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을 잘 하게 된 이유
알몸뚱이에 신발도 없이 뜨거운 철길을 걷고 있는 아이 앞에는, 대관령 너머로 붉은 노을이 지고 있었다.
아이는 울고 있었다. 또래의 친구들은 아이를 무시하고 뒤돌아 보지 않고 마냥 앞서서 걸어갔다. 심지어 놀리기 까지 했다.
그날, 아이는 집에 들어가 엄마에게 맞아서 또 울었다. 발가벗긴 채로.
초등학교 들어 가기전, 나는 강릉역 앞에 살았다. 강릉역 앞의 대로는 비포장 도로여서 풀이 자랐고, 그 풀을 뜯어 먹는 염소도 있었다.
단오가 되면, 강릉역에서 내린 단오 행렬이 장관이었다. 원숭이며, 피에로며, 꼬끼리며.
아이들은 단오에 공연할 서커스 무리를 따라 남대천 단오장까지 뛰어 갔다.
또 한가지 기억은, 경포대까지 철길을 따라 걸어서 수영을 하고 다시 걸어서 돌아왔던 일이었다.
아침에 엄마 몰래, 부엌에 가서, 도시락에 밥과 고추장만 도시락에 넣어 강릉역 앞에 모여 경포대 까지 무리를 지어 걸어갔다.
아침에는 철길이 덜 뜨거워서 걸을만 했다.
우리는, 경포대에 도착해서, 벗은 옷과 도시락을 모래를 파서 감추고, 짝대기 하나를 표시로 하루 종일 물장난을 하고 수영을 했다.
어느 날, 내가 표시한 짝대기가 사라졌다.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친구들은 도시락을 먹었지만 난 굶을 수 밖에 없었다. 허겁지겁 먹는 친구들은 나를 외면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수영을 마치고 돌아올 때 였다. 옷이 없어 알몸뚱이로 올 수 밖에 없었다.
철도는 이미 한 여름의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발갛게 달아 있었다.
철도 밖은 돌이 많아 발바닥이 아팠고, 철도는 뜨겁고, 나는 한 없이 울면서 친구들을 따라갔다.
야속한 친구들은 나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때는, 청량리에서 출발하는 영동선 열차의 종점은 경포대 역이었다.
그것이 내가 중 3 때 영동 고속도로가 생기면서 사라지고 강릉역이 종점이 되었다.
그때, 현대의 포니가 탄생했다. 포니의 탄생과 경포대 역이 사라진 것과 영동고속도로가 생긴 것이 거의 동시였다.
현대 자동차는, 경포대역이 도움을 준 셈이다. 박정희와 정주영은 친했나 보다.
경포대 까지 오는 청량리 발 영동선 열차는, 피서철이면 기타를 맨 젊은이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영화 ‘고래사냥’ 은 그래서 탄생했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부터 막무가내로 배운 수영이, 군에 가기 전, 대학 1 학년 때 인명구조원 알바를 하게 하였고,
그래서 배운 스쿠바다이빙이었고, 강사가 되었고, 강사로서 해병전우회 인명구조단을 가르쳐 경포대 인명구조대의 기틀을 만들었다.
아무리 힘들고, 설사 술이 만취를 해도 하루 종일 바다에 있을 수 있다.
그것이 내 평생의 건강을 지킬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던 거 같다.
강릉시 대표로 일반인 수영대회에 출전해 1 등도 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