사랑하는구나. 교회가 너의 우상이구나. 그러면 저는 화들짝 놀랍니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의 요즘 묵상의 주제는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까?’입니다. 아직 사람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는데, 나처럼 사랑에 무능한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나? 참 고민이 됩니다.
그 날도 저는 운전을 하며 찬송을 흥얼거리고 있었습니다. 사거리에 빨간 불이 들어왔습니다. 핸드 브레이크 채우고, 눈을 감고 습관적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찬송 가사에 그런 내용이 있었어요. 그런데 문뜩 이런 생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사랑하는 것이 뭐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지?’
저는 신앙에서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하나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뭐예요?’ ‘하나님 어떻게 사랑받고 싶으세요?’ 물론 항상 대답을 듣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계속 묻고 기다리고 있으면 하나님 말씀이 떠오릅니다. 그러면 성경 말씀을 찾아봅니다. 그 후, 제게 생각난 말씀은 요한복음 21장 15-18절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베드로가 6명의 다른 제자들과 함께 디베랴 호수에 물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 밤새도록 한 마리도 못 잡았는데, 예수님 말씀대로 배 오른편으로 그물을 던지고 153마리의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조반을 먹은 후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질문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예수 그리스도는 다른 사람들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베드로는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사랑해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했듯이,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 사랑은 우상에 대한 거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랑에 대한 과격한 거절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두 번째 질문을 하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번에는 비교의 대상이 없습니다. 그냥 주님을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베드로는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 사랑은 말 그대로 하나님 자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저는 때때로 하나님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더 사랑합니다. 하나님이 제게 주신 지식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제게 주신 지혜를 사랑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하나님이 주신 사업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지는 않으십니까?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인격 자체, 하나님의 성품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당신만 있으면 됩니다.’ 그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이 세 번째 질문을 하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세 번째 질문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주님은 아가파오 동사를 써서 아가페 사랑을 할 수 있느냐고 물으셨고, 베드로는 필레오 동사를 떠서 필레오 사랑밖에 못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주님이 베드로에게 “네가 필레오 사랑을 할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근심하면서 대답했습니다. “주님 모든 것을 다 아시지 않습니까? 내가 주님을, 필레오 사랑을 하는 줄 아시지 않습니까?”
저는 이 세 번째 질문과 대답이 참 좋습니다. 필레오 사랑이 참 마음에 듭니다. philosophy가 무엇이지요? 예, 지혜에 대한 사랑입니다. philharmony는 음악에 대한 사랑입니다. philanthropy는 인간에 대한 사랑 즉 박애 정신입니다. 마찬가지로 philotheos가 가능합니다. 하나님 사랑이 가능합니다.
여러분 아가페 사랑과 필레오 사랑의 차이는 알겠지요? 아가페 사랑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는 사랑이지요. 선인과 악인을 가리지 않고 햇빛을 주시고 비를 주시는 사랑 말입니다. 우리가 이런 아가페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기는 참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도 감히 하나님을 아가페 사랑을 하겠다는 말은 할 수 없었습니다.
필레오 사랑은 친한 사람들 사이의 우정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친구들과 우정을 나눕니다. 마음을 나누고, 뜻을 나누고, 경험을 나눕니다. 그러면서 점점 더 친해집니다. 친밀감을 느낍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이 정도의 필레오 사랑은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도 하나님에 대해 필레오 사랑은 할 수 있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하나님에 대해 필레오 사랑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면 하나님을 필레오 사랑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며 세 가지 정도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계속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간 사이에도 우정이 싹 트고, 사랑이 생기면, 자꾸 마음이 끌립니다. 그 친구 잘 있나 궁금해집니다. ‘열아홉 순정’에서 국화씨에게 한 남자가 이런 말을 하더라구요. “나도 몰라. 자꾸 생각나는 것을 어떻게 하냐? 밥은 먹었는지, 잠은 잘 잤는지, 아프지는 않은지 자꾸 걱정되는데 나보고 어떻게 하란 말이냐?”
나는 하나님 생각이 잘 나지 않는데 어떻게 하지? 이런 분 계십니까? 그런 분들은 의도적으로 하나님께 집중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이것을 하나님 임재 연습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보고 계시는데, 나는 하나님을 잊고 있으니 참 미안하지 않습니까?
둘째,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 옆에 머물고 싶어하는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계속 붙어 있고 싶어하잖아요? 하나님을 바라보며, 경배하며,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바로 예배지요. 혼자서도 예배 드리는 삶이 가능한 이유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약4:8).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됨을 알지어다"(시46:10).
셋째,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도 주께서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 하는 사역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부탁을 거절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친구의 부탁을 거부할 친구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어떤 때는 친구가 부탁하지 않아도 친구가 기뻐하는 일을 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교회 당회에서 결의하고 추진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성전 건축’은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프로젝트입니다. 구제 사역과 기독교 인재 양성 사역은 누가 보아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못해서 한이지, 신앙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동의할 만한 일입니다. 예배가 본래 히브리어로 하나님을 섬기는 ‘아바드’라는 말에서 나왔어요. 주일 예배만 예배가 아닙니다. 삶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이미 예배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분부를 이행하는 것입니다. 높은뜻 숭의 교회 사역을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의 표현으로 감당합시다.
일체은혜 감사
이동규 목사
‘지선아 사랑해’라는 책을 쓴 이지선 자매의 이야기가 지금 장안의 화재가 되고 있습니다.
그녀의 원래 생일은 1978년 5월 24일입니다. 그런데 우연찮은 교통사고로 전신화상을 입으면서 구상일생으로 살아난 잊을 수 없는 날2000년 7월 30일 또 하나의 생일로 지키고 있다고 합니다.
그녀는 보기에도 흉측하게 일그러져 버린 얼굴과 몸뚱아리, 그녀의 처음 기도는 ‘하나님 저 언제 데려가실레요?’ 였습니다. 이렇게 눈물과 절망으로 나날을 보내던 그녀가 주님을 진실로 만나고 주님의 폭포수 같은 사랑을 접하고서는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저 눈에 보이는 대로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등이 아파서 벽에 기대야 했기 때문에
모두 앞으로 나와 예배드리는데도 저는 맨 뒷자리에 있었어요.
그러나 내 마음은 하나님 제일 가까이,
십자가 바로 밑에 엎드리고 있었답니다
다들 찬양하는데 저는 입을 꾹 다물고 있습니다
잇몸이 다 내려앉을 것 같이 당기는 턱 때문에
도저히 입을 벌려 찬양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은 누구보다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게 전부라고 생각지 말아주세요
너무나 못난 얼굴을 갖게 되었지만
예전처럼 예쁘게 화장도 못하지만
이 마음은 그 누구보다 예쁜 것을 좋아하는
스물네 살 여자입니다
그저 눈에 보이는 대로 "쯧쯧쯧..." 불쌍하다 하지 말아주세요
누가 봐도 세상에서 제일 불쌍하고 불행할 것 같은 모습이지만
그 누구보다 마음이 행복한 천국에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외모가 아닌 중심을 보신다는 하나님,
나의 하나님,
나는 그래서 하나님이 더 좋아요
그 누구보다 마음이 행복한 천국에 살고 있다고 서슴없이 말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가장 결핍하고 가장 저주스러운 상황에서 감사의 노래, 행복의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거기에 비해 우리는 사실 너무 가진 게 많아서 탈입니다. 너무 가진 게 많아 불평이 늘어지고 원망이 늘어 졌는지도 모릅니다.
까닭에 하나님의 사랑의 폭포수를 맞고 있는 그대, 하나님의 자녀들은 우선 두 가지에 감사해야 합니다.
첫째는 만남에 감사해야 합니다.
사람은 만남의 동물입니다. 만남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습니다. 만남이 행복하면 그 사람의 삶도 행복합니다. 반대로 만남이 불행하면 생활도 불행해집니다. 불행한 사람들에게 둘러쌓여 있는 나는 불행한 사람이기 때문이지요. 다른 사람들을 저주하면 내 삶도 저주스러워 집니다. 만남을 저주하면 내 삶도 저주스러워 집니다. 까닭에 만남을 축복해야 합니다. 만남을 잘 가꿔야 합니다. 만남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사모님의 지극히 평범한 글이 반향을 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내 인생에서 잘 만난 사람들
내가 누워서 책을 읽고 있는데 초등학교 5학년인 막내아들 사혁이가 엄마방으로 들어오면서 물었습니다. "엄마! 엄마는 인생에서 누구를 잘 만났어요?" 나는 순간 조금 당혹스러웠습니다.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아이를 이불속으로 끌어들이면서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아직 방에 연료를 아끼느라 불을 때지 않고 전기장판만 필요할 때 저녁에 잠깐 씁니다.)
" 음- 엄마는 엄마의 엄마를 잘 만났지.(참고로 내 아버지는 고3때 돌아가심. 그 후 어머니의 격려와 지원이 아버지보다 더 많았다고 생각함)
음~ 그리고 엄마의 남편도 잘 만난 것 같아. 음- 그리고 엄마의 아들인 사혁이도 잘 만난 것 같아. 아들 딸들 잘 만난 것 같아." 여기까지 대화했을 때 나는 막내 아들을 더욱 꼬~옥 껴안아 주었습니다. 아들은 자기도 엄마를 잘 만난 것 같다면서 매우 흐뭇해 하였습니다.
"음- 그리고 엄마의 초등학교 선생님도 잘 만났고 음- 그리고 엄마한테 아버지 같은 목사님들이 계셨어. 그 분들의 격려와 사랑이 생각나는구나."
"아~ 그렇구나. 엄마의 인생에서 잘 만난 사람들이 많구나." 하고 사혁이가 화답했습니다. 난 정말 행복한 사람입니다. 내 주변에는 내 인생에서 내가 잘 만난 사람들이 수두룩합니다. 나는 내 동생들도, 시부모님도, 시동기간들도 모두 잘 만났습니다. 내 인생길에서 잘 만났던 사람들이 한명 한명 생각나고 명단을 작성해보고 싶습니다. 저는 하도 인덕이 많아서 사람을 만나면 얌체같지만 '저분은 나를 무엇인가 도와줄 분'하고 마음속으로 뇌어 보는 버릇이 있습니다.
나도 다른 사람들의 인생에서 잘 만난 사람으로 기억되는 사람이기를 바랍니다.
가슴이 따뜻해지는 글입니다. 난 정말 행복한 사람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만날 때마다 ‘저분은 무언가 나를 도와줄 분’이라고 생각한다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웃음도 나왔지만, 그 마저도 따뜻하게 들립니다. 무언가 만남과 만남을 불평하고 원망하고 소홀히 여기고 살아온 우리네 삶을 깨우는 글입니다.
그렇습니다. 만남을 불평하면 삶이 불평스러워 집니다. 만남을 짜증내면 삶이 짜증납니다. 만남을 저주하면 삶이 저주스러워 집니다. 반대로, 만남을 축복하면 인생이 축복으로 가득찹니다. 만남을 행복해 하면 인생이 행복합니다. 맹구우목(盲龜遇木)적인 만남입니다. 다 필요가 있어 하나님이 붙여주신 만남들입니다.
저는 어릴적 가정형편을 얼마나 원망했는지 모릅니다. 너무 가난했던 시절, 너무 못 배운 부모 밑에 태어난 환경, 그 부모와의 만남을 비관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니 참 멋있는 만남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희 형제는 1남6녀,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날 없지만 저희 집은 불화가 없습니다. 흥부네 집 같습니다. 떵떵거리고 사는 사람이 없기에 서로 위해 줍니다. 서로 지난날이 아쉬워 서로 위해주려고 합니다. 없이 살았기에 싹튼 인정입니다. 또 저의 목회 인생으로 보면 가난한 과거가 참 도움이 될 때가 많습니다. 빈궁에 처할 줄도 알고 궁핍에 처할 줄도 알아 일체의 비결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제가 머슴체질이라고 농담 삼아 말하지만 저는 사실입니다. 먹는 것 입에 잘 안 가립니다. 먹을 게 귀했던 시절 먹는 타령 입맛 타령을 해본 적이 없기에, 아무거나 잘 먹습니다. 없어서 못 먹지 있는데 왜 못 먹느냐 이 식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불행한 만남도 행복의 재료가 되기도 합니다. 그 만남이 환경이든 사람이든 그렇습니다. 전적으로 나에게 달려 있습니다. 만남을 기적으로 생각하고 축복하면 기적의 재료가 됩니다. 반대로 그 만남을 저주로 생각하면 저주의 재료가 됩니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만남은 기적입니다. 기적적인 만남에 감사하십시오.
하나님이 나를 향한 놀라운 작품을 만들기 위해 세밀하게 배치해 놓은 만남들입니다. 기적의 재료들입니다. 까닭에 그 만남들을 가지고 멋진 오케스트라를 연주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위대한 작품이 탄생할 것입니다.
둘째는 기회에 감사해야 합니다.
저는 ‘영상기록 병원 24시’라는 TV 프로그램을 가끔 보는 편입니다.
거기에는 갖은 질병으로, 특히 불치의 병으로 투병하는 사람들의 눈물겨운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일전에는 옥진씨(47)라는 분이 소개 되었습니다. 6개월이 남았다는 시한부 선고를 받은 것은 작년이었고, 지금 1년이란 세월이 흘렀다고 합니다. 더 이상의 치료법이 없다는 절망 속에서 그녀는 1년을 버텨온 것이지요.
그녀는 인공항문 수술을 받았고 또한 소변줄까지 달게 되었고, 현재 옥진씨는 골반부 전체에 암세포가 퍼져있는 상태입니다. 또 임파절에도 암 전이 의심을 보이고 있다 더 이상 현대 의학으로는 쓸 수 있는 방법이 없다며 의료진마저 치료책을 세우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그녀와 남편은 희망을 놓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주목하는 말 한마디는 이것입니다. 그녀가 눈물을 흘리며 말합니다. 사람들은 아주 쉽게 죽고 싶다고 말하는데 그런 사람을 볼 때면 멱살을 잡으며 묻고 싶다는 거지요. 진짜 죽고 싶으냐고? 자신은 언제 죽음이 찾아 올지 모르는 1분 1초를 기약없이 사는데.. 자신은 정말 하루라도 더 살고 싶은데.. 사람들은 정말 이런 상황을 안 당해 봐서 그리 쉬 죽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고.. 그 말이 그리 야속하게 들릴수 없다고.. 마치 배부른 사람들의 투정같아 보인다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목숨이 연장되고 있다는 것. 건강이 주어 졌다는 것, 활력 있게 일할 수 있다는 것. 이 모두가 엄청난 축복이요, 기적인 것을. 우리는 쉬 무시하고 소홀히 하고 막 다루면서 살지 않았나 하는 반성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이 오늘도 우리에게 다시 기회를 주신 것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다시 기회를 주셨어요.
먹을 수 있는 기회, 걸을 수 있는 기회, 숨쉴 수 있는 기회, 일할 수 있는 기회, 사랑할 수 있는 기회, 베풀 수 있는 기회, 나눌 수 있는 기회, 전도할 수 있는 기회, 봉사할 수 있는 기회, 도전할 수 있는 기회, 용서 받을 수 있는 기회..
생각해 보면 엄청난 축복의 기회들이 이렇게나 많습니다. 가진 것 없다고 생각하며 결핍되게 살아 왔는데 이리도 축복이 많군요. 그렇군요. 이제는 목숨 같은 기회, 피 같은 이 기회를 잘 선용해야 겠군요.
베드로는 기회를 감사하며 잘 활용한 사람입니다. 기회를 엄청난 하나님의 선물로 생각한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세번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타락했습니다. 영영 주님을 떠났습니다. 예수님을 저주하고 배반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기회를 다시 주셨습니다. 오늘 요한복음 본문에 보니, 베드로의 배반으로 가슴 아프게 십자가 처형을 당하신 예수님이 다시 부활하셔서 베드로에게 나타나셨습니다.
“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 (15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번이나 물으십니다. 나중에는 베드로가 근심하며 대답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말은 ’이번에는 기회를 잘 활용할 수 있겠지? 다시 한번 기회를 주는 데 이번에는 실패하지 않겠지? 이번에 주는 찬스에서는 승리할 수 있겠지? 이번 기회에서는 빛나는 사역을 할 수 있겠지?‘ 이런 말과 같은 뜻입니다. “내양을 먹이라. 내양을 치라” - 사역하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사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교회의 수장이 될 기회를 주셨습니다. 빛나게 사역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이 기회를 백분 잘 선용했습니다. 베드로는 그 후에도 네로의 박해 때 로마에서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길위에 나타나셔 또 베드로를 각성시키시고 기회를 다시 주셨습니다. ‘쿼바디스 도미네‘ 어디로 가느냐? 로마로 가야지! 다시 한 번 기회를 줄테니 로마로 가거라! 너는 빛나는 사역자가 될 거야!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영화 ’쿼바디스‘에 이 장면이 아주 인상적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그 기회를 잘 할용하여 로마로 다시 돌아가 십자가에 거꾸로 메달려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리고 빛나는 사역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주님은 늘 우리에게 오셔서 기회를 주십니다.
회개할 기회,
도전할 기회,
사역할 기회,
용서할 기회,
화해할 기회,
사랑할 기회
멋있게 살 기회,
말씀의 사람이 될 기회,
거룩할 기회,
오늘도 주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다시 기회를 주십니다.
주님은 기회를 주시러 오십니다.
성경의 인물들이 낙담하고 절망하고 포기하고 타락하고 죄악에 빠질 때마다 주님은 어김없이 오셔서 위로하고 격려하고 희망주고 다시 도전할 기회를 주십니다.
저주중에 가장 큰 저주는 기회를 빼앗아 가는 것입니다.
축복중에 가장 큰 축복은 기회를 다시 부여 받은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기회를 다시 부여 받지 않았나요?
건강의 기회
시간의 기회
가정의 기회
일터의 기회
생명의 기회
사랑할 기회
개선할 기회
도전할 기회
다시 얻은 이 기회를 목숨처럼 활용하십시오.
이 기회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다시 기회를 주신 주님께 감사하십시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김태복 목사
예수님이 부활하신 지 상당히 많은 날들이 흘렀으나 제자들은 아무 변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몇 번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저들에게 못 박힌 손과 발, 옆구리를 보여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또한 의심을 하는 도마의 의문도 풀어 주시고, 혹은 그들 앞에서 구운 생선과 먹을 것을 잡수시기도 하였으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채 시간만 흐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나자 제자들은 ‘그러면 그렇지, 우리 주님이 그렇게 무력하게 십자가에서 실패자로 끝나실 수가 없지 않은가? 이제는 부활하셨으니 아주 놀라운 일들이 전개되리라’라는 기대로 가득 찼습니다. 그러나 하루 가고 이틀 가고 일주일, 이주일이 흘러가도 주님은 바람처럼 나타나셨다가 다시 사라지실 뿐, 아무 역사, 아무 지시도 없으셨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은 대단히 초조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주님은 이제 우리에게 손을 드셨는가? 우리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셨는가? 특별히 그 중에 가장 안절부절한 사람은 베드로였을 것입니다. 그는 대단히 성격이 급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시간을 마냥 허송할 수만 없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잘못한 실수와 지은 죄가 너무 많기 때문에 감히 나서서 “주여, 이제는 무엇을 하리이까? 명령만 하옵소서. 우리는 아골 골짜기와 빈들에라도 가겠나이다.”라고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성급하게 나섰다가는 참고 계시던 주님이 분노를 터트리실지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시몬 베드로야, 네가 어찌 감히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는가? 유월절 만찬 때에 내가 너희에게 ‘오늘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고 분명 예언할 때에 네가 단호하게 나셔서 ‘다 주를 버릴지언정 나만은 주님을 따르겠다’고 뻔뻔스럽게 장담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내 입에 감히 담기도 싫은 말이지만 네가 조그마한 계집종 앞에서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던 자가 아니냐?”
“아, 이제는 너라면 지쳤노라. 그런데 또 성급하게 나서다니, 네 얼굴이 그렇게 두꺼운가?”라고 하실 것 같아 너무나 조마조마합니다. 아니, 차라리 모든 사람 앞에서 공개적으로 야단을 쳤더라면 속이라도 시원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번번이 나타나셨지만 베드로에게 가타부타 아무 말씀도 없으시고 다시 떠나가십니다. 베드로는 마침내 지치고 말았습니다. 주님이 완전히 자기를 단념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이제는 모든 희망이 사라졌습니다. 주님은 부활 승리하셨으나 자기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오늘 3절에 나오는 말씀대로 다른 제자들에게 “나는 고향 바다에 물고기나 잡으러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할 일 없이 시간만 보내던 다른 제자들도 덩달아 따라 일어나서 우리도 함께 가겠다고 나셨습니다. 그 제자들의 이름은 베드로, 도마, 나다니엘, 요한과 야고보, 그리고 또 다른 두 제자 등, 일곱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고기를 잡으러 간 곳은 디베랴 바다였습니다. 이 바다는 갈릴리 바다로 부르기도 하고, 혹은 게네사렛 호수라고 불리는 곳으로 사실은 민물이 사는 호수입니다. 남북의 길이가 약 20.8 킬로로 50리 정도가 되고, 폭은 약 30리 정도가 되는 아주 고요하고 평화로운 호수입니다. 디베랴 바다로 불려진 것은 AD 25년경, 헤롯 안디바가 갈릴리 호수 서안에 도시를 세우고 당시 황제인 티베료에게 경의를 표시하기 위해 도시 이름을 디베랴로 붙임으로 생겨진 것입니다.
그 호숫가에 서면 얼마나 평화로운지, 한없이 앉아 있어도 지루한 줄을 모를 정도입니다. 12년 전에, 오늘 본문이 전개된 곳으로 추정되는 그 호수가 교회 뜰에 앉아서 함께 갔던 일행들과 함께 ‘요한의 아들 시몬아’로 시작되는 복음송가를 감격적으로 부르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 푸른 호수, 평화로이 나르던 갈매기들의 날개 짓, 어여쁜 꽃들이 피어 있던 푸른 언덕들이 기억납니다. 베드로와 그 일행은 이제 영육이 완전히 지친 채 자기들의 고향과 일터로 낙향한 것입니다.
모든 고향 사람들은 이 실패하고 돌아온 베드로 일행에 대해서 아마 냉소를 보냈는지 모릅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을 피하듯 바다에 나가서 밤이 맞도록 그물을 던집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으나 아무 것도 잡히지 않는 것입니다. 매사가 되는 일이 없습니다. 그들은 완전히 지쳐 버린 채 밝아오는 새벽을 맞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닷가 언덕 위에서 누구인가 서서 그들에게 묻습니다.
“애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그 분은 예수님이셨으나 저들은 새벽의 희뿌연 빛 탓인지, 아니면 주님이 여기까지 오시리라고 생각을 못 했는지 알아 뵙지 못했습니다. 아마, 고기를 사려고 온 사람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고기가 없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은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말씀대로 따라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잡히어 그물을 들어 올릴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 순간 지혜가 많은 요한은 예전에 자기들을 부르실 때와 똑같은 방법임을 즉시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주님이시다.”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때로 우리의 삶이 되는 일이 없고 엉키고 상할 때가 있습니다. 바로 그 환난 날이 주님이 가까이 계신 때인 줄 알고 주님을 불러야 할 시간입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져 주리라” 그렇습니다. 고난의 날에 주님은 가장 가까이 계신 줄 알고 주님을 불러야 합니다.
지금 베드로는 심정은 절망 그대로였습니다. 3년 동안 열심히 주님을 따라 다녔으나 결과는 배신자로 낙인이 찍히게 된 입장인데다, 어젯밤은 밤이 맞도록 그물을 던졌으나 아무 것도 잡지 못함으로 무력감에 휩싸이면서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났다. 나는 이제는 영육 간에 완전히 실패자다. 살 가치가 없는 인간이다.’라는 생각으로 차라리 이 바다에 풍덩 빠져 죽고 싶은 심정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에 그처럼 회복하고 싶어 하는 예수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요한이 “주님이시라”라는 말을 전달받는 순간, 베드로는 터질 듯한 감격이 가슴에 차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제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습니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입니다. 베드로는 벗고 있던 겉옷을 입습니다. 그리고 주저할 것도 없이 물 속으로 풍덩 뛰어 들어 언덕을 향해 헤엄쳐 갑니다. 거리는 오십 간 쯤 됩니다. 약 100 미터 되는 거리입니다. 새벽의 바다를 헤치며 주님을 향해 헤엄쳐 가는 베드로의 모습은 갈망 그대로입니다.
그 손의 휘저음은 곧 기도 그 자체였습니다. ‘주여, 여기 큰 죄인이 다시금 주 앞에 나가오니 이 몸을 다시금 용납하시고 품꾼의 하나로도 써 주옵소서.’라는 강한 바램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바로 베드로의 그 갈망, 그 안타까움, 그 불붙는 마음을 새벽의 여명을 안고서 주시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아마 주님은 속으로 울고 계셨을 것입니다. “오냐, 과연 너는 시몬이구나. 내가 너를 찾아올 때마다 네가 내 앞에 엎드려 회개하기를 기다렸는데 너는 죄가 너무 커서인지 눈치만 보고 있더구나.”
“그러나 이제야 네가 내게로 전심을 다해 달려오는구나.” 예수님의 가슴은 탕자의 아버지처럼 눈물로 가득 차셨을 줄 압니다. 그리고 잔치를 배설하시듯이 숯불을 피우시고 음식을 마련하신 후에 지치고 피곤한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와서 조반을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식사를 마친 후에 예수님은 큰 소리로 말씀하시기를 “베드로야”라고 부르십니다. 그때에 베드로의 가슴은 얼마나 뛰기 시작했을까요?
이제는 본격적으로 야단을 맞겠구나. 다른 제자들도 베드로가 배신한 것과 세 번씩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때문에 책망을 듣게 될 줄 알고 모두 고개를 숙인 채 조마조마한 가슴으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주님의 입에서 난데없는 말씀이 나왔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아니, 책망은커녕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니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베드로는 울먹이며 대답합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그러자 곧 이어 주님의 음성이 들리기를 “내 어린양을 먹이라.”라고 하십니다. 드디어 사명을 맡기십니다. ‘주님이 나를 버리지 않으셨구나.’라는 깊은 안도감이 베드로의 감격을 고조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이 무슨 일입니까? 주님이 다시 물 으십니다. “요한의 이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은 내 사랑을 믿지 못하시는가? 베드로는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합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주님은 다시 당부하십니다. “내 양을 치라.” 다시금 사명을 재확인하십니다.
자, 그런데 이번에 다시 베드로를 부르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의 가슴은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왜 세 번이나 물으시는가? 너무나 근심이 되어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합니다.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양을 먹이라.” 성도 여러분이여,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에는 무슨 교훈이 담겨 있습니까? 왜 세 번이나 똑같은 질문과 당부를 하셨습니까? 여기에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l.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원하신 것은 최우선적인 사랑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물으시기를 “요한의 이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였습니다. ‘이 사람들 보다’라는 것은 여기 있는 제자들, 여기 있는 너희 친구들, 이 부근에 있는 아내나 자녀들, 부모나 친척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 사람들 보다’에 해당하는 말은 헬라어로 ‘풀레온 투톤’인데 이를 번역하면 ‘이것들 보다’라는 해석도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네가 이것들 보다’라는 말은 ‘네가 의지하고 있는 이 배나 그물이나 아니면, 너희 재산들보다’라는 뜻이 담기어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을 종합적으로 말한다면 “베드로야, 너는 여기 있는 너의 친구들, 너의 동료들, 너의 식구들, 너의 재산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입니다. 즉 , 가장 최우선 적인 사랑을 원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 로 질문하십니다.
“아무개야, 너는 너의 남편이나 아내, 자녀들이나 재산들, 지위나 생명보다 나를 더 사령하느냐?”라고 하실 것입니다. 그 때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우리는 단호하게 대답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 이 모든 식구들이나 친구들, 이 모든 세상 그 어느 것보다 주님을 더 사랑합니다.” 그렇다고 주님은 자기 외에는 누구도 사랑해서는 안 된다고 결코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남편이나 아내, 부모나 자녀,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문제는 주님보다 더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최우선의 사랑은 드리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장 귀한 사랑을 주님께 드릴 때 바로 그러한 사람에게 귀한 직분을 맡기는 것이요, 또한 우리의 식구, 우리의 생명, 우리의 건강, 우리의 재산도 다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원종수 박사님이 서울의과대학에 입학한지 얼마 안 되어 큰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습니다. 학교 보건소에서 통지서가 날아오기를 폐의 반이 썩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는 폐병에 걸리면 죽는 병인 줄 알았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너무나 낙심이 되어 자살하려고 결심했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고 주의 뜻대로 살려고 했는데 왜 이런 시련을 주시는가? 이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지 않는 탓이라 생각하고, 1965년 5월, 물리과 건물 4층에서 투신자살하기 결심했다는 것입니다. 발코니에 나와 떨어져 죽으려는데 불쌍한 어머니가 생각나서 차마 죽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최후 수단으로 금식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따지는 기도를 하기를 “하나님, 제가 죽으면 하나님 손해가 아닙니까?”라면서 하나님께 전생을 바치는 기도를 하면서 기도할 때에 셋째 날 새벽에 기도하는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갑자기 머리에 시원한 얼음 같은 것이 내려오기 시작합니다. 머리에서 목까지 내려오더니 음성이 들리기를 “종수야, 네 머리는 이제 새것이다.”라는 것입니다. 다시 그 시원한 것이 목을 지나가며 “종수야 네 목은 이제 새 것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가슴도, 배도, 다리도 다 새 것이라는 선언을 하면서 지나가더라는 것입니다. 너무나 신비한 체험인지라 산에서 내려와 엑스레이를 찍었더니 깨끗하게 나아 있었고 흔적들만 남아 있더랍니다. 지금도 원종수 박사는 그 사진을 가지고 다니며 간증한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여, 여러분은 그 어느 것보다 주님을 사랑합니까? 그 어느 것보다 반드시 주님을 사랑하여야 합니다. 그 때에 주님이 강하게 역사 하시는 삶을 살줄로 믿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베드로에게 세 번 물으신 이유는 쓴 뿌리를 완전 제거하기 위하심 입니다.
베드로에게는 결정적인 실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 사건 때에 조그마한 계집종 앞에서 주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 일만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돌아가는 느낌을 금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밤에 잠이 오지를 않습니다. 그 생각만 하면 너무 부끄러워서 어느 누구에게도 나설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베드로의 쓴 뿌리요 열등의식이었습니다.
아마 예수님이 이때에 모든 제자들 앞에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물으시지 않으시고 승천하셨다면 훗날 수제자로서 설교를 하려고 설 때마다 ‘나 같은 비겁자가 무슨 설교를 할 것인가?’라는 자책감으로 힘을 잃을 수도 있었을 것이요, 무슨 일을 할 때에 반대자들이 “당신 같은 비겁자가 무슨 지도자로 나서는가?”라는 비난을 하므로 교회를 어지럽힐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를 아시기 때문에 베드로의 쓴 뿌리요, 올무가 되는 그 사건을 완전히 씻어 주시기 위해서 모든 제자들 앞에서 시좌함을 선포해 주시고 동시에 수제자의 권위를 세워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주석가는 이 장면을 베드로 사도 위임식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탕자 아버지가 모든 종들 앞에서 아들의 잘못을 용서하고 아들의 권위를 세워 주는 깊은 사랑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각자마다 남이 알거나 혹은 알지 못하는 결정적인 실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악한 마귀는 때로 그것을 들추어내면서 우리를 괴롭힙니다. “너는 과거에 이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는가? 그런 주제에 무슨 설교인가? 무슨 주님의 일을 할 수가 있는가?”라고 따집니다. 그 때에 우리는 담대히 물리쳐야 합니다. “이미 그 죄는 다 회개하고 사해졌노라. 물러가라.” 그리고 우리는 주님의 일을 할 때에 이미 회개해 버린 다른 사람의 과거 잘못을 들추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들추어내는 것은 십자가 보혈을 모독하는 행위요, 마귀가 기뻐하는 행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목회를 통해 보는 사실은, 상당히 많은 그리스도 일꾼들이 아주 사소한 실수나 열등의식 때문에 주님의 일을 그르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그것이 바로 쓴 뿌리입니다. 그것을 과감히 제거하여야 합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이여,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가 실수하고 죄를 졌을지라도 다시 오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거듭 물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혹 실수하고 잘못을 범한다 할지라도 다시 부르시는 주님 앞에 나아와 자복하고 회개하므로 주님과의 사랑을 완전히 회복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주님은 자기를 사랑하는 방법은 자기의 양을 치는 것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고 대답을 들으신 후에는 반드시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에게 그 사랑을 갚을 길이 전혀 없습니다. 주님에게 최고급 음식점에서 갈비라도 사드리고 싶어도 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에게 성탄절에 선물을 드리려고 해도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방법을 베드로에게 알려주고 계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어린양을 먹이라”는 것입니다. 어린양은 누구인가 보살피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절대적인 보호가 필요합니다. 어린양이란 앞으로 베드로가 목회해야 될 신자들을 의미하기도 하고 전혀 의지가지가 없는 주님의 소자들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마25:31에서 양과 염소의 비유로 말씀하시기를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자에게 마실 것을 주고 병든 자를 돌보고 벗은 자에게 입히고 갇힌 자를 돌아본 것을 곧 자기에게 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도움이 필요한 자들인 주린 자, 벗은 자, 나그네 된 자, 갇힌 자, 병든 자를 외면하고 박대하는 것은 곧 자기를 외면하고 박대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여, 이 모든 것들보다 주님을 사랑합니까? 그렇다면 특별한 사랑이 필요한 자들인 주님의 어린양, 의지 가지 없는 주님의 소자들을 돌아보십시오. 대부분 많은 신자들은 주님에게 하고 싶은 사랑을 대신 목회자들에게 합니다.
특별한 대접도 하고 때가 되면 선물도 합니다. 그러나 목회자보다 먼저 해야 될 분들은 주님의 어린양과 소자들입니다. 의지 가지 없는 거지 노인이 문 앞에 올 때에 박대하거나 추운 겨울에 육교 위에서 벌벌 떨고 구걸하는 거지들을 보면서 사기를 친다고 핑계하면서 외면하면서도 목회자에게는 비싼 음식을 대접한다고 하면 주님이 잘했다고 하시겠습니까? 또한 목회자들도 그런 식의 대접은 받고 싶지 않습니다. 여러분 주님의 사랑을 갚고 싶습니까? 주님의 어린양이나 소자들을 사랑하십시오.
찬송가 305장 ‘놀라운 주님의 은혜’를 작사한 분은 존 뉴톤 목사인데 그는 어린 시절 매우 불행했습니다. 그 불행이 결국 그를 죄의 온상에 몰아넣었습니다. 그는 청년 시절 한때 선원으로 전전 하기도 했고 방탕한 생활로 인해 온갖 죄를 저지르고 폭력과 싸움을 일삼다가 노예선에 끌려가는 비참한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노예 생활에 시달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고향에 사는 친구로부터 소포가 도착했습니다.
그 소포에는 여러 일용품과 책 한 권이 들어 있었는데 그 책의 이름이 토마스 아켐피스가 쓴 ‘그리스도를 본받아’였습니다.
그는 책읽기 싫어하는 사람이었으나 친구의 성의를 생각하여 억지로 읽기 시작했는데 마음에 폭풍우가 일기 시작했습니다. 칠흑 같이 어두운 심령에 그리스도의 빛이 비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30여 년 간 죄악된 생활을 철저히 회개하고 자복함으로 새사람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문에 모범수가 되어 감옥에서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만의 하나 갚기 위해 39세에 목사가 되어 자기처럼 불행하고 비참하게 사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전력을 다해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됨으로 주님을 향한 사랑을 나타내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여, 여러분은 진정 주님을 어느 누구보다도 사랑합니까? 그렇다면 주님이 맡기시는 어린양을 먹이고 치라. 그리고 오늘도 의지 가지 없는 주님의 소자들이 굶주릴 때에 먹이고 헐벗을 때에 입히고 갇혔을 때에 돌아보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줌으로 주님께 받은 사랑의 빚을 갚는 자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것들보다 더
최응희 목사
오늘 본문의 말씀속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일곱 명의 제자들을 만나시고 있습니다. 그 중에 베드로와 집중해서 대화하시고 있습니다.
1. 헛그물질 하는 베드로
베드로와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로 나아가 밤새도록 그물질을 했지만 처음 예수님을 만나던 그때처럼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던져라" 예수님은 어부가 아닙니다. 그물질을 해 본적도 없는 분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도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했을 때, 순종하여 고기를 건졌듯이, 지금도 오른 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하십니다. 순종하여 그물을 던졌더니 그물을 들어 올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단순히 기적의 말씀 뿐 아니라 주님을 만나 그 삶을 맡긴 자들에게 주시는 풍성한 삶을 말씀하십니다.
때때로 우리는 성경의 방법은 오늘 세상에 안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교회에서만 쓰는 책이요, 듣기 좋은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원리나 세상의 방법은 따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대해서는 내가 더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경적인 방법으로 세상을 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생각해 보게 됩니다. 물고기 잡는 기술이나 방법은 베드로가 더 잘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술이 좋다고 다 고기를 잡는 것은 아닙니다. 인생에 대해서 잘 안다고 인생을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말이 있습니다. 교육학자의 집의 자녀교육이 엉망이고, 윤리학자의 도덕성이 더 형편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꼭 그런 것도 아니고, 약간은 비틀어진 말이지만 지식이 곧 삶은 아니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말입니다. 인생에 전문가는 없습니다. 전문가는 같은 일을 반복적으로 시행해 보아서 실패도 하고, 성공도 하면서 그 일에 익숙한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나 인생의 전문가는 없습니다. 누가 인생의 전문가라고 나설 사람이 있습니까! 누가 인생을 여러 번 살아보았습니까? 누가 자신의 삶 속에서 20대를 30대를 50대를 70대를 80대를 여러 번 경험할 수 있습니까? 인생은 항상 한번의 기회밖에 없는 낯선 시간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전문가는 없습니다. 음식의 달인, 물건 쌓기의 달인은 있는지 몰라도 인생의 달인은 없습니다. 인생의 전문가는 오직 인생을 창조하신 하나님 뿐이시요, 예수님 뿐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내 지식이나, 내 경험이나, 내 생각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의지해서 나의 인생의 푯대를 삼고, 하나님 말씀 중심으로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고기잡이 사건은 예수님 없는 삶의 헛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 없이 산 인생은 스스로는 계속해서 무엇인가 노력하고, 힘쓰고, 살아왔지만 아무 것도 건질 것이 없는 인생과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인생은, 깊은 데 던졌던지, 오른 쪽에 던졌던지 그 삶이 풍성합니다. 진정 주님 말씀에 의지하여 사는 삶은 항상 삶이 풍성합니다. 물질의 축복도 그러하고, 영혼의 열매는 더욱 그러합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삶으로 영육간에 늘 풍성한 복을 받으시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2. 베드로의 믿음을 물으신 예수님
엉뚱하지만 여기서 질문 하나를 드리겠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보물처럼 여기는 것이 있습니까? 물건이든지 사람이든지 무형의 어떤 것이든지, 나에게는 이것이 정말 무엇보다 귀중하다 여기시는 것이 있습니까? 이것이 나의 삶에 ‘가장 귀중한 보물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을 머리 속에 떠 올려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재물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자녀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자신의 과거 경력일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재능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가 겹쳐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들이 나의 보물이다. 떠 올리셨습니까?
만약 지금 예수님께서 여러분에게 오셔서 ‘그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고 물으신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내가 완강히 붙잡고 있는 그것, 그것이 재물이든, 학력이든, 경력이든, 자랑이든, 재능이든, 그것을 보시면서 ‘네가 그것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그렇게 물으신다면 어떻게 답변하시겠습니까? 이것은 삶의 우선순위를 물으신 것입니다. ‘이것들’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순위에 있어서 ‘이것들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삶에는 우선 순위가 있습니다.우리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하나님, 이번 일만 잘되면 주일에 빠지지 않고 예배드리겠습니다’ ‘자녀가 어려서 지금은 힘이 듭니다.자녀를 키울 때까지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것은 인생을 실패하는 삶의 모습입니다.하나님의 축복의 원리를 모르는 생각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태복음6:33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요한삼서1:2
이스라엘아 듣고 삼가 그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받고
네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심 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네가 크게 번성하리라. 신명기6:3
축복에 관한 말씀은 언제나 한결같습니다.네가 먼저 예배 드려라.그러면 너의 삶을 책임지리라“네가 먼저 영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는 삶을 살아라.그러면 내가 너에게 나머지 삶의 일들을 인도하겠다
우리가 영적인 것을 먼저 구할 때 나머지는 하나님이 채워주신다는 말씀이십니다.사업을 책임져 주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아이를 책임져 주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우리에게 시간과 기회를 줄 수 있는 분이 누구입니까?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예를 들어 밥을 짓는 경우를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첫째로 맛있고 좋은 쌀이 있습니다.둘째로 비싼 솥이 있습니다.셋째로 물이 있고, 넷째로 가스레인지가 있다고 합시다.밥을 짓기 위한 모든 재료가 준비되어 있습니다.그런데 물을 부으려고 나중에 솥을 열어보니 쌀이 새까맣게 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물은 붓지 않고 쌀만 불에 올려놓았기 때문입니다. 재료가 없어서 그렇습니까? 아닙니다.재료는 최고급이었습니다.그러나 순서가 틀렸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삶의 순서가 중요합니다.먼저 해야할 것이 있는 것입니다. 인생의 모든 것이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지 않고 말씀 가운데 서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일그러지는 것입니다.하나님만이 우리의 내일을 아시는 분이십니다.하나님만이 우리의 삶을 책임질 수 있는 분이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주님은 그렇게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이 물음은 희랍어로 보면 ‘네가 이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는 뜻이 더 강합니다. (άγαπας με πλέον τούτον; do you love me more than these?) 이 세상 것들보다, 이 육신적인 것들보다, 이 눈에 보이는 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그것이 주님의 물음이었습니다. 세 번씩이나 물으셨습니다. 희랍어 원문으로 보면 주님의 물음과 베드로의 대답에 차이가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희랍어에서 사랑은 세 가지 경우로 쓰입니다. 아가페(αγαπη)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 필로스(φιλος)는 친구간의 사랑, 에로스(ερος) 는 이성간의 사랑,
예수님께서 처음 두 번은 네가 나를 αγαπας(아가파스)하느냐? 고 물으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내가 주님을 φιλω(필로)합니다.’고 대답합니다. ‘네가 절대적인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느냐’ 물었더니 베드로는 ‘예수님을 스승님으로서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그래서 세 번째는 예수님께서 물음을 바꾸셨습니다. ‘그럼 네가 나를 φιλεις(필레이스)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제가 예수님을 φιλω(필로)합니다.’ ‘네가 스승으로 나를 사랑하다는 말이구나.’ ‘그렇습니다, 제가 스승님으로서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예수님은 절대적인 사랑을 물으셨고 베드로는 인간적인 사랑을 고백한 것입니다. 지금 현재로서는 이러한 베드로의 대답이 예수님의 마음에 시원치가 못하셨을 것이지만, 그것이 솔직한 베드로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베드로의 고백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셨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은 후에는 베드로의 고백은 달라졌습니다. ‘예, 주님 제가 주님을 αγαπη(아가페)합니다.’ 바로 이런 베드로의 믿음을 소망 중에 바라보시면서 받아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눈은 항상 그렇게 미래의 눈으로 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도 그렇게 보십니다. 지금 좀 모자라도, 지금 좀 시원치 못해도, 지금 좀 부족해도, 미래의 눈으로 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감히 그 사랑 안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3. 베드로에게 다시 사명을 주신 예수님
베드로의 대답이 예수님의 기대에 못미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① 내 어린양(αρνιον/lamb)을 먹이라(βοσκω/돌보다. 먹이다).
② 내 양(προβατον/sheep)을 치라(ποιμαινω/지키라).
③ 내 양을 먹이라.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처음 만났을 때,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고 이미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고기 낚는 어부로 되돌아간 베드로에게 그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다시 확인시켜주시고 있습니다. 네가 정말 이 세상적인 모든 가치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그렇다면 내 양을 먹이고 키우는 일 그 사명을 잃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이 말씀을 마음 깊이 담고 그 험악하고 열악한 초대교회의 환경 속에서 교회를 세우며 이끌어가는 사명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온 생애를 다 바쳐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였습니다.
‘쿼바디스’라는 유명한 영화가 있었지요? 베드로에 대한 전설을 영화화 한 것입니다. 네로는 새로운 로마를 건축하고자 일부러 로마에 큰 화재를 일으킵니다. 이에 대해 시민들이 불만이 폭발하게 되자, 이 화재의 범인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지목하여 분노의 방향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씌웁니다. 그로인해서 큰 박해가 일어납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죽었습니다. 베드로가 이를 피하여 혼자 로마를 빠져 나옵니다. 도시를 거의 빠져 나왔을 때, 갑자기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베드로가 놀라며 그 앞에 엎드립니다. 그리고 말씀드립니다. ‘쿼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그 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내가 로마로 간다. 네가 내 양들을 버리고 가니, 내가 양들을 돌보러 간다.’ 그래서 베드로가 ‘주여, 그리하지 마옵소서. 제가 가겠나이다’ 다시 돌이켜 로마로 가서 박해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을 격려하며 그들을 돌보다가 결국은 붙잡혀서 거꾸로 된 십자가에 달려 순교 당했다고 하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모두 그렇게 대단한 사명자나 순교자의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사명자로 부르셨습니다. 참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사명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어떤 대단하고 굉장한 일을 해야만 사명자가 아닙니다. 주를 위해서 나 자신을 드리고 나누며 사는 삶이 사명자의 삶입니다. 선교회에 누군가가 잘 참석하지 않을 때, 그저 좇아가서 격려하고 함께 하기를 열심히 권면하는 성도가 있다고 하면 그것이 사명자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교회에 몸이 불편한 사람이 있을 때, 그저 병원이고 가정이고 찾아가서 위로하고 기도해주는 성도가 있다고 하면 그것이 사명자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받을 사랑만이 아니라 나눌 사랑을 가지고 나누는 사람--그 사람이 사명자입니다. 누군들 바쁘지 않을 사람이 있으며, 누군들 자존심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한 영혼을 돌보고, 한 사람을 세워줄 수 있다고 하면, 내 자존심을 버리고 내 피곤함을 능히 이기며 그 일을 감당하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사명자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삶에만 몰두하여 살지 말고 사명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 자신에게 몰두하여 살지 않았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기쁨이 별로 없지 않습니까. 왜입니까? 자기 자신에게만 몰두하여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경력, 여러분의 능력, 여러분의 재능, 대단합니다. 그것이 사명적으로 쓰여지고 있습니까? 값없이 나를 위해 죽어주신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형제자매 된 성도들을 위해서 그렇게 기쁘게 쓰여지고 있습니까? 옆을 보시기 바랍니다. 위를 보시기 바랍니다. 나만 내려다보고, 나의 자존심만 내세우고, 나의 경력만 깃발처럼 들지 말고, 그것이 어떻게 주를 위해, 이웃을 위해, 복음을 위해 사용되고 있는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오늘 우리에게도 진지하게 물으십니다. ‘네가 이 세상 것들보다, 이 육신적인 것들보다, 이 눈에 보이는 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우리가 진심으로 ‘주여, 세상 그 어떤 것보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저의 삶과 생에 있어서 주님이 항상 첫 번째입니다. 그 어떤 것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겠습니다. 주님 주시는 사명 그 무엇이든지 생명을 다해 감당하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하는 참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진정으로 예수를 사랑하십니까
요한복음 21장 15-17절
할렐루야! 오늘은 좋은 날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 있음에 감사한 일이요 좋은 날인 것입니다. 나쁜 일이 있어 상한 마음으로 왔어도 오늘 예배 드리며, 말씀을 들으며 좋아질 줄 믿습니다. 달라질 줄로 믿습니다. "찬양하라 내 영혼아 찬양하라 내 영혼아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찬양하라."
일제시대때 평양시에 새벽 네시 반만 되면 어김없이 대동강의 모란봉에는 하늘을 가르는 듯한 우렁찬 외침이 들려왔습니다. 예수! 천당! 이라는 외침이었습니다. 바로 최권능 목사님이었습니다. 최목사님은 이른 새벽부터 "예수! 천당!"이란 외침으로 시작해서 해가 저물어 사람들이 다 잠들 때까지 잠시도 쉬지 않았습니다. 또한 최 목사님이 "예수! 천당!"이라는 외침을 하지 않을 때는 그 대신 즐겨 부르시는 찬송이 있었습니다.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 우리들은 약하나 예수 권세 많도다"라는 찬송이었습니다. 최권능 목사님이 평양 시내 나가서 전도를 하는데, 일본 헌병 한 사람이 말을 타고 오고 있었습니다. 최 목사님이 전도하고 있는 앞으로 왔을 때 큰 소리로 느닷없이 "예수 믿고 천당"하였더니 이 헌병이 타고 있던 말이 놀래서 펄쩍 뛰는 바람에 헌병이 말에서 뚝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화가 난 헌병은 목사님을 부대로 끌고 가서 매를 때리는데, 한 번 치면 "예수" 두 번 치면 "예수, 예수"하고 세게 치면 크게 "예수" 작게 치면 작게 "예수" 하였습니다. 때리다가 너무도 어이가 없어서 "이봐 목사야 너는 어떻게 건들기만 하면 예수 소리만 나오는가?" 물으니 최목사님은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나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예수만 꽉 차 있기 때문에 건드리면 예수만 나온답니다".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진정으로 당신은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첫째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는 언제나 예수님을 생각하는 자입니다
사랑하는 자를 늘 생각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한 시간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 사랑하는 자는 무엇을 하든지 어디서든지 주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눈뜨고 일어나면서 주여 하고 예수님 생각하고 일하면서도 예수님 생각하게 됩니다. 늘상 예수님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예수님을 닮게 됩니다. 진리가 그를 주장하게 되고 여호와를 앙망하게 됨으로 새 힘을 얻어 독수리 날개치며 올라감 같이 되고 새 힘을 얻게 됩니다. 히브리서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인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또 3절에 "너희는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를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예수님을 사랑하고 늘 생각하면서 사는 자는 자기 스스로 승리케 하고 평화롭게 합니다.
히터는 말하기를 "사람이 아침에 일어날 때 맨 먼저 떠오르는 분이 예수님이라야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날 때 "주여" 할 수 있는 사람이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여러분은 아침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맨 먼저 무엇을 생각합니까?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감사하고 일어나십니까? 아니면 돈이나 명예나 권세를 생각하면서 일어나십니까? 시험과 환난이 많은 이 세상을 살아갈 동안 예수님 한 분으로 만족하고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 떠난 지식, 예수 떠난 사업, 예수 떠난 권세 만족이 없는 것이요, 마지막에는 망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시인이요, 음악가요, 학자요, 부자였습니다. 첩들도 많고 술도 마시고 향락주의로 살았습니다. 이 세상에 솔로몬만큼 하고 싶은 일 다 해보고 살았던 사람이 없습니다. 미국의 대통령 클린턴이나 영국의 여왕도 솔로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전도서 마지막에 말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인생의 최대의 행복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주님을 언제나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주님만 사랑하는 마음으로 현재와 미래에 복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는 기도에 힘쓰는 자입니다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초대교인들은 기도하기를 좋아했습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전혀 기도에 힘 쓰니라" 우리는 기도하는 시간이 짐스럽고 괴로운 것이 아니라 기쁘고 감사해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교통하는 길이요, 성령 받는 방법이요, 승리하는 수단입니다. 기도를 늘 하고 사는 사람은 범죄하지 않고 마귀의 계략에 넘어가지 않고 넘어졌다 해도 승리합니다.
옛날 한국 초기 부흥사였던 이성봉 목사님은 신학생들과 함께 가는데, 느닷없이 소리치면서 "어엇" 하더랍니다. 학생들이 이상해서 "목사님 왜 그러십니까?"하고 물었더니 말씀하기를 "내가 지금 주님의 손을 붙들고 길을 가고 있어요" "어엇 주여 주여"하면서 길을 걷더라는 것입니다. 한 시대의 부흥사로 위대하게 인정받는 주의 종들은 항상 주님의 손에 붙들린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면서 인생길을 자신있고 성공적으로 걸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영, 육, 물질에 있어 이겨내기 힘든 환경에 처하셨습니까? 마음과 눈을 하나님께 고정시키십시오. 힘을 다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으십시오. "기도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일하게 하신다." 이는 바운즈의 말이며,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축복하실 때에 무엇보다도 먼저 기도를 하게 하신다." 이는 메튜헨리목사의 말입니다.
어떤 무신론자의 강연이 있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기도가 응답된다는 말은 환상이요 바램일 뿐, 있을 수 없습니다. 여기에 기도가 응답된다는 분이 있으면 나와 보십시오. 잠시 적막이 흐른 후 한 사람이 나왔습니다. 나는 논쟁하려고 나온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전에 술주정뱅이요, 도박꾼이었고, 걸핏하면 아내를 폭행하므로 가정을 불행하게 만들었습니다. 헌데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난폭하여지고 강퍅한 인간으로 미치광이처럼 살았습니다. 그러나 내 아내는 남편인 나를 위하여 날마다 기도했습니다. 어느 날 내가 술 취하지 않은 제 정신으로 귀가하였는데 아내와 어린 딸이 2층 침실에서 눈물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빠 새 사람이 되어 구원받게 해 주세요 하나님 이 어린 딸의 기도를 들으시고 내 남편을 변화시켜 주시옵소서 순간 저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고, 커다란 응어리가 목구멍에 걸려 숨을 쉴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견딜 수가 없어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 후부터 나는 새 사람이 되어 새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는 여러분이 너무도 잘 알고 계십니다. 기도가 응답되는지, 안되는지는 여러분이 말씀하여 주십시오. 그의 말이 끝나자 모든 청중은 열광적인 박수를 보냈답니다.
하나님이 성도들의 부족하고 연약한 것을 보충해 주시기 위해서 기도를 주셨습니다. 기도를 사랑하는 성도는 매사에 하나님의 능력과 도움을 입게 됩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기도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는 사명을 잘 감당하는 자입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는 예수님이 주신 직분을 사랑하고 사명을 감당합니다. 바울은 그에게 주신 직분을 받고 너무 감사해서 죽기까지 그 직분을 감당했습니다. 전도하다가 돌에 맞아 죽었다고 인정하고 군중이 돌아가고 난 다음에 일어나서 다시 복음 전도에 나섰던 사람이 바울입니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치라"고 하신 사명을 받고 괴로우나 즐거우나 감당했고 마지막에 로마성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순교하기까지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는 일생을 주님 위해서 헌신합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이기에 교회에서 맡기신 직분 주님이 주신 것입니다. 이 사명을 감당키 위해서는 할 말 다 못하고, 쓸 것 다 못 쓰고, 잘 것 다 못 자면서 주님 가신 십자가 길을 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은혜 무엇으로 보답할꼬 하면서 가는 길입니다. 그러나 이 길은 상 받는 길이요, 금생과 내생에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음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스데반이 복음 전하다가 돌에 맞아 머리가 깨지고 코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렸지만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만 바라볼 때 그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처럼 빛이 났고 흔들리지 않는 신앙의 사람이요, 사명의 사람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1837년 미국 노스필드란 곳에 무디가 탄생했습니다. 17세까지 양화점 직공으로 일하다가 19세때 전도자 킴볼이란 사람에게 전도를 받고 예수 믿은 후에 어느 날 설교에서 "하나님은 사명을 위해서 자신 전체를 바칠 수 있는 일군을 찾고 계십니다. 이 가운데 그런 인물이 없습니까? 결심하세요"라는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아 무디는 "오 주여 내가 나의 전체를 주님 위해 바치겠습니다"라고 결심했습니다. 그때부터 무디는 주님의 손에 40년간 붙들려 쓰임으로 백만명이 넘는 많은 영혼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고 그의 생애는 전도자로서 찬란한 생애를 보냈습니다.
오늘 주님이 요구하시고 한국 교회가 요구하는 인물은 주님의 대속의 은혜가 너무 너무 고마워 사명을 가지고 "오 주여 당신의 십자가의 사랑이 너무너무 고마워서 나의 생애를 드리겠습니다. 물질도 드려서 주님을 사랑하겠습니다" 라는 사람들을 주님은 붙들어 쓰시고 축복하시며 그런 사람들을 들어서 교회를 부흥시키고 천국을 확장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내를 사랑하고 가족을 사랑하고 남편을 사랑하고 자식을 사랑하는 사람은 열심히 일하는 사람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족시키는 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예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합니다. 이것이 사명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질문은 이 시간에 우리를 향해서 하시는 질문입니다. 우리에게 주님은 사랑하는 분량을 확인하시고자 묻고 계십니다. 얼마나 섬길 수 있는지, 얼마나 순종할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으셔서 하시는 질문입니다.
당신은 진정으로 예수를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을 언제나 생각하며, 기도에 힘쓰며, 주신 사명을 끝까지 잘 감당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진정 예수를 사랑하는가란 주님의 질문에 자신있게 ‘주님이 아시나이다’라고 고백하며 응답하는 성도들이 되어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사랑을 회복시켜주신 예수님
임덕순 목사
2008년 봄 대심방이 거의 끝나갑니다. 저는 매년 돌아가면서 한 교구씩 심방하는 바람에 성도들의 가정을 2년에 한번 공식으로 방문합니다. 그런데 대심방 불변의 법칙이 있습니다. 심방 받는 가정이 말씀을 사모하면서 노트와 볼펜과 돋보기를 준비해 놓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음식을 준비하는 데에만 신경 쓰다가 막상 예배드리려고 하면 성경과 돋보기를 찾아 헤매는 분이 많다는 것입니다. 오랜만에 담임목사님이 오신다고 집집마다 간식을 정성껏 준비해 주시는 바람에 두 사람이 혼이 났는데, 하나는 전도사님입니다.
전도사님이 간식 준비하지 말라고 당부할 때는 그렇게 한다고 해놓고는 막상 찾아가면 거의 어김없이 간식을 준비해 놓고 있습니다. 그래도 목사님이 오셨는데 어떻게 그냥 가시게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저는 감사함으로 먹었지만 전도사님은 안내와 훈련을 잘 못한 사람이 되어서 날마다 송구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저입니다. 매일 8-10 가정을 심방하는데, 집집마다 간식을 주시고 점심때는 점심을 또 주시니 배가 불러서 그동안 다이어트 한 것이 다 무효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저를 대접해 주신 것에 대하여 너무나 감사합니다. 목사님을 사랑한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니까 주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에, 제가 배가 부르거나 시간이 없어서 많이 먹지는 못했어도 저를 대접하려고 준비하신 모든 분들은 주님을 대접하신 것이므로 주님이 복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저를 영접하지 않은 분들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심방을 받고 싶었어도 부득이한 사정 때문에 안타깝게 심방 받지 못한 분도 있었지만 심방을 아주 부담스럽게 여기고 피한 분들도 있었고, 마지못해서 심방을 받은 분도 보였습니다. 그런 태도는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세가 틀림없습니다. 보이는 목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성경에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사랑하고 주의 종들을 귀히 여기시고, 주의 종을 굳은 사람, 미운 사람으로 여기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일은 서로 믿지 못하고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서 함께 살아가는 일입니다. 부부가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서 함께 살아가는 일은 참으로 불행하고 괴로운 일입니다. 부모와 자식이 사랑하지 않으면서 함께 살아가는 일,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신앙생활을 함께 하는 일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요 괴로운 일입니다.
오늘은 주님께서 사랑이 변해버린 베드로를 어떻게 회복시켜주셨는지를 배우고자 합니다. 요한복음은 믿음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기록된 책인 동시에 사랑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기록된 책입니다. 믿음이라는 말과 사랑이라는 말이 가장 많이 나오는 책이 요한복음과 요한 서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 요한을 가리켜 믿음의 사도요 사랑의 사도라고 부릅니다. 오늘 아침 사랑을 잃어버린 베드로의 모습과 사랑을 회복시켜 주신 예수님의 모습을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 제목은 사랑을 회복시켜 주신 주님입니다.
1. 사랑을 받은 베드로
베드로는 누구입니까? 눅5:에 보면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고기 잡던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시던 장면이 나옵니다. 그날 많은 사람들은 주님이 거기 계시다는 소문을 듣고 주님을 만나려고 몰려들어서 인산인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왜 갈릴리해변으로 가셨는가하면 베드로를 만나기 위해서 가신 것이었습니다. 주님이 그를 찾아가셨습니다. 그날은 마침 고기 한 마리도 못 잡고 밤새 헛수고 하고 빈 그물을 씻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주님은 그의 할 일없는 빈 배를 빌려 타시고 바다에 띄워 강단을 삼아 말씀전하시고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권면하셨습니다. 가장 가까이에서 말씀을 듣던 베드로는 주님이 보통분이 아님을 깨닫고 말씀에 순종하여 밤새 고기가 잡히지 않던 곳으로 다시 가서 그물을 내렸더니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이 잡히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베드로는 예수님이 자기가 담당할 수 없이 크신 분임을 알고 자기를 떠나달라고 애원했지만 주님은 도리어 그를 제자로 삼아 데리고 가셨습니다.
이 사건에서 보듯이 시시한 베드로, 실패한 베드로, 전망 없는 사람 베드로를 주님이 찾아가서 선택하시고 당신의 제자를 삼아주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영광스럽게도 주님의 제자가 되었고, 기독교 역사의 초석을 놓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선택을 입었다는 것은 대단한 축복입니다.
롬 8:30에 보면,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라고 하셨고, 롬 9:11에는 이삭의 아들이 쌍둥이인데 그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하나님의 택하심의 은혜로 에서가 아닌 야곱이 선민의 조상이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그런 은혜는 이스라엘이나 베드로만 아니라 우리도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죽도록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2. 사랑을 배신한 베드로
베드로는 주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 중에도 가장 사랑받은 수제자였고, 예수님이 베드로의 이름도 지어 주셨고 칭찬도 가장 많이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어디를 가나 그를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그래서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현장에도 야고보 요한과 함께 갔던 사람이고, 변화산에서 주님이 구약시대 엘리야와 모세와 담화하는 장면을 목격한 사람 중 한명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바다를 밟고 걸어오시는 그 광경을 보고 자기도 걷게 해달라고해서 주님을 믿고 바다 위를 밟고 걸어보았던 유일한 사람입니다.
그는 그러한 사랑과 경험 때문에 주님이 누구신가를 누구보다 먼저 알 수 있었고, 그래서 주님께 대한 바른 신앙고백을 했던 사람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한 사람은 열 두 제자 중에서 베드로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얼마나 칭찬을 받았었습니까? “이 사실을 네게 알게 한 이는 네 육신의 부모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이제부터 너는 베드로다.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고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맬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그렇게 사랑을 입은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주님 부활의 현장도 가장 먼저 목격한 사람입니다. 부활하시던 주일날 새벽에 그가 무덤을 찾아갔다가 “그는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셨으니 거기로 가서 만나라.”는 천사의 고지를 들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무덤에서 돌아 나오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난 사람입니다.
그는 주님과 자기와의 관계가 끊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생명 걸고 주님을 섬기겠다고 맹세했던 사람입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러 가신다니까 “주여 그리 마옵소서. 절대로 그런 일이 주님께 미치지 못하리이다.” 라고 만류했던 사람이고, “다른 사람이 다 주를 버릴지라도 저는 주를 버리지 않고 죽는데도 함께 가겠나이다.” 라고 맹세한 사람입니다. 그러자 주님은 “네가 아직도 자신을 모르는구나. 네가 내일 새벽닭이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고 말씀해 주셨고, 새벽이 되었을 때, 두려움에 휩싸여 주님을 부인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달려 나가서 통곡하고 후회한 경험도 있는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인간의 약점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팔뚝 같은 장담을 해도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존재라서 주님이 붙들어 주셔야만 믿음도 지킨다는 것, 주님께 기도해야 한다는 것도 아는 사람입니다. 주님이 “네가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내가 기도하였다.”고 하시는 말씀을 듣기도 한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그랬던 그가,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하고도, 주님이 이전처럼 날마다 자기와 같이 계시지 않는다는 것에 실망하고서, 주님께 받은 부탁과 자기가 했던 맹세를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고 예루살렘을 떠나 갈릴리로 가면서 다른 제자들에게 “에라. 나는 물고기나 잡으러 가야겠다.”하고 문을 박차고 나가서 갈릴리고 가버렸습니다.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 앞에서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야겠다.”라고 말한 그 한마디는 주님을 향한 배신의 선언이었습니다. 자기를 위해 생명을 바쳐주신 주님을 향한 사랑의 배신이요, 주를 위하여 죽기까지 하겠다고 맹세했던 사람의 신앙의 배신이었습니다. 그것도 자기 혼자서 조용히 간 것이 아니라 다른 제자 여섯 명을 데리고 갔습니다. 열 한명 남은 제자들 중에 일곱 명이 그를 따라 주님을 떠났습니다. 베드로가 배신을 선동한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사랑을 받은 베드로가 이처럼 철저하게 배신할 수 있습니까?
으뜸제자 베드로가 왜 이 모양이 되었을까요? 몇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 그는 기도해야 할 때에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예수님이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서 기도하라고 말씀했을 때 베드로는 누어 쿨쿨 잠만 잤습니다. 남들 기도할 때 기도하지 않으면 시험에 듭니다.
둘째, 그는 자신을 너무 과신했습니다. 자신을 너무 믿었고 자신을 나타내려는 교만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교만은 패망의 선봉입니다.
셋째, 그는 감정의 기복이 심한 사람이었습니다. 언제는 주님을 위해 죽기까지 하겠다고 맹세하고, 어느 순간에는 차갑게 돌아서는 사람이었습니다.
감정의 변화가 심한 사람은 주님을 따라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넷째, 그는 헛된 기대로 주님을 따랐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사죄와 구원을 주시는 분인데 그는 이 세상의 권력과 영광을 주실 줄로 알고 따랐습니다. 오늘도 주님께 헛된 것을 바라고 주님을 믿는 사람은 언제든지 주님을 배신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한때는 주를 위해서 죽겠다고 나서던 베드로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나서도 주님을 등지고 갈릴리로 가버린 것입니다.
기독교의 2천년 역사가 흘러오는 동안 경험한 바에 의하면 믿음이 좋던 사람이나 사랑이 뜨겁던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서 믿음도 사랑도 포기하고 좌절과 절망에 빠지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향한 사랑이 진실하고 변함이 없으십니까? 전에는 주님을 사랑했고 교회를 사랑하였는데, 요즘은 하나님이나 교회나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관심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까? 전에는 기도만 하려고 고개 숙이면 눈물이 앞을 가렸고 말씀만 들을라치면 어쩌면 그렇게 내게만 말씀하는지 그렇게 은혜가 되어 감당할 수 없이 고마웠는데, 요즘은 기도도 힘이 없고 말씀도 귀에 들려오지 않는 분 없습니까?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떤 분은 IMF때문이라고 하고, 어떤 분은 실직이나 부도가 이유가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대학에 들어가면서 믿음이 식어지고 어떤이는 군대에 다녀와서 신앙 포기했고, 어떤 분은 목사에게 시험 들었다며 믿음과 사랑이 싸늘해집니다. 어떤 이유에서이건, 주님과 교회를 향한 믿음과 사랑이 식어진 분은 여기 없으십니까? 만약 여러분들 가운데 그와 같은 분들이 한 두 분이라도 계시다면, 오늘 아침 설교는 바로 그 한두 분을 위한 설교입니다.
3. 사랑을 회복시키신 주님
주님은 사랑의 배신자인 베드로를 찾아가셨습니다. 그의 배신을 다 참으시고 찾아가셨습니다. 주님을 배신한 베드로는, 제 딴에는 고기나 많이 잡아서 안정되게 살아보겠다고 나섰는데, 그날 밤 그렇게 열심히 그물질을 했지만 날이 밝아오는 시간까지 단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하고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배 오른편에 그물을 내려서 고기를 잡으라고 일러 주시고, 그의 그물에 고기를 가득 몰아 넣어주셔서 가득히 잡도록 해 주신 다음에, 그들이 물 밖으로 나오기를 잠잠히 기다리셨다가, 그들에게 미리 준비하셨던 음식을 먹여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음식을 다 먹기까지 아무 말씀도 안하시고 기다리시다가, 그들이 음식 먹기를 마치자 비로소 입을 열어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본래 이름을 부르신 다음에 "네가 나는 사랑하느냐?"라고 질문하셨습니다. "네가 왜 나를 부인했느냐?"가 아니었습니다. "네가 왜 나를 버리고 여기로 고기 잡으러 왔느냐?"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은 그의 실수와 잘못을 지적하시는 책망이 아니라 사랑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사랑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가출했다가 돌아 온 딸을 붙잡고 엄마가 울먹이면서, "얘야, 너 지금도 엄마 사랑하지?"라고 애타게 묻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 말 가운데는 엄마의 애타는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시몬아, 나는 너를 지금도 사랑하는데, 너도 나를 사랑하지?"라는 애타는 사랑의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이 사랑의 질문가운데에서 베드로는 세 가지 사랑을 확인하고 회복될 수가 있었습니다.
첫째, 베드로는 이 질문 가운데서 자기를 향하신 주님의 뜨거운 사랑을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연인들이 자주 확인하고 싶어 하는 말이 "자기 나 사랑해?" 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사용하신 사랑이란 말은 "아가파스"란 말이었습니다. "아가파스 메" 라는 말은 "너 나를 세상에서 최고로 사랑하지? 너 나를 죽도록 사랑하지?" 라는 의미의 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배신자 베드로를 향해 "너 나를 지금도 최고로 사랑하지?"라고 물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배신자 베드로에게서 사랑의 고백을 왜 그렇게도 애타게 듣고 싶어 하셨을까요? 베드로를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체면도 다 버리고, 그저 베드로의 사랑만을 강하게 확인하고 싶어 하신 것입니다. 그 질문 속에는 "나는 지금도 변치 않고 끝까지 너를 사랑하고 있는데 너도 지금 나를 사랑하고 있는 거지?"라는 애타는 물음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그 주님의 질문 속에서 자기를 향하신 주님의 뜨거운 사랑을 느꼈습니다.
둘째, 베드로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주님의 질문을 듣고 주님을 향한 자신의 사랑이 회복되었습니다. 사랑을 받을 때 사랑이 회복됩니다. 나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끈질기고 뜨거운가를 확인할 수 있다면, 차갑게 돌아앉은 사람의 마음에도 주님을 향한 새로운 사랑이 살아날 것입니다. 주님의 질문을 듣던 베드로는 자기 가슴 속에서 주님을 향한 사랑이 뜨겁게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사랑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고 쌍방적입니다. 사랑은 주고받는 것입니다. 주님이 베드로를 그토록 사랑하시는 것을 느꼈을 때, 베드로의 마음속에도 주님을 향한 사랑이 회복되었습니다. 그 사랑이 너무 고맙고 너무 감격스러워서 그분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떨리는 마음과 지극히 겸손한 마음으로 이렇게 자기의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주여, 그렇습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향한 자기의 사랑을 회복할 수가 있었습니다.
셋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주님의 질문은 베드로의 마음속에 양 무리를 향한 사랑을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의 질문은 "내 양을 먹이라"는 분부로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그의 사랑이 회복되었다면, 그것은 말로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실천으로 나타나야 했습니다. 그래서 “내 양을 먹이라.” 라는 말씀을 세 번씩이나 반복 반복하여 그의 뇌리에 심어주셨습니다. 사랑은 추상적인 감상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세 번씩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고, 그가 대답할 때마다 ‘내 양을 먹이라’ 하신 것은, 세 번 씩이나 주님을 부인하고 맹세하고 저주하기까지 하면서 주님을 배신했던 베드로의 지난날의 실수들을 깨끗이 용서하셨다는 것과, 그에게 당신이 사랑하시는 양 무리를 맡기신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말씀을 듣던 베드로는 다짐 했을 것입니다. “이제 다시는 주님 사랑을 배반하지 않으리라. 이제 주님을 향한 나의 사랑을 주님의 양 무리에게 실천해서 주님을 향한 나의 사랑을 증명해 드리리라.” 그래서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라고 한 대답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낙심하고 시험에 들어서 한 동안 주님도 떠났고, 양 무리도 떠났었습니다. 그런데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 양을 먹어야 한다."라고 가르쳐 주시는 말씀으로 베드로의 가슴 속에는 주님을 향한 사랑만 회복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양 무리를 향한 사랑도 회복되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미래에 관한 예언까지 말씀 해 주셨습니다. 18절을 보면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지만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가리라.”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과거에는 네 마음대로 나를 부인하고 양 무리를 버리는 배신자의 길을 걸었지만, 앞으로는 나와 내 양 무리를 위해서 생명을 버리며 사랑하는 순교자가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은 잘 죽는 일입니다. 베드로는 이제 주님과 양 무리들을 위해서 살다가 주님과 양 무리들을 위해서 죽는 영광스러운 죽음을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처럼 주님을 증거하고 성도들을 보호하다가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하였습니다. 주님이 오셔서 베드로를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만 회복된다면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시간에도 믿음의 회복이 필요한 사람과,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의 회복이 필요한 사람과 소망이 회복되어야 할 사람들을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에게도 이 믿음과 사랑을 새롭게 부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좌절과 절망에 빠져 있는 분들이 있다면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부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4. 사랑의 경쟁력을 요구하신 주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라는 주님의 질문은 그를 향한 자신의 사랑의 고백이요, 베드로의 사랑을 회복시키는 말씀이었지만, 또 하나 중요한 내용이 들어있는 말씀입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말씀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네가 여기 있는 이 사람들을 더 사랑하냐, 아내면 나를 더 사랑하냐” 하시는 질문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너는 네 이웃이나 네 자식이나 네 재산이나 네가 좋아하는 것들을 더 사랑하느냐, 아니면 그런 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당연히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 주님을 더 사랑한다고 대답할 수 있어야 회복된 성도입니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이 전에 즐기던 세상일도 주 섬기는 내 맘 뺏~지 못해” (94) 이렇게 제대로 된 신앙과 사랑을 고백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다른 하나는, “여기 네 곁에 있는 요한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더 강하냐? 여기 일곱명중에서 네가 가장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는 질문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자면 “네가 믿음의 경쟁력, 사랑의 경쟁력을 가지고 있느냐?”는 질문이십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신앙의 경쟁력, 사랑의 경쟁력을 가지라고 요구하십니다. “돈 버는 일, 권력 잡고 이름 내는 일에는 남에게 지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치면서, 왜 남보다 신앙생활 잘해볼 생각은 하지도 않느냐, 직장에서는 남보다 뒤지지 않으려고 그렇게 애를 쓰면서 남들이 열심히 교회봉사하고 충성해도 아무런 감각도 없이 교회만 왔다 갔다 하지 말고, 너희 교회에서 네가 신앙생활 가장 잘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런 신앙의 경쟁력 좀 가져봐라.” 하시는 분부입니다.
내주 되신 주를 참사랑하고 곧 그에게 죄를 다 고하리라. (315)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내 평생에 힘쓸 그 큰 의무는 주예수의 덕을 늘 기리다가
숨질 때에 까~지 내 할 말씀은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사랑의 경쟁력을 가지라는 주님의 분부에는 이 찬송과 같이 고백하십시다.
사랑을 회복하고 사랑의 경쟁력을 가진 성도가 됩시다. 사랑만 회복된다면 우리에게 회복되어야 할 문제들은 주님께서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주께서 아시나이다
곽선희 목사
전 미국 대통령이었던 지미 카터가 쓴 책 중에 '살아있는 신앙'이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 중에 지미 카터가 한평생을 지향했던 그의 좌우명이 나옵니다. 그의 좌우명은 이렇습니다. "왜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가……. 이 좌우명을 선택하게 된 사연이 있습니다. 그가 해군장교가 되기 위하여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임관 바로 직전에 그 유명한 해군 제독 릭오버 제독과 함께 면담할 기회를 가졌었답니다. 제독께서 이 젊은 사관에게 전술에 대하여 전략에 대하여 혹은 군인의 자세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질문을 했습니다. 이 젊은 사관은 땀을 흘리면서 벌벌 떨며 대답을 했습니다. 얼마 이야기한 후에 화제를 좀 부드럽게 바꾸면서 말씀하기를 "공부는 재미있었는가? 성적은 어땠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지미 카터의 성적이 괜찮았었답니다. 그래서 자신감을 가지고 점수와 등수를 말씀드렸습니다. 제독께서는 다시 물었습니다. "그 성적이 자네가 최선을 다한 결과인가?" 하고 물었습니다. 카터는 식은땀이 났습니다. 벌벌 떨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최선을 다했는가?" 그는 두려운 마음으로 대답했습니다. "글쎄요. 최선을 다했다고야 말씀드릴 수 없겠지요." 그때 제독은 무섭게 쏘아보며 다시 질문을 합니다. "왜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가?" 대답을 못했습니다. 제독은 다시 물었습니다. "왜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가, 라고 묻고 있는 않느냐?" 그는 더더욱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다시 생각했습니다. 최선이라는 게 뭡니까? 최선이란 집중하는 것을 말합니다. 얼마나 집중적으로 딴 생각 없이 내가 하는 일에 온 마음과 정성을 쏟았는가? 얼마나 그 하는 일을 즐겼는가? 혹이라도 불평하던가 원망하던가 불만스럽게 생각하면 그건 최선이 아니죠. 얼마나 하고있는 일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즐겁게 생각하고 했느냐. 또 주어지는 기회마다 감사한 마음으로 했느냐. 혹이라도 원망하는 마음이 그 속에 있으면 그건 최선이 아니죠. 얼마나 충만히 감사했느냐. 시간에 대하여 건강에 대하여 지식에 대하여 기회에 대하여 주어진 능력에 대하여 얼마나 최선을 다했느냐? 그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너무나도 최선과는 먼 거리에 살았기 때문이요. 그는 다시 생각을 했답니다. 내가 인생을 다 살고 나서 주님 앞에 서는 날, 주님께서 내게 물으실 겁니다. 너는 왜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가? 그 두려운 질문이 가슴에 꽉 차게 들어왔습니다. 여러분, 업적이나 실적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성적이 좋으냐 나쁘냐 몇 등이냐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문제는 얼마나 최선을 다했느냐 하는 것이죠. 이것이 인생을 질적으로 평가하는 것입니다. 양적으로 묻고 있지 않아요. 질적으로 묻고 있는 거예요. 최선을 다했느냐? 왜 최선을 다하지 않았느냐? 여러분 주님 앞에 가서 우리가 내놓을 수 있는 대답이 무엇이겠습니까? 주님 앞에는 실적이나 업적은 아무 상관이 없어요. 문제는 주어진 현실 여건 속에서 내가 얼마나 최선을 충성을 사랑을 다했느냐, 그것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께서 질문하시는 아주 엄숙하고 중요한 질문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묻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베드로가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지어주었던 반석이라고 하는 그 유명한 이름, 베드로, 페트라스, 페트라 라고하는 그 이름이 아니고 낮추어서 원점으로 돌아가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묻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생애를 같이하면서 깊이 생각해 보면 여러번 여러번 말로나 행동에 실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마는 결정적인 것으로는 세가지 실수를 합니다. 그 첫째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준비하려고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실 때 베드로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 깨어 기도하라. 그는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죄 가운데 기도하지 않는 죄가 가장 큰 죄입니다. 그는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밤새 기도하시고 시험을 이기시고 십자가를 졌지만 기도없는 베드로는 예수를 모른다고 할 수밖에 없었어요. 결국은 베드로가 약했던 게 아니에요. 상황이 잘못된 것도 아니에요. 베드로가 기도가 없었어요. 기도하지 아니한 죄, 깨어 기도하지 아니한 죄가 결정적인 죄요 실수요. 두 번째는 물론 여러분 아시는 대로 삼중 부인이라고 하죠. Threefold Deny, 그는 예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합니다. 예수님 저 앞에서 재판을 받으실 때 저 뒷전에 앉았다가 어린아이가 나와서 "당신이 갈릴리 사람이요 예수님의 제자…" 아∼ 아니라고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고 두 번째는 맹세하고 세 번째는 저주했어요. 삼중으로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이거야말로 씻을 수 없는 실수죠. 큰 죄를 졌지요. 큰 실수를 했죠. 그리고 세 번째는 예수님 부활하신 다음에 베드로를 만나주셨습니다. 여러 차례 만났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아무래도 나는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예수님 앞에도 죄송하고 자기 자신을 볼 때도 무자격한 것을 알고 그는 갈릴리로 옛 생업을 따라 물고기 잡으러 갔습니다. 밤새껏 수고했지만 한 마리도 못잡고 허탈감에 빠져있는 바로 그 시간에 예수님께서 저를 찾아간 것입니다. 그가 본래에 받았던 사명의 길을 떠나서 갈릴리로 돌아갔다는 것, 그 물고기 잡으러 갔다는 것. 그 자체가 얼마나 큰 실수였습니까?
자, 그런 가운데도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의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그의 실수에 대해서 비판하고 원인을 추궁하지도 않습니다. 왜 그랬느냐, 어떻게 그 지경이 됐느냐, 전혀 말씀하지 않습니다. 딱 한마디 물으십니다. "아가파스메" 원문대로는 "지금 네가 현재 나를 사랑하느냐" 그런 말입니다. 현재 아가페의 사랑을 하느냐 하고 묻습니다. 이 질문 속에는 많은 말씀이 거기에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긴 원인분석적인 뜻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베드로야, 네가 왜 나를 모른다고 하게 된 줄 아느냐? 니가 왜 이렇게 실수가 많고 이렇게 형편없이 된 줄 아느냐? 원인은 오직 하나, 사랑이 없기 때문에.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같이 비참하게 됐느니라. 또한 현재 이 꼴이 뭐냐 이게. 3년 동안 메시아를 따라 다니고 다시 옛 직업으로 돌아갔어요. 왜 이 모양이 됐느냐? 이런 실망이 어디로부터 온 것이냐? 사랑이 없기 때문이에요.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이같은 이같은 하잘 것 없는 형편없는 인간이 되지 않았느냐. 왜 이렇게 비겁한 인간이 되지 않았느냐. 또 하나는 네가 지금 미래를 걱정하는가 본데 예수님이 안 계시고 예수님이 안계시는 가운데에 나는 무엇을 할까?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 예수의 제자를 그냥 둘 수가 없는데 나는 어떻게 해야되나. 그 두려움, 미래에 대한 불확실, 왜 이 모양이 됐느냐. 이것도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은 절망이 없습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사랑에는 좌절이 없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묻습니다. 베드로는 두려운 가운데 대답합니다. "아가파스메" 아가페의 사랑을 하느냐 하고 물을 때 베드로는 대답합니다. "오이다 호티 필로세" 여기서는 "아가페?"라고 물었는데 대답은 "필로" 라고 대답합니다. "플레오" 라는 말은 프랜드쉽. 친구라는 뜻입니다. 친하다는 정도예요. '희생적 사랑을 하느냐' 하고 물을 때 '친구의 사랑정도 합니다' 그 얘기예요. "아가파오세"라고 대답하지 못하고 "필로세"라고 대답합니다. 여기에 결정적인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좀더 내려가서 그 친구의 사랑마저 내가 주를 사랑하는 것을 주께서 아십니다. "오이다 호티 필로세" 이렇게 대답하게 됩니다. 주께서 아십니다. 주도권을 그리스도께 내드리는 것입니다. 아주 겸손해진 것입니다. 감히 사랑한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겁니다. 저도 생각이 있기에 그러나 내가 이지경이 됐지마는 주를 사랑하는 것을 주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다시 주님께 위탁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아주 우스운 이야기입니다마는 얼마 전에 96세 된 할아버지와 92세 된 할머니가 텔레비젼에 나와서 이렇게 인터뷰하는 걸 보았는데 결혼 70주년 기념이랍니다. 참 지긋지긋하게 같이 살았더만요. 근데 결혼 70주년 기념, 그런 프로그램에 나와가지고 이말 저말로 이렇게 인터뷰를 하는데 참 인터뷰 끝에 그 할아버지한테 아나운서가 짓궂은 질문을 했어요. "만일에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도 이 부인하고 결혼하겠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할아버지는 가만히 있더니 "좀 생각해 봐야겠는데요" 대답이 시원치 않더라구요. 그런데 할머니보고 물어봤어요.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는 길이 있다면 다시 이 남편과 결혼하겠습니까?" 했더니 대답이 전혀 다릅니다. "내가 돌보아 주어야죠." 뭐 사랑한다 안 한다, 결혼한다 안한다가 아니고 저 사람에겐 내가 필요한다 이거요. "내가 도와줘야 됩니다" 이렇게 대답을 하더라구요. 그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이라는 말처럼 어려운 말이 없어요. 사랑이 에로스냐 아가페냐 이건 굉장히 중요한 철학적 이론입니다. 그러나 쉬운 일입니다. 에로스라는 사랑은 항상 나를 중심합니다. 나를 위해서 저를 사랑하는 것이고 내게 저가 필요하고 내가 저를 돕고 그래서 사랑의 이름으로 자식을 괴롭힙니다. 보세요. 사랑의 이름으로 남편 못살게 합니다. 사랑의 이름으로 아내를 죽입니다. 다 사랑이라고 합니다. 왜요? 그건 자기 중심적인 것이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아가페라고 하는 것은 내가 사랑하는 그분으로 중심이 옮겨갑니다. 그에게 맡깁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십니다. 사랑하는 그것마저도 당신이 압니다 그거예요. 욥기 23장 10절에 보면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나를 단련하신 후에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나의 운명, 그에게 있습니다. 내가 당하는 현실, 주님의 사랑 안에 있습니다. 그 만이 아십니다' 하는 겸손한 고백이 있는데 베드로가 말합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C.R. Rogers 라고 하는 분이 심리학에 있어서 심리치료 방법의 삼원리를 말합니다. 심리적으로 건강하기 위해서 혹은 병든 심리가 건강해지기 위해서는 세가지 절대 조건이 있다. 첫째가 무조건적 존중함이 있어야 한다. 수평적인 것이 아니요. 내려다보는 것도 아니요. 높이 보는 거예요. 사랑의 대상을 높이는 거요. 나보다 훨씬 높이는 거요. 그가 아십니다. 그 존중이 없는 사랑이란 정신적으로 허약해집니다. 그것이 정신병을 만드는 겁니다. 나를 낮추고 상대방을 높입니다. 당신이 훌륭합니다, 당신의 뜻이 옳습니다, 당신 생각이 옳습니다, 존경하는 바로 그런 심리가 건강한 심리를 창출한다는 것이고요. 또 하나는 공감적인 이해입니다. 내 뜻을 남에게 이해시키려고 하지 말고 그의 뜻을 받아들여 이해의 공감대를 이루어야 되요. 그것이 사랑이에요. 그리할 때 건강해질 수 있어요. 내가 사랑하는 분의 뜻을 내가 수용할 수 있어야됩니다. 전혀 수용할 마음이 없어요. 사랑한다고 하면서 내 뜻을 밀어붙일 생각밖에 없어요. 그건 사랑이 아니에요. 이런 공감적인 충분한 이해가 따라가야 비로소 정신적으로 건강할 수 있고 세 번째는 믿음과 진실이 있어야 한다. 사랑하는데 대한 믿음이올시다. 사랑하면 믿어집니다. 믿어지면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정직해야 합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자 앞에 정직합니다. 그때에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될 수 있다, 라고 하는 심리학 이론을 내놓고 있습니다.
오늘 베드로는 말합니다. "주께서 아십니다." 내 마음도 내 뜻도. 내가 지금 이 정도 입니다마는 주님은 아십니다. 내가 이 모습이요 처절합니다마는 주여 주께서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아주 겸손합니다. 여기서 신학적으로 말하면 에로스적 사랑이 아가페적 사랑으로 바뀌는 시간입니다. 그 동안은 자기 중심적으로 예수를 사랑했습니다. 자기 출세를 위하여 자기 장래를 위하여 자기 영달을 위하여 예수를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사랑한다고 장담을 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큰소리 고백했던 그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시간은 그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아가페로 돌아갑니다. 아가페의 사랑을 받고 아가페의 사랑에 대한 아가페적 응답을 합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독선과 아집에서 떠나서 겸손과 헌신으로 돌아가며 자기를 완전히 부정하면서 주님 앞에 사랑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변화 심리학자인 안소니 로빈스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의 책 가운데 Awake the Giant within 이라고 하는 책이 있는데요 이 책은 무려 세계적으로 천만권 이상이 팔린 베스트 셀러입니다. 1997년 국제 상공회의소가 세계에 큰 영향을 끼친 학자 열 사람 중에 이 사람을 꼽고 있습니다. 그의 이론입니다. 우리가 이 세대를 살아가기 위한 건강한 사람이 되려면 먼저 자신의 감정을 극복해야 합니다. 현대인으로써 중요한 것이 감정 문제요. 이 감정을 방임하고 있어요. 감정을 다스려야 돼요. 여러분의 실수가 다 어디서 온 겁니까? 잘못된 감정을 내버려두었거든요. 자기 감정을 자기가 바로 통제할 수 있어야한다. 또한 건강을 관리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절제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해야됩니다. 무질서하게 살면서 건강을 달라고 기도한다면 그건 미신입니다. 이걸 알아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건강을 잘 관리해야될 책임이 있습니다. 또한 경제를 관리해야 됩니다. 인간관계를 관리해야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가 말하는 말은 시간을 정복해야 됩니다. 여러분 내가 시간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주어진 시간을 정복한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시간 안에서 최선으로 사는 거죠. 낭비되는 시간이 없어야 되요. 꽉꽉 채워가지고 살아야돼요. "시간을 정복하는 것이 바로 인간을 정복하는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시간을 무엇으로 다스리겠습니까? 사랑한 시간만이 시간이요 미워한 시간은 빼앗긴 시간이에요. 이걸 잊지마세요. 사랑으로 꽉 찬 시간만이 살아있는 시간이에요. 섭섭해하고 불면하고 원망하고 그건 다 낭비된 시간이에요.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러면 내 양을 먹이라." 주님의 일 할 수 있는 오직 하나의 one condition!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제 대답합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 주님만이 아십니다." 아주 겸손하게도 신앙적으로 새로운 고백을 하게 될 때 주는 그에게 다시 큰 은총을 베푸십니다. 내 양을 먹이라.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우리를 사랑하사 지난날의 그 많은 실수를 꾸짖지 아니하시고 현재 이 시점에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는 주님. 그 크신 은혜를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모든 생각을 다 버리고 새롭게 정리하고 '주여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겸손한 사랑의 응답을 할 수 있게 하사 그 사랑으로 세상을 이기고 나를 이기고 그리고 최선의 충만한 생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