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랫줄 위의 산책 / 김승희
빨랫줄 위를 걷는 것이다,
구름 위에 걸린 빨랫줄을 걷는 심정으로,
위기를 과장하지 않으면서
위기를 미학화하는 사업에 나는 필히 골몰하고 싶다,
필생의 사업이라면 이제 그것이 대문자로 대두되는 세월
시인의 사업이라면 필경 가내수공업 수준이겠지만
그런데 말이다, 그것이 만만치 않은 우주적인 함량을 지녔다는 것이다,
이 반달리즘 자본의 세월 속에서
못 먹고 못 입고 지지리 궁상인 극빈의 연필심처럼
앙상하게 마른 시인이라는 동물이
자기 손금을 파서 우물을 내고 그 위에 빨랫줄 같은
한 그루 몽환의 무지개를 심으면서
빨래를 미학화하고 극대화하고 있다는 것,
크리슈탈 워터보다도 인디언의 물 에로우 헤드보다도
더 아름다운 생수를 자기 손금에서 파내면서
그 분출로 이루어진 무지개의 빨랫줄 위를 걷고 있다는 것,
이런 것이야말로 역사적인 일이 아니랴,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무지개 위의 구름보다도 더 우아하고 절실하게
피를 머금고 수반 위에 피어난 글라디올러스,
주렁주렁 매어달린 숙명의 측량할 수 없는 홍염,
동대문 의류시장에서 장사를 하던 내 친구의
시체가 서해 바닷가 어느 모텔에서 발견된 날,
세상에 보호자가 없어도 그렇게 없어서
내가 빨랫줄에서 내려와 경찰서 안치실에까지 불려갔는데
나 캄캄한 극장에서 불이 난 것과 같았어,
허무처럼 간단한 것이 없더군, 허무처럼 간단한 것이 좋아,
그런 표정으로 구름 위에 누워 있는 그녀,
빨랫줄 위에서 왜 좀더 버티지 못했어, 왜 그렇게 추락했어,
울고 싶어도 울 수가 없고
날고 싶어도 날 수가 없어,
우아하게 살기로 한다,
구름 위에 걸린 빨랫줄을 걷는 심정으로,
밤마다 지하주차장 벽에 차를 박아도
빨래를 미학화하는 사업에 나는 필히 골몰하여야 한다
* 마가복음 14장 27절 중에서
- 김승희 시집 <냄비는 둥둥>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