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공작기관이 「진보정당 창당추진委」 준비위원과 민주노동당 고문을 지낸 姜泰運(강태운ㆍ73·건축설계사)씨를 간첩으로 포섭해 민주노동당 창당과정에 끼어들어 그 과정을 모니터하고 간부들 포섭工作도 시도한 사실이 드러났다.
姜泰運씨는 1994년부터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북한 공작원 朴春根, 중국에 나와 있는 북한 공작원 김문수 등을 여섯 차례 현지에서 접선했다. 姜씨는 민주노동당 창당과정에 참여하면서 입수한 민주노동당 내부자료와 민주노동당 관련 인사의 인적사항과 전화번호 등을 입수해, 이들 공작원에게 보고했다.
姜씨는 북한 공작원들로부터 「민주노동당 정성희 사무부총장 등을 포섭해서 北京으로 데리고 오라」는 지령을 받고, 포섭을 시도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姜씨는 북한 공작원들로부터 1500만원 상당의 공작금을 받았다(법원 판결문).
서울지법 형사22부는 2003년 12월29일 姜泰運씨에 대해 간첩죄, 잠입탈출, 회합 통신 등의 혐의로 징역 6년 자격정지 4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姜씨가 북한에 보낸 「진보정당 창당 준비과정」, 「세부 사업계획」, 「고문단 및 위원회 구성」 등에 관한 자료들의 성격에 대해 『북한에 누설될 경우, 북한의 對南공작에 이용되어 대한민국의 안전에 위험을 초래할 우려가 있음』이라고 判示했다.
서울고법은 지난 4월27일 열린 항소심에서도 姜씨에 대해 1심과 똑같은 형량을 선고했다. 고법 재판부는 『피고인이 북측에 제공한 정보는 公知의 사실이라 볼 수 없고 공개 시 국가에 불이익을 초래할 수 있는 기밀로 인정된다. 가벼운 형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피고인이 공감할 것』이라고 밝혔다. 재판부는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나 국가안보 위협이 있으면 국가보안법과 같은 법률이 필요하며, 이 법에 따라 남북 화해 분위기와 상관없이 북한은 反국가단체로 인정된다』고 판시했다.
姜泰運씨는 「몽양 여운형 추모사업회」,「죽산 조봉암 추모사업회」 대표 자격으로 1999년 1월, 「진보정당창당추진위원회」의 15人 준비위원으로 선출됐고, 2000년 1월 民勞黨 고문에 취임했다. 姜씨는 2003년 8월15일 구속된 직후 민노당 고문직을 사임했다.
수사 검사 - 『北이 강령 만드는 과정에 개입했을 가능성이 있다』
당시 姜泰運씨 사건을 수사했던 許相九 서울고검 검사(수사 당시는 서울지검 공안부)는 「북한이 민주노동당 정강정책과 강령을 만드는 과정에 개입한 것인가」라는 물음에 『그럴 가능성이 있다. 북한에서 메모지가 많이 내려왔다. 어떤 지령인지는 姜泰運씨가 폐기해서 모른다』고 답변했다.
1심과 항소심 재판부의 판결문에 따르면, 북한 공작기관이 姜泰運씨에게 처음 접선을 시도한 것은 1994년경이었다.
일본에 거주하고 있던 姜씨의 조카딸(누나 강모씨의 딸) 안춘자(63·1983년 일본 귀화)가 이 무렵 일본에서 姜씨에게 국제전화를 걸었다. 안씨는 『남편 朴春根이 일본에서 통일운동을 하는 사람인데, 국내문제에 대해 관심이 많다』며 『남편에게 한국에 살고 있는 삼촌이 통일문제에 관심이 많고 재야단체內에서도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라고 했더니, 한 번 만나 보고 싶어 한다』고 姜씨에게 제의했다.
姜泰運씨는 조카딸과 전화통화를 한 후 在日 북한 공작원 朴春根과 전화로 인사를 했다. 두 사람은 전화통화로 의기투합했고, 그 후 수년간 전화로 남북한 문제, 국내 정세 등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북한 공작원인 朴春根은 전화통화에서 북한을 「나의 조국」이라고 자처하면서, 『좌익 출소자, 운동권 인물 등 국가보안법 위반 전력자들은 애국인사로서 훌륭한 사람인데 이들을 처벌하는 국가보안법은 폐지되어야 하고, 미군철수 후 연방제식으로 통일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1심 판결문에 따르면, 姜씨는 朴春根의 사상과 주장내용이 북한의 주장과 일치하고, 자신과 이념적으로 공감하는 부분이 많아서, 朴春根과 연계하여 통일운동을 전개하리라고 다짐했다고 한다.
朴春根은 1997년 大選에서 「국민승리 21」이 패배하자 『과거 진보세력을 규합하여 조직화하라』고 지시했다. 朴春根은 1998년 10월 자료 수집과 보고에 필요한 경비로 姜泰運씨에게 은행계좌를 통해 6만 엔(한화 60만원)을 송금했다. 1998년 11월27일에는 『진보단체 결성을 위한 경비로 사용하라』는 지시와 함께 3만 엔이 송금됐다.
朴春根은 『빨갱이들이 다 모인다고 그러겠지만, 추진하고 있는 「준비위원회 결성」을 열심히 하라』고 독려했다.
姜씨는 朴春根을 1999년 2월 도쿄에 가서야 처음 대면했다. 朴씨는 이때까지 국제전화를 통해 姜씨에게 지시를 하달했다. 姜泰運씨는 2000년 7월에 朴春根의 지시를 받고 처음 중국을 방문해서 북한 대외연락부 부과장 김문수 등 북한 공작원들과 접선을 계속했다.
이후 姜泰運씨는 일본과 중국의 북한 공작원들과 별도의 보고 라인을 유지했다.
在日 북한 공작원 朴春根은 함경도 출신으로 東京 이케부쿠로(池袋)에 있는 환신물산이라는 공장을 경영했다고 한다. 그의 공장은 김치·기름·깨소금·고춧가루 등의 가공식품을 생산했다. 일본 공안 관계자에 따르면, 朴春根은 작년 8월경 姜씨가 구속된 직후, 의문의 변사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民勞黨 창당준비 과정을 정밀 보고
검찰 관계자에 따르면, 『國情院에서 자료를 넘겨받는 시점에서는 朴春根이 자살하지 않았고, 검찰 수사과정에서 朴씨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朴春根 유서가 존재한 것으로 미뤄 자살로 추정되지만 他殺(타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했다.
검찰 관계자는 유서 내용이 「(처에게)미안하다. 뒷일은 ○○○와 상의해 달라」는 통상적인 내용이 들어 있었고, 또 다른 유서가 발견됐다는 이야기가 들린다고 했다.
對北 전문가 K씨는 『한국 친척들의 원망으로 양심의 가책을 느껴 자살했을 수 있고, 여러 명의 공작망이 드러나자 조직이 瓦解(와해)될 것을 두려워해 「차단」 차원에서 강요된 자살을 택했을 개연성이 있다』고 했다.
姜泰運씨는 1999년 진보정당 창당추진委 15인 준비위원에 포함되면서, 활동을 본격화했다. 그는 2000년 1월 民勞黨 창당 때 고문으로 임명됐고, 이후 在日 북한 공작원 朴春根에게 계속 보고를 했다.
판결문에 적힌 범죄사실을 보자.
●姜씨는 1999년 2월 朴春根으로부터 5만 엔을 송금받고 보름 후 일본을 처음 방문해서 「진보정당 창당 원탁회의 자료」, 「통일 관련 자료 및 신문기사」, 「申昌均 회고록 5권」 등을 전달했다.
북한은 姜泰運씨를 통해 民勞黨 창당의 全과정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姜泰運씨는 1999년 6월27일 동대문우체국에서 진보정당 창당추진위원회 기관지 「창간 준비」 3호 등을 노란색 서류봉투에 넣어 국제우편으로 朴春根에게 보냈다.
●姜씨는 1999년 7월12일 서울 중구 을지로 2가 소재 모 한식당에서 개최된 고문단 회의에 참가해서 「진보정당 창당추진위원회 제4차 운영위원회」 회의자료 및 세부사업계획, 고문단 및 운영위원회 구성 등에 관한 자료를 입수해 이를 朴春根에게 전했다.
●그는 1999년 10월28일 朴春根으로부터 『지금 당 조직, 지방당 조직(결성)을 어느 정도 진행하고 있는가』라는 연락을 받고 전날(10월27일) 열렸던 고문회의 자료를 우편으로 발송했다.
姜씨는 자필로 『우리 黨 홍보관계, 정책, 정강정책 시안으로 상당히 두껍다. 이 서류를 보면 다 적혀 있는데 지금 한 60개가 움직이고 거기에 지방조직 표와 움직임까지, 보궐선거 움직임까지 전부 있다』고 적었다.
姜씨는 중국을 방문하면서 가족들에게는 『안춘자가 중국에 참기름 공장 터를 샀는데 공장 설계를 의뢰해 그 일을 하러 간다』고 둘러댔다. 일본에 朴春根을 만나러 갈 때는 『설계일로 간다』고 했다.
●2000년 3월20일, 姜씨는 남한에서 수집한 각종 자료를 朴春根에게 보내면서 신문기사를 하나 첨부해서 보냈다. 2000년 1월24일자 한겨레신문에 게재된 「지하 매설물 위치 한눈에」라는 기사였다. 기사는 모 정보통신 업체가 지하 매설물을 지상에 있는 것처럼 선명하게 볼 수 있는 「인터넷 3차원 지하 매설물 관리 프로그램」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는 기사였다.
공안 담당자는 『지하 매설물에 대한 입체 지도를 北이 입수할 경우, 지하 매설구에 放火 등을 통해 정보통신망을 무력화 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가스관 폭발로 남한 사회를 일시에 혼란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고 했다.
북한 공작원이 암호 지정
●姜泰運씨는 2000년 7월22일 朴春根의 지시에 따라 北京으로 날아갔다. 北京공항에는 朴春根과 북한공작원 「박명일」, 「이홍수」가 나와 있었다. 姜씨는 김문수·朴春根에게 民勞黨 창당과정, 黨에 대한 국민여론, 향후 진로 등에 대해 보고했다.
『民勞黨이 올해 초 헌법소원을 제기해 「1인2표제」 투표를 관철시켜 시행되었는데, 「1인2표제」는 출마자와 정당을 별도로 찍는 것으로 그 원류가 독일에서 나온 것이다』
『지난 총선에서 높은 득표율을 올리고도 전국 투표율이 2%가 안 돼 등록을 취소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는데, 총선에서 유효 투표수의 2%를 얻지 못한 정당에 대해 등록을 취소하도록 규정한 정당법 조항에 대해 소송을 제기했다』
●姜씨는 2000년 11월24일 중국을 다시 방문, 民勞黨 黨舍에서 입수한 民勞黨 지역조직 연락처를 기재한 문건과 고문단 회의 자료집 등을 北京의 경륜반점 1002호에서 북한 공작원 김문수에게 전달했다.
이 자료에는 民勞黨 간부들의 인적사항, 연락처 및 民勞黨의 사업계획 등이 담겨 있었다.
(姜씨는 2003년 5월20일까지 「진보정당 추진위 제4차 운영위원회 회의자료」, 「民勞黨 제4차 중앙위 자료집」, 「民勞黨 고문단 1차회의 자료집」, 「고문단 회의 자료집」 등을 북한 공작원에게 전달했다. 이 자료들은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고 민노당 黨員들이나 고문단에게만 공개됐던 자료다.)
姜泰運씨는 김문수로부터 『民勞黨이 (2000년) 총선에서 참패하였는데 이를 극복하고 재야단체인 전국연합, 한국노총, 全農, 한총련 등을 규합하는데 힘을 쏟아 세력을 확장하도록 노력해야 된다』는 지침을 받았다. 姜씨는 민주노동당 핵심인물인 千永世, 鄭星熙, 崔圭曄 등에 대한 정보를 김문수에게 제공했다.
북한 공작원 김문수는 姜泰運씨에게 『사무부총장 鄭星熙가 유능하고 똑똑해 보이는데 우리와 연결될 수 있도록 해달라』, 『가능하면 한 번 데리고 나왔으면 좋겠다』라고 지시했다.
●姜泰運씨는 2001년 5월8일 서울 동대문구 소재 청량리역에서 朴春根의 지시를 받고 입국한 안춘자(朴春根의 妻)를 만나 그녀에게서 『6ㆍ15 공동선언 1주년기념 대토론회 행사와 관련, 재야단체에서 신청한 북한 주민 접촉이 불허될 이유, 民勞黨의 千永世·鄭星熙·崔圭曄을 행사에 참가시킬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라』는 朴春根의 메모지를 전달받았다.
●姜씨는 2001년 5월9일 朴春根에게 국제전화를 걸어 『그거(안춘자를 통해 받은 지령) 다 읽고 오늘 조치를 했다』, 『6ㆍ15공동선언 1주년기념 대토론회가 개최되는데 각계 대표를 망라해서 위원회를 구성하고 訪北을 신청하였으나 (통일부에서는) 위원회에 이적단체인 한총련과 범민련이 포함되어 있다는 이유로 불허조치되었다』, 『그런데 어제 메모를 봐 가지고는 거기서(북한) 세 사람을 지목해 줬는데 다시 거기서 초청장을 보내 주어야 통일부에 방북신청을 한다』, 『그 세 사람은 民勞黨의 千永世 사무총장(現 국회의원 당선자), 鄭星熙 사무부총장, 崔圭曄 자통위원장으로 한총련이나 범민련에 포함되어 있지 않으므로 불허될 이유가 없다』, 『(초청장은) 저번에 보내준 명함에 주소가 있으니까 빨리 보내줘야 한다』 라고 요청했다.
鄭星熙 사무부총장 포섭 工作
●2001년 6월14일, 姜씨는 朴春根에게 『오늘 6ㆍ15공동토론회에 여기서들 떠났는데 우리 의도대로 됐다. 사무총장 千永世, 崔圭曄 통일위원장, 지구당 위원장 둘, 申昌均 선생(한독당 대표 역임), 통일국장 등 여섯 사람이 갔다』고 전화로 보고했다.
●2001년 7월18일, 姜씨는 朴春根으로부터 국제전화로 『「6ㆍ15남북공동선언 1주년기념 민족통일 대토론회」에 참석한 民勞黨 사무총장 千永世, 자통위원장 崔圭曄 등이 평양에서 개최되는 「8ㆍ15민족통일 대축전 南北 공동행사」에 꼭 다시 참가할 수 있도록 하라』는 지령을 받는다.
千永世씨와 崔圭曄씨는 8ㆍ15행사를 위해 訪北했다.
●姜씨는 2001년 11월17일 北京으로 가서 在日 공작원 朴春根을 만났다. 그는 朴春根과 북한 공작원 박명일의 안내로 숙소인 경륜반점에 도착해 그곳에서 기다리던 북한 공작원 김문수와 인사를 나눴다.
김문수는 姜씨에게 『먼저 얘기했던 사람(鄭星熙 지칭) 어떻게 됐느냐』고 民勞黨 鄭星熙 사무부총장의 포섭 상황을 물었다. 姜씨는 『아직 일이 다 안 됐다.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는 다음날 김문수로부터 장백산 인삼주 2병, 朴春根으로부터는 활동비 명목으로 50만 엔을 받았다.
●2002년 7월20일 姜씨는 김문수로부터 지령을 받기 위해 다시 北京을 찾았다. 북한 공작원 김문수는 『사람(鄭星熙 지칭) 데리고 오는 게 왜 그렇게 오래 걸리느냐. 힘든 일이냐』고 채근했고, 姜씨는 『그 사람은 가정사정 때문에 지금은 안 된다. 다른 사람을 구하겠다』고 대답했다.
기자는 鄭星熙 당시 사무부총장(現 민노당 안양동안 지구당 위원장)에게 『姜泰運 고문을 평소 잘 아는가』라고 하자 『잘 모른다. 사무부총장할 때 조금 아는 정도다』고 했다.
재판부는 姜泰運씨가 민노당 사람들을 포섭할 영향력이 있는지에 대해 회의적인 평가를 했다. 판결문 내용이다.
「피고인이 과연 그들(鄭星熙, 千永世)을 포섭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거나, 그러한 지위에 있었는지, 그들을 포섭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을 했는지조차 의문이 아닐 수 없다」
民勞黨 홈페이지 이용해 交信하라
●姜씨는 2002년 7월21일 北京에서 북한공작원 박명일로부터 『앞으로 우리가 民勞黨 홈페이지 실명게시판을 활용해 상호연락을 해야겠다. 투고하는 사람 이름은 김중성, 김중갑, 리종국으로 하고 투고날짜는 매주 토·일요일로 한다』는 연락방법을 지시받았다.
●姜씨는 2003년 8월10일 黨 회의자료와 성명서 등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가 朴씨에게 마지막으로 자료를 전달했다. 朴씨로부터 「국내에서 통일사업을 열심히 해 달라」는 취지의 편지와 미화 2000달러를 받아 그해 8월12일 입국하려다 인천공항에서 검거됐다.
북한은 姜泰運씨가 항소심에서 간첩활동 혐의로 징역 6년의 실형을 선고받자 『실로 놀라움을 금할 수 없는 反통일 파쑈악행이 아닐 수 없다』면서 국가보안법을 비난하고 나섰다.
북한 로동신문은 지난 4월30일자 논평을 통해 『前 민주로동당 고문 강태훈(姜泰運의 誤記)에게 중형을 들씌운 서울고등법원의 판결소동은 보안법의 反통일적이며 파쑈적인 진면모를 다시 한번 드러내 보여 준다』고 주장했다.
林炚圭(임광규) 변호사는 姜泰運씨 사건에 대해 『北은 간첩 金洛中 사건과 李善實, 徐敬元 사건에서 보듯 남한에 합법정당을 건설하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해왔다』면서 『이번 姜泰運씨 사건은 民勞黨 창당과정에서 北이 공작원을 통해 끊임없이 간여해 왔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북한 전문가 K씨의 얘기다.
『간첩은 파괴, 군사탐지를 主임무로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북한의 對南공작은 「남한 주민 의식화」, 즉 「全국민의 親北·反韓·反美 의식화」가 對南공작의 처음과 끝이죠. 民勞黨 姜泰運 前 고문 간첩사건은 북한의 對南 공작이 우리의 기존 정당에까지 손길을 뻗쳤다는 증거입니다』
姜泰運 前 고문의 유죄판결에 대해 民勞黨 내부에서 불만이 새나왔다.
지난 4월29일 民勞黨 정책부장을 맡아온 金正鎭(김정진) 변호사는 黨 지도부를 비판하며 사퇴서를 제출했다. 金변호사는 2002년부터 民勞黨 상근 당직자로 활동하면서, 富裕稅(부유세) 공약 등을 만들고 각종 법률지원을 맡아 온 인물이다. 金변호사는 黨 홈페이지 게시판에 올린 「사직서-평당원으로 돌아가며」라는 글을 통해 『지도부의 무책임 때문에 절망감을 느꼈다』고 했다.
『지난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된) 前 民勞黨 고문 姜泰運씨 사건은 黨의 존립과 안전에 관한 중대한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지도부가 지극히 무책임한 행보를 계속했다. 우리는 이제 한 고비를 넘었을 뿐인데 언론의 과도한 관심, 이에 대한 차분하지 못한 黨의 대응이 우려할 만한 수준에 와 있다. 지도부의 무책임 때문에 절망을 느꼈다』
기자는 지난 5월12일 民勞黨 金鍾哲(김종철) 대변인에게 전화로 공식입장을 들었다.
─姜泰運 前 고문의 유죄판결이 난 것에 대한 民勞黨의 입장은.
『姜泰運 前 고문은 특별히 黨의 비밀정보가 아닌, 인터넷으로 확인 가능한 정보를 北에 전달한 것으로 판단한다. 그렇다 해도 黨 내부 정보를 北 기관에 전달한 행위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다만, 국보법이라는 악법이 南北의 자유왕래를 허용하지 않고 족쇄를 물렸기 때문에 국가보안법의 문제를 먼저 지적하고 싶다』
─姜고문의 창당시 기여는.
『고문이라면 어떤 일을 하는지 알지 않는가(웃음). 원로 중 한 분으로 위촉한 것이다. 姜고문은 黨의 의사결정에 거의 영향이 없다. 民勞黨이 그럴 수 있는 체제도 아니고』
─姜씨는 현재 고문인가 아니면 前 고문인가. 고문이 아니라면 자진 사퇴인가.
『자진 사퇴했다. 구속된 지 얼마 안 돼 사퇴하신 것 같다』
南北에서 버림받은 姜泰運
기자는 2000년 10월9일 북한 노동당 창건기념 행사 참관을 위해 訪北했던 魯會燦 국회의원 당선자(당시 부대표)에게 전화로 몇 가지를 물었다.
─姜고문을 잘 아는가.
『姜고문은 2000년 창당할 때 黨에서 처음 보았다. 과거 革新黨 활동을 하던 분들은 지속적으로 在野 운동을 안 했다. 운동을 은퇴하고 있다가 친분관계에 있던 분들이 추천해서 고문이 된 경우다. 당시 고문은 정식으로 임명되는 것이 아니었고, 추천형식이었다. 당시 고문 중 절반은 내가 얼굴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고문을 지낸 분에게 공헌이 없다면 결례겠지만 공헌이 거의 없었다. 공헌으로 고문이 된 분이 아니었고, 재야 활동을 오래한 분이라는 생각에 굳이 따지지는 않았다. 고문이란 자리가 權座도 아니고. 다른 黨과는 달리 民勞黨은 권력과 무관한 자리다』
─면회는 갔었나.
『지도부는 안 갔다. 지도부는 지금 화가 나 있다. 그는 탈당계를 내고 「黨에 累(누)를 끼쳤다」며 고문직을 사퇴했다. 그는 前 고문이고 당원이 아니다』
지난 5월11일, 기자는 서울 중랑구 중화동에 있는 姜泰運씨의 집을 찾아갔다. 그의 부인 한모(72)씨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한씨는 『협심증으로 고생하는 영감이 하루 빨리 석방됐으면 원이 없겠다』고 울먹였다. 그녀는 현재 자궁암 수술 후유증, 股關節(고관절)에 膽石(담석)으로 고생하고 있다.
姜씨는 IMF 외환위기 사태 이후 형편이 어려워지자 큰아들 강모(49)씨와 살고 있었다. 姜泰運씨는 한씨와의 사이에 3남3녀를 두었다. 서울시 동대문구 용두동에 있는 姜씨의 건축설계 사무실(대원창건사)은 이미 문을 닫았다.
가족들에 의하면, 姜씨가 지난해 8월 國情院에 체포되면서 한 달에 월세 100여만원이 나가는 사무실 임대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姜泰運씨의 부인 한씨는 民勞黨 관계자들에게 서운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黨 사람들이 우리 식구를 위로하기 위해 집으로 찾아온 적이 없습니다. 재판이 시작될 때 변호사 문제 때문인지 몇 번 전화를 해온 것을 빼고요』
그녀는 한숨과 함께 한마디를 내뱉었다.
『동대문 일대에서 남편은 好人으로 평이 좋았고, 출마하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습니다. 남편은 친구들을 소홀히 하지 않는 성격이라 건축사무실에는 늘 사람들로 들끓었어요. 먹을 때만 친구지, 막상 그 양반이 감옥에 들어가니까 개미새끼 한 마리 얼씬 거리지 않네요』
기자는 姜泰運씨의 부인 한씨가 들려 주는 家族史와, 姜씨의 화목했던 가족 사진을 보며, 南과 北으로부터 모두 버림받은 南勞黨 같은 사람을 半세기가 지난 21세기 벽두에 다시 보게 되는 것 같아 가슴이 저려 왔다.●
◈ 姜泰運은 누구인가
1960년 革新黨 창당에 참여… 「반공법」위반으로 구속 … 6·25 때 아버지가 미군의 총격으로 사망
姜泰運씨는 1931년 경기도 남양주시 삼패동에서 2남2녀 중 차남으로 출생했다. 그의 부친은 수백석지기였다고 한다. 姜씨는 20세가 되던 1950년 한모씨(여)와 결혼했다. 결혼하던 해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姜씨는 제2국민역으로 軍에 입대했다고 한다.
부인 한씨에 따르면, 그는 전쟁 기간 내내 空挺隊(공정대)에서 낙하훈련과 전투에 참가했다. 1·4 후퇴 무렵 姜씨의 부친은 피란길에 인민군으로 誤認(오인)받아 미군의 총격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姜씨는 제대 후인 1955년, 한양大 工大 건축공학과에 진학한다.
1959년 대학을 졸업한 姜씨는 서울大 강사를 3년간 지냈다고 한다. 1960년 12월경, 現 「竹山 曺奉岩(조봉암) 선생 기념사업회」 회장인 허영무(73)씨 등 10여 명과 革新黨(혁신당)을 창당하기로 하고, 창당준비위원 겸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한다.
姜씨는 「진보세력의 힘으로 모순된 자본주의 구조를 타파하고 사회변화를 이루어야 한다」, 「容共 영세 중립화 통일을 하자」고 주장하다가 5·16 혁명 이후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됐다. 그는 1961년 12월 혁명 검찰부에서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부인 한씨는 『혁신당 사건에 연루됐던 사람은 모두 5년, 2년 刑을 선고받았는데, 남편은 비교적 가벼운 9개월 刑을 선고받았다. 감투를 쓰지 않아서 그렇다고 한다. 남편은 진보당 간사장을 지낸 尹吉重(윤길중) 前 국회부의장과 절친했다』고 했다.
出所한 姜씨는 1965년 대원건축설계사무소를 시작으로, 광신산업사 설계부장등으로 일했다. 서울 시내 대연각호텔, 삼성출판사, 서린호텔, 이화여대 부속병원 등이 그의 손을 거쳤다고 한다.
姜씨는 1976년 7월경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에 건축설계사무소인 「대원창건사」를 설립했다. IMF 외환위기가 찾아오면서 경제사정이 나빠졌고, 경기도 남양주시 삼패동 일대의 임야가 채권자들의 손에 넘어갔다.
許부장은 「징역 6년 刑이면 국가보안법 위반사범으로서는 형량이 낮은 것 아닌가」라는 질문에 『宋斗律 교수가 징역 7년刑을 받은 것을 보더라도 결코 낮은 형량이 아니다』라고 했다.
─최근 국가보안법 적용이 약화되고 있는 것 아닌가.
『남북화해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수사여건이 악화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金大中 정부 초기에 국가보안법 사범의 수사에 어려움이 많았다. 現 정부 들어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할 일은 해야 한다. 이런 분위기에서 6년 刑 선고가 난 걸 검찰로서는 만족한다. 姜泰運은 73세의 고령으로 그에게 6년 刑은 終身刑(종신형)이나 다름없다』
─姜泰運씨의 건축설계사무소는 어떻게 됐나.
『현재 사무실은 폐쇄됐다. 재판과정에서 변호사들이 「공사 受注 중이라 출소하면 都給(도급)을 준 사람이 공사를 하도록 해 주겠다고 한다」며 증빙 서류를 제출했다. 그러나 실제로 國情院을 통해 확인해 보니 사무실이 이미 폐쇄돼 있었다』
─대원창건사가 대규모 설계 감리를 한 적이 있나.
『많은 물량은 수주하지 못해 최근 매출은 거의 없는 것으로 파악됐다. IMF 외환위기 때 타격을 크게 받았고, IMF 기간 중엔 연간매출이 기천만원에 불과한 때가 있었다』
─북한 공작원이 姜씨에게 民勞黨 홈페이지 實名 게시판에 자료 입력하면서 투고하는 사람 이름을 「김중성」, 「김중갑」, 「리종국」으로 하고, 투고날짜를 매주 토ㆍ일요일로 한다는 등의 상호 연락방법을 지시했는데, 홈페이지에서 이들 명의의 글을 확보했는가.
『검찰은 자료를 확보하지 못했다. 어떤 이유인지 이들 이름이 홈페이지에 있지 않고 사라졌다』
─북한이 民勞黨 사무부총장 鄭星熙씨를 포섭대상으로 삼은 이유는.
『千永世씨는 나이가 많고 알려진 인물이지만, 鄭星熙씨는 젊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鄭星熙씨는 여러 편의 문제 논문을 썼다. 판결문에는 나오지 않지만, 두 개 정도의 논문을 姜泰運씨가 北에 보낸 것으로 안다. 이 논문은 民勞黨 홈페이지에 소개가 됐을 것이다』
─民勞黨 C씨는 2000년 7월26일 姜泰運씨가 日貨 5만 엔을 환전해 일부를 전달한 것으로 판결문에 기록돼 있다. 검찰에서는 왜 C씨를 기소하지 않았나.
『C씨 본인이 國情院 조사에서 (혐의사실을) 부인했다. 국가보안법상 금품수수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北에서 온 資金이라는 사실이 입증돼야 하고, C씨가 北에서 온 돈이라는 사실을 알고 받아야 한다. 그것을 입증하기 어려워 기소하지 않았다. 姜泰運씨는 C씨에게 「식사나 하라」며 엔화를 환전해서 준 것이다』
─姜泰運씨가 1999년 8월 강령(시안)과 정강정책이 담긴 창당발기인대회 자료집을, 동대문 우체국을 통해 北에 전달했다. 北이 정강정책이나 강령을 만드는 과정에 개입한 것은 아닌가.
『그럴 가능성이 있다. 北에서 메모지가 많이 내려왔다. 어떤 지령인지는 姜泰運 본인이 폐기해서 모른다. 문서 파기는 공작원의 기본 아닌가. 아쉽게도 검찰에서 확보하지 못했다』
─姜泰運씨가 체포되던 작년 8월 말, 民勞黨은 姜고문은 실제 黨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아 민노당은 이번 사건과 무관하다고 했다.
『姜泰運씨는 분명 검찰 수사를 받을 때까지 民勞黨 고문 신분이었다. 이번 사건이 쟁점화되면서 民勞黨이 해촉했든지 본인이 사퇴했든지 했을 것이다』
─千永世, 崔圭曄, 鄭星熙씨 등은 금강산에서 개최되는 6ㆍ15 대회에 참석하는 등 여러 차례 北에 드나들었다. 이때 북한 측 사람들과 접촉했나.
『여러 차례 공식방문 형식으로 北에 갔다. 北에서의 일정을 보면 북한 측 인사들을 개별 접촉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처벌하기 어렵다』
첫댓글 아~ 머리아프당.. 어찌 될려는지..
끝까지...못 잃겠음....죄송....
민주화 유공인사 1명 추가요???, 민주화 보상심의 위원히 밥줄 생겼네
제발 끝까지 읽고 공부 하세요.이 나라의현실이 어'덯게 돌아가고 있는지.. 죄송합니다. 장문을 올려드려서..그래도 끈기를 가지고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나 국가안보 위협이 있으면 국가보안법과 같은 법률이 필요하며, 이 법에 따라 남북 화해 분위기와 상관없이 북한은 反국가단체로 인정된다』고 판시했다.
여기에 전농이 나오네요(오늘 조간 全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