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랑봉 추모비 이야기
◎ 장소 : 충남 천안시 동남구 성남면 석곡리 산44-1번지
충정공파 8세조 인촌공(휘 명)이 병조정랑으로 계시다가 계유정란(일명 단종사화)때
부친인 파서공(휘 순생)께서 안평대군과 친분이 두텁다는 이유로 피화되어 고성으로 유배되시었다가
억울한 죽음을 당하고 시신마져 수습하지 못하게 막아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금산 유배지에 있다가
아들 금구공 (휘백형)의 피에 상소로 사면 되었으나 갈곳이 없어 생질이 사는 이곳에 추거하며
매일 세 번씩 이 산봉우리에 올라 동배 남곡하며 못다한 충심과 효심을 다하다 돌아가신뒤
이곳 사람들이 이산을 정랑봉이라 불러 산이름이 되었고 이곳에 안동 김경규가 짓고 완산 이석영이 쓰고
이지역 현감인 오당 이상수가 인촌공을 추모하는 비를 세웠다
추모비 바로 아래에는 천안시에서 이곳을 찾는 이들이 쉬어 가도록 정자를 지어 놓았다.
□ 正郎峰 追慕碑文(정랑봉 추모비문)
環東土數千里 群山列立萬千其峰 名稱亦何限而直不過厥初尋常之爲
환동토수천리 군산열입만천기봉 명칭역하한이직불과궐초심상지위
也 惟大麓之 正郞峰則不然 峰在縣南大陽洞 後因故端廟名臣正郎趙
야 유대록지 정랑봉즉불연 봉재현남대양동 후인고단묘명신정랑조
公忠孝而著焉 趙公諱銘 號仁村 漢陽世家 莊陵伏節 吏曹叅議 坡
공충효이저언 조공휘명 호인촌 한양세가 장능복절 이조참의 파
西先生諱順生之子也 妙年擢第歷踐淸顯 當癸甲之稽一門九竄 公時
서선생휘순생지자야 묘년탁제역천청현 당계갑지계일문구찬 공시
以正郎 編配錦山及上王遇害 父公受命催痛茹冤 如欲无生後蒙原宥
이정랑 편배금산급상왕우해 부공수명최통여원 여욕무생후몽원유
量移本縣 僦居細城山西 卽所謂大陽洞者是也 痛君父匪命 日三登家
양이본현 추거세성산서 즉소위대양동자시야 통군부비명 일삼등가
後高峰 東拜南號 以爲常 蓋莊寢在寧越 父公後 命 受因固城也 因
후고봉 동배남호 이위상 개장침재영월 부공후 명 수인고성야 인
柴毁而歿 縣人號是峰曰正郎 正郎之稱自此始焉 仁志之士 遊散之客
시훼이몰 현인호시봉왈정랑 정랑지칭자차시언 인지지사 유산지객
莫不登臨 想像歌詠其事 縣倅安公鼎福 以正郎峰三字揭試題 繡衣金
막불등림 상상가영기사 현쉬안공정복 이정랑봉삼자게시제 수의김
公履成 有端廟乾坤 只一峰之句 誠曠世之與感也 其曰瞻彼高峰 永
공이성 유단묘건곤 지일봉지구 성광세지여감야 기왈첨피고봉 영
世淸風 剛齋宋先生所製祝辭也 峰之東南十餘里許 又有臺曰望京 蓋
세청풍 강제송선생소제축사야 봉지동남십여리허 우유대왈망경 개
以公每於吉望具朝衣 朝芴 望拜京華 以展舊君朝儀也 迨仁陵感際
이공매어길망구조의 조홀 망배경화 이전구군조의야 태인릉감제
贈公直提學 士林立忠烈祠 以祝之 又後陵祀肅廟展 公所居之村 自
증공직제학 사림입충열사 이축지 우후능사숙묘전 공소거지촌 자
其僦居 鄕人稱多仁村而因稱公號 後改今名大陽地 區現屬天安郡治
기추거 향인칭다인촌이인칭공호 후개금명대양지 구현속천안군치
下 峰巒今爲柳氏家私有 嗚呼 物換星移 滄桑屢變 惟此一芴 靑峰不
하 봉만금위유씨가사유 오호 물환성이 창상루변 유차일홀 청봉불
磨不頹 帶得万千峰 氣象而崒然特立 婦儒之傳誦不? 雲仍之追慕深
마불퇴 대득만천봉 기상이줄연특립 부유지전송불? 운잉지추모심
增依 程子所謂 水不忍廢地 不忍荒之義 建貞珉以表之 其贊劃者后
증의 정자소위 수불인폐지 불인황지의 건정민이표지 기찬획자후
孫炯元也 噫欲觀公之遺躅 斯有峰焉 欲詳名之徵情蓋觀乎此碑也 後
손형원야 희욕관공지유촉 사유봉언 욕상명지징정개관호차비야 후
千百世 尙有以識公之大節也夫 嗚呼子規?月 白夜公之英靈 其必徜
천백세 상유이지공지대절야부 오호자규?월 백야공지영령 기필상
徉乎 其上而恨亦無窮矣 今其遠孫喆衡屬余記之 究論余是峰下居人
양호 기상이한역무궁의 금기원손철형속여기지 구론여시봉하거인
每登臨歎賞久矣 吾王考 提學公亦嘗有詩曰 正郎峰在北 追憶趙先生
매등림탄상구의 오왕고 제학공역상유시왈 정랑봉재북 추억조선생
竊愈感焉 遂書之如右 時端廟後九甲戌中秋也 嘉善大夫 前行奎章閣
절유감언 수서지여우 시단묘후구갑술중추야 가선대부 전행규장각
副提學 安東 金敬圭 撰 前行章陵叅奉 完山 李錫永 謹書 景仰
부제학 안동 김경규 찬 전행장능참봉 완산 이석영 근서 경앙
高山慕孝忠 今人詳說 正郎 蹤試看當日罔非土 端廟乾坤之一峰
고산모효충 금인상설 정랑 종시간당일망비토 단묘건곤지일봉
繡衣使 市隱 金履成梅竹樓前啼蜀禽 望景臺上暮雲深 可憐一片峰
수의사 시은 김이성매죽루전제촉금 망경대상모운심 가련일편봉
頭月長照 孤臣戀闕心 經筵官 峿堂 李常秀 乙亥 春立
두월장조 고신연관심 경연관오당 이상수 을해 춘립
〈 원문 해석 〉
□ 정랑봉 추모비문 (正郞峰 追慕碑文)
이 나라 땅 수 천리에 산들이 곳곳에 있고, 만천 봉우리가
있으니 산이름은 얼마나 많을까. 처음 심상으로 이름 지어진
것이지만 오직 정랑봉은 그러하지 않다.
정랑봉은 현의 남쪽에 있는데 후에 단종조의 명신(端宗朝 名臣)
정랑 조명(正郞 趙銘)의 충효(忠孝)에서 이름이 지어지게(作名) 되었다.
조공의 이름은 명(趙公 諱 銘)이요. 호는 인촌(仁村)이며 한
양의 세가(世家)다. 단종 조 이조참의(端宗 朝 吏曹叅議)를
지낸 파서공 이름 순생(坡西公 諱 順生)의 아들이다.
어려서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치고 계유정란에 온가문이 화를 당하였다.
공은 이때 정랑(正郞)으로 금산(錦山)에 유배되었다가 단종
께서 해(害)를 당함과 아버지의 사형소식을 듣고 애통하고
원통하여 생에 의욕이 없었으며 후에 유배에서 풀려 본 현 세성산 서쪽에 살았는데 지금의 신사리가 이곳이다.
임금과 부친이 비명(非命)에 돌아가심을 애통히 여겨 하루에 세 번씩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 동쪽으로 절하고 남쪽을향해 울부짖음을 그치지 않았다(東拜南哭).
단종의 묘는 영월(寧越)에 있고, 고성(固城)은 부친이 귀양을 가서 사사(賜死)된 곳이다.
얼마나 그러했는지 사립문이 달아 없어질 지경이 되어 마을 사람들이
이 봉우리를 정랑봉(正郞峰)이라 하니 정랑봉 이라는 이름이 여기서 시작된다.
인(仁)에 마음을 둔 선비와 나그네들은 자연에 임하여 마음을 시로 읊지 않음이 없다.
본 현의 수장(本縣 首將)인 안정복(安鼎福)이『정랑봉(正郞峰)』세자를 시제로 걸었고, 암행
어사 김이성은 단종의 땅은 하늘과 땅 사이 오직 이 한 봉우
리라고 한 구절은 진실로 광세의 감흥을 일으킨다.
그『첨피고봉 영세청풍(瞻彼高峰 永世淸風)이라는 것은 강제 송선생(剛齊 宋先生)이 축사(지은 글) 한 것이다.
봉우리 동남쪽 십 여리에 누대(樓臺)가 있는데 망경대(望京臺)라고 한다.
공이 매 초하루와 보름에 공복을 갖추어 입고 홀기를 들고 북쪽을 향해 절하며 군신(君臣)의 예의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순조조(純祖朝 서기1812년)때에 이르러 공에게 승정원 도승지.
경연참찬관.춘추관. 수찬관. 예문관직제학을 제수하고 사림(士林)들은
충열사(忠烈祠)를 세워 제사하고 또 후에 숙묘전(肅廟殿)에 제사하였다.
공이 살았던 마을은 공이 산 다음부터 마을 사람들이 공의
충효를 본받아 다인촌(多仁村)이라 불렀으며 이것이 또한 공의 호(號 仁村)가 되었다.
후에 대양(大陽)으로 이름을 고치니 현재는 천안시에 속한다. 정랑봉은 지금 유씨(柳氏)들의
사유지가 되었다.
세월이 바뀌어 강산이 여러 번 변했는데 오직 이 우뚝한 봉우리는 변하지 않고 무너지지 않아
만천봉의 기상을 띠어 우뚝 솟아 있어 부녀자들과 선비들이 전하여 쇠하지 않아 후손들의 추모함이 깊도다.
장자께서 이른바 『물은 차마 땅을 폐하지 못하고 차마 황폐하게 하지 못 한다』고 하신 뜻으로
곧은 옥돌(비석)을 세워 이를 표하노니 『아! 공의 남기신 발자취를 보고자 한다면 이 봉우리에 있을 것이며
그 명칭의 자세함을 알고자 한다면 이 비석을 볼지어다. 천 백세가 지나더라도 이 비석으로 인하여 공의 큰 절개를 알게 될 것이다.』
『오호라! 서쪽새가 우는 그믐날이면, 공의 꽃다운 영혼이 반드시, 봉우리 위를 배회할 것이며,
한스러움이 또한 무궁 할 것이다.』 지금 그 먼 후손 철형(喆衡)이 나에게 와서 기문(記文)을 부탁하거늘
나는 이 봉우리 아래 사람이라 매양 이곳에 올라 탄식한 것이 오래되었다.
나의 조부 제학공(祖父 提學公)께서 일찍이 시를 지어 말하기를 『정랑봉이 북쪽에 있으니
조 선생을 추모하노라』하셨다. 가만히 느낌이 있어 드디어 이렇게 쓰노라 이때는 단묘
이후 아홉 번째 갑술(1934)년 중추절이다.
가선대부 전행 규장각 부제학을 지낸 안동 김경규는 삼가 짓고 전 장릉 참봉을 지낸 완산 이석영이 삼가 쓰노라.
속에 시은 김 이성(市隱 金履成)은 『높은 산 우러르며 충효를 사모하니, 지금 사람 자세히 정랑의 발자취를 말하네,
시험 당일에 단종의 땅을 찾는다면, 하늘과 땅 사이 오직 이 봉우리뿐』 이라 하였고.
경연관 오당 이상수(經筵官 峿堂 李常秀)는 매죽루 앞에서 서쪽새가 울고, 망경대 위에 저녁노을이 짙게 지는 구나,
가련한 일편단심의 달빛만이 정랑봉 위에 길게 비추고 있는 것은 외로운 신하의 임금에 대한 애절한 마음뿐이로다』하였다.
오당 이상수(吾堂李常秀)가 을해(乙亥)1935년 봄에 세우다.
(모계공파 성봉이 현지 방문 비문촬영 필사 및 해석)
첫댓글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