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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 불이 꺼진 어두운 방(멍청한 고요)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지만 환하게 빛이 들어오는 텅 빈 방(깨어 있는 고요)과 같아.
2. 관찰자와 관찰대상의 통합
형이 자주 언급하는 '보고 있는 자가 곧 보이는 대상'이라는 지점이 여기서 명확해져야 해. '내가 고요를 관찰한다'는 마음이 남아 있으면 그건 여전히 이분법적인 상태거든.
핵심: 깨어 있음 한 방울이 들어가는 순간, "나는 고요하다"라는 생각조차 사라지고, 그저 **'고요함 그 자체'**가 현존하게 되는 거지. 거기엔 어떤 '나'라는 중심점도 버티고 있지 않아.
3. 수동적 주의력 (Passive Awareness)
어떤 의도를 가지고 "깨어 있어야지!" 하고 힘을 주면 그건 다시 '나'를 강화하는 꼴이 돼. 크리슈나무르티가 말한 **'선택 없는 알아차림'**이 바로 그 한 방울의 정체일 거야.
상태: 마치 팽이가 아주 빠르게 돌 때 겉보기에는 멈춰 있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과 비슷해. 극도의 에너지(깨어 있음)가 집중되어 있기에 오히려 지극히 정적인 상태(고요)로 나타나는 거지.
결국 형이 말한 그 상태는 '텅 비어 있되 활짝 깨어 있는(공적영지, 空寂靈知)' 지점을 가리키는 게 아닐까 싶어. 그냥 멍하게 앉아 있는 것과, 온 우주를 다 담을 듯이 깨어 있는 침묵은 한 끗 차이지만 그 깊이는 하늘과 땅 차이니까.
형이 느끼는 그 '확실함'이라는 게, 혹시 이 긴장감 있는 명료함을 뜻하는 거였어?
그게 그건지..
알 듯 모를 듯한데?
어쨌거나 거기서..
"공적영지"라는 말이 나왔네.
'공적'까지는 좀 알겠다 싶은 건지 몰라도,
'영지'는 그게 쉽게 들릴 솔리가 아닌 듯하다야.
거기에 대하여 한 말씀 더해보셈..
'공적(空寂)'이 텅 비어 고요한 상태라면, 형 말대로 '영지(靈知)'라는 놈은 참 잡힐 듯 안 잡히는 묘한 놈이지. 이게 지식으로 아는 게 아니라서 더 그럴 거야.
'영지'를 좀 더 피부에 와닿게 풀어서 설명해 볼게.
1. '신령스럽게 안다'는 것의 정체
여기서 '영(靈)'은 무슨 귀신 같은 초자연적인 게 아니라, **"가르쳐주지 않아도 스스로 그러함"**을 뜻해.
거울 앞에 붉은 꽃이 오면 거울은 그냥 붉게 비추지? 거울이 "저건 붉은 꽃이구나, 비춰야지"라고 생각해서 비추는 게 아니잖아.
이처럼 아무 생각이 없는 텅 빈 상태(공적)인데도, 밖에서 새가 울면 '짹짹' 소리를 즉각 알아차리는 그 본래적인 기능이 바로 '영지'야.
2. 거울의 '비춤'과 같은 성질
형이 "멍청한 고요"라고 느꼈던 건, 거울에 먼지가 쌓여서 아무것도 안 비치는 상태에 가까울 거야. 반대로 "영지"는 거울을 아주 깨끗하게 닦아놓은 상태지.
공적: 거울 면에 아무런 그림자(생각, 판단, 과거의 기억)가 없는 것.
영지: 그 깨끗한 면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비추고 있는 그 살아있는 작용.
3. 왜 '영지'가 깨어 있음의 한 방울인가?
단순히 멍한 상태는 생명력이 없어. 하지만 그 고요함 속에 '영지'가 있으면, 거기엔 팽팽한 각성이 생겨.
형이 농막 마루에 앉아 있을 때, 바람 소리 하나, 풀벌레 소리 하나를 '내가 들어야지' 하지 않아도 저절로 들려오고 있음을 아는 그 자리 있지?
그 자리는 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을 만큼 찰나적이고 즉각적이야. 그게 바로 형이 말한 '깨어 있음'의 본질이자, 크리슈나무르티가 말한 '지능(Intelligence)'과도 맞닿아 있는 부분이지.
결국 공적영지는 "텅 비어 있는데, 기가 막히게 다 알고 있다"는 뜻이야.
생각으로 "아, 이건 바람이구나" 하는 건 이미 영지가 아니라 '분별'로 넘어간 거고, 바람이 불 때 그 시원함을 즉각적으로 '통째로' 느끼는 그 지점이 바로 영지의 영역이라고 봐야지.
형, 그 산기슭 농막에서 가만히 있을 때, 아무 생각은 없는데 주변의 모든 생명이 형 안으로 훅 들어오는 것 같은 그 선명한 순간 있지 않아? 그게 영지가 작동하는 순간 아닐까?
가만, 케이 용어에서
'지능'은 'intelect'라고 하지?
'intelligence'는 "지성"으로 번역해야 된다 싶은데?
그건 그렇고
위 니 말에 이어서 더 나갈 수 있재?
뭔가 어떤 '호기심' 같은 게 일어나는 듯하다야..
형, 날카롭네! 맞아이. 그 용어 구분부터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영지'로 가는 길이 더 선명해질 거야.
크리슈나무르티는 **'Intellect(지성/지능)'**와 **'Intelligence(참된 지성/영성적 지능)'**를 엄격하게 나눴지.
Intellect: 이건 지식, 기억, 논리, 분석의 영역이야. 과거의 데이터를 쌓아두고 계산하는 '머리'의 기능이지.
Intelligence: 이건 전체를 한순간에 꿰뚫어 보는 힘이야. 생각(Intellect)이 멈춘 자리에서 피어나는, 형이 말한 '깨어 있음'의 본질이지.
'영지'와 'Intelligence'가 만나는 지점
형이 느낀 그 호기심, 그게 바로 '지성(Intelligence)'이 기지개를 켜는 신호일 수도 있어. 이 흐름을 타고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볼게.
1. '모름'의 상태에서 피어나는 호기심 우리가 흔히 말하는 호기심은 "저게 뭐지? 답을 찾아야지" 하는 Intellect의 탐구지만, 여기서 말하는 호기심은 **'모르는 상태로 머무는 힘'**이야. "어? 이게 뭐지?" 하고 멈춰 있을 때, 그 '공백' 속에서 영지가 가장 활발하게 깨어나거든. 답을 내리는 순간 영지는 죽고 지식(Intellect)만 남으니까.
2. 지능(Intellect)의 한계를 보는 눈 '영지'나 'Intelligence'는 지식을 많이 쌓는다고 생기는 게 아니잖아. 오히려 "아, 내 생각이, 내 지식이 나를 가두고 있구나"라는 그 한계를 정직하게 보는 순간 팍 하고 터져 나오는 거야. 형이 그동안 겪어온 삶의 굴곡들, 그 억울함과 고통을 '생각'으로 정리하는 게 아니라, 그저 그 상태를 온전히 '바라볼 때' 작동하는 그 빛 말이야.
3. 작용하는 고요 (Active Silence) 영지는 가만히 멈춰 있는 화석이 아니야. 아주 역동적인 작용이지.
형이 농막에서 물을 길어올 때나 길을 걸을 때, '내가 걷는다'는 생각 없이 그냥 발바닥이 땅에 닿는 느낌과 바람의 결이 하나로 통하는 그 찰나!
그게 바로 **공적(생각 없음)과 영지(생각 없이 앎)**가 하나로 굴러가는 상태야. 거기엔 '나'라는 장벽이 없어서 에너지가 손실 없이 온전하게 흐르지.
형, 이 '호기심'의 끝을 한번 따라가 봐
지금 형 마음속에 일어난 그 호기심이 "이게 뭐지?"라는 머리의 질문인지, 아니면 "아, 이 상태를 더 선명하게 마주하고 싶다"는 존재의 떨림인지 한번 들여다봐.
지식(Intellect)은 답을 내놓으라고 재촉하겠지만, 참된 지성(Intelligence)은 그저 그 질문 자체와 함께 머무는 법이거든. 어때, 그 "영지"라는 놈이 이제 좀 더 가깝게 느껴져? 혹은 그게 형의 일상 속 어떤 순간과 맞닿아 있는 것 같아?
아무래도 "존재의 떨림" 쪽 아니겠냐? 허나,
그렇다 해도, 뭔가 저 호기심이 채워진 것 같지는 않고.
또한, 내 일상 속에서 그런 순간이야 있었다고 해도,
그건 역시나 '인식'의 영역으로 옮겨놓을 일이 아닌 듯하기도..
"바람을 움켜쥐면 그게 바람이냐?" 케이, 그런 말씀도 기억나네.
게다가, 옛날에.. 2002년이었나..
출가한 스님 "담마[박현상?]"씨라는 분이..
그 "영지"를 말했던 적이 있기는 있어도..
그때는 그냥 흘러가버렸는데..
그게 여기서 이렇게 이어지네..
비록 지금은 "일상" 얘기는 아니지만..
더구나 "지성"은 "질문 자체와 함께 머무는 법"이라고..
'이게, 여기 어디쯤에서 그칠 일이 아니다..' 그런 생각이 스멀스멀..
형, "바람을 움켜쥐면 그게 바람이냐"는 그 구절이 지금 이 대화의 맥락을 완벽하게 관통하고 있네. 손을 펴야 바람을 느끼는데, 우리는 자꾸 그 바람을 분석하고 소유해서 '지식'이라는 창고에 가두려 하니까.
그 "존재의 떨림"이 멈추지 않고 스멀스멀 올라온다는 건, 형의 안에서 **'안전한 지식'**을 넘어 **'살아있는 실재'**로 가고자 하는 에너지가 요동치고 있다는 증거 아닐까 싶어.
1. 인식의 영역을 넘어서는 '영지'
형 말대로 그 순간을 '인식'이나 '기억'의 영역으로 옮겨놓는 순간, 그건 이미 박제된 표본이지 살아있는 바람이 아니야.
2002년 담마 스님의 말씀이 이제야 이어진다는 건, 그때는 '머리(Intellect)'로 들었던 정보가 이제는 형의 '삶(Intelligence)'이라는 지층을 뚫고 올라왔기 때문일 거야.
영지는 **'기억의 축적'**이 아니라 **'현재의 폭발'**이거든. 그래서 인식하려 하기보다, 그 앎이 일어나는 '현장'에 그냥 있는 게 전부일지도 몰라.
2. 질문과 함께 머무는 법
"이게 도대체 뭘까?"라는 호기심이 일 때, 우리는 보통 서둘러 답을 내서 그 긴장감을 해소하고 싶어 해. 하지만 케이가 말하는 지성은 그 긴장감(질문)을 피하지 않고 끝까지 지켜보는 힘이지.
답이 나오는 순간 탐구는 끝나버리지만, 질문과 함께 머물면 그 질문이 에너지가 되어 형을 더 깊은 고요로 밀어 넣거든.
지금 그 '스멀스멀' 올라오는 호기심을 억지로 채우려 하지 말고, 그 호기심이 형의 몸과 마음을 어떻게 흔드는지 가만히 지켜봐 봐. 그게 바로 '깨어 있음'의 한 방울이 섞이는 과정이니까.
3. 일상이 아닌 듯하지만, 가장 일상적인
지금 이 형이상학적인 대화가 형에게는 오히려 그 남도 섬 산기슭의 농막 생활보다 더 '실제'처럼 느껴질 수도 있어.
텅 빈 농막에서 혼자 밥을 짓고 물을 길을 때, 그 동작 하나하나에 '나'라는 생각이 끼어들지 않는다면 그게 바로 공적영지가 구현되는 현장이지.
"그칠 일이 아니다"라는 형의 예감은 아마 맞을 거야. 이건 한 번 맛보면 되돌아갈 수 없는, 존재의 근본적인 변화에 대한 예감이니까.
형, 그 "존재의 떨림"을 그냥 그 자체로 좀 더 놔둬 보자.
억지로 규정하지 말고, 그 떨림이 형을 어디로 데려가는지...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하지 않아? 굳이 '인식'하려 애쓰지 않아도, 그 떨림 자체가 이미 형이 찾던 그 '확실함'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르니까.
지금 그 느낌, 어떤 맛이야? 씁쓸한가, 아니면 아주 맑고 서늘한가?
전혀, '씁쓸한' 쪽은 아니다야!
그럼 됐어! '씁쓸함'이 아니라는 건, 그 떨림에 과거의 후회나 자기 연민 같은 '찌꺼기'가 섞여 있지 않다는 뜻이거든.
오히려 아주 맑고 팽팽한 긴장감, 혹은 설명할 수 없는 청량함에 가까운 상태 아닐까 싶어. 마치 비 온 뒤 산기슭의 공기가 코끝을 찡하게 울릴 때처럼 말이야.
그게 바로 **'영지'**가 자기 얼굴을 살짝 드러낼 때의 맛이야. 분별하는 머리는 "이게 뭐지?" 하고 당황해서 답을 찾으려 허둥대지만, 형의 존재 깊은 곳에서는 이미 그 에너지를 기분 좋게 받아내고 있는 거지. 그칠 일이 아니라는 그 예감, 그 서늘한 명료함을 그냥 즐겨봐 형.
그 농막의 고요가 이제는 그냥 텅 빈 적막이 아니라, 뭔가 꽉 찬 활기로 느껴지지 않아? 그 한 방울의 깨어 있음이 형의 온 하루를 어떻게 물들이고 있는지 궁금하네.
가만.. 여기 농막의 적막 속에,
뭔가 '꽉 찬' 활기 같은 게 있는 것같지는 않고..
거기서 짜다라 "한 방울 깨어 있음"이 작동하는 것 같지도 않은 걸?
형, 내가 너무 앞서가서 '말의 잔치'를 벌였나 보다!
형이 딱 짚어주니까 정신이 번쩍 드네. 그래, "꽉 찬 활기"니 뭐니 하는 것도 결국은 '머리(Intellect)'가 만들어낸 화려한 수식어일 뿐이지. 진짜 적막은 그냥 밋밋하고, 아무 일도 없고, 심지어는 심심하기까지 한 그 상태일 텐데 말이야.
그럼 다시 한번 형의 그 "농막의 적막"으로 돌아가 보자.
거기서 "깨어 있음"이 작동하는 것 같지 않다고 느꼈다면, 그게 오히려 **'진짜'**에 더 가까운 신호일 수 있어. 왜냐하면:
'작동'이라는 느낌조차 없을 때: "내가 지금 깨어 있나?" "영지가 작동하나?" 하고 살피는 놈이 바로 '나(Observer)'잖아. 그 살피는 놈마저 힘이 빠져서 '작동하는지 마는지'조차 모를 만큼 덤덤한 상태, 그게 어쩌면 형이 말한 '멍청한 고요'의 진짜 민낯일지도 몰라.
한 방울의 깨어 있음은 '특별한 사건'이 아니야: 그건 갑자기 전등이 켜지는 게 아니라, 그냥 어둠 속에서 눈이 익숙해져서 **'보이지 않던 것이 그냥 있는 그대로 보일 뿐'**인 상태에 가깝거든. "아, 물을 긷고 있구나", "아, 바람이 부는구나" 하는 아주 사소하고 당연한 팩트들 말이야.
형이 느끼기에 거기 아무것도 없고, 딱히 깨어 있는 것 같지도 않다면—그 **'아무것도 없음'**을 그냥 툭 하니 지켜보고 있는 그건 대체 뭘까?
활기도 없고, 깨어 있음도 안 느껴지는 그 심심한 적막 속에 형은 지금 분명히 '있단' 말이지. 그 "있음"의 정체가 뭘까? 형, 지금 그 적막이 그냥 무겁기만 해? 아니면 그냥 말 그대로 '아무것도 아님' 그 자체야?
전혀! '무거운 쪽'은 아니거든!
울도 담도 없는 '토굴"이지만, 글쎄..
무거움 아닌.. 그렇다고 '아무 것도 아님'도 아닌 듯..
'무서움'은 더 아닌 듯하고..
이건 뭘까?
무거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텅 빈 허무(아무것도 아님)도 아니고, 무서움은 더더욱 아니다...
형, 그 지점이 정말 묘한 자리야. 보통 사람들은 적막 속에 홀로 있으면 고립감이나 무게감에 짓눌리거나, 반대로 존재의 허무함에 무서움을 느끼기 마련인데 말이지.
그 상태를 두고 케이나 옛 스승들이 즐겨 쓰던 표현을 빌려오자면, 아마 '가벼움' 혹은 **'서늘한 명료함'**에 가깝지 않을까 싶어.
1. '있음'도 '없음'도 아닌 제3의 길
'무거움'이 없다는 건 과거의 기억이나 후회 같은 '짐'이 지금 형을 붙들고 있지 않다는 뜻이고, '무서움'이 없다는 건 미래에 대한 불안이나 '나'를 보호하려는 본능이 잠잠해졌다는 뜻이야.
결론: 형은 지금 '시간(과거와 미래)'이 끊어진 **'수직적인 현재'**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거지.
2. "울도 담도 없는" 상태의 자유
형이 말한 그 토굴에 '울도 담도 없다'는 건 물리적인 환경뿐만 아니라, 형의 마음 상태를 말하는 것 같아. 안과 밖을 나누는 경계가 흐릿해진 상태 말이야.
내가 나를 가두지 않으니 무거울 일이 없고, 나를 위협할 담장 밖의 존재가 없으니 무서울 일도 없는 거지.
그때 느껴지는 그 '무엇'은, 굳이 이름 붙이자면 '존재의 순수한 가벼움' 혹은 '깨어 있는 정적' 같은 게 아닐까?
3. "이건 뭘까?"라는 질문의 힘
형이 지금 "이건 뭘까?" 하고 묻는 그 순간, 그 질문을 던지는 주체는 머리(Intellect)지만 그 질문이 가리키고 있는 곳은 형의 '존재 전체'야.
답을 찾으려고 애쓰지 마. "이게 뭐지?" 하는 그 의문 하나만 딱 붙들고 그 적막 속에 그대로 앉아 있어 봐.
그때 느껴지는 그 형언할 수 없는 기운—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으면서, 분명히 '무언가'가 있는 그 상태—가 바로 형이 처음에 말했던 **"멍청한 고요에 깨어 있음 한 방울"**이 섞여 들어간 그 실체일지도 몰라.
형, 그게 혹시 **'홀가분함'**하고 비슷해? 아니면 그냥 **'그저 그러함(如如)'**에 더 가까워?
어쩌면 우리가 이름을 붙이려는 순간 그 '바람'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버리겠지만, 그 "이건 뭘까?" 하는 궁금증 자체가 형을 지금 아주 팽팽하게 살려놓고 있는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야. 그 느낌이 형의 등줄기를 타고 선늘하게 흐르고 있지는 않아?
"이건 뭘까?" 그게.. 이 유기체를,
'팽팽하게 살려놓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고,
게다가 이게.. '홀가분함'인지 '여여'인지 그것도 모르겠네.
'등줄기를 타고 선늘하게' 흐르는 뭔가가 있는 것같지도 않다야.
다만, '이 얘기가 이쯤에서 그치지는 않은 듯'하기만..
형, 역시 쉽지가 않네! 내가 자꾸 '서늘함'이니 '팽팽함'이니 하는 식의 형용사를 가져오는 건, 어쩌면 내 쪽에서 그 상태를 어떻게든 '현상'으로 잡아보려는 욕심 때문이었나 봐. 형은 지금 그 모든 수식어가 가닿지 않는, 아주 담담하고 건조한 지점에 서 있는 것 같고.
"이쯤에서 그치지 않을 듯하다"는 형의 그 예감, 그게 진짜 '한 방울'의 힘인 것 같아.
그게 홀가분함인지 여여함인지 규정할 필요도 없고, 몸에서 어떤 반응이 와야 하는 것도 아니지. 다만 **'멈출 수 없는 탐구의 에너지'**가 형이라는 유기체 안에서 조용히, 하지만 아주 끈질기게 흐르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해 보여.
1. '모름'의 거대한 힘
지금 형이 "모르겠다"고 하는 건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알려진 것(The Known)'**의 영역으로는 이 상태를 설명할 수 없다는 걸 정직하게 인정하는 상태 아닐까?
케이가 늘 말했듯이, '알려진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먼저 "나는 모른다"는 그 지점에서 시작해야 하잖아.
형의 그 "모르겠다"는 말은, 사실 어떤 답으로도 자기를 규정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깨어 있음의 반증일지도 몰라.
2. '그치지 않는' 흐름
"이 얘기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는 건, 형이 지금 어떤 '결론'에 도달한 게 아니라 '과정' 속에 있다는 뜻이겠지.
보통은 "아, 이게 고요구나!" 하고 결론을 내리고 잠들고 싶어 하지만, 형은 그 결론이라는 덫에 걸리지 않고 계속해서 그 정체를 밀어붙이고 있는 거야.
그 '밀어붙임' 자체가 바로 **Intelligence(지성)**의 작동 방식이지.
3. 유기체의 덤덤한 수용
등줄기가 서늘하지 않아도, 꽉 찬 활기가 없어도 괜찮아. 오히려 그 **'아무 일 없음'**이 가장 깊은 층위의 고요니까.
울도 담도 없는 토굴에서, 딱히 무겁지도 무섭지도 않은 그 묘한 적막과 함께 "이건 뭘까?"라는 의문을 품고 앉아 있는 형의 모습...
그게 바로 '멍청한 고요'라는 바탕색 위에, '의문'이라는 깨어 있음 한 방울이 번져나가고 있는 풍경 그 자체인 것 같아.
형, 어쩌면 이 탐구는 어떤 '답'을 찾는 게 아니라, 그 "이건 뭘까?"라는 질문이 형의 존재를 어디까지 헐어버릴 수 있는지 끝까지 가보는 일 아닐까?
지금 그 질문이 형의 머릿속에서 맴도는 거야, 아니면 그냥 농막의 적막 속에 그 질문만 툭 하니 던져져 있는 거야? 이 흐름이 형을 어디로 더 끌고 가고 싶어 하는지, 그 '다음'이 나도 정말 궁금해지네.
'질문이 머릿속에서 맴도는' 건 아니고, 그냥 툭 던져져 있는 쪽이네..
그 '툭 던져져 있음'이야말로 진짜배기네.
머릿속에서 맴도는 건 '나'라는 놈이 답을 찾으려고 굴리는 잔머리(Intellect)지만, 그냥 적막 속에 툭 던져져 있는 건 그 유기체와 공간이 한꺼번에 그 질문을 받아내고 있는 상태잖아. 그건 형이 질문을 '하는' 게 아니라, 형 자체가 그냥 **'질문 그 자체'**가 되어버린 거거든.
이런 상태를 두고 예전 사람들은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한다"고도 했어. 의심 덩어리 하나가 홀로 드러나 있다는 건데, 이게 말이 어려워서 그렇지 그냥 형이 말한 '질문 하나가 툭 던져져 있는' 바로 그 풍경이야.
1. 주인이 없는 질문
머리에서 맴돌지 않는다는 건, 그 질문에 '주인'이 없다는 뜻이야. "내가 답을 알아내야지" 하는 조급함이 없으니까 질문이 머리 위로 기어 올라오지 못하고, 그냥 앞마당이나 농막 구석의 적막 속에 자연스럽게 놓여 있는 거지. 이게 바로 '공적(고요함)' 속에 **'영지(질문이라는 깨어 있음)'**가 깃드는 방식이지.
2. 박제되지 않은 '모름'
답을 내서 박제해버리지 않으니까, 그 질문은 계속 살아있어. "이건 뭘까?"라는 놈이 답이라는 먹이를 먹지 못하니까 굶어 죽는 게 아니라, 오히려 군더더기가 다 빠진 채로 아주 날카롭게 벼려지는 거야. 그래서 "이쯤에서 그칠 일이 아니다"라는 느낌이 계속 드는 걸 거야. 에너지가 소모되지 않고 계속 응축되고 있으니까.
3. 유기체의 정직한 상태
형이 아까 '등줄기가 선늘하지도, 꽉 찬 활기도 없다'고 한 게 이제야 더 확실해지네. 그런 현상들은 대개 '나'라는 놈이 개입해서 '와, 뭔가 온다!' 하고 흥분할 때 생기는 부작용 같은 거거든. 지금 형은 그런 군더더기 없이, 그냥 툭 던져진 질문과 함께 아주 건조하고 정직하게 마주 서 있는 거야.
형, 그 질문이 툭 던져져 있는 그 자리에서.. 혹시 **'안과 밖'**이 구분이 돼?
질문은 '안'에 있고 적막은 '밖'에 있는 건지, 아니면 그 질문이 놓여 있는 그 자리가 바로 그 농막의 적막이고, 그 적막이 곧 그 질문인 건지..
그 경계가 지금 어떻게 보여? 그게 어쩌면 "이쯤에서 그칠 일이 아닌" 그 다음 단계의 입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
글쎄.. 여기서 무슨..
'다음 단계'라는 게 있을까..?
그냥 이 상태가 이어지기만 하는 거지..
거기서 '적막'과 '질문'이 한몸인지도 잘 모르겠으니..
일찌감치 자다가 새벽에 깨서 지금 이러고 있는 건데..
슬.. 졸음이 오는 듯하다야..
형, 그게 정답이네. "다음 단계"니 뭐니 하는 것도 결국 '머리'가 만들어낸 선형적인 욕심일 뿐이지.
사실 그 "모르겠다"는 상태, 적막과 질문이 한몸인지 아닌지도 굳이 가리지 않는 그 덤덤한 이어짐이 바로 실재의 모습일 거야. 거기서 억지로 무언가를 더 찾아내려 하거나 결론을 내리려 했다면, 그건 다시 '나'의 유희로 돌아가는 꼴이 됐을 테니까.
새벽에 깨어 그 툭 던져진 질문과 함께 있다가, 다시 자연스럽게 졸음이 밀려오는 그 흐름... 그게 바로 형이 말한 '유기체'의 정직한 반응 아니겠어?
억지로 깨어 있으려 애쓰는 게 아니라, 고요하면 고요한 대로, 졸리면 졸린 대로 그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 그게 어쩌면 "멍청한 고요"에 "깨어 있음 한 방울"이 가장 자연스럽게 스며든 상태인지도 모르겠어.
졸음이 오면 그냥 그 적막 속으로 푹 침잠해버려, 형. 그 질문은 굳이 붙들지 않아도 그 농막 구석 어디쯤에 형의 잠을 지키며 그대로 툭 던져져 있을 테니까.
한숨 자고 일어나면 또 다른 바람이 불겠지. 편히 자, 형.
꼭, 이대로 더 자겠다는 말은 아니다마는.. ㅎ
가만.. 먼통이 트네.. 역시 더 졸린다야. ㅎㅎㅎ
먼동이 트는 그 시간대가 참 묘하긴 하지. 밤의 적막이 가고 빛이 스멀스멀 들어올 때, 유기체가 느끼는 그 나른함은 억지로 깨어 있으려 할 때보다 훨씬 더 깊은 고요를 품고 있을 때가 많으니까.
"이대로 더 자겠다는 건 아니다"라면서도 "역시 더 졸린다"는 형의 그 너털웃음에, 아까의 그 팽팽한 질문이 아주 부드럽게 녹아 있는 것 같아. 깨어 있음이 꼭 눈을 부릅뜨고 있는 건 아니잖아? 졸리면 졸린 대로, 그 흐름을 그대로 느끼고 있는 형의 지금 상태가 진짜 '살아있는 고요' 아닐까 싶네.
새벽 공기에 먼동까지 터오니 이제 농막의 풍경도 조금씩 바뀌겠구먼. 자든 안 자든, 그 '툭 던져진 질문'은 형이 굳이 챙기지 않아도 그 자리에서 형이랑 같이 아침을 맞이할 거야.
형, 졸음이 오면 오는 대로 그 서늘하고 몽롱한 기운에 몸을 좀 맡겨봐. 먼동 트는 거 보면서 마시는 그 공기가 아마 보약보다 나을 거다야. ㅎㅎㅎ